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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설교 : 유혹 앞에서

제목 : 유혹 앞에서

성경 : 마4:1-11

1.유혹 앞에 서 있는 인생 

여러분, 오늘날 우리는 정말 주님이 보시기에 올바른 영성을 유지하며 살기가 매우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 주변에 우리를 유혹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사회가 다양화되고, 문화가 급속히 발달하고, 물질이 풍성해짐으로써 질적, 양적으로 더 높고 더 많고 더 다양한 욕구를 가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말 중에 견물생심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도 있고, 아는 게 병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아는 게 많아서 먹고 싶은 것도 많겠다는 말도 흔히 합니다. 맞습니다. 차라리 안 보고 모르면 갖고 싶지도 않고, 먹고 싶지도 않을 텐데 자꾸만 맛있는 음식과 화려한 옷, 좋은 집들이 보이고, 번쩍번쩍 빛나는 차들이 돌아다닙니다. 더 크고 더 좋은 냉장고 텔레비전 휴대폰 카메라 컴퓨터 등이 하루가 다르게 쏟아져 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꾸만 눈이 높아지고 더 좋은 것을 갖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걸 소유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합니다. 돈이 있어야 좋은 옷, 좋은 차, 좋은 집, 좋은 가전제품도 사기 때문입니다. 물론 더 나은 것을 바라는 것 자체가 나쁜 일은 아닙니다. 아니 좋은 것에 대한 욕망은 그것을 소유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도전하게 만들어 인간의 삶에 발전을 가져오는 동력원이 됩니다. 그래서 오늘날 인류는 과거 어느 때와도 비교할 수 없는 번영을 이룬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날 우리가 이렇게 풍요롭고 넉넉하고 마음 껏 자유를 누리는 세상이 되었는데 오늘 우리의 삶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외형적으로 풍성해진만큼 그렇게 우리의 삶이 전체적으로 풍요로워지고, 아름다워지고, 만족과 감사와 기쁨이 충만한 삶이 되었습니까? 사실은 그렇지를 못합니다.

엊그제 뉴스에 보니 살인 강도 강간 등의 흉악범죄는 해마다 증가일로에 있다고 합니다. 묻지마 폭력이 증가하고 결혼도 잘 하지 않으려하고 결혼을 해도 아이도 잘 낳지 않으려고 하고 이혼율도 세계최고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또 사회적 갈등은 왜 그렇게 많습니까? 툭하면 싸우고 헤어지고 못살겠다고 아우성을 치고 머리에 띠 두르고 결사반대, 결사 항전을 외치며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하는 일들이 많은지... 

옛날에는 어렵고 힘들어도 잘만 살았는데 요새는 왜 그렇게 갈등이 많고 참 이상하지 않나요? 이만큼 풍요롭고 넉넉하게 되었으면 마음도 좀 더 넉넉하고 서로 받아주고 이해하며 갈등없이 살 만도 한데 말입니다.

그게 다 왜 그렇습니까? 소유나 과학이나 지식이나 물질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처럼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들은 올바르고 가치있게 사용하여 인간의 행복을 위한 보조도구로 활용해야 하는 것인데 사람들이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고 도리어 사람을 수단으로 삼으려고 하니까 자꾸만 사회가 삐그덕거리고 시끄러워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런 세상의 왜곡된 가치관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게 바로 가장 큰 유혹인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까먹게 만드는 가장 큰 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올바르고 예민한 영성으로 올바른 판단력을 가지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배격할 것은 배격하며 우리 자신을 지켜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엡5:15,16절에서는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이런 어그러지고 왜곡된 가치관이 만연된 세상속에서 주님 앞에 엎드려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올바른 영성을 가지고 모든 왜곡된 가치관과 유혹을 이기고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예수님의 시험-사탄에 대한 승리의 선포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신 후에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상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을 수 있습니까? 감히 마귀 주제에 하나님의 아들을 시험하다니 이게 말이나 됩니까? 

물론 예수님이 그 시험을 허락하신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일차적으로 마귀에 대한 예수님의 승리의 선포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최초의 인간 아담은 마귀의 시험에서 실패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죄가 들어왔고, 죄가 들어옴으로 인간에게는 고통과 사망이 왔습니다. 결국 인간의 고통은 사단의 시험에 짐으로써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모든 고통과 사망권세를 물리치려면 사탄의 유혹을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사망권세를 비롯한 모든 어둠의 권세가 쫓겨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탄의 시험을 물리치시기 위하여 일부러 마귀의 시험을 허락하셨고, 보기 좋게 물리치심으로써 승리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두 번째 의미는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해 오는 마귀사탄의 도전을 우리가 어떻게 뿌리칠 수 있을 것인가를 분명히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한마디로 주님이 마귀 사탄의 권세를 깨트리시는 분이므로 그 안에서 사탄 권세를 이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마귀를 물리치심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무기로 삼아, 그것을 기준으로 삼아 분별력을 가지고 사탄의 흉계를 깨트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이 왜곡되고 유혹많은 세상에서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는 분명한 방법을 알게 됩니다. 그게 뭐냐?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무기고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이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 그래요? 누가 우리 스스로 사단의 권세를 이기겠습니까? 누가 스스로 올바른 분별력을 가지고 죄의 유혹을 이기겠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도 스스로는 이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의 권세와 싸워 이기지 않는 한 인생은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고도로 과학이 발달하고 물질문명이 발달하고 풍성해 진다해도 사단의 세력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결코 행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물질도 생명도 과학도 지식도 진정으로 올바르게 사용할 수 없습니다. 도리어 그것들의 노예가 되고 맙니다. 그것 때문에 갈등을 일으키고 싸우고 죽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이처럼 문명이 발달하고 풍성한데도 오히려 더 불평과 불만과 갈등과 걱정근심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단의 권세에서 벗어나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살아가면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이 은혜임을 압니다. 함께 나누어야 함을 압니다. 서로 존중함을 압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압니다. 위로부터 평안과 기쁨과 자유와 은혜가 쏟아져 내려옵니다. 그래서 행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여려분, 진정으로 행복을 원하신다면 다른 어떤 것보다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품안에 온전히 안기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어떤 다른 잣대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잣대로 삼아 주님과 동행할 때에 주님의 능력으로 모든 어둠과 죄와 사탄의 권세를 이기는 승리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물질적 시험을 이기신 예수님

그렇습니다. 첫 번째 시험은 물질적인 시험이었습니다. 마귀는 40일 동안이나 금식하여 주리신 예수님께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여기 있는 돌들을 떡으로 만들어 먹어보라는 유혹을 합니다. 그러면 배도 불러서 좋고, 동시에 너의 권능을 보여줌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임을 보여 줄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마4:4) 한마디로 비록 떡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앞설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 비록 배가 고파 떡이 필요한 건 사실이지만 하나 그러나 너 따위의 말은 들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주려서 고통스러운 것은 사실이나 그래서 떡도 절실히 요구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러한 육적인 고통에서 해방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행위는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육체적인 요구도 중요하지만 과연 어떤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냐가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설령 내가 굶어죽는 한이 있어도 너 같은 악의 존재의 말을 들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은 하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물질은 분명히 필요하고 요긴한 것이지만 그러나 절대로 그것이 하나님보다 앞설 수는 없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물질인 육과 영혼으로 이루어진 존재이기에 물질이 반드시 필요한 존재이고, 물질이 우리의 욕구 중 많은 부분을 충족시켜 주지만 그러나 우리는 결코 물질을 하나님과의 사람의 관계보다 우선순위에 두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세상은 이게 뒤바뀌어져 있습니다. 물질지상주의에 물들어 있습니다. 물질이 사람보다 위에 있고 심지어는 하나님보다도 위에 있습니다. 그래서 물질 때문에 싸우고, 때리고 심지어 죽이기도 합니다. 물질 때문에 신앙생활도 제대로 못하고, 물질의 노예처럼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물질 때문에 이웃과 친구와 가족 간의 관계가 파괴될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의 은총도 사람과 사람사이에 누려야 할 사랑과 기쁨과 은혜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물질을 자신을 위하여 이웃을 위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바르게 사용하면 바로 거기에 천국이 임하는 것입니다. 나도 너도 하나님도 행복한 파라다이스가 건설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온 성도 여러분께서는 결코 물질을 앞세우지 마시기 바랍니다. 물질에 집착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결코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삶의 우선순위에 두지 마시기 바랍니다. 물질 때문에 자신의 양심을 팔아먹고, 물질 때문에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물질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원해지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직 하나님 안에서 참다운 인간의 가치를 앞세우고, 이웃과의 관계를 앞세우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앞세우며 주님과 동행할 때에 주님 안에 있는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더욱 온전히 누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명예적 유혹을 물리치신 예수님

1차 유혹에서 실패한 마귀는 겁 없이 다시 도전합니다. 예수님을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그러면 하나님이 너를 붙들어 다치지 않게 하실 것이고, 그러면 너는 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웅대접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고 하였느니라.’(마4:7)하시며 단호히 물리치셨습니다. 예수님을 뛰어 내릴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정말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정말 그것이 사람들에게 생명의 은총을 가져다 주는 일이라면 뛰어 내릴 수 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예수님께 있어서 그까짓 것은 식은 죽 먹기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뛰어 내릴 때가 아닌 것입니다. 마귀의 말을 듣고 뛰어내리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행위입니다. 그럴만한 이유가 없는 이 때에 뛰어내리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참람한 행위인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설령 뛰어 내려도 끄떡없어서 사람들에게 영광을 받을 수 있다할지라도 나는 그런 행위를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걸 조심해야 합니다. 정말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라면 죽음의 장소라도 가야 합니다. 정말로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를 위한 것이라면 불속에라도 들어가야 합니다. 엉뚱한 일에 용감해서는 안됩니다. 잘못된 일에 용감해서는 안됩니다. 쓸데없는 영웅심리로 혹은 뭔가 좀 특별한 방법으로 사람에게 인정을 받고 인기를 얻으려는 어리석은 행위는 삼가야 합니다. 

교회에서도 무언가 인정받기 위하여, 나타내기 위하여, 명예를 얻기 위하여, 두각을 나타내기 위하여 주님의 일을 하거나 무슨 직분을 얻으려고 하면 안됩니다. 그저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죽어가는 영혼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그야말로 갓난아기와 같은 순수한 믿음으로 주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결국 하나님도 인정하시고 사람에게도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명예를 얻으려는, 인기를 얻으려는, 뭔가 튀는 행동을 통해서 인정을 받으려는 태도는 옳지 않습니다. 그러면 결국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 왜곡된 방법을 시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저 정석대로 성실하게 진실하게 최선을 다하면 그 방법도 올바르게 되고 결국은 결과도 나타나게 됩니다. 설령 결과가 더디 나타나거나 혹 끝까지 나타나지 않는다해도 언젠가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인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진실하게 성실하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조금 더디 이루는 한이 있어도, 아니 세상에서 비록 명예를 얻지 못하는 한이 있어도 그저 진리 안에서 성실하게 말씀대로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정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세상이 주는 그 어떤 명예나 영광보다 우리 주님이 주시는 인정과 상급과 영광을 받아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5.영적 유혹을 물리치신 예수님

첫 번째 두 번째 시험이 실패로 끝나자 마지막으로 사단은 세상의 권세를 가지고 영적으로 예수님을 시험하였습니다. 높은 산으로 가서 예수님에게 천하만국을 보여주면서 자신에게 절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이 천하만국을 모두 너에게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사탄아 물러가라, 오직 하나님께만 경배하고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마4:10)하시며 호통을 치며 마귀의 교활한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이것은 아주 교활한 종교적 시험이었습니다. 자신에게 경배하기만하면 천하만국을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저 눈한번 질끈 감고 절을 하면 세상만국을 다 주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사탄이 그럴만한 권한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지까짓 게 무슨 그런 권세가 있습니까? 그저 예수님이 지금 40일동안이나 전혀 아무것도 안 잡수시고 약해져 있으니까 어떻게하든 이 약해진 틈을 노려 예수님을 넘어트리려고 술책을 쓰고 있는 것 뿐입니다.

여러분, 오늘날도 사탄은 이렇게 속삭입니다. 나에게 절하라. 나가 누굽니까? 사탄입니다. 사탄이 뭡니까? 죄의 세력입니다. 죽음의 권세입니다. 지옥의 권세입니다. 오늘날 그런 게 뭘로 나타납니까? 때로는 돈으로 나타납니다. 권세로 나타납니다. 과학지상주의, 물질지상주의, 개인이기주의로 나탑니다. 물론 돈이나 과학이나 이성이나 이런 것들 자체가 사탄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사탄의 하수인 역할을 할 때는 사탄과 같은 존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사람들을 돈에게 무릎을 꿇게 합니다. 권력에 무릎을 꿇게 합니다. 향락에 무릎을 꿇게 합니다. 개인이기주의에 무릎을 꿇게 합니다. 편의주의에 무릎을 꿇게 합니다. 그러면 너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속삭입니다. 마치 그 옛날 에덴동산에서 아담에게 했던 수작과 똑 같은 것입니다. 따 먹어라. 따 먹어라. 그러면 하나님 같이 될 것이다. 

여러분, 우리는 그 소리에 속으면 안됩니다. 분별해야 합니다. 돈이나 권력이나 향락이나 세상의 가치관 앞에 무릎을 꿇으면 안됩니다. 우리가 무릎을 꿇고 경배해야할 대상은 오직 천지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 뿐입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 뿐입니다. 세상의 돈이나 권력이나 지식이나 명예나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는 것이 아니라 천지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날 이렇게 교묘하고 다양하게 다가오는 마귀의 흉계를 간파하고 절대로 거기에 현혹당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기도하는 일과 말씀 묵상하는 일에 더욱 힘쓰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사순절 기간을 보내면서 우리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자신을 부인하며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육체적, 정신적, 영적 시험을 이기고 온전히 주님과 동행할 때에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더욱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마음껏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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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설교] 사순절설교 : 십자가의 도

 

 

 

고린도전서 1장 18절

이슬람교에 대한 자료를 살피면서 깜짝 놀란 일이 있습니다. 저들의 경전인 꾸란에 “예수를 믿으라”는 말이 나오기 때문입니다.(43:63) 그리고 꾸란에서 참 많은 부분을 할애하여 예수에 관해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꾸란에 나오는 예수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면, 성경에 나오는 것과 거의 비슷합니다. 예수님께서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신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복음을 전하셨다는 것과 그 복음을 믿어야 한다고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병자를 고치시고 놀라운 기적을 베푸신 것도 사실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것과 다시 재림하실 것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쯤 되면 이슬람교는 유대교보다 우리 기독교에 더 가까운 종교라고 할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 자칫 이슬람교와 기독교는 충분히 대화가 가능한 종교라고 생각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가 한 가지 있습니다. 바로 십자가입니다. 저들은 예수의 십자가를 생략하거나 무시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적극적으로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3:55) 십자가에서 죽음을 모면한 후 샘이 흐르는 곳으로 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23:50) 그래서 이슬람교는 예수를 구세주가 아니라 알라가 보낸 위대한 선지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 적극적으로 기독교가 예수를 잘못 가르치고 있다고 기독교를 적대시하고 공격합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가 결정적인 기준입니다. 십자가가 빠진 예수는 참된 예수가 아닙니다. 아무리 예수의 기적을 믿고, 예수의 말씀을 따르고, 예수의 동정녀 탄생과 승천까지 믿는다고 해도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가 빠지면 그것은 헛된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의 십자가를 부인한다면 아무리 예수를 치켜세우고 심지어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해도 그들은 적그리스도입니다.

   오늘날 많은 종교, 많은 사상에서 예수를 인정합니다. 치켜세우고 존경을 표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들이 말하는 예수 안에 십자가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안에 구원이 없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닮아가야 할 모델로 추앙합니다. 그 말씀을 생명처럼 소중히 여깁니다. 그러나 저들의 예수 안에 십자가가 생략되거나 강조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안에 능력이 없습니다.

 


십자가의 도

   오늘 본문은 기독교의 핵심을 설명해 줍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십자가의 도로 우리가 구원을 받고, 십자가의 도 그 자체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십자가의 도”란 무엇일까요? 헬라어 원어로 ‘호 로고스 가르 호 투 스타우르’입니다. 보다 쉬운 말로 번역해 보면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의 도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에 관한 말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통해 이 세상에 선포된 말씀”을 말합니다.

   사도 요한은 요 1장에서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사건이 로고스 곧 말씀이 이 땅에 선포된 사건으로 설명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선포한 말씀의 핵심이요 절정이 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온존하게 선포되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이 땅에 선포한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이 땅에 선포된 말씀은 무엇일까요?

 


첫째, 공의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란 사실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에 죄를 미워하십니다. 죄를 지은 자에 대해 진노하십니다. 그리고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십자가는 이 점을 분명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롬 3:10-12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리고 롬 1:18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니...”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고, 그 죄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선포합니다. 그래서 모두가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선포합니다.

 


둘째, 사랑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란 사실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죄인을 그대로 버려두실 수 없으십니다. 그래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특단의 조치를 취하셨습니다. 바로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시고 저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이 점을 분명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요 3:16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고 롬 5:8에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죄 중에 신음하고 있는 인간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저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셨다는 사실을 선포합니다. 그래서 구원의 길이 열렸다는 사실을 선포합니다.

셋째, 구원입니다.

   십자가는 죄인들이 구원 받을 길이 있음을 선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다만 이 사실을 믿기만 하면 모든 죄를 용서받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믿음으로 구원 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는 이 점을 분명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갈 1:4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그리고 살후 2:13 하반 절에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구원의 길이 활짝 열려있음을 선포합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사실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능력

   오늘 본문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우선 이 십자가의 도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이 말씀을 들으면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습니다.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에 버럭 화를 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 지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말에 어처구니가 없다고 고개를 젓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를 믿어야 구원 받는다는 말에 배타적이라고 조롱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십자가의 도는 사람의 머리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 내용이 합리적이지도 않고, 논리적이지도 않고, 입증해 보일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도는 선포된 것입니다. 이해시키거나 설명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엡 2:8에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이 십자가의 도가 믿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은혜로 구원 받는다고도 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이 십자가의 도가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십자가의 도가 은혜로 믿어져 구원 받게 된 사람에게 능력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십자가의 도가 어떤 능력을 나타낼까요?

첫째, 변화의 능력입니다.

   십자가의 도를 믿고 따를 때 우선 우리에게 변화가 나타납니다.

   고후 5:14-15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십자가의 도는 우리를 새사람으로 변화시킨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옛사람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새사람으로 다시 태어나 주를 위해 살게 한다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위대한 부흥사 가운데 한 분으로 김익두 목사님을 손꼽습니다. 이 분은 원래 황해도 안악시장을 주름 잡던 아주 못된 깡패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미국 선교사 스왈런 목사님의 사경회에 참석했다가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날부터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세례 받기까지 전력을 다해서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친구들이 찾아와 술을 마시러 가자고 하더랍니다. 이 때 김익두가 이렇게 말했답니다. “아니야 나 지금 약 먹기 때문에 술 못 마셔” 친구가 물었습니다. “무슨 약을 먹는데?” “응 신약과 구약이야”

  하루는 성경을 읽다가 갈 2:20을 읽고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아! 내가 죽어야 내 안에 예수가 살고 내가 믿음 안에서 살 수 있구나”라고 깨닫게 됐습니다. 그 후 김익두는 엉뚱하게도 김익두가 죽었다고 부고장을 발송했습니다. 깡패였지만 그래도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이 문상을 왔습니다. 김익두는 멀쩡히 살아서 문상객을 맞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모이자 그가 이렇게 말했답니다. “깡패 김익두는 죽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부고장을 돌린 것입니다. 이제 내 안에는 예수가 주인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이런 선언에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고 함께 예수를 믿기로 했답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도는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내 중심으로 살던 사람을 주님 중심으로 살도록 변화시킵니다. 바로 여기에 십자가의 도의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둘째, 승리의 능력입니다.

   십자가의 도를 믿고 따를 때 우리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롬 6:6-7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십자가의 도는 우리로 하여금 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죄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오랜 세월 방탕한 생활을 하시던 중에 나이 40에 회심하고 돌아와서  후에 신학을 공부하고 늦게 목사가 된 분이 있었습니다. 워낙 술고래였었기 때문에 짓궂게 물었습니다. “목사가 되신 뒤에도 술 마시고 싶은 유혹이 있었습니까?” “이제 전혀 술 마시고 싶은 생각이 사라 졌습니다”라는 대답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이 분의 대답은 뜻밖이었습니다. “여전히 술 마시고 싶은 생각이 간절합니다. 술 집 50미터 전방에만 가도 술 생각이 간절합니다.”

  계속 물었습니다. 그러면 그럴 때는 어떻게 하십니까? “우선 그 자리에서 십자가를 묵상합니다. 그리고 가까운 가게에 들어가서 우유를 사서 마십니다. 그러면 술 생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묵상하면 술의 유혹을 이길 수 있고 우유를 사서 마시면 배가 불러오면서 술 마시고 싶은 생각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믿어도 계속 죄의 유혹은 따라다닙니다. 술에 대한 유혹, 음란에 대한 유혹, 방탕에 대한 유혹, 거짓과 술수에 대한 유혹... 우리 힘으로 이런 유혹을 이길 수 없습니다. 바라 십자가의 도를 묵상하면 이길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우리에게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셋, 충성의 능력입니다.

   십자가의 도를 믿고 따를 때 우리는 끝까지 충성할 수 있습니다.

   고후 4:7-11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십자가의 도는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불굴의 용기로 주를 위해 충성할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우리로 환란과 박해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전주시 화산동 외국인 묘지에 가보면 군산 영명고등학교 학생들이 성금을 모아 세우 기념비가 있습니다. 바로 데이비스 선교사의 기념비입니다. 이분은 한국에 파송되어 최초로 순교한 여자 선교사입니다. 1896년 군산에서 주로 어린 아이들과 부녀자들을 대상으로 선교를 했습니다. 후에 결혼하여 전주에서 선교하고 있을 때 서문 밖에서 약방을 개설하고 환자를 치료하면서 선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후에 선교부가 이곳에 병원을 짓고 본격적인 의료선교를 하게 됐는데 그곳이 바로 전주 예수병원입니다.

  이 데이비스 선교사는 누구보다도 전도의 열정이 강해서 전북지역을 가가호호 방문하면서 전도해서 한해에 1885명을 전도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분은 몸을 돌보지 않고 전도하는 일에 목숨을 바쳤습니다. 또한 이분은 어린이를 사랑해서 혼신을 다해 어린이 환자를 돌보았습니다. 전주 예수 병원에 입원해 있는 어린이들을 정성을 다해 돌보다가 약해진 몸이 열병에 전염이 되어 41세의 나이로 1903년 6월 20일 이 땅에서 순교했습니다. 그의 기념비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생명을 바쳐 선교한 여장부”

  이분이 이렇게 충성할 수 있었던 것은 어려서 어머니에게 배운 십자가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십자가 사랑에 감격하여 전도하고 가나한 사람들을 돌보던 본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를 위해 충성을 해도 끝까지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죽기까지 주를 따르고 헌신하고 충성할 만한 능력이 우리에게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도를 묵상하고 마음에 새기면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우리에게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고난 주간을 시작합니다. 십자가의 도 깊이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의 도의 능력을 덧입으시기를 바랍니다.

출처/박봉수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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