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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새벽을 깨우는 예수님  

 

 

 


 새벽을 깨우는 예수님

 

 

마가복음 1장 35절 말씀에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윗이 시편 57편 8절 말씀에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로 볼 때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 예수라고

부르는 것에 대하여 연관이 저절로 지어지는 것을 봅니다.

다윗이 새벽보다 먼저 일어나 새벽을 깨우 듯

예수님도 새벽이 오기 전 먼저 일어나 한적한 곳으로 가서

하나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적어도 단호하게 말할 수 있는 것

진정한 인생의 성공비결이 있다면

그것은 ‘새벽예배에 있다’고 소리치겠습니다.

 

인생의 성공은 새벽예배에 있습니다.

이 대한민국의 발전 실상은 새벽예배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바로 새벽예배보다 먼저 일어나

새벽을 흔들어 깨우는 다윗과 같은 예수님과 같은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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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그리스도인의 특권

 

 


 

 요한복음 10장 19∼30절

하나님 말씀은 언제나 심판적 요소가 있습니다. 그래서 같은 말씀을 들어도 듣는 이의 반응은 둘로 나뉩니다. 믿고 기뻐하는가 하면 또 믿지 않고 오히려 완악해집니다.

예수께서 선한 목자라고 하시니 분쟁이 났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저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 그의 말을 듣느냐 라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은 귀신 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고 말하기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와 받아들이지 않는 자로 갈라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말씀의 심판성인 것입니다. 그림을 아는 자에게 그림은 굉장한 가치가 있지만 그림을 모르는 자에겐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피카소의 그림이 100만달러짜리라고 해도 그림을 모르는 이에겐 한푼의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또 나라가 있어야 왕의 가치를 압니다. 예수는 구세주요, 하나님 나라의 왕이십니다. 즉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자에게 예수는 고귀한 왕인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 나라에 속하지 않는 자에게 예수는 한 개인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내 양은 나를 안다"고 하심은 너무도 당연한 말씀인 것입니다. 진정으로 배우려는 사람에게 있어서 스승은 무한한 가치입니다. 하지만 배울 마음이 없는 자에게 스승은 귀찮은 존재일 뿐입니다. 그래서 선생이 존경받는 나라가 발전하는 나라요 선생이 무시당하는 나라는 야만국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참 스승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가 존경받는 나라가 하나님 나라요, 예수가 무시당하는 나라가 사단 마귀의 나라인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악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않는 한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싫어합니다. 물과 기름입니다. 섞일 수 없습니다. 회심하지 않는 한 하나님 백성을 결코 좋아하지 않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롬8:7)고 말씀하십니다. 양은 목자를 따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자에게 주시는 세 가지 약속이 있습니다. 먼저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십니다(요일5:12). 두번째 영원히 멸망치 않게 하십니다(시121:3-8). 세번째 아버지의 손에서 뺏을자가 없다고 하십니다(시37:24, 사41:10). 어린 아이가 아버지의 손에 있을 때 안전하고 누구도 뺏지 못함과 같이 주님의 양은 주님의 손 안에서 안전함을 믿습니다.

한남기(광명 소하성신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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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 십자가만 자랑하라


 

 

 


   "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라디아서 6:14).

 


   필자는 많은 독서를 한 사람이라 말할 수는 없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세상의 어떤 책도 성경만큼 한가지 주제를 분명히 증거하는 완벽한 책은 없다고 생각한다.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한가지 분명한 주제를 통해서 인생을 깨우치고 있다.

   어떤 이는 "성경은 어려워서 읽지 못하겠다" 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어려운 책이 아니다. 어찌 아비가 자식에게 알아듣지 못하는 어려운 말을 하는자가 있겠는가? 하물며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서 자녀 된 인간에게 주신 말씀인 성경이 당연히 쉬워야 하지 않겠는가! 기독교 역사 2000년 동안, 특히 중세 및 근대 기독교가 일반인들의 성경 접촉을 막거나 혹은 성경을 어려운 책으로 가르쳐왔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이면 누구나 깨달아야 할, 또는 깨달을 수 있는 쉬운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면 성경의 주제는 무엇인가? 성경의 주제는 구원이요 구원의 성취는 십자가이다.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디모데후서 3:15).

   성경에서 십자가를 빼어버리면 성경은 당장에 쓸모 없는 휴지조각으로 전락해 버린다.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하여 성경은 쓰여졌다. 사도 바울은 이 놀라운 진리를 깨달은 후 뜨겁고 간절한 마음으로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고백했다. 십자가는 인류를 구원하는 유일한 길이다. 십자가는 인간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인간 누구도 십자가 앞에 나오지 않고 결코 하나님을 만날 자가 없다.우리 신앙의 시작도 십자가요 우리 신앙의 진행도 십자가요 우리 신앙의 아름다운 열매의 모든 능력도 십자가에만 있다. 인간이 사단과 싸워 이길 수 있는 모든 능력도 십자가에서만 나온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린도전서 1:18).

   진실이 이러할진대 우리에게 있어서 십자가를 믿고 증거하고 사랑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그러므로 사단은 갈보리 십자가 사건 이후 오늘날까지 줄기차게 십자가의 진리를 왜곡시키며 훼손하려고 대적하고 있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의 교회적 문제점들을 바로잡기 위하여 서신을 보내면서  마지막 결론의 내용이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필자는 갈라디아서의 주제들을 마감하려 함에 있어서 갈라디아서의 주제가 되며 결론이 되는 십자가의 역할에 대해서 몇 가지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로 십자가는 구원의 길이다. 거룩하시고 완전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본질적으로 거룩 그 자체이시기 때문에 죄를 무조건 용납하시거나 죄에 관여하시거나 죄인과 상종하실 수 없는 분이시다.

   인간이 멸망의 지옥에 가는 것은 하나님을 닮은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사단의 꾀임을 좇아서 죄인의 길로 들어간 까닭이다. 하나님은 본래 인간을 선하게 만드셨지만 인간이 타락의 길로 간 것이다(전도서 7:20). 창세기 1장 27절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 함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도 포함된다. 하나님이 인간을 이토록 악한 모습으로 만든 것은 절대 아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인간이 하나님(아버지)을 버리고 사단을 아버지로 섬김으로(요한복음 8:44) 사단을 따라서 포악해진 것이다. 사실 현재도 인간의 속성 깊은 곳에 선한(거룩한) 성품이 내재하고 있음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다.

   바울은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로마서 7:21)라고 고백하였다.

   이제 죄로 말미암아 더러워진 인간은 약간의 선한 성품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결코 나아질 수 없는 신분과 상태로 전락하여 버렸다. 만약 성경이 구약만 기록되고 그리스도의 실체를 나타내는 신약이 진술되지 않았다면 인간을 구원하는 길은 영원히 막혀버리고 전 인류는 멸망의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의 구원을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의 선물로 받아들이고 있다. 실제로 오늘날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거나 모르고 있는 자들이 영원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데살로니가후서 1:8).

   그러면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끊어진 인간들을 위하여 십자가는 무슨 역할을 하였는가? 그것은 주님이 십자가에서 구속의 사역을 완성하는 그 위대한 최후의 순간에 외치신 내용에 잘 나타나 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요한복음 19:30).

   여기에서 "다 이루었다" 하신 말씀은 무슨 뜻인가? 죄인을 구속하는 일을 다 이루었다는 뜻이다. 즉 헬라어로 "테텔레스타이" 란 단어로서 '다 갚았다'는 뜻이다. 인간이 갚아야 할 죄를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다 갚았다는 뜻이다.

   이것은 전 인류의 죄, 즉 창세 초기의 아담으로부터 마지막 인간까지의 모든 인간의 죄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여기 '갑'이라는 한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는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을 대적하며 현재 주님을 심히 모독하는 사람이다. 그는 십자가의 속죄를 안 믿을 뿐 아니라, 모르고 있다.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의 죄는 어떻게 되었는가? 그것은 간단하다.

   이미 2000년 전에 갈보리 언덕 십자가상에서 고통 중에 돌아가신 주님은 '갑'이라는 사람의 죄를 포함해서 모든 사람의 죄를 단번에 해결하셨다. 그런데 사람이 왜 지옥에 가는가? 그것은 그가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기보다 이 복음을 믿지 않음으로 지옥에 가는 것이다. 십자가는 모든 죄인을 의인으로 만든다. 더러운 죄인이 거룩해지는 것은 십자가의 길뿐이다. 이제 거듭난 자는 죄인이라 하지 않고 거룩한 의인이라 칭한다. 이제는 하나님과 상종할 자격이 주어진 의인이 된 것이다. 이것은 십자가의 속죄를 받아들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다(로마서 3:23~24).

 

   둘째로 십자가는 능력이다. 구원받은 신자는 어떻게 이 악한 세대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기쁘게 살아갈 수 있는가?

그것은 십자가의 능력을 의지함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신자가 구원받았을지라도 신자의 육체에는 여전히 죄의 속성이 있어서 신자를 괴롭힌다. 사단은 이 육체의 속성을 이용하여 신자로 하여금 기쁘고 즐겁게 생활하지 못하도록 역사한다. 그러나 십자가의 능력은 이러한 죄의 유혹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는 능력이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서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십자가에 달리신)를 바라보자"(히브리서 12:1~2).

   사단은 우리 육체의 속성 중 정과 욕심을 사용하여 우리를 죄 가운데로 인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의 죄의 근원은 정과 욕심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러나 육체의 정욕이 역사하여 우리의 신앙이 흔들릴 때 십자가 앞으로 나가면 불같이 일어나던 정욕이 사그라지고 신령한 그리스도인으로 회복 받게 된다.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고 성도를 용서하지 못하다가도 십자가의 사랑이 중심에 살아나면 저절로 용서하는 마음으로 변화된다.

   모든 평강의 근원도 십자가로 말미암은 것이다. 죄를 향하여 달려가기를 즐겨하는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사실을 묵상하기 바란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라디아서 2:20).

 

   셋째로 십자가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핍박이 따른다.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하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핍박을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쳤으리니"(갈라디아서 5:11).

   바울이 만약 할례와 율법의 행위를 전하였다면 핍박이 없었을 것이요 그러하였다면 바울을 통하여 죄인이 구원받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십자가가 전해지는 곳에는 구원 역사가 일어난다. 구원받는 자들이 십자가로 인하여 성장하며  용감하게 주님을 따르게 된다.

   이것은 사단이 가장 싫어하는 성령님의 역사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전하고자 하는 곳에는 반드시 사단이 핍박하며 자기의 종들을 동원하여 방해공작을 일삼는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은 훌륭한 종파, 큰 교회에 속하여 자신은 정통이라고 하여 다른 사람들을 힘부로 판단하고 핍박하며 스스로 정통적인 믿음의 소유자로 위로 받고 있는데 이것은 엄청난 자기 착각임을 알아야 한다.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사단은 하나님의 종들을 핍박하여 왔다. 성경을 자세히 보라. 항상 핍빅하는 자 편에 선 자들이 이단이요 거짓이었다.

   물론 오늘날 실제로 잘못된 이단이기 때문에 핍박받는 경우도 많지만 정상적인 하나님의 자녀들도 핌박받는 자 중에 있음을 성경이 가르치고 있다.

   핍박의 역사를 간단히 살펴보면 가인이 아벨을 핍박하였고, 이스마엘이 이삭을, 에서가 야곱을, 사울이 다윗을, 여러 잘못된 왕들이 선지자들을 핍박하였다. 예수님도 핍박 받고 이단으로 정죄받아 죽임을 당하셨으며 제자들도 대부분 이단으로 몰려 순교하였다.

   오, 독자여! 그대가 참된 진리 중에 있는지 아는 방법 중 하나는 그대가 지금 그리스도 때문에 핍박받는 자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교회사에도 보면 수많은 하나님의 종들이 핍박을 받았다.

   주님이 친히 말씀하셨다. "이(십자가 예수)을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태복음 5:10~12).

   분명히 말하거니와 성경의 역사나 교회의 역사는 정상적인 하나님의 종들이 심한 핍박에 시달렸음을 잘 대변하고 있다. 오늘날에도 기독교의 거대한 조직들이 참된 하나님의 교회들을 자기 교인들을 지킬 목적으로 얼마나 정죄하고 있는가? 이 핍박은 주님 오실 때까지도 계속될 것이다.주님이 친히 말씀하신 바 "좁은 문"의 비밀을 독자들은 알기 바란다.

   끝으로 바울이 탄식으로 경고하고 있는 말씀이 있다. 참된 하나님의 교회가 어떻게 변질 되는가 하는 문제다. 그것은 "핍박을 면하려는 생각"으로부터 변질 되는 것이다.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 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함 뿐이라"(갈라디아서 6:12).

   핍박을 면하기 위하여 모양을 내고 타협을 하고 안일한 생활을 추구할 때 참 진리는 점점 변질되어 가고, 성령의 능력은 점점 떠나간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면서 복음의 초창기에 온갖 핍박을 정면으로 대적하며 담대하게 나아갔을 때 능력과 성령 충만이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이러한 경험을 회상하는 성도들을 필자는 많이 보아왔다.

   그러나 핍박을 면하려고 부드러움과 평안을 추구하며, 여러 가지 지혜와 학문적 방법이 동원되고, 종교적 형식을 흉내내며, 이러한 것들을 조금씩 조금씩 용납하는 동안 숫자는 늘어날지라도 이미 교회는 변질되어가고 성령의 능력은 소멸되어 가는 것이다. "이슬비에 옷 젖는다"는 우리의 속담처럼 우리가 순종하던 성경의 진리가 놀랍게 변질될 때 주님이 얼마나 슬퍼하시겠는가?

   필자는 생각하건대 전도에는 특별한 방법이 없다고 본다. 정상적 전도라면 십자가의 본질을 분명하고 담대하게 전하는 것이다. 바울도 전도는 미련한 것이라고 하였다(고린도전서 1:21). 비록 핍박이 온다 할지라도 우리는 십자가의 도를 앞세우고 담대히 전진하여야 한다. 핍박이 더 일어난다 할지라도... .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베드로전서 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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