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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 받고 사는 삶 (잠 30:10-11)

 

 


10. 너는 종을 그의 상전에게 비방하지 말라 그가 너를 저주하겠고 너는 죄책을 당할까 두려우니라  11. 아비를 저주하며 어미를 축복하지 아니하는 무리가 있느니라


이 시간에 “축복 받고 사는 삶”이라는 제목입니다. 그동안 한국교회에 복과 축복에 대한 용어 가지고 논란이 많았습니다. “복은 하나님이 주시고, 축복은 한자로 빌 축(祝) 복복(福)으로 사람이 사람에게 복을 빌 때 쓰는 건데 왜 하나님께 축복을 달라는 거냐?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분이시지 비는 분이 아니시다.” 대충 이런 논란입니다.


맞는 지적입니다. 모를 때는 그렇게 썼지만 안 다음부터는 복(福)과 축복(祝福)을 구분하여 써야 합니다. 창13:3에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고 정확하게 구분하여 있기 때문입니다.


민6:22-27의 구약의 축도에도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했습니다.


그러나 오래된 습관이다 보니 혹시 누가 복을 써야 할 곳에 축복을 썼다 해서 너무 비판하지는 말고 그 마음을 보고 아멘하자고 제안한 바 있습니다. 하나님은 복을 주시고, 우리는 서로 축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을 축복할 뿐 아니라 또한 많은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며 살아야 합니다.


축복을 받기 위해서 조심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1. 약한 대상이라고 함부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10절 “너는 종을 그의 상전에게 비방하지 말라 그가 너를 저주하겠고 너는 죄책을 당할까 두려우니라.” 여기 종은 당시로 볼 때 권리도 인권도 없는 약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여기 “훼방하다”(라솬)는 말은 거짓된 말로 남을 중상모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로 볼 때 본 절은 성실하고 부지런한 종을 거짓으로 상전에게 밀고하여 미움을 받게 만드는 자는 그 종의 원한을 사게 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원한을 품은 종의 간구를 들으시고 공의로 징계하실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강한 자에게 비굴하고 연약하고 비천한 사람에게는 함부로 하기 쉬운 악한 습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이 약점을 보이거나 자기보다 못하다 생각되면 무시하고 함부로 합니다. 약하고 말 못한다고 마음까지 없겠습니까? 자기를 위하는지 해하는지 다 압니다. 특히 윗사람에게 고자질하면 그 상처가 크기 때문에 그를 결코 축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솝 이야기에 어느 날 동물의왕 사자가 병이 들었는데 숲속의 짐승들은 사자에게 잘 보이지 않으면 후환이 두려운 것을 알고 모두 사자에게 아부하며 병문안을 하였습니다. 여러 짐승들이 건강에 좋은 것을 선물하는데 늑대는 사자에게 줄만한 것이 없어 사자에게 잡아먹힐까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아직 여우가 방문안하지 않은 것을 알고 평소에 여우에게 당했던 것을 보복도 할 겸 사자에게 "대왕님, 여우 녀석은 사자님이 걱정되지도 않은가 봐요." "그렇구나. 괘씸한 녀석" 하며 화가 잔뜩났습니다.


바로 이때 여우가 오다가 이 소리를 듣고 사자에게 말했습니다. "사자님, 제가 사자님 병을 고치는 법을 알고 오는 길에 늦었습니다." “그게 정말이냐?” "네, 그것은 늑대를 잡아다가 삶아 잡수시면 회복이 빨리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 결과 아부하던 늑대는 사자에게 바로 잡혀 먹히고 말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솝 이야기는 그냥 이야기가 아니고 인간의 심리를 동화로서 묘사한 이야기입니다.


우리 속담에도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도 곱다.”했습니다. 말을 좋게 하세요. 그러면 오는 말도 좋을 것입니다. 이처럼 마7:12에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하셨습니다. 율법과 선지자란 구약성경을 일컫는 다른 명칭입니다. 남을 대접하는 것이 성경의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서로 먼저 남을 높이고 대접해보세요. 그러면 감사해서 축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웃에게 잘하면 너 잘되라. 잘되라. 축복해 줍니다. 채무자일지라도 가난하면 너무 혹독하게 말라는 것이 율법입니다. 신24:12-13에 “그가 가난한 자이면 너는 그의 전당물을 가지고 자지 말고 해 질 때에 그 전당물을 반드시 그에게 돌려줄 것이라 그리하면 그가 그 옷을 입고 자며 너를 위하여 축복하리니 그 일이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네 공의로움이 되리라” 하셨습니다.


하나님께도 잘하고 사람들에게도 축복 받게 잘해야 합니다. 너무 혹독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원한을 사게 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 개성도 조절해야 합니다. 개성 때문에 자꾸 다투고 다투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까다롭다면 그를 누가 축복하겠습니까?


잠11:10에 “의인이 형통하면 성읍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패망하면 기뻐 외치느니라” 했고, 잠28:12 “의인이 득의하면 큰 영화가 있고 악인이 일어나면 사람이 숨느니라” 했습니다.


다투지 않는다고 온유하다고 함부로 하면 그가 저주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하늘에서 보시고 가만 두지 아니하십니다. 마10:42을 보면 곧 그들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온유하셨습니다. 마12:19에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하신 대로 욕하면 들으시고 때리면 맞으시고 대항하지 않으셨습니다. 저주하지 않고 축복했습니다. 그렇다고 함부로 하면 하나님이 가만두지 않으신 것을 유대인들을 볼 때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눅20:17-18에 “기록된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냐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셨습니다. 사람에게 축복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지 미움의 대상이 되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2. 친근하다 해서 함부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11절 “아비를 저주하며 어미를 축복하지 아니하는 무리가 있느니라.” 이스라엘의 관습상 아비를 저주하고 어미를 미워하는 자는 율법의 규정에 따라서 사형에 처하게 됩니다. 출21:17을 보면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했습니다. 저주만 해도 사형입니다.


자신을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을 가장 존경하고 친밀하게 해드려야 함에도 부모를 괴롭힌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명한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윤리도덕을 정면으로 거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도 그랬지만 오늘날에는 아주 심각한 상황입니다. 부모나 어른에 대한 효성이나 존경은 땅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친 부모에게도 함부로 하는 자녀들이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들에게 너무 잘해주거나, 아니면 해 준 것이 없어 면목이 없거나 어떤 일에 죄책감을 느끼고 부모가 자기 권리를 주장하지 않으면 자녀들이 부모를 우습게보고 버릇 나쁘게 커서 불효를 행합니다.


어떤 집에 혼자 사는 어머니가 자식하나 바라보고 사는데 자식을 사랑해서 뭐 맛있는 것 있으면 너 먹어라, 뭐 좋은 것 있으면 너 가져라, 뭐 좋은 옷 있으면 너 입어라, 그리고 자기는 먹지 않든지 꼭 벌레 먹은 것 몹쓸 것만 먹고 아이한테만 좋은 것 다 먹였습니다.


그랬더니 이 아이가 버릇없이 제가 대장인 줄 알고 어머니를 무시하고 천시하고 조금 남은 어머니의 재산까지 팔아서 사업한다고 몽땅 없애버리고 어머니는 죽든지 살든지 안중에도 없고, 화가 나면 부모에게 분풀이 하고 그런 불효자가 얼마나 많습니까? 교도소에서도 부모 때리고 온 죄수들은 같은 죄수끼리도 가만 두지 않는답니다.


그런데 꼭 부모 탓만은 아닙니다. 잘해줘도 못해줘도 효도하는 자녀가 있고 잘하지 않는 자가 있습니다. 마지막까지 부모 탓으로만 돌리면 안 됩니다. 결국 내 탓입니다. 구약에도 부모에게 함부로 한 자가 얼마나 많았으면 부모에 대한 경고가 많을까요? 가장 범하기 쉬운 죄이기도 합니다.


친근하다고 함부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가까운 이웃은 우리가 날마다 만나는 사람입니다. 내 이웃에게 먼저 잘해야 합니다. 가까운 사람에게 함부로 하고 먼데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하다가 가까운 이웃의 분노를 사서 축복해 주지 않습니다.


부모, 친근하다고 함부로 해서는 안 됩니다. 부모의 주특기는 축복인데 부모를 서운하게 하면 축복이 나가지 않습니다. 아무리 자녀라도 하도 못된 짓만 하면 차라리 죽기를 바라는 부모도 있습니다. 축복 받을 수 있는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자녀는 부모에게 잘하고 자녀도 부모를 축복해야 합니다. 야곱도 별미로서 아버지의 마음을 기쁘게 해서 축복을 받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면서까지 저주하지 않고 축복하셨습니다. 시109:17-18은 우리에게 경고합니다. “그가 저주하기를 좋아하더니 그것이 자기에게 임하고 축복하기를 기뻐하지 아니하더니 복이 그를 멀리 떠났으며 또 저주하기를 옷 입듯 하더니 저주가 물 같이 그의 몸속으로 들어가며 기름 같이 그의 뼈 속으로 들어갔나이다.” 그러므로 약하다고 함부로 해서 상처 입히지 말고 친근하다고 함부로 해서 마음 상하게 하는 일 없으면서 늘 베풀고 사랑하고 축복하여 서로 축복 받음으로 하나님 앞에 복을 받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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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을 받는 자세

 

 

 

 

 

고난을 받는 자세  (골 1:24) 


본문 :
24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로새서 1:24)

[믿음대로 살아도 고난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겪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살아있는 것, 예수 믿게 된 것, 기도할 수 있게 된 것.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가장 큰 것은 예수 믿어서 구원받게 된 것입니다. 믿음으로 천국시민이 된 은혜보다 더 큰 은혜를 없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믿음을 가짐으로 받는 은혜와 축복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음으로 믿음이 자라고 믿음이 자랄수록 말씀대로 살고 하루의 삶이 더 행복해지는 줄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은혜를 받고 믿음으로 살면서 행복하게 사는 삶이 계속 되면 참 좋겠지만 때때로 고민을 하게 되는 일이 생기는데 그것이 말씀대로 사는데도 불구하고 고난이 있을 때입니다. 지금같이 은혜롭게 살고 지금같이 좋을 때가 없는데 갑자기 하나님이 고난을 주시는 이유가 무엇일까를 고민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고난이 없으면 더 말씀대로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믿음으로 살고 말씀대로 살아도 전혀 생각 밖의 어려움이 생길 때가 있고 어려움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성경에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도 이런 때가 있었습니다. 갑자기 흉년이 와서 어려움을 당할 때가 있었습니다. 이삭, 야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윗의 믿음은 정말 훌륭합니다. 그럼에도 그의 일생은 고난이 정말 많았습니다. 욥과 같은 경우도 하나님이 칭찬하실 정도였지만 엄청난 고난이 닥치는 것을 봅니다. 사도 바울은 일생을 하나님에게 바치고 다 희생하며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고난이 날마다 있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도 고난 없이 산 사람이 한 명도 없습니다. 『인생이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욥 5:7) 엄마 뱃속에 있던 아기가 나올 때에도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그러니까 태어날 때부터 엄청난 고난 속에서 태어나고 죽을 때까지 고난이 있습니다.

[애매한 고난을 주시는 이유는 은혜 받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베드로는 우리가 당하는 고난을 “죄로 말미암아 당하는 고난, 애매한 고난, 선한 일을 위하여 받게 되는 고난”(벧전 2장)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죄로 인해 당하는 고난은 당연합니다. 죄 값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고난은 유익이 많습니다. 그 고난으로 인하여 회개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벧전 4:1) 그 뿐만 아니라 죄 가운데 사는 사람이 고난 중에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사람이 많습니다. 고난 중에 예수 믿어서 하나님 앞에 돌아와서 구원받은 사람들이 이 자리에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범하고 죄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찾아온 고난은 축복입니다. 그래서 고난은 축복입니다. 인간들이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괜찮다고 해보십시오. 그러면 당장 이 곳은 지옥이 될 것입니다. 이 고난 때문에 세상이 이 정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 중에 고난을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십시오.

2. 또 선한 일을 하는 중에 고난을 받은 사람은 기쁨으로 참을 수 있습니다. 이런 고난은 받은 상과 영광을 생각할 때 이 고난을 잘 참을 수 있습니다.

3. 그러나 문제는 애매한 고난입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인 것입니다. 말씀대로 믿음대로 사는데도 왜 하나님께서 고난을 주시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기 때문에 더 답답하고 괴로운 것입니다. 이럴 때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에게 복이 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는 기회로 만드는 것이 제일 좋은 것입니다. 우리가 잘못 생각하면 이런 고난이 올 때 화가 나고 원망 불평할 수 있습니다. 또 해결이 안 되어서 고민하고 낙심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고난이 없어지기만을 바라면서 살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4. 하나님께서 이런 애매한 고난을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이유는 첫째로 우리에게 유익을 주기 위해서이고, 둘째로 하나님께서 이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통해서 영광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이 믿음이 매우 중요합니다. 전혀 이유를 알 수 없는 애매한 고난이라도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유익을 주시려고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라는 그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성숙한 사람이 고난을 받는 자세]

  믿음이 어린 사람과 성숙한 사람의 차이가 고난을 당할 때 고난을 받는 자세에서 알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고난이 왔을 때 고난 받는 자세를 보면 그 사람의 믿음의 수준을 알 수 있습니다.

1.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기도합니다.

  믿음이 성숙한 사람은 애매한 고난이 왔을 때 첫째로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기도합니다. 믿음이 성숙한 사람은 주권이 하나님에게 있음을 믿는 사람입니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이 애매한 고난이 온 이유도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이 무엇인가 내게 말씀하시고 알게 하시려는 것이 있기 때문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세상에 우연한 일은 없습니다. 절대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아니면 절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건 하나하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섭리를 알고 뜻을 알기 위해서 엎드리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고난이 크면 클수록 크게 부르짖으십시오. 그러면 큰 은혜를 받습니다. 그리고 큰 믿음을 가집니다. 그러면 큰 축복을 받고 큰 일꾼이 됩니다. 어떤 고난이 와도 엎드리면 자신에게는 복이 되고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게 된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고난은 기도하라는 사인입니다. 다니엘은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기 때문에 사자 굴에 들어가서 밥이 되는 고난이 왔을 때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변명도 하지 않고 오직 기도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 하나만 했습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5)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2-3) 예레미야가 하나님 앞에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 눈을 여셔서 하나님의 엄청난 일을 보여주셨습니다. 『보라 내가 이 성을 치료하며 고쳐 낫게 하고 평강과 성실함에 풍성함을 그들에게 나타낼 것이며 내가 유다의 포로와 이스라엘의 포로를 돌아오게 하여 그들을 처음과 같이 세울 것이며 내가 그들을 내게 범한 그 모든 죄악에서 정하게 하며 그들의 내게 범하며 행한 모든 죄악을 사할 것이라 이 성읍이 세계 열방 앞에서 내게 기쁜 이름이 될 것이며 찬송과 영광이 될 것이요 그들은 나의 이 백성에게 베푼 모든 복을 들을 것이요 나의 이 성읍에 베푼 모든 복과 모든 평강을 인하여 두려워하며 떨리라』(렘 33:6-9) 이 시대는 포로로 끌려가고 있는 시대였습니다. 포로로 끌려갔던 사람들이 돌아와서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고 회복시키신다는 것입니다. 나라가 망하고 성전이 불타도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그 비밀을 알았으니 참 행복했을 것입니다. 히스기야 왕은 다윗처럼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지역마다 다니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라고 하는 위대한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앗수르 왕이 쳐들어왔습니다. 밤새도록 엎드려 기도했을 때 18만5천의 군사들이 다 죽어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히스기야의 이름이 더 높아지고 그 위기가 축복으로 바뀌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히스기야에게 죽음이 찾아왔을 때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시고 15년이나 더 살게 하시고 증거로 해 그림자가 15도나 더 뒤로 물러나는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에게 힘든 일이 생길 때 낙심하지 마시고 히스기야처럼 엎드리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2. 더욱 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삽니다.

  두 번째로 믿음이 성숙한 사람은 더욱 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것만을 결심합니다. 이유는 말씀대로 살 때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말씀대로만 살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늘 복 받을 것을 믿습니다. 고민할 것 없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더 말씀대로 살 것을 결심하고 애를 쓰면 반드시 축복하시고 책임지시는 것을 눈으로 볼 줄 믿습니다. 창세기 26장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이삭에게 하나님은 애굽으로만 내려가지 말고 내가 지시하는 곳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이삭은 흉년 때에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그랄 지방에 갔습니다. 그 때에 100배의 축복을 주셔서 마침내 거부가 되었습니다. 말씀을 듣는 것으로 끝나지 말고 준행하시기 바랍니다. 요셉이 억울하게 감옥에 갔을 때도 거룩하게 말씀대로 살 때 하나님께서 축복해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말씀대로만 살면 하나님께서 책임지십니다. 이것에 대한 확신을 가지십시오. 다니엘이 포로였지만 왕의 진미로 몸을 더럽히지 않고 늘 3번 기도했을 때 어려움이 닥쳐도 하나님께서 결국 축복해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오래 전에 서울에서 집회했을 때의 일입니다. 교회를 새로 잘 짓고 저를 불러주셨습니다. 보통은 강사숙소를 호텔로 자주 정하는데 저에게는 교회에서 5분 정도 거리에 있는 집사님 댁에 큰방을 주셨습니다. 제법 큰집이었지만 추운 날씨였는데도 방에 불을 떼지 않았고 물도 찬 물만 나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좀 기분이 나빴습니다. 장로님들과 저녁 식사를 하는데 집사님 남편이 왔습니다. 그 남편이 제게 공손히 인사하면서 ‘목사님, 저는 1년에 한 두 번 교회에 소풍갑니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더 기분이 더 나빴습니다. 그 말은 결국 자신을 교회에 데리고 가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식사 후에 모두 교회에 가고 저는 조금 여유 있게 가려고 혼자 남았습니다. 그런데 그 남편이 걸어가면 5분 거리를 고물 자동차에서 저를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기대하지 않았는데 아주 놀랐습니다. 저녁예배 드리고 나오니까 또 차로 저를 집에 데려주었습니다. 그 다음날 새벽 예배 때에는 5시 정각에 남편이 넥타이까지 매고 부인 성경을 들고 차에서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새벽예배를 드린 후에는 제가 1시간 이상 기도하니까 그 분이 못 기다리고 먼저 가셔서 저는 걸어서 오곤 했습니다. 그렇게 집회를 계속 했습니다. 그 남편을 보면 귀하고 방을 보면 짜증이 나곤 했습니다. 목요일 새벽에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데 남편이 추리닝을 입고 뛰어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차를 경찰이 몰고 오는 것이었습니다. 알고 보니까 면허도 없이 새벽에 운전 연습한다고 자신이 끌고 돌아다니다가 걸린 것이었습니다. 사실 운전 연습한다고 저를 데리고 다닌 것이었습니다. 참 기가 막혔습니다. 그래서 제 마음 속에 ‘하나님께서 이 가정을 축복해주셔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가정이 축복을 받아야 주의 종이 대접받는 것이 즐겁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낮 공부 때까지 계속 기도할 때니까 방해하지 말라고 하고 집중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이 기적이 일어나는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낮 공부를 마치고 점심을 시내에서 먹고 돌아오니까 대문을 활짝 열고 남편이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그 남편이 저를 데리고 소파에 앉더니 두 내외가 큰절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 때문에 축복을 받았다면서 절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분은 중동에 수출을 했는데 사업을 확장시켰다가 부도가 났습니다. 은행에서 압류하려고 결정을 내리는 상황에 부흥회가 있었고, 교회에서는 부흥강사를 위해서 호텔도 얻고 준비도 했는데 두 내외가 모시겠다고 하니까 믿음이 약한 사람들이 낙심할까봐 허락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새벽 예배 나가서 부인집사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 처음에는 십일조 생활을 했는데 회사가 잘 되니까 십일조의 액수가 커져서 떼먹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교회 5분 거리에 살면서도 장로님, 목사님 아무도 대접한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한 번도 대접하지 못하고 집이 날아갈 상황이 되자 부흥강사를 대접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래서 제가 거기서 머문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망한 사람이 결심하고 십일조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겠다고 결심하고 장로님들과 저를 대접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목요일에 경찰에 걸리는 바람에 저는 기도했는데 그 시간에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수출전람회 중에 그 회사도 전시를 했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그 회사를 보다가 1억 5천만원을 주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 시대에 1억이 얼마나 큰 돈입니까! 그래서 그 회사를 살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 수출 제품을 들고 교회에 가져와서 간증하고 설교했습니다. 우리에게 고난이 왔을 때 우리가 어떤 태도를 가지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첫째로 기도하기로 결심하십시오. 둘째로 말씀대로 살겠다고 결심하십시오.

3. 고난을 기뻐하고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성숙한 믿음의 사람들은 기뻐하고 감사합니다. 욥의 문제는 기뻐하고 감사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살아있는 것 자체가 한심스럽고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이 데려가시는 것이 났다는 약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만약 욥이 그 상황 중에 기뻐하고 감사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사도 바울은 어떤 고난이 있어도 기뻐하고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성숙한 믿음을 가진 사람]

  그러면 어떤 믿음을 가진 사람이 이렇게 살겠습니까?

1. 첫째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고난은 우리에게 복이 된다는 것을 믿는 사람입니다. 고난은 위대한 사람을 만듭니다. 고난은 마치 뜨거운 불의 용광로와 같아서 금을 넣으면 모든 찌꺼기가 사라지고 정금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유도 없이 고난을 주시는데 목적 가운데 가장 큰 것이 그 사람의 찌꺼기를 없애기 위해서입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였던 것입니다. 정욕, 혈기, 교만, 위선, 오만의 모든 찌꺼기들을 없애기 위해서 고난의 용광로 속에 하나님은 우리를 넣습니다. 우리에게 고난이 왔을 때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할 때 그는 은혜를 받으면 위대해지지만 자신에게 고난을 준 사람을 원망하고 미움을 가지면 그 사람은 더 악한 사람이 됩니다. 고난을 받는 자세를 보면 그 사람의 믿음 상태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고난 받는 자세가 무척 중요한 것입니다. 억울하게 고난 받을 때 하나님은 생각지도 않고 사람과 세상을 원망하고 불평하면 더 악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2.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고난은 반드시 전화위복이 된다는 것을 믿는 사람입니다. 요셉과 같이 억울한 고난은 반드시 더 큰 축복을 가져온다는 믿음을 가지십시오. 이런 믿음의 소유자들은 항상 감사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을 믿으십시오.

3. 세 번째로 고난이 왔을 때 항상 기뻐함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된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다니엘은 이런 믿음으로 사자굴에 들어가도 기도하고 감사할 수 있었던 것이고 스데반도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기쁨이 충만했고 원수들을 위해서 기도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것입니다. 그 자리에 사울이 있었습니다. 사울이 스데반의 그 모습으로 사도 바울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영적성숙의 변화는 고난 받는 태도와 정비례합니다. 그 사람의 믿음이 성숙해져가는 것은 고난 받는 태도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빌 1:29)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 주시는 목적인 것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소원과 목표가 주님을 위해서 기쁨으로 십자가를 지고 고난을 받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따라오려면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1:8)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딤후 2:3)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딤후 4:5) 계속 디모데에게 강조하는 것이 고난을 잘 받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우리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실 때까지 남은 고난을 자신의 몸에 채운다는 것입니다. 이 사도 바울의 자세가 얼마나 위대한지 모릅니다. 저와 여러분도 고난 많은 이 세상에서 살면서 고난 때문에 낙심하는 사람되지 말고 모든 고난을 자신에게 복이 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을 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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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주일설교 / 부활은 기독교신앙의 핵심

 

 

 

성경 고린도전서 15:1-10.

 


우리 주님 부활하셨습니다!
우리 죄를 씻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고난 받으시고 죽으신 주님,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믿는 모든 인생에게 영원한 생명의 복을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3: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5:24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자는 그 순간부터 영원한 생명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11:24-27절,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신앙의 핵심입니다.

 @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본문 3-8절입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바울사도가 사역하던 당시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본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생존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 모두가 부활의 증인들입니다. 이들을 통해서 주님의 부활이 널리 전파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사도는 자신을 그 증인의 반열에 올려놓고 있는 것입니다.

잘 아시는데로 바울사도는 사울이였을 때에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과 같이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보지는 못했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고백하는 것처럼, 사울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던 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을 붙잡아 잔인하게 처형하던 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핍박자 사울이 변하여 사도 바울이 되고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자가 된 것은 분명히 그의 간증처럼 다메섹도상에서 빛가운데, 음성 가운데 주님을 만났기 때문인 것입니다.

핍박자 사울을 만나주신 주님은 분명히 사울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이신 동시에 다시 사신 부활의 주님이십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바울사도는 자신을 부활하신 주님의 목격자들과 함께 부활하신 주님의 증인으로 올려놓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가 주님의 부활사건의 증인들입니다. 우리가 만난 주님은 부활하신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2천여년 전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시지 않으셨다면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주님을 다시 만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이 전부라면 주님도 그저 수 많은 위인들중의 하나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부활하셔서 지금까지 믿는 모든 자들의 구원자가 되십니다. 저와 성도님들이 만난 주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인 동시에 분명히 부활하신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주님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 부활은 소망입니다.

이 땅에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신 주님과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했고 부활하신 주님의 사랑을 그 누구보다도 극적으로 체험한 베드로의 고백입니다. 베드로전서 1:3-4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이 세상은 우리들이 영원히 머물 곳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있는 그 무엇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기독교 사상가 C.S 루이스는 ‘영원하지 못한 것은 영원히 무용지물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인생은 결국 이 세상에서 절망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된 그리스도인들은 천국과 영생을 유산으로 받기에 그 소망을 가지고 세상을 이기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4:18절,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그러므로 부활은 모든 성도의 산소망, living hope, 참된 소망인 것입니다.

 (이제)
 @ 부활은 신앙입니다.

부활은 과거의 역사적 사실이고(물론 지금도 우리 가운데 일어나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미래의 소망인 동시에 현재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세우는 힘입니다.

규장출판사에서 나온 ‘부활’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런 글이 있습니다. ‘장래 부활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현재 부활의 생명력이 공급되어 현실에서도 죄와 사망의 세력을 제압하는 능력을 발휘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현실에서 몸부림치며 살아가야 하는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능력의 근원중의 근원이요 핵심중의 핵심이다.’

고린도전서 15:55-58절,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의 부활로) 말미암아 (현재)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라” 아멘!

부활신앙은 늘 다시 시작하는 신앙이고 새롭게 시작하는 신앙입니다. 동토의 땅을 뚫고 돋아나는 봄의 새싹의 힘이 바로 부활신앙의 힘입니다.

‘디싸이플’이라는 기독교잡지에 소개된 어느 무명작가의 글이 있습니다. ‘사나운 소리가 들려도 너무 겁내지 말게 하시며 / 꾸지람을 들어도 너무 낙심하지 말게 하시고 / 바람이 분다고 아무데로나 끌려가지 않게 하시며 / 햇볕이 뜨겁다고 그늘만 찾지 말게 하소서 / 기왕 지나온 길 되돌아 보지 말게 하시고 / 어둠이 덮여와도 외로워 하지 않게 하소서 / 몽치가 다가올 때에도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던 주님 / 제자의 배반에도 위로의 시선을 던지시던 주님 / 침 뱉는 자들도 용서하시던 주님 / 십자가 위에서도 어머니를 생각하시던 주님 / 오 주님 / 나도 부활하게 하소서 / 내 가슴이 푸른 하늘이 되게 하시고 / 내 생각이 넓은 바다가 되게 하시며 / 내 영혼을 봄 동산으로 만들어 주소서 / 아-멘!’

부활주일, 부활하신 주님, 영으로 우리 각 심령에 새롭게 모시고 주님이 주신 천국과 영생의 산소망안에서 부활의 능력으로 다시 시작하고 새롭게 시작하는 모든 예배자들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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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말씀 설교] 소통의 역사

 

 

 

제목 : 소통과 연결의 역사”,

말씀 : 사도행전(34) 10:44-11:18

 

오늘 본문은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을 통해 이방인에게도 구원의 복음이 전파되는 역사적인 사건의 결론부분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셨던 말씀이 성취되어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사도행전 1:8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들이 사도행전으로 말씀을 나누면서 계속 확인한 것 처럼, 인간적인 생각이나 힘으로는 결코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이제, 오늘 본문을 깊이 묵상해 보면 생명의 복음이 이방인에게도 전파되는 것을 가능케 한 성령의 구체적인 역할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이 시대, 신앙하는 우리들이 성령을 구해야 하는 분명한 이유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 먼저, 소통의 역할입니다.

오늘 본문 44-46절입니다.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무엇을 보게 됩니까? 먼저, 하나님과 철저이 단절되어 있던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그 증거로 방언을 하며 그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입니다.

몇 구절의 간단한 말씀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베드로와 욥바에서부터 동행한 ‘할례받은 신자’들(사도행전 10:23절, “...이튿날 일어나 저희와 함께 갈새 욥바 두어 형제도 함께 가니라” 물론 이 시점에서는 주님을 영접한 유대 그리스도인들입니다.)이 감짝 놀란 이유입니다. 그들의 생각으로는 이방인들은 결코 하나님과 통할 수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방인들이 자신들 앞에서 방언을 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을 직접 보게 된 것입니다.

더불어 결코 서로 함께 할 수 없는 사람들이 하나가 되는 모습을 봅니다. 각기 욥바와 가이사랴에 있던 베드로와 이방인 고넬료가 먼저 만나게 되었고, 고넬료와 함께 한 이방인들이 베드로에게 말씀을 듣는 중에 하나님을 만남으로 스스로는 결코 함께 할 수 없는 유대인들과 구원의 은혜안에서 하나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소통의 역사입니다.

우리가 사는 모든 삶의 고통이 어디에서 옵니까? 단절에서 옵니다. 단절은 죄의 결과입니다. 태초에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가 단절됩니다. 이때부터 인간의 고통이 시작된 것입니다. 죄로 인한 홍수심판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고 보존된 인류가 바벨탑을 쌓아 또다시 하나님과 맞서 자기들의 이름을 내려한 결과가 무엇입니까? 바로 언어의 단절입니다. 인간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되고, 서로의 관계가 단절된 것입니다.

이 관계가 어떻게 회복되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회복된 것입니다. 죄로 하나님과 철저이 단절된 인간이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된 것입니다. 또 주님이 부활 승천하신후 약속하신 성령이 오심으로 언어가 하나되고 복음을 통해 인류가 하나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에베소서 2:12-14절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전혀 모르던 시절을 생각하여 보십시오. 그때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들과 원수가 되어 있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아무런 도움을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도 모르고 희망도 없는 멸망할 수밖에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비록 전에는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었으나 그리스도 예수께서 피를 흘려 이루신 그 구원의 성업으로 이제는 하나님과 가까워졌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은 우리 유대 사람과 여러분 이방 사람들을 한가족으로 만들고 우리 사이를 갈라놓았던 벽을 허물어뜨리셨습니다.”(현대어성경) 이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이고 소통의역사입니다.

저는 이 어려운 시대, 성령으로 말미암은 이 소통의 역사가 우리 가운데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다양한 단절의 아픔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 가정에서, 교회공동체 내에서, 이 나라와 민족가운데서 경험하는 아픔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악한 세상과 우리 자신들의 연약한 본성을 이기지 못한 삶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도 가능성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순간도 성령이 역사하면 어떤 상황과 형편, 조건속에서도 소통의 역사는 일어납니다. 오늘 본문 47-48절이 기록된 이유입니다. “이에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하리요 하고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하니라 저희가 베드로에게 수일 더 유하기를 청하니라” 이방인들이 말씀을 듣고 세례를 받고 그리고 성령이 임한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듣는 도중에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이 체험되고 방언이 터지고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올려진 것입니다. 그 후에 물로 세례를 받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은 이 소통의 역사는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이 소통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이 체험이 우리들의 교회와 성도들을 통해서 가정으로, 사회로, 이 나라와 민족가운데로 확산되어 나가기를 바랍니다. 우리들의 사명입니다. 그래야 삽니다. 요즈음 화두가 ‘소통’인 분명한 이유입니다. 정치계, 경제계, 사회...모든 분야에서 소통의 역사가 일어나야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습니다.

미래교회학자 레너드 스위트교수도 21세기 교회의 키워드는 ‘통’(‘소통’)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체험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을 ‘소통’으로 설명합니다. 그리고 소통의 은혜를 체험한 교회는 세상과 소통해야 함을 말합니다. 세상과 타협하거나 변질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으로 소통해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소통케 하는 성령의 역사속에 사는 성도는 세상을 피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굴복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며 주의 복음을 소통시켜 나갑니다. 이것이 바로 선교이고 전도입니다. 초대교회가 바로 성령으로 말미암은 소통의 역사를 체험하며 세상가운데로 파고 들어간 교회의 모델입니다.

이제, 소통의 역사는 연결의 역사로 이어집니다. 성령이 역사하면 소통과 동시에 이로 인해 모든 것들이 연결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사도가 그간 체험했던 일들을 회고하며 간증하는 분명한 이유입니다. 본문 5-14절까지의 말씀의 내용입니다. 베드로사도가 욥바에서 처음 환상을 보았을 때에는 그것이 무엇인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순종과 기대로 한걸음, 한걸음 따라갔더니 가이사랴에 있는 고넬료의 집에서 이방인에게도 구원의 은총이 주어지는 것을 목도하게 되었다는 놀라운 간증입니다.

사순절 새벽기도회동안 자가점검을 위하여 40조각의 퍼즐을 매일 한조각씩 나누어 드리고 있습니다. 사실, 그 조작만 가지고는 마지막 순간까지 무슨 모양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순종과 기대의 마음을 가지고 한 조각 한 조각 맞추어 나가면 조각이 서로 통하고 연결되어 완성된 모습을 드러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이고 연결의 역사입니다.

우리들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앞에 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들이 경함한 인생의 부분들이 만들어 낼 큰 그림을 우리들은 알지 못합니다. 우리들이 세상을 떠나고서도 바로 그 그림이 그려지는 것은 아닙니다. 일정기간이 지나고 나서야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그리신 그림이 보여집니다. 우리 후손들의 몫일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할 일은 매순간 우리에게 주어지는 다양한 인생의 모습들을 거부하지 말고 의심하지 말고 받아들여서 최선을 다해 살아내는 것입니다. 여기에 있는 그 누구도 인생을 최고로 잘 살 수 있다고 장담할 분은 아무도 없으십니다. 그러나 누구나 최선을 다할 수는 있습니다.

돌이켜 보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순간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만일 그 순간들을 다 거부했다면 오늘 이 시간 저는 이 자리에 있지 못했을 것입니다. 제게 허락된 하나님의 은혜는 순간마다 최선을 다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8: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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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말씀 / 주일설교 / 유혹 앞에서

 

 

 

제목 : 유혹 앞에서

성경 : 마4:1-11

1.유혹 앞에 서 있는 인생

여러분, 오늘날 우리는 정말 주님이 보시기에 올바른 영성을 유지하며 살기가 매우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 주변에 우리를 유혹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사회가 다양화되고, 문화가 급속히 발달하고, 물질이 풍성해짐으로써 질적, 양적으로 더 높고 더 많고 더 다양한 욕구를 가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말 중에 견물생심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도 있고, 아는 게 병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아는 게 많아서 먹고 싶은 것도 많겠다는 말도 흔히 합니다. 맞습니다. 차라리 안 보고 모르면 갖고 싶지도 않고, 먹고 싶지도 않을 텐데 자꾸만 맛있는 음식과 화려한 옷, 좋은 집들이 보이고, 번쩍번쩍 빛나는 차들이 돌아다닙니다. 더 크고 더 좋은 냉장고 텔레비전 휴대폰 카메라 컴퓨터 등이 하루가 다르게 쏟아져 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꾸만 눈이 높아지고 더 좋은 것을 갖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걸 소유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합니다. 돈이 있어야 좋은 옷, 좋은 차, 좋은 집, 좋은 가전제품도 사기 때문입니다. 물론 더 나은 것을 바라는 것 자체가 나쁜 일은 아닙니다. 아니 좋은 것에 대한 욕망은 그것을 소유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도전하게 만들어 인간의 삶에 발전을 가져오는 동력원이 됩니다. 그래서 오늘날 인류는 과거 어느 때와도 비교할 수 없는 번영을 이룬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날 우리가 이렇게 풍요롭고 넉넉하고 마음 껏 자유를 누리는 세상이 되었는데 오늘 우리의 삶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외형적으로 풍성해진만큼 그렇게 우리의 삶이 전체적으로 풍요로워지고, 아름다워지고, 만족과 감사와 기쁨이 충만한 삶이 되었습니까? 사실은 그렇지를 못합니다.

엊그제 뉴스에 보니 살인 강도 강간 등의 흉악범죄는 해마다 증가일로에 있다고 합니다. 묻지마 폭력이 증가하고 결혼도 잘 하지 않으려하고 결혼을 해도 아이도 잘 낳지 않으려고 하고 이혼율도 세계최고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또 사회적 갈등은 왜 그렇게 많습니까? 툭하면 싸우고 헤어지고 못살겠다고 아우성을 치고 머리에 띠 두르고 결사반대, 결사 항전을 외치며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하는 일들이 많은지...

옛날에는 어렵고 힘들어도 잘만 살았는데 요새는 왜 그렇게 갈등이 많고 참 이상하지 않나요? 이만큼 풍요롭고 넉넉하게 되었으면 마음도 좀 더 넉넉하고 서로 받아주고 이해하며 갈등없이 살 만도 한데 말입니다.

그게 다 왜 그렇습니까? 소유나 과학이나 지식이나 물질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처럼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들은 올바르고 가치있게 사용하여 인간의 행복을 위한 보조도구로 활용해야 하는 것인데 사람들이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고 도리어 사람을 수단으로 삼으려고 하니까 자꾸만 사회가 삐그덕거리고 시끄러워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런 세상의 왜곡된 가치관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게 바로 가장 큰 유혹인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까먹게 만드는 가장 큰 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올바르고 예민한 영성으로 올바른 판단력을 가지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배격할 것은 배격하며 우리 자신을 지켜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엡5:15,16절에서는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이런 어그러지고 왜곡된 가치관이 만연된 세상속에서 주님 앞에 엎드려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올바른 영성을 가지고 모든 왜곡된 가치관과 유혹을 이기고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예수님의 시험-사탄에 대한 승리의 선포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신 후에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상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을 수 있습니까? 감히 마귀 주제에 하나님의 아들을 시험하다니 이게 말이나 됩니까?

물론 예수님이 그 시험을 허락하신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일차적으로 마귀에 대한 예수님의 승리의 선포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최초의 인간 아담은 마귀의 시험에서 실패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죄가 들어왔고, 죄가 들어옴으로 인간에게는 고통과 사망이 왔습니다. 결국 인간의 고통은 사단의 시험에 짐으로써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모든 고통과 사망권세를 물리치려면 사탄의 유혹을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사망권세를 비롯한 모든 어둠의 권세가 쫓겨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탄의 시험을 물리치시기 위하여 일부러 마귀의 시험을 허락하셨고, 보기 좋게 물리치심으로써 승리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두 번째 의미는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해 오는 마귀사탄의 도전을 우리가 어떻게 뿌리칠 수 있을 것인가를 분명히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한마디로 주님이 마귀 사탄의 권세를 깨트리시는 분이므로 그 안에서 사탄 권세를 이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마귀를 물리치심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무기로 삼아, 그것을 기준으로 삼아 분별력을 가지고 사탄의 흉계를 깨트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이 왜곡되고 유혹많은 세상에서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는 분명한 방법을 알게 됩니다. 그게 뭐냐?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무기고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이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 그래요? 누가 우리 스스로 사단의 권세를 이기겠습니까? 누가 스스로 올바른 분별력을 가지고 죄의 유혹을 이기겠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도 스스로는 이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의 권세와 싸워 이기지 않는 한 인생은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고도로 과학이 발달하고 물질문명이 발달하고 풍성해 진다해도 사단의 세력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결코 행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물질도 생명도 과학도 지식도 진정으로 올바르게 사용할 수 없습니다. 도리어 그것들의 노예가 되고 맙니다. 그것 때문에 갈등을 일으키고 싸우고 죽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이처럼 문명이 발달하고 풍성한데도 오히려 더 불평과 불만과 갈등과 걱정근심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단의 권세에서 벗어나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살아가면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이 은혜임을 압니다. 함께 나누어야 함을 압니다. 서로 존중함을 압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압니다. 위로부터 평안과 기쁨과 자유와 은혜가 쏟아져 내려옵니다. 그래서 행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여려분, 진정으로 행복을 원하신다면 다른 어떤 것보다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품안에 온전히 안기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어떤 다른 잣대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잣대로 삼아 주님과 동행할 때에 주님의 능력으로 모든 어둠과 죄와 사탄의 권세를 이기는 승리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물질적 시험을 이기신 예수님

그렇습니다. 첫 번째 시험은 물질적인 시험이었습니다. 마귀는 40일 동안이나 금식하여 주리신 예수님께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여기 있는 돌들을 떡으로 만들어 먹어보라는 유혹을 합니다. 그러면 배도 불러서 좋고, 동시에 너의 권능을 보여줌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임을 보여 줄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마4:4) 한마디로 비록 떡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앞설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 비록 배가 고파 떡이 필요한 건 사실이지만 하나 그러나 너 따위의 말은 들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주려서 고통스러운 것은 사실이나 그래서 떡도 절실히 요구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러한 육적인 고통에서 해방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행위는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육체적인 요구도 중요하지만 과연 어떤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냐가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설령 내가 굶어죽는 한이 있어도 너 같은 악의 존재의 말을 들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은 하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물질은 분명히 필요하고 요긴한 것이지만 그러나 절대로 그것이 하나님보다 앞설 수는 없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물질인 육과 영혼으로 이루어진 존재이기에 물질이 반드시 필요한 존재이고, 물질이 우리의 욕구 중 많은 부분을 충족시켜 주지만 그러나 우리는 결코 물질을 하나님과의 사람의 관계보다 우선순위에 두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세상은 이게 뒤바뀌어져 있습니다. 물질지상주의에 물들어 있습니다. 물질이 사람보다 위에 있고 심지어는 하나님보다도 위에 있습니다. 그래서 물질 때문에 싸우고, 때리고 심지어 죽이기도 합니다. 물질 때문에 신앙생활도 제대로 못하고, 물질의 노예처럼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물질 때문에 이웃과 친구와 가족 간의 관계가 파괴될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의 은총도 사람과 사람사이에 누려야 할 사랑과 기쁨과 은혜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물질을 자신을 위하여 이웃을 위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바르게 사용하면 바로 거기에 천국이 임하는 것입니다. 나도 너도 하나님도 행복한 파라다이스가 건설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온 성도 여러분께서는 결코 물질을 앞세우지 마시기 바랍니다. 물질에 집착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결코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삶의 우선순위에 두지 마시기 바랍니다. 물질 때문에 자신의 양심을 팔아먹고, 물질 때문에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물질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원해지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직 하나님 안에서 참다운 인간의 가치를 앞세우고, 이웃과의 관계를 앞세우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앞세우며 주님과 동행할 때에 주님 안에 있는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더욱 온전히 누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명예적 유혹을 물리치신 예수님

1차 유혹에서 실패한 마귀는 겁 없이 다시 도전합니다. 예수님을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그러면 하나님이 너를 붙들어 다치지 않게 하실 것이고, 그러면 너는 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웅대접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고 하였느니라.’(마4:7)하시며 단호히 물리치셨습니다. 예수님을 뛰어 내릴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정말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정말 그것이 사람들에게 생명의 은총을 가져다 주는 일이라면 뛰어 내릴 수 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예수님께 있어서 그까짓 것은 식은 죽 먹기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뛰어 내릴 때가 아닌 것입니다. 마귀의 말을 듣고 뛰어내리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행위입니다. 그럴만한 이유가 없는 이 때에 뛰어내리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참람한 행위인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설령 뛰어 내려도 끄떡없어서 사람들에게 영광을 받을 수 있다할지라도 나는 그런 행위를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걸 조심해야 합니다. 정말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라면 죽음의 장소라도 가야 합니다. 정말로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를 위한 것이라면 불속에라도 들어가야 합니다. 엉뚱한 일에 용감해서는 안됩니다. 잘못된 일에 용감해서는 안됩니다. 쓸데없는 영웅심리로 혹은 뭔가 좀 특별한 방법으로 사람에게 인정을 받고 인기를 얻으려는 어리석은 행위는 삼가야 합니다.

교회에서도 무언가 인정받기 위하여, 나타내기 위하여, 명예를 얻기 위하여, 두각을 나타내기 위하여 주님의 일을 하거나 무슨 직분을 얻으려고 하면 안됩니다. 그저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죽어가는 영혼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그야말로 갓난아기와 같은 순수한 믿음으로 주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결국 하나님도 인정하시고 사람에게도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명예를 얻으려는, 인기를 얻으려는, 뭔가 튀는 행동을 통해서 인정을 받으려는 태도는 옳지 않습니다. 그러면 결국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 왜곡된 방법을 시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저 정석대로 성실하게 진실하게 최선을 다하면 그 방법도 올바르게 되고 결국은 결과도 나타나게 됩니다. 설령 결과가 더디 나타나거나 혹 끝까지 나타나지 않는다해도 언젠가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인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진실하게 성실하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조금 더디 이루는 한이 있어도, 아니 세상에서 비록 명예를 얻지 못하는 한이 있어도 그저 진리 안에서 성실하게 말씀대로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정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세상이 주는 그 어떤 명예나 영광보다 우리 주님이 주시는 인정과 상급과 영광을 받아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5.영적 유혹을 물리치신 예수님

첫 번째 두 번째 시험이 실패로 끝나자 마지막으로 사단은 세상의 권세를 가지고 영적으로 예수님을 시험하였습니다. 높은 산으로 가서 예수님에게 천하만국을 보여주면서 자신에게 절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이 천하만국을 모두 너에게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사탄아 물러가라, 오직 하나님께만 경배하고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마4:10)하시며 호통을 치며 마귀의 교활한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이것은 아주 교활한 종교적 시험이었습니다. 자신에게 경배하기만하면 천하만국을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저 눈한번 질끈 감고 절을 하면 세상만국을 다 주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사탄이 그럴만한 권한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지까짓 게 무슨 그런 권세가 있습니까? 그저 예수님이 지금 40일동안이나 전혀 아무것도 안 잡수시고 약해져 있으니까 어떻게하든 이 약해진 틈을 노려 예수님을 넘어트리려고 술책을 쓰고 있는 것 뿐입니다.

여러분, 오늘날도 사탄은 이렇게 속삭입니다. 나에게 절하라. 나가 누굽니까? 사탄입니다. 사탄이 뭡니까? 죄의 세력입니다. 죽음의 권세입니다. 지옥의 권세입니다. 오늘날 그런 게 뭘로 나타납니까? 때로는 돈으로 나타납니다. 권세로 나타납니다. 과학지상주의, 물질지상주의, 개인이기주의로 나탑니다. 물론 돈이나 과학이나 이성이나 이런 것들 자체가 사탄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사탄의 하수인 역할을 할 때는 사탄과 같은 존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사람들을 돈에게 무릎을 꿇게 합니다. 권력에 무릎을 꿇게 합니다. 향락에 무릎을 꿇게 합니다. 개인이기주의에 무릎을 꿇게 합니다. 편의주의에 무릎을 꿇게 합니다. 그러면 너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속삭입니다. 마치 그 옛날 에덴동산에서 아담에게 했던 수작과 똑 같은 것입니다. 따 먹어라. 따 먹어라. 그러면 하나님 같이 될 것이다.

여러분, 우리는 그 소리에 속으면 안됩니다. 분별해야 합니다. 돈이나 권력이나 향락이나 세상의 가치관 앞에 무릎을 꿇으면 안됩니다. 우리가 무릎을 꿇고 경배해야할 대상은 오직 천지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 뿐입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 뿐입니다. 세상의 돈이나 권력이나 지식이나 명예나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는 것이 아니라 천지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날 이렇게 교묘하고 다양하게 다가오는 마귀의 흉계를 간파하고 절대로 거기에 현혹당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기도하는 일과 말씀 묵상하는 일에 더욱 힘쓰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사순절 기간을 보내면서 우리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자신을 부인하며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육체적, 정신적, 영적 시험을 이기고 온전히 주님과 동행할 때에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더욱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마음껏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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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주일예배설교 (성령충만)

 

 

 


제목 : 성령 충만함을 받으라

말씀 : 엡5:15~18

1.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 믿음이 무엇입니까? 말 그대로 믿는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시고 영광스러우시고 거룩하시고 진실하시고 선하시고 은혜로우시고 사랑과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생의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빛이신 유일한 구원자라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으면 영원한 천국의 은총을 누리고 여기서도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게 된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런 믿음을 가지고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러한 믿음을 가진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는 진정 생명의 은총을 온전히 풍성히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물론 우리가 믿는 그 믿음대로 주님을 믿고 따라가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마음으로 믿는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믿는다면 그 믿음을 따라 살아야 그 믿음이 진짜 믿음이고 그래야 비로소 그 믿음이 주는 은총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예수님을 믿는다면 당연히 예수님과 동행해야 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빛이라고 믿으면서 그래서 그 안에 생명과 기쁨과 자유와 평안이 있다고 믿는다고 하면서 따라가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 은혜를 누리겠습니까? 어둠 가운데 있으면서 빛의 은혜를 누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아니 그 은혜를 누리고 못 누리고를 떠나서 믿는다고 하며 따라가지 않는다면 그건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믿는다면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야 하고 그러면 분명히 예수님이 주시는 그 무한한 생명의 은총을 마음껏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하면 진정 예수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함으로 생명의 은혜가 넘쳐나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그건 말하나마나 성령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 받으면 하나님을 믿게 되고 더 나아가서 충만하게 받으면 정말 성령께서 주시는 힘과 능력과 지혜로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며 얼마든지 생명의 기쁨과 은혜가 넘쳐나는 복된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는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전체를 다시 한번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여러분, 보세요. 너희는 지혜 없는 자같이 하지 말고 지혜있는 자가 되라는 거예요. 왜요? 때가 악해서 그렇다는 거예요. 때가 악해서 뭐 어쨌다는 겁니까? 지혜가 없으면 악하고 왜곡된 세상의 물결에 휩쓸려가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혜 있는 자가 되어 악한 세상의 물결에 휩쓸려가지 말고 올바른 분별력과 힘을 가지고 그걸 물리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성령의 능력과 지혜로 올바른 분별력과 능력을 얻게 되어 주님과 동행하며 세상의 왜곡되고 헛된 것들을 물리치고 진정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게 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정말 세상의 다른 어떤 것보다도 성령을 받아야 하고 성령을 받되 충만하게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알고 자신을 알고 그래서 구원의 은총을 누리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자신도 하나님도 알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고, 죄를 해결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과 동행하지 못하고 죄와 무지가운데서 사망의 음침할 골짜기를 방황할 수 밖에 없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죽었던 영혼이 살아나 어두운 영혼이 밝아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알게되고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을 알게 되고, 인생의 목적과 의미와 방향을 알게 됩니다. 사탄에게서 해방되고, 세상의 죄와 무지와 도전과 유혹으로부터 자유하게 됩니다. 올바른 분별력과 지혜로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의 능력으로 세상을 이기며 생명의 은혜가 넘쳐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정말 성령의 받아야 합니다. 받되 한번 받은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충만하게 받아야 합니다. 성령을 받되 충만하게 받지 못하면 어떻게 근근이 죽지 않을 만큼의 생명을 유지할지는 몰라도 세상에 너무나 만연되어 있는 왜곡된 가치관과 유혹과 도전을 이길만한 영적 능력이 부족하여 세상의 것에 끌려 다니게 되어 생명력이 왕성한 삶을 살아갈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느라고 다니기는 다니는데 예수님 안에 넘쳐흐르는 그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자유와 평안을 마음껏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정말 어찌 하든지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다른 것은 못 받아도 별거 없습니다. 세상의 것 많이 받은 사람이나 적게 받은 사람이나 별 차이 없습니다. 거기서 거깁니다. 그래봤자 죄인이고 그래봤자 다 근심걱정 시기질투 속에 지지고 볶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성령충만 받으면 다릅니다. 인생이 바뀝니다. 운명이 바뀝니다. 영생복락은 물론 지금 여기서도 얼마든지 생명의 능력과 은혜가 넘쳐나는 살을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세상의 다른 어떤 것보다도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진정 생명의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어떻게 성령의 충만함을 받습니까?

여러분,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성령 충만함을 받습니까? 물론 많은 것을 말할 수 있지만 먼저 성령의 임재를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인간은 죄와 무지 가운데 있어서 자연인 그대로는 어떤 생명의 은총도 누릴 수 없고 오직 성령을 받아야 생명의 은혜와 능력 가운데 산다는 것을 인정하고 세상의 다른 어떤 것보다도 성령의 역사하심을 간절히 사모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야 성령께서 기쁘시게 우리 가운데 임재하시어 생명의 능력과 은헤와 기쁨과 소망으로 충만하게 채워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누군가를 만나고 싶은데 그 사람이 여러분을 달갑지 않게 여긴다면 갈 마음이 생기겠습니까? 설령 억지로 간대해도 반가워하기는커녕 시큰둥하게 여기고 귀찮게 여기면 그 사람과 오래 함께 머물겠습니까? 성령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님을 사모하는 가운데 성령의 오심을 다른 무엇보다 기뻐하고 간절히 기다리는 그 영혼 속에 기쁨으로 찾아 가셔서 거기 계속 머무시면서 큰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107:9절에서는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모하는 영혼 즉 하나님 안에 생명과 기쁨과 위로와 소망이 있음을 믿고 그러기에 그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면서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자에게 주님 안에 있는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성령님과의 만남과 그 안에서 누리게 될 은총을 진실로 사모해야 하는데 그러면 여러분, 우리가 진실로 사모하는 마음으로 성령의 임재를 기다린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말할 것도 없이 말씀과 기도와 찬양 생활에 힘쓰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돈을 사모하는 사람은 어디로 달려갑니까? 돈 냄새가 나는 곳으로 달려갑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어디로 달려갑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곳을 달려갑니다. 오락이나 도박이나 술이나 이런 것에 빠지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곳으로 달려갑니다.

그러면 우리가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에 거기에 생명이 있고 기쁨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역사하심을 간절히 사모한다면 어디로 달려가겠습니까? 물론 성령이 역사하는 곳으로 달려가게 되겠지요. 그러면 성령이 역사하는 곳이 어디입니까? 말씀과 기도와 찬양이 있는 곳이지요. 그러면 말씀과 기도와 찬양이 있는 곳이 어딥니까? 교회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예배드립시다. 말씀 묵상합시다. 기도합시다. 찬송합시다. 그러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무엇으로 성령의 은총을 덧입을 수 있습니까? 영은 오직 영으로만 통하기 때문에 오직 영이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하여, 그리고 말씀 안에서 기도로 대화할 때에 하나님과 우리 영이 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씀과 기도생활에 힘쓰면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믿음을 주시고 힘과 능력과 은혜와 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부활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셨고, 제자들은 그 말씀을 따라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열심히 말씀 되새기며 기도할 때에 성령 충만함을 받아 능력 있는 제자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행1:14절을 보십시오.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그들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주님의 말씀을 되새기며 기도하기에 힘썼던 것입니다. 그러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행2:4절을 봅니다.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제자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말씀 되새기며 기도에 힘썼을 때 드디어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열흘 만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생명의 능력과 은혜가 넘치는 교회가 되어 놀라운 생명의 역사를 일으켜 나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성령의 은총을 간절히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은총을 사모하신다면 말씀과 기도와 찬양생활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 교회를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의 심령과 가정과 우리 교회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과 평안과 위로가 넘쳐나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왜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합니까?

여러분, 그러면 왜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합니까? 물론 앞에서 이미 상당부분 언급이 되었습니다만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 않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는 기본적으로는 성령을 받아야 하나님을 알게 되고 인생을 알게 되고 그래서 주님을 믿고 거듭나 새 생명을 얻음으로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때에 성령의 역사하심과 인도하심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모든 죄와 유혹과 도전과 상황과 환경을 이기고 생명의 길, 진리의 길, 의의 길로 잘 달려가 여기서도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과 평안을 누리며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가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다른 것은 못 받아도 성령은 받아야 합니다. 받되 충만하게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죄와 무지 가운데 있던 옛자아가 죽고 영혼이 소생하게 됩니다. 그래서 죄와 무지 속에 가지고 있던 인생의 목적과 방향과 의미는 사라지고 주님이 주시는 새롭고 올바르고 살아있는 인생관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그야말로 천국시민이 됨으로 거듭나고 가치관과 목적과 방향이 달라지니 거듭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야말로 새로운 인생이 전개되는 것입니다. 전에는 알든 알지 못하든 사탄의 지배 속에서 사탄의 조종을 받으며 내 마음대로 내 생각대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죄되고 왜곡된 가치관을 따라 살며 그게 인생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건 죄와 무지 속에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방황하는 인생에 불과한 것입니다. 스스로는 다 똑똑하고 잘나고 세상에 모르는 것 하나 없는 것처럼 여기며 살아왔지만 그러나 실상은 죄와 무지 가운데 살아가는 무지몽매한 인생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완전히 새로운 삶이 전개됩니다. 이제는 내가 나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나를 지배하게 됩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세상에 지배당하고 세상에 취하여 세상 사람들이 살아 가는대로 살아갔는데 이제는 성령에 취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게 됩니다. 물론 성령은 생명의 영, 은혜의 영, 거룩한 영, 진리의 영이기시 때문에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면 생명의 풍성한 은혜과 기쁨과 능력을 평안과 위로와 자유를 마음껏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삶의 모습을 보면 흡사 술에 취한 사람과 비슷합니다. 물론 결과는 반대지만 원리적으로 보면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술 취하면 어떻게 됩니까? 내 몸과 마음을 술이 지배해버립니다. 그래서 몸과 마음이 내 마음대로 잘 안됩니다. 그래서 이리 비틀 저리 비틀 거리다가 넘어지고 쓰러지고 자빠집니다.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술이 내 마음을 지배해 버리니까 평소에 안하던 짓을 하게 됩니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시비를 걸고 싸우기도 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노상방뇨도 하고, 음행을 저지르기도 합니다. 술이 나를 지배해 버려 제정신이 아니기 때문인 것입니다.

성령에 취해도 그렇습니다. 물론 술은 영적 육체적 마음적 감각을 둔하게 만들어 부정적인 방향으로 이끌어가지만 성령은 진리의 영, 선한 영, 은혜의 영, 의의 영이시므로 우리의 영혼이 살아나게 하십니다. 그래서 지혜와 분별력과 능력을 주십니다. 그래서 진리의 길, 생명의 길, 의의 길로 달려가며 주께 영광을 돌리는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에게 능력을 주셔서 어렵고 힘든 일도 이기게 하십니다. 상황과 환경도 이기게 하십니다. 심지어 환난과 핍박과 죽음까지도 이기게 마침내 완전한 승리자가 되게 하십니다.

또 여러분, 술에 취하면 술이 내 정신 줄을 제 맘대로 조종하여 평소에는 못하던 이야기도 거리낌 없이 하고, 추하고 더러운 말도 서슴없이 하게 되고, 했던 말 또 하고 했던 말 또 하곤해서 사람을 질려버리게 만들기도 합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도 그렇습니다. 물론 술에 취하면 쓸데없고 추한 말이 많아지지만 성령에 취하면 생명과 기쁨과 은혜와 평안을 주는 말이 많아집니다. 말씀 읽고 기도하고 찬송하고 전도하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소망을 주느라고 말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또 여러분, 술에 취하면 감각이 무뎌져서 근심걱정을 조금쯤은 잊어버려 약간은 평안함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물론 이건 진짜 평안이 아닙니다. 잠시 약간의 정신적인 마취를 시켜 놓은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취가 풀리면 즉 술에서 깨어나면 더 괴롭고 후회스럽고 수치감만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에 취하면 생명과 평강과 소망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 영혼과 마음을 근본적으로 치유해 주십니다. 그래서 세상의 근심 걱정이나 상황과 환경을 이기고 진정으로 평강과 위로와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론 영광의 나라에 대한 소망으로 인하여 더욱 모든 상황과 환경을 이기고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은혜와 능력으로 세상을 이기고 생명의 풍성한 은혜가 넘쳐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요즘에 보면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성령에 취해 있지 않고 돈과 명예와 안일함과 물질주의와 이기주의와 세상 즐거움에 취해 있습니다. 심지어는 술과 마약과 향락과 도박에 취해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믿음의 사람들조차도 세상에 취해서 헌신과 봉사와 충성과 이런 거룩한 귀하고 복된 가치들을 고색창연한 옛말로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일성수하지 않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도 하고, 술을 마셔도 아무 상관없는 것처럼 여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18절에서 술 취한 것을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방탕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잠23:31~33절을 보십시오.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 / 그것이 마침내 뱀 같이 물 것이요 독사 같이 쏠 것이며 / 또 네 눈에는 괴이한 것이 보일 것이요 네 마음은 구부러진 말을 할 것이며...” 여러분, 그래도 마셔도 된다고 하시겠습니까? 그러면 이 말씀들은 도대체 뭡니까?

여러분, 롬12:1,2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여러분, 보세요. 우리 몸을 거룩한 산제물로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술 먹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하겠습니까? 그게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는 삶이겠습니까?

여러분, 바로 그래서 성령으로 충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바르게 분별하게 됩니다. 그래야 이 왜곡된 세대를 본받지 않고 주님을 본받게 됩니다. 그래야 우리 몸이 거룩한 산제물이 되고 그래야 거룩하고 복되고 아름답고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이 넘치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성령강림절기를 보내면서 더욱 깨어 기도하며 말씀 묵상함으로 성령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정말 이 세대의 왜곡된 풍조에 휩쓸려가지 말고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분명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평안과 위로와 소망이 넘쳐나게 될 것입니다. 거룩하고 복되고 아름답고 귀한 사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고 귀하게 쓰임 받는 복된 인생이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꼭 이런 삶이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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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살아있는 교회

 

 

 

 

제목 : 살아있는 교회

말씀 : 행 2:1~4


1.혼이 담겨 있어야 가치가 있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6, 70년대에 영국에 '비틀즈'라는 락그룹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Yesterday, Let it be, Love me do 등의 수많은 곳을 히트시켜 전 세계의 젊은이들을 열광시켰고, 수십억달러의 돈을 벌어들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1965년 이들의 외화획득의 공적을 인정하여 대영제국 훈장을 수여하기도 하였습니다.

 

어느 날 비틀스가 이탈리아에서 공연을 할 때의 일입니다. 공연장에는 수만 명의 청중들이 모여들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는데 한참 공연이 무르익어 열창을 하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이 갑자기 무대위로 뛰어올라서는 권총을 겨누면서 빨리 노래를 그만두고 돌아가라고 소리를 쳤습니다. 당장 그만두고 돌아가지 않으면 쏘아 죽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삽시간에 공연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는데 다행히 경찰의 침착한 대처로 이 사람은 잠시 후에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범인을 잡아놓고 보니까 이 사람은 괴한도 깡패도 아닌 유명한 음악대학의 교수였습니다. 경찰이 어이가 없어 왜 이런 무모한 짓을 저질렀느냐고 묻자 그 교수는 비틀즈를 보면서 흥분해서 말했습니다. ‘너희들 음악에는 혼이 배어 있질 않아. 그런 혼도 없는 속된 노래를 가지고 이 많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노래를 부르는 것은 사람들을 기만하는 것이다. 그러니 당장 그만두고 돌아가라.’

 

즉 이 음악교수는 노래에 자신의 진실과 마음과 혼까지 담아 음악과 자신이 하나가 되는 그런 순수한 음악, 그런 영혼이 담겨있는 음악을 추구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비틀즈라는 락 그룹이 그러한 혼이 담겨져 있는 순수한 음악이 아니라 상업적이고 세속적인 노래로 사람들을 현혹하며 그래서 순수음악을 더럽힌다고 여겨 그런 과격한 행동을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사건속에서 한가지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하면 우리가 하는 일에 혼이 담겨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거기에 진실이 있고,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림을 아름답게 그려도 거기에 혼이 담겨져 있지 않고 그저 상업적으로 그린다면 그 그림은 가치가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웅변술을 가지고 열변을 토해도 거기에 혼이 담겨있지 않고 진실성이 없다면 위선에 불과한 것입니다.

 

벌써 오래전 이야기입니다만 제가 회사에 다닐 때 한 2,3년동안 서예를 배운 적이 있습니다. 서예도 마찬가집니다. 글씨에도 혼이 담겨져 있는 글씨가 있고, 그저 기교적으로 쓴 글씨가 있습니다. 혼이 담겨져 있는 글씨는 무언가 알 수 없는 감동이 전해져 오고, 힘이 있고, 거기에 빨려 들어가는 듯한 감동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저 기교로만 쓴 글씨는 왠지 천박해보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거기에 혼을 담고, 진실을 담고, 정성을 담을 때 의미와 가치가 있습니다. 물론 신앙생활도 예외는 아닙니다. 아니 신앙생활은 더더욱 혼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영혼을 담지 않는 신앙생활이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녀도, 아무리 귀한 직분을 가졌어도, 아무리 교회를 위해서 봉사해도 자신이 하는 일에 영혼이 담겨져 있지 않다면 껍데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아무리 찬양을 잘해도 거기에 혼이 담겨져 있지 않으면 그것은 그냥 세상적인 노래에 불과한 것입니다. 아무리 예배를 드려도 거기에 혼을 담지 못하면 그냥 시간을 때우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제가 말하는 영혼이란 내 자신만의 영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령님이 주관하시고, 성령님께 붙들린바 된 그러한 영혼입니다. 우리의 영혼의 근원이신 성령님이 함께하시는 그러한 살아있는 영혼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우리가 하는 일속에 그 살아있는 영혼을 담으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진정 생명과 은혜가운데 거하며 참된 가치를 누리며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4:24절에서는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시146:1절에서는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어디서 무엇을 하든 진정 혼을 담아서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령님께 사로잡힌 바 된 그 영혼을 가지고 신앙생활하고, 가정 생활하고, 직장생활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온전히 진정성을 가지고 무엇인가를 영위함으로 하나님을 감동시키고 사람을 감동시킴으로 하나님과 사람앞에 인정받고 존중받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의 모든 삶에 진정 살아있는 영혼을 담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2.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 살아있는 영혼을 가지고 매사에 영혼을 담아 하려면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께서 사로잡힌 바된 진정 살아있는 영혼으로 무엇을 할 때 그게 진정한 혼으로 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냥 내 정성만 담는다고 되는게 아닙니다. 인격만 가지고 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자연적인 혼을 죄로 말미암아 죽어 있기 때문에 그 혼만을 담아서는 진정으로 나를 드리는 것이 못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이시며 진리의 영이시며 거룩한 영이신 성령께 사로잡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 전체에 살아있는 영혼을 담아 영위함으로 진정 살아있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성령강림주일이란 예수님의 제자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전혀 기도하기에 힘쓸때에 오순절날 성령의 충만한 역사가 일어난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신 예수님의 명령을 기억하며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힘써 기도하고 있을 때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고, 그것을 계기로 하여 본격적으로 우리 주님의 구원의 역사를 일으켜 나갔던 날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날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제자들이 진정한 생명력을 가지고 주님의 사역을 감당할때에 그러한 성령에 붙들린 사람들에 의해서 교회가 세워지고,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고, 생명의 역사가 일어났던 그 일을 기억하며 오늘에 되살려보는 그러한 절기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날의 성령의 충만한 역사를 오늘 우리도 경험하며 생명가운데 은혜가운데 주님의 사명을 감당해보자는 그러한 취지로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님을 우리의 영혼속에 담고 그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그래야 우리의 삶에는 생명이 있고, 은혜가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있는 신앙인이 되어질때에 우리는 복음의 큰 사명을 감당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최권능목사님은 본래의 이름은 최봉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이 얼마나 권능이 많으신지 수많은 사람을 전도하여 많은 교회를 세우고, 신유의 은사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별명으로 최권능목사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분은 전도할 때 「예수 천당, 마귀 지옥」하면서 돌아다니신 분으로 유명했습니다. 무슨 교리나 말씀이나 원리나 이치 등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무조건 만나는 사람마다 「예수 천당, 마귀 지옥」을 외치고 다녔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렇게 어떻게 보면 정말 무식하게 전도했는데 이분의 전도를 받으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번은 이 목사님이 시냇물을 건너려는데 어떤 양반 하나가 담뱃대를 길게 물고 둑에 점잖게 앉아 있는 것입니다. 최권능 목사님은 이때도 예외없이 둑에 앉아 잠시 쉬고있는 영감님에게 귀에다 대고, 「예수 천당, 마귀 지옥」하면서 냅다 소리를 지르고는 징검다리를 건너 갔다고 합니다. 그러자 이 점잖은 양반이 깜짝 놀라서 「저, 저 저런 고얀놈이 있나.」하면서 소리를 쳤지만 목사님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징검다리를 건너갔습니다.

 

그래서 이 양반도 어쩔 수 없이 「괘씸한 놈 같으니라고」하고는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이 양반이 집에 도착해서 지내고 있는데 자나깨나 자꾸만 귀에서 「예수 천당, 마귀 지옥」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잠시 앉아 쉬려고 하면 「예수 천당, 마귀 지옥」 소리가 들리고, 잠을 자면 꿈속에서 「예수 천당, 마귀 지옥」 소리가 들리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 양반이 예수 귀신 붙었다고 하면서 그 지방에서는 제법 용하다고 하는 무당을 불러다가 굿을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아무리 굿을 해도 계속 귀에서 「예수 천당, 마귀 지옥」 소리만 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서양귀신은 서양귀신 들린 사람에게 가야된다고 해서 교회를 찾게 되었고 결국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분이 누구냐 하면 그분이 바로 고당 조만식 선생님의 부친인 조을선씨였고, 이 한분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분을 통해서 조만식 선생이 믿게 되고, 조만식 선생을 통해 수많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 천당, 마귀 지옥」이라는 말속에 무슨 철학이 있습니까? 무슨 논리가 있습니까? 거기에 무슨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만한 그럴듯한 웅변이 있습니까? 거기에 무슨 사람들을 불러모을만한 재미있는 이야기거리가 있습니까? 그런데도 최 권능 목사님은 그 말 한마디로 수천명의 사람을 전도하였고 수십교회를 세웠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예수천당이라는 말을 듣고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겠습니까? 어쩌면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때야, 세상은 참 어수룩 했으니까. 그때야 가난하고 못배워 사람들이 좀 단순하고 순진했으니까. 그때야 무슨 재미있는 일도 없었으니까 그냥 예수천당만 해도 믿었지 지금 세상은 그렇게 안됩니다.」라고 말입니다. 물론 어느 정도 개연성은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만약 오늘 최권능 목사님이 이 안강땅에 오셔서, 저 시장 바닥과 저 일터를 다니면서 「예수 천당 마귀 지옥」라고 다니신다면 분명 이 안강지역에도 놀라운 복음의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저 서울 바닥에 가서, 저 부산 바닥에 가서, 저 유흥가와 환락가에 가서 최권능목사님이 「예수 천당, 마귀 지옥」을 외쳐댄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품으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의 그 단순한 말속에는 비록 철학도 이론도 교리도 없지만 그러나 거기에 있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살아있는 예수의 혼, 예수의 영, 성령이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최권능 목사님 속에 주의 성령이 충만하였기 때문에 그래서 비록 단순하고 어떻게 보면 유치한 말이지만 그가 혼을 다해서, 영혼을 다바쳐 복음을 증거할 때 성령께서 역사하셨고, 성령께서 역사하시니 안 믿고는 배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성령이 그 안에서 차 있을 때 그의 삶은 성령이 담겨져 있는, 성령이 역사하시는, 성령이 인도하는 그러한 삶이었던 것입니다. 성령이 가득차 있기에 그는 그야말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명력이 왕성한 삶을 살았고 동시에 그러한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주님품으로 인도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살아있는 것이라야 역사를 이루어 갑니다. 살아 있어야 생육하고 번식을 하는 것입니다. 죽어있는 것은 자체로서도 별 의미가 없거니와 생육하고 번식하는 것은 더더구나 불가능한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은 살아있는 신앙인입니다. 생명의 영이신 성령으로 사로잡힌 사람은 살아있는 신앙인입니다. 이런 살아있는 신앙인만이 참된 생명의 가치를 누리게 되거니와 동시에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3.어떻게 성령충만함을 받습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초대교회는 이처럼 살아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그야말로 살아서 펄펄 뛰는 물고기와 같은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힘차게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그런 신앙인들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오늘 본문의 말씀에 잘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그들은 생명의 영이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오순절날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전혀 기도하기를 힘쓰다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기 때문에 그래서 생명의 영이신 성령께서 그들속에서 역사하셨기 때문에 그들은 정녕 살아있는 신앙인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충만이 무엇입니까? 충만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철철 넘쳐흐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다는 것은 내 안에 성령이 넘쳐흐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안에는 더 이상 다른 것이 자리잡을 수가 없는 상태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리와 생명과 은혜의 영이신 성령께서 내 인격을 지배하고, 내 자아를 지배하고, 내 모든 것을 지배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생명의 영으로 말미암아, 그 은혜의 영으로 말미암아 생명과 은혜와 사랑과 능력이 넘쳐흐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성령이 내 안에 가득하니 이제는 내 욕심, 내 못난 자아, 내 짧은 소견, 내 미련한 인생관 이러한 것들은 죽고 맙니다. 그 대신 성령님안에 있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생명과 은혜와 진리가 나를 이끌어 갑니다. 하나님의 영이 나를 지배하니 내 인생의 가치관, 내 성품의 기질이 바뀔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혼이 나를 지배하니 나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자랑들은 사라지고 이제는 저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면서 무엇보다도 소중한 이 생명의 역사를 위하여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이 우리를 살리겠습니까? 무엇이 우리 교회를 더욱 힘있게 하겠습니까? 무엇이 저와 여러분과 우리 교회속에 진정한 생명의 역사를 일으켜 나가겠습니까?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과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영으로 신들릴 때 우리는 놀라운 생명력을 갖게 되고, 그렇게 생명력을 갖게 될 때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을 감당해 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과 우리 교회가 성령에게 붙들릴 때, 속된 말일지 모르지만 거룩한 영이신 성신으로 신들릴 때 우리안에 우리 가정안에 우리 교회안에 이 지역사회안에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고,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고 기쁨과 사랑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신들려 살아갈 때, 우리는 진정 진리안에서 참된 가치와 의미와 보람을 찾게 되며, 진정한 평안과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세상에 모든 헛된 욕심들을 버리고 저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는 가운데 정녕 소망중에 즐거워하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혼에 충만할 때 봉사하며, 전도하며, 사랑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우리속에 진정으로 요청되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오늘날 한국교회속에 가장 시급하게 요청되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신에 충만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진리의 영이요, 생명의 영이요, 은혜와 사람의 영이신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과 우리의 모든 가정들과 모든 성도들 생명 속에 이 하나님의 혼이 살아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든 사랑하는 성도들속에 그리고 우리의 가정속에 교회속에, 그리고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 속에 하나님의 혼이 살아서 역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가운데 생명이 역사합니다. 은혜와 사랑이 역사합니다. 모든 어둠의 세력이 물러가고, 모든 우고와 질환이 물러갑니다. 추하고 더럽던 것이 아름답고 깨끗하게 됩니다. 혼돈된 것이 질서를 찾게 되고, 죽어 가는 것들에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고 얼어붙은 동토에도 생명의 싹이 트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녕 성령충만함을 받기를 힘써야 합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는데는 다른 왕도가 없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제자들이 보여 주었던 것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부여잡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끝까지 붙들고 늘어져야 합니다. 기도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충만함을 받고, 성령충만함을 받으면 세상을 이기고, 죄와 사망과 어둠과 미움과 욕심과 저주의 권세를 이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 안에 우리 가정안에서 우리 교회안에 생명의 역사가 은혜의 역사가 사랑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성령강림주일을 맞이하여 다시한번 성령의 충만한 역사를 맛보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누리기 위하여 더욱 말씀을 부여잡고 기도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진정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성령으로 충만함을 덧입어 세상을 이기고, 죄와 사망을 이기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어둠의 세력을 이김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는 삶을 살아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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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진정한 소망

 

 


제목 : 진정한 소망

본문 : 딤전6:17~19


1.진정한 소망


여러분, 여러분의 간절한 소원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정말 무엇을 기다리고 무엇을 기대하며 사십니까? 부자 되는 것, 자식이 출세하는 것,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는 것, 물론 그것도 좋습니다. 그것도 기대하고 그것을 위해서도 힘써야 합니다. 그러면 그것도 하나님께서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정말 그렇게 되면 무슨 뾰죽한 수가 생길까요? 행복에 겨워 어쩔 줄 모르고 날마다 싱글벙글하며 살아갈까요?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다. 가보면 똑같아요. 뭐 많이 배우고 돈많고 출세하고 건강하면 맨날 좋아 죽을 것처럼 생각되지만 똑같이 걱정하고 불안하고 염려하고 싸우고 갈등하고 지지고 볶고 삽니다. 그래서 뭐 전직 대통령, 전직 총리, 장관, 재벌 총수, 무슨 팝의 황제니 골프의 황제니 하며 불리던 사람들이나 유명 연예인이나 할 것 없이 자살도 하고 잡혀 가기도 하고 가정불화도 겪고 하며 살아가는 거예요.

 

여러분, 세상의 것은 죽을 둥 살둥 달려가서 얻었다고 하는 순간 이미 멀어지기 시작해요. 세상의 것으로 누리려는 행복은 잡았다고 하는 순간 저만치 날아가서 날 잡아봐라 하면서 달아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좇아 다니다가 결국 인생 끝나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하나님도 모르고 세상 것 좇아 다니다가 죽는다면 얼마나 불쌍하고 가련하고 비참한 인생이 되겠어요.

 

여러분, 우리가 정말로 기대하고 기다리고 힘써 나아가야 할 대상은 따로 있습니다. 우리를 정말로 행복하게 하고 그래서 우리가 목숨 걸고 지켜야 할 대상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주님이십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주님만이 우리 인생의 진정한 희망이요, 소망입니다. 주님안에 만이 진정한 생명과 평화와 기쁨과 은혜가 있습니다. 주님 안에는 이세상에서도 모든 상황을 초월해서 누릴 수 있는 기쁨과 평안과 은혜가 있으며, 더 나아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대한 보장이 있습니다. 그야말로 완전하고 절대적이고 영원한 영광과 기쁨과 은혜가 있습니다. 오직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께 대한 기대와 소망속에서 사는 자들만이 완전히 후회없는 성공한 인생이 됩니다.

 

오늘 17절 말씀 보세요.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무엇에 소망을 두지 말라.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라. 무엇을 소망을 두라? 하나님께 두라.

 

왜요? 재물은 정함이 없으니까. 정함이 없다는 게 뭡니까? 정해져 있는 자리가 없다는 거예요. 즉 불확실하다는 거지요. 오늘 있다가 내일 없어지는 거라는 거지요. 내께 아니라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무슨 소리냐 영원토록 내꺼다. 실컷 쓰고 누리고 살다가 죽으면 그게 내꺼지 누구꺼냐 그럴지 모르지만 아닙니다. 생명도 돈도 내일을 장담할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설령 죽을 때까지 가지고 있어도 결국 놓고 가야하고 그거만 믿고 산 인생이라면 결국 영원한 고통 밖에는 남아 있을 게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 대한 소망은 다릅니다. 주님께 있는 소망은 완전하고 영원하고 온전합니다. 영원하고 완전한 기쁨과 소망과 위로와 평안을 주십니다. 그것만이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는 유일한 길입니다.

 

오늘 19절 보세요.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이것이 뭡니까?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선을 행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좋은 터를 쌓는 것이고,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참된 생명이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단순한 육체적 생명이 아닙니다. 영적, 정신적, 육체적 생명을 말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말합니다. 완전한 생명을 말합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그 뜻을 따라 선을 행하며 사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쌓는 지혜로운 인생이다, 그런 인생속에 영원한 생명의 은총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결코 정함이 없는 재물이나 권력이나 지식이나 세상의 즐거움을 기대와 기다림과 소망으로 삼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직 우리의 유일한 참 소망이신 주님을 소망께 대한 소망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결코 썩어 없어질 세상의 것에 소망을 두지 말고 하나님께,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을 후히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세상에서도 평안과 기쁨을 누리고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2.선한 사업에 부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소망이 다른 사람은 삶의 목적도 다르고 삶의 방향도 다릅니다. 돈에 소망을 두는 사람은 삶의 목적이 돈을 모으는 것입니다. 세상 즐거움에 소망을 두는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그저 먹고 마시고 노는 일에 사용합니다. 그저 부자되고 건강하게 잘먹고 잘사는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사람은 그저 돈이나 모으고 제 몸 하나 잘 입히고 잘 먹이고 편안하게 사는 것이 인생의 낙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은 다릅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은 세상의 것을 목적으로 삼지도 않고 거기에 얽매이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은 장차 하나님 앞에 섰을 때를 준비하며 삽니다. 그래서 돈을 버는 목적도 다르고, 돈과 시간과 재능과 육신을 사용하는 방법이 다릅니다. 돈과 지식과 권력과 명예를 얻으려는 목적이 다릅니다.

그게 뭡니까? 주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입니다. 나 혼자 잘먹고 잘사는 게 목적이 아니라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죽어가는 영혼들을 살리고 그래서 결국 주님과 나와 이웃이 함께 기뻐하는 삶을 추구합니다. 그러다가 결국 영원한 영광의 나라의 은총을 누리는 것을 목적으로 삼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삶이 이생에서나 저생에서나 가장 복되고 기쁘고 아름답고 가치있고 의미있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깊이 그리고 냉정하게 생각해 보세요. 솔직히 자신만을 위하여 사용한다면 그게 무슨 그렇게 의미가 있겠어요? 돈이든 시간이든 재능이든 권력이든 지식이든 그저 자신만을 위하여 사용한다면 그게 무슨 큰 가치를 만들어 내겠어요? 그렇게 해서 자신이 무엇이 그렇게 크게 즐겁겠어요? 여러분, 좋은 것은 함께 나눠야 더 좋아지고 더 많은 가치가 있는 거예요.

 

자 여기 맛있는 음식이 있어요. 저 혼자 독차지하고 앉아서 먹으면 무슨 맛이 그렇게 있어요? 여럿이 같이 먹으면 얼마나 더 맛이 있어요. 너무 너무 좋은 일이 있어요. 혼자 히죽히죽 웃으며 좋아하는 것보다 모든 사람이 함께 웃고 축하해주고 기쁨을 함께 나누면 얼마나 더 기뻐요? 호화판 유람선이 있어요. 저 혼자 타고 다니면 무슨 재미가 있어요? 함께 타고 다니며 서로 웃고 즐거워하면 얼마나 더 기쁘겠어요? 좋은 집이 있어요. 저 혼자살면 무슨 재미가 있어요. 함께 살 때 즐거운 거지요.

 

여러분, 사람은 원래 관계적인 존재예요. 가족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 존재하는 거예요. 본래 그런 존재로 지음을 받은 거예요. 그래서 절대 혼자 행복할 수 없어요. 혼자 배터지게 먹고 혼자 대궐 같은 집에서 살고 혼자 좋은 입고 하면서 행복할 수 없어요. 그러면서 행복하다면 그 인생은 죽은 인생이요, 병든 인생이요, 죄와 무지의 종이 된 인생이예요. 결국 영원한 지옥속에 들어갈 수 밖에 없는 인생이예요.

 

여러분,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결코 자기만을 위해서 살면 안됩니다.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주님의 뜻을 따라 주님을 생각하고 이웃을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18절 말씀 보세요.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 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선한 일이란 포괄적으로 좋은 일을 말합니다. 가난한 자를 돕고, 병든 자와 갇힌 자를 돌아보고, 절망속에 있는 자를 위로하는 등 모든 어렵고 고통받는 이웃을 돌아보는 것을 말합니다. 선한 사업에 부하라는 것은 그런 일을 행하는데 있어서 인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선한 일들을 위하여 자신의 물질과 시간과 재능을 사용하는데 인색하지 말고 넉넉히 드리라는 것입니다. 나눠주기를 좋아하라는 것은 억지로 마지못해 하지 말고 감사한 마음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그런 일들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소망을 둔 자들의 삶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이것이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재창조된 인생의 올바른 가치관입니다. 이유는 앞에서 말씀드린 19절에 있습니다.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는 것이다. 이것이 참된 생명을 취하는 길이다.

무슨 뜻입니까? 그렇게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나눌 때 그것이 결국은 자기 생명을 위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영원한 생명을 택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나를 위해서 그렇게 해야지 하는 그런 마음으로 하라는 뜻이 아니고 결과적으로 너도 살고 나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너도 기쁘고 나도 기쁘고 주님도 기쁘고 결국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다시 말씀드리지만 정말 자기 혼자 잘먹고 잘사는 거 그거 별거 아닙니다. 그런 삶으로 누릴 수 있는 기쁨과 평안과 은혜도 없고요, 있다 해도 별거 아닙니다. 그런 삶은 죄와 무지속에 있는 인생의 모습이요, 영적, 정신적, 인격적, 체적 미숙아의 삶입니다.

여러분, 갓난아기 보세요. 갓난아기는 남을 모릅니다. 그냥 자기밖에 모르죠. 남을 배려할 줄 모릅니다. 왜냐하면 정신적으로 인격적으로 아직 성숙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올바르게 성장하여 성인이 되면 남을 배려하게 됩니다. 책임과 의무를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신적, 인격적, 영적으로 자꾸 자라나야 합니다. 자라나서 주님의 뜻을 헤아리고 이웃을 배려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특별히 여러분, 지금은 대강절 기간입니다. 주님이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심령과 가정과 교회 속에 기쁨으로 거하시도록 우리를 돌아보는 시간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어떤 심령속에 기쁨으로 거하시겠습니까? 어떤 심령속에 은혜를 주시겠습니까? 주님께서 기쁘게 은혜를 베풀어주는 자는 부자가 아닙니다. 권력자가 아닙니다. 지식인이 아닙니다. 단순히 윤리적으로 깨끗한 자가 아닙니다. 자신의 죄와 무지를 인정하고 주님 앞에 엎드리는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세상의 썩어 없어질 것에 소망을 두지 않고, 거기에 욕심을 두지 않고, 거기에 얽매이지도 않고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한 심령으로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자에게 기쁨으로 오십니다.

또한 그렇게 순수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세상의 것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그저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주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자에게 기쁨으로 찾아 오셔서 은혜를 주십니다. 그런 자들에게 은혜를 주시고 평강을 주시고 기쁨을 주시고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성탄의 의미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신 목적인 것입니다. 대강절은 바로 그런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생각하며 우리 자신을 준비하는 기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세상의 별거 아닌 돈과 명예와 지식을 바라보며 거기에 소망을 두고 거기에 얽매이는 삶을 살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직 주님만이 나의 소망이요, 나의 기쁨이며 영원한 생명의 은총과 더불어 이 땅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는 메시야라는 점을 기억하며 그저 겸손히 엎드려 그 분의 은혜를 구하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정말로 주님을 기대하고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산다면 그저 자신만을 위하여 사는 존재가 아니라 주님의 뜻을 살피고 이웃을 돌아보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정말 주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어지 모든 것들을 주님과 이웃을 위하여 사용하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생명과 기쁨과 은혜를 주시려고 이 땅에 오신 주님의 놀라우신 은혜가 여러분 심령속에 가득하여 주님과 이웃을 기쁘게 해드리며 여러분 주님 안에 있는 은혜의 축복이 가득한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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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성탄절예배설교):인류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

 

 


제목 : 인류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

말씀 : 마1:18-21

 

할렐루야! 예수님께서 온 인류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오신 성탄절을 맞이하여 여러분 모두의 가정위에 주님의 사랑과 은총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특별히 지역 주민 여러분과 함께 성탄절을 맞게 되어 너무너무 기쁘고 감사합니다. 저희 교회를 찾아주신 분들을 다시 한번 진심으로 환영하며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여러분, 이 성탄절은 우주 최대의 명절입니다. 이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아니 이 지구 뿐 아니라 우주 공간 전체에 걸쳐서 아니 우주 뿐 아니라 저 하늘나라의 성도들이나 천사들에 이르기 까지 그리고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부터 영원토록, 그리고 민족이나 혈통이나 남녀노소 빈부귀천 할 것 없이 전 우주의 모든 존재들에게 가장 큰 축복의 날이요, 은혜의 날입니다.

왜냐하면 이 날은 예수님께서 인류의 가장 큰 원수인 죄와 사망과 사탄과 지옥의 권세에서 우리를 건져주어 영생복락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 오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누구든지 죄와 사망과 사탄과 지옥의 권세에서 구원받아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차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날은 세상의 어떤 날과도 비교할 없는 엄청난 축복의 날이요 기쁨의 날이요 은혜의 날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간 먼저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려고 이땅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감사의 박수를 치겠습니다. ‘예수님, 감사합니다. 예수님, 고맙습니다. 예수님,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영광을 돌립니다.’ 그리고 우리들도 서로 간에 사랑과 기쁨의 인사를 나누겠습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이 축복의 성탄절을 맞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심령과 가정과 이 땅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평화와 생명의 은혜가 가득한 복된 성탄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1.죄에서 구원하여 영생을 주시려고 오신 예수님.

 

그렇다면 여러분, 도대체 오늘 성탄절이 어떤 날이기에 그렇게도 온 우주 최대의 위대하고 복되고 기쁜 날입니까? 그것은 앞서도 언급했지만 예수님께서 모든 인류의 죄를 씻어주어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성탄의 핵심이고,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물론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해방되고 평화를 누리고 풍요로움을 누리는 것도 중요합니다. 가난한 자, 병든 자, 억압받는 자를 해방시켜주고, 서로 사랑하며 사는 일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병든 자를 고쳐주시고 배고픈 자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보다 더 중요하고 시급한 일은 죄에서 해방되어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면 세상의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도 결국 다시 늙고 병들고 죽을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냥 늙고 병들고 죽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영원한 형벌에 처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절대 상극이기 때문에 죄를 가지고는 하나님께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지만 그 어떤 것보다도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오늘 21절 말씀을 보십시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보십시오. 이름을 예수라 하라. 예수라는 이름 자체가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오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10:10절에서는 말씀합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보십시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이 생명은 영적, 육체적, 정신적인 전인적인 생명입니다. 즉 죄에서 구원하여 먼저 천국백성이 되게 하고 그 다음에는 이땅에서도 생명의 풍성한 은총 누리게 하기 위하여 이땅에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물론 돈이나 권세나 건강이나 이런 것도 중요합니다. 건강하게 잘 먹고 잘 사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 땅에서 누려야 할 자유와 평화도 소중한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돈도 열심히 벌어야 합니다. 건강을 위하여 열심히 운동도 해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고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이 영원한 생명보다 중요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생명보다 우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막8:3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돈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았다해도 목숨을 잃으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세상에서 제일가는 권세를 얻었다해도 목숨을 잃으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세상에서 모든 부귀영화를 누렸다해도 그 영혼이 구원받지 못하고 영원한 지옥가운데 처한다면 세상에서 누렸던 그 온갖 부귀영화가 무슨 쓸데가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돈도 중요하고 명예도 중요하고 건강도 중요하고 사랑도 중요하고 다 중요하지만 생명이 제일 중요합니다. 인간의 생명은 결코 육체적인 생명만이 아닙니다. 영적인 생명이 있고, 육체적인 생명이 있고, 정신적 생명이 있습니다. 영과 육과 혼이 살아있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이 모든 영역에서 온전한 생명을 얻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비로소 온전한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는 이 문제를 아무도 스스로 해결 할 수 없습니다. 일평생 산에 들어가 도를 닦아도 안되고, 죽도록 공부해서 박사학위를 천개만개 따도 안되고, 세계 제일의 권세를 얻어도 안되고, 천하제일의 부자가 되어도 안 됩니다. 천하없는 성인군자나 영웅호걸도 할 수 없습니다. 달나라 별나라 우주 끝까지 갈 수 있는 과학 기술로도 안됩니다.

그러면 이 문제를 누가 해결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오직 우주만물의 창조주로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지혜와 권능과 은혜와 사랑이 충만하신 하나님 뿐입니다. 천지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만이 우주만물의 모든 것을 아시고,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과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어떤 피조물들은 다 죄와 무지속에 있어서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할 지혜도 능력도 권한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2012년전 하나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죄없고 흠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끔찍한 죽음을 통하여 우리가 받을 죄의 대가를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망에게 붙잡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죄와 영생의 문제를 모두 해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으면 모든 죄를 용서받고 부활의 생명을 얻음으로 영생복락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이 자기 죄는 자기가 해결해야지 남이 대신 죽어준다고 어떻게 내 죄가 용서되느냐고 말씀합니다. 좋은 말씀입니다. 그럴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도 그렇게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일평생 산에 들어가 도를 닦아도 안되고, 죽도록 공부해서 박사학위를 천개만개 따도 안되고, 세계 제일의 권세를 얻어도 안되고, 천하제일의 부자가 되어도 안 됩니다. 어떤 분은 내 마음만 똑바로 먹으면 된다고 하지만 그러나 천하없는 성인군자라도 온전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은 너나 할 것 없이 누구나 죄인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쩔 수없이 죄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신 예수님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천길만길 깊은 구렁 속에 갇혀 있다고 칩시다. 그 구렁은 말 그대로 천길 만길 너무 깊어서 제 아무리 발버둥쳐도 올라 올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네 힘으로 올라오라며 내버려 둬야 합니까? 두레박을 내려 보내주든지 헬리콥터를 내려 보내든지 어떤 식으로든 누군가 도와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도움의 손길이 다가왔을 때는 그 도움의 손길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올라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유일한 살 길인 것입니다.

바로 그래서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헤어 나올 수 없는 죄의 수렁에서 건져 주러 오신 것입니다. 천길만길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어도 올라올 수 없는 우리를 구원해 주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우리를 구하시기 위하여 찾아오신 주님 품에 안기는 것입니다. 주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를 안전하게 천국까지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저 영광스러운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은 하나님이 보내주신 유일한 구세주이신 예수님 품에 온전히 안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인생의 유일한 구조선으로 보내주신 예수님 품에 안기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 모두가 예수님을 믿고 죄 용서받고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 영생복락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영원한 천국을 주신 예수님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영생을 주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천국을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분들이 죽으면 그만이지 천국이 어디 있느냐, 가 보았느냐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계신데 여러분, 아닙니다. 천국은 반드시 있습니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육신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죽으면 육신은 땅에서 왔기 때문에 땅으로 돌아가지만 영혼은 하나님께서 주신 영원히 죽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영원히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늘나라로 가기 전에 우리가 해결해야 할 것이 바로 죄인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데 죄를 그대로 가지고 가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지옥으로 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죄를 용서받고 들어간 영혼은 영원한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또 어떤 분은 그럼 무슨 증거라도 있느냐고 묻습니다. 네, 확실한 증거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입니다. 성경은 우주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 예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너무나 확실한 것입니다. 그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천국이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마4:17에서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하셨고, 또 11:25,26절에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게 누구의 말씀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메시아이십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거짓말을 하시겠습니까? 성령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지 않는다해도 그렇습니다. 여러분, 사람들은 예수님을 석가모니와 소크라테스와 더불어 세계3대성인이라고 부릅니다. 그 예수님께서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는 너희를 위해 죽었다가 다시 살 것이다. 나를 믿는 자는 죄 용서받고 천국에 갈 것이다.’ 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성인이라고 생각한다면 이 말씀을 믿든지 만약 믿지 않는다면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생각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죽었다가 다시 산다든지 천국과 지옥이 있다든지 하는 말들은 인간의 이성과 경험과 과학으로서는 말도 안되는 소리아닙니까? 그런데 그런 말도 안되는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을 어째서 성인이라고 부른단 말입니까?

 

그러면 또 어떤 분들은 나는 그 성경자체를 믿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은 인류역사상 최대의 베스트셀러입니다. 성경은 지구상에서 가장 많이 읽혀진 책으로 세계 2,50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어 지금까지 수십억의 사람들이 읽고 인간이 얼마나 죄와 무지가운데 있는지 알게 되고, 천국과 지옥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통해 예수님을 믿고 천국백성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그들이 바보라서 이성적으로는 도무지 말도 안 되는 부활과 천국과 지옥을 믿겠습니까? 아니 그 내로라하는 과학자들이나 정치인들이나 학자들이 과학의 법칙을 몰라서 부활을 믿고 천국과 지옥을 믿겠습니까?

 

그러면 또 예수님 안 믿는 수많은 똑똑하고 잘난 사람들은 바보라서 그 사실을 안 믿느냐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예수님을 안믿는 분들 중에도 정말 똑똑하고, 인격적으로 너무나 훌륭한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영과 육은 차원이 다릅니다. 육적, 물적인 것은 세상의 원리와 법칙아래 있지만 영혼은 세상의 육적 물적 이성적 법칙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기껏해야 3차원의 세계지만 영적인 세계는 4차원 5차원 백차원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세상적으로 똑똑하고 인격적으로 훌륭해도 죄로 말미암아 영혼이 어두워져 있으면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는 무지몽매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 훌륭한 과학자들이나 그밖에 위대한 분들은 세상 지식도 잘 알고 영적인 지식도 잘 아는 분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분들은 세상적인 지식이나 인격적으로 아주 훌륭하지만 영적인 지식은 없는 분들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어떤 판단이 더 옳겠습니까? 세상적으로는 똑똑하지만 영적으로는 어두운 사람들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세상 지식과 영적인 지식이 모두 밝은 사람들의 판단이 더 옳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인간은 영적존재입니다.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결단코 여기서의 삶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분명히 영원한 세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죄로 말미암아 무지와 어둠 속에 있는 인생들이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조차 모르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런 죄와 무지가운데 있는 인생을 불쌍히 여기셔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탄절인 것입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셔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그래서 저 영원한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게 하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날이 세계 역사상 가장 기쁜 날인 것입니다. 전 우주 공간에 걸쳐서 가장 기쁜 날인 것입니다. 죄에서 해방되어 영생복락을 누리는 것이야말로 인류를 진정으로 영원히 온전히 살리는 일이요, 행복하게 하는 일이요, 우리 인류가 진정한 사랑과 은혜와 평안과 위로와 소망과 축복속에 영원히 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눅2:10,11절에서는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성탄절에는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인류의 유일한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모셔 들이기 바랍니다. 그러면 즉시 예수 그리스도의 사죄의 은총이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진정 모든 죄와 무지와 어둠과 사탄과 사망과 지옥의 권세에서 해방될 것입니다. 그러면 진정 영적으로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완전한 해방자, 자유가가 될 것입니다. 모든 근심과 걱정과 염려과 고통에서 해방 될 것입니다. 모든 미움과 시기와 질투와 욕심에서도 해방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과 은혜와 평강과 위로와 소망을 마음껏 누리게 될 것입니다. 진정 사랑과 은혜와 기쁨과 감사가 넘쳐나는 가정과 이 땅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이 성탄절에 온전히 예수님을 모심으로 저와 여러분은 오늘 여기서 누릴 천국을 마음껏 누리다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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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참된 지혜자(엡5:15~18
 

 

 

 


제목 : 참된 지혜자

본문 : 엡5:15-18


1.주어진 것을 선용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여러분, 지혜가 무엇이겠습니까? 지혜란 한마디로 어떤 주어진 것들을 선용할 줄 아는 능력입니다. 육체이든 물질이든 지식이든 사랑이든 이성이든 경험이든 시간이든 상황이든 환경이든 여하튼 각자의 삶속에 주어져 있는 모든 것을 선용할 수 있는 능력이 곧 지혜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선용할 때 모든 것들이 최상의 가치를 갖게 되고 그러면 우리 삶 전체가 복되고 아름답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 그래요? 그것이 돈이든 지식이든 상황이든 환경이든 기회든 시간이든 건강이든 제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다해도 그걸 선용할 줄 모른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돈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아도 그걸 올바르게 사용하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냐는 말씀이예요. 제아무리 박사학위가 100개라도 그걸 올바르게 사용하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어요. 더 나가서 그것을 악용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데 참 안타까운 것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선용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돈이 많은데 그저 자신의 육신의 욕구를 채우는데만 사용하고 더 나아가서는 도박이나 향락이나 사치로 탕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힘을 가지고 폭력이나 휘두르며 강도짓이나 하면 엉뚱하게 사용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지혜와 지식이 많은데 그걸 가지고 남의 것을 빼앗을 궁리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컴퓨터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이용하며 해킹이나 하고 남의 통장에서 돈이나 빼가고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높은 지위를 이용하여 압력이나 행사하여 뇌물이나 받다가 망신만 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정말 무엇이 옳은 일이고 가치있는 일이고 아름다운 일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과연 무엇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일인지를 생각하며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을 선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은 정말 아름답고 가치있고 기쁨과 은혜가 충만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5,16절에서는 말씀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시간을 바르게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시간 뿐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주님의 뜻대로 선용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혜자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세상은 아름답고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은총이 가득한 복된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결로 세상의 왜곡된 가치관과 삶의 모습에 휩쓸려 다니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잘 살피며 정말 무엇이 우리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것인지, 무엇이 생명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게 하는 것인지를 생각하며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작든 많든 하나님의 뜻대로 선용하는 삶을 통하여 주님 안에 있는 생명의 은총을 풍성히 누리는 복된 삶이 되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선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두말할 나위없이 생명과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17,18절 말씀 보세요.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즉 지혜로운 자가 되려면 주님의 뜻을 알아야 하는데 주님의 뜻을 알려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지요. 성령충만함을 받을 때 비로소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바르게 알게 되고 그러면 지혜와 능력과 사랑과 은혜의 영이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을 선용할 수 있는 참된 지혜자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왜 아니겠습니까? 도대체 우리가 진리의 길을 어떻게 알 수가 있어요. 무엇이 진리입니까? 여러분, 여러분의 지혜로 진리를 알겠습니까? 설령 안다면 그 진리의 길로 나 혼자 잘 갈 수 있습니까? 아니 그 이전에 그 진리가 믿어지기는 하던가요? 도무지 안됩니다. 도무지 알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고, 갈 수도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는 것입니까? 어떻게 해야 알 수 있고 믿을 수 있고 따라 갈 수 있습니까?

 
다른 뾰죽한 수가 없어요. 생명의 영이요,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님이 내 안에 오셔서 내 어둔 눈을 밝혀 주어야 합니다. 내 어둔 마음을 환하게 비춰주어야 합니다. 성령님이 들어오셔서 귀를 열고, 눈을 뜨고, 마음을 열어서 듣게 하시고 보게 하시고 믿게 하실 때 진리의 길을 알게 되고, 영광의 나라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달콤한 생명의 말씀으로 들립니다. 천국이 보이고 주님이 보이는 것입니다.
 

안 그러면 안 보여요. 안 들려요. 안 믿어져요. 아니 막혀 있는데 어떻게 들려요. 눈이 감겨져 있는데 어떻게 보여요. 죄와 무지와 어둠과 굳어진 마음과 이성과 경험으로 영의 세계에 대하여 소경이 되고 귀머거리가 되었는데 어떻게 들리고 어떻게 보여요. 소경이 되고 귀머거리가 되어 어떻게 분별할 수가 있어요.

 
이걸 해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사람이 할 수 있나요? 돈이 할 수 있나요? 과학이 할 수 있나요? 경험이 해결해 주나요? 안돼요. 영은 영이요, 육은 육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사람은 사람입니다. 영적인 일은 영적으로만 분별하는 거예요.

고전2:13절 보세요.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신령한 일은 무엇으로 분별해요. 신령한 것으로, 즉 성령의 역사하심을 따라서만이 분별하게 된다는 거지요.

좀전에 보았던 18절 말씀도 보세요. “술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술 취한다는 것은 물론 직접적으로 마시는 술에 취한 것을 말합니다. 술에 취하면 제 정신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술을 마시면 사리분별력과 판단력이 떨어져요. 몸도 제 맘대로 안돼요. 그래서 용감해지지요. 그래서 술 마시고 용기를 얻어 평소에 못했던 소리도 하고, 한 소리 또 하고, 소리를 지르고 범죄 행위를 하고 희롱하고 추태를 부리곤 하지요.

 
그러나 술취한다는 것은 꼭 마시는 술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의 향락, 안락, 즐거움, 명예, 권세 등등 뭔가 자신에게 위안을 주고 만족을 줄 것이라고 여기는 세상의 것으로 취한 상태, 곧 세상의 것들에게 정신을 빼앗긴 상태도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시는 술에 취하면 제정신이 아니듯이 세상에 취하면 영이 제영이 아닌 것입니다. 술에 취한 사람이 분별력도 판단력도 없고 육체를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것처럼 세상에 취한 사람은 영적 분별력이나 판단력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육신의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자꾸 영이 원하는 길로 가지 않고 엉뚱한 길로 가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것에 취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대한 관심과 열정보다는 세상에 빠져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에 취해 있으면 안된다는 거지요. 하나님의 성령에 취해야 성령의 인도를 따라 거룩한 길로, 진리의 길로, 생명의 길로 달려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너무나 당연한 귀결이 아니겠습니까? 생명의 영이요,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충만 받으면 내 마음속에 생명과 기쁨과 진리와 은혜와 사랑과 거룩과 의로 충만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되겠어요? 내 마음속에 가득 들어 있는 진리, 생명, 은혜, 사랑, 거룩, 의를 따라 살아가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죽어가는 영혼과 예배와 찬양과 기도와 사랑을 나누는 일들에 열심을 내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생명과 은혜와 진리와 사랑과 거룩과 의를 향하여 갈때에 우리의 삶은 더욱 생명과 평화와 기쁨과 은혜와 사랑이 가득한 삶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세상의 것으로 충만함을 받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진리에 대하여 생명에 대하여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대하여는 별로 관심이 없겠지요. 그저 세상에 취해서 세상의 것에 얽매어 욕심과 이기심과 안일함이 나를 지배하게 되겠지요. 마치 거기에 행복이 있고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 것처럼 여기며 세상길로 세상길로 달려가겠지요. 그러다가 그 결국은 어떻게 될 것인지 여러분의 상상에 맡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의 다른 어떤 것보다도 먼저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생명과 진리와 사랑의 영이신 성령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주님의 뜻을 향하여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달려가 달려 갈지라도 세-상길 가지 말고-, 그 하늘비밀 내게- 주신 아버지품을 향해-.’

 
정말 우리 성도님들은 세상의 다른 어떤 것으로 충만하기 전에 먼저 성령으로 충만하여 진정 생명과 자유와 기쁨과 사랑과 의의 영이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갈 때에 주님 안에 있는 그 은혜의 풍성함을 마음껏 누리며 주의 거룩한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복된 인생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주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16,17절 다시 한번 보세요.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무슨 말씀입니까? 세월을 선용하며 지혜자의 삶을 살아야 하는데 때가 악해서 그렇게 하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때가 악하기 때문에 우리가 보고 듣고 말하는 것들이 정말 진리안에서 말씀안에서 이루어지기가 어렵다는 거예요.

여러분, 안 그래요? 보십시오. 정말 선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 살면 선한 일을 하기가 쉽습니다. 모두가 착하고 깨끗하고 올바른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서 살면 자연히 선을 배우게 되고 사랑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절로 선한 모습과 사랑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 곳에서는 혼자서 못되게 굴고 나쁜 짓을 하고 다니면 이 사람은 결국 왕따를 당하게 될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악을 행하고 싶어도 행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악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 살면 선하게 살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왜요? 보고 배우는 게 악이니까요. 보고 배우는 것이 악이니까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악을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설령 어찌어찌해서 혼자 선한 척하면 왕따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나쁜 줄 알면서도 같이 행동하는 거예요. 그러다가 세월이 가면 자기가 하는 나쁜 행동들이 나쁜 줄도 모르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잠13:20절에선느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는 정말 이걸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나 왜곡된 세상속에 살고 있습니다. 영적인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들과 늘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생각지도 않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물질만능주의, 과학지상주의, 개인이기주의, 집단이기주의, 인본주의가 만연되어 있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우리의 사고 구조도 자연히 그렇게 굳어져 버린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들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왜곡된 가치관에 물들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물질만능주의, 개인이기주의, 인본주의에 빠져 그저 자기 생각대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눈에 보이는 것을 좇아 그저 어찌 하든지 많은 소유하기 위하여 육신이 요구하는대로 죄와 무지속에 무감각하게 살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는 바로 이런 점을 경계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하는 이 한마디 속에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과학은 발달하고 있지만 그러나 정작 진리의 측면에서는 너무나 열악한 환경속에 처해있는 우리의 현주소를 일깨워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무감각속에서 휩쓸려가서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는 자가 곧 큰 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언제나 우리의 심령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각들,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계획들,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고 있는 언행들, 우리가 습관적으로 살아가는 삶의 일상들 정말 주님의 뜻에 합당한 것인지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말씀과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중심을 잘 잡고 살아갈때에 주님의 은혜를 충만히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시간을 올바르게 사용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지혜로운 자가 되기위하여 기억할 것은 세월을 아껴야 한다 즉 시간을 올바르게 사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15,16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없는 자같이 말고 지혜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고 말입니다.

 

세월을 아끼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아낀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물론 아낀다는 것은 그저 애지중지 보관해두라는 것은 아닙니다. 진정 아끼는 것은 각각의 용도에 맞게 귀하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돈을 아끼는 것은 돈을 쌓아두는 것이 아닙니다. 가치있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재능을 아끼는 것도 재능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재능을 유익하게 사용하여 자신과 남을 풍요롭게 하는 것입니다. 자식을 아끼는 것은 자식을 가만히 앉혀 놓고 먹여 살리는 것이 아닙니다. 맨날 자식들 뒤치다꺼리나 해주는 게 아닙니다. 자식이 가치있게 바르게 진리안에서 살아가도록 돕는 것이 자식을 아끼는 것입니다.

 

세월을 아끼라는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들을 정말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아름답고 가치있게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들을 정말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자신과 남과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게 모두 유익이 되도록 가치있게 사용하라는 것이지요. 그럴 때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이웃에게 생명과 기쁨을 주며 우리 자신도 정녕 생명의 기쁨이 넘치는 아름답고 멋진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 영생복락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정말 많은 것들을 주셨습니다. 생명의 주시고, 건강을 주시고, 지혜를 주시고, 힘을 주시고, 물질을 주시고, 육체를 주시고, 시간을 주시고 정말 너무나 귀한 것들을 너무나 많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 귀한 것들을 어떻게 사용해 오셨습니까? 앞으로는 어떻게 사용하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정말 선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생명, 건강, 지혜, 물질, 육체, 시간 이 모든 것들을 주님의 뜻을 따라 아름답게 가치있게 사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진정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것으로 취하지 말고 생명과 진리와 의의 영이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올바르게 알아서 주님의 뜻대로 사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 자신이 먼저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온전히 누리는 삶을 살아가고 동시에 여러분의 이웃에게도 기쁨과 유익을 주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더 나아가 죽어가는 영혼들을 주님품으로 인도하며 주의 영광 나타내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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