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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성경 학교 기도문 (Summer Bible School Prayer)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34:9-10)


하늘과 땅과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주님,
저희들에게 생명과 호흡을 주심을 감사드리오며 이 시간
찬송과 영광을 돌리옵니다.

 

메마른 땅에 단비를 주시사, 만물이 신선하게 자라게 하시며,
젖은 땅에 햇빛을 비취사 오곡 백과가 성숙케 하시며,
온 천지가 주의 은혜와 축복 속에 자라고 또 자라게 하여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주님, 이 시간도 지난 한 주간 동안
아쉬웠던 경건한 삶을 회복하게 하시고,
주님의 참 자녀로 인격이 갖추어지게 하시며, 맡은 일을
성실히 이행하고 책임을 다하여 이 여름을 알차게
살아갈 수 있는 인격과 믿음을 심어 주시옵소서.

 

가물어 메마른 땅 위에 단비를 내리시고 충분한 비를 주시되
부족함 없도록 채워주신 주님, 저희의 심령에 장
마비와 같은 은혜의 비를 내리셔서, 그 비를 심령 깊숙이
충만하게 받아들이게 하시고, 저희의 믿음 또한 무성하게
자라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무더운 여름을 맞이하여
교회가 여러 가지 여름 행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계획하고 준비하는 자들에게 지혜를 주셔서,
소문만 무성한 여름 행사가 아니라 열매를 많이 맺어
주님께 큰 영광 돌리는 향기로운 여름 행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어린 학생들을 지도하고 양육하는 교사들마다 그 심령을
충만하게 하셔서, 어린 심령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을 수 있는 교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교사들이 하는 일마다 건성으로 임하는 일이 없게 하시고
주님처럼 늘 희생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책임감 있는
교사들이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예배의 시종의 주님께 의탁하오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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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낮 설교 <보배로운 믿음>

 


 
제목 : 보배로운 믿음

말씀 : 벧후1:1~4

베드로 전서

A.D.64년경. 로마 네로 황제의 기독교 핍박 시작. 아직 본격적으로 박해가 시작되진 않았지만 로마제국 내에 흩어져 거류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박해에 대비해 믿음으로 이겨 나갈 것을 권면. 우리는 산 소망이 있는 자들, 영혼의 구원을 받은 자들로 잠깐 근심 할 수 밖에 없지만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은 것, 오직 주의 말씀만 영원함.

우리는 택하신 족속, 왕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그의 소유된 백성. 그러기에 거짓 것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선한 싸움을 해야 함으로 오히려 더 많은 고난과 핍박. 그러므로 깨어 근신하며 굳건한 믿음으로 마귀를 대적하며 기꺼이 고난 받을 것.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증표로써 도리어 영광스러운 일. 그렇게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할 때에 하나님이 끝까지 지켜줘 승리할 것.

그렇다. 죄와 무지와 어둠속에 있는 세상. 마귀사탄이 역사하고 있는 세상. 나도 세상도 다 죄와 무지와 어둠. 끊임없는 죄와 유혹과 핍박과 도전. 그러므로 고난과 핍박도. 그러나 우리는 진리에 속한 자이므로 좁은 길.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을 달려가야. 진리를 위해 고난 받는 것을 기뻐해야. 깨어 근신해야. 하나님이 지켜 주실 것.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차지할 것.

 

베드로 후서

베드로가 두 번째 보낸 서신. 베드로전서를 보낸 뒤 3,4년 뒤에. 네로의 핍박이 더욱 가중되던 때. 믿음이 흔들리는 사람들 발생. 어느 정도 견디다가 믿음이 연약한 자들은 배교하기도. 특히 주님의 재림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의문. 곧 오실 줄 알았던 주님이 오시지는 않고 핍박만 가중되자 낙심하는 사람들.

이에 베드로사도는 다시 서신을 보내어 생명과 경건에 속한 것을 주셨으니 믿음을 굳게 지킬 것. 믿음으로 인내 할 것. 개가 토하였던 것을 도로 먹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로 돌아가듯 과거로 돌아가지 말라.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끌려가지 말라.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음을 기억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 믿음을 지킬 것을 강조.

우리도 정말 조심해야.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지 말아야. 우리들 주변에 도사리고 있는 온갖 왜곡된 가치관에 속지 말아야. 마귀 사탄은 때로는 달콤하게 때로는 환난과 핍박으로 때로는 세상의 온갖 왜곡되고 거짓된 사상으로 우리를 넘어트리려고 함. 깨어 있어야.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아야. 오직 그것만이 진리의 길, 생명의 길. 그러려면 참고 기다려야.

오늘 말씀. 송신자와 수신자. 축복 기도. 성도의 정체성 상기.

 

1.송신자와 수신자

벧후1:1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1)예수 그리스도의 종 - 송신자

베드로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라고 소개.

종은 dou'lo"로 노예라는 뜻. 완전히 주인에게 종속되어 있는 자, 주인을 섬기며 그 뜻을 받들어 수행하는 자. 주인의 뜻을 헤아려 준행하며 그 명령을 따라 움직이는 자. 그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자. 동시에 종으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했을 때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자.

우리는 완전히 주님께 종속되어 주님의 수족이 되어 주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존재. 종은 몸도 마음도 시간도 물질도 재능도 생각도 오직 주인의 것. 주인의 뜻에 의하여 움직여야. 주님은 완전한 생명과 사랑과 은혜와 기쁨과 위로와 소망의 주님이시기 때문에 그 주님 뜻대로 살아갈 때 최고의 가치, 의미, 복,

 

은혜 누리다가 영광의 나라.

사도는 ajpovstolo"로 ‘보냄을 받은 자’ 원칙적으로 모든 인간은 관리인으로 보냄을 받은 자. 주어진 자리에서 잘 관리하여 하나님의 주신 동산을 아름답게 가꾸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며 그 가운데서 생명의 은총을 누리도록. 그러나 세상 사람은 몰라.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거기다 한가지 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보냄을 받은 자.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자로 보냄을 받은 자. 그러므로 보냄을 받은 자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해야.

그러므로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님의 뜻대로 바르게 사용함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가고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며 살아가자.

2)보배로운 믿음을 가진 자들 - 수신자

베드로는 수신자들의 신분 또는 정체성을 상기시킴.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보배로운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 즉 베드로는 이 편지를 받는 그들이 얼마나 굉장한 사람들인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를 상기시킴, 즉 귀한 믿음의 소유자답게, 그 엄청난 신분의 소유자답게 세상의 어떤 것과 바꿀 수 없는 이 보배로운 믿음을 굳게 지키고, 의와 진리와 선 가운데 귀한 삶을 살라는 것.

우리는 세상의 어떤 것과 바꿀 수 없는 보배로운 믿음을 가진 자들.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어 얻게 됨. 그러므로 이 보배로운 믿음을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바꾸면 안돼. 환난과 핍박이 와서 설령 육체의 생명은 잃은 망정 이것만은 잃어서는 안돼.

당연하지 않나? 믿음보다 큰 보배가 어디 있는가? 무엇이 믿음보다 우리에게 더 큰 생명의 은총을 가져다주겠나? 무엇이 이보다 더 큰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과 영광을 가져다주겠나? 이것은 상대적인 문제가 아니다. 세상의 무엇과 비교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세상의 것은 다 잃어봤자 별거 아니다. 그러나 믿음은 잃으면 끝장. 영원히 끔찍한 고통.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말씀.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마16:26) 또 마13:44절에서 말씀.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그러므로 세상에서 가장 큰 보배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자. 가장 큰 보배를 가진 자들임으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살아가자. 세상의 별 것 아닌 것들에게 조금이라도 믿음을 팔아먹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자. 오직 말씀대로 살아갈 때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영원하고도 풍성한 은혜를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자.

 

2.축복기도

벧후1:2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모든 서신서의 서두와 종결 부분에서 계속 말씀했던 내용. 여기서는 두 가지를 강조. 첫째는 인생의 진정한 복이 무엇인가? 둘째는 그 복은 어디로부터 어떻게 오는가? 물론 인생의 복은 하나님께로부터. 하나님이 복의 근원. 그 하나님을 알고 바르게 섬길 때 은혜와 평강. 인생의 진정한 복은 하나님이 위로부터 내려주시는 생명과 은혜와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이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는 말할 것도 없고 세상에서 누리는 진정한 평안과 기쁨과 즐거움과 위로와 소망도 오직 하나님이 주실 때 가능. 세상의 돈과 명예와 물질과 지식도 어느 정도 우리 삶에 유익이 되나 거기에 진정한 행복이 있는 게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때 가능하다. 그리고 그 은혜는 하나님을 앎에서 시작된다. 하나님을 알 때 믿게 되고 믿을 때 그 은혜를 누리게 된다.

그러므로 세상의 다른 어떤 것보다 주님이 주시는 평강과 위로와 소망을 구해야. 그러려면 주님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믿어야. 주님이 누구신지 어떻게 믿고 어떻게 따라야 하는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주님의 뜻을 바르게 알아야 한다. 그러려면 더욱 주님을 가까이 해야 한다. 엎드려야 한다.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주님이 깨닫게 하시고 도우시고 인도하셔서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가게 한다. 그래서 주님의 평강과 위로와 소망을 마음껏 누리게 된다.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게 된다.

그러므로 세상의 것들을 찾고 바라보고 의지하고 따라가기보다 주님을 찾자. 겸손히 엎드리자. 주님을 사모하자. 그래서 주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주님이 주시는 은혜의 충만함으로 세상의모든 것을 이기고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자.

 

3.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주심

벧후1: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주셨다. 여기서 생명이란 하나님이 본래 주셨던 기쁨과 은혜와 복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영원토록 조금도 부족함 없이 완전히 누릴 수 있는 영원한 생명. 물론 이것은 신기한 능력 즉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완성된 주님 안에 있는 생명이다. 우리의 죄와 무지와 허물과 연약함을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이런 완전한 생명의 소유자가 되는 것.

경건이란 그런 완전한 생명을 가진 자들이 가져야 할 삶의 태도. 생명은 우리 믿음의 사람들의 본질적인 정체성. 경건은 온전한 생명을 가진 자들이 가져야 할 삶의 외견적인 모습. 그런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주셨다는 것은 그렇게 생명을 가진 자로 경건한 삶의 모습을 가지고 살아갈 때 주어지는 모든 은혜들을 주셨다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고, 특혜이고, 외견적으로 보여주어야 할 삶의 모습. 그러므로 특별한 은혜를 받은 자들답게 특별한 삶의 자세를 가지고 세상과 야합하거나 타협하거나 끌려 다니지 말고 믿음을 지켜나가라는 의미.

그러므로 우리는 보배로운 믿음을 가진 존귀한 인생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긍지와 자존심을 가지고 험하고 혼탁하고 왜곡된 세상에 끌려가지 말자. 이것은 오직 예수님 안에서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오직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며 주의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잘 달려감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받아 누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인생이 되자.

 

4.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됨.

벧후1: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이로써’ 라는 것은 3절의 자기 영광과 덕으로써 라는 말씀으로 오직 주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지극히 큰 약속을 주셨다는 말씀. 지극히 큰 약속이란 물론 영원한 영광의 나라. 따라서 영원한 영광의 나라 때문에 그까짓 썩어 없어질 세상의 것에 끌려 다니거나 노예가 되지 않고 신성한 성품 즉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따라 사는 자가 되게 하셨다는 말씀이다.

 

그렇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생명과 경건에 속한 것을 받은 자들이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약속으로 받았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약속으로 받으면 세상의 것들이 작은 것임을 안다. 거기에 연연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 거기에 끌려 다니지 않는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지고 살게 된다.

당연하지 않나? 진정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보았는데 그까짓 세상의 것에 끌려 다닐 이유가 뭔가? 세상의 것을 바라볼 이유가 뭔가? 어찌 주님을 바라보지 않겠나? 그러면 성령님이 어찌 함께 하시지 않겠나? 그러면 얼마나 더 주님을 닮아가겠나? 그러면 얼마나 주님의 은총 누리며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겠나?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는 주님의 종임을 잊지 말고 주님께서 주신 모든 것을 주님의 뜻대로 바르게 사용하자. 진실로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보배로운 믿음을 가진 자들이라는 기억하며 세상의 것에 휘둘리거나 낙심 원망 근심하지 말고 오직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하자.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소유한 자들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주님과 온전히 동행하며 주님의 영광 나타내며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가며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마음껏 누리는 복되고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인생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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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설교 - 생명에 관한 문명 과학

 

 


말씀 : 욥38:1-11

제목 : 신앙과 과학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크게 두가지일 것이다. 하나는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로 곧 무신론자들이 여기에 속한다. 다른 하나는 모든 종교는 다 똑같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로 이 사람들은 다신론자들이거나 종교다원주의자들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신 자체를 거부하기 때문에 또 어떤 이는 자신이 나름대로 섬기는 신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하나님을 거부하거나 다른 우상을 섬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한마디로 영이 완전히 죽어 있거나 조금 살아있다해도 심각하게 손상을 입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이 죽어있는 사람은 영적으로 사고하지 못하고 오직 육체적, 정신적으로만 사고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를 거부하는 것이며, 또 어떤 사람들은 영적인 영역이 심각하게 손상되어 있어서 올바르게 사고하지 못하고 엉뚱하게 인간이 만든 신을 섬기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인생들의 두가지 큰 오류를 발견하게 된다.

하나는 그들의 영이 죽어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함으로 오는 오류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영적으로라야 교제가 가능한데 영이 죽어있으므로 더 이상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게 되었고, 하나님과 교통이 안되니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만날 수도 없고 그 은혜도 누리지 못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알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며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의 오류는 과학지상주의에 빠져 있는 모습니다. 그러니까 영이 죽어 있는 인생은 인간의 모든 삶을 그저 정신적이고 물질적인 것으로만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영이 완전히 죽어있으니까 그 영역은 부정하고 인간사의 모든 일들이 정신적, 물질적 영역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면 그저 정신적인 측면으로 이해하여 그건 나약한 사람들이 마음에 위안을 받기 위하여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저 물질적인 잣대를 가지고 있어서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면 하나님을 어디 있느냐, 보았느냐, 천국에 갔다 왔느냐고 묻는다. 그러면서 볼 수도 들을 수도 없고 만져볼 수도 없는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과학지상주의에 빠져 있는 현대인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눈으로 보았느냐, 귀로 들어보았느냐, 천국에 다녀왔느냐고 묻는 것은 결국 그게 과학적으로 맞는 말이냐, 경험적으로 증명할 수 있느냐하는 질문이고 이러한 질문은 바로 과학지상주의적인 발상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건 정말 어리석은 일이다. 여러분, 과학이 뭔가? 과학(科學, science)에 대하여 사전에서는 이렇게 나와 있다. ‘자연세계에서 보편적 진리나 법칙의 발견을 목적으로 한 체계적 지식.’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과학이란 자연에 관한 것 즉 인간의 감각기관으로 경험 가능한 세계에 대한 어떤 법칙과 원리를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과학은 인간과 우주의 모든 영역을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 아닌 것이다. 과학은 우주와 인간에 관한 모든 것을 연구하는 학문도 아니고 그것을 다 밝혀낼 수도 없고 그 문제들을 다 해결할 수도 없다. 그러니 과학의 범위 밖에 있는 하나님을 과학의 범주 안에서 이해하고 증명하고 알아내려고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마치 과학이 만능인양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과학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지식과 정보를 제공해 줄 수 있으면 마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처럼 여기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과학적으로 규명될 수 있는 사실만 인정할 수 있고 과학적으로 규명되지 않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는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큰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1.과학의 지식적 한계를 알지 못하는 오류

과학은 지식적으로도 분명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 다시말하면 과학으로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들이다. 과연 신은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인간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죽음 저 너머에는 무엇이 있는가? 인류의 미래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진정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선하고 아름답고 가치있는 것은 무엇인가? 도덕적으로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가? 과학은 이런 인간의 보다 근원적인 문제에 대한 지식이나 정보나 해결점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다.

또한 그런 근원적인 문제 말고 일반적인 지식들도 마찬가지다. 모든 지식이 과학의 법칙에 의하여 실험될 수 있고 증명되어 밝혀지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국어 공부를 한다고 하자. 국어를 잘하려면 열심히 글을 많이 읽고 쓰며, 문법을 공부하고, 단어를 암기하고 하면서 하는 것이지 거기에 무슨 과학적 법칙을 적용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음악이나 미술 등의 예능 분야도 과학적 법칙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가 서로 만나서 교제하거나 사랑하는 일도 거기에 무슨 과학적 법칙을 적용해서 모든 것을 밝혀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러한 분야들에도 부분적으로 과학을 도구로 사용하여 보다 효과적으로 공부도 할 수 있고 좀더 긍정적인 발전을 모색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 모든 원리가 과학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밖에도 설령 과학의 범주 안에 있는 대상이라고 할지라도 과학으로 다 알 수 없는 것이 너무나 많다. 예를 들어 이 광활한 우주와 생명은 분명히 과학의 연구대상이지만 그러나 절대로 그 신비를 과학으로 다 밝혀낼 수 없다. 즉 과학이 결코 인간과 우주와 이 세계에 대한 모든 것을 밝혀 낼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과학은 인간과 우주에 대한 모든 것을 연구할 수 있는 학문도 아닐뿐더러 설령 과학이 연구할 수 있는 분야라고 할지라도 그것도 다 밝혀 낼 수는 없다는 것이다.

2.과학의 능력적 한계를 알지 못하는 오류

그뿐이 아니다. 과학은 이런 지식적인 한계가 있을 뿐 아니라 능력적으로 한계가 많다. 즉 지식적으로 다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설령 과학이 알고 있는 문제라도 그 문제들을 다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생명에 관한 문제를 보자. 생명에 관한 분명 과학의 연구대상이지만 그러나 생명체를 만들어 낼 수도 없으며, 죽은 생명체에게 다시 생명을 부여할 수도 없다. 인간의 노화 현상을 조금 지연 시킬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사람들이 그토록 원하는 불로장생의 길을 열어줄 수도 없다.

물론 이런 근원적인 문제 말고도 과학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너무나 많다. 세상에 존재하는 악의 문제를 과학으로 해결할 수 없다. 앞서 말씀 드린대로 세상의 다른 학문의 문제도 과학으로 다 해결할 수 없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나 혹은 과학 이외의 다른 분야에 대해서 모두 지식을 제공할 수도 없고, 그 문제들을 다 해결할 수도 없는 과학으로 알 수 없다고 하여 하나님을 부정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냐는 말이다.

3.과학을 말하면서 비과학적인 진화론을 믿고 있는 오류.

조금 공부를 했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존재를 거부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 중에 하나는 소위 진화론이다. 왜냐하면 진화론은 우주만물의 기원에 대하여 성경의 말씀과는 완전히 정반대되는 주장을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번 말씀을 드렸기 때문에 오늘은 간단히 언급한다. 진화론은 한마디로 우주 만물이 저절로 생겼다는 것이다. 땅도 바다도 하늘도 별도 나무도 동물도 사람도 저절로 생겼다는 것이다. 생물들은 처음에 무언가 단세포 생명체가 생겨나더니 자꾸자꾸 변화해서 마침내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허구요, 가설에 불과한 이론이다.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고 있지만 사실은 과학도 아니다. 증명된 것도 아니고 실험을 통해서 밝혀낸 것도 아니다. 무슨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다. 과학의 법칙으로도 말도 안된다. 물리학적 법칙에도 위배되고, 생물학적 법칙에도 위배된다.

그들이 증거라고 내 놓은 몇몇의 증거들도 사실은 증거도 아니다. 전혀 연결고리도 없으며, 증거라고 말하는 화석이라는 것도 어떤 것은 조작된 것이고, 어떤 것은 처음부터 그냥 그런 동물일 뿐이다. 중간단계의 생명체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진화론은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주장되고 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비과학적인 허구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마치 진화론을 과학적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으니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4.과학의 방법을 무시하고 신을 거부하는 오류.

과학지상주의자들이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과학적으로도 엄청난 모순이다. 무슨 말이냐하면 과학적 방법론은 관찰 ? 가설 ? 실험, 입증 ? 정설, 응용 등인데 신이 없다는 주장은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단순히 자신의 신념으로 그런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신이 없다고 과학적으로 말하려면 관찰과 가설과 실험의 과정을 거쳐서 신이 없다는 것을 입증해야 하는데 실험도 입증도 하지 못하고 그저 단순히 자기의 신념으로 신이 없다고 주장하니까 과학적으로도 말이 안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건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원래 과학이라는 것이 인간의 감각으로 경험 가능한 세계만을 다룰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과학은 인간의 눈으로 보이고 귀로 들리고 정신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분야에 대해서만 어느 정도 밝혀 낼 수 있는데 하나님의 영역은 그 이상의 것이기에 과학적으로는 본래부터 접근할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인 것이다.

그런데 과학적으로 접근할 수 없는 영역을 과학적인 잣대에 의하여 판단하려고 하고, 그래서 당연히 과학적인 법칙으로 관찰하고 실험하고 증명할 수도 없는 영역임에도 하나님이 없다고 한다면 이런 모순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여러분, 과학이 하나님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은 과학적으로는 하나님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과학이나 과학자가 하나님에 대해서 내릴 수 있는 가장 정직하고 겸손한 태도이다. 그런데 마치 과학적으로 신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무지와 교만과 어리석음을 나타내는 일일 뿐인 것이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라.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 가운데로서 욥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욥38:1-3)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욥에게 질문을 퍼부어 대신다. 네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있었느냐, 네가 바다 속을 속속들이 다 알 수 있느냐, 광명이 어떻게 생겼는지 아느냐, 누가 비를 만들었고, 누가 하늘의 일월성신을 만들었느냐, 너의 마음 속에 지혜는 누가 주었느냐, 네가 그 근원을 아느냐, 네가 거기에 있었느냐 하시면서 네가 알거든 한번 대답해보라고.....

그러니까 앞부분에서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 대하여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마치 자신이 모든 것을 아는 양, 마치 자신이 판단자가 되는 양 여기며 말했던 욥에게 그의 무지함을 일깨워 주며 그 무지와 어둠 속에서 함부로 말하지 말고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의 뜻을 살피라는 말씀인 것이다.

이 말씀은 오늘날 과학을 맹신하는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라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마치 자신들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양 말하지만 실상 그들이 아는 것은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런 작은 지식을 가지고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그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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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우리 가족을 위한 기도

 

 

 

사랑이신 아버지 하나님

저희들의 가정을 축복하여 주시어

생명과 사랑의 보금자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아이들이 가정에서 자신들의 존엄성을 깨닫고

믿음과 소망과 사랑 가운데서 성숙하게 하옵소서.

 

부부간의 생각을 주님의 은총으로 이끌어 주셔서

저희 가정이 겪는 모든 어려움을

순조롭게 극복하게 하옵소서

 

저희 가정이 신앙의 출발지가 되게 하시며

평안함과 화목함이 가득하고 감사가 넘치는

복된 가정되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아버지를 주인으로 모신 저희들의 가정이

날마다 축복의 자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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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기도

 

 

 

*영원하신 주 하나님!
저희들의 생명에 주님의 영으로 새해에 새 생명을 주시사
주를 찬미케 하심을 감사합니다.
주님은 저희들의 생각보다 높으시고 저희들의 지식보다
초월해 계심을 믿사옵니다. 오늘도 주의 이름으로 간구하
는 특권을 누리게 하심으로 아침을 열게 하시니 감사합니
다.

사랑하는 주님,
언제부터인지 저희들의 영안이 많이 어두워져 버렸음을
느낍니다. 또 마음이 냉냉해져 가고, 굳어져감을 느낍니다.
때로는 회개를 하고 싶어도 눈물이 나지도 않을 때가 있습
니다. 뛰어보고 싶어도 발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외쳐보고
싶어도 목이 열리지 않습니다.

오 주님!
성령의 물로 냉냉한 마음을 뜨겁게 해 주옵소서.
성령의 단비로 굳어진 발을 옥토로 만드소서.
주님, 우리는 잘 믿는다고 자부하면서도 부패하고
교만해져감을 회개합니다.
우리가 거룩과 믿음을 자랑하면서 추해져 버렸고, 불신앙
에 빠져 버렸음을 회개합니다. 우리가 영원을 찬미하면서
도 그져 순간적인 욕망을 추구하며 살아 온 죄를 회개합니
다. 주님의 그 보혈의 권세와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의 죄
과를 도말하소서. 그리고 우리 가운데 사죄의 기쁨을 충만
케 하옵소서.
영원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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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설교(대강절) 그 날을 바라보며


 


 


말씀:이사야 35:1-10

제목:그날을 바라보며

영국의 극작가 사무엘 베켓은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작품으로 1969년도 노벨문학상을 받았습니다. 이 책은 비슷한 처지에 있는 두 사람이 황량한 길가에서 <고도>라고 하는 미지의 인물이 나타나 그들을 구원해줄 것을 막연히 기다리면서 행하고 있는 여러 가지 삶의 모습들을 그리고 있는 책입니다.

그들은 고도가 나타나면 그들을 구원하여 무언가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해 줄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무작정 고도를 기다리면서 서로 다투기도 하고, 아무런 의미도 없이 떠들어대기도 하고, 혹은 소리를 지르며 노래를 불러보기도 하는 등의 별 의미도 가치도 없는 행동을 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때로는 절규하기도 하고, 때로는 희희낙낙하기도 하고, 때로는 절망하기도 하고, 그러다가 다시 희망을 갖기도 하면서 그저 무한정 고도를 기다리는 것으로 이 책의 이야기는 아주 허무하게 종결을 짓고 있습니다.

무슨 결론도 없고 마치 쓰다가 만 책처럼 그렇게 끝을 맺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책이 노벨문학상을 받은 것은 오늘날 방황하고 있는 현대인의 모습을 아주 예리하게 비판하고 있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는 참된 인생의 목표나 기다림도 없이 그저 먹고 마시며 즐기는 것으로 세월을 보내는, 그것이 마치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길인 것처럼, 그것이 마치 인생의 목적인양 생각하며 무의미하게 살아가고 있는 인생의 모습을 고발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현대인들은 인생의 진정한 목표와 소망을 잃어버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이 궁극적으로 가야할 영원한 고향을 망각한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저 먹고 마시고 소유하고 즐기면서 육신의 정욕을 만족시키는 것이 마치 인생의 의미요, 인생의 가치로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것은 결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의 모습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진정한 기쁨도 될 수 없고, 참된 만족과 가치를 줄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그것은 진정한 소망이 될 수 없고, 기다려야할 대상도 될 수 없습니다. 도리어 허무와 좌절과 고독만을 가져다 줄 뿐입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영원한 절망과 고통만을 안겨 줄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영원한 기쁨과 만족과 은혜를 주실 분은 누구십니까? 정녕 우리가 기다려야 할 대상은 누구입니까? 정녕 우리 인류가 소망을 걸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말할것도 없이 성육신하셔서 이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온 인류의 유일한 구세주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기쁨이며 소망이며 기다려야 할 유일한 분이십니다.

1.갈림길에 서 있는 인생

여러분,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오늘 말씀에서는 두 개의 세상을 대비시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광야와 같은 세상입니다. 식물도 동물도 제대로 살 수 없는, 설령 산다고 해도 온갖 고초속에 살아가야 할 그런 험하고 거친 세상입니다. 소경과 귀머거리와 저는 자들이 있을 수 밖에 없는 힘들고 고통스러운 세상입니다. 우리를 넘어뜨리고 상처를 주고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그런 사나운 세상이요, 소망이 없는 세상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것과 정 반대의 세상입니다. 그야말로 낙원과 같은 세상입니다. 광야와 사막 위에 샘물이 솟아나서 백합화가 무성하게 피어나고, 온갖 종류의 풀과 꽃들이 만발한 샤론평원처럼 아름다움과 향기가 넘치는 그러한 세상입니다. 저는 자는 일어나고, 귀머거리의 귀가 열리고, 소경의 눈이 열려서 누구하나 소외당하거나 고통 당하는 사람이 없이 함께 은혜와 기쁨을 누리는 그런 세상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분명 기억해야 합니다. 이 두 개의 상이한 세상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직시해야 합니다. 이러한 두 개의 상이한 세상이 다만 우리의 상상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갓 이상향에 지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세상이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약속된 세상이며, 우리를 위해서 예비된 그런 세상이라는 것을 우리는 망각해서는 안됩니다. 사람들이 알고 있든 모르고 있든, 누리고 있든 누리고 있지 못하든 그것과는 상관없이 지금도 이 두 개의 세상은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이 두 개의 세상중 어느 한쪽에 속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광야와 같은 세상속에서 험하고 절망적이고 영원한 고통의 삶을 살아 갈것이냐 아니면 낙원과 같은 세상속에서 영원한 영광과 은혜의 삶을 누릴 것이냐 우리는 이 두가지를 선택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물론 누가 광야의 삶을 원하겠습니까? 누가 영원한 고통과 절망의 삶을 원하겠습니까? 누가 낙원의 삶을 바라지 않겠습니까? 누가 영원한 행복과 은혜의 삶을 원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하면 이 광야의 삶에서 해방되어, 이 절망과 무의미의 삶에서 벗어나서 영원한 기쁨과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가 있겠습니까? 고도를 기다리는 사람들처럼 그저 적당히 먹고 마시고 즐기는 가운데 거기에 진정한 행복과 은혜의 삶이 있겠습니까?

거기에 대한 해답은 오늘 본문의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크게 두 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2.인간을 찾아오신 하나님

먼저 하나는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셔서 구원해 주실 그때에만 진정한 은혜와 행복의 삶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4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는 굳세게 하라, 두려워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수하시며 보복하여 주실 것이라 그가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는 말씀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바벨론 포로와 같은 세상속에서 좌절과 두려움과 참된 평강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인생에게 주님이 찾아오신다는 것입니다. 오셔서 어둠의 세력들을 물리쳐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좌절하고 고통스럽고 근심걱정하게 하는 모든 사단의 세력을 물리쳐주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때에 소경의 눈이 열리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저는 자는 일어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를 고통스럽게하는 모든 것이 물러가고 우리는 진정한 은혜와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는 우주 만물의 주관자이시며,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만이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외에는 다른 어느 누구도 해결할 자격도 능력도 없는 것입니다. 오직 천지의 주인이신 하나님만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이땅에 오신 것입니다.

인간의 불행의 근원인 죄와 사단의 권세에서 해방시켜 주시기 위하여, 그리하여 이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우리를 건져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 오신 것입니다.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부활하심으로 사망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안에 있는 자에게 진정한 생명과 평강과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먼저 이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잊지 말고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이 대강절넷째주일을 보내면서, 성탄절을 준비하면서, 그리고 이제 성찬식과 세례식에 참여하면서 먼저 이천년전에 이땅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해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끊임없이 거역하고 불순종하고 어리석고 미련함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은혜를 주시려고 기쁨을 주시려고 변함없이 찾아오시는 주님께 감사드리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우리를 찾아오셨을 때 비로소 구원의 길이 열리고, 은혜의 길이 열리고, 낙원으로 향하는 통로가 열리게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더욱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주님을 영접해야 할 인간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를 찾아오셨다는 사실과 더불어 우리가 진정한 은혜와 기쁨과 영광의 삶을 살기 위하여 또 한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셔서 우리를 찾아오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조건적으로 베풀어주신 은혜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해 놓으신 구원의 길이요, 생명의 길입니다.

그러나 그것과 더불어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을 우리는 어떻게 영접하느냐하는 문제입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다리를 만들어 주셨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그 다리를 건너가지 않으면 그 다리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진수성찬을 차려놓았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그것을 먹지 않으면 아무리 풍성한 진수성찬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십시다. 8절 말씀입니다. “거기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 바 되리니 깨끗지 못한 자는 지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된 것이라.” 무슨 말씀입니까? 광야와 같은 세상에 대로를 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거룩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거룩한 길을 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그 영광의 나라에서, 그 낙원과 같은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길을 누가 갈 수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누가 그 길을 통과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누구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깨끗지 못한자는 지나가지 못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만이 그 길을 통과할 수가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물론 말할 것도 없이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덧입어서 죄사함의 은총을 입은 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씻음을 받고 그래서 죄로부터 해방되어 깨끗하게 되어 질때에 우리는 그 거룩한 길을 건너가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문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대로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보내셔서 우리가 영원한 영광과 기쁨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의 행동만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결단만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찾아오셔서 유일한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것이냐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그분을 영접하고 그분을 믿음으로 그분의 보혈로 깨끗함을 받고 구속함을 받을 것이냐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다만 그분을 진실로 영접하고 믿고 따르기만 한다면 그 거룩한 길이, 그 영광의 나라가 우리의 것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얼마나 감격스런 일입니까?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무지로 말미암아, 어둠으로 말미암아, 완고함과 강퍅함과 고집스러움과 교만함으로 말미암아 이것을 모르는채 광야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알았습니다.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주님을 믿고 죄 사함의 은총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영원한 영광과 기쁨의 나라를 맛보며 또한 그 나라를 바라보며 살고 있습니다.

이 어찌 감사하지 않으수 있으며, 이 어찌 영광돌리지 않을 수 있으며, 이 어찌 찬양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이 어찌 감격하지 않을 수 있으며, 이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여러분, 주님이 오셨습니다. 이천년전에 이땅에 오셨습니다. 오셔서 자유와 평화와 기쁨과 생명을 주셨습니다.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향한 통로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지금도 변함없이 우리의 심령속에 가정속에 교회속에 끊임없이 찾아오셔서 기쁨과 은혜와 생명을 주시고 계십니다.

물론 아직은 영광의 나라가 완성된 것이 아니기에 힘이 들때도 있을 것입니다. 고통의 순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조차도 영광으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게 하실 것입니다.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게 영원한 기쁨과 안식과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그때에는 아무도 우리를 괴롭게하지 못할 것입니다. 오직 은혜만이 안식만이 영원한 영광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대강절 넷째주일을 보내면서 이러한 주님의 은혜를 다시 한번 되새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이 광야에 같은 세상에서, 죄와 사단의 권세에서 건지시어 참된 생명과 기쁨과 은혜가운데 살게 하시려고 이 땅에 오신 주님께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오직 주님께 소망을 두고 그 나라를 바라보며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 영광의 나라를 오늘 여기서 맛보며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려드리는 삶을 살아가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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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슬림을 위한 기도

 

 


중동지역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박해를 당하고 있으니

그들을 긍휼이 여기시고 그들에게 주님의 힘을 더하여 주시고

영적인 생명력이 강하게 일어나게 도와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주님을 전하는 그들에게 하나님과 진실한 교제가 이루어 질 수 있도록

도와 주시고 그들이 우리 주님을 열성을 가지 전하는 자들로 변화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중동에 있는 그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하시고

그 사랑을 전하는지 못하게 하는 일이 없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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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산 감사 기도

 

생명의 근원이신 사랑의 하나님, 감사합니다.

지금 여기 당신의 뜻에 따라 한 생명이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경축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아직 이름조차 지어지지 않은 이 아이의 생명 앞에서 우리는 그저 천지를 만드신 당신의 놀라운 손길을 느낄 뿐입니다. 이제 우리 가운데서 이 아이의 새로운 삶이 시작됩니다. 아직 스스로 설 수도 없고 자신의 뜻을 표현하지도 못하는 이 여린 생명을, 부모를 비롯한 모든 이들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보살피고 양육할 수 있도록 인도하소서.

 

 

생명을 보전하는 것보다 더한 사랑이 없음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앞으로 이 아이의 삶을 주님께서 주관하여 주옵소서. 그가 어떻게 자라나서 어떤 삶을 살아갈ㄹ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바라옵기는, 그가 부모를 통하여 생명을 물려받은 것처럼, 자신을 내어주어 다른 이들을 살리는 생명의 삶,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살게 하옵소서.

그것이 우리가 이 아이에게 하는 가장 큰 축복의 기도임을 믿습니다.

 

 

주여, 이 아이의 부모에게 지혜를 주옵소서. 표현할 수 없는 해산의 고통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그 고통을 통하여 새로운 생명이 태어났다는 것을 잊지 않게 하시고, 그 교훈을 마음에 담아 이 아이를 기르게 하옵소서. 오늘 한 생명이 우리에게 온 것에 감사하며 다시 한 번 이 아이와 부모를 축복하는 마음으로 기도드리오니, 이들의 삶을 주관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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