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교회절기별 설교 ] 부활절 주일 설교 부활신앙

 

 

 

늘 살아 계시네  (막16:1~18 )

가이드 포스트지에 실린 킬링거 부인의 간증입니다. 이혼한 지 1년이 되던 날 그녀는 친구, 가족, 경제생활 등 모든 것이 먹구름에 싸여 죽기 직전의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책장에서 딸의 초등학교 3학년 때 과제물을 발견했습니다. 여덟 쪽인데 매 쪽에 한 살부터 여덟 살 때까지의 사진 한 장씩을 붙이고 자기의 삶을 설명한 과제물이었습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 쪽에 End(끝)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딸의 글씨 옆에 담임선생님의 'Your beginning' (너의 시작이다)이라는 글씨가 End 라는 글씨를 내리 누르듯이 크게 적혀 있었습니다. 이것이 킬링거 부인이 새 출발하게 된 동기가 되었습니다. 여덟 살 난 아이가 사진 이야기의 끝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마흔이 된 자기도 결코 끝이 아니라는 깨달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예수의 부활을 믿는 자에게는 끝이 없습니다. 여덟 살의 딸아이가 자신의 숙제에 '끝' 이라고 썼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고 시작이었던 것처럼 마흔 살이지만 내 삶은 이제 시작이라는 부활의 믿음을 가지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현재 위치는 어디입니까?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끝입니까? 그러나 끝은 여러분의 생각이지, 하나님에게는 시작입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은 결코 헛된 생활이 아닙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은 낙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은 지금부터 시작입니다.

독일의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 역시 부패하고 타락한 가톨릭을 개혁하면서 죽음과 고통과 어려움의 많은 위협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낙심하지 않았고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험한 시험과 역경이 몰아친다 할지라도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새로운 용기와 소망이 넘친다." 라고 말했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생각만 해도 언제나 소망과 용기가 넘친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늘 살아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새로운 삶이 전개될 줄로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다함께 "살아 계신 주" 함께 찬양합니다. "주 하나님 독생자 예수 날 위하여 오시었네. 내 모든 죄 용서하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나의 구세주. 살아 계신 주 나의 참된 소망 걱정 근심 전혀 없네. 사랑의 주 내 갈 길 인도하니 내 모든 삶의 기쁨 늘 충만하네. 주안에서 거듭난 생명 도우시는 주의 사랑. 참 기쁨과 확신 가지고 예수님의 도우심을 입으며 살리. 살아 계신 주 나의 참된 소망 걱정 근심 전혀 없네 사랑의 주 내 갈 길 인도하니 내 모든 삶의 기쁨 늘 충만하네. 그 언젠가 주 뵐 때까지 주를 위해 싸우리라 승리의 길 멀고 험해도 주님께서 나의 앞길 지켜주시리. 살아 계신 주 나의 참된 소망 걱정 근심 전혀 없네 사랑의 주 내 갈 길 인도하니 내 모든 삶의 기쁨 늘 충만하네." 지금도 늘 살아 계신 부활의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늘 살아 계신 주님은 우리 가운데 계시어,


첫째로 두려움과 의심을 물리쳐 주십니다

미국의 유명한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가 절망에 처한 때가 있었다고 합니다. 27세가 되었을 때 신경쇠약증에 걸렸습니다. 그로 인해 공포와 두려움과 낙심 가운데 언제 자살할지 모르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 헤어 나오기 위해 발버둥치다가 성경을 읽게 되었습니다. 어떤 좋은 약이나 의사보다, 뛰어나다고 믿는 인간의 생각이나 방법보다 더 좋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1장 25절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하는 말씀을 읽을 때에 그는 마음에 감동을 느꼈습니다. 죽은 자도 살리시는 예수께서 내 병을 못 고치시겠는가 생각하니 마음이 기뻐 그 말씀을 종일 복창하였습니다. 그러자 마음속에 믿음이 생겼습니다. 믿음이 점점 커지자 용기와 희망이 생기고 살아 계신 주께서 늘 함께 하심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는 인생의 밑바닥까지 내몰았던 신경쇠약으로부터 깨끗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뛰어난 심리학자로서의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고통을 겪으며 절망과 두려움 속에서 살아갑니다. 미래를 알지 못해 불안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래서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염려합니다. "이제는 끝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가집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할 순간임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여인들은 날이 밝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예수의 시신에 향품을 바르기 위함입니다. 이는 여인들이 부활을 믿지 못하고 있었다는 증거이고 합니다. 그러니 저들에게는 오로지 슬픔과 두려움 밖에 없었습니다. 3절에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며 염려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두려움과 염려는 이미 제거되어 있었습니다. 돌이 벌써 굴려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의 부활을 계획하셨기에 돌문을 여신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여인들은 보이는 돌은 염려했지만 부활신앙을 가로막은 절망의 돌을 치우는 일은 생각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우리 앞에 있는 두려움과 염려의 돌을 옮겨주셨습니다. 더 이상 가로막고 있는 돌문을 바라보며 좌절하거나 실망할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 돌무덤 안에 계시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우리를 만나시려고 우리 앞에 서 계십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주님을 만나 부활의 능력이 함께 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부활하신 주께서 늘 살아 계시어 우리의 두려움과 의심 또한 날마다 물리쳐 주심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처음 사랑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클락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일하는 전도자 중의 한 사람입니다. 미국 시카고에서 매일 밤 전도 집회를 합니다. 꾸준하게 회중이 모입니다. 그런데 회중의 대부분은 술주정꾼, 도둑, 소매치기, 투전꾼 등입니다. 모두가 인간이기를 포기한 사람들입니다. 클락의 설교는 형편없습니다. 지루하고 싫증이 납니다. 느리고 흐리멍덩한 음성입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매일 밤 500여명의 회중이 모입니다. 무엇에 단단히 매인 것처럼 열심히 설교를 듣습니다. 결신자들이 하루에도 수십 명씩 나옵니다. 싫증이 나서 제대로 들을 수조차 없는 설교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감동이 되었을까요?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클락의 진실된 사랑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랑처럼 사람의 마음을 깊이 찌르는 힘은 없습니다. 클락의 눈에는 사랑의 눈물이 언제나 고여 있습니다. 지난 날 클락이 이곳으로 처음 왔었을 때 그는 불쌍한 회중들의 가련함을 알고 울었습니다. 그런데 우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했습니다.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마음을 차갑게 가졌습니다. 그 결과 울지 않는 노력은 성공했으나 설교에 능력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내 눈에 눈물을 돌려주시옵소서." 하나님은 그에게 눈물을 돌려 주셨을 뿐만 아니라 처음 사랑을 회복시켜주셨고 놀라운 능력도 주셨습니다. 사랑은 위대합니다. 사랑은 상대방의 마음을 사로잡고 사람들을 이끄는 매력이 있으며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기적을 만들어 냅니다.

6절입니다.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본문에 의하면 부활 사건의 초점이 빈 무덤이 아니라 갈릴리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더 이상 무덤 속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이미 부활하셔서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갈릴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장소입니다.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만나려는 주님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갈릴리는 예수께서 사역을 시작하신 곳입니다. 제자들을 부르시고 훈련시키신 곳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모두 도망쳤습니다. 그들은 숨어서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처음 사랑과 처음 열정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주님을 향한 사랑이 회복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을 첫 사랑의 장소인 갈릴리로 모이게 하신 것입니다. 그곳에서 자신의 부활을 확인시키심으로 새로운 용기를 주고, 첫 사랑을 회복하고, 부활의 증인으로 삼으시려는 것입니다. 주님의 첫 사랑을 잃어버린 분이 있습니까? 신앙의 좌절을 맛보고 낙심한 분이 있습니까? 부디 부활하신 주님을 통하여 첫 사랑을 회복하시고 은혜를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부활을 증거하는 능력을 주십니다

일본의 최고 기업인 '가네보' 제약회사의 경영자 미타니 야스토는 예수님을 만나 부활신앙으로 인생이 역전되었다고 간증합니다. 인사과장으로 일하면서 회사에서도 항상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알고 상부에서 회사 안에서는 신앙생활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그는 회사에서 쫓겨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신앙을 포기하겠습니다" 라고 상사에게 선언하였습니다. 그러자 그의 마음속에서 "네가 나를 배반하는구나" 하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성경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는 구절을 읽으며 마음이 너무 괴로웠습니다. 자책감이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자신의 인생을 맡기겠다고 기도하면서, 직장을 잃어버리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그러자 마음에 평강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다시 기도하고 성경을 읽으며 회사 동료들에게 열심히 전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일본 전역을 순회하면서 이백여 회의 전도집회를 하고 간증을 하였습니다. 그 결과 회사에서 쫓겨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성실함과 실력을 인정받아 급격히 승진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주심으로 회사를 일본 최고의 기업으로 성장시킨 기여를 인정받아 그 회사의 회장이 되었습니다. 이후 야스토는“예수님의 부활 신앙 체험으로 인생이 역전되었습니다.”라고 간증하게 된 것입니다.

15절에 예수께서 명령하십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예수 부활하심으로 예수 믿는 자들이 영원히 살 수 있다고 전하는 내용이 복음입니다. 그래서 빈 무덤을 본 자들은 예수님의 살아나심을 증거 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난 자들도 누구를 만나든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직접 빈 무덤을 보지 못했고, 예수님을 만난 적도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에서 부활하셨다고 증거하며 목숨걸고 외쳤습니다. 우리도 부활신앙으로 부활의 증거자가 되어야 합니다.

부활절 신앙과 부활신앙을 구별하여야 합니다. 부활절에 교회를 아름답게 장식하고 계란을 준비하여 나눠주고 새벽 예배드리는 일들은 부활절 신앙이라고 부르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하고 체험하는 것은 부활신앙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부활절 신앙이 아닌 부활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부활신앙은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 하는 신앙입니다. 부활사건은 나 자신이 믿어져야 관계가 있게 됩니다. 부디 두려움과 의심을 물리쳐주시고, 첫사랑을 회복시켜 주시며, 부활의 능력을 날마다 주시는 늘 살아 계신 주님을 전하는 부활의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서윤석목사 설교 중에서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라이프TV

라이프 TV는 삶과 꿈과 희망을 이야기 하는 곳입니다.

,
반응형

십자가 신앙과 부활 신앙

 


누가복음 24장 25∼35절

무언가를 본다는 건 대단한 일입니다.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기 위해선 잠시 눈을 감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아름다움을 모르는 건 둘째 치고 눈을 감고 움직이면 여기저기 부딪치게 돼 생활하기가 매우 힘들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신앙의 영적인 안목에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본문엔 영안이 열린 자와 닫힌 자가 나옵니다. 둘의 차이는 큽니다. 닫힌 자에게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가는 길은 슬픔과 죽음, 실의와 좌절의 길입니다. 그러나 생물학적인 눈이 아닌 영적인 눈이 열린 엠마오로 가는 길은 천국, 생명, 기쁨, 희망의 길이었습니다. 그들이 영안으로 무엇을 보았습니까. 그들은 바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닫힌 영안은 세상적인, 자기중심적인 정보만을 제공합니다. 그들의 눈엔 십자가형을 받은 나사렛 목수가 보일 뿐입니다. 하지만, 열린 영안에는 부활한 예수, 모든 말씀을 성취하신 예수, 메시아 예수가 보입니다. 본문을 잘 보십시오. 예수님 곁에서 대화하는 것은 영안이 열릴 때나 닫힐 때나 똑같습니다만, 예수님이 보이고 깨달아지는 건 닫힌 영안이 열릴 때에나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 일에 깨달음이 있길 바랍니다. 엠마오에서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은 그들이 본 것, 바로 예수의 다시 사심을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서 기독교 신앙의 핵심 중의 핵심인 부활 신앙을 볼 수 있습니다. 세계적인 목회자 빌리 그레이엄은 “빈 무덤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의 신앙이 생명과 부활과 대속의 신앙이 됩니다.

어느 종교 창시자가 부활했습니까.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입니다. 우리 주님은 수많은 사람들을 살리고 고치시다가, 끝내 주님 스스로가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다시 사셨습니다. 그런 이유로 피터슨 스미스는 “인간에게 죽음은 없다. 다만 불신이 있을 뿐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활의 증거가 있을까요. 빈 무덤이 부활의 증거이기도 하지만, 성경 자체가 예수님의 부활의 증거가 됩니다. 사복음서 안에 쉰여덟 번, 사도행전에 스물두 번, 바울 서신서 안에 육십 번 이상 예수님의 부활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로마 시대의 정치가, 역사가들도 예수님의 사심을 문헌으로 기록한 바 있습니다. 또한 성경의 수많은 인물들이 다투어 예수님의 사심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들 모두 다시 사신 예수님을 만났고, 또한 체험했습니다. 이 증거로 인해 많은 기독교인이 박해 가운데서도 기쁘게 순교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부활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믿음이 있습니까. 부활이라는 말은 ‘다시 일어난다’는 말을 기원으로 합니다. 부활의 믿음과 그 신앙으로 우리는 생의 갖가지 좌절과 낙심을 딛고 일어설 수 있습니다. 부활의 신앙과 그에 대한 영적인 안목이 우리의 삶을 그대로 패배치 않게, 낙담치 않게, 실망치 않게, 분노치 않게, 격동치 않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사심을 믿으며 전진하는 우리들은 사건 앞에서도 주님의 섭리를 생각하고, 슬픔을 찬송으로 바꿉니다. 그것을 우리는 욥에게서, 아브라함에게서, 바울에게서, 요한에게서, 빌립에게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부활 신앙을 가진 성도는 어느 곳에 있던지 감사할 수 있고, 찬송할 수 있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놀랍고도 감격스러운 사건이 2000여년 전 오늘 그리스도께서 무덤에서 일어나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김성기 대전 세계로교회 목사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라이프TV

라이프 TV는 삶과 꿈과 희망을 이야기 하는 곳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