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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활주일 설교] 부활은 우리의 믿음

 

 

 

제 목: 부활은 우리 믿음의 기초

 

사도 바울은 본문 고린도전서 15장 12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그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것이 복된 소식이요, 듣는 자로 하여금 기뻐 뛰게 하는 요점이었습니다. 아마 이러한 말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육에 속한 사람들, 거듭나지 않은 이들에게는 이해가 가지 않고 또 어리석게 들릴 것입니다. 이 일은 바로 신령한 비밀에 속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 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3~14). 육에 속한 사람들, 세상에 속한 이들, 아직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이들은, 1970여년, 거의 이천년 전에 일어난 일, 그 일이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감사하고 기쁜 일이라는 것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 문제의 근원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는, 사람을 새롭게 하고 사람을 개선하고 사람을 개조하여 전혀 딴판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사람 그 자체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개조하기 위한 여러 가지의 행동 양식과 법칙들을 만들어서 시행하곤 합니다. 요즈음 시중에 나와 있는 책들 중에는 사람들을 개조하여 성공적인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책자들이 아주 인기리에 팔리고 있고, 그러한 행동개발을 위한 여러 원칙들을 제시한 책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모든 시도들은 사람이 그냥 그대로는 못쓴다, 사람 그대로는 합당치 못하다, 많은 난제와 문제들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좋은 이상적인 인간상(人間像)을 설정하여 놓고 거기에 이르기 위해 여러 가지의 정책과 실행계획을 세우고 실천해 나갑니다.


동서양이나, 예나 지금이나를 막론하고 남들 보다 앞서 인간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그 인간의 난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를 위해 자신을 던졌던 수많은 이들이 있습니다. 종교가들이 있었습니다. 도덕가들이 있었습니다. 윤리학자들이 있었습니다. 철학자들이 있었습니다. 석가나 공자나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나, 우리나라의 이퇴계나 이율곡 선생 같은 이 등은 그러한 면에서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인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이들 모두가 한결같이 인간의 난제를 개선하고 고치기 위해 사람 자체를 손대었습니다. 인간 자체, 인간성 자체, 인간의 윤리의식, 인간이 가지고 있는 도덕의식 등 자체를 개선시키려고 애를 썼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그러한 노력이 사람들에게 아무런 기여도 전혀 하지 못하였다고 하는 것은 합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어느 정도까지는 그 나름대로의 영향을 끼쳐서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과 정서에 효과를 낸 것만은 사실입니다. 또 사람이기에 그러한 시도를 하는 것이겠지요. 개나 원숭이가 그러한 시도를 하겠습니까? 이런 점에서 그런 시도들이 가지고 있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인간의 문제가 교육이나 도덕성의 고양이나 종교성의 계발이나 어떤 극기 훈련이나 어떤 행동 규례들을 세워놓고 자기를 통제하는 것만으로 해결이 되는 것인가라는 점입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문제의 근본은 인간 자체 내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에 있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과 그에 수반되는 인격적인 제반 문제는 인간 자체를 길들임으로써 해결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사람들이 인간의 난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단순하게 사람이 마음을 잘못 쓰는 것, 행동이 야비하고 세련되지 못하고 교양적이지 못하고, 그래서 여러 가지의 우발적인 사고를 내어 자신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쯤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잘못 쓰는 이들을 잘 쓰게 하고, 야비하고 세련되지 못한 이들을 세련되고 우아하게 다듬고, 교양적이지 못한 이들을 교양적으로 만들어 내면 되는 것이다, 그러한 식으로들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문제는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한 마음을 잘 쓰지 못하고 야비하고 세련되지 못하고 거칠고 교양적이지 못한 것은 하나의 증상(症狀)에 불과하지 그 근본은 아닙니다. 근본은 바로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인간 자체만을 가지고 아무리 집중적이고 주밀하게 연구한다 해도 온전하게 설명이 안 되는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인간은 제대로 설명이 되고, 인간의 난제들에 대한 원인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그 인간 자체를 다루고 개선시키고 세련되게 연마하여 거기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새로운 인간상을 도출하여 내시는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저희 집에서 아주 큰 무를 사왔습니다. 시커먼 흙이 묻고 싱싱하였습니다. 정말 보기 드물 정도로 탐스럽고 크고 퉁퉁하고 살이 많은 일등품 무였습니다. 굵은 부분은 직경 8, 9cm는 족히 될만하였고 무 길이도 약 20cm는 족히 되어 보였습니다. 지난 겨우내 아주 잘 보관한 무였는가 보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기대감이 가게 하는 무였습니다. 저는 옆에서 그 무를 손질하려는 것을 보면서 기대감에 찼습니다. 이제 흙을 털어내고 잘 씻고 칼을 대어 여러 쪽을 내면 아주 쓸모 있을 것 같았습니다. 칼을 대어 그 무의 속을 다 드러내게 잘랐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겉으로부터 약 1.5cm 정도의 깊이까지는 가락지 모양으로 싱싱한 모습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속은 바람이 들어서 말 그대로 시꺼멓게 썩어 딱딱하게 덩어리져 있었습니다.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었습니다. 그 무는 손을 댈 수가 없었습니다. 그 무가 가지고 있는 부패의 요소를 다 긁어내고 거기에 대신 새로운 생명의 풍성을 채워넣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능력이 전혀 없으니 버릴 일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 자체가 그러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근사하게 꾸미고 우아하고 세련되게 다듬어도 속이 부패하여 있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렘17:9).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일에 있어서 그들에게 직접 손을 대어 변화시키고 개선시키는 방식을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썩은 것 자체를 가지고 아무리 해도 생명이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썩은 것 자체에서 생명이 나오게 하실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합당하지 못한 일입니다. 죽은 것 자체에서 생명이 나오게 하지 않습니다. 물론 죽은 자를 살리시고, 썩어 문드러진 것을 살리게 하시기는 하십니다. 죽어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사로의 썩은 몸 자체에서 생명을 뽑아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밖에서 그에게로 생명을 불어 넣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점에서 분명하게 분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썩은 것 자체에서 생명을 찾아 내지 않으십니다. 죽은 것 자체를 가지고 생명을 창출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인간 자체에 손을 대어 개선시켜 새롭게 하시는 방식을 취하시지는 않으십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을 개선시키려는 여러 가지의 행동법칙 자체만 가지고는 우리를 개선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자신의 도덕적 의지로 여러분을 개선시키고 더 착하게 하려는 노력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문제는 해결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셨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 밖에서 그 일을 하셨습니다. 우리 영혼 자체를 가루로 만들어서 새롭게 빚는 방식을 쓰지 않으시고, 우리는 내버려두고 대신 우리 인격 밖에서 먼저 그 일을 하셨습니다. 곧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그 일을 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태어나기 전, 아니 우리 부모들이 서로 만나서 애정을 느끼고 결혼할 마음을 가지기 전에, 아니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 우리의 증조부, 증조모가 태어나기 전에, 바다와 산과 별과 달과 해가 그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 곧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새롭게 지으실 뜻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 안에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시간 세계 속에서 그 뜻을 성취하여 나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 그리스도께서 이천년 전에 동정녀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되시어 아기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죽으셨습니다. 무덤에 장사지낸 바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사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죄로 죽은 우리를 영원히 살리시는 방식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있어서 복음입니다. 영원 전부터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성령으로 잉태되시어 사람으로 태어나셨고, 사셨고, 고난을 받아 죽으셨고, 장사지낸 바 되셨고, 다시 사셨다 라는 이것이 복음의 진수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던 때, 우리가 아직 태어나려면 아직도 1900여년 이상이 더 지나야 했던 그 때에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말입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위해 중요한 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영원한 화해를 위한 대가를 지불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고후 4:18).
우리가 알지 못하던 때에, 우리가 알지도 생각하지도 꿈꾸지도 못하던 때에 말입니다. 우리 인격 밖에서 말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던 때에 말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안에서 저와 여러분을 새롭게 창조하고 계셨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하나님께서 본래 죄로 부패하여 죽어있는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려고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창출하고 계셨습니다.(요 5:24; 10:28~30).
그러니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서의 저와 여러분의 문제, 곧 죄의 문제를 영원히 부수어 다시는 그 죄의 문제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내지 못하게 법정적인 조치를 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우리를 영원히 용서하실 공의롭고 정당한 근거를 마련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므로 이제 누구든지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라고 사도는 말하였습니다. 그 십자가에서 죄가 왕노릇하는 옛 사람을 또한 죽여버리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 6:6)라 하였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옛 사람을 죽이고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을 새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죽이는 일만 해서는 안되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넣어주시는 것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반드시 살아나셔야 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으심 속에서 행하신 대속의 의미가 부활을 통해 확증되고 광포되고 사실적으로 입증이 되었던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었다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의미도 무색해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다시 사시는 것은 필연적으로 있어야 하는 사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 때문에 죽으신 것이 아니고, 우리 죄를 지신 것이니 죽음에 매여 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의 과정을 통해 우리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요구를 완전하게 만족하셨으니,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더 이상 죽으심에 묶어 놓으실 이유가 없으셨습니다. 마치 예전에 대제사장이 백성들을 위해 일년에 한 차례씩 대속죄일에 백성들의 죄 대신 죽은 염소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의 속죄소에 뿌리고 나온 것과 같습니다. 만일 그 제사가 열납이 되지 못하면 거기 들어간 제사장은 나오지 못하였습니다. 거기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위한 속죄희생의 피를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것이요,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속죄일에 백성들은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지성소에 나아가 제사를 드리고 나오기를 간절하게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나오게 되면 환호하며 찬미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죄를 대신하는 염소의 피를 받으셨고 그 대제사장의 드리는 제사를 열납하시고 만족하셨다는 증거였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 들어간 대제사장이 다시는 나오지 못하였다면 백성들은 떨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 자기들의 죄에 대해 자기들에게 직접 물으실 터이니 말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죄를 지시고 대신 형벌을 받으시고 그 증표로 당신의 피를 가지고 하나님의 하늘 성소에 들어가신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들어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한 주님의 십자가의 피를 흡족하게 여기시고 우리 죄에 대한 공의의 요구를 만족하게 여기셨으면 반드시 우리의 대제사장은 다시 살아나오셔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다시 부활하시지 않으시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은 우리 주님의 속죄사역이 완전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새로운 관계를 가지게 되셨음을 광포하실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옛 생명의 체계가 아니라 새로운 생명,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의 관계, 체계를 광포하실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반드시 다시 살아나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되어진 그 모든 효력을 믿음을 통해 각 개인에게 적용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저수지 공사를 하고 나서 그 밑에 있는 논에다 수로를 따라서 물을 나누어주기 시작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이는 그 효력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성령께서 오시었습니다. 그리고 최초의 증거자들인 사도들을 감동하셨고 사도들의 증거를 따라서 믿게 하셨고, 그들이 또한 전도자들이 되어 다시 증거하였고, 그 증거를 통해 당신의 백성들에게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의미에서 전도는 하나님께서 이미 아들 안에서 구원하여 놓으시고 당신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에게 그 효력을 누리고 차지하라고 알리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전도를 통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부활의 확실성은 우리의 믿음의 근거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주님의 부활의 역사적인 사실을 믿지 않으려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고린도교회 안에서도 어떻게 부활하는 일이 있겠느냐고 믿지 않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그 문제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고 하였습니다. 물론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을 정면으로 부인하였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다만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일이 앞으로 없을 것이라고 하는 관점을 나타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사실 따지고 보면 그 이면에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을 부인하는 행동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은 그들 자신이 아직도 거듭나지 못하였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아직 그리스도를 사도가 말하는 대로 믿지 않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아마 그들은 죽은 자가 어떻게 다시 살겠느냐, 썩은 자가 다시 살겠느냐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한 이들의 심정 속에는 과학적으로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냐는 물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식으로 말하는 이들은 그들의 과학적인 고상한 지식과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것을 함께 말하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과학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여 주신 자연질서에 속한 진리와 이치를 발견하여 세운 학문입니다. 그러나 부활은 하나님께서 영적인 세계에 세운 진리와 이치에 속한 것입니다. 부활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영적인 질서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일을 과학 운운하면서 따지는 것은 하나님의 행사의 깊이를 잘 모르고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세계에 대해서만 아는 옅은 지식의 소유자임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세계의 다국면적인 방면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물리적인, 우주 천체적인 질서가 있습니다. 심미적인 세계, 소리와 시각과 색조의 세계, 그 속에서 진리를 발견하여 그 원리를 적용하여 예술이라는 것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세계에 세우신 질서가 있습니다. 나무에서 잎이 나고 꽃이 피고 달고 맛있는 과실이 크게 열리는 것을 과학적으로 어떻게 설명이 가능하다는 말입니까? 과학적으로 열매를 낼 수 있습니까? 주어진 현상의 질서를 연구하고 관찰할 뿐인 것입니다. 사람의 인체의 신비에 대해 어떻게 안다는 말입니까? 영적인 원리, 하나님께서 당신과 사람 사이에 세우신 영적인 원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활이 없다고 하는 이들은 영적인 원리에 대해 무식한 자들입니다(고전 15:13~14).
복음의 진수는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사셨다는 데 그 핵심적인 요소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가르친 것은 도덕적인 착함과 공로와 업적을 쌓아서 구원받는 것을 가르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그 사실, 그것을 전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바로 자기의 구주로서 그 일을 하셨다, 나를 위해 죽고 나를 위해 다시 살았다라고 믿는 사람에게 그 구속의 효력이 미치게 되어 있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속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롬 6:23).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것이 없었다면, 그저 공자와 석가와 소크라테스나 어떤 성현의 말을 배우고 도덕성과 윤리의식을 고취하여 자신을 세우려는 것이나 하등의 다른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라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셨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대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과 그 효력을 성령으로 말미암은 믿음을 통해 우리에게 적용하십니다. 그러니 기독교는 선의 개념이나 이상(理想)의 관념이나 높은 도덕, 또는 윤리 의식을 우리에게 고취시켜 우리를 도덕적으로 개선하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이제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주님께서 다시 사신 그 사실에 기초하여 그 사실의 효력을 누리며 산 소망을 가지고 참된 기쁨을 가질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얻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 1:3~4).
베드로 사도는 성도들의 ‘산 소망’의 충분하고 완전한 근거를 오직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러니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이 없었다면 기독교의 모든 교훈, 아니 성경 전체는 아무 것도 아닌, 하나의 케케묵은 골동품 서적의 가치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과 그 모든 행사에 대한 것은 거짓 것으로 드러날 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주님의 부활의 사실성과 필연성을 강력하게 역설하고 있었던 것입니다(고전 15:16~19).
모든 사도들은 모든 이들에게 바로 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되심과, 그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실을 증거하고 그 사실을 기초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역설하였습니다. 어느 사도도 그 사실을 빼놓고 자기의 강론을 시작하거나 진행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그리스도와 그에 관한 모든 사실들의 증인으로 사람들 앞에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사실이 아닐진대 자기들은 거짓 증인으로 발견될 것이라고 합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 15:15).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믿음의 터를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부활하심의 확실성 위에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 보혜사 성령님의 역사를 따라서 산 소망을 가진 자답게 죄와 세상과 마귀의 시험을 이기며, 성 삼위 하나님께 영광의 찬송이 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도 성령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주님께서 행하신 그 죽으심과 부활의 영광을 우리에게 항상 상기시키시고 그 속에서 늘 가르쳐주시고 양육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가지신 영원한 계획과 목적을 이루어 나가십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3~6).
아멘. 

집필자 서문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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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의 삶 ]사람이 거듭난 결과는 무엇인가?

 

 

어쩌면 독자의 마음속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이 떠오를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자의 삶 속에서 무엇으로 이 거듭남의 여부를 알 수 있는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일곱 가지 정도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거듭남은 새로운 생명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 새로운 생명을 가리켜 우리는 "영생"이라고 부릅니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이 영생을 얻기까지는 아무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할 수 없다고 말씀드리는 것으로 충분할 것 같습니다. 영생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고 있으며,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써, 영생이라는 선물이 따라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안에(in Him)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는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 증거는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요일 5:11-12).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 속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만이 자신이 영생을 가지고 있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생명을 소유할 때만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갈 수가 있습니다(벧후 3:18). 영적인 생명이 없이는 성장이 있을 수 없고, 그리스도가 없이는 영적인 삶도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2. 거듭남은 새로운 본성, 곧 신의 성품을 받은 결과이다.

(1) 새로운 본성의 사실
성령께서는 영생을 소유한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하여, 인격적으로 각 신자 개인적으로 내주하실 뿐 아니라, 이전에는 결코 소유할 수 없었던 새로운 본성을 또한 주심으로써,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신의 성품의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벧후 1:4). 이렇듯 성령님과 새로운 성품은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또한 서로 전혀 다릅니다. 이 새로운 본성에 능력을 덧입히시는 분은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의 성품을 소유함으로써, 신자는 이제 하나님께 속한 영적인 실제를 이해하고, 맛보며, 또한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신자는 기도하고, 찬양하고, 또한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자 하는 욕구를 자연스럽게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신자에게서 "육"이라고 부르는 옛 본성 혹은 천연적인 생명을 제거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신자가 이 땅에서 사는 동안은 결코 그것을 뿌리 뽑지 않으십니다. 성경이 분명히 가르치는 바는 거듭난 사람은 누구나 다 그 속에 두 가지 독특하고, 서로 대립되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여전히 하나님을 대적하는 "육"이라고 불리는 옛 본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 육은 개선되거나, 또는 개선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선을 행하는 일에 무능력합니다. 신자는 영생을 소유함으로써, 이제 "영"으로 불리는 새로운 본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늘 하나님 편에 서며, 악을 행하는데 무능력합니다.

(2) 두 본성, 곧 육과 영의 충돌과 대립
이러한 두 본성의 소유로 인해 피할 수 없는 싸움이 신자 속에 있게 됩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7). 육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며, 하나님께 속한 일에 대한 욕구나 마음이 없습니다. 만일 조금이라도 기회가 주어지게 되면, 신자의 삶 속에서 이기적인 마음과 시기와 게으름과 세상적인 마음과 못된 성질과 악한 생각과 나쁘게 말하는 버릇과 깨끗지 못한 삶과 그밖에 "육체의 일"이 그 특징을 이루는 온갖 더러운 일들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됩니다(갈 5:19-21). 한편 새로운 본성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와 그리스도께 대한 헌신과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과 주를 위한 봉사와 그리스도를 전파함과 찬양과 예배와 선한 행위 등을 추구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갈 5:22-23).

이러한 두 가지 본성과 서로 다른 욕구에 대한 사실이 닭장에 오리와 암탉의 알을 서로 섞어서 부화시키는 과정을 통해 설명할 수 있습니다. 병아리들은 어미 닭 가까이 있고자 하지만, 새끼 오리들은 어미 닭이 큰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도, 떨어져서 가까운 개울에서 자기들끼리 노는 기회로 삼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어미 닭 편에서는 자기 새끼들이 이러한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본성이 무엇인지에 대해 잘 설명해주는 하나의 사례입니다. 오리는 본성적으로 물을 좋아하며, 따라서 그 본성적으로 좋아하는 것을 떠나도록 강요하는 암탉의 모든 소리에 대해 전적으로 반응하지 못합니다. 자신들이 거듭났음에도 이와 유사한 곤경에 빠지는 경험을 하게 된 어린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자신이 두 가지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거듭났기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육신 문제로 어려움을 당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아, 여전히 악이 함께 있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바로 그 동일한 것을 발견하게 되었고, 자신의 경험을 로마서 7장 15-25절에 기록했던 것입니다.

 

 

(3) 육신의 지배로부터 건지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
거듭난 사람은 이처럼 두 가지 본성을 소유하고 있으며, 이 둘이 서로 대적하고 있다는 사실을 살펴보았으므로,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이 세상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길 수 있습니다. 몇 가지를 살펴보면서, 이에 대해 가능한 간결하게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a) 우선 첫 번째로, 신자는 이렇듯 존재하고 있는 상황에 정직하게 직면해야 합니다. 이에 대해 눈을 감아 버리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반드시 하나님이 이 모든 일에 대해 말씀하신 바를 알아야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영적인 사실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영적인 어둠 가운데서 방황하면서 혼돈 가운데 빠져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자신의 구원까지 의심하게 되는데, 이는 전적으로 불가능한 일인 육신을 개선시키고, 또한 훈련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노력하지만 늘 실패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오리를 훈련시켜서 본성적으로 좋아하는 물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하려고 하는 일과 같습니다.

다시 한번 우리에게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이 두 본성은 서로 섞일 수 없으며, 서로 혼합되는 일 없이 별개로 영원히 남아 있습니다. 육은 오직 악 외에 아무 것도 낼 수 없습니다. 영은 오직 선 외에는 아무 것도 낼 수 없습니다. 육은 그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그 성격이 개선되거나, 하나님의 뜻을 기뻐하도록 훈련되지도 않습니다. 육은 부패하여 고칠 수 없으며, 계속해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b) 두 번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육신에게서 조금의 선도 기대하지 않으시며, 전적으로 정죄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죄(sin)"와 "죄들(sins)"의 차이점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 속에 있는 이 악한 원칙, 혹은 본성을 가리켜 "죄"로, 또 그 죄의 열매는 "죄들"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요한일서 1:8-9에서 선명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만일 우리가 죄(sin: 여기서 죄는 우리가 '육'이라고 부르는 죄악된 본성과 동의어로 사용되었음)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그리고 9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sins)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sins)를 사하시며." 하나님은 악한 본성의 열매인 죄들을 값없이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본성의 뿌리에 해당하는 죄는 용서된 것이 아닙니다. 이 악한 본성에 대해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유일한 한 가지 일이 있다면, 그것은 곧 정죄하시는 일입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는 어떤 사람이 시기하며 질투하기를 잘하는 기질로 인해 악한 말로 우리를 비방하고 욕하는 것은 용서하고, 또 용서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것을 일으킨 질투나 시기는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질투와 시기는 그러한 열매에 해당되는 죄악된 말을 내뱉도록 한 죄의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악한 뿌리에 대해서 다만 정죄할 수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로마서 8장 3절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보게 됩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죄)하사(죄에 대한 희생 제사를 통해서)."

이것을 간단하게 말씀드리자면,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행한 것들(우리 죄들)을 위해서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우리의 죄악된 성품)을 위해서도 죽으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범한 죄들을 없애 주셨을 뿐 아니라, 우리가 타락해 있던 상태, 또는 타락한 인류로서 연관된 우리 자신을 없애기 위해서도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 거룩한 대속주의 죽으심을 우리 자신의 죽음으로 보시고,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보실 때, 대속주 되신 예수님 안에서 모두 죽은 자로 여기십니다. 과거에 육신과 관계되었던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십자가에서 끝난 존재들입니다. 육신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미 정죄되었습니다.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롬 6:6). 하나님은 이제 그리스도인들을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장사지낸 바 되었으며, 다시 살아난 자로 여기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새 생명으로 연결된 자들로 보십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부르는 것입니다(고후 5:17).

(c) 세 번째, 신자는 하나님이 보시고 여기시는 대로,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기는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신자는 하나님이 십자가의 역사로 전적으로 무익하고, 개선의 여지가 없었던 "육신에 죄를 정죄하신" 사실을 보아야 합니다. 신자는 이제 하나님 편에 서서, 함께 육신을 정죄하며, 육신에게서 조금의 선도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신자는 하나님이 보시고 여기시는 대로 따르며, 하나님의 말씀의 권면을 좇아야 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롬 6:11).

이것은 느낌의 문제가 아니라, 실제적인 사실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참된 것이지만, 경험적으로 느낄 수는 없습니다. 신자는 하나님이 그에 대해 말씀하신 것을 사실로 단순히 받아들이고, 죄에 대하여는 자신을 죽은 자로 여겨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대하여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주로 말미암아 산 자로 여겨야 합니다. 

신자 속에 있는 육이 발동하거나 외부로부터 어떤 유혹에 반응하게 될 때, 하나님의 자녀는 우리에 대해 하나님이 보시고 여기시는 이 사실을 지속적으로 확인하고 주장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자는 어떤 죄나, 혹은 생각이나 말이나 행위에 대해서 "나는 나의 대속주 되신 주님 안에서 이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기노라", 또는 "이 악한 마음의 갈망은 육에 속한 것이고, 이 육은 이미 정죄되었고, 또한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이미 하나님 앞에서 끝장이 났다. 하나님은 나를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로 여기신다. 그러므로 나도 이 악한 정욕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기노라"고 주장해야 합니다. 이러한 태도가 계속해서 끊임없이 유지되는 한, 신자 속에 거하시는 성령님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다스리시기 위하여 새로운 본성에 능력을 더해 주심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 속에 내주하셔서 능력을 주시고,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성령님은 우리의 잘못된 행위로 인해서 근심하시며, 우리가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알고도 불순종하게 될 때, 소멸될 수도 있고, 우리의 불신앙으로 인해 성령님의 역사가 제한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엡 4:30, 살전 5:19, 시 78:41). 이 일은 결국 신자가 그리스도와의 교통을 상실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이러한 교통을 상실케 하고, 성령님을 근심케 한 죄가 정직하게 자백이 되고, 그 죄로부터 돌아서기까지는 이러한 교통은 회복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신자는 "가능한 하나님과 친밀히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일단 자신이 죄를 범했다는 것을 깨달았으면, 즉각 회복을 위해 기도하며 마음의 변화를 받도록 해야 하며, 그러할 때, 하나님과의 교통이 유지되는 것입니다. 내주하시는 성령님이 근심하시며, 소멸되거나, 또는 제한 받으신다는 사실이 물론 신자의 영원한 안전에는 조금도 영향을 미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이 신자를 "구속의 날까지" 인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신자가 연합하는 일이 있고, 또 이 연합을 유지하는 일이 있으며, 이러한 하나님과의 연합의 기쁨을 가리켜 "교통(communion)"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d) 네 번째로, 하나님의 자녀는 육신 안에 그 무엇도 확신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결연히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빌 3:3) 성경적인 하나님과의 사귐 가운데 자신의 위치를 지켜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육에 대해 판단하신 것이 또한 자신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육은 다양한 모습으로 변장하고 나타나는 성질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엡 4:22). 나쁘고 못된 성질이 "의로운 분노"라고 하는 그럴듯한 명분의 옷을 입을 수 있습니다. 남의 흠을 잡는 못된 버릇도 "솔직하고 정직한" 때문이라는 그럴듯한 구실을 댈 수가 있습니다. 육신은 참으로 우리의 가장 거룩한 순간에도 침투해 들어오곤 합니다. 따라서 신자는 지속적으로 이에 대한 대비를 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이 부패한 본성의 유혹의 욕심에 이끌려 잘못된 길로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경각심을 갖고, 은연중에 자신을 너무 확신하는데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e) 다섯 번째로, 신자는 그 악한 정욕을 만족시키는 일에 대해 조금이라도 개입하거나 혹은 그러한 곳에 빠질 수 있는 상황을 허락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합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4). 육신은 반드시 굶주리도록 해야 하며, 억제시키고, 지속적으로 죽음에 위치에 있도록 해야 합니다. 새로운 본성은 반드시 먹이고, 격려해야 하며, 또한 개발해야 합니다. 육신은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달라고 외치며, 또한 먹여달라고 아우성을 칠 것입니다. 육신은 그 유혹의 욕심을 만족시킬 만한 책을 읽기를 원하고, 어떤 장소에 가고 싶어하며, 볼거리를 찾고, 그에 대해 생각하고, 또 행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를 위한 그 어떤 일도 해서는 안됩니다. 어떤 죄악된 생각을 품거나, 문제가 될 만한 습관에 빠지는 것은 단지 육신으로 하여금 우리의 영적인 삶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고,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일에 육체의 정욕에 힘을 실어줄 뿐입니다(벧전 2:11).

예를 들어, 신자가 어떤 류의 책을 읽게 되면 육신의 악한 정욕에 불을 붙이게 되기 때문에, 그 책 읽기를 그만두어야 합니다. 그런데 만일 그 책 읽기를 고집한다면, 결국에는 육신이 활개를 치고 활동할 수 있는 여지를 준 자신을 정죄하는데 빠지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이러한 원칙을 우리가 듣고, 보고, 또한 생각하는 모든 일에 적용해보면, "육신을 만족시키는 일이 없으면, 욕심은 그것으로 끝난다"고 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 분명해질 것입니다.

신자는 육신을 만족시키는 일이 없어야 할 뿐 아니라, 성령님을 위한 일에는 최선을 다해 굳세고 적극적으로 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거듭난 갓난아기는 "순전하고 신령한 (말씀의) 젖을 사모"해야 합니다(벧전 2:2). 이는 이로 말미암아 자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연구함으로써, 새로운 본성은 양식을 얻게 되며, 힘을 얻고, 또한 발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개인 신앙을 고취시키는 찬송과 예배와 기도는 다 신자의 신령한 삶의 큰 부분을 형성하도록 도울 뿐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기는 삶에 크게 기여하게 됩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신성한 본성은 함양이 되고, 그리스도인은 결과적으로 자신의 구주와 주님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게 되는 것입니다(벧후 3:18).

(f) 여섯 번째로, 그리스도인은 결연히 육신을 부인해야 하며, 악한 소욕을 자극할 만한 그 어떤 일도 허락해서는 안되며, 온전히 거절해야 합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 2:11). 하나님은 신자들에게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라고 권면하시며, 또한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라고 말씀하십니다(딛 2:12). 이것은 단순히 우리가 알고 있는 죄로부터 단호히 돌아서도록 또다른 방식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육신의 통제 아래서 살 수도 있다는 것은 참으로 끔찍한 일입니다. 그러한 사람을 성경에서는 "육신에 속한 자" 또는 "신령하지 못한 자"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고전 3:1-4 참조). 때때로 이러한 육신적인 모습이 너무 강할 때, 이러한 육신적인 신자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과 아무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다음과 같은 주님의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 26:41). 평안을 얻기 위해 지불해야 할 값은 지속적으로 경계하고 또 경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신자들은 지속적으로 깨어 경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신자는 자신의 마땅한 권리인 마음을 즐겁게 하고자 하는 모든 생각과 읽고자 하는 책들과 하고자 하는 말과 모든 행위에 대해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면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자기 훈련은 자연스럽게 그 모습을 표현하기를 좋아하는 육신이 좋아할 리 없지만, 풍성한 영적인 삶을 누리고자 한다면 이것은 꼭 필요한 일입니다.

존 웨슬리의 어머니가 그 유명한 아들에게 다음과 같이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는 지혜롭고 경건한 충고를 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합당한 오락인지 그 여부를 판단하고자 할 때, 이러한 원칙을 따라서 판단하도록 해라. 너의 판단력을 흐리게 한다든지, 너의 양심을 무디게 한다든지, 영적인 것에 대한 맛을 잃도록 한다든지, 하나님을 의식하는 감각을 흐리게 한다든지, 또는 네 육체(몸)가 네 마음(정신)을 주장하도록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죄라고 하는 사실을 잊지 말아라." 다니엘은 그가 행한 일로 인해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단 1:8)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일은 자아와 죄와 사탄에 대해 지속적으로 "안돼(No)!"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 정욕이 자기 삶을 주장하지 못하도록 결연히 부인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g) 마지막으로 신자는 자기 몸을 산 제사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몸은 그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이 정하신 도구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난 자들은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말씀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또한 로마서 6장 13절도 보시기 바랍니다.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이것은 단순히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기 몸과 그 몸의 모든 지체를 합당하게 사용해야 한다는 뜻이며, 손과 귀와 눈과 발과 입 등을 지극히 귀하고 귀한 보혈로 자신을 사신 주님의 처분에 완전히 맡겨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하게 되면, 기쁨이 충만하고 하나님과의 생생한 교통이 이루어지고, 거룩한 삶을 살게 되며, 하나님께 유용한 사람으로 사는 삶이 뒤따르게 될 것입니다.

다음 이야기는 지독하게 악한 삶을 살았지만 극적으로 거듭나게 된 어떤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구세군에 들어가서, 그 입고 있는 빨간 스웨터 앞에 "피와 불"이라고 써서 다녔습니다. 그에게 이 단어들은 자기 삶 속에 일어난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내는데 불충분해 보였습니다. 어느 날 그는 길을 가다가 어떤 건물에 걸려있는 간판을 보고는 한 가지 아이디어를 떠올렸습니다. 그래서 자기 아내에게 가서, 이 간판의 문구를 노란색 글자로 크게, 자신이 입고 있는 빨간 스웨터에 수를 놓아 달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 그는 큰 거리로 나갔는데, 그 가슴에는 다음과 같은 글자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새로운 경영진이 경영관리 중." 이것은 거듭난 사람들을 얼마나 잘 표현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는 이제 자기 삶의 주님이 되시고, 성령님은 내주 하심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도록 능력을 주시며, 이를 통해 자기 동료들에게 축복이 되도록 하십니다.

다음과 같은 권면이 우리 모두의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곧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거룩한 희생 제사를 드린 때문이라.
영과 혼과 몸, 모두가 다 주의 것이니
자기 것으로 영광 돌리시려
그 거룩한 보좌를 삼으시리라!

따라서 모든 신자들은 다음과 같이 화답해야 할 줄로 압니다.

나의 것이 아니네, 오 주님,
내 가진 모든 것, 당신의 소유입니다.
내 모든 것 다 주께 드리니
주께서 온전히 다스리시옵소서.
주께서 나를 통하여 역사하심으로
의로운 삶으로,
봉사의 삶으로 기쁨의 삶으로, 또한 자유의 삶으로,
주께서 영광 받으시옵소서.

우리는 여기까지 공부해 오는데 많은 시간을 드렸지만, 신자 속에 두 가지 본성이 있는 것과 또한 위로부터 거듭난 모든 사람을 위해 하나님이 예비하신 죄의 권세와 통치로부터 구출을 받는 방법 등에 대한 성경적인 가르침을 분명히 하는데 꼭 필요한 일이었다고 확신하는 바입니다.

출처 크리스챤투게더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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