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절기예배 설교 <십자가> 어떤 십자가를 지고 가십니까?

 

 


(막15:16-32)


  “아무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마 16:24). 십자가와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예배의 주제입니다. 모든 정상적인 목회자들은 모두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릅니다. 그러나 목회자마다 십자가를 지는 느낌은 다릅니다. 십자가에 대한 나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1. 억지로 지는 십자가(막15:16-25).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서 와서 지나가는데 저희가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에 이르러”(막15:21-22).

 

  구레네 사람 시몬은 예수를 대신하여 얼마동안 십자가를 "억지로" 짊어져야 했습니다. 군인들의 창과 칼 앞에 자존심을 다 구기고 마지못해 십자가를 졌습니다.   이날은 시몬에게 "개 같은 날의 오후"며 재수 없는 날이었습니다. 십자가는 시몬에게 원치 않았던 굴욕이요,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며, 빨리 던져버려야 속이 시원한 불편한 짐이었으며 그가 비방하고 조롱한 형벌에 불과했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의 위협에 시달리다 더 버티면 어쩐지 뒤끝이 좋을 것 같지 않다는 느낌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은 아닐까요? “이보게나, 내가 피 흘려 산 교회를 위해 그렇게 불평과 원망의 느낌을 가지고 십자가를 짊어져야 한다면 이제 그만 내려놓게나. 내 마음이 편치 않네.”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마16:24). 십자가의 감격을 회복하도록 주님, 도우소서! 십자가를 하나 더 얹어주실지라도 기꺼이 지고 갈 수 있도록 우리 마음을 십자가의 은혜로 채워주소서!

 


  2. 마취제를 거절한 십자가(막15:22-25).

 


  “내가 목마르다!” 예수의 외침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십자가를 지는 삶에는 목마름과 고통이 있습니다. 갈증이 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고통과 갈증을 면하기 위해 마취제 같은 쓸개 탄 즙은 거절하셨습니다. 우리들이 목회자가 되어 한 없이 양보하고,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려 할 때 고통과 목마름을 느낍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피곤해지는 순간이 있으며, 좌절을 겪기도 합니다. 하나님, 십자가의 목마름을 성스러운 목마름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우소서! 이런 저런 목마름을 환영하는 모습으로 살 수 있도록 도우소서!  

  예수님께는 십자가의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있으나 쓸개 탄 마취제를 거절하심으로 온 몸 그대로 고통을 느꼈습니다. 비통한 희롱과 조롱, 외면이 주는 정신적 고통도 감수했고 무서운 저주도 온 몸과 영으로 받았습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고 갈보리로 향하는 가파르게 보이는 해골의 언덕을 오를 때 사람들이 제공할 고마운 마취제를 고대하며 십자가를 등에 지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위로인 마취제가 필요 없었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눅23:34). 하나님, 사람들의 비난과 비평에 몸서리치고 있는 저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소서!

  주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조롱하는 자들이나 죽을 준비가 되었다고 큰소리치고는 잽싸게 달아나 버린 제자들을 향한 원망의 느낌, 버림받았다는 서러움의 느낌을 못 박아 버렸기에 마취제를 거절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자기 연민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렸기 때문에 마취제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길 원했습니다. 십자가를 하나님의 축복으로 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여, 우리들을 축복하소서! 십자가를 하나님의 위로며 영광으로 들어가는 감격으로 받을 수 있도록 도우소서! 

 


3. 죽어야 사는 십자가(막15:30-32).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면 믿겠다”고 했으나 주님은 십자가에서 내려 올 수 없었습니다. 우리들의 구원을 “다 이루었다”고 선언할 때까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도록 막고 있던 휘장을 하나님께서 친히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버리심으로 구원의 새롭고 산 길 을 열어 놓으시기까지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내려 올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오직 죽어서야 십자가에서 내려 왔습니다. 저주를 받은 뒤에야 내려 왔습니다. 우리들의 구원을 완성한 뒤에 내려 오셨습니다!

“주님 오늘도 제 몸은 당신께 드리는 희생제물입니다. 명령을 기다립니다.”

  서 아프리카 선교사로 사역했던 테일러 스미스의 기도입니다. 이 기도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오늘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죽을 각오가 되어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들은 교회 사임을 생각하고 있을 지 모릅니다. 우리들은 교회사역을 그만 둘 적절한 타이밍을 찾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린 애써 기도하며 개척했던 사역지를 떠나려는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왜 우리들은 사명을 중단하려는 것일까요? 왜 우리는 더 이상 헌신을 하지 않으려는 것일까요? 죽기살기로 헌신하더니 10년도 못 채우고 사역지를 떠나려는 것일까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갈5:24).

  성령님께서 나에게 물으십니다. "육신적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는가? 세상에 대해 죽었는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지고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길 원하는가?"(고후 4:10)  "아닙니다. 성령님, 내 자존심 때문에 더 이상 목회 못하겠습니다." 성령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죽어야 그리스도가 나타난다네. 네 자존심이 죽고, 네 욕심이 죽어야 교회가 살지 않겠나!"

   

  지금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 있다면?  ‘사람들의 칭찬, 명예, 자존심, 대우’에 대해서 전보다는 더 적게 관심을 기울일 것입니다. 우리는 욕심에 대해 죽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우리들에게 좋게 말하느냐 아니냐가 우리들의 헌신의 질을 결정할 만큼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죽는 순간에 이르면 우리가 하나님의 뜻과 무관하게 열심히 추구하던 것이 별 의미가 없게 됩니다. 죽음의 자리에선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들이 다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혹독한 비판에 대해 죽은 자입니까? 사람들의 불친절에 대해 죽은 자입니까? 오늘도 나 자신을 향해 죽고 하나님의 영광과 목적을 위해 살려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인준하지 않으신 욕심에 대해 죽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죽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열매 맺기 위함입니다.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십자가에서 자아를 단호히 처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진가(眞價)를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게 함이니”(빌3:8-9). 오늘도 십자가를 지는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타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4:10).  하나님, 죽은 줄로만 알았던 내가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조금만 실망해도 분노가 치밀고, 조금만 나의 지도력이 손상 당해도 견딜 수 없어하는 나를 철저히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 주십시오! 내 눈물은 주님을 위한 눈물이 아니라 서러워서, 속상해서, 억울해서 흘리는 눈물 뿐이니, 주여 이 상한 마음마저도 십자가를 못 박을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4. 당돌한 십자가(막 15:42-47; 요 19:38-42)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taking courage)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귀한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요셉이 세마포를 사고 예수를 내려다가 이것으로 싸서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어두고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으매.”(막15:42-47)

 


  하나님의 아들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제자들은 모두 달아났습니다. 예수님은 실패자처럼 보입니다. 아무도 예수님 편에 서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십자가 주변에는 그 당시에 아무런 사회적 권리나 힘이 없는 여성들만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실패한 것처럼 보이는 순간이요, 실패자의 자리에 나서서 자신이 예수의 제자라며 밝히며 예수님의 시신을 수습해 가겠다고 한 사람이 아리마대 요셉입니다. 그는 주변에 믿는 사람처럼 보이는 이들이 없고, 믿는 사람들이 다 넘어진 것 같을 때 실망하지 않고 나서서 당돌히 십자가를 졌습니다. 억지로가 아닙니다. 마지못하여 십자가를 찾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용기있는 태도로 십자가를 졌습니다.

 

  요셉을 당돌하다고 표현한 이유는 그가 한 행동은 홀로 죄악에 맞서는 용기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반역자의 신분으로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반역자의 시신은 가족들도 가져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요구한 것은 스스로 반역자의 제자라고 공개하는 일이므로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모든 것을 잃을지라도 예수의 제자임을 밝힌 신앙이 바로 빌라도와 세상이 볼 때 당돌한 신앙이고, 하나님이 보실 때 용기 있는 신앙입니다.  “반역자로 몰아가도 좋다. 아니 예수는 반역자가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죄 없는 아들이심을 내가 믿는다. 빌라도 당신도 예수가 무죄라는 것을 알지 않는가!”라는 담대함이 이 시신을 달라는 요구에 담겨있었습니다.

 


  요셉이 용기있게 십자가를 지는 태도는 다른 사람에게 거룩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일찍 예수께 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온지라”(요 19:39). 자신의 신분 노출을 두려워해서 밤중에 찾아왔던 니고데모, 예수님이 비난당할 때 드러내 놓고 변호하지 못했던 니고데모, 드디어 그도 요셉을 보고 힘을 얻었습니다. 당당히 자신이 예수의 제자임을, 예수를 사랑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동료를 보고 용기를 얻었습니다. 니고데모는 장례를 치르기 위해 100근이나 되는 값비싼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가지고 왔는데 이 양은 왕족의 장례를 치를 때에 사용하는 만큼의 많은 분량입니다. 내가 용기있게 십자가를 지고가는 삶이 어둠 속에서 자신들의 존재를 감추고 살아가는 수많은 니고데모들이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와 당당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주게 되도록 도와주소서! 

 

  5. 자랑의 십자가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갈6:14).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아무 것도 자랑하지 않고 사신 분 중에 최초의 미국 침레교 선교사 아도니람 저드슨이 있습니다. 그는 미얀마에서 7년 동안 열심히 사역했지만 7년이 지나도록 예수 믿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주변의 냉대 속에서 자신의 사랑하는 아내마저 병으로 잃었습니다. 자기 아내를 묻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친한 친구가 이렇게 위로했습니다.

“여보게 저드슨 형제, 너무 낙심치 말게나.”

그러자 저드슨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낙심이라고? 예수 안에서 소망은 태양처럼 빛나고 있다네!”  

  25년의 세월이 흘러 저드슨은 미국으로 돌아 왔습니다. 지금까지는 선교하면 영국이 대표였습니다. 미국이 아직 선교에 미약할 때였는데 위대한 사역을 마친 저드슨이 돌아오자 전 미국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를 환영하고 그의 보고하는 자리에 몰려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선교사의 입에서 나올 흥미진진한 선교 이야기들을 듣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데 저드슨 선교사는 첫째 날 우리 죄인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설교했습니다. “역시 하나님의 사람이구나”하고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둘째 날은 저드슨이 번역한 미얀마-영어 사전과 미얀마 번역성경에 대한 이야기도 듣고 싶어했습니다. 또 7년 동안 열매가 없다가 그 후 20여 년 동안 3,000명이 넘는 미얀마 원주민들을 예수님 앞으로 인도하고 침례를 베푼 영웅적인 이야기를 듣고 싶어했습니다. 또 감옥에 끌려가서 죽을 뻔한 고비를 수없이 넘긴 일화도 자세히 알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나 저드슨은 둘째 날도 예수 그리스도만 이야기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사 53:5). 사람들은 셋째 날엔 틀림없이 선교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셋째 날에는 죄의 권세를 깨치시고 부활의 능력으로 오늘도 우리 속에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해 말씀했습니다. 그러자 사회를 보던 목사님이 기다리다 못해 안타까워서 말했습니다.

“저드슨 선교사님, 성도들은 오늘 다른 설교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이야기 말고 선교사님이 겪으신 재미있고 극적인 이야기를 좀 해주십시오. 또 선교사님이 회중교회 선교사의 신분으로 출발했다가 배를 타고 가면서 성경공부를 하는 중에 왜 침례교회 선교사로 바뀌었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에게 이야길 들려주십쇼”라고 부탁드렸습니다.

그러나 저드슨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저에게는 저 영광의 보좌를 버리고 나를 위해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우리 주님 이야기보다 더 재미있고 더 감격스러운 이야기는 없습니다.”  

 

  저 영광의 보좌를 버리고 세상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우리 주님을 이야기하는 것이 가장 감격스럽습니까? 자랑의 십자가가 우리 마음을 꽉 채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십시다. 하늘에서 드리는 예배의 중심도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계 5:12). 아멘!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합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합시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니라”(고전2:2). 아멘.

 

  어떤 십자가를 지고 부활의 주님에게 나아가겠습니까?   (김택수 목사)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라이프TV

라이프 TV는 삶과 꿈과 희망을 이야기 하는 곳입니다.

,
반응형


7월 구역예배 대표 기도문

 

 


사랑의 하나님.

무더운 여름 가운데 건강하게 지켜주시고,

이렇게 구역예배로 모여 예배 드릴 수 있게 하심에 감사합니다.

 

주님 일주일동안의 우리의 삶을 돌아 볼 때

기도하지 못하고 말씀 보지 못하였던 모습을 돌아보며 용서를 구합니다.

또한 예수님을 믿으면서 정직하지 못하고 성실하지 못한 모습으로

믿지 않는 이가 복음을 받아들이는데 방해 한 것이 있다면 주님 용서 하여 주옵소서.

 

주님 우리가 주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가 깨끗하여 졌고, 천국으로 향하는 은혜의 열차를 타게 되었습니다.

내가 잘해서,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선물로 주신 은혜이고 사랑입니다.

이 넘치는 주의 은혜와 사랑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전할 수 있는 우리 구역이 되게 하옵소서.

 

오늘 주실 말씀을 통해 은혜 받게 하시고,

말씀을 통해 주의 뜻을 깨닫고 감사함으로 일주일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무더운 여름 건강하게 지켜주시길 소망하오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라이프TV

라이프 TV는 삶과 꿈과 희망을 이야기 하는 곳입니다.

,
반응형

 [오늘의 기도] 십자가의 진정한 가치를 알게 하소서   

 

 


사랑의 하나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십자가가 너무 무겁고
힘들다고 불평을 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왜 내가 더 무거운
짐을 져야 하는지 억울해 합니다.
유독, 나만이 겪어야 할 고난의 무게가
큰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
예수님이 지신 그 십자가는
우리의 고집과 탐욕과 교만 등,
인간의 모든 죄악을 다 짊어지고 가신 길이셨기에
너무나 힘들고 무거운 고난의 결정체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 길을 가고자 한다면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야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 십자가는 우리의 교만이 부른 고통이며
우리의 탐욕이 부른 아픔이며
우리의 아집이 부른 힘듦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우리는 너무나 쉽게 그 골고다의 십자가를 지려 합니다.
만약 우리가 눈물과 아픔 없이 십자가를 지려 한다면,
만약 우리가 영광과 승리만이 존재하는 십자가를 지려 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가치의 십자가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자신의 십자가를 온전히 감당할 때,
눈물과 아픔이 영광과 승리와 함께 할 때
십자가는 비로소 그 가치를 진정으로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오늘도 십자가의 진정한 가치를 따라 애쓰며 수고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라이프TV

라이프 TV는 삶과 꿈과 희망을 이야기 하는 곳입니다.

,
반응형

 

[은혜의 설교] 그리스도인을 향한 경고

 
 

 

그리스도인을 향한 경고
 
마태복음 21장 18∼22절, 마가복음 11장 12∼14절

희극 ‘늘근 도둑 이야기’가 서울 대학로 극장에서 22년째 장기공연 중이라고 한다. 도둑이 젊은 형사 앞에서 선한 사람임을 나타내기 위해 나무 십자가와 성경, 찬송가를 꺼내 들고 자신을 변호하는가 하면 극중 인물이 방언 기도를 흉내 내며 신실한 크리스천인 것처럼 행동하면서 웃기는 내용이다. 이 연극을 보노라면 주님의 질타가 전해진다. 오늘 본문 말씀 속에 숨겨져 있는 세 가지 주님의 음성 또는 경고를 들어보자.

먼저, 나무에서 열매를 찾으셨다.

예수님은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시기에 열매를 찾으셨다. 무화과나무는 3월에 싹이 나서 6월께 열매를 맺는다. 예수님이 나무에서 열매를 찾으셨을 때는 4월께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나무에서 열매를 찾으셨다. 예수님 재림의 시기를 암시한 대목이 아닐까 싶다. 때가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주님이 의도적으로 나무에서 열매를 찾으시고 열매 없는 나무를 저주하셨다. 그리고 그 나무는 결국 뿌리까지 말라 죽게 되었다. 이 대목에 눈을 크게 뜨고 볼 수 있어야 한다. “너희는 그날과 그때를 알 수 없으나”(마 25:13) “도적과 같이 이르리니”(벧후 3:10) “준비하고 있으라” “예비하고 있으라”(마 25:1∼13)는 경고의 메시지처럼 들린다.

안일한 신앙생활을 경계해야 한다. 오락과 향락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며 겨우 주일을 지키는 종교인은 아닌지, 바쁘다는 핑계로 현실에 안주하는 종교인은 아닌지 점검해야 한다.

두 번째로, 잎만 무성했다.

나무는 유대인을 풍자적으로 비유한 대목일 것이다. 껍데기 신앙, 외식적인 신앙, 외모지상주의를 지적한 내용일 것이다. 그런데 이 비유는 지금의 그리스도인에게도 적용된다.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함에도 주님의 말씀은 간 곳 없고, 오직 그리스도인의 화려함만 보이는 것 같다. 소위 명품족이 교회 안에서까지 힘을 편다는 소리까지 들리고 있다.

물론 그리스도인이 하늘 복을 받아 땅에서도 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창 1:28)은 맞다. 그러나 자신을 내세우며 차별화하려고 화려함을 추구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하나님이 주신 건강, 물질, 자녀, 시간, 몸까지도 주님을 위해서 먼저 드려야 한다. 특히 물질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선용돼야 한다. 열매는 없고 잎만 무성한 종교인은 아닌지 자문해볼 일이다.

세 번째, 나무의 열매가 없다.

주님이 나무를 통해서 얻으려고 했던 것이 과연 무엇이었을까. 물론 열매를 찾으시긴 했지만 더 깊은 주님의 의도가 숨겨져 있었다고 본다. 열매 속에 감추어져 있는 씨앗이다. 씨앗은 생명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나무의 열매를 통해서 생명을 찾으셨다.

모든 씨앗은 그 속에 생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름답다. 지금 주님이 그리스도인에게서 찾으시는 것은 생명이다. 교회를 통해서 주님은 생명을 찾고 계신다. 세상을 향해 주님은 생명을 찾고 계신다. 열방을 향해 주님은 생명을 찾고 계신다. 주님의 십자가 보혈의 능력에 힘입어 예수님의 생명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을 찾고 계신다.

미국 에이든 토저 목사는 교회의 세 가지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믿는 자가 성장하지 않고 어린아이와 같이 머물러 있으면서 살만 찌는 것, 믿는 자가 교회 안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알지 못하고 참관만 하는 것, 믿는 자가 서로 일치되지 않고 분열과 다툼만 일삼는 것이다.

최진 목사(홍성 구성교회)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라이프TV

라이프 TV는 삶과 꿈과 희망을 이야기 하는 곳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