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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별 설교 부활주일설교 < 부 활 신 앙 >

 

 


부 활  신 앙  (요한복음21:1-14 )

오늘 우리성가대가 찬양으로 전해준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기쁨의 소식을 성가대원들처럼 찬양으로 이웃에게 못전해 줄지라도 말로 전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옆의 사람과 인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이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십시오"
우리가 힘들어하는 이유는 자신의 신앙과 생활이 전혀 관계없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꽃장수 할머니 한 분이 몇 송이의 꽃을 들고 행인이나 차에 탄 사람들에게 꽃을 사라고 외치고 있었습니다. 조금도 구김살 없이 밝은 표정의 이 할머니를 유심히 바라보던 한 젊은사람이 물었습니다. "할머닌 괴롭고 걱정되는 일이 없습니까?" "젊은이 내 나이만큼 살아보시우. 왜 걱정이 없고 괴로움이 없겠소" "그런데 할머니의 표정속에서 어두운 그림자란 찾아보기도 힘든데 어떻게 된 노릇입니까?""고통스러울 때 주님을 생각한답니다. 내 고통이 아무리 커도 악독한 죄를 뒤집어 쓰고 손발에 못박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주님, 더구나 창으로 옆구리를 찔렸을 때의 주님과 어찌 비교나 할 수 있겠소. 그렇게 고난 당하신 주님이 사흘만에 부활했답니다. 나도 견디기 어려울 만큼 괴로울 땐, 주님과 같이 "3일만 참고 견디자"고 자신에게 타이른답니다. 어둠도 3일뿐이다. 절망은 겨우 삼일이면 족해. 3일후에는 영광스런 날이 찾아 올거야. 이런 소망이 있기에 나는 언제나 행복한 삶을 누릴수가 있어"
여러분의 삶이 정말 힘들고 어렵습니까? 그럴 때 3일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다른 종교에서 찾아볼수 없는 독특한 신앙이 바로 부활신앙입니다. 다른 종교의 선각자들은 모두가 다죽었고 지금도 무덤속에 갖혀있지만 우리주님은 다시 살아나셔서 지금도 저와 여러분과 함게 해주신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부활신앙이 무엇입니까?

 

첫째,부활신앙은 지금도 살아계신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부활절의 진정한 의미는 우리가 믿는 주님이 지금도 살아 계시다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종교들이 죽은 사람을 믿지만 우리는 살아계신 주님을 믿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신앙입니다. 지금도 살아 계신 주님을 확실히 믿고 확신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영국의 시인 테니슨(A. Tennyson)이 시골길을 걷다가 정말 행복한 얼굴로 열심히 일하는 중년 부인을 만났습니다. 신기하게 생각한 테니슨이 물었습니다. "오늘 아침에 좋은 소식이 있으셨나 봅니다?" 그 부인은 미소를 띠며 "선생님, 저는 한 가지 소식 밖에 모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인류를 위해 죽으셨다가 삼일만에 부활하셨다는 소식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테니슨도 맞장구 치며말하기를. "부인, 그건 오래된 소식이자 항상 새로운 소식이며, 정말 좋은 소식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지금도 살아 계신 분이십니다.

 

둘째로 부활신앙은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신 주님을 믿고 받아드리는 삶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를 고아와 같이 내버려두지 않고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임마누엘의 주님이십니다. 주님과 항상 함께 동행하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엠마오로 향하던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이 그들과 함께 동행해 주셨지만 그들은 미쳐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부활신앙이 생긴이후 주님이 그들과 함께 해주셨다는걸 알게 된것입니다. 부활신앙은 지금도 주께서 우리와 늘 함께하고 있을을 알게합니다.
관념적으로 하나님을 믿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믿는 우리 주님이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주님은 처음 부르실 때와 똑같은 일을 베드로에게 하셨습니다. 처음에도 베드로는 빈그물을 씻고 있을 때 깊은데로 그물을 던지라고 하셔서 많은 고기를 잡게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역시 빈그물의 베드로에게 이번에는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같은 일을 행하심으로 베드로의 마음에 있던 본래의 신앙을 일깨워 주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음을 믿지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주님 없이 아무리 애를 써도 아무런 결과를 얻을 수 없습니다. 주님이 오셔야 합니다. 주님이 함께 계심을 믿는 것이 부활신앙입니다. 주님이 함께 계심을 믿는 것이 성령 충만한 삶입니다. 주님 함께 계심을 믿지 못함은 그 어떤 일이든지 쓸모 없는 것입니다. 지칠 대로 지친 인생이지만 우리 곁에 주님이 함께 계십니다. 곁에 오신 주님이 우리의 잃어버린 신앙, 잃어버린 기쁨, 잃어버린 열정 그것을 다시 찾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드디어 베드로의 눈에 항상 함께 계시는 주님이 분명히 보였습니다. '주님이시다.' 베드로는 어떻게 했습니까? 물로 뛰어 들어 주님께로 나아갔습니다. 오직 주님! 다시 주님만을 붙잡는 순간인 것입니다. 주님이 안 계시다고 생각했을 때에는 물고기가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함께 계심을 발견 한 후에는 그 많은 153마리의 물고기가 문제되지 않습니다. 물고기 보다 주님이 더 크게 보입니다. 아니 주님 한 분 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찬송204장)만 보입니다. 다른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세상 끝 날까지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신 주님이시기에 지금도 함께 계십니다. 언제나 우리 곁에 계시는 주님을 믿고 그 능력을 힘입어 살아가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로 부활신앙은 지금도 우리의 승리를 보장해 주시는 주님을 믿는 삶입니다.
부활의 신앙은 최후의 승리가 주님의 것임을 믿는 신앙입니다. 영원한 승리의 보장이신 주님을 의지함으로 항상 불의와 죄악의 세력과 싸워 늘 승리하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인도의 캘커타에 "리"기념병원이 있습니다. "리"씨의 가족중에는 인도의 고지에 있는 다질림의 학교에 다니는 6명의 자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밤 장마비가 퍼붓자 산사태가 발생하여 여섯자녀가 잠자고 있던 집을 순식간에 덮쳐 버렸습니다. 그러나 "리"씨 부부는 하나님을 섬기는데도 왜 이런일이 일어났는지를 불평하지 않고 그들의 집을 더 크게 지어 캘커타의 거리에서 방황하는 부랑아들을 돌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70년이상을 살면서 해마다 5백명이 넘는 부랑아들을 돌보아 주었습니다. 6사람의 가족이 이제는 수천명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이 죽은 자녀들을 위하여 세운 기념비에는 "우리 주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롬8:37)"라고 씌어있었습니다.
그들은 재난을 겨우겨우 비켜간 것이 아니라 재난을 승리로 이끌어 갔습니다. "리"부인은 말하기를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아무 고난도 당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기쁠뿐이었습니다" 만일 이들의 마음속에 죽음이 끝이고 부활신앙이 없었다면 그들은 인생의 슬픔과 괴로움으로 끝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6명의 자녀를 잃었을지라도 주님의 나라에는 다시 영원한 생명을 함께 누릴 것을 기뻐하면서 그들은 새로운 승리의 삶을 살아갔던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기 전에는 열심히 사는 길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부활하신 후에는 새로운 삶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 충만함으로 사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예수님의 마음과 사랑으로 가득 찰 때 성령 충만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일할 때에 비로소 우리는 이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의 승리를 보장해 주시는 주님을 의지하고 살아가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혼자의 삶에는 실패하고, 내 능력으로 내 힘으로 하려고 하는 것은 실패하지만 '주님의 것'으로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은 반드시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 온 몸과 온 마음을 드려, 온 인격을 드려 '주님의 것'으로 일하고 주님의 것으로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부활 주일! 부활의 신앙은 주님이 지금도 살아 계신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의 곁에 항상 함께 계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살아 계신 주님을 인하여 승리한다는 사실을 선언하고 선포하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주시는 이 부활의 승리를 마음껏 외치며 선포하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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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주일설교 / 부활은 기독교신앙의 핵심

 

 

 

성경 고린도전서 15:1-10.

 


우리 주님 부활하셨습니다!
우리 죄를 씻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고난 받으시고 죽으신 주님,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믿는 모든 인생에게 영원한 생명의 복을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3: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5:24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자는 그 순간부터 영원한 생명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11:24-27절,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신앙의 핵심입니다.

 @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본문 3-8절입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바울사도가 사역하던 당시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본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생존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 모두가 부활의 증인들입니다. 이들을 통해서 주님의 부활이 널리 전파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사도는 자신을 그 증인의 반열에 올려놓고 있는 것입니다.

잘 아시는데로 바울사도는 사울이였을 때에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과 같이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보지는 못했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고백하는 것처럼, 사울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던 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을 붙잡아 잔인하게 처형하던 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핍박자 사울이 변하여 사도 바울이 되고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자가 된 것은 분명히 그의 간증처럼 다메섹도상에서 빛가운데, 음성 가운데 주님을 만났기 때문인 것입니다.

핍박자 사울을 만나주신 주님은 분명히 사울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이신 동시에 다시 사신 부활의 주님이십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바울사도는 자신을 부활하신 주님의 목격자들과 함께 부활하신 주님의 증인으로 올려놓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가 주님의 부활사건의 증인들입니다. 우리가 만난 주님은 부활하신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2천여년 전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시지 않으셨다면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주님을 다시 만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이 전부라면 주님도 그저 수 많은 위인들중의 하나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부활하셔서 지금까지 믿는 모든 자들의 구원자가 되십니다. 저와 성도님들이 만난 주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인 동시에 분명히 부활하신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주님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 부활은 소망입니다.

이 땅에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신 주님과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했고 부활하신 주님의 사랑을 그 누구보다도 극적으로 체험한 베드로의 고백입니다. 베드로전서 1:3-4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이 세상은 우리들이 영원히 머물 곳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있는 그 무엇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기독교 사상가 C.S 루이스는 ‘영원하지 못한 것은 영원히 무용지물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인생은 결국 이 세상에서 절망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된 그리스도인들은 천국과 영생을 유산으로 받기에 그 소망을 가지고 세상을 이기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4:18절,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그러므로 부활은 모든 성도의 산소망, living hope, 참된 소망인 것입니다.

 (이제)
 @ 부활은 신앙입니다.

부활은 과거의 역사적 사실이고(물론 지금도 우리 가운데 일어나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미래의 소망인 동시에 현재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세우는 힘입니다.

규장출판사에서 나온 ‘부활’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런 글이 있습니다. ‘장래 부활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현재 부활의 생명력이 공급되어 현실에서도 죄와 사망의 세력을 제압하는 능력을 발휘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현실에서 몸부림치며 살아가야 하는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능력의 근원중의 근원이요 핵심중의 핵심이다.’

고린도전서 15:55-58절,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의 부활로) 말미암아 (현재)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라” 아멘!

부활신앙은 늘 다시 시작하는 신앙이고 새롭게 시작하는 신앙입니다. 동토의 땅을 뚫고 돋아나는 봄의 새싹의 힘이 바로 부활신앙의 힘입니다.

‘디싸이플’이라는 기독교잡지에 소개된 어느 무명작가의 글이 있습니다. ‘사나운 소리가 들려도 너무 겁내지 말게 하시며 / 꾸지람을 들어도 너무 낙심하지 말게 하시고 / 바람이 분다고 아무데로나 끌려가지 않게 하시며 / 햇볕이 뜨겁다고 그늘만 찾지 말게 하소서 / 기왕 지나온 길 되돌아 보지 말게 하시고 / 어둠이 덮여와도 외로워 하지 않게 하소서 / 몽치가 다가올 때에도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던 주님 / 제자의 배반에도 위로의 시선을 던지시던 주님 / 침 뱉는 자들도 용서하시던 주님 / 십자가 위에서도 어머니를 생각하시던 주님 / 오 주님 / 나도 부활하게 하소서 / 내 가슴이 푸른 하늘이 되게 하시고 / 내 생각이 넓은 바다가 되게 하시며 / 내 영혼을 봄 동산으로 만들어 주소서 / 아-멘!’

부활주일, 부활하신 주님, 영으로 우리 각 심령에 새롭게 모시고 주님이 주신 천국과 영생의 산소망안에서 부활의 능력으로 다시 시작하고 새롭게 시작하는 모든 예배자들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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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활주일 설교] 부활은 우리의 믿음

 

 

 

제 목: 부활은 우리 믿음의 기초

 

사도 바울은 본문 고린도전서 15장 12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그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것이 복된 소식이요, 듣는 자로 하여금 기뻐 뛰게 하는 요점이었습니다. 아마 이러한 말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육에 속한 사람들, 거듭나지 않은 이들에게는 이해가 가지 않고 또 어리석게 들릴 것입니다. 이 일은 바로 신령한 비밀에 속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 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3~14). 육에 속한 사람들, 세상에 속한 이들, 아직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이들은, 1970여년, 거의 이천년 전에 일어난 일, 그 일이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감사하고 기쁜 일이라는 것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 문제의 근원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는, 사람을 새롭게 하고 사람을 개선하고 사람을 개조하여 전혀 딴판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사람 그 자체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개조하기 위한 여러 가지의 행동 양식과 법칙들을 만들어서 시행하곤 합니다. 요즈음 시중에 나와 있는 책들 중에는 사람들을 개조하여 성공적인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책자들이 아주 인기리에 팔리고 있고, 그러한 행동개발을 위한 여러 원칙들을 제시한 책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모든 시도들은 사람이 그냥 그대로는 못쓴다, 사람 그대로는 합당치 못하다, 많은 난제와 문제들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좋은 이상적인 인간상(人間像)을 설정하여 놓고 거기에 이르기 위해 여러 가지의 정책과 실행계획을 세우고 실천해 나갑니다.


동서양이나, 예나 지금이나를 막론하고 남들 보다 앞서 인간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그 인간의 난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를 위해 자신을 던졌던 수많은 이들이 있습니다. 종교가들이 있었습니다. 도덕가들이 있었습니다. 윤리학자들이 있었습니다. 철학자들이 있었습니다. 석가나 공자나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나, 우리나라의 이퇴계나 이율곡 선생 같은 이 등은 그러한 면에서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인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이들 모두가 한결같이 인간의 난제를 개선하고 고치기 위해 사람 자체를 손대었습니다. 인간 자체, 인간성 자체, 인간의 윤리의식, 인간이 가지고 있는 도덕의식 등 자체를 개선시키려고 애를 썼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그러한 노력이 사람들에게 아무런 기여도 전혀 하지 못하였다고 하는 것은 합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어느 정도까지는 그 나름대로의 영향을 끼쳐서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과 정서에 효과를 낸 것만은 사실입니다. 또 사람이기에 그러한 시도를 하는 것이겠지요. 개나 원숭이가 그러한 시도를 하겠습니까? 이런 점에서 그런 시도들이 가지고 있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인간의 문제가 교육이나 도덕성의 고양이나 종교성의 계발이나 어떤 극기 훈련이나 어떤 행동 규례들을 세워놓고 자기를 통제하는 것만으로 해결이 되는 것인가라는 점입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문제의 근본은 인간 자체 내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에 있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과 그에 수반되는 인격적인 제반 문제는 인간 자체를 길들임으로써 해결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사람들이 인간의 난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단순하게 사람이 마음을 잘못 쓰는 것, 행동이 야비하고 세련되지 못하고 교양적이지 못하고, 그래서 여러 가지의 우발적인 사고를 내어 자신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쯤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잘못 쓰는 이들을 잘 쓰게 하고, 야비하고 세련되지 못한 이들을 세련되고 우아하게 다듬고, 교양적이지 못한 이들을 교양적으로 만들어 내면 되는 것이다, 그러한 식으로들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문제는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한 마음을 잘 쓰지 못하고 야비하고 세련되지 못하고 거칠고 교양적이지 못한 것은 하나의 증상(症狀)에 불과하지 그 근본은 아닙니다. 근본은 바로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인간 자체만을 가지고 아무리 집중적이고 주밀하게 연구한다 해도 온전하게 설명이 안 되는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인간은 제대로 설명이 되고, 인간의 난제들에 대한 원인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그 인간 자체를 다루고 개선시키고 세련되게 연마하여 거기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새로운 인간상을 도출하여 내시는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저희 집에서 아주 큰 무를 사왔습니다. 시커먼 흙이 묻고 싱싱하였습니다. 정말 보기 드물 정도로 탐스럽고 크고 퉁퉁하고 살이 많은 일등품 무였습니다. 굵은 부분은 직경 8, 9cm는 족히 될만하였고 무 길이도 약 20cm는 족히 되어 보였습니다. 지난 겨우내 아주 잘 보관한 무였는가 보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기대감이 가게 하는 무였습니다. 저는 옆에서 그 무를 손질하려는 것을 보면서 기대감에 찼습니다. 이제 흙을 털어내고 잘 씻고 칼을 대어 여러 쪽을 내면 아주 쓸모 있을 것 같았습니다. 칼을 대어 그 무의 속을 다 드러내게 잘랐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겉으로부터 약 1.5cm 정도의 깊이까지는 가락지 모양으로 싱싱한 모습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속은 바람이 들어서 말 그대로 시꺼멓게 썩어 딱딱하게 덩어리져 있었습니다.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었습니다. 그 무는 손을 댈 수가 없었습니다. 그 무가 가지고 있는 부패의 요소를 다 긁어내고 거기에 대신 새로운 생명의 풍성을 채워넣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능력이 전혀 없으니 버릴 일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 자체가 그러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근사하게 꾸미고 우아하고 세련되게 다듬어도 속이 부패하여 있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렘17:9).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일에 있어서 그들에게 직접 손을 대어 변화시키고 개선시키는 방식을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썩은 것 자체를 가지고 아무리 해도 생명이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썩은 것 자체에서 생명이 나오게 하실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합당하지 못한 일입니다. 죽은 것 자체에서 생명이 나오게 하지 않습니다. 물론 죽은 자를 살리시고, 썩어 문드러진 것을 살리게 하시기는 하십니다. 죽어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사로의 썩은 몸 자체에서 생명을 뽑아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밖에서 그에게로 생명을 불어 넣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점에서 분명하게 분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썩은 것 자체에서 생명을 찾아 내지 않으십니다. 죽은 것 자체를 가지고 생명을 창출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인간 자체에 손을 대어 개선시켜 새롭게 하시는 방식을 취하시지는 않으십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을 개선시키려는 여러 가지의 행동법칙 자체만 가지고는 우리를 개선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자신의 도덕적 의지로 여러분을 개선시키고 더 착하게 하려는 노력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문제는 해결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셨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 밖에서 그 일을 하셨습니다. 우리 영혼 자체를 가루로 만들어서 새롭게 빚는 방식을 쓰지 않으시고, 우리는 내버려두고 대신 우리 인격 밖에서 먼저 그 일을 하셨습니다. 곧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그 일을 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태어나기 전, 아니 우리 부모들이 서로 만나서 애정을 느끼고 결혼할 마음을 가지기 전에, 아니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 우리의 증조부, 증조모가 태어나기 전에, 바다와 산과 별과 달과 해가 그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 곧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새롭게 지으실 뜻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 안에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시간 세계 속에서 그 뜻을 성취하여 나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 그리스도께서 이천년 전에 동정녀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되시어 아기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죽으셨습니다. 무덤에 장사지낸 바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사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죄로 죽은 우리를 영원히 살리시는 방식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있어서 복음입니다. 영원 전부터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성령으로 잉태되시어 사람으로 태어나셨고, 사셨고, 고난을 받아 죽으셨고, 장사지낸 바 되셨고, 다시 사셨다 라는 이것이 복음의 진수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던 때, 우리가 아직 태어나려면 아직도 1900여년 이상이 더 지나야 했던 그 때에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말입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위해 중요한 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영원한 화해를 위한 대가를 지불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고후 4:18).
우리가 알지 못하던 때에, 우리가 알지도 생각하지도 꿈꾸지도 못하던 때에 말입니다. 우리 인격 밖에서 말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던 때에 말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안에서 저와 여러분을 새롭게 창조하고 계셨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하나님께서 본래 죄로 부패하여 죽어있는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려고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창출하고 계셨습니다.(요 5:24; 10:28~30).
그러니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서의 저와 여러분의 문제, 곧 죄의 문제를 영원히 부수어 다시는 그 죄의 문제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내지 못하게 법정적인 조치를 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우리를 영원히 용서하실 공의롭고 정당한 근거를 마련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므로 이제 누구든지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라고 사도는 말하였습니다. 그 십자가에서 죄가 왕노릇하는 옛 사람을 또한 죽여버리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 6:6)라 하였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옛 사람을 죽이고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을 새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죽이는 일만 해서는 안되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넣어주시는 것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반드시 살아나셔야 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으심 속에서 행하신 대속의 의미가 부활을 통해 확증되고 광포되고 사실적으로 입증이 되었던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었다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의미도 무색해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다시 사시는 것은 필연적으로 있어야 하는 사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 때문에 죽으신 것이 아니고, 우리 죄를 지신 것이니 죽음에 매여 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의 과정을 통해 우리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요구를 완전하게 만족하셨으니,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더 이상 죽으심에 묶어 놓으실 이유가 없으셨습니다. 마치 예전에 대제사장이 백성들을 위해 일년에 한 차례씩 대속죄일에 백성들의 죄 대신 죽은 염소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의 속죄소에 뿌리고 나온 것과 같습니다. 만일 그 제사가 열납이 되지 못하면 거기 들어간 제사장은 나오지 못하였습니다. 거기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위한 속죄희생의 피를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것이요,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속죄일에 백성들은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지성소에 나아가 제사를 드리고 나오기를 간절하게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나오게 되면 환호하며 찬미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죄를 대신하는 염소의 피를 받으셨고 그 대제사장의 드리는 제사를 열납하시고 만족하셨다는 증거였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 들어간 대제사장이 다시는 나오지 못하였다면 백성들은 떨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 자기들의 죄에 대해 자기들에게 직접 물으실 터이니 말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죄를 지시고 대신 형벌을 받으시고 그 증표로 당신의 피를 가지고 하나님의 하늘 성소에 들어가신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들어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한 주님의 십자가의 피를 흡족하게 여기시고 우리 죄에 대한 공의의 요구를 만족하게 여기셨으면 반드시 우리의 대제사장은 다시 살아나오셔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다시 부활하시지 않으시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은 우리 주님의 속죄사역이 완전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새로운 관계를 가지게 되셨음을 광포하실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옛 생명의 체계가 아니라 새로운 생명,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의 관계, 체계를 광포하실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반드시 다시 살아나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되어진 그 모든 효력을 믿음을 통해 각 개인에게 적용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저수지 공사를 하고 나서 그 밑에 있는 논에다 수로를 따라서 물을 나누어주기 시작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이는 그 효력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성령께서 오시었습니다. 그리고 최초의 증거자들인 사도들을 감동하셨고 사도들의 증거를 따라서 믿게 하셨고, 그들이 또한 전도자들이 되어 다시 증거하였고, 그 증거를 통해 당신의 백성들에게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의미에서 전도는 하나님께서 이미 아들 안에서 구원하여 놓으시고 당신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에게 그 효력을 누리고 차지하라고 알리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전도를 통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부활의 확실성은 우리의 믿음의 근거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주님의 부활의 역사적인 사실을 믿지 않으려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고린도교회 안에서도 어떻게 부활하는 일이 있겠느냐고 믿지 않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그 문제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고 하였습니다. 물론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을 정면으로 부인하였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다만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일이 앞으로 없을 것이라고 하는 관점을 나타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사실 따지고 보면 그 이면에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을 부인하는 행동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은 그들 자신이 아직도 거듭나지 못하였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아직 그리스도를 사도가 말하는 대로 믿지 않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아마 그들은 죽은 자가 어떻게 다시 살겠느냐, 썩은 자가 다시 살겠느냐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한 이들의 심정 속에는 과학적으로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냐는 물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식으로 말하는 이들은 그들의 과학적인 고상한 지식과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것을 함께 말하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과학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여 주신 자연질서에 속한 진리와 이치를 발견하여 세운 학문입니다. 그러나 부활은 하나님께서 영적인 세계에 세운 진리와 이치에 속한 것입니다. 부활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영적인 질서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일을 과학 운운하면서 따지는 것은 하나님의 행사의 깊이를 잘 모르고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세계에 대해서만 아는 옅은 지식의 소유자임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세계의 다국면적인 방면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물리적인, 우주 천체적인 질서가 있습니다. 심미적인 세계, 소리와 시각과 색조의 세계, 그 속에서 진리를 발견하여 그 원리를 적용하여 예술이라는 것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세계에 세우신 질서가 있습니다. 나무에서 잎이 나고 꽃이 피고 달고 맛있는 과실이 크게 열리는 것을 과학적으로 어떻게 설명이 가능하다는 말입니까? 과학적으로 열매를 낼 수 있습니까? 주어진 현상의 질서를 연구하고 관찰할 뿐인 것입니다. 사람의 인체의 신비에 대해 어떻게 안다는 말입니까? 영적인 원리, 하나님께서 당신과 사람 사이에 세우신 영적인 원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활이 없다고 하는 이들은 영적인 원리에 대해 무식한 자들입니다(고전 15:13~14).
복음의 진수는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사셨다는 데 그 핵심적인 요소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가르친 것은 도덕적인 착함과 공로와 업적을 쌓아서 구원받는 것을 가르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그 사실, 그것을 전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바로 자기의 구주로서 그 일을 하셨다, 나를 위해 죽고 나를 위해 다시 살았다라고 믿는 사람에게 그 구속의 효력이 미치게 되어 있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속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롬 6:23).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것이 없었다면, 그저 공자와 석가와 소크라테스나 어떤 성현의 말을 배우고 도덕성과 윤리의식을 고취하여 자신을 세우려는 것이나 하등의 다른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라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셨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대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과 그 효력을 성령으로 말미암은 믿음을 통해 우리에게 적용하십니다. 그러니 기독교는 선의 개념이나 이상(理想)의 관념이나 높은 도덕, 또는 윤리 의식을 우리에게 고취시켜 우리를 도덕적으로 개선하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이제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주님께서 다시 사신 그 사실에 기초하여 그 사실의 효력을 누리며 산 소망을 가지고 참된 기쁨을 가질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얻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 1:3~4).
베드로 사도는 성도들의 ‘산 소망’의 충분하고 완전한 근거를 오직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러니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이 없었다면 기독교의 모든 교훈, 아니 성경 전체는 아무 것도 아닌, 하나의 케케묵은 골동품 서적의 가치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과 그 모든 행사에 대한 것은 거짓 것으로 드러날 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주님의 부활의 사실성과 필연성을 강력하게 역설하고 있었던 것입니다(고전 15:16~19).
모든 사도들은 모든 이들에게 바로 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되심과, 그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실을 증거하고 그 사실을 기초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역설하였습니다. 어느 사도도 그 사실을 빼놓고 자기의 강론을 시작하거나 진행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그리스도와 그에 관한 모든 사실들의 증인으로 사람들 앞에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사실이 아닐진대 자기들은 거짓 증인으로 발견될 것이라고 합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 15:15).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믿음의 터를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부활하심의 확실성 위에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 보혜사 성령님의 역사를 따라서 산 소망을 가진 자답게 죄와 세상과 마귀의 시험을 이기며, 성 삼위 하나님께 영광의 찬송이 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도 성령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주님께서 행하신 그 죽으심과 부활의 영광을 우리에게 항상 상기시키시고 그 속에서 늘 가르쳐주시고 양육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가지신 영원한 계획과 목적을 이루어 나가십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3~6).
아멘. 

집필자 서문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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