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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낮 예배설교

 

 

 

주일오전예배설교 

 

늘 살아 계시네  (막16:1~18 )

 

가이드 포스트지에 실린 킬링거 부인의 간증입니다. 이혼한 지 1년이 되던 날 그녀는 친구, 가족, 경제생활 등 모든 것이 먹구름에 싸여 죽기 직전의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책장에서 딸의 초등학교 3학년 때 과제물을 발견했습니다. 여덟 쪽인데 매 쪽에 한 살부터 여덟 살 때까지의 사진 한 장씩을 붙이고 자기의 삶을 설명한 과제물이었습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 쪽에 End(끝)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딸의 글씨 옆에 담임선생님의 'Your beginning' (너의 시작이다)이라는 글씨가 End 라는 글씨를 내리 누르듯이 크게 적혀 있었습니다. 이것이 킬링거 부인이 새 출발하게 된 동기가 되었습니다. 여덟 살 난 아이가 사진 이야기의 끝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마흔이 된 자기도 결코 끝이 아니라는 깨달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예수의 부활을 믿는 자에게는 끝이 없습니다. 여덟 살의 딸아이가 자신의 숙제에 '끝' 이라고 썼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고 시작이었던 것처럼 마흔 살이지만 내 삶은 이제 시작이라는 부활의 믿음을 가지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현재 위치는 어디입니까?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끝입니까? 그러나 끝은 여러분의 생각이지, 하나님에게는 시작입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은 결코 헛된 생활이 아닙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은 낙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은 지금부터 시작입니다.

독일의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 역시 부패하고 타락한 가톨릭을 개혁하면서 죽음과 고통과 어려움의 많은 위협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낙심하지 않았고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험한 시험과 역경이 몰아친다 할지라도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새로운 용기와 소망이 넘친다." 라고 말했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생각만 해도 언제나 소망과 용기가 넘친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늘 살아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새로운 삶이 전개될 줄로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다함께 "살아 계신 주" 함께 찬양합니다. "주 하나님 독생자 예수 날 위하여 오시었네. 내 모든 죄 용서하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나의 구세주. 살아 계신 주 나의 참된 소망 걱정 근심 전혀 없네. 사랑의 주 내 갈 길 인도하니 내 모든 삶의 기쁨 늘 충만하네. 주안에서 거듭난 생명 도우시는 주의 사랑. 참 기쁨과 확신 가지고 예수님의 도우심을 입으며 살리. 살아 계신 주 나의 참된 소망 걱정 근심 전혀 없네 사랑의 주 내 갈 길 인도하니 내 모든 삶의 기쁨 늘 충만하네. 그 언젠가 주 뵐 때까지 주를 위해 싸우리라 승리의 길 멀고 험해도 주님께서 나의 앞길 지켜주시리. 살아 계신 주 나의 참된 소망 걱정 근심 전혀 없네 사랑의 주 내 갈 길 인도하니 내 모든 삶의 기쁨 늘 충만하네." 지금도 늘 살아 계신 부활의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늘 살아 계신 주님은 우리 가운데 계시어,


첫째로 두려움과 의심을 물리쳐 주십니다

미국의 유명한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가 절망에 처한 때가 있었다고 합니다. 27세가 되었을 때 신경쇠약증에 걸렸습니다. 그로 인해 공포와 두려움과 낙심 가운데 언제 자살할지 모르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 헤어 나오기 위해 발버둥치다가 성경을 읽게 되었습니다. 어떤 좋은 약이나 의사보다, 뛰어나다고 믿는 인간의 생각이나 방법보다 더 좋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1장 25절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하는 말씀을 읽을 때에 그는 마음에 감동을 느꼈습니다. 죽은 자도 살리시는 예수께서 내 병을 못 고치시겠는가 생각하니 마음이 기뻐 그 말씀을 종일 복창하였습니다. 그러자 마음속에 믿음이 생겼습니다. 믿음이 점점 커지자 용기와 희망이 생기고 살아 계신 주께서 늘 함께 하심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는 인생의 밑바닥까지 내몰았던 신경쇠약으로부터 깨끗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뛰어난 심리학자로서의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고통을 겪으며 절망과 두려움 속에서 살아갑니다. 미래를 알지 못해 불안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래서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염려합니다. "이제는 끝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가집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할 순간임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여인들은 날이 밝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예수의 시신에 향품을 바르기 위함입니다. 이는 여인들이 부활을 믿지 못하고 있었다는 증거이고 합니다. 그러니 저들에게는 오로지 슬픔과 두려움 밖에 없었습니다. 3절에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며 염려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두려움과 염려는 이미 제거되어 있었습니다. 돌이 벌써 굴려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의 부활을 계획하셨기에 돌문을 여신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여인들은 보이는 돌은 염려했지만 부활신앙을 가로막은 절망의 돌을 치우는 일은 생각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우리 앞에 있는 두려움과 염려의 돌을 옮겨주셨습니다. 더 이상 가로막고 있는 돌문을 바라보며 좌절하거나 실망할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 돌무덤 안에 계시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우리를 만나시려고 우리 앞에 서 계십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주님을 만나 부활의 능력이 함께 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부활하신 주께서 늘 살아 계시어 우리의 두려움과 의심 또한 날마다 물리쳐 주심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처음 사랑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클락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일하는 전도자 중의 한 사람입니다. 미국 시카고에서 매일 밤 전도 집회를 합니다. 꾸준하게 회중이 모입니다. 그런데 회중의 대부분은 술주정꾼, 도둑, 소매치기, 투전꾼 등입니다. 모두가 인간이기를 포기한 사람들입니다. 클락의 설교는 형편없습니다. 지루하고 싫증이 납니다. 느리고 흐리멍덩한 음성입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매일 밤 500여명의 회중이 모입니다. 무엇에 단단히 매인 것처럼 열심히 설교를 듣습니다. 결신자들이 하루에도 수십 명씩 나옵니다. 싫증이 나서 제대로 들을 수조차 없는 설교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감동이 되었을까요?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클락의 진실된 사랑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랑처럼 사람의 마음을 깊이 찌르는 힘은 없습니다. 클락의 눈에는 사랑의 눈물이 언제나 고여 있습니다. 지난 날 클락이 이곳으로 처음 왔었을 때 그는 불쌍한 회중들의 가련함을 알고 울었습니다. 그런데 우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했습니다.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마음을 차갑게 가졌습니다. 그 결과 울지 않는 노력은 성공했으나 설교에 능력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내 눈에 눈물을 돌려주시옵소서." 하나님은 그에게 눈물을 돌려 주셨을 뿐만 아니라 처음 사랑을 회복시켜주셨고 놀라운 능력도 주셨습니다. 사랑은 위대합니다. 사랑은 상대방의 마음을 사로잡고 사람들을 이끄는 매력이 있으며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기적을 만들어 냅니다.

6절입니다.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본문에 의하면 부활 사건의 초점이 빈 무덤이 아니라 갈릴리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더 이상 무덤 속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이미 부활하셔서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갈릴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장소입니다.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만나려는 주님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갈릴리는 예수께서 사역을 시작하신 곳입니다. 제자들을 부르시고 훈련시키신 곳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모두 도망쳤습니다. 그들은 숨어서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처음 사랑과 처음 열정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주님을 향한 사랑이 회복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을 첫 사랑의 장소인 갈릴리로 모이게 하신 것입니다. 그곳에서 자신의 부활을 확인시키심으로 새로운 용기를 주고, 첫 사랑을 회복하고, 부활의 증인으로 삼으시려는 것입니다. 주님의 첫 사랑을 잃어버린 분이 있습니까? 신앙의 좌절을 맛보고 낙심한 분이 있습니까? 부디 부활하신 주님을 통하여 첫 사랑을 회복하시고 은혜를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부활을 증거하는 능력을 주십니다

일본의 최고 기업인 '가네보' 제약회사의 경영자 미타니 야스토는 예수님을 만나 부활신앙으로 인생이 역전되었다고 간증합니다. 인사과장으로 일하면서 회사에서도 항상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알고 상부에서 회사 안에서는 신앙생활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그는 회사에서 쫓겨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신앙을 포기하겠습니다" 라고 상사에게 선언하였습니다. 그러자 그의 마음속에서 "네가 나를 배반하는구나" 하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성경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는 구절을 읽으며 마음이 너무 괴로웠습니다. 자책감이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자신의 인생을 맡기겠다고 기도하면서, 직장을 잃어버리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그러자 마음에 평강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다시 기도하고 성경을 읽으며 회사 동료들에게 열심히 전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일본 전역을 순회하면서 이백여 회의 전도집회를 하고 간증을 하였습니다. 그 결과 회사에서 쫓겨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성실함과 실력을 인정받아 급격히 승진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주심으로 회사를 일본 최고의 기업으로 성장시킨 기여를 인정받아 그 회사의 회장이 되었습니다. 이후 야스토는“예수님의 부활 신앙 체험으로 인생이 역전되었습니다.”라고 간증하게 된 것입니다.

15절에 예수께서 명령하십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예수 부활하심으로 예수 믿는 자들이 영원히 살 수 있다고 전하는 내용이 복음입니다. 그래서 빈 무덤을 본 자들은 예수님의 살아나심을 증거 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난 자들도 누구를 만나든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직접 빈 무덤을 보지 못했고, 예수님을 만난 적도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에서 부활하셨다고 증거하며 목숨걸고 외쳤습니다. 우리도 부활신앙으로 부활의 증거자가 되어야 합니다.

부활절 신앙과 부활신앙을 구별하여야 합니다. 부활절에 교회를 아름답게 장식하고 계란을 준비하여 나눠주고 새벽 예배드리는 일들은 부활절 신앙이라고 부르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하고 체험하는 것은 부활신앙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부활절 신앙이 아닌 부활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부활신앙은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 하는 신앙입니다. 부활사건은 나 자신이 믿어져야 관계가 있게 됩니다. 부디 두려움과 의심을 물리쳐주시고, 첫사랑을 회복시켜 주시며, 부활의 능력을 날마다 주시는 늘 살아 계신 주님을 전하는 부활의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김광일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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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전예배설교] 생명의 기쁨

 

 


말씀 : 눅10:30-37

제목 : 생명의 기쁨

1.내가 먼저 좋은 사람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태어나서 어떤 사람과 만나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누구를 만나느냐에 의하여 우리의 삶의 모습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부모도 잘 만나면 좋습니다. 돈과 명예와 사회적 지위와 게다가 인품까지 좋은 부모를 만나면 자식의 삶이 평안하고 부요하고 복될 것입니다. 그러나 가난하고 술주정뱅이에다가 인품까지 고약한 부모를 만난다면 자식의 삶이 험난할 것입니다.

물론 배우자도 그렇죠. 그런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 경제적 능력과 사회적 지위와 출중한 외모와 훌륭한 인품을 가진 배우자를 만난다면 당연히 복된 삶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쥐뿔도 없는데다 성품까지 고약한 배우자를 만난다면 당연히 삶이 힘들고 고달플 것입니다. 물론 친구나 이웃도 마찬가집니다. 좋은 친구, 좋은 이웃을 만나면 많은 유익과 기쁨을 누리게 되지만 고약한 사람을 만나면 정말 피곤하고 힘든 것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여기서 꼭 기억해야 할 것은 그러므로 물론 다 기왕이면 좋은 부모, 좋은 배우자, 좋은 친구, 좋은 이웃을 만나야 되겠지만 그러나 내가 그렇게 좋은 사람을 만나려면 먼저 내가 좋은 사람이 되기를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나는 좋은 사람이 못되면서 좋은 사람을 만나려고 한다면 속된 말로 도둑놈 심보가 아니겠습니까? 소위 황금율이라 불리는 마7:12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당연하잖아요? 나는 남을 대접해주지 않으면서 나는 남에게 대접받으려고 한다면 얼마나 모순된 일입니까? 내가 좋은 이웃, 좋은 친구가 되어 주지 않는데 누가 나를 좋은 이웃, 좋은 친구로 대하겠습니까? 나는 좋은 남편, 좋은 아내가 되지 못하면서 어떻게 배우자에게 좋은 아내, 좋은 남편이 되어 주기를 바라겠습니까?

여러분, 우리의 삶에 있어서 정말 만남이 중요하므로 여러분도 좋은 분을 만나되 그러나 그 전에 여러분이 먼저 좋은 사람이 되기를 힘씀으로 결국은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이웃이 되고, 좋은 만남이 되어 서로가 함께 생명의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바랍니다.

2.남에게 끔찍한 불행을 준 사람

그런데 여러분, 안타깝게도 오늘 말씀에 보면 자기는 좋은 것을 누리려고 하면서 남에게 너무나 끔찍한 아픔과 고통과 슬픔을 주는 아주 나쁜 사람을 보게 됩니다. 오늘 30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여러분, 이 얼마나 무지하고 어리석고 안타깝고 비극적인 일입니까? 서로 생명을 살려주고 기쁨과 평안과 위로를 주어도 시원찮을 판에 이 무지 몽매한 강도는 돈 몇푼 얻으려고 다른 사람의 옷을 벗기고 때리고 심지어 다 죽어가는 사람을 버리고 도망을 간 것입니다.

여러분, 이 강도는 잘먹고 잘살려고 이런 몹쓸 짓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게 정말 행복과 기쁨과 가치를 가져다주겠습니까? 뭐 빼앗은 것을 사용할 때에 잠시 자신의 육신의 정욕을 만족시켜 주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도둑이 제발 저린다고 그 심령이 평안할 리도 없고 성령 평생 그 짓을 해서 잘 먹고 잘 산다고 할지라도 평생 동안 온갖 비난과 욕을 얻어먹고 손가락질 당하며 살아가는 더럽고 추하고 무가치한 인생에 불과한 것이요, 결국 영원한 지옥불에 들어갈 수 밖에 없는 너무나 불쌍하고 불행한 인생에 불과한 것입니다.

또 이 강도를 당한 사람의 고통과 아픔과 상처는 어떻겠습니까? 물건을 빼앗겨 물질적으로 많은 손해를 본 것은 고사하고 생명의 위협까지 받았습니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엄청난 아픔과 상처를 받았고, 극도의 공포와 불안에 떨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이후의 삶도 육체적 정신적 물질적으로 너무나 고통스럽고 힘들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즉 이 미련한 강도의 짓은 결국 자기도 죽고 남도 죽게 만드는 심히 어리석고 무지하고 바보 같은 짓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결코 이런 우를 범해서는 안됩니다.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또 크든 작든 또 영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물질적으로나 절대 남에게 상처와 아픔과 고통를 주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결국 자기도 죽고 남도 죽이는 하나님께도 책망듣고, 사람들에게 욕먹고 멸시당하고 손가락질 당하고 무시당하는 어리석고 무지하고 더럽고 추하고 볼품없는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더 생각 해야 할 것은 내가 남에게 상처와 아픔과 고통을 주지 말아야 할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동시에 나 스스로가 그런 불행한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하여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물론 때론 불가항력적인 불행이 있는 것도 사실이긴 하지만 사실 따지고보면 스스로 자초한 불행이 훨씬 더 많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정말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며 그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을 구하며 그 말씀을 따라 선과 진리와 의 가운데 열심히 성실하게 진실하게 살아야 하는데 기도도 하지 않고 말씀도 마음에 새기지 않고 그래서 주님의 뜻과는 어긋나게 자기 마음대로 왜곡된 길로 잘못된 길로 다니다가 마귀의 밥이 되어 봉변을 당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오늘 강도를 만난 사람도 사실 그런 측면이 있습니다. 물론 이 사람에께 끔찍한 고통을 준 강도는 엄벌을 받아 마땅한 죄인 중의 죄인임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그러나 조금 깊이 생각해 보면 강도를 당한 사람에게도 일말의 책임이 있다는 것도 부정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닥 봉변을 당했는데 그 길은 본래 매우 험한 길이라서 강도가 자주 출몰하는 우범지역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은 그 길을 가기를 꺼렸고 부득불 가야 할 때는 여럿이 함께 다니는 것이 상례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여하튼 대책도 없이 혼자 그 길을 가다가 그만 봉변을 당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가 한번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우리 인생길 전체에서나 혹은 인생길의 어떤 한 과정에서 어떤 계획을 가지고 무슨 일을 하든 나혼자 내 마음대로 하다가는 그런 불행한 일을 만나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즉 기도하며 말씀 안에서 오직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인생길을 걸어가며 무엇인가를 추진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그냥 내 마음대로 자신만 믿고 자기 생각대로 주님께서 동행하지 않는 길로, 심지어 주님께서 싫어하시는 길로 가면 자칫하면 이런 봉변을 당하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귀가 캄캄한 밤길, 으슥한 길에 숨어 있는 강도처럼 숨어 있다가 우리 영혼과 정신과 물질과 육신을 덮침으로 상처와 고통과 아픔을 당하기 십상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과거에 우리가 경험했던 실패나 아픈 기억들이 엎드려 기도하며 주님과 동행하며 온전히 주님의 뜻대로 열심히 성실하게 삶을 영위했더라면 대부분은 경험하지 않아도 될 아픔이 아니었을까요? 그냥 내 경험과 지식과 이성을 따라서 내 마음대로 심지어는 하나님께서 금하신 길로 자기 마음대로 갔기 때문에 당했던 그래서 결국 스스로 자초한 불행과 아픔과 상처는 아니었을까요? 마치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불행을 자초했던 것러첨 말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내 경험과 이성과 지식을 따라 내 마음대로 혼자 돌아다니지 말고 우리의 완전하고 유일한 보호자이시며 인도자이신 예수님과 온전히 동행해야 합니다.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께서 인정하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해 주시는 길로 걸어가야 합니다. 그 길이 안전하고 그 길이 복되고 그 길이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누리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절대로 자신의 생각과 능력과 경험만을 의지하며 자기 마음대로 다니지 말고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의 인도하심과 그 뜻을 따라 겸손히 주님과 동행할 때에 생명의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어떤 도움도 주지 못한 사람

오늘 말씀 속에서 우리가 또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너무나 절실하게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고 지나쳐간 어리석고 무지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31절, 32절을 보겠습니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여러분,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지금 강도를 만난 사람은 절체절명의 상황으로 누군가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 때 제사장이 그 길로 지나가면서 어찌된 영문인지 강도를 만나 쓰러져 있는 사람을 외면하고 그냥 지나가버렸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레위인이 지나가게 되었는데 그도 역시 이 사람을 못 본척하고 지나쳐 버렸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이럴 수가 있었을까요? 물론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 제사장과 레위인은 이 강도 만난 사람이 이미 죽은 것으로 생각하고 당시 시체는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그걸 접촉하면 자신도 부정하게 됨으로 피해서 갔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금방 사고를 당한 것으로 보아 아직 강도들이 근처에 있을 것으로 보고 서둘러 도망갔을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무언가 급한 일이 있어 이런 일에 끼어들었다가 시간이 지체되거나 성가신 일이 생길까봐 그랬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어떤 경우든 그들의 행동은 생명을 천하보다도 귀하게 여기는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말씀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거나 아니면 자신의 상황이나 안위나 평안함만을 구하는 무지하고도 어리석은 행동이었습니다. 어떤 경우든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일단은 이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제사장과 레위인은 안타깝게도 그냥 지나쳐 버렸습니다. 그래서 강도만난 사람은 생명을 구함 받음으로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누리고, 반대로 제사장과 레위인은 죽어가며 고통 받는 생명을 살림으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고 귀히 여김을 받을 수 있는 복된 기회를 날려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아니 복된 기회를 그냥 날려버린 정도가 아니라 이건 제사장과 레위인으로서 아니 굳이 제사장과 레위인이 아니더라도 인간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의무를 저버림으로 주님의 책망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에서 한가지 더 생각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것은 직접적으로 아픔과 상처와 고통을 주는 것만 악이 아니라 선을 행하지 않는 것도 죄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사람을 직접 해치거나 고통을 주지는 않았지만 마땅히 돌봄이 필요한 사람을 외면함으로서 간접적으로 아픔과 고통을 당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주님의 준엄한 경고를 받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적극적인 악만이 죄가 아니라 소극적 악, 즉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것, 마땅히 선을 행해야 하는데 하지 않는 것도 악입니다. 그래서 약4:17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여러분, 보세요.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하지 않으면 죄라고 하지 않습니까? 당연하잖아요. 선을 행함으로 다른 사람에게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주는 것이 사람의 책임과 의무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내가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결국 다른 사람이 손해를 보거나 아픔을 겪지 않습니까? 그러니 당연히 죄가 되지 않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에게 적극적으로 상처와 아픔과 고통을 주지 않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남에게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유익을 주어야 할 때에 수수방관함으로 결국 죄를 짓는 어리석은 삶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도리어 적극적으로 선과 진리와 의를 행함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가져다주며 결국은 자신도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고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생명의 기쁨을 가져다 준 사람

앞에서는 여러 가지 안타까운 모습들이 있었는데 다행히 우리는 마지막 부분에서 정말 아름다운 장면을 보게 됩니다. 33~35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강도 만나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사람에게 드디어 구세주와 같은 사람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 사람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여행을 하던 중에 쓰러져 신음하고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는 지체 없이 그에게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신속히 응급조치를 취한 다음에 주막으로 데려다가 주고는 치료비까지 내어 주며 돌보아 달라고 부탁을 하고는 자기의 길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아름답고 귀하고 멋있는 사람입니까? 이 귀한 사람으로 인하여 강도 만나 다 죽어가던 사람은 새 생명을 얻음은 물론 비록 한편으로는 이 아픈 기억으로 말미암아 힘들 때도 있겠지만 이 귀한 사람으로 인하여 감사와 기쁨의 마음도 갖게 되고 새로운 희망과 소망 가운데 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 사람은 육체의 생명을 살릴 뿐 아니라 영적 정신적으로 새로운 생명을 주는 복되고 아름답고 귀한 일을 한 것입니다. 또 사실 그 자신도 하나님께서 천하보다도 귀히 여기는 생명을 사랑하여 자신의 물질과 시간과 정성을 드려 살려 줌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입게 되고 그래서 그 자신도 더욱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으며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삶을 살아가는 복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너도 이와같이 하라고 하시면서 그래서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좋은 이웃이 되어 좋은 만남의 관계 속에서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풍성하게 누리는 복된 삶을 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주님이 주신 말씀을 상고해 보면서 우리 삶을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혹시 어렵고 힘든 상황을 만났던 적이 있다면 환경이나 상황이나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기 전에 먼저 스스로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을 만나고, 가지 말아야 할 곳으로 들어갔었기 때문은 아닌지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정말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을 구하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인데 내 생각과 경험과 의지와 왜곡된 가치관을 따라 내 코가 석잔데 남에게 도움을 줄 여유가 어디있느냐며 합리화시키고 변명하면서 하지 못할 때가 많았던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정말 이제 후로는 먼저 정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며 빛이신 예수님과 온전히 만나 교제할 수 있는 시간과 장소와 상황과 환경을 가까이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예수님과 밀접한 만남 속에서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의 은혜와 능력을 덧입어 주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과 주님의 주시는 힘과 능력과 지혜로서 우리의 육신과 영혼과 마음을 공격하는 마귀사탄의 공격을 물리침으로 절대로 강도 만난 인생이 되지 않고 주님의 은혜와 능력과 축복이 넘쳐나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더 나아가서는 그러한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능력과 은총으로 영적 육체적 물질적으로 강도를 만나 고통을 당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의 기쁨과 평안과 위로를 주며 살아가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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