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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제목 : 강을 건넌 사람들

말씀:수3:14-17

1.현실의 강을 넘어서야 합니다.

어떤 인터넷 매체에 보니까 박명수 어록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거기에 보면 이런 말들이 있었습니다. ‘성공은 1%의 재능과 99%의 빽이다.’ ‘일찍 일어난 새가 피곤하다.’ ‘고생 끝에 골병난다.’ ‘가는 말이 고우면 얕 본다.’ ‘늦었다고 생각할때는 늦은 거다.’ ‘참을 인이 세 번이며 호구된다.’ 그리고 이런 말들에 대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했고, 이런 말들을 주옥같은 명언이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신지요? 공감이 가는 말들인가요? 물론 어떤 면에서는 오늘 우리의 실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어서 공감이 되는 부분들이 없지 않아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속지 마십시오. 설령 그런 말들이 오늘 우리의 현실을 반영하는 말이라고 할지라도 그게 진리는 아닙니다. 아니 도리어 그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었다면 그것은 현실이 그만큼 왜곡되고 썩어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 사고 방식은 결코 인간의 삶을 가치있고 의미있게 하며, 기쁨과 평안과 행복을 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갈등과 탈법과 술수와 상처와 아픔과 시기와 질투와 무질서를 초래하여 인간의 삶을 불행하게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더더구나 그걸 진짜로 알고 그렇게 살아간다면 결국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고 말 뿐입니다.

여러분, 세월이 어떻게 변하고, 가짜가 어떻게 그럴듯하게 가장해도 거짓은 거짓에 불과합니다. 세월이 변한다고 진리가 거짓이 되고, 거짓이 진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진리가 가짜가 되는 일이 있다면 그건 처음부터 진리가 아니었을 뿐이지 진리가 가짜가 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날 너무나 왜곡된 가치관이 마치 진리처럼 가장하고 판을 치고 있습니다. 물질만능주의와 인본주의와 개인이기주의와 무사안일주의와 쾌락주의가 만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앞에서 말씀드린 무슨 박명수 어록이니 뭐니 하는 이런 허접스런 말들이 나오고 그걸 또 무슨 주옥같은 명언이니 어쩌니하며 떠들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합니다. 열심히 말씀과 기도로 훈련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너무나 당당하게 큰소리를 치며 흘러가고 있는 이 왜곡된 가치관들 속에 끌려가기 십상입니다. 우리가 맨날 보고 듣고 이야기하고 교제하며 살아가는 세상이 하나님과는 전혀 관계없이 자신이 죄와 무지속에 있는 줄은 모르고 그저 자기중심, 자기 소견, 자기 의지, 자기 경험대로 물질주의, 이성주의, 이기주의 물결속에 흘러가고 있기 때문에 정말 말씀과 기도로 무장하지 않으면 십중팔구 거기에 휩쓸려 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롬12:2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 세대의 왜곡되고 거짓된 것을 따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정말로 우리 영혼이 변화되고, 마음이 변화하여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바르게 분별하고 그 뜻을 좇아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말씀과 기도로 무장하여 온전한 분별력을 가지고 모든 거짓되고 왜곡된 가치를 바르게 분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다수라는 이름으로 진짜를 가장하고 있는 가짜를 바르게 분별하고 배격함으로 그런 것들에 결코 농락당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정말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능력으로 세상의 모든 오염되고 추하고 왜곡된 현실을 이기고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을 잘 달려감으로 생명의 은총을 풍성히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현실의 강을 건넌 사람들

여러분, 그래서 성경에서는 그런 왜곡된 현실의 강을 건너 살 것을 계속 말씀하셨고, 또 그런 말씀을 따라 삶으로써 성공했던 많은 사람들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노아 할아버지도 그 중 한사람이었습니다. 당시에 죄가 세상에 관영하여 하나님께서는 땅을 홍수로 멸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러나 노아 할아버지 가정은 그런 현실에 휩쓸려 떠내려가지 않고 그 현실의 강을 건너 의롭고 경건하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가정을 통하여 새로운 역사를 이루어가시려고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어 홍수를 피라하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노아는 즉각 순종하여 배를 만들기 시작하여 무려 120년 동안에 걸쳐 방주를 지었습니다.

여러분, 노아의 방주는 길이가 137m, 넓이가 23m, 높이가 14m의 3층짜리 배로 용적량이 3만톤이 넘는 거대한 배입니다. 물론 지금의 조선기술로는 이런 규모의 배 정도야 문제가 될 것이 없지만 노아의 가족 여덟식구가 순전히 손으로 이 정도의 배를 만든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120년동안 그 엄청난 일을 하면서 얼마나 힘이 들었겠으며, 또한 얼마나 많은 유혹들이 있었겠습니까? 이 배를 정말 우리가 완성이나 할 수 있을까? 정말 120년 후에 인류가 멸망할 비가 오기는 오는 걸까? 또 10년 30년 50년 70년 100년이 지나면서 내가 정말 말씀을 바로 듣기는 들은 걸까 등등 많은 생각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사람들은 전 세계의 홍수심판이라는 말도 안되는 말을 믿고 배를 만드는 노아의 가족을 미치광이 취급을 하면서 노아의 가족을 비웃으며 먹고 마시고 즐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그런 모든 현실을 뿌리치고 배를 만들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어떻게 살든 오직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였습니다. 너무나 힘들고 고된 작업이었지만 중단하지 않고 열심히 성실하게 배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120년이 지났을 때 정말로 하늘에 구멍이 뚫려 밤낮 40일 동안을 양동이로 물을 퍼붓듯이 비가 쏟아졌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온 세상이 물에 다 잠겼고, 노아를 비웃으며 먹고 마시고 즐기던 사람들은 하나없이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뭐라 그러거나 말거나, 심지어는 자신의 내부 속에서 어떤 생각들이 일어나거나 말거나 그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120년간 방주를 만들었던 노아의 가족 8식구만이 방주 안에서 안전하게 대홍수의 강을 건너 새로운 인류의 시조가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아브라함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창12:1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밑도 끝고 없이 무작정 가라는 것입니다. 떠나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이 왜곡되고 죄된 문화가 판을 치는 이 땅과 이 사람들과 이 문화를 떠나라는 것입니다. 이들을 떠나 내가 새롭게 시작할 그 땅으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 말씀에 순종하여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아버지와 고향산천과 그 모든 환경과 문화의 강을 건너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 완전히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 것입니다.

또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어 구원하실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여 애굽의 우상숭배의 문화의 땅을 떠나게 하셨습니다. 홍해 바다를 건너 멀리 가나안 땅까지 가게 하셔서 거기서 새역사를 시작하셨던 것입니다.

이 모든 말씀들이 뜻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한마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 죄와 무지와 왜곡과 어둠의 현실들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딛고 일어서든지 아니면 그곳을 떠나든지 여하튼 왜곡된 현실의 강을 건너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승리가 있고, 거기에 생명의 풍성한 은총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본래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던 에덴의 모습들을 너무나 많이 잃어버렸고, 너무나 많이 변질되어 있어서 우리가 넘어야 산과 건너야 할 강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때로는 환경과 상황이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산입니다. 때로는 이성과 경험이 우리가 건너야 할 강입니다. 불신과 의심과 욕심과 욕망과 돈과 권력도 넘어서야 할 강입니다. 사람과 문화와 과학도 우리가 넘어서야 할 산 중의 하나입니다. 술과 담배와 향락과 무사안일은 말할 것도 없이 반드시 건너가야 할 강입니다. 물질주의와 인본주의과 종교다원주의와 개인이기주의도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요, 건너야 할 강입니다. 이러한 산을 넘고 강을 건너야 비로소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입니다. 거기에 우리 모두가 원하는 진정한 기쁨과 자유와 평화와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이 시간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정말 내가 지금 시급하게 넘어서야 할 산이 무엇인지, 빨리 건너야 할 강이 무엇인지 되새겨보면서 그것이 무엇이든 주님의 인도하심과 능력 주심을 따라 그 산을 넘고 그 강을 건너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 산과 강의 저너머에서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는 에덴의 축복을 충만하게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약속의 말씀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가 우리 앞에 놓여져 있는 산과 강을 넉넉히 건너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한마디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바라보며 나아가야 합니다. 다시말씀드리면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든, 어떻게 왜곡되고 오염된 가치관과 문화가 판을 쳐도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고, 푯대로 삼고 천성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도 바로 그러한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데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광야생활을 마치고 드디어 오매불망 기다리던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하여 요단강을 건너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 중요한 시점에 큰 난관에 봉착하게 됩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이면 그때가 우기라서 요단강이 넘칠만큼 싯뻘건 물이 넘실거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적으로는 도무지 요단강을 건널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이런 난관을 어떻게 헤쳐 나갔습니까? 오늘 14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백성이 요단을 건너려고 자기들의 장막을 떠날 때에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에서 나아가니라.” 이것은 6절에서 이미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내용으로 거기에 보면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앞장서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요단강에 도착하면 무조건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요단강이 갈라질 것이다. 그러면 백성들은 제사장들이 멘 언약궤를 보고 건너기만 하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무슨 뜻입니까? 한마디로 세상 물결이 어떻게 넘실 거려도 말씀을 따라 저 가나안복지를 향해 전진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언약궤가 뭡니까? 말그대로 약속의 말씀이 들어있는 상자입니다. 그 안에는 십계명 돌판과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만나 항아리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언약궤는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는 것이며 나아가 하나님의 생명의 떡이요, 생명의 근원이라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약궤를 따라가라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을 따라 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 생명이 있음을 기억하고 그 생명의 말씀을 따라 전진하라는 것입니다. 요단강물이 아무리 사납게 덤벼들어도 두려워 말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약속을 바라보며 전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책임지고 요단강을 가나안복지로 인도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그 때 그 사람들에게만 주신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을 따르는 모든 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갈때에 사나운 강물이 넘실대며 그들을 방해하고 위협하고 낙심하게 만들었던 것처럼 우리가 저 가나안복지를 향해 갈때에 우리를 실망시키고 낙담케하는 일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환난과 풍파가 닥칠때도 있고, 때로는 환경과 상황 때문에, 때로는 물질과 건강 때문에, 때로는 사람 때문에 어려움을 겪을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두려워말고 흔들리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부여잡고 가나안복지를 향해 달려가라는 것입니다. 누가 어떻게 위협하고 유혹해도 그런 왜곡되고 죄되고 혼잡한 것들에게 눈길도 주지말고, 흔들리거나 낙심하지도 말고, 오직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오직 유일한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을 부여잡고 저 가나안복지를 향해 달려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전능하신 하나님,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장애물을 제거해 주시든지, 상황과 환경을 변화시켜 주시든지 아니면 상황과 환경을 그대로 두고 우리에게 지혜와 능력을 주셔서서 이기게 하시든지 여하튼 어떤 방법으로든 승리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오직 주님을 믿고 의지하며 그 약속의 말씀을 바라보며 가나안 복지를 향해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분명히 주님이 인도하십니다. 힘주시고 은혜를 주시고 지혜를 주셔서 이기게 하십니다. 환경과 상황을 변화시켜 주셔서 승리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그러실만한 능력과 권한과 사랑과 인자와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정말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주님의 방법과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갈때에 주님의 능력과 은혜로 우리를 위협하고 유혹하고 넘어뜨리려는 모든 세력들을 이기고 에덴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믿음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 또 하나 기억할 것은 에덴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려면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15,16절 말씀 보겠습니다. “요단이 곡식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 가에 잠기자 /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사르단에 가까운 매우 멀리 있는 아담 성읍 변두리에 일어나 한 곳에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새.....”

자 보십시오, 요단강물의 흐름이 언제 그쳤습니까?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물속에 들어섰을 때입니다. 다시 말씀드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이스라엘을 집어삼키기라도 할 듯이 덤벼들던 요단강의 흐름을 끊고 강바닥을 드러내어 무사히 요단강을 건너게 하셨는데 그런 기적이 일어난 시점이 언제냐?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언약궤를 메고 사납게 요동치며 흐르는 요단강속으로 들어갔을 때라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기적을 일으켜 놓고 건너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순종했을 때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대부분의 경우 기적을 만들어 놓고 누리게 하시기 보다는 믿음으로 행동할 때 기적의 은총을 누리게 하십니다. 노아에게도 하나님께서 방주를 만들어놓고 타라고 하지 않으시고 네가 만들어서 타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고 하실때도 먼저 그냥 무조건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광야생활 동안 반석에서 물을 내실 때도 모세에게 반석을 향하여 명령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가나의 혼인잔치 집에서 포도주를 만들어 놓고 갖다 주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물을 떠서 갖다 주라고 하셨습니다. 나사로를 부활시킬때도 마르다에게 무덤 입구의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때는 제자들에게 빵을 나누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실로암 못가에 있던 맹인에게는 흙을 눈에 바르고 실로암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모든 말씀에 순종했을 때 결국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즉 믿음으로 순종하는 자에게 갓난아기처럼 하나님을 신뢰하는 그 믿음과 순진한 마음을 보시고 은헤를 베풀어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무슨 일이 있어도 세월이 어떻게 변해도 열심히 성실하게 진리를 따라 살기를 원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든지, 상황과 환경이 어떠하든지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을 따르고 그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따라가도 하나님이 아니라 하신 것,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왜곡되고 거짓된 것을 버리고 넘어가고 떠나 갈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유는 두말할나위도 없이 거기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 사랑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과 행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이 땅에서 누려야 에덴 동산이 있고 나아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로 이어지는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 앞에 높게 서 있는 왜곡된 현실의 산들을 넘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너무나 도도하게 흐르는 왜곡의 가치관의 강을 건너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유일한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을 푯대로 삼고 저 가나안복지를 향해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누가 무슨 말을 해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주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며 지혜와 능력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넉넉하게 건너가게 하십니다. 승리하게 하십니다. 이 땅에서도 진정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다가 영원한 천국의 은총을 주십니다. 이런 진정하고 영원한 승리를 누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우리 온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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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 Sunday worship preaching )
 

 


말씀 : 마13:3-9

제목 : 마음을 옥토로 만듭시다

1.풍성한 열매의 관건은 밭입니다.

농사를 지어서 풍성한 수확을 얻으려면 여러 가지 구비 조건이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밭이 가장 중요하지 않나 생각이 됩니다. 아무리 품종이 좋고 기후나 기술이 좋아도 토질이 형편없으면 좋은 열매를 기대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농부가 농사를 지으려면 밭을 갈아 부드럽게 하고, 돌멩이를 골라내고, 퇴비도 넣고 토양 소독도 하면서 밭을 장만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이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의 밭이 깨끗하고 진실하고 겸손하고 지혜로워야 인생의 좋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주님께서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하여 바로 이러한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여 생명의 말씀을 받아들임으로 마음을 옥토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30배 60배 100배의 풍성한 열매를 맺어 생명의 풍성한 은혜가 넘치는 삶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오늘 말씀의 내용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깊이 묵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려면 우리 마음을 바르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인간의 심령이 너무 왜곡되어 있어서 복음이라는 너무 귀하고 복된 생명의 말씀이 사람들에게 전해졌는데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귀한 생명의 말씀을 아예 받아들이지도 않고,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들마저도 생명의 풍성한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얼마든지 생명의 은총을 누릴 수 있는 상황속에 있습니다.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과 영광의 나라와 동시에 이 땅에서도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평화와 소망을 주는 복음의 씨앗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의 마음의 밭에 뿌려 졌고 또 얼마든지 그것을 믿고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릴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말씀을 거부하고, 어떤 이는 겨우 받아들이긴 했으나 열매를 맺지 못하고 겨우 목숨만 부지하고 있거나 심지어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고 극히 일부의 사람들만이 생명의 열매를 맺으며 그 은총을 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무엇이 문제입니까? 왜 같은 생명의 씨앗이 들어갔는데 어떤 사람에게는 거부당하고, 어떤 사람은 조금 자라다가 말라죽고, 어떤 사람에게는 근근이 목숨만 부지하고 있고, 어떤 이들에게는 생명의 열매가 풍성히 맺히는 것입니까? 그건 다름 아니라 복음을 들은 사람들의 마음의 밭이 문제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의 밭이 완고하고 단단하게 굳어져 있거나 돌밭과 같이 얄팍하거나 세상의 온갖 잡초들로 무성하여 복음의 씨앗이 싹이 트고 자라나지 못하여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능력을 본 사람들 중에도 어떤 이는 복음을 받아들였고, 어떤 이는 복음을 거부하였다는 사실에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주님은 감히 세상의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지혜와 능력으로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엄청난 능력으로 병든 자를 고치시고, 귀신 들린 자를 고쳐주시고, 심지어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군중들이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러한 주님의 말씀을 듣고, 능력을 본 사람들 중 끝까지 예수님을 믿고 따른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예고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님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도 가려느냐고 물으시면서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셨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는 하는 가장 근본적인 요인은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의 마음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죄와 무지와 어리석음과 연약함과 한계를 인정하고 겸손히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자는 생명의 복음을 받아들여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지만 자신의 분수를 모르고 자기 생각과 지식과 경험과 이성대로 살아가는 완고하고 어리석은 자는 복음을 받아들이지도 않고 겨우 받아들인다해도 말씀을 따르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살아감으로 생명의 은총을 누리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 마음의 밭을 잘 다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것으로 인해 단단해지고, 세상의 온갖 잡초로 가득하고, 자신의 힘과 지식과 이성을 의지하려는 완고하고 교만한 마음을 성령의 능력으로 깨트리고 부드럽고 깨끗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마음이 옥토가 되어 생명의 말씀이 싹이 트고 자라나 풍성한 열매를 맺어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 마음의 밭을 옥토로 만들 수 있습니까?

2.단단히 굳어진 마음을 깨트려야 합니다.(3,4절)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옥토로 만들려면 자신의 무지와 어리석음과 한계를 인정하고 겸손히 주님 앞에 엎드려 말씀묵상하며 깨어 기도함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 심령속에 들어있는 단단하게 굳어진 것들을 깨트려 버려야 합니다.

오늘 말씀속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데 먼저 3,4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이 말씀은 비유의 말씀으로 씨를 뿌리는 자는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복음을 전하는 자들입니다. 씨는 물론 하나님의 말씀이고, 밭은 인간의 마음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길가란 단단하게 굳어져 있는 인간의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이미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전해졌건만 사람들의 마음이 세상에 태어나서 보고 듣고 배우고 경험한 것들로 완전히 굳어져 있어서 생명의 말씀을 도무지 이해하지도 못하고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생명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죽음의 길로 치닫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인간의 심령은 세상에서 보고 듣고 배운 것으로 너무나 단단하게 굳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세상에서 보고 듣고 배운 것들은 대부분 물질적으로 많고 좋은 것을 누리며 높은 자리에 올라가 대접받으며 육체적 물질적으로 평안하고 부요한 삶을 살아가기 위한 것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을 위하여 기를 쓰고 공부하고 일하고 힘쓰고 애쓰며 거의 대부분의 시간과 정열을 거기에 할애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육체적 물질적 사고로 심령이 완전히 굳어질 수 밖에 없고, 그러한 물질적 사고로 심령이 굳어지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명의 말씀에는 아예 관심도 없고,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도 못함으로 이를 거부하고 영원한 멸망의 길로 치달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나마 복음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마저도 아직도 그 심령 속에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있는 물질적 육체적 가치관으로 인하여 말씀 따라 가지 않고 세상을 따라 감으로 생명의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단단하게 굳어진 심령을 깨트려 부드럽게 하고 생명의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다른 방법 없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죄와 무지가운데 있는 존재인지, 자신의 지식과 경험과 이성과 얼마나 작은 것인지를 인정하고 주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기도하며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주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너무나 왜곡되게 굳어진 옛자아가 깨트려 주심으로 진리를 향해 갈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 성령이 역사하시고 성령이 역사하시면 그 동안 살아오면서 단단하게 굳어진 왜곡된 가치관들이 깨지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고, 말씀에 아멘으로 화답하며 그 말씀을 따라 살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 심령 속에서 말씀의 씨앗이 싹이 트고 자라나서 풍성한 생명의 열매를 맺게 되어 그야말로 생명의 은혜가 넘치는 복된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어찌 하든지 정말 겸손한 마음으로 더욱 자신을 말씀 앞에 세우며 기도하며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자신이 죄인이요 어리석은 자요 완고한 인생임을 고백하고 기도하며 성령의 역사하심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능력과 은혜가 여러분의 심령 속에 충만하게 임함으로 세상의 것으로 굳어져 있던 마음이 활짝 열려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이 여러분의 심령에 온전히 심겨지고 그래서 그 말씀이 여러분 심령 속에서 싹이 트고 자라나 풍성한 열매를 맺으며 그 은총을 충만히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말씀이 심령 속에 깊이 뿌리 내려야 합니다.(5,6절)

그렇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 마음이 옥토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 속에 들어온 말씀이 우리 심령 속에 깊이 뿌리 내리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5,6절을 보십시오.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여기서 돌밭은 돌이 많은 밭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위 위에 약간 흙이 덮여있는 밭을 말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싹이 텄으나 가뭄이 들자 땅속의 습기를 공급받지 못함으로 금방 말라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심령도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심령에 말씀의 씨가 겨우 들어가긴 했는데 그 마음속이 아직도 세상에서 살면서 보고 듣고 배우고 경험한 물질주의와 인본주의적 가치관이 자리 잡고 있어서 말씀이 그 마음속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주님 안에 있는 진정한 생명의 도를 알지 못하고 세상의 복이나 기쁨이나 평안을 위해서 다니고, 그래서 뭔가 믿는 흉내를 내기는 내는데 조금만 어려운 일이 있으면 그만 실족하여 넘어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안타깝게도 이런 일들이 많습니다. 10년 20년 30년 교회에 다녔다고 하면서 아직도 세상의 가치관으로 굳어진 심령이 깨지지 않음으로 그저 세상 기쁨이나 평안이나 위로나 복을 위해서 다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교회에서 별일 없이 웃고 떠들고 재미있게 교제할 때는 그 재미로 교회에 다닙니다. 또 뭔가 어려움이 없고 일이 잘 되면 좋다고 교회에 다니고 어떤 때는 은혜를 받은 것처럼 눈물 흘리며 기도하기도 하고, 교회 일도 열심히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분들은 교인과 뭔가 관계가 틀어지고 뭔가 좀 어려운 일이 있으면 그만 낙심하고 원망하고 불평하게 됩니다. 뭔가 좀 자기에게 서운하게 대하는 것처럼 느껴지거나 알아주지 않는 것처럼 여기면 교회를 떠나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나도 왕년에 세례를 받았다, 성가대를 했다, 교사를 했다고 하면서 교회에 안 나오는 분들도 많습니다. 여러분, 그건 그냥 교회에 왔다갔다 한 것이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정말로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속된 말로 때려 죽여도 교회에 안 나올 수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생명의 주를 만났는데, 천국과 지옥을 아는데 어떻게 교회를 안 나올 수가 있습니까?

그러면 왜 이런 일이 벌어집니까? 다름 아니라 마음이 돌밭이라 그렇습니다. 말씀을 받기는 받았는데 그 심령 속에 아직도 인간적인 생각과 가치관과 경험과 이성이 바위처럼 굳어 있어서 그냥 인간적인 생각으로 교회생활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절대로 그렇게 교회생활하면 안됩니다. 정말 나 자신을 깨트려 부수고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안에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있고, 오직 그 말씀만이 진리이며 생명이라는 걸 알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이게 신앙생활입니다.

그냥 인간적으로 사랑하고 돕고 위로하는 것은 직장이나 마을이나 동호회나 계모임에서도 할 수 있습니다. 거기서도 사랑도 나눌 수 있고 서로 섬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단순히 인간적으로 교제하는 곳이 아닙니다.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며 그래서 이 땅에서도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다가 무엇보다도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분명한 진리이고 이것을 아는 사람은 죽어도 교회를 떠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윤리적으로 종교적으로 교회생활하면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물론 조금 어려움이 오고 일이 잘 안 풀리면 그만 졸업해 버립니다. 교회가 자신을 알아주지 않고 조금 서운하게 하면 그만둡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정말 우리 심령 속에 바위처럼 굳어져 있는 인간의 이성과 경험과 지식의 단단한 것들을 주님의 능력으로 깨트려 버려야 합니다. 신앙생활이란 인간적인 기쁨이나 평안이나 욕구 충족을 위하여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말씀으로 거듭나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누리며, 오직 말씀안에서 주님과 동행함으로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며 그 역사를 이루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물론 그렇게 살다보면 인간적인 생명의 기쁨과 자유와 평화와 사랑은 저절로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우리 심령속에 굳어진 왜곡된 생각들을 하루속히 버리고 오직 우리의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 가운데 오직 주님의 말씀을 따라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권능과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어려움과 유혹과 시험을 이기고 먼저는 나 자신이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며 주님의 거룩한 역사를 이루어가는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마음속의 잡초를 뽑아버려야 합니다.(7절)

그렇습니다. 우리 마음을 옥토로 만들어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기 위해서는 세상의 것들로 완고하게 굳어져 있는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그 다음에는 마귀 사탄이 끊임없이 우리 마음에 뿌려놓는 잡초를 제거해야 합니다. 아무리 마음의 밭을 부드럽게 해도 온갖 못된 잡초들이 무성하면 생명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7절에서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그러니까 어떤 사람은 말씀을 겨우 받아들이긴 했는데 그래서 뭔가 자라는 것처럼 보였는데 그만 마음속에 세상의 온갖 잡동사니 같은 것들로 가득차서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밭을 아무리 부드럽게 하고 퇴비를 넣고 씨앗을 뿌려도 잡초가 무성하면 어떻게 좋은 열매를 맺겠습니까?

여러분, 인간의 마음의 밭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심령에는 너무나 많은 잡초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 근심과 걱정이 잡초입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의 향락과 즐거움이 잡초가 됩니다. 어떤 이는 원망과 불평과 미움과 욕심이 잡초입니다. 어떤 이는 돈과 권력에 대한 집착과 욕심이 잡초가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러한 잡초는 얼마나 질기고 강하고 잘 자라는지 모습니다. 밭에 곡식의 씨앗을 뿌려 놓으면 잡초가 먼저 납니다. 조금만 방치하면 잡초가 곡식을 완전히 덮어 버려 곡식은 약해져 죽거나 겨우 살아남아도 열매가 별로 없습니다.

우리 인간 심령도 그렇습니다. 마귀가 얼마나 강렬하게 역사하는지 조금만 방심하면 온갖 왜곡되고 추하고 부정적이고 악하고 불신앙적인 것들이 우리 심령을 차지해 버립니다. 세상의 돈과 명예와 영광과 향락과 원망과 불평과 증오와 미움과 같은 잡초들이 말씀을 덮어 버립니다. 그래서 말씀이 열매를 맺지 못함으로 생명의 은혜가 넘치는 삶을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걸 제거하고 이겨야 합니다. 이걸 이기는 방법도 다른 게 없습니다. 더욱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며 말씀의 능력을 덧입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능력과 은혜를 덧입어 마귀가 잡초의 씨앗을 뿌리지 못하게 하고 자라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아니 완전히 뿌리째 뽑아버려야 합니다. 그러면 생명의 말씀이 무럭무럭 자라나서 생명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음으로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이 넘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8절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우리의 심령을 부드럽게 하고 말씀으로 채우고 잡초들을 제거하면 생명의 풍성한 열매를 맺고 그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우리 심령속에 있는 세상의 온갖 잡다한 것들을 제거하고 진정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 은혜의 말씀, 사랑의 말씀이 무럭무럭 자라난다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아름답고 복되고 귀하고 영광스럽겠습니까? 얼마나 자신의 삶이 윤택하고 부요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의 은총을 가져다 주겠습니까? 주님은 오늘 이 비유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이러한 삶이 되기를 간절히 촉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여러분의 심령을 부드럽게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심령 속에 온전히 뿌리박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의 심령의 밭에 있는 모든 잡초들을 제거하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주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기도하며 말씀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 진정 주님의 인도하심과 성령님의 역사하심 가운데 오직 옥토와 같은 마음으로 주님과 동행할 때에 여러분의 심령 속에서 생명의 씨앗이 싹이 트고 자라나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면서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갈 수 있는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되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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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주일설교 / 부활은 기독교신앙의 핵심

 

 

 

성경 고린도전서 15:1-10.

 


우리 주님 부활하셨습니다!
우리 죄를 씻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고난 받으시고 죽으신 주님,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믿는 모든 인생에게 영원한 생명의 복을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3: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5:24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자는 그 순간부터 영원한 생명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11:24-27절,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신앙의 핵심입니다.

 @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본문 3-8절입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바울사도가 사역하던 당시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본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생존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 모두가 부활의 증인들입니다. 이들을 통해서 주님의 부활이 널리 전파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사도는 자신을 그 증인의 반열에 올려놓고 있는 것입니다.

잘 아시는데로 바울사도는 사울이였을 때에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과 같이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보지는 못했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고백하는 것처럼, 사울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던 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을 붙잡아 잔인하게 처형하던 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핍박자 사울이 변하여 사도 바울이 되고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자가 된 것은 분명히 그의 간증처럼 다메섹도상에서 빛가운데, 음성 가운데 주님을 만났기 때문인 것입니다.

핍박자 사울을 만나주신 주님은 분명히 사울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이신 동시에 다시 사신 부활의 주님이십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바울사도는 자신을 부활하신 주님의 목격자들과 함께 부활하신 주님의 증인으로 올려놓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가 주님의 부활사건의 증인들입니다. 우리가 만난 주님은 부활하신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2천여년 전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시지 않으셨다면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주님을 다시 만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이 전부라면 주님도 그저 수 많은 위인들중의 하나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부활하셔서 지금까지 믿는 모든 자들의 구원자가 되십니다. 저와 성도님들이 만난 주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인 동시에 분명히 부활하신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주님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 부활은 소망입니다.

이 땅에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신 주님과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했고 부활하신 주님의 사랑을 그 누구보다도 극적으로 체험한 베드로의 고백입니다. 베드로전서 1:3-4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이 세상은 우리들이 영원히 머물 곳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있는 그 무엇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기독교 사상가 C.S 루이스는 ‘영원하지 못한 것은 영원히 무용지물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인생은 결국 이 세상에서 절망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된 그리스도인들은 천국과 영생을 유산으로 받기에 그 소망을 가지고 세상을 이기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4:18절,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그러므로 부활은 모든 성도의 산소망, living hope, 참된 소망인 것입니다.

 (이제)
 @ 부활은 신앙입니다.

부활은 과거의 역사적 사실이고(물론 지금도 우리 가운데 일어나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미래의 소망인 동시에 현재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세우는 힘입니다.

규장출판사에서 나온 ‘부활’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런 글이 있습니다. ‘장래 부활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현재 부활의 생명력이 공급되어 현실에서도 죄와 사망의 세력을 제압하는 능력을 발휘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현실에서 몸부림치며 살아가야 하는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능력의 근원중의 근원이요 핵심중의 핵심이다.’

고린도전서 15:55-58절,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의 부활로) 말미암아 (현재)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라” 아멘!

부활신앙은 늘 다시 시작하는 신앙이고 새롭게 시작하는 신앙입니다. 동토의 땅을 뚫고 돋아나는 봄의 새싹의 힘이 바로 부활신앙의 힘입니다.

‘디싸이플’이라는 기독교잡지에 소개된 어느 무명작가의 글이 있습니다. ‘사나운 소리가 들려도 너무 겁내지 말게 하시며 / 꾸지람을 들어도 너무 낙심하지 말게 하시고 / 바람이 분다고 아무데로나 끌려가지 않게 하시며 / 햇볕이 뜨겁다고 그늘만 찾지 말게 하소서 / 기왕 지나온 길 되돌아 보지 말게 하시고 / 어둠이 덮여와도 외로워 하지 않게 하소서 / 몽치가 다가올 때에도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던 주님 / 제자의 배반에도 위로의 시선을 던지시던 주님 / 침 뱉는 자들도 용서하시던 주님 / 십자가 위에서도 어머니를 생각하시던 주님 / 오 주님 / 나도 부활하게 하소서 / 내 가슴이 푸른 하늘이 되게 하시고 / 내 생각이 넓은 바다가 되게 하시며 / 내 영혼을 봄 동산으로 만들어 주소서 / 아-멘!’

부활주일, 부활하신 주님, 영으로 우리 각 심령에 새롭게 모시고 주님이 주신 천국과 영생의 산소망안에서 부활의 능력으로 다시 시작하고 새롭게 시작하는 모든 예배자들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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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주님과 동행하려면...

 

 

 

제목 : 내가 먼저 하나님 편에 섭시다.

말씀 : 눅18:9-14

 


1.내가 먼저 하나님 편에 서야 합니다.

 

1861년부터 65년까지 미국에서는 남북전쟁이 있었습니다. 당시 미국의 북부지역은 공업이 발달하여 노예제도가 폐지되었지만 남쪽에는 농없이 주업으로 노예제도가 존속되고 있었습니다. 이때 링컨 대통령은 노예해방을 천명하자 이에 반발한 남부 사람들이 연방에서 탈퇴하고 별도의 대통령을 뽑으면서 남북전쟁이 시작되어 4년간의 치열한 접전 끝에 결국 링컨이 이끄는 북군이 승리하여 노예제도가 폐지되고, 민주정치를 이루는데 크게 기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4년간 치열한 공방을 벌이는 동안 웃지못할 일이 벌어졌습니다. 남군이나 북군이나 모두 하나님을 열심히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 북군에 속한 교회의 목사님들과 교인들은 하나님이 우리 편에 되어 주셔서 북군이 이기게 해달라고 열심히 기도를 하였습니다. 또한 남군에 속한 교회는 교회대로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셔서 남군이 이기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를 하였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얼마나 난감하셨겠습니까? 양쪽 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며 싸우며 죽고 죽이고 하면서 서로 내 편이 되어 달라고 하니 하나님이 어느 편에 서야 하겠습니까? 이때 링컨 대통령이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어 달라고 기도하기 전에, 우리가 하나님 편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하십시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기 전에 먼저 정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먼저 생각하고 그 뜻대로 행하고 그 뜻대로 되도록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점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정말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를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 편을 들어달라고 하기 전에 나는 정말 하나님 편에 서 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편에서 생활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대로 살아가면서 하나님이 내 편이 되어서 복을 달라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인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기는 별로 하나님 편에 있지 않으면서 다른 교인이나 교회의 잘못에 대해서 신랄하게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은 교회의 일을 열심히 하지 않으면서 교회가 하는 일들에 대하여 비판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신은 그다지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서 누구 때문에 교회에 가고 싶지 않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정녕 하나님의 은총을 누리기를 원한다면 내가 먼저 하나님 편에 서야 합니다. 교인들과 교회의 잘못을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 편에 있는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교회가 하는 일을 비판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얼마나 열심히 교회를 섬겼는지를 생각해야 하는 것이 올바른 자세인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찾아오시는 것은 사실입니다. 또한 우리 주님은 사랑의 주님이라서 우리가 부족하고 연약함에도 우리를 찾아와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먼저 찾아오셨다고 다 되는 것도 아니요,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셔서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고 다 은혜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이 찾아오실 때에 주님을 진정으로 영접해야 하고, 영접하였으면 주님의 그 놀라운 사랑과 은혜에 응답하여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기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주님과의 진정한 만남이 이루어지고, 그렇게 주님과의 진정한 만남이 이루어질 때에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충만하게 받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요14:21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말씀그대로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자라야 진정 주님을 사랑하는 자요, 또한 주님을 사랑하는 자가 하나님께도 사랑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은혜를 달라고 하기 전에 주님이 우리를 그 놀라운 부르심과 사랑에 응답하여 주님 말씀대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교회나 성도나 기타 다른 사람들의 잘못에 대하여 비난하기 전에 먼저 내 스스로가 주님편에서 말씀대로 살아가며 그래서 사랑과 긍휼을 베풀고 교회도 열심히 섬겨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은혜를 충만히 누리며 주께 영광을 돌리고 주님의 그 놀라우신 사랑과 은총을 세상사람들에게 보여 줄 수 있는 복된 삶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우리가 주님의 편이 되어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2.교회를 가까이 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정말 주님편이 되어 주님과 동행하려면 주님의 몸된 교회를 가까이 해야 합니다. 오늘 10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과 세리, 이 두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잘 보세요. 어디에 갔습니까? 성전에 갔습니다. 왜 갔습니까? 기도하러 갔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바리새인은 교만하고 자신의 의를 내세우는 기도를 드림으로 하나님께 물리침을 당하고, 겸손히 자신의 죄와 허물을 고백하는 기도를 드림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고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바로 여기서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우리가 주님의 편이 되기 위해서는 주님의 몸인 교회를 가까이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말씀듣고, 찬양하는 것이 내가 주님의 편에 서 있다는 가장 기본적인 증거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당연하지 않습니까? 교회가 뭡니까? 교회는 주님의 몸입니다. 엡1:23절입니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교회는 주님의 몸이고,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이 즉 예수님으로 충만한 곳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뭡니까? 물론 주님의 자녀이며 동시에 주님의 몸된 교회의 지체입니다. 고전12:27입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우리가 주님의 몸의 지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교회는 주님의 몸이고 우리는 그 주님의 몸된 교회의 지체인데 지체인 우리가 어떻게 몸된 교회를 떠나서 존재할 수 있습니까? 또한 교회는 주님으로 충만한 곳이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지상 교회가 온전치는 못하지만 그래도 지상에서는 주님으로 가장 충만한 곳이 교회밖에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렇게 주님으로 충만한 교회를 가까이하지 않고 어떻게 우리가 주님 편에 설 수가 있겠습니까?

요15:5절을 보십시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보십시오. 주님은 포도나무 원줄기이고 우리는 가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기 붙어 있어야만 생명을 부지할 수 있고 나아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교회는 주님의 몸이고 우리는 그 지체입니다. 주님은 포도나무 원줄기이고 우리는 그 가지입니다. 또한 교회는 주님으로 충만한 곳입니다. 그런데 교회를 떠나 어떻게 생명을 유지할 수 있습니까?

어떤 분은 꼭 교회에 다녀야 신앙생활하나? 혼자하면 되지. 라고 말합니다. 또 어떤 분은 교회를 안다니며 나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이런 생각은 100%틀린 생각입니다. 교회를 떠나서는 절대로 신앙생활 할 수 없습니다. 교회를 멀리하는 사람치고 신앙생활 제대로 하는 사람 없습니다.

물론 정말 교회에 가기를 간절히 원하는데 도저히 갈 수가 없는 상황이라면 문제가 다릅니다. 그러나 얼마든지 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지 않는 사람은 무슨 이유로도 정당화 될 수 없고, 나아가 신앙생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어떻게 주님의 몸된 교회의 지체인 우리가 몸된 교회를 뗘나서 신앙생활을 한단 말입니까? 어떻게 주님으로 충만한 교회를 떠나서 은혜충만한 신앙생활을 한단 말입니까?

여러분, 부모님을 멀리하고,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허물이나 들추고 다니면서 부모님을 공경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남편과 아내가 서로 멀리하고, 대화도 하지 않고, 요구를 거부하고, 헐뜯고 비방하며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모이기를 힘쓰라, 주일을 성수하라,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하셨는데 그러한 하나님의 뜻과 반대로 살면서 하나님 편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로 하나님 편에 서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을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공경한다면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한다면 교회와 성도들을 비난하고 비평하기 전에 내가 먼저 교회를 사랑하고 섬기는 일에 앞장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를 원하신다면 열심히 교회에 나아와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말씀듣고 찬양하는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은혜와 능력을 덧입어 생명의 풍성한 은혜가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죄를 인정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편이 되기 위하여 기억해야 할 두 번째는 주님 앞에 자신의 죄와 무지와 연약함을 인정하고 고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런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데 먼저 11,12절에 보면 바리새인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토색과 불의와 간음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 드렸습니다. 그래서 감사합니다. 사실 감사한 것 아닙니까? 못된 짓 안하고 금식하고 십일조 생활하고 얼마나 그럴듯한 삶입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기도를 받지 않으셨다고 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한마디로 바리새인의 기도는 자기 의를 내세우며 남을 정죄하고 무시하는 기도였기 때문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나는 다른 사람들과 다릅니다. 나는 이 세리와 같지 않습니다. 즉 옆에서 기도하고 있는 세리를 지칭하며 나는 저 나쁜 사람, 저 죄인과 같지 않기 때문에 감사하다고 말합니다. 즉 이 사람은 교만하고 무지하고 남을 정죄하고 무시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세리의 기도는 어떤 기도였습니까? 13절 보겠습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여러분 이 말씀을 잘 보세요. 세리는 ‘멀리 서서’ 기도하였습니다. 즉 자신의 죄와 무지를 생각할 때에 감히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갈 수가 없어 멀리 서서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자신의 죄와 무지와 허물을 생각할 때 너무 죄스럽고 너무 송구스러워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가슴을 치며’ 기도했습니다.

여러분, 왜 가슴을 칩니까? 너무 슬프고 답답하여 가슴이 뻐개지는 것 같아서 가슴을 치는 것입니다. 이 세리가 자신의 죄와 무지와 허물을 생각할 때에 너무 마음이 답답하고 아파서 가슴을 치며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 자신의 죄와 무지를 인하여 애통하며 회개하며 죄사함 은총을 간절히 탄원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이 세리의 기도를 주셔서 그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편이 되기 위한 또 하나의 과정입니다. 먼저는 하나님 앞에 나와야 되고, 그 다음에는 겸손히 자신의 죄와 무지와 어리석음과 한계를 인정하고 회개하며 애통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5:4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진실로 자신의 죄와 무지와 허물과 미련한을 인식하고 주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긍휼을 구하는 자에게 주님의 은총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열심히 주님 앞에 나오시기 바랍니다. 열심히 나와서 진실로 겸손하고 낮은 자세로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부족합니다. 미련합니다. 주여 저를 용서하소서. 저를 긍휼히 여기소서. 저를 도와주소서하면서 주님의 긍휼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남의 죄나 허물이나 부족한 것을 보고 비난하고 헐뜯음으로 남의 가슴을 치게 만들지 말고 겸손히 자기 가슴을 치며 엎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온전힌 하나님 편에 서서 살아갈 때에 하나님의 놀라우신 축복과 은총을 더욱 충만히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겸손하게 엎드려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정말로 하나님이 내 편이 되고 내가 하나님의 편이 되려면 자신의 죄와 무지와 허물을 인정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겸손해야 합니다. 오늘 14절 하반절을 보세요.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다시 말씀드려 바리새인이 의롭다하심을 받지 못한 이유는 교만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외적으로는 바리새인이 세리보다 더 깨끗하고, 종교생활도 잘 했을지 모릅니다. 세리는 외적으로 바리새인보다 더 죄인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은 자기 죄는 말하지 않고 그 쥐꼬리만한 의를 내세웠습니다. 자신의 죄는 모른 채 세리를 경멸하고 멸시하고 조롱했습니다. 반면 세리는 비록 외적으로 허물이 많았지만 자신의 죄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감히 하나님께 가까이 가지도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우러러 보지도 못했습니다. 겸손히 엎드려 긍휼히 여겨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그를 받아 주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이 사회와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교만입니다. 인간이 과학이나 문화나 예술이나 지식이나 제법 뭐 좀 이루었다고 교만에 빠져 하나님까지도 제멋대로 판단하려고 합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에도 자기 눈속에 들보가 있는 줄은 모르고 남의 눈의 티를 빼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남은 깔아 뭉기고 자신을 높이려고 합니다. 이런 행위는 첫째는 자신의 분수를 모르고 감히 하나님께 도전하는 미련하고 어리석은 행위요 동시에 결국 인간 사이에 갈등과 아픔과 고통을 주는 미련한 행위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께 물리침을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자신의 분수를 알고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그래서 시147:6절에서는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겸손한 자들은 붙드시고 악인들은 땅에 엎드러뜨리시는도다.”고 하셨습니다. 잠18:12에서는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특별히 여러분, 오늘은 대강절 둘째주일입니다. 대강절이란 주님의 낮아지심과 사랑을 기억하며 그 주님이 우리 심령가운데 온전히 임하시도록 준비하는 절기입니다. 그래서 내가 먼저 주님의 생명의 은총을 누리고 나아가 주님 안에 있는 그 생명과 사랑과 은총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절기입니다.

 

그러므로 이 대강절을 보내면서 저와 여러분은 더욱 겸손한 모습으로 주님과 동행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내편이 되어달라고하기 전에 나 자신이 먼저 하나님의 편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정말로 하나님 편이 되어 은혜가운데 살기를 원한다면 주님의 몸된 교회를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남의 허물과 죄를 말하기 전에 자신의 죄와 무지와 어리석음과 허물을 인정하고 자기 가슴을 치며 겸손하게 엎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와같이 여러분이 진정 하나님 편이 되고, 하나님이 여러분의 편이 되어 주실 때에 하나님안에 있는 그 놀라운 은총을 충만히 받아 누리고, 더 나아가 주님안에 있는 그 생명과 평강과 자유와 기쁨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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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지혜로운 인생

 

(겨자씨)

 


제목 : 지혜로운 인생

본문 : 엡5:15-18

1.주어진 것을 선용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여러분, 지혜가 무엇이겠습니까? 지혜란 한마디로 어떤 주어진 것들을 선용할 줄 아는 능력입니다. 육체이든 물질이든 지식이든 사랑이든 이성이든 경험이든 시간이든 상황이든 환경이든 여하튼 각자의 삶속에 주어져 있는 모든 것을 선용할 수 있는 능력이 곧 지혜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선용할 때 모든 것들이 최상의 가치를 갖게 되고 그러면 우리 삶 전체가 복되고 아름답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 그래요? 그것이 돈이든 지식이든 상황이든 환경이든 기회든 시간이든 건강이든 제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다해도 그걸 선용할 줄 모른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돈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아도 그걸 올바르게 사용하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냐는 말씀이예요. 제아무리 박사학위가 100개라도 그걸 올바르게 사용하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어요. 더 나가서 그것을 악용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데 참 안타까운 것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선용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돈이 많은데 그저 자신의 육신의 욕구를 채우는데만 사용하고 더 나아가서는 도박이나 향락이나 사치로 탕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힘을 가지고 폭력이나 휘두르며 강도짓이나 하면 엉뚱하게 사용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지혜와 지식이 많은데 그걸 가지고 남의 것을 빼앗을 궁리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컴퓨터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이용하며 해킹이나 하고 남의 통장에서 돈이나 빼가고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높은 지위를 이용하여 압력이나 행사하여 뇌물이나 받다가 망신만 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정말 무엇이 옳은 일이고 가치있는 일이고 아름다운 일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과연 무엇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일인지를 생각하며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을 선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은 정말 아름답고 가치있고 기쁨과 은혜가 충만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5,16절에서는 말씀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시간을 바르게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시간 뿐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주님의 뜻대로 선용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혜자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세상은 아름답고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은총이 가득한 복된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결로 세상의 왜곡된 가치관과 삶의 모습에 휩쓸려 다니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잘 살피며 정말 무엇이 우리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것인지, 무엇이 생명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게 하는 것인지를 생각하며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작든 많든 하나님의 뜻대로 선용하는 삶을 통하여 주님 안에 있는 생명의 은총을 풍성히 누리는 복된 삶이 되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선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두말할 나위없이 생명과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17,18절 말씀 보세요.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즉 지혜로운 자가 되려면 주님의 뜻을 알아야 하는데 주님의 뜻을 알려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지요. 성령충만함을 받을 때 비로소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바르게 알게 되고 그러면 지혜와 능력과 사랑과 은혜의 영이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을 선용할 수 있는 참된 지혜자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왜 아니겠습니까? 도대체 우리가 진리의 길을 어떻게 알 수가 있어요. 무엇이 진리입니까? 여러분, 여러분의 지혜로 진리를 알겠습니까? 설령 안다면 그 진리의 길로 나 혼자 잘 갈 수 있습니까? 아니 그 이전에 그 진리가 믿어지기는 하던가요? 도무지 안됩니다. 도무지 알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고, 갈 수도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는 것입니까? 어떻게 해야 알 수 있고 믿을 수 있고 따라 갈 수 있습니까?

다른 뾰죽한 수가 없어요. 생명의 영이요,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님이 내 안에 오셔서 내 어둔 눈을 밝혀 주어야 합니다. 내 어둔 마음을 환하게 비춰주어야 합니다. 성령님이 들어오셔서 귀를 열고, 눈을 뜨고, 마음을 열어서 듣게 하시고 보게 하시고 믿게 하실 때 진리의 길을 알게 되고, 영광의 나라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달콤한 생명의 말씀으로 들립니다. 천국이 보이고 주님이 보이는 것입니다.

안 그러면 안 보여요. 안 들려요. 안 믿어져요. 아니 막혀 있는데 어떻게 들려요. 눈이 감겨져 있는데 어떻게 보여요. 죄와 무지와 어둠과 굳어진 마음과 이성과 경험으로 영의 세계에 대하여 소경이 되고 귀머거리가 되었는데 어떻게 들리고 어떻게 보여요. 소경이 되고 귀머거리가 되어 어떻게 분별할 수가 있어요.

이걸 해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사람이 할 수 있나요? 돈이 할 수 있나요? 과학이 할 수 있나요? 경험이 해결해 주나요? 안돼요. 영은 영이요, 육은 육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사람은 사람입니다. 영적인 일은 영적으로만 분별하는 거예요.

고전2:13절 보세요.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신령한 일은 무엇으로 분별해요. 신령한 것으로, 즉 성령의 역사하심을 따라서만이 분별하게 된다는 거지요.

좀전에 보았던 18절 말씀도 보세요. “술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술 취한다는 것은 물론 직접적으로 마시는 술에 취한 것을 말합니다. 술에 취하면 제 정신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술을 마시면 사리분별력과 판단력이 떨어져요. 몸도 제 맘대로 안돼요. 그래서 용감해지지요. 그래서 술 마시고 용기를 얻어 평소에 못했던 소리도 하고, 한 소리 또 하고, 소리를 지르고 범죄 행위를 하고 희롱하고 추태를 부리곤 하지요.

그러나 술취한다는 것은 꼭 마시는 술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의 향락, 안락, 즐거움, 명예, 권세 등등 뭔가 자신에게 위안을 주고 만족을 줄 것이라고 여기는 세상의 것으로 취한 상태, 곧 세상의 것들에게 정신을 빼앗긴 상태도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시는 술에 취하면 제정신이 아니듯이 세상에 취하면 영이 제영이 아닌 것입니다. 술에 취한 사람이 분별력도 판단력도 없고 육체를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것처럼 세상에 취한 사람은 영적 분별력이나 판단력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육신의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자꾸 영이 원하는 길로 가지 않고 엉뚱한 길로 가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것에 취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대한 관심과 열정보다는 세상에 빠져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에 취해 있으면 안된다는 거지요. 하나님의 성령에 취해야 성령의 인도를 따라 거룩한 길로, 진리의 길로, 생명의 길로 달려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너무나 당연한 귀결이 아니겠습니까? 생명의 영이요,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충만 받으면 내 마음속에 생명과 기쁨과 진리와 은혜와 사랑과 거룩과 의로 충만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되겠어요? 내 마음속에 가득 들어 있는 진리, 생명, 은혜, 사랑, 거룩, 의를 따라 살아가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죽어가는 영혼과 예배와 찬양과 기도와 사랑을 나누는 일들에 열심을 내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생명과 은혜와 진리와 사랑과 거룩과 의를 향하여 갈때에 우리의 삶은 더욱 생명과 평화와 기쁨과 은혜와 사랑이 가득한 삶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세상의 것으로 충만함을 받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진리에 대하여 생명에 대하여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대하여는 별로 관심이 없겠지요. 그저 세상에 취해서 세상의 것에 얽매어 욕심과 이기심과 안일함이 나를 지배하게 되겠지요. 마치 거기에 행복이 있고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 것처럼 여기며 세상길로 세상길로 달려가겠지요. 그러다가 그 결국은 어떻게 될 것인지 여러분의 상상에 맡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의 다른 어떤 것보다도 먼저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생명과 진리와 사랑의 영이신 성령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주님의 뜻을 향하여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달려가 달려 갈지라도 세-상길 가지 말고-, 그 하늘비밀 내게- 주신 아버지품을 향해-.’

정말 우리 성도님들은 세상의 다른 어떤 것으로 충만하기 전에 먼저 성령으로 충만하여 진정 생명과 자유와 기쁨과 사랑과 의의 영이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갈 때에 주님 안에 있는 그 은혜의 풍성함을 마음껏 누리며 주의 거룩한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복된 인생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주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16,17절 다시 한번 보세요.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무슨 말씀입니까? 세월을 선용하며 지혜자의 삶을 살아야 하는데 때가 악해서 그렇게 하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때가 악하기 때문에 우리가 보고 듣고 말하는 것들이 정말 진리안에서 말씀안에서 이루어지기가 어렵다는 거예요.

여러분, 안 그래요? 보십시오. 정말 선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 살면 선한 일을 하기가 쉽습니다. 모두가 착하고 깨끗하고 올바른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서 살면 자연히 선을 배우게 되고 사랑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절로 선한 모습과 사랑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 곳에서는 혼자서 못되게 굴고 나쁜 짓을 하고 다니면 이 사람은 결국 왕따를 당하게 될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악을 행하고 싶어도 행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악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 살면 선하게 살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왜요? 보고 배우는 게 악이니까요. 보고 배우는 것이 악이니까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악을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설령 어찌어찌해서 혼자 선한 척하면 왕따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나쁜 줄 알면서도 같이 행동하는 거예요. 그러다가 세월이 가면 자기가 하는 나쁜 행동들이 나쁜 줄도 모르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잠13:20절에선느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는 정말 이걸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나 왜곡된 세상속에 살고 있습니다. 영적인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들과 늘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생각지도 않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물질만능주의, 과학지상주의, 개인이기주의, 집단이기주의, 인본주의가 만연되어 있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우리의 사고 구조도 자연히 그렇게 굳어져 버린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들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왜곡된 가치관에 물들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물질만능주의, 개인이기주의, 인본주의에 빠져 그저 자기 생각대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눈에 보이는 것을 좇아 그저 어찌 하든지 많은 소유하기 위하여 육신이 요구하는대로 죄와 무지속에 무감각하게 살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는 바로 이런 점을 경계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하는 이 한마디 속에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과학은 발달하고 있지만 그러나 정작 진리의 측면에서는 너무나 열악한 환경속에 처해있는 우리의 현주소를 일깨워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무감각속에서 휩쓸려가서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는 자가 곧 큰 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언제나 우리의 심령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각들,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계획들,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고 있는 언행들, 우리가 습관적으로 살아가는 삶의 일상들 정말 주님의 뜻에 합당한 것인지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말씀과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중심을 잘 잡고 살아갈때에 주님의 은혜를 충만히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시간을 올바르게 사용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지혜로운 자가 되기위하여 기억할 것은 세월을 아껴야 한다 즉 시간을 올바르게 사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15,16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없는 자같이 말고 지혜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고 말입니다.

세월을 아끼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아낀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물론 아낀다는 것은 그저 애지중지 보관해두라는 것은 아닙니다. 진정 아끼는 것은 각각의 용도에 맞게 귀하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돈을 아끼는 것은 돈을 쌓아두는 것이 아닙니다. 가치있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재능을 아끼는 것도 재능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재능을 유익하게 사용하여 자신과 남을 풍요롭게 하는 것입니다. 자식을 아끼는 것은 자식을 가만히 앉혀 놓고 먹여 살리는 것이 아닙니다. 맨날 자식들 뒤치다꺼리나 해주는 게 아닙니다. 자식이 가치있게 바르게 진리안에서 살아가도록 돕는 것이 자식을 아끼는 것입니다.

세월을 아끼라는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들을 정말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아름답고 가치있게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들을 정말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자신과 남과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게 모두 유익이 되도록 가치있게 사용하라는 것이지요. 그럴 때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이웃에게 생명과 기쁨을 주며 우리 자신도 정녕 생명의 기쁨이 넘치는 아름답고 멋진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 영생복락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정말 많은 것들을 주셨습니다. 생명의 주시고, 건강을 주시고, 지혜를 주시고, 힘을 주시고, 물질을 주시고, 육체를 주시고, 시간을 주시고 정말 너무나 귀한 것들을 너무나 많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 귀한 것들을 어떻게 사용해 오셨습니까? 앞으로는 어떻게 사용하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정말 선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생명, 건강, 지혜, 물질, 육체, 시간 이 모든 것들을 주님의 뜻을 따라 아름답게 가치있게 사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진정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것으로 취하지 말고 생명과 진리와 의의 영이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올바르게 알아서 주님의 뜻대로 사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 자신이 먼저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온전히 누리는 삶을 살아가고 동시에 여러분의 이웃에게도 기쁨과 유익을 주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더 나아가 죽어가는 영혼들을 주님품으로 인도하며 주의 영광 나타내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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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은혜받은 믿음

 

 

 

 

제목 : 은혜받은 믿음

말씀 : 마20:1~16

1.포도원품 꾼의 비유의 의미

오늘 본문은 유명한 포도원 품꾼의 비유입니다. 어느 날 포도원 주인이 포도를 한창 수확할 시기에 일손이 너무 부족하여 장터로 품꾼을 데리러 나갔습니다. 처음에는 아침 일찍 즉 0시(오전 6시)나가 몇 명을 불러 포도원으로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일손이 부족하여 3시(오전9시)에 장터에 가서 사람들을 불러 가서 일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래도 계속 일손이 부족하여 육시, 구시, 심지어 십일시 즉 오후5시에도 가서 일꾼을 불러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하라하고 하였습니다.

드디어 십이시 즉 오후 6시가 되어 일을 마치고 품삯을 주는데 먼저 제일 늦게 온 사람 즉 1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에게 하루 품삯인 1데나리온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아침부터 일찍 와서 열심히 일한 다른 품꾼들이 ‘한 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저 사람이 한 데나리온을 받으면 우리는 훨씬 더 받겠구나.’하고 은근히 기대를 하며 품삯을 받으러 갔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한 데나리온 밖에 주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주인에게 따집니다. ‘아니, 이 사람은 다 저녁때 와서 겨우 한시간 밖에 일하지 않았고 우리는 하루종일 12시간 동안이나 뙤약볕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일했는데 어떻게 똑같이 한 데나리온 밖에 안 줍니까?’ 그러자 주인이 말합니다. ‘내가 너에게 잘못한 것이 무엇이냐? 애시당초 너희와 한 데나리온을 약속하고 일하지 않았느냐? 나중에 온 저 사람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준 것은 그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선을 행한 것이어늘 너는 너는 내가 저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준 것을 악하게 보느냐? 너는 네가 받아야 할 것을 정당하게 받은 것이니 네 것이나 가지고 가거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비유의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1절을 보겠습니다.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여러분, ‘천국은 마치’ 하시면서 이 비유의 말씀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비유는 무엇에 대하여 우리에게 가르쳐주려고 하신 것입니까? 그렇죠. 천국에 대해서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의미입니다. 천국이 있다. 천국을 믿어라. 천국을 믿고 천국시민으로 살아라 그런 이야기죠.

그 다음에는 포도원주인이 새벽6시, 아침9시, 정오, 오후3시, 오후5시에 계속 품꾼을 찾으러 나갔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포도원 주인은 물론 하나님이시오, 품꾼은 우리들입니다. 포도원주인이 계속 품꾼을 찾으러 갔다는 것은 우선은 하나는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천국으로 보내시기 위하여 계속해서 우리를 찾아와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 의미로 하나님은 우리를 천국으로 보내시기 위하여 계속 찾아오신다는 것입니다. 천국이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다른 것은 몰라도 천국은 반드시 소유하야 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시려고 끊임없이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세 번째 의미는 우리를 그렇게 계속 찾아오시는 것은 우선은 우리를 천국백성으로 삼기 위해서 이지만 단순히 그것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일꾼으로 세우시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품꾼이 일꾼 아닙니까? 우리를 하늘나라 일꾼으로 세우셔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데 참여시키려고 부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 의미는 저녁때가 되어 품삯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저녁때란 우리에게 활동할 수 있도록 주어진 시간이 다 지나고 하나님품으로 갈때를 말합니다. 그때에는 우리가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그 삯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포도원 품꾼의 비유의 말씀의 교훈인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며 첫째는 천국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이요, 두 번째는 천국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셔서 은혜로 주시는 선물이라는 것이요, 셋째, 그렇게 천국백성이 되었으면 그 너무나 소중한 하늘나라를 위해 일해야 한다는 것이며, 네 번째는 그렇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하나님 뜻안에서 살아갈 때에 천국은 물론 큰 상급까지 주신다는 것입니다.

2.예수님은 천국을 가장 강조하셨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하여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천국은 반드시 존재한다. 천국은 예수님이 다른 어떤 것보다고 강조해서 말씀하신 가장 중요한 명제다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약성경에 보면 천국 혹은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씀이 60여차례 나오는데 대부분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4:17절에서는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면 제일 먼저 하셨던 말씀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였습니다. 마4:23절에서는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다고 하셨습니다. 마5장의 팔복에서는 계속해서 어떻게 어떻게 하면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마16:19절에서는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마22:2절에서는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마25:1절에서는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고 하시는 등 수없이 천국에 대하여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계속해서 천국에 대하여 강조하고 계십니까? 두말할나위도 없이 천국이 반드시 존재하고, 천국이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수 없는 가장 중차대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천국을 주시려고 오셨고 그것에 대하여 계속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조차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자꾸 강조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마13:44절을 보십시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한마디로 천국은 우리의 전 재산을 다 팔아서라도, 아니 우리의 육체의 생명을 팔아서라도 반드시 사들여야 할 가장 중요한 재산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정말로 천국을 바르게 알고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천국이 신앙생활의 목적입니다. 물론 지금 여기서 어떻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느냐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원한 천국입니다. 천국이 궁극의 목적이고, 궁극적 종착점이며, 우리가 마침내 들어가 살아야 할 영원하고 완전한 복락의 본향집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천국 천국 그러면 아주 유치한 것으로 알고 뭐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철학적으로 고상하고 선하면 대단한 것으로 압니다. 성경을 요리조리 분해하고 쪼개고 뭐 그럴듯한 말을 하면 대단한 것으로 알고 천국을 이야기하면 시원치 않게 여깁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닙니다. 무슨 대단한 미사여구를 사용하고 무슨 아주 심오한 철학적인 이치를 말하고 요리조리 분석해보고 쪼개보고 무슨 심오한 철학적 이론을 대입해봐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합니다. 간단명료합니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내가 세상의 빛이다. 나를 믿으라.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산다. 나는 다시 온다. 믿는 자는 생명의 부활로 믿지 않는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온다. 그러므로 나를 믿고 나를 따르라. 보화를 땅에 쌓지 말라. 하늘에 쌓으라. 그냥 단순명료한 화법을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냥 그 단순명료한 명제를 그대로 믿고 따르면 되는 것이지 거기에 무슨 다른 해석이나 주석이나 조건을 붙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냥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그토록 강조하신 천국을 확실히 믿고 공연히 이것 저것 갖다 붙이지 말고 그냥 단순무식하게 천국의 법과 원리와 규범과 목적과 가치를 따라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영원한 천국의 은총을 누리는 것은 물론 지금 여기서도 높은 산이 거친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찬양하며 모든 상황과 환경과 조건을 초월하여 현재적 천국와 영원한 천국을 마음껏 맛보며 감사와 기쁨과 소망과 위로를 마음껏 맛보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하나님은 열심히 우리를 찾고 게십니다.

그렇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와같이 천국은 우리에게 있어서 다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한 명제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천국에 가기를 간절히 원하셔서 열심히 우리를 찾아오셔서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계십니다.

오늘 1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보십시오. 포도원 주인이 이른 아침에 직접 집을 나가 품꾼을 찾았습니다. 여기서 포도원의 의미는 이중적입니다. 하나는 이 땅에 이루어진 현재적인 천국이요, 다른 하나는 영원한 천국입니다. 다시 말해 일단 하나님을 믿으면 현재적 천국을 누리다가 마침내 예수님께서 오실 때에 영원한 천국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천국의 놀라우신 은총을 주시기 위하여 이른 아침부터 저녁 해가 저물 때까지 일꾼을 찾고 계신 것입니다. 보십시오. 이른 아침에 집을 나가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삼시 육시 구시 열한시까지 계속 일꾼을 부르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포도원 들여보내시려고 새벽부터 저녁까지 계속 찾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론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포도원 들어가기만 하면 우리는 그 놀라운 천국의 은총을 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을 만나 천국의 은총을 누리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끊임없이 찾아오셔서 우리를 만나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죄와 무지 속에 신음하고 있는 인생을 찾아오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악과 먹고 죄에 빠져 두려움 속에 숨어있는 아담을 찾아와 만나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을 찾아와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수많은 선지자를 보내어 우리를 찾아 오셨습니다.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까지 보내주셔서 우리를 찾고 계신 것입니다. 지금도 제가 비록 부족하지만 제 입술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되게 함으로 여러분을 찾아가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런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그 놀라우신 사랑과 열정으로 살게 된 것입니다. 정말 너무 약하고 추하고 때로는 정말 악하기까지 한 우리들이지만 이렇게 찾아오셔서 불러주시고 은혜주셔서 그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고, 생명의 기쁨과 은혜가운데 살게 된 것입니다. 내가 무슨 큰 능력이 있어서, 무슨 구원받을 만한 선행이나 공로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오직 우리를 사랑하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그 은혜로 말미암아 살게 되었고 구원받고 천국시민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저와 여러분은 이 놀라우신 은총을 기억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그 앞에 겸손히 엎드려 절하며 그 놀라우신 사랑과 은혜를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살아숨쉬고 천국백성되어 영광의 나라를 향하여 나아가게 된 것은 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기억하며 오로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며 겸손히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정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고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큰 은혜를 채워주시는 그 은총을 덧입어 정말 감사와 기쁨과 은혜와 찬양이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은혜 받았으면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포도원으로 부르시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우리가 하나님의 포도원에 들어와 풍성한 것을 누리게 하려 함임과 동시에 우리를 포도원 품꾼으로 쓰시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오늘 1절 말씀을 또 보십시오. 오늘 비유의 말씀의 핵심을 모두 1절에 다 들어있습니다.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무엇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 보낸다? 품꾼입니다. 품꾼이 뭐하는 사람입니까? 일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일만 시키려는 것은 아닙니다. 포도원에서 주인의 보호와 인도와 사랑을 받으며 살게 됩니다. 그리고 일한 연후에는 삯도 받습니다. 그런데 그런 은혜를 받았으면 그리고 그러한 삯을 받으려면 마땅히 자신이 있는 그곳에서 열심히 일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하나님의 포도원에 살게 하신 것은 첫 번째는 하나님의 동산의 은총을 누리게 하려 하심이, 두 번째는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기까지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의 동산에서 일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동산을 가꿈으로 또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동산의 은총을 주기 위해서 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열심히 하나님의 동산에 서 수고하다가 일을 그칠 때가 오는데 그때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한대로 갚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는 새벽 6시에 온 사람이나 오후5시에 온 사람이나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주셨다고 말씀함으로 마치 1시간 일한 사람이나 12시간 일한 사람이나 무조건 똑같이 주는 것처럼 생각할지 모르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많이 했다고 자랑하지도 말고 적게 했다고 낙심하지도 말고 그저 주어진 시간 동안 부름 받은 그 시간와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라는 말씀이지 무조건 똑같이 주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계22:12절을 보십시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너무나 큰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면 마땅히 은혜를 받은 자로서의 삶이 있어야 합니다.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그 은혜를 누리며 그 은혜의 역사를 위하여 수고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면 내려놓아야 할 짐이 있고, 반면에 새롭게 짊어져야 할 짐이 생깁니다. 마11:28~30절을 보겠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여러분, 보십시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즉 인생의 모든 수고와 무거운 짐을 맡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그저 먹고 마시고 입고 잠자고 육신의 것만을 위해서 사생결단하며 살아가는 무거운 짐을 벗겨 주겠다는 것입니다. 또한 죄와 근심과 걱정과 염려의 무거운 짐도 벗겨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쉼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면에 나의 멍에를 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멍에는 뭡니까? 생명의 역사를 위한 멍에, 사랑의 멍에, 헌신의 멍에입니다. 생명과 진리와 평안과 참된 기쁨을 위한 멍에입니다. 그러면 왜 어떤 짐은 벗으라 하시고 어떤 짐은 지라고 하십니까? 물론 이유는 간단합니다. 세상의 짐과 죄의 짐은 우리를 힘들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고 생명을 죽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이 주시는 짐은 생명을 살리고 기쁨과 은혜와 능력과 희망과 소망과 위로를 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분명히 그렇습니다. 우리를 죽이는 짐이 있고 살리는 짐이 있습니다. 죽이는 짐은 뭡니까? 죄의 짐입니다. 그저 육신의 영광만을 위하여 수고하는 짐입니다, 육신의 정욕을 채우기 위하여 지는 짐입니다. 그러면 살리는 짐은 어떤 짐입니까? 사랑의 짐입니다. 진리를 위한 짐입니다. 생명의 역사를 위한 짐입니다. 이런 짐들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기쁨을 주고 은혜를 주고 참된 가치를 가져다 줍니다. 긍지와 자부심과 자존감과 뿌듯함을 가져다 줍니다. 나를 행복하게 하고 남을 행복하고 하고 주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부모는 자녀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자녀를 위하여 짐을 지면서 행복해 합니다. 남녀가 서로 사랑하면 서로를 사랑하기 때문에 서로를 위해서 짐을 지면서 행복해 합니다. 자신이나 남에게 생명과 기쁨과 은혜와 행복을 주는 짐을 지고 나면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그러나 자신만을 위한 짐, 심지어는 죄를 행하며 지는 짐은 행복을 주지 못합니다. 도리어 결국 자신과 남을 죽게 만듭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런 세상의 모든 짐은 내게 맡기고 내가 너에게 주는 생명의 짐, 사랑의 짐, 진리를 위한 짐을 지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럴 때 영원한 천국의 은총을 누림은 물론 지금 여기에도 하나님의 나라가 충만하게 이루어져 사랑과 기쁨과 위로와 소망과 행복이 넘치는 삶을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천국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천국이 우리의 삶의 중심에 있게 하시기 바랍니다. 아직 천국을 확실히 알지 못하는 분들을 위하여 더욱 사랑과 말씀과 기도로 관심을 쏟음으로 온 가족과 모든 교우들이 한분도 빠짐없이 다른 어떤 것보다도 우선해서 하늘나라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렇게 천국의 은총을 누리게 되었으면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총을 이라는 점을 잊지 말고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각자 주어진 자리에서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포도원을 가꾸는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힘있게 이루어가는 가운데 주님의 거룩한 생명의 역사에 참여하는 자로서 누릴 수 있는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기쁨과 은혜와 보람과 가치와 의미와 행복을 누리며 현재적인 천국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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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성숙한 그리스도인

 

 

 

말씀 : 고전2:14-3:3

제목 : 성숙한 그리스도인

프란시스 베이컨이라는 사람은 사람을 다음과 같은 세 부류로 구분을 했습니다. 첫째는 거미 같은 인생입니다. 거미는 거미줄로 집을 지어놓고 거기에 걸려드는 것을 잡아먹는 곤충입니다. 그러므로 거미같은 인생이란 덫을 놓고 남의 등이나 쳐먹고 살려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두 번째는 개미 같은 인생이라고 하였습니다. 개미는 부지런한 곤충으로 사람들에게 매우 긍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지만 여기서 말하는 개미같은 인생이란 긍정적인 의미는 아닙니다. 이것은 남에게는 줄줄 모르고 그저 자신만을 위해서 모아 들이는 이기적인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꿀벌 같은 인생입니다. 꿀벌은 물론 꿀벌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열심히 모아서 남에게 다 줍니다. 심지어는 요즘에는 자기 생명을 받쳐 벌침으로 사람들을 고쳐주기도 줍니다. 그래서 꿀벌 같은 인생이란 이타적인 삶을 추구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여기서 가장 바람직한 인간상이 어떤 모습인지, 우리는 어떤 모습을 지향해야 하는지는 제가 말씀드리지 여러분들께서 더 잘 아실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이러한 세상적인 관점에서의 세종류의 인간상과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의 세종류의 인간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는 육에 속한 사람이요, 다음은 육신에 속한 사람이요, 그 다음은 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이에 대하여 말씀을 나눌 때에 주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셔서 저와 여러분은 우리 주님이 가장 원하시는 인간의 모습을 향하여 좀더 달려감으로 주의 생명의 은총이 충만한 삶을 살아가게 되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1.육에 속한 사람

오늘 본문에 보면 먼저 육에 속한 사람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14절을 보십시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육이란 yucikov"(프쉬키코스)인데 이는 육적인, 천성적인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이것은 혼에 속한 사람, 즉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하여 죄와 무지를 그대로 가지고 죄된 육신의 소욕대로, 죄의 본성대로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따라서 육에 속한 사람은 영이 죽은 사람들입니다. 우리 인생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영과 육과 혼을 가진 존재로 지음 받았는데 죄로 말미암아 영이 죽음으로 육과 혼도 죄와 어둠속에서 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이것을 회복시켜야 영혼을 살려야 하는데 성령을 받지 못하여 영이 죽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성령의 일을 거부합니다. 깨닫지도 못합니다. 인정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면서 도리어 믿는 일을 미련하고 어리석고 연약한 사람들이나 하는 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좀전의 14절 말씀 다시 보세요.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성령이 없기 때문에 성령의 일을 받지 않는 거지요. 복음을 받아들이기는커녕 미련하고 황당하다고 여깁니다. 그런게 어디있느냐며 도리어 생명에 속한 사람들을 조롱하고 비웃고 핍박하고 해요. 당연하지요. 인간의 죽은 영혼이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진리를 알고, 성령의 일을 아는데 그들에게는 성령이 없으니 다만 미련할 뿐이요, 어리석게 여겨질 뿐인 것입니다.

성령을 통해서는 진리를 알고, 주님을 알고, 생명의 길을 아는데 성령이 없으니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는 거지요. 영이 죽어 있어서 성령을 체험할 수가 없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와 부활의 진리에 대해서,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전혀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저 죄된 육과 혼의 요구대로 삽니다. 육과 혼의 본능을 따라, 타락한 본성을 따라 사는 거 뿐이예요. 비록 정신적으로 나름대로 고상한 가치를 추구한다해도 그러나 육은 육이고, 혼은 혼일 뿐이예요. 결국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따라 살다가 죄의 심판을 받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 그렇습니다. 죄된 육신의 본능을 따라 사는 삶은 결코 하나님 앞에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죄된 육신의 본성을 따라 사는 인생은 결코 누구도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설령 세상에서 좀 고상하고 선하고 가치있는 삶을 산다해도 누구도 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만에 하나 육과 정신이 최상의 가치를 드러내며 산다고 해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다면 결코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지옥의 고통을 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여러분은 한분도 절대로 이 편에 서 있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 편에 서 있지 않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동원해야 합니다. 그 무엇보다도 천만다행으로 단순히 육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되었다는 이 사실을 기억하며 감사하며 기뻐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육신에 속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육에 속한 사람이라는 말과 유사해서 좀 혼돈이 됩니다만 성경에서는 육에 속한 사람과 육신에 속한 사람을 분명히 구분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자, 오늘 3:1절의 말씀의 봅시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하노라.”

여러분, 이 말씀을 잘 보세요. 특별히 후반절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그 말씀이요. 고린도 교인중에 아직 믿음이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에 대하여 바울은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안에서 어린아이들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거예요? 밖에 있다는 거예요? 안에 있다는 거지요. 안에 있긴 있는데 어린아이같은 자들, 성숙하지 못해서 어린아이 같지만 그래도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들이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 안에 들어오긴 했는데 아직은 육체적인 삶을 다 벗어던지지 못한 사람, 영보다 육의 지배를 더 많이 받으며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 그럴 수 있습니다. 자, 보세요. 남자가 20세가 되면 군에 입대합니다. 입대하자마자 군인은 군인입니다. 그런데 군인으로서의 모습은 아직 갖추어지지 않았습니다. 군인인 것만은 틀림이 없는데 아직 군인 노릇을 잘 못합니다.

사람이 태어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아기는 태어나면서 사람입니다. 아니 엄마 뱃속에 잉태할 때부터 사람입니다. 그러나 태어나자마자 곧바로 사람 구실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 구실 제대로 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젖을 먹고 이유식을 하고 밥을 먹고 학교에 다니고 오래 기간 훈련과 교육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래도 사람구실 제대로 못하는 사람도 있지만...

영적으로 이런 사람들이 바로 육신에 속한 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 들어오긴 했지만 아직 어린아이라서 주님의 모습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어린아이들처럼 대하며 젖을 먹였던 것입니다.

2절이지요.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고린도 교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너무나 어린아이와 같아서 차마 밥을 먹이지 못하고 젖을 먹였다는 것입니다. 밥을 먹이면 체 할 것 같아서, 단단한 밥을 먹이면 배탈이 날 것 같아 못 먹이고 계속 젖을 먹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여러분 곁의 성도들이 좀 부족하고 연약해도 너무 타박하지 마세요. 그럴 수 있느냐고 몰아세우지 마세요. 그럴 수 있습니다. 뭐 솔직히 다 도토리 키재기 아니겠습니까? 내가 성숙했으면 얼마나 성숙했겠어요. 내가 믿음이 좋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우리 서로 다 부족하고 연약하고 허물 많은 존재라는 것을 기억하며 감싸주고 덮어주고 격려해주고 위로해 주고 기도해 주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젖은 무엇이고, 밥은 무엇입니까? 젖은 부드럽고 넘기기 쉽고 영양가가 많은 음식입니다. 밥은 무엇입니까? 단단합니다. 그냥 안 넘어 갑니다. 씹어야 합니다. 자기가 침으로 삭혀서 넘겨야 합니다. 거친 것도 있고, 쓴 것도 있습니다. 맵고 짜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도 젖과 밥이 있습니다. 젖은 부드럽고 달콤한 말씀들, 소화가 잘되는 말씀들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주님이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등의 주로 은혜에 관한 말씀들입니다. 밥은 단단하고 넘기기 힘들고 소화가 잘 안되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주로 책망이나 헌신의 요구에 대한 말씀들입니다. 이런 말씀은 씁니다. 소화가 잘 안됩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런 말씀을 들으면 배탈이 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면 반드시 먹어야 할 말씀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여기서 목사의 고민이 깊어집니다. 성도들에게 무슨 말씀을 전해야 할까? 어떤 양식을 먹일까? 어떤 분에게는 부드럽고 달콤하고 술술 넘어가는 말씀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어떤 분에게는 단단하고 거칠고 맵고 쓴 말씀도 필요합니다.

어떤 분은 아직도 어린아이이고, 어떤 분은 한참 일할 나이이고, 어떤 분은 이미 노년기에 접어들었습니다. 어떤 말씀은 어떤 분에게는 고단백 영양분이 될 수 있지만 어떤 분은 먹고 배탈이 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다 큰 어른들에게 매일 젖만 먹일 수도 없습니다. 또 단단한 음식만 먹일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고민을 하며 기도하며 말씀을 준비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달콤한 말씀만 바라지 말고 혹 쓴 말씀이라도 믿음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혹은 너무 초보적인 말씀을 한다고 그거 다 아는 건데 라고 생각하지 말고 믿음으로 아멘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는 육신에 속한 사람이라는 이 말씀에서 큰 위로와 격려를 받게 됩니다. 정말 부족하고 연약하더라도, 아직도 세상의 모습이 많이 남아 있다해도 주님을 시인한다면 우리는 비록 어린아이이긴 하지만 주님의 자녀라는 것 때문입니다. 천만다행히도 주님께서는 그런 어린아이와 같은 우리의 모습도 받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혹시 여러분이 부족하고 연약하고 허물된 모습이 많더라도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나는 구원받았다는 그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의 삶이 더욱 생동감이 있고, 활력이 넘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육신에 속한 사람, 즉 영적 어린아이와 같은 삶은 물론 구원을 받긴 했지만 우리가 머물러 있어야 할 위치는 결코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가 성장하기를 원하십니다. 성장하여 자신의 몫을 감당하고, 그러는 가운데 더욱 은혜와 기쁨과 감격을 누리며 주의 역사를 펼쳐 가기를 원합니다. 거기가 바로 우리가 있어야 할 위치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 번째 부류의 사람인 영에 속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오늘 2:15절 보세요.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여기서 ‘신령한 자’가 바로 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말그대로 육과 혼의 지배보다는 영의 지배를 받으며 사는 사람이지요. 물론 그렇다고 이런 사람들이라고 100% 영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육과 혼의 지배를 완전히 벗어던지고 100% 신령하게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영에 속한 사람과 육신에 속한 사람을 정확하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라고 구분하기는 힘듭니다. 그러나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래도 육 보다는 영에 더 많이 지배를 받는 사람은 신령한 사람이요, 영의 지배를 받긴 받지만 아직은 영보다는 육과 혼의 원리에 더 많이 좌우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육신에 속한 사람 즉 아직 성숙하지 못한 크리스찬이 아닐까하고 말입니다.

영에 속한 사람은 어떻게 삽니까? 오늘 15, 16절을 보세요.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먼저 15절 보면 아주 신나는 말씀이 있어요.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지만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않는대요. 이게 무슨 말씀이예요? 나는 남을 마음대로 판단하지만 남에게는 절대 판단 받지 않는다는 말이예요? 아닙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신령한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판단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런 사람은 남에게 판단 받을 만한 일을 잘 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기 때문에 주님의 기쁘신 뜻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향해 힘써 달려가기 때문에 남에게 정죄받고 비난받을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런 사람에게는 진정한 자유가 있다는 거예요.

16절절 보세요.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잘못하면 주님을 가르친다는 말처럼 들을 수도 있는데 그게 아니라 주님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 준다는 거지요.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지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죽어가는 영혼을 바라보며, 또 아직도 미성숙하여 어린아이와 같은 영혼들을 바라보며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령한 사람이란 주의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뜻을 바르게 알고, 주님의 뜻을 바르게 알기에 남에게 판단 받을 만한 일을 하지 않습니다. 또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기에 주님의 마음을 알고 그 마음을 따라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생명을 살리는 일에 열심히 참여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믿으면 약하지만 하나님의 사람임은 맞습니다.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거기에 머무를 수만은 없습니다. 계속해서 아기로 남아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계속해서 쫄병으로 남아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계속해서 젖만 먹고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계속해서 밥을 먹여줄수는 없지 않습니까? 계속해서 보살핌을 받고 있을수는 없지 않습니까?

물론 그렇게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살기에 그 자신에게는 기쁨과 감격과 은혜와 생명력이 충만한 복된 삶이 되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먼저 정말 여러분이 육에 속한 사람, 즉 성령을 배제한 채 그저 육신의 본능을 따라 사는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것 때문에 무엇보다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만에 하나 아직도 그저 육신의 본능만을 따라 살고 있다면 속히 영에 속한 사람 쪽으로 자리를 옮기시기 바랍니다.

혹시 아직도 온전히 영에 속한 사람이 되지 못하여 육신에 속한 사람 즉 믿음의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에 속했다해도 그러나 주님의 사랑으로 구원의 은총을 누릴 수 있는 백성이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기왕이면 한 단계 더 나아가 영에 속한 사람으로써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 갈 때에 기쁨과 은혜와 생명력이 넘치는 풍성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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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전예배설교] 사랑의 우선 순위

 

 

 

 

말씀 : 신6:4~9

제목 : 사랑의 우선순위

1.사랑에도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 인간의 하나님께 대한 사랑, 부모의 자녀 사랑, 자녀의 부모에 대한 사랑, 남녀 간의 사랑, 친구간의 사랑, 인간의 동식물에 대한 사랑 등 어떤 종류의 사랑이든 사랑은 모두 아름답고 가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랑이 아름답고 가치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가치나 우선순위에 있어서 차이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예를 들면 사람에 대한 사랑이나 동물에 대한 사랑이 모두 가치있고 귀한 것이지만 사람에 대한 사랑이 우선적인 것이고, 더 큰 가치를 지닐 것입니다. 또 똑같은 사람에 대한 사랑이라도 부모님께 대한 사랑이 친구에 대한 사랑보다는 더 우선적이고, 더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좀 극단적인 예이긴 하지만 만약 사랑하는 부모님과 친구와 애완견이 물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다면 누구를 먼저 구하겠습니까? 당연히 사람이 우선이 되어야 할 것이고, 그 중에서도 부모님이 우선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사랑은 모두 아름답고 귀한 것이지만 분명 귀중함이나 가치에는 차이가 있고 그래서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 보면 어떤 바보같은 사람들이 개 사랑하기를 사람보다 더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미친 중년부인이 남편없이는 살아도 개 없이는 못산다고 했답니다. 그러면서 개에게 온갖 정성과 시간과 돈을 쳐 들이고 심지어는 개한테 엄마가 어쩌구저쩌구하면서 말을 합니다. 자기가 개 엄마면 그러면 자기도 갭니까? 심지어는 개 사랑하기를 하나님보다 더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은 돈 만원도 무서워 벌벌 떨면서 개에게는 아낌없이 돈을 바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만약 개보다 우선순위에서 밀려난다면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그야말로 개보다 못한 존재가 되는 거 아닙니까? 하물며 하나님이 개보다 우선순위에서 밀려난다면 도대체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여러분, 물론 세상의 모든 것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바르게 사랑해야 합니다. 가치의 차이가 있습니다. 우선순위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가장 우선되어야 하고 가장 가치있는 사랑은 무엇입니까? 두말할 나위없이 하나님께 대한 사랑입니다. 왜 그런지 제가 설명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기까지 해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분이십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주신 분이십니다. 더 이상 무슨 이유가 필요하겠습니까?

눅14:26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보십시오. 심지어는 부모와 형제와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부모와 형제와 자매와 자기 목숨을 미월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세상의그 어떤 소중한 것이라해도 하나님보다 우선이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이 가장 우선적으로 사랑해야 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물질이나 명예나 권력이나 부귀영화는 말할 것도 없고, 개 따위는 더더구나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부모나 친구나 남편이나 아내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보다도 우선 되어야 합니다. 마22:37~38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무엇이 가장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라고 하셨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웃 사랑은 그 다음인 것입니다. 부모 형제 자식 이웃 그 누구라도 하나님보다 먼저 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물론 모든 것을 사랑하되 올바른 사랑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최우선적으로 가장 크게 사랑해야 마땅한 하나님을 가장 먼저 가장 크게 사랑할 줄 아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고 주님 안에 있는 생명의 은총을 풍성히 누리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좀더 구체적으로 왜 하나님을 가장 먼저 가장 크게 사랑해야 합니까?

2.여호와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제일순위에 두고 사랑하며 섬겨야 될 이유는 앞에서 이미 언급이 되었지만 그 분만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4,5절을 함게 보겠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데 그러면 왜 그래야 하느냐?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최우선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며 그 말씀을 가르치고 지켜야 할 전제조건이며 이유이며 근거인 것입니다.

4절에서 우리는 세 단어를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다. 하나님, 여호와, 유일하신 이 단어입니다. 하나님은 신이라는 뜻으로 전능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뜻으로 스스로 있다는 것은 존재의 근거가 타인에게 있지 않고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유일하신 하나님 여호와라는 말씀은 오직 여호와 우리 하나님만이 유일하게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으로 모든 우주만물의 근거가 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으로 모든 우주만물의 창조주로써 우리를 인도하시고 섭리하시고 역사하시는 그래서 우리 모두의 생명의 주인이 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전능하신 하나님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분뿐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직 유일하게 우리를 창조하시고, 인도하시고, 주관하시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다른 무엇보다도 우선하여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우주만물의 주권자이시며 생명의 근원이시며 구원자이신데 그 분보다 소중한 존재가 어디에 있겠으며, 그 분보다 사랑해야 할 존재가 무엇이겠으며, 그분보다 더 믿고 섬기고 공경하고 의지하고 따라가야 존재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오직 유일한 창조주이시며,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만을 온전히 주인으로 모셔들이고 최우선적으로 그 분을 사랑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오직 유일한 하나님의 아들로써 우리의 생명의 주인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셔 들이고 마음과 정성을 다해 사랑하며 섬기며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실로 모든 생명과 위로와 소망과 구원의 근원이신 하나님 안에서 참된 생명의 은총과 기쁨과 평강이 충만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그 유일하신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겠습니까?

3.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오직 유일한 창조주이시며, 섭리자이시며, 생명의 주인이시므로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동원해서 사랑해야 합니다. 오늘 5절을 보겠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어떻게 사랑하라고요?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을 다하여 사랑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한마디로 전인격 즉 모든 영성과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하면 이런 것입니다. 남편이나 아내가 어떻게 서로를 사랑해야 합니까? 마음을 다해서 사랑해야 합니다. 자기 남편도 사랑하고 다른 남자도 사랑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남편은 다른 여자에게 한눈을 팔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세상과 하나님을 겸하여 사랑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과 감정과 의지를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6:24절에서는 예수님은 말씀하신 것입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진정하고 완전하고 유일한 우리의 참된 주인이신 하나님께 충성을 다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또 뜻을 다하여 사랑하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여기서 뜻이란 원어로 ‘영혼, 생명’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뜻을 다한다는 것은 생명을 바쳐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22:37절에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더더구나 죄로 말임아 영원한 형벌 가운데 처할 수 밖에 없던 인생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새로운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명은 이제는 나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이므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내어 놓으라고 하면 언제라도 내어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10:39절에서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 다음에 힘을 다하여 사랑하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힘을 다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역량을 다 동원해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힘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우선은 육체의 힘입니다. 육체가 가지고 있는 힘이 적든 크든 어쨌든 우리가 할 수 있는 대로 그 힘을 주님을 사랑하는 일에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재능의 힘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공부를 잘하고, 어떤 이는 미술을 잘하고, 어떤 이는 음악적인 재능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운동을 잘하고, 어떤 사람은 리더십이 있습니다. 또 권력과 물질의 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권세가 있고, 어떤 사람은 돈이 많습니다. 이것도 큰 힘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종류의 힘을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에 사용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힘을 주님을 사랑하는 일에 사용해야 합니다. 물론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도 사용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우선하여 그 모든 힘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동원하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힘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본래부터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과 구원을 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그러한 모든 힘들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사용할 때에 그 힘이 자신과 남들에게 생명을 주고 기쁨을 주고 소망을 주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의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세상의 다른 무엇을 사랑하는 것보다 가치있는 일입니다. 복된 일입니다. 아름다운 일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죽어가는 영혼들을 살리고 우리 모두에게 생명의 기쁨을 가져다주는 일입니다. 또한 그런 믿음으로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때 하나님은 너무너무 기쁜 마음으로 우리에게 더 큰 은혜로 채워주십니다. 은혜로 성령으로 기쁨으로 평강으로 사랑으로 백배천배만배로 갚아 주십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을 동원해서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고 주님 나라를 이루어가며 주님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런 사랑을 할 수 있습니까?

4.진정한 사랑은 예수님 안에서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이와 같이 정말 우리의 모든 것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데 문제는 우리가 예수님 믿고 구원을 받긴 했지만 아직도 죄와 무지속에 있기 때문에 진정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기가 너무나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해서 못할 때가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에이 어차피 잘 안되는 것 공연히 속 끓이지 말고 포기하자 하면서 포기해야 합니까? 물론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너무 슬퍼하고 안타까워하십니다. 주님의 나라를 이루어 갈 수가 없습니다. 나 자신이 생명의 은총을 온전히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러분, 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할 수 있기 때문에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간단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면 됩니다. 나는 할 수 없지만 예수님은 하십니다. 나는 무능하지만 예수님은 전능하십니다. 나는 무지하지만 예수님은 모든 지혜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예수님 안에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면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요15:5절에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4:13에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나는 할 수 없지만 주님은 하시기 때문에 주님 안에 들어가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와함께 하시면 주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 우리의 생각과 의지와 모든 것을 맡기면 주님께서 지혜와 능력과 사랑을 주셔서 가능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마음과 사랑과 지혜와 능력으로 주님과 자신과 가족과 이웃을 바르게 사랑할 수 있게 되고, 그러면 물론 주님 안에 있는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은 모두가 귀한 것이지만 그러나 사랑에도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사랑은 모두 아름다운 것이지만 그 중에서도 더 아름답고 더 귀한 사랑이 있습니다. 물론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운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이야말로 가장 고귀하고 가장 아름다운 사랑입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의 사랑 중에서는 말할 것도 없이 우리의 창조주이시며, 우리의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와 사망과 지옥의 권세에서 건져주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가장 큰 사랑이고 가장 고귀한 사랑이고 최고의 가치를 지니는 사랑입니다. 생명의 은총을 더욱 풍성하게 누리는 길이요, 천하보다 귀한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이 놀라운 사랑을 받은 저와 여러분은 우리의 창조주이시며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우리에게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을 무엇보다도 먼저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영광의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곳에 오셔서 온갖 모욕과 고통을 당하시고 마침내 십자가의 저주받은 죽음까지 당하셔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예수님을 다른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되 반은 세상을 사랑하고, 나와 내 가족과 내가 즐겨하던 것을 먼저 사랑하고 그 나머지 찌끄레기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먼저 가장 크게 가장 소중한 부분을 드려서 정말 마음과 뜻과 힘과 목숨을 다하여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주님의 생명의 역사를 힘있게 이루어가고 주님 안에 있는 그 놀랍고 풍성한 생명의 은총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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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전예배설교] 생명의 기쁨

 

 


말씀 : 눅10:30-37

제목 : 생명의 기쁨

1.내가 먼저 좋은 사람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태어나서 어떤 사람과 만나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누구를 만나느냐에 의하여 우리의 삶의 모습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부모도 잘 만나면 좋습니다. 돈과 명예와 사회적 지위와 게다가 인품까지 좋은 부모를 만나면 자식의 삶이 평안하고 부요하고 복될 것입니다. 그러나 가난하고 술주정뱅이에다가 인품까지 고약한 부모를 만난다면 자식의 삶이 험난할 것입니다.

물론 배우자도 그렇죠. 그런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 경제적 능력과 사회적 지위와 출중한 외모와 훌륭한 인품을 가진 배우자를 만난다면 당연히 복된 삶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쥐뿔도 없는데다 성품까지 고약한 배우자를 만난다면 당연히 삶이 힘들고 고달플 것입니다. 물론 친구나 이웃도 마찬가집니다. 좋은 친구, 좋은 이웃을 만나면 많은 유익과 기쁨을 누리게 되지만 고약한 사람을 만나면 정말 피곤하고 힘든 것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여기서 꼭 기억해야 할 것은 그러므로 물론 다 기왕이면 좋은 부모, 좋은 배우자, 좋은 친구, 좋은 이웃을 만나야 되겠지만 그러나 내가 그렇게 좋은 사람을 만나려면 먼저 내가 좋은 사람이 되기를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나는 좋은 사람이 못되면서 좋은 사람을 만나려고 한다면 속된 말로 도둑놈 심보가 아니겠습니까? 소위 황금율이라 불리는 마7:12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당연하잖아요? 나는 남을 대접해주지 않으면서 나는 남에게 대접받으려고 한다면 얼마나 모순된 일입니까? 내가 좋은 이웃, 좋은 친구가 되어 주지 않는데 누가 나를 좋은 이웃, 좋은 친구로 대하겠습니까? 나는 좋은 남편, 좋은 아내가 되지 못하면서 어떻게 배우자에게 좋은 아내, 좋은 남편이 되어 주기를 바라겠습니까?

여러분, 우리의 삶에 있어서 정말 만남이 중요하므로 여러분도 좋은 분을 만나되 그러나 그 전에 여러분이 먼저 좋은 사람이 되기를 힘씀으로 결국은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이웃이 되고, 좋은 만남이 되어 서로가 함께 생명의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바랍니다.

2.남에게 끔찍한 불행을 준 사람

그런데 여러분, 안타깝게도 오늘 말씀에 보면 자기는 좋은 것을 누리려고 하면서 남에게 너무나 끔찍한 아픔과 고통과 슬픔을 주는 아주 나쁜 사람을 보게 됩니다. 오늘 30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여러분, 이 얼마나 무지하고 어리석고 안타깝고 비극적인 일입니까? 서로 생명을 살려주고 기쁨과 평안과 위로를 주어도 시원찮을 판에 이 무지 몽매한 강도는 돈 몇푼 얻으려고 다른 사람의 옷을 벗기고 때리고 심지어 다 죽어가는 사람을 버리고 도망을 간 것입니다.

여러분, 이 강도는 잘먹고 잘살려고 이런 몹쓸 짓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게 정말 행복과 기쁨과 가치를 가져다주겠습니까? 뭐 빼앗은 것을 사용할 때에 잠시 자신의 육신의 정욕을 만족시켜 주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도둑이 제발 저린다고 그 심령이 평안할 리도 없고 성령 평생 그 짓을 해서 잘 먹고 잘 산다고 할지라도 평생 동안 온갖 비난과 욕을 얻어먹고 손가락질 당하며 살아가는 더럽고 추하고 무가치한 인생에 불과한 것이요, 결국 영원한 지옥불에 들어갈 수 밖에 없는 너무나 불쌍하고 불행한 인생에 불과한 것입니다.

또 이 강도를 당한 사람의 고통과 아픔과 상처는 어떻겠습니까? 물건을 빼앗겨 물질적으로 많은 손해를 본 것은 고사하고 생명의 위협까지 받았습니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엄청난 아픔과 상처를 받았고, 극도의 공포와 불안에 떨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이후의 삶도 육체적 정신적 물질적으로 너무나 고통스럽고 힘들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즉 이 미련한 강도의 짓은 결국 자기도 죽고 남도 죽게 만드는 심히 어리석고 무지하고 바보 같은 짓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결코 이런 우를 범해서는 안됩니다.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또 크든 작든 또 영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물질적으로나 절대 남에게 상처와 아픔과 고통를 주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결국 자기도 죽고 남도 죽이는 하나님께도 책망듣고, 사람들에게 욕먹고 멸시당하고 손가락질 당하고 무시당하는 어리석고 무지하고 더럽고 추하고 볼품없는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더 생각 해야 할 것은 내가 남에게 상처와 아픔과 고통을 주지 말아야 할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동시에 나 스스로가 그런 불행한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하여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물론 때론 불가항력적인 불행이 있는 것도 사실이긴 하지만 사실 따지고보면 스스로 자초한 불행이 훨씬 더 많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정말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며 그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을 구하며 그 말씀을 따라 선과 진리와 의 가운데 열심히 성실하게 진실하게 살아야 하는데 기도도 하지 않고 말씀도 마음에 새기지 않고 그래서 주님의 뜻과는 어긋나게 자기 마음대로 왜곡된 길로 잘못된 길로 다니다가 마귀의 밥이 되어 봉변을 당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오늘 강도를 만난 사람도 사실 그런 측면이 있습니다. 물론 이 사람에께 끔찍한 고통을 준 강도는 엄벌을 받아 마땅한 죄인 중의 죄인임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그러나 조금 깊이 생각해 보면 강도를 당한 사람에게도 일말의 책임이 있다는 것도 부정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닥 봉변을 당했는데 그 길은 본래 매우 험한 길이라서 강도가 자주 출몰하는 우범지역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은 그 길을 가기를 꺼렸고 부득불 가야 할 때는 여럿이 함께 다니는 것이 상례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여하튼 대책도 없이 혼자 그 길을 가다가 그만 봉변을 당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가 한번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우리 인생길 전체에서나 혹은 인생길의 어떤 한 과정에서 어떤 계획을 가지고 무슨 일을 하든 나혼자 내 마음대로 하다가는 그런 불행한 일을 만나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즉 기도하며 말씀 안에서 오직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인생길을 걸어가며 무엇인가를 추진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그냥 내 마음대로 자신만 믿고 자기 생각대로 주님께서 동행하지 않는 길로, 심지어 주님께서 싫어하시는 길로 가면 자칫하면 이런 봉변을 당하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귀가 캄캄한 밤길, 으슥한 길에 숨어 있는 강도처럼 숨어 있다가 우리 영혼과 정신과 물질과 육신을 덮침으로 상처와 고통과 아픔을 당하기 십상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과거에 우리가 경험했던 실패나 아픈 기억들이 엎드려 기도하며 주님과 동행하며 온전히 주님의 뜻대로 열심히 성실하게 삶을 영위했더라면 대부분은 경험하지 않아도 될 아픔이 아니었을까요? 그냥 내 경험과 지식과 이성을 따라서 내 마음대로 심지어는 하나님께서 금하신 길로 자기 마음대로 갔기 때문에 당했던 그래서 결국 스스로 자초한 불행과 아픔과 상처는 아니었을까요? 마치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불행을 자초했던 것러첨 말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내 경험과 이성과 지식을 따라 내 마음대로 혼자 돌아다니지 말고 우리의 완전하고 유일한 보호자이시며 인도자이신 예수님과 온전히 동행해야 합니다.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께서 인정하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해 주시는 길로 걸어가야 합니다. 그 길이 안전하고 그 길이 복되고 그 길이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누리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절대로 자신의 생각과 능력과 경험만을 의지하며 자기 마음대로 다니지 말고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의 인도하심과 그 뜻을 따라 겸손히 주님과 동행할 때에 생명의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어떤 도움도 주지 못한 사람

오늘 말씀 속에서 우리가 또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너무나 절실하게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고 지나쳐간 어리석고 무지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31절, 32절을 보겠습니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여러분,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지금 강도를 만난 사람은 절체절명의 상황으로 누군가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 때 제사장이 그 길로 지나가면서 어찌된 영문인지 강도를 만나 쓰러져 있는 사람을 외면하고 그냥 지나가버렸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레위인이 지나가게 되었는데 그도 역시 이 사람을 못 본척하고 지나쳐 버렸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이럴 수가 있었을까요? 물론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 제사장과 레위인은 이 강도 만난 사람이 이미 죽은 것으로 생각하고 당시 시체는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그걸 접촉하면 자신도 부정하게 됨으로 피해서 갔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금방 사고를 당한 것으로 보아 아직 강도들이 근처에 있을 것으로 보고 서둘러 도망갔을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무언가 급한 일이 있어 이런 일에 끼어들었다가 시간이 지체되거나 성가신 일이 생길까봐 그랬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어떤 경우든 그들의 행동은 생명을 천하보다도 귀하게 여기는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말씀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거나 아니면 자신의 상황이나 안위나 평안함만을 구하는 무지하고도 어리석은 행동이었습니다. 어떤 경우든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일단은 이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제사장과 레위인은 안타깝게도 그냥 지나쳐 버렸습니다. 그래서 강도만난 사람은 생명을 구함 받음으로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누리고, 반대로 제사장과 레위인은 죽어가며 고통 받는 생명을 살림으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고 귀히 여김을 받을 수 있는 복된 기회를 날려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아니 복된 기회를 그냥 날려버린 정도가 아니라 이건 제사장과 레위인으로서 아니 굳이 제사장과 레위인이 아니더라도 인간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의무를 저버림으로 주님의 책망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에서 한가지 더 생각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것은 직접적으로 아픔과 상처와 고통을 주는 것만 악이 아니라 선을 행하지 않는 것도 죄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사람을 직접 해치거나 고통을 주지는 않았지만 마땅히 돌봄이 필요한 사람을 외면함으로서 간접적으로 아픔과 고통을 당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주님의 준엄한 경고를 받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적극적인 악만이 죄가 아니라 소극적 악, 즉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것, 마땅히 선을 행해야 하는데 하지 않는 것도 악입니다. 그래서 약4:17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여러분, 보세요.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하지 않으면 죄라고 하지 않습니까? 당연하잖아요. 선을 행함으로 다른 사람에게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주는 것이 사람의 책임과 의무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내가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결국 다른 사람이 손해를 보거나 아픔을 겪지 않습니까? 그러니 당연히 죄가 되지 않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에게 적극적으로 상처와 아픔과 고통을 주지 않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남에게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유익을 주어야 할 때에 수수방관함으로 결국 죄를 짓는 어리석은 삶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도리어 적극적으로 선과 진리와 의를 행함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가져다주며 결국은 자신도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고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생명의 기쁨을 가져다 준 사람

앞에서는 여러 가지 안타까운 모습들이 있었는데 다행히 우리는 마지막 부분에서 정말 아름다운 장면을 보게 됩니다. 33~35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강도 만나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사람에게 드디어 구세주와 같은 사람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 사람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여행을 하던 중에 쓰러져 신음하고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는 지체 없이 그에게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신속히 응급조치를 취한 다음에 주막으로 데려다가 주고는 치료비까지 내어 주며 돌보아 달라고 부탁을 하고는 자기의 길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아름답고 귀하고 멋있는 사람입니까? 이 귀한 사람으로 인하여 강도 만나 다 죽어가던 사람은 새 생명을 얻음은 물론 비록 한편으로는 이 아픈 기억으로 말미암아 힘들 때도 있겠지만 이 귀한 사람으로 인하여 감사와 기쁨의 마음도 갖게 되고 새로운 희망과 소망 가운데 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 사람은 육체의 생명을 살릴 뿐 아니라 영적 정신적으로 새로운 생명을 주는 복되고 아름답고 귀한 일을 한 것입니다. 또 사실 그 자신도 하나님께서 천하보다도 귀히 여기는 생명을 사랑하여 자신의 물질과 시간과 정성을 드려 살려 줌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입게 되고 그래서 그 자신도 더욱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으며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삶을 살아가는 복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너도 이와같이 하라고 하시면서 그래서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좋은 이웃이 되어 좋은 만남의 관계 속에서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풍성하게 누리는 복된 삶을 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주님이 주신 말씀을 상고해 보면서 우리 삶을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혹시 어렵고 힘든 상황을 만났던 적이 있다면 환경이나 상황이나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기 전에 먼저 스스로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을 만나고, 가지 말아야 할 곳으로 들어갔었기 때문은 아닌지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정말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을 구하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인데 내 생각과 경험과 의지와 왜곡된 가치관을 따라 내 코가 석잔데 남에게 도움을 줄 여유가 어디있느냐며 합리화시키고 변명하면서 하지 못할 때가 많았던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정말 이제 후로는 먼저 정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며 빛이신 예수님과 온전히 만나 교제할 수 있는 시간과 장소와 상황과 환경을 가까이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예수님과 밀접한 만남 속에서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의 은혜와 능력을 덧입어 주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과 주님의 주시는 힘과 능력과 지혜로서 우리의 육신과 영혼과 마음을 공격하는 마귀사탄의 공격을 물리침으로 절대로 강도 만난 인생이 되지 않고 주님의 은혜와 능력과 축복이 넘쳐나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더 나아가서는 그러한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능력과 은총으로 영적 육체적 물질적으로 강도를 만나 고통을 당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의 기쁨과 평안과 위로를 주며 살아가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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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사모하는 믿음


 

 


말씀 : 고전15:57,58

제목 : 사모하는 믿음

1.상급을 사모해야 합니다.

여러분, 기복신앙 즉 복을 비는 신앙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물론 기복신앙이라는 말은 대부분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기복신앙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신앙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신앙을 그저 복이나 받기 위한 도구쯤으로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기복신앙이 다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다시말해 건전한 기복신앙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온전한 믿음이나 천국에 대한 소망도 없이, 성도로서의 책임이나 의무는 하지 않으면서 단순히 복이나 받으려한다면 당연히 잘못된 믿음이지요. 그러나 올바른 믿음안에서 복을 사모하며 열심히 섬기고 수고하는 모습은 바람직한 자세라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솔직히 우리가 무엇인가를 위하여 애쓰고 힘쓰는 것은 그것을 통하여 무엇인가를 얻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열심히 공부를 하여도 얻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누가 공부를 하겠습니까? 뙤약볕에 나가서 아무리 피땀을 흘려 일해도 가을에 수확할 것이 하나도 없다면 누가 그 고생을 하겠습니까? 직장에서 열심히 일했는데 월급이 없다면 누가 일하겠습니까? 열심히 장사를 했는데 남는 게 없다면 누가 장사를 하겠습니까?

믿음도 그렇습니다. 솔직히 예수님 믿고 아무것도 얻는 것이 없다면 누가 예수님을 믿겠습니까? 예수님 믿으면 죄 용서 받고, 영생을 얻고,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기 때문에 믿는 것 아닙니까? 그렇게 기본적으로 천국에 가는 것뿐 아니라 열심히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면 세상에서도 잘되고 나중에 천국에서 큰 상급도 받을 것을 믿기 때문에 더욱 열심히 성실하게 섬길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말하면 또 어떤 이들은 천국에 들어가면 됐지 뭘 상급까지 바라느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어쩌면 그것은 열심히 신앙생활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변명일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솔직히 상받기 싫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복받기 싫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여러분, 정말로 순수한 사람은 상 받기를 바라고, 상을 받으면 좋아 합니다. 만약 상받는 것도 원치 않고 받아도 기쁘지도 않다면 그건 그 사람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상받기 싫은게 아니라 상받기 위하여 힘쓰는 과정이 싫은 거겠지요.

여러분, 보십시오. 순진한 아이는 사탕 하나를 주어도 기뻐합니다. 그래서 사탕하나 얻어먹기 위하여 재롱을 떨기도 합니다. 그래서 1,000원 한 장을 사모하며 그것을 얻기 위하여 기꺼이 심부름을 합니다. 그러다가 1,000원 한 장 얻으면 너무나 기뻐합니다. 물론 요즘 아이들은 천원 알기를 우습게 여길지 모르지만 그것은 그 아이들이 잘못된 것입니다. 적어도 천진난만한 아이들이라면 작은 것 하나에도 기뻐하고 감사할 줄 알고 그래서 그것을 얻기 위해서 예쁜 짓도 할 줄 아는 그런 모습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여러분 정말 순수한 사람은 유치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맨날 이것저것 달라기나 하고, 떼나 쓰고, 일일이 하나하나 다 챙겨줘야 하는 그런 유치한 모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조그마한 것 하나에도 기뻐할 줄 알고 그래서 그것을 사모하는, 그래서 그 작은 것 하나를 얻기 위하여 뭔가를 열심히 하려고 하는 그런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순수한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순수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상급을 사모하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그대로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예쁜 짓을 하면 하나님께서 좋은 것을 주실 줄 알고 예쁜 일을 하기 위하여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어른이다, 나는 성숙했다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뭔가를 바라고 열심히 하는 것을 유치하다고 여깁니다. 그러면 그런 사람들이 정말로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열심히 하느냐? 그렇지도 못합니다. 뭔가를 바라고 열심히 하는 것 같은 유치한 짓은 하지 않겠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열심히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변명에 불과한 것이지요.

또 이런 사람들 중에는 자기는 성숙한 사회인이요, 신앙인이라고 생각하며 남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뭐 애들이냐? 이러란다고 이러고 저러란다고 저러고... 내가 뭐 어린애냐 사탕하나 얻어먹자고 뭘 하게.... 그러면서 하라고 하면 오기를 부리고 더 안합니다. 그러면서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할테니 간섭하지 말라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결단코 이런 자세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옳은 태도가 아닙니다.

여러분, 인격이든 신앙이든 성숙해지면 성숙해 질수록 더 겸손해지고, 더 순수해지고, 더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이 그렇다그러면 그런줄 알고 졸졸 따라가야 합니다. 동시에 하나님 앞에 두려움도 느낄 줄 알아야 합니다. 예배당에 들어오면 경건함을 느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예배에 엄숙하게 참여해야 합니다. 이런 말은 정말 겸연쩍은 말이지만 그래도 맞는 말이니까 해도 괜찮은 줄 압니다. 목사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혹시 좀 못난 목사라도 그래도 하나님이 세우셔서 말씀의 대언자로, 교회의 지도자로 세운 사람이니까 좀 어렵게 여길 줄도 알고, 그 말에 순종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때묻지 않고 순진무구한 갓난아기와 같은 신앙인 것입니다.

요는 뭐냐하면 순진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끝까지 하나님을 경외하며 말과 행동을 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두려움과 경외심이 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간절히 사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사탕하나 바라고 재롱을 떨 듯이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이 순수한 신앙이고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신앙이며, 정말 기쁨과 은혜와 기대와 소망가운데 주님과 동행하는 살아있는 신앙인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마18:3절에서 말씀합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어린아이와 같이 순진무구하게 주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순진한 아이가 어른을 어려워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경외할줄 아는 그런 순진한 믿음을 가진 자라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어린아이와 같은 순진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또한 그 은혜와 상급을 간절히 사모하는 가운데 온전히 주님과 동행하심으로 주님의 풍성한 은혜를 마음껏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순전한 믿음에 큰 상급이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성경에서는 수없이 반복해서 어린아이와 같이 순진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반드시 복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복의 내용은 크게 보면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현세적인 축복, 즉 지금 여기서 우리가 이 육신을 가지고 살아갈 때에 누리는 복입니다. 땅에서 누릴 복에 대한 약속의 말씀중 대표적인 것은 신28:1~6절입니다. 좀 길지만 같이 읽겠습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한마디로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따라 사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큰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으며,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으며, 자녀가 복을 받고 토지의 소산이 복을 받고 짐승까지 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두 번째 복은 영원한 영광의 나라의 복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시고 더 나아가서는 그 나라를 위하여 충성한 자들에게는 큰 상급도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계22:12절을 보십시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내가 다시 올 것이다. 그때에는 너희가 행한 대로 갚아 줄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고, 그때에는 확실하게 우리가 행한대로 갚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행한 대로 갚는다는 것은 물론 벌 줄 자를 벌주고 상 줄 자를 상 준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세상에서도 물론 상과 벌이 있지만 나아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도 상과 벌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극히 당연한 이치가 아니겠습니까? 심은대로 거둔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진리가 아니겠습니까? 콩심은데 콩나고 팥심은데 팥나는 것입니다. 열심히 일하면 일한만큼 주어지는 것입니다. 농부가 열심히 일을 하면 가을에는 풍성한 수확이 있습니다. 열심히 공부를 하면 좋은 학자가 될 수 있습니다. 열심히 운동을 하면 좋은 운동선수가 됩니다. 성실하게 열심히 사업을 하면 좋은 사업가가 될 수 있습니다. 직장에서 열심히 충성스럽게 일하면 반드시 인정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갓난아기와 같이 하나님의 창조, 주권, 능력, 은혜, 축복을 믿고, 그 안에 생명과 복과 은혜가 있음을 믿고 주님을 따라가면 영원한 영광의 나라는 물로 이 땅에서도 좋은 것들로 채워주십니다. 하나님 자신이 직접 우리를 푸른 초장 잔잔한 물가로 인도해 주십니다. 죄와 사탄의 유혹으로부터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나아가 우리에게 지혜와 능력과 분별력을 주십니다. 그래서 환경과 상황을 이기게 하십니다. 진실한 마음과 성실한 자세를 주십니다. 그래서 열심히 성실하게 진실하게 최선을 다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인정받을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사랑받고 인정받고 존경받게 됩니다. 그러면 당연히 이 땅에서도 많은 것을 누리게 되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는데 귀하게 쓰임 받게 됩니다. 그러니 어찌 세상에서 복을 누리지 않겠으며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 상급이 없겠습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상급은 열심히 성실하게 진실하게 충성스럽게 살아가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당연한 보상입니다. 반면에 우주만물의 창조주시오 주관자이시며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의 뜻을 거스리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자들에게 벌이 주어지는 것도 당연한 대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주님 뜻대로 살아가는 자들에게 복을 주실 것을 수없이 약속하셨고, 반면에 주님의 뜻을 거슬러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화가 있을 것을 수없이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진정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믿음으로 주님이 주실 상급과 칭찬을 바라보며 열심히 성실하게 진실하게 주님 뜻대로 충성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약속을 믿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자들에게 주어질 이 땅에서의 축복과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의 그 무한히 영광스러운 상급을 사모하면서 열심히 주의 뜻대로 살아갈 때에 여기서도 하나님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도 큰 상급도 받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복을 받으려면 열심히 힘써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순진한 마음으로 복을 받기를 원하고 상급을 받기를 원한다면 물론 그 상을 받기 위하여 열심히 충성해야 합니다. 오늘 58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을 줄을 앎이니라.”

고전 15장의 말씀은 소위 부활장이라고 불리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앞부분에서는 부활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우리의 모든 육체는 부활한다, 불신자는 죽음의 부활로 나타나 영원한 형벌가운데 처하고, 예수 안에서 죽은 자들은 영광의 몸으로 부활하여 영원히 주와 함께 왕노릇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 57절에서는 말씀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부활의 승리를 주신, 그래서 영원한 승리와 영광을 주신 주님께 감사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바로 그러기 때문에 그날을 바라보며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라는 것입니다. 수고에는 반드시 상급이 있을 것이므로 장차 주께서 우리를 생명의 부활로 일으키셔서 영원한 영광의 기업을 누리게 하실 그날을 바라보며 주님의 일에 힘쓰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부활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부활하게 됩니다. 어떤 이는 생명의 부활로, 어떤 이는 죽음의 부활을 하게 됩니다. 그때에는 상과 벌이 확실해 집니다. 어떤이는 완전한 형벌 가운데 처하고 믿음으로 승리란 사람들은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믿음을 지키고 주님이 주실 큰 상급을 기대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순진한 믿음의 모습입니다. 또한 그런 삶에 힘이 있습니다. 희망과 소망으로 가득차게 됩니다. 그래서 강하고 담대하게 앞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주신 사명을 감사와 기쁨으로 열심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의 역사도 힘있게 이루어가며 생명력이 넘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 엄청난 영광의 나라가 있는데 그 나라를 바라보면 왜 희망과 소망과 힘와 용기와 위로와 기쁨이 솟아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지 못하는 인생은 희망과 소망이 없습니다. 설령 나름대로는 희망과 소망이 있는 것 같이 보일지라도 그것은 진정한 희망과 소망이 아닙니다.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고 말 것들입니다. 그야말로 일장춘몽에 불과한 것이지요. 아니 그냥 일장춘몽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들이 바라보는 그것들의 노예로 살기 십상입니다. 혹시 끝까지 그런 희망과 소망속에 기쁨을 누리는 것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그 모든 순간들이 일식간에 끝나고 마침내 주님 앞에 섰을 때 영원한 형벌에 처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롬8:24절에서는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벧전1:24,25절에서는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라고 하셨습니다. 보이는 소망, 세상의 모든 물질 부귀영화 풀의 꽃과 같은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은 결코 소망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고 영원한 영광을 가져다 줄 그 하늘의 소망만이 완전한 소망이요, 그때 받을 상급만이 완전한 상급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결코 세상의 썩어 없어질 것들만을 바라보며 사는 인생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실 이 땅에서의 진정한 복, 나아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 주실 그 영광스러운 복을 간절히 사모하며 거기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정말 갓난아기와 같이 순수한 믿음으로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가정에서 교회에서 직장에서 진실하고 성실하고 열심히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몸과 마음과 물질과 시간을 세상을 것만을 위하여 사용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귀하게 사용할 줄 아는 지혜로운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정 어린아이와 같은 순전한 마음으로 주님이 주시는 상급을 간절히 사모하는 가운데서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갈 때에 세상에서도 진정한 희망과 소망과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다가 마침내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 주님의 약속된 축복을 풍성하게 받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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