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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의 간증 ::  찰스 스펄전의 구원 간증

 

 

  

찰스 스펄전(Charles Spurgeon)은 1834년 6월 영국 남부의 에섹스주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집안은 1568년부터 찰스 스펄젼이 태어나던 때까지 12대를 걸쳐 전통적인 청교도 신앙을 지켜왔다.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청교도 목사였다. 이 때문인지 그의 부모들은 어릴 적부터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자녀들에게 심어 주기 위해서 대단한 관심을 가졌다.

 

당시 순회 설교자였던 찰스의 아버지는 어느 주일 아침에 자기 자녀들을 잘 돌보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사로잡혀 마음이 울적하였다. 자신을 정죄하는 이러한 생각을 못이긴 채 집으로 돌아온 찰스의 아버지는 그 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나는 큰 방에 아이들이 하나도 없는 것을 목격하고 깜짝 놀라 이층으로 올라갔다. 아내가 자녀들의 이름을 일일이 불러가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 특히 찰스의 순서가 되자 특별히 기도를 했다."

 

찰스 스펄전은 어렸을 때부터 천로역정 (Pilgrim's Progress)을 자주 읽었는데, 전 생애 동안 무려 100여 번이나 탐독했다고 한다. 6살 어릴 적에 목사관 2층의 어두침침한 방에서 천로역정의 복사판을 발견했는데, 그 책은 표지가 목판화로 되어 있었다. 아랫층으로 가지고 와, 밝은 불빛에서 바라본 표지의 그림을 잊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등에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주인공의 모습이 대단히 인상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 그는 7살부터 15살까지 콜체스터에서 교육을 받는 동안 청교도들이 쓴 책을 많이 읽었다. 박스터의 '비회심자에 대한 부르심 (call to the unconverted)', 제임스의 '갈급한 탐구자', '죄인에 대한 경고' 등이다. 찰스는 다른 학생들보다 정신 연령이 높아 조숙했다. 그래서 그는 존 번연의 '풍성한 은총(Grace abounding)'에 나오는 긴 문장들을 외웠다가 그의 친구들에게 즐겁게 들려주곤 하였다. 그러나 1850년 1월 6일 확실히 거듭남을 경험하기까지 그는 많은 내적인 방황과 고뇌를 겪었다.

 

"나는 젊었을 때, 약 5년간의 심히 괴로운 시기, 즉 암흑기를 지낸 일이 있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율법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 절실히 느끼고 있다면, 나는 그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나도 그와 같은 느낌을 가진 적이 있기 때문이다. 당시 나의 삶을 옆에서 지켜본 사람이라면 나에게서 인간적으로나 도덕적으로 , 어떤 죄를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불성실하고 부정직한 참담한 말을 하는 다른 소년들과 똑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자신을 살펴볼 때 그는 하나님을 거스리는 패역무도한 죄인이었다. 결국 그는 그 자신을 율법 가운데로 인도해 주는 모세를 만났다. 하나님의 선한 법 곧 십계명에 부딪히는 일이 자주 있었다. 십계명을 대하고 그것을 그에게 비추어 보았을 때, 지극히 거룩하신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나는 확실히 죄인임을 알게 되었다.

 

그 때 그의 마음은 빛을 잃은 태양과 같았고, 그가 지은 죄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만이 존재하는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뜨리고 말았다. 그는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성경 말씀을 찾아보았지만 이렇다 할 만한 해답을 받지 못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의 마음은 더욱 더 답답해갔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이 없었다. 여러 가지 이론을 꾸며 가며 그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을 가지려고 했지만 그 노력은 헛수고였으며,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특권은 그의 것이 될 수 없었다. 그는 확실히 복음을 깨닫지 못했다. 그는 너무도 답답해서 콜체스터의 모든 교회들을 찾아가 뭔가 해답을 얻기를 원했으나, 어떤 설교자도 그를 도와주지 못했다.

 

그 설교자들의 설교는 ‘어찌하면 구원을 얻을까?’ 하고 고민하고 있던 그에게는 결코 도움이 되질 않았다. 인간 행위의 열심만을 강조하는 내용들이었다. 설교가 끝날 때는 '좋은 말씀 잘 들었다' 하는 생각뿐이지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스펄전은 당시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을 수도 없이 들었지만, 여전히 주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이렇게 고민에 빠져 있던 스펄전에게 인생을 바꾸어 놓는 순간이 다가왔다. 1850년 1월 6일 , 우연히 들른 교회 예배당에서 어떤 사람의 설교를 듣고 구원을 받은 것이다.

스펄전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쓰고 있다.

 

"요즈음 그 때를 가끔 생각하는데, 만일 그 날 아침 그처럼 대단한 눈보라가 치지 않았더라면 난 지금까지도 암흑 속에서 헤매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날 아침 눈이 너무 많이 와서 길이 막혀 버렸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우리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보잘것없는 조그만 예배당에 들어가게 되었다. 예배당에는 20여명 채 못 되는 사람들이 앉아 있었으며, 목사도 나오지 않았다. 이윽고, 한 초라한 사람, 아마 양복점 직공이거나 구두 수선공처럼 보이는 이가 강단에 올라갔다. 그 사람의 설교는 처음부터 끝까지 성경 본문을 외어대는 것이었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준비된 원고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본문은 '땅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는 이사야 45장 22절이었는데, 그 사람은 그 본문을 제대로 읽지도 못하였다. 스펄전은 그 작고 초라한 예배당에서 평범한 사람의 설교에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친애하는 여러분! 이 말씀은 매우 간단합니다. 여기에 '앙망하라'고 하였습니다. 앙망한다는 것, 즉 바라본다고 하는 것은 결코 어렵거나 힘이 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보기 위해서 한 다리를 들거나, 손가락을 움직일 필요가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저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는 보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대학 같은 곳에 다니며 고등교육을 받을 필요도 없습니다. 어린 아이도 볼 수 있지요. 그런데 여러분은 모두 자기 자신만을 바라봅니다. 봐야 아무 소용도 없는 자기 자신을 바라본다고 자신의 문제가 해결됩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를 보십시요. 지금 당장 그를 바라보십시오!"

 

힘을 주어 말씀을 전하던 그 사람은 한 순간 숨을 돌리고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를 바라보라! 나는 십자기에 매달렸다. 나를 바라보라! 나는 핏방울을 떨어뜨리고 있다. 보라 ,나는 죽어 장사되었다 !! 나를 바라보라! 나는 다시 살아났다. 나는 승천했다. 나는 아버지 오른편에 앉아있다. 나를 바라보라! 오오~~ 나를 바라보라!! 그리스도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기까지 말하고 난 그 사람은 강당 바로 밑에 앉아 있던 스펄전을 바라보았다. 그는 스펄전을 향하여 "청년이여! 당신은 왜 그렇게 가련한 모습을 하고 있소? 라고 물었다. 스펄전은 무척 당황했다.

그 설교자의 한마디가 그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지금 이 시간에 성경 말씀에 순종하면 당신은 구원을 받을 수 있소!". 그리고 힘을 주어 그는 말했다.

"청년이여, 예수를 바라보시오! 지금 바라보시오!". 스펄전은 깜짝 놀라 자리에서 반쯤 일어났다. 그리고 그 순간 예수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그의 가슴에 꽉 차 있던 구름은 걷히고, 그의 영혼에 구원의 빛이 비추었다. 그는 진실로 그를 바라보았던 것이다. 그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감격에 넘쳐 구주의 귀하신 보혈과 단순하고도 명확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찬송하고 싶었다.

 

그토록 오랫동안 지고 왔던 죄의 무거운 짐이 바로 나의 어깨 위에서 영원히 굴러 떨어져 버렸을 때, 그는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 나오는 순례자와 같은 환희에 도취되었다.

"이제야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그는 어린아이처럼 마음껏 환호성을 지르고 싶었다.

 

"주님! 십자가에서 그 모든 것이 해결 됐었군요. 나의 그 무거웠던 죄가 모두 다…"

 

스펄전은 거듭남의 체험에 대해 "뉘우침의 포도주 통에서 짜낸 포도주는 실로 값진 것입니다. 회개의 광산에서 채굴한 금이야말로 정금인 것입니다. 깊은 고통의 동굴에서 발견된 그러한 진주들이야 말로 참으로 찬란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죄를 받고 자기의 목에 오랏줄이 묶여 있었던 자는 죄사함을 받고서 구세주의 보혈로 깨끗이 씻겨져 그 분의 영광을 위해 살게 될 때 기쁨의 눈물을 흘릴 사람인 것입니다."라고 했다.

 

1850년 1월 6일, 그는 확실히 구원을 받은 후 온 종일 성경을 읽었다.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자신의 거듭남이 확실하다는 것을 거듭 느꼈다. 부모님들의 완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스펄전은 1850년 어머니 생일날 침례를 받았다. 그는 자켓과 바지를 입은 그대로 물 속에 들어갔다. 물 속에서 나온 후, 그는 그의 마음에 여러 가지 공포들이 그 물 속에 잠긴 채 없어져 버렸다는 것을 느꼈다."

 

위에서 보았듯이 스펄전은 대단히 종교적인 집안에서 태어나 경건한 분위기 가운데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부정직한 다른 소년들과는 달리 경건하게 보이는 삶을 살았지만 그의 영혼은 여전히 거듭나지 못한 상태였다. 그는 거듭나기 위해 먼저는 사람들 보기에 경건해 보이는 삶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하나님의 거룩한 법 앞에서 심각한 죄인임을 깨달아야 했다.

 

 

이 거듭남은 스펄전처럼 나중에 하나님께 크게 쓰임받았던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일어났던 일이 결코 아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고 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될 하나님의 자녀라면 누구나 경험하는 것이다. 거듭나지 않고서는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주님의 말씀을 분명히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이와 같이 거듭남은 집안의 종교적인 배경이나 개인의 경건한 삶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는데 아무런 기여도 할 수 없고, 오직 자신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하나님 앞에서 심각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데서 출발한다.

 

스펄전이 이렇게 심각한 죄인임을 깨닫고 괴로워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로 하여금 구원의 기쁜 소식을 듣게 하셨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십자가에서 이루어 놓으신 완전한 사역을 의지하라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의 죄값을 치르기 위해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십자가에서 피 흘리게 하셨고, 바로 이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자신의 죄값이 모두다 지불되었다는 사실을 의지하는 자에게 바로 구원이 임하는 것이다. 구원받기 위해 내 편에서 기여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오직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나는 아무리 죄인일지라도 나의 죄값을 모두 지불하신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구원받게 된다. 이것이 바로 스펄전이 설교자로부터 “그리스도를 바라보라”는 외침을 들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에 비쳐주신 놀라운 구원의 메시지였다.

 

여러분은 자신이 죄인임을 분명히 깨닫고 나서 확실한 거듭남을 경험했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여러분의 구원을 위해 오직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만을 의지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구원을 위해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있습니까?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롬 5:9)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히 9:22)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 1:29)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요 19:30)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히 10:12)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히 10:18)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섬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엡 1:7)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벧전 1:18~19)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찌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출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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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 예배 대표 기도문

 

 

 

은혜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지난 5일 동안도 지극하신 사랑과 은혜 가운데 저희들을 축복하여 주시고
오늘밤 주님의 몸 된 교회로 다시 불러모아 주시고 주님을 만날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신 은혜에 온 몸과 마음을 다하여 감사 드립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이 자리에 나올 때마다 거룩하신 성령님 함께
하셔서 저의 00교회의 모든 주님의 백성들이 진정과 신령으로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 예배드릴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오늘밤 저희 00교회의 모든 성도님들이 금요철야 예배로
하나님 아버지께 찬양과 말씀과 기도로 영광드리고자 하오니
기뻐 열납하여 주시옵고,
특별히 이 자리에 이 모양 저 모양으로 함께 하지 못한 성도님들의
발걸음을 재촉하게 하옵시고 한 백성도 빠지지 않고 모두 모두 함께
모여 거룩하신 하나님아버지께 영광돌리는 데 혼신을 다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살아 계셔서 역사 하시는 거룩하신 성령님의 임재하심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밤 주님의 몸 된 00교회의 지체들이 거룩하신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힘입어 하나님의 전에 나왔지만,
참으로 저희들의 모습은 아름답지 못하고, 추악한 것들로 가득 차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나이다.
세상을 사는 동안 저희들의 중심에는 세상적 죄악과 주님의 십자가의
영광을 흐리게 하는 죄 많은 모습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물질적 욕심을 담고 제 주장만을 앞세우며 살아가는
저희 심령들을 긍률히 여기시고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죄 많은 저희들을 성령의 능력으로 강하게 붙들어 주셔서 기쁨과
은혜가 충만한 가운데 주님이 원하시는 길을 걷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아니하는 모든 세상적인 정욕의 고리를 끊어버리고,
저희를 위하여 스스로 피 흘리신 주님의 뜻을 따라,
이제는 저희들도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길을 따라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기도 제목마다 모두 해결되는 오늘 철야 기도가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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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의 삶 ]사람이 거듭난 결과는 무엇인가?

 

 

어쩌면 독자의 마음속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이 떠오를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자의 삶 속에서 무엇으로 이 거듭남의 여부를 알 수 있는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일곱 가지 정도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거듭남은 새로운 생명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 새로운 생명을 가리켜 우리는 "영생"이라고 부릅니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이 영생을 얻기까지는 아무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할 수 없다고 말씀드리는 것으로 충분할 것 같습니다. 영생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고 있으며,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써, 영생이라는 선물이 따라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안에(in Him)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는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 증거는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요일 5:11-12).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 속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만이 자신이 영생을 가지고 있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생명을 소유할 때만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갈 수가 있습니다(벧후 3:18). 영적인 생명이 없이는 성장이 있을 수 없고, 그리스도가 없이는 영적인 삶도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2. 거듭남은 새로운 본성, 곧 신의 성품을 받은 결과이다.

(1) 새로운 본성의 사실
성령께서는 영생을 소유한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하여, 인격적으로 각 신자 개인적으로 내주하실 뿐 아니라, 이전에는 결코 소유할 수 없었던 새로운 본성을 또한 주심으로써,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신의 성품의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벧후 1:4). 이렇듯 성령님과 새로운 성품은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또한 서로 전혀 다릅니다. 이 새로운 본성에 능력을 덧입히시는 분은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의 성품을 소유함으로써, 신자는 이제 하나님께 속한 영적인 실제를 이해하고, 맛보며, 또한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신자는 기도하고, 찬양하고, 또한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자 하는 욕구를 자연스럽게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신자에게서 "육"이라고 부르는 옛 본성 혹은 천연적인 생명을 제거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신자가 이 땅에서 사는 동안은 결코 그것을 뿌리 뽑지 않으십니다. 성경이 분명히 가르치는 바는 거듭난 사람은 누구나 다 그 속에 두 가지 독특하고, 서로 대립되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여전히 하나님을 대적하는 "육"이라고 불리는 옛 본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 육은 개선되거나, 또는 개선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선을 행하는 일에 무능력합니다. 신자는 영생을 소유함으로써, 이제 "영"으로 불리는 새로운 본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늘 하나님 편에 서며, 악을 행하는데 무능력합니다.

(2) 두 본성, 곧 육과 영의 충돌과 대립
이러한 두 본성의 소유로 인해 피할 수 없는 싸움이 신자 속에 있게 됩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7). 육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며, 하나님께 속한 일에 대한 욕구나 마음이 없습니다. 만일 조금이라도 기회가 주어지게 되면, 신자의 삶 속에서 이기적인 마음과 시기와 게으름과 세상적인 마음과 못된 성질과 악한 생각과 나쁘게 말하는 버릇과 깨끗지 못한 삶과 그밖에 "육체의 일"이 그 특징을 이루는 온갖 더러운 일들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됩니다(갈 5:19-21). 한편 새로운 본성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와 그리스도께 대한 헌신과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과 주를 위한 봉사와 그리스도를 전파함과 찬양과 예배와 선한 행위 등을 추구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갈 5:22-23).

이러한 두 가지 본성과 서로 다른 욕구에 대한 사실이 닭장에 오리와 암탉의 알을 서로 섞어서 부화시키는 과정을 통해 설명할 수 있습니다. 병아리들은 어미 닭 가까이 있고자 하지만, 새끼 오리들은 어미 닭이 큰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도, 떨어져서 가까운 개울에서 자기들끼리 노는 기회로 삼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어미 닭 편에서는 자기 새끼들이 이러한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본성이 무엇인지에 대해 잘 설명해주는 하나의 사례입니다. 오리는 본성적으로 물을 좋아하며, 따라서 그 본성적으로 좋아하는 것을 떠나도록 강요하는 암탉의 모든 소리에 대해 전적으로 반응하지 못합니다. 자신들이 거듭났음에도 이와 유사한 곤경에 빠지는 경험을 하게 된 어린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자신이 두 가지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거듭났기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육신 문제로 어려움을 당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아, 여전히 악이 함께 있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바로 그 동일한 것을 발견하게 되었고, 자신의 경험을 로마서 7장 15-25절에 기록했던 것입니다.

 

 

(3) 육신의 지배로부터 건지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
거듭난 사람은 이처럼 두 가지 본성을 소유하고 있으며, 이 둘이 서로 대적하고 있다는 사실을 살펴보았으므로,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이 세상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길 수 있습니다. 몇 가지를 살펴보면서, 이에 대해 가능한 간결하게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a) 우선 첫 번째로, 신자는 이렇듯 존재하고 있는 상황에 정직하게 직면해야 합니다. 이에 대해 눈을 감아 버리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반드시 하나님이 이 모든 일에 대해 말씀하신 바를 알아야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영적인 사실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영적인 어둠 가운데서 방황하면서 혼돈 가운데 빠져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자신의 구원까지 의심하게 되는데, 이는 전적으로 불가능한 일인 육신을 개선시키고, 또한 훈련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노력하지만 늘 실패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오리를 훈련시켜서 본성적으로 좋아하는 물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하려고 하는 일과 같습니다.

다시 한번 우리에게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이 두 본성은 서로 섞일 수 없으며, 서로 혼합되는 일 없이 별개로 영원히 남아 있습니다. 육은 오직 악 외에 아무 것도 낼 수 없습니다. 영은 오직 선 외에는 아무 것도 낼 수 없습니다. 육은 그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그 성격이 개선되거나, 하나님의 뜻을 기뻐하도록 훈련되지도 않습니다. 육은 부패하여 고칠 수 없으며, 계속해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b) 두 번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육신에게서 조금의 선도 기대하지 않으시며, 전적으로 정죄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죄(sin)"와 "죄들(sins)"의 차이점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 속에 있는 이 악한 원칙, 혹은 본성을 가리켜 "죄"로, 또 그 죄의 열매는 "죄들"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요한일서 1:8-9에서 선명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만일 우리가 죄(sin: 여기서 죄는 우리가 '육'이라고 부르는 죄악된 본성과 동의어로 사용되었음)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그리고 9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sins)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sins)를 사하시며." 하나님은 악한 본성의 열매인 죄들을 값없이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본성의 뿌리에 해당하는 죄는 용서된 것이 아닙니다. 이 악한 본성에 대해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유일한 한 가지 일이 있다면, 그것은 곧 정죄하시는 일입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는 어떤 사람이 시기하며 질투하기를 잘하는 기질로 인해 악한 말로 우리를 비방하고 욕하는 것은 용서하고, 또 용서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것을 일으킨 질투나 시기는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질투와 시기는 그러한 열매에 해당되는 죄악된 말을 내뱉도록 한 죄의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악한 뿌리에 대해서 다만 정죄할 수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로마서 8장 3절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보게 됩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죄)하사(죄에 대한 희생 제사를 통해서)."

이것을 간단하게 말씀드리자면,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행한 것들(우리 죄들)을 위해서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우리의 죄악된 성품)을 위해서도 죽으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범한 죄들을 없애 주셨을 뿐 아니라, 우리가 타락해 있던 상태, 또는 타락한 인류로서 연관된 우리 자신을 없애기 위해서도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 거룩한 대속주의 죽으심을 우리 자신의 죽음으로 보시고,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보실 때, 대속주 되신 예수님 안에서 모두 죽은 자로 여기십니다. 과거에 육신과 관계되었던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십자가에서 끝난 존재들입니다. 육신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미 정죄되었습니다.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롬 6:6). 하나님은 이제 그리스도인들을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장사지낸 바 되었으며, 다시 살아난 자로 여기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새 생명으로 연결된 자들로 보십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부르는 것입니다(고후 5:17).

(c) 세 번째, 신자는 하나님이 보시고 여기시는 대로,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기는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신자는 하나님이 십자가의 역사로 전적으로 무익하고, 개선의 여지가 없었던 "육신에 죄를 정죄하신" 사실을 보아야 합니다. 신자는 이제 하나님 편에 서서, 함께 육신을 정죄하며, 육신에게서 조금의 선도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신자는 하나님이 보시고 여기시는 대로 따르며, 하나님의 말씀의 권면을 좇아야 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롬 6:11).

이것은 느낌의 문제가 아니라, 실제적인 사실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참된 것이지만, 경험적으로 느낄 수는 없습니다. 신자는 하나님이 그에 대해 말씀하신 것을 사실로 단순히 받아들이고, 죄에 대하여는 자신을 죽은 자로 여겨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대하여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주로 말미암아 산 자로 여겨야 합니다. 

신자 속에 있는 육이 발동하거나 외부로부터 어떤 유혹에 반응하게 될 때, 하나님의 자녀는 우리에 대해 하나님이 보시고 여기시는 이 사실을 지속적으로 확인하고 주장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자는 어떤 죄나, 혹은 생각이나 말이나 행위에 대해서 "나는 나의 대속주 되신 주님 안에서 이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기노라", 또는 "이 악한 마음의 갈망은 육에 속한 것이고, 이 육은 이미 정죄되었고, 또한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이미 하나님 앞에서 끝장이 났다. 하나님은 나를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로 여기신다. 그러므로 나도 이 악한 정욕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기노라"고 주장해야 합니다. 이러한 태도가 계속해서 끊임없이 유지되는 한, 신자 속에 거하시는 성령님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다스리시기 위하여 새로운 본성에 능력을 더해 주심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 속에 내주하셔서 능력을 주시고,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성령님은 우리의 잘못된 행위로 인해서 근심하시며, 우리가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알고도 불순종하게 될 때, 소멸될 수도 있고, 우리의 불신앙으로 인해 성령님의 역사가 제한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엡 4:30, 살전 5:19, 시 78:41). 이 일은 결국 신자가 그리스도와의 교통을 상실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이러한 교통을 상실케 하고, 성령님을 근심케 한 죄가 정직하게 자백이 되고, 그 죄로부터 돌아서기까지는 이러한 교통은 회복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신자는 "가능한 하나님과 친밀히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일단 자신이 죄를 범했다는 것을 깨달았으면, 즉각 회복을 위해 기도하며 마음의 변화를 받도록 해야 하며, 그러할 때, 하나님과의 교통이 유지되는 것입니다. 내주하시는 성령님이 근심하시며, 소멸되거나, 또는 제한 받으신다는 사실이 물론 신자의 영원한 안전에는 조금도 영향을 미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이 신자를 "구속의 날까지" 인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신자가 연합하는 일이 있고, 또 이 연합을 유지하는 일이 있으며, 이러한 하나님과의 연합의 기쁨을 가리켜 "교통(communion)"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d) 네 번째로, 하나님의 자녀는 육신 안에 그 무엇도 확신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결연히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빌 3:3) 성경적인 하나님과의 사귐 가운데 자신의 위치를 지켜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육에 대해 판단하신 것이 또한 자신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육은 다양한 모습으로 변장하고 나타나는 성질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엡 4:22). 나쁘고 못된 성질이 "의로운 분노"라고 하는 그럴듯한 명분의 옷을 입을 수 있습니다. 남의 흠을 잡는 못된 버릇도 "솔직하고 정직한" 때문이라는 그럴듯한 구실을 댈 수가 있습니다. 육신은 참으로 우리의 가장 거룩한 순간에도 침투해 들어오곤 합니다. 따라서 신자는 지속적으로 이에 대한 대비를 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이 부패한 본성의 유혹의 욕심에 이끌려 잘못된 길로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경각심을 갖고, 은연중에 자신을 너무 확신하는데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e) 다섯 번째로, 신자는 그 악한 정욕을 만족시키는 일에 대해 조금이라도 개입하거나 혹은 그러한 곳에 빠질 수 있는 상황을 허락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합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4). 육신은 반드시 굶주리도록 해야 하며, 억제시키고, 지속적으로 죽음에 위치에 있도록 해야 합니다. 새로운 본성은 반드시 먹이고, 격려해야 하며, 또한 개발해야 합니다. 육신은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달라고 외치며, 또한 먹여달라고 아우성을 칠 것입니다. 육신은 그 유혹의 욕심을 만족시킬 만한 책을 읽기를 원하고, 어떤 장소에 가고 싶어하며, 볼거리를 찾고, 그에 대해 생각하고, 또 행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를 위한 그 어떤 일도 해서는 안됩니다. 어떤 죄악된 생각을 품거나, 문제가 될 만한 습관에 빠지는 것은 단지 육신으로 하여금 우리의 영적인 삶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고,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일에 육체의 정욕에 힘을 실어줄 뿐입니다(벧전 2:11).

예를 들어, 신자가 어떤 류의 책을 읽게 되면 육신의 악한 정욕에 불을 붙이게 되기 때문에, 그 책 읽기를 그만두어야 합니다. 그런데 만일 그 책 읽기를 고집한다면, 결국에는 육신이 활개를 치고 활동할 수 있는 여지를 준 자신을 정죄하는데 빠지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이러한 원칙을 우리가 듣고, 보고, 또한 생각하는 모든 일에 적용해보면, "육신을 만족시키는 일이 없으면, 욕심은 그것으로 끝난다"고 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 분명해질 것입니다.

신자는 육신을 만족시키는 일이 없어야 할 뿐 아니라, 성령님을 위한 일에는 최선을 다해 굳세고 적극적으로 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거듭난 갓난아기는 "순전하고 신령한 (말씀의) 젖을 사모"해야 합니다(벧전 2:2). 이는 이로 말미암아 자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연구함으로써, 새로운 본성은 양식을 얻게 되며, 힘을 얻고, 또한 발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개인 신앙을 고취시키는 찬송과 예배와 기도는 다 신자의 신령한 삶의 큰 부분을 형성하도록 도울 뿐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기는 삶에 크게 기여하게 됩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신성한 본성은 함양이 되고, 그리스도인은 결과적으로 자신의 구주와 주님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게 되는 것입니다(벧후 3:18).

(f) 여섯 번째로, 그리스도인은 결연히 육신을 부인해야 하며, 악한 소욕을 자극할 만한 그 어떤 일도 허락해서는 안되며, 온전히 거절해야 합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 2:11). 하나님은 신자들에게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라고 권면하시며, 또한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라고 말씀하십니다(딛 2:12). 이것은 단순히 우리가 알고 있는 죄로부터 단호히 돌아서도록 또다른 방식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육신의 통제 아래서 살 수도 있다는 것은 참으로 끔찍한 일입니다. 그러한 사람을 성경에서는 "육신에 속한 자" 또는 "신령하지 못한 자"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고전 3:1-4 참조). 때때로 이러한 육신적인 모습이 너무 강할 때, 이러한 육신적인 신자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과 아무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다음과 같은 주님의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 26:41). 평안을 얻기 위해 지불해야 할 값은 지속적으로 경계하고 또 경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신자들은 지속적으로 깨어 경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신자는 자신의 마땅한 권리인 마음을 즐겁게 하고자 하는 모든 생각과 읽고자 하는 책들과 하고자 하는 말과 모든 행위에 대해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면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자기 훈련은 자연스럽게 그 모습을 표현하기를 좋아하는 육신이 좋아할 리 없지만, 풍성한 영적인 삶을 누리고자 한다면 이것은 꼭 필요한 일입니다.

존 웨슬리의 어머니가 그 유명한 아들에게 다음과 같이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는 지혜롭고 경건한 충고를 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합당한 오락인지 그 여부를 판단하고자 할 때, 이러한 원칙을 따라서 판단하도록 해라. 너의 판단력을 흐리게 한다든지, 너의 양심을 무디게 한다든지, 영적인 것에 대한 맛을 잃도록 한다든지, 하나님을 의식하는 감각을 흐리게 한다든지, 또는 네 육체(몸)가 네 마음(정신)을 주장하도록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죄라고 하는 사실을 잊지 말아라." 다니엘은 그가 행한 일로 인해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단 1:8)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일은 자아와 죄와 사탄에 대해 지속적으로 "안돼(No)!"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 정욕이 자기 삶을 주장하지 못하도록 결연히 부인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g) 마지막으로 신자는 자기 몸을 산 제사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몸은 그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이 정하신 도구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난 자들은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말씀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또한 로마서 6장 13절도 보시기 바랍니다.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이것은 단순히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기 몸과 그 몸의 모든 지체를 합당하게 사용해야 한다는 뜻이며, 손과 귀와 눈과 발과 입 등을 지극히 귀하고 귀한 보혈로 자신을 사신 주님의 처분에 완전히 맡겨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하게 되면, 기쁨이 충만하고 하나님과의 생생한 교통이 이루어지고, 거룩한 삶을 살게 되며, 하나님께 유용한 사람으로 사는 삶이 뒤따르게 될 것입니다.

다음 이야기는 지독하게 악한 삶을 살았지만 극적으로 거듭나게 된 어떤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구세군에 들어가서, 그 입고 있는 빨간 스웨터 앞에 "피와 불"이라고 써서 다녔습니다. 그에게 이 단어들은 자기 삶 속에 일어난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내는데 불충분해 보였습니다. 어느 날 그는 길을 가다가 어떤 건물에 걸려있는 간판을 보고는 한 가지 아이디어를 떠올렸습니다. 그래서 자기 아내에게 가서, 이 간판의 문구를 노란색 글자로 크게, 자신이 입고 있는 빨간 스웨터에 수를 놓아 달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 그는 큰 거리로 나갔는데, 그 가슴에는 다음과 같은 글자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새로운 경영진이 경영관리 중." 이것은 거듭난 사람들을 얼마나 잘 표현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는 이제 자기 삶의 주님이 되시고, 성령님은 내주 하심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도록 능력을 주시며, 이를 통해 자기 동료들에게 축복이 되도록 하십니다.

다음과 같은 권면이 우리 모두의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곧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거룩한 희생 제사를 드린 때문이라.
영과 혼과 몸, 모두가 다 주의 것이니
자기 것으로 영광 돌리시려
그 거룩한 보좌를 삼으시리라!

따라서 모든 신자들은 다음과 같이 화답해야 할 줄로 압니다.

나의 것이 아니네, 오 주님,
내 가진 모든 것, 당신의 소유입니다.
내 모든 것 다 주께 드리니
주께서 온전히 다스리시옵소서.
주께서 나를 통하여 역사하심으로
의로운 삶으로,
봉사의 삶으로 기쁨의 삶으로, 또한 자유의 삶으로,
주께서 영광 받으시옵소서.

우리는 여기까지 공부해 오는데 많은 시간을 드렸지만, 신자 속에 두 가지 본성이 있는 것과 또한 위로부터 거듭난 모든 사람을 위해 하나님이 예비하신 죄의 권세와 통치로부터 구출을 받는 방법 등에 대한 성경적인 가르침을 분명히 하는데 꼭 필요한 일이었다고 확신하는 바입니다.

출처 크리스챤투게더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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