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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의 유익(잠3:21-26) 조학환목사 

 

 

 

[주일오후설교] 지혜의 유익

 

제목 : 지혜의 유익

말씀 : 잠3:21-26

여러분, 세상에서 정말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가장 값진 것이 무엇인가? 말할 것도 없이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말할 것도 없이 그 어떤 금은보화보다 귀한 것이 믿음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생명의 은총,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갈 수 유일한 방법인 이 믿음보다 귀한 것은 없는 것이다. 그 아무 것도 그것보다 우리에게 더 큰 유익을 줄 수 있는 것은 없다. 그 아무것도 그것보다 더 큰 기쁨을 줄 수는 없다. 더 큰 위로와 소망을 줄 수는 없다.

그래서 지난시간에 같이 본바와 같이 15절의 말씀에 보면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너의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지혜 즉 하나님을 알고 믿고 따르는 그 일이 진주를 갖는 것 보다 더 귀한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 지혜 하나님을 알고 믿고 따르는 지혜,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지혜는 세상에서 우리가 바라고 사모하는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이 값진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렇다. 정말 이 보다 귀한 것은 없다. 이것과 바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정말 올바른 생각과 올바른 가치관과 올바른 지혜를 가진 사람이라면 정말 하나님을 아는 지혜,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지혜, 주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의 은총과 바꿀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그 지혜를 알지 못하는 무지한 사람이거나 아니면 올바른 가치관이나 생각을 가지지 못한 정신 이상자들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도 그렇고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도 이 지혜의 유익과 지혜의 가치를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지난시간에는 16절에서 지혜는 장수와 부귀를 준다고 하였고, 또 17절에서는 지혜는 즐거움과 평강을 준다고 하였다. 더 나아가서는 18절에서는 지혜는 영생을 준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니까 결국 지혜를 얻으면 천하를 얻는 것이다. 장수와 부귀, 즐거움과 평강, 영생 이 이상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 이 이상 더 필요한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 지혜를 가진 우리는 감사해야 한다. 영광을 돌려야 한다.

그리고 더나아가서는 그 지혜를 따라 살라야 한다. 공연히 세상 풍조에 이리저리 휩쓸리지 말고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가치관이나 목표나 방향을 가지고 살것이 아니다. 우리의 방향, 우리의 가치, 우리의 목표는 하나다. 기준은 오직 지혜이다. 하나님안에 있는 지혜, 하나님의 말씀 그것이다. 그것을 따라 살면 반드시 영과 육이 은혜를 받는 풍성함을 누린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말씀도 역시 계속해서 이 천하보다 귀한 지혜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1.지혜를 얻으려면

오늘 본문에서는 지혜의 유익을 말하기전에 먼저 지혜를 얻기 위한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니까 지혜를 얻으면 참 평안과 기쁨이 있을 것인데, 영과 육이 풍성함을 누릴 것인데 그렇다면 이러한 지혜는 어떻게 얻을 수 있는 것인가하는 것을 먼저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1)말씀을 읽고 묵상해야한다.(21절)

오늘 본문 21절 뒷부분에 보면 “이것들로 네 눈 앞에서 떠나지 않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네 눈앞에서 떠나지 않게 하라는 것은 말 그대로 항상 우리 눈앞에 말씀이 있게 하라는 이야기다. 눈앞에 성경말씀이 있게 하라는 것은 물론 성경책을 눈앞에 놔두고 구경만 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읽고 묵상하라는 이야기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지혜를 얻게 된다는 말씀인 것이다.

물론 지극히 당연한 말씀이다. 판사가 되려면 헌법, 민법, 상법, 형사소송법 등등의 법 서적을 부지런히 읽어야한다. 의사가 되려면 의학서적을 눈앞에 놓고 살아야 한다. 영어를 잘하려면 늘 영어책을 가까이 해야한다. 소설을 잘 쓰려면 늘 소설책을 가까이 해야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알려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까이 해야한다. 생명에 관한 지식을 얻고자 한다면 생명의 책을 가까이 해야 한다. 말할것도 없이 성경은 최대의 지혜서이다. 성경은 유일하게 생명의 구원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책이다. 성경은 구원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는 비결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 책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비밀을 알려주는 책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을 때 지혜를 얻고, 생명의 비밀을 깨닫게 되고, 구원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는 비결을 알게된다. 그래서 최대의 지혜를 소유한 사람, 생명의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밤낮으로 성경을 묵상하는 사람이 가장 복있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시12:1-3) 왜? 성경에는 생명에 이르는 길이 있으니까. 성경에는 기쁨과 은혜의 길이 있으니까. 성경에는 진리의 길이 있으니까. 그래서 결국 열매를 맺게 되니까.

그러므로 성경을 읽으라. 묵상하라. 농촌에서 솔직히 농번기에는 읽기가 힘들다. 그러면 겨울철에 1독을 하겠다는 마음으로 한번 시작해 보시라. 그리고 모든 공적인 예배에도 부지런히 참석하라. 그냥 참석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심비에 새기라. 말씀을 마음판에 새기고 적용시키라. 그러면 지혜를 얻는다. 풍성한 삶을 산다. 은혜의 삶을 산다. 반드시 복된 사람이 된다.

2)지혜의 말씀을 지켜야 한다.

21절 전반절에 보면 “내 아들아 완전한 지혜와 근신을 지키고.....”라고 말씀하고 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지키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와 계명을 삶속에서 적용시키라는 것이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걱정하지 말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고 한번 그렇게 해보라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다는 것이다.

그렇다. 말씀을 올바르게 듣고 읽는 사람은 그 안에서 은혜를 받는다. 도전을 받는다. 새로운 용기가 솟아난다. 그것을 따라서 살게 될 유익을 확실히 알게 된다. 그 길이 얼마나 복된 길인지 분명히 보게 된다. 그래서 새로운 결단이 생긴다. 그래서 실행하게 된다. 실행하면 은혜가 온다. 은혜가 오면 더욱 신이나서 말씀안에서 살게 된다. 그래서 그 말씀을 묵상하고 지키는 자들은 반드시 복있는 사람이 되고야 마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계1:3에서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렇다. 정말 복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다. 바로 말씀안에 거하는 사람이다. 말씀을 묵상하며 읽으며 그 안에 거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읽으라. 묵상하라. 그대로 행하라. 그리하여 은혜를 받으라. 그러면 세상에서 가장 복된 삶을 살게 된다.

2.지혜를 얻는 자의 유익

지혜를 얻은 자의 유익은 이미 지난 시간에 살펴본 바가 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도 또 이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왜 자꾸만 강조할까? 물론 먼저 그것이 그만큼 중요하니까 그렇다. 중요하지 않은 사실을 강조할 리가 없다.

그리고 자꾸만 강조하는 이유가 또 하나있다. 그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말을 잘 안듣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한번 말해서 잘 들으면 두말할 필요가 무엇인가? 한번 말해서 잘 들으면 한번 말하면 그만이다. 우리 자녀들이 한번 말하면 알아서 하면 잔소리를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시행이 안되면 했던 소리 또 하고 또 하고 하게 되는 것이다. 성경에서도 자꾸만 강조하는 것은 그것이 그만큼 중요하니까, 중요해서 말을 해도 잘 시행이 안되니까 그런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선은 성경에서 강조해서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자. 그만큼 중요한 말씀이다. 귀를 기울였으면 이제는 실제로 그 말씀안에서 살자. 그럼 정말 지혜자가 된다. 복있는 사람이 된다.

그래서 오늘도 또 강조하고 있다.

1)생명을 얻는다.

이것은 이미 18절에서도 말씀하고 있는 내용이다. 18절 전반절에서는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나무라.”고 말씀하고 있고 오늘은 “그리하면 그것이 네 영혼의 생명이 되며....”라고 또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문자적으로는 좀 다르지만 의미는 똑 같은 말이다.

그러니까 지혜를 얻은 자는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지혜는 물론 하나님의 말씀이기도 하고, 하나님 자신이기도, 예수님을 지칭하기도 한다. 즉 성경을 통하여, 말씀을 통하여, 그것을 주야로 묵상하여 거기서 생명의 말씀을 깨닫고, 구원의 도를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면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이 역시 너무나 당연한 말씀이 아닌가? 오직 성경안에만 생명의 도가 있다. 진리의 길이 있다. 영생복락의 길이 있다. 구원의 길이 있다. 물론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할때에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구원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영원한 생명의 은혜를 받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말한다.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3:15) 또 요20:31에서는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성경의 기록 목적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알게 하고 믿게하여 그 이름을 힘입어서 구원을 얻게 하려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가까이 하라. 말씀을 묵상하라. 그러면 지혜를 얻는다. 생명의 은총을 누린다. 영생복락을 누린다. 복의 길이 그렇게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어려운 길도 아니다. 다만 믿고 따르면 된다. 말씀을 하나님을 주님을 가까이 하면 된다.

2)아름다움과 은총을 누린다.

본문 22절 하반절에 보면 “네 목에 장식이 되리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장식이란 ?호의, 은총, 은혜, 매력, 아름다움?으로 번역되는 말이다. 그러니까 지혜의 말씀을 늘 가까이하며 그것을 지켜 살면 은혜와 은총과 아름다움속에 살게 된다는 말이다.

그렇다. 진정 하나님의 말씀을 소유한 자는 아름다워 진다. 그 말이 아름답다. 그 인격이 향기로워 진다. 그 마음이 넉넉해진다. 정말 그 마음 씀씀이가 아름다워진다. 심령의 평안함을 누린다. 모든 추하고 더럽고 허물많던 모습들이 사라진다. 모든 이기심과 미움과 시기와 질투와 증오와 욕심과 저주가 사라진다. 사랑하고 용서하고 이해하고 관용하고 너그러워진다. 왜 진리와 사랑과 은혜의 영이신 성령님이 인도해주시니까. 성령님이 나를 이끌어가니까.

사람이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무엇인가? 가장 은혜로운 모습은 무엇인가? 그것은 결코 외양이 아니다. 능력도 아니다. 지식도 아니다. 권세도 아니다. 부귀도 아니다.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아름다운 마음이다. 맑고 깨끗한 영혼이다. 가식도 미움도 증오도 질투도 거짓도 없는 해맑은 모습이다. 사랑하고 용서하고 이해하고 덮어주는 마음이며 그러한 아름다운 마음들이 밖으로 표출될 때 정말 아름다운 사람이다.

갓난아기가 아름다운 것은 왜인가? 그야말로 어둠의 그림자가 없기 때문이다. 거짓이 없다. 미움도 증오도 없다. 순수하다. 깨끗하다. 그래서 아름답다. 은혜로운 것이다. 그래서 모든 보는 이들의 마음을 평안하게 해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안에서 사는 자는 바로 이런 은혜를 누린다는 것이다.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고 찬양하며 살아가면 성령이 역사하신다. 말씀이 인도하신다. 그래서 우리의 심령속에 찌꺼기를 제거해 주신다. 태워주신다. 모든 세상적인 욕망을 없이 해 주신다. 그러면 그 영혼이 투명해진다. 정제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진정한 은혜와 기쁨을 누리게 된다. 이러한 은혜를 누려보지 않으려는가?

3)평안을 누리게 된다.(23-25)

오늘 23, 24절에서는 “네가 네 길을 안연히 행하겠고 네 발이 거치지 아니하겠으며 네가 누울 때에 두려워하지 아니하겠고 네가 누운즉 네 잠이 달리로다.”고 말씀하고 있다. 즉 우리가 말씀안에서 진리안에서 살아갈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가는 길을 평탄케 해주시고, 걸려서 넘어지지 않게 하시고, 밤에 잠자리에 누울때에도 아무 근심걱정이 없어서 평안히 잠잘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신다는 말씀이다.

잠을 잘 잘 수 있다는 것이 정말 행복한 일이다. 잠을 잘 잔다는 것은 근심걱정이 없다는 이야기다. 근심 걱정 불안 공포 미움 증오 욕심이 있으면 잠이 잘 안온다. 잠이 잘 안온다는 것은 무엇인가 평형이 깨졌다는 것이다. 정신적인 것이든 영적인 것이든 육적인 것이든 무엇인가 평안의 상태에 문제가 생기면 잠이 잘 안오는 것이다. 잠자리에 누워도 별로 편안하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있으면 평강의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붙들어주신다. 위로부터 내려오는 평강을 주신다. 그래서 그것이 영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혹은 육체적인 것이든 세상의 조건과 무관한 평강을 채워주셔서 모든 근심 걱정 물리쳐 주시고 잠자리도 평안케 해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시 127:2에서는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믿고 따르는 자들을 도우시고 인도하시고 역사하셔서 하나님의 평강과 하나님의 위로와 하나님의 소망으로 채워 주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의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진정한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갖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심지어는 죽음의 순간이나 어떤 위기의 순간에도 평안을 누리게 하신다는 것이다. 오늘 25,26절에 보면 “너는 창졸간의 두려움이나 악인의 멸망이 임할 때나 두려워하지 말라. 대저 여호와는 너의 의지할 자이시라. 네 발을 지켜 걸리지 않게 하시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씀은 물론 우리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신다는 말씀이다. 넘어지지 않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뿐만아니라 설령 우리가 넘어질때에도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지켜 주셔서 넘어지 않게 하심으로 평강을 누리고 설령 넘어져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그것을 이기게 함으로 평강을 누리게 된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그 어떤 순간에도 심지어는 멸망의 순간에도, 급작스런 위기의 순간에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지켜주시고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하나님 역사해 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기에 해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살든지 죽든지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죽음앞에서도 겁 낼 필요도 없고, 환난과 핍박속에서도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다. 네가 정녕 나를 믿고 의지하고 따르기만 한다면 내가 모든 것을 알아서 처리해 주시겠다는 말씀이다. 순탄하며 순탄한대로 풍파가 있으면 풍파가 있는대로, 살면 사는대로 죽으면 죽는대로 하나님이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요14:27에서 말씀하셨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빌4:6,7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말씀을 정리한다.

여러분, 근심하지 마시라. 염려하지 말라. 두려워하지도 말라. 다만 주님을 믿으라. 말씀을 묵상하라. 기도하라. 맡기라. 다만 주의 율례와 법도와 계명을 사랑하며 그것을 따르라. 그러면 반드시 주님이 역사하신다. 성령님이 인도하신다. 그러면 은혜를 누린다. 평강을 누린다. 생명의 은총을 누린다. 우리 온 성도들은 이러한 사실을 새롭게 기억하며 오직 주의 율례와 법도와 계명을 좇아 살때에 진정 지혜로운자로써 주님의 평강와 위로와 소망을 마음껏 누리며 사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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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저녁설교] 주일의 의미

 

 


제목 : 주일의 의미

말씀 : 출20:8-11

 


1.주일 성수

주일(主日)성수(聖守)는 성도의 가장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의무이며 특권이며 사명이며 권리이다. 가장 복된 일이다. 그렇다면 주일을 지키는 것이 왜 특권이고 사명이고 복인가?

1)안식일의 의미

주일은 안식일을 기본으로하여 그 정신을 이어받아 신약시대의 성도들이 지키는 가장 거룩한 절기이다. 그러므로 주일의 의미를 살펴보려면 먼저 안식일의 의미를 살펴보아야 한다.

안식일의 의미는 십계명의 말씀에 아주 잘 나타나 있다. 십계명의 말씀 중 안식일의 규정을 말씀하고 있는 출20:8-10에 보면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 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 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쉽게 말하면 안식일은 엿새 동안은 열심히 일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더욱 풍요롭게 가꾸다가 제 칠일에는 모든 것을 중단하고 쉬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그리고 우리가 열심히 수고해서 이룬 것들을 누리면서 안식하게 하기 위하여 세우셨다는 것이다.

그 말씀 중 우리는 특별히 11절 후반절의 말씀 즉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는 말씀에 주목해야 한다. 즉 안식일은 다른 날과 전혀 다른 날이라는 것이다. 다른 날과는 완전히 구별하여 세운 날이라는 것이다. 우리에게 복을 주시려고 따로 세워놓으신 아주 특별한 날이라는 것이다.

거룩하다는 말의 의미가 그것이다. 구별되다, 성별되다, 다르다 뭐 그런 의미를 갖는다. 그러니까 그날은 다른 날과는 완전히 다른 날이라는 것이다. 그날은 다른 날과는 완전히 의미가 다르게 따로 구분해서 세워주신 날이라는 것이다. 구별해서 따로 세워놓으신 날이니까 다른 날과 구별해서 다르게 지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다른 날들과는 전혀 다르게 세상에서 하던 모든 일들을 완전히 중단하고 특별한 방법으로, 특별한 목적으로 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고 우리는 안식과 기쁨과 은혜의 충만함을 누림으로 복되고 기쁜 날이 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 날은 가장 복된 날이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이것이 얼마나 큰 복인가? 세상의 모든 일, 근심, 걱정, 수고에서 벗어나 하나님 존전에 나와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은총을 누리며 그 안에서 안식하는 그 복을 어디에다 비교할 것인가? 하나님도 알지못하고, 주님안에 있는 안식도 누리지 못하고, 위로부터 내려오는 성령의 충만한 은혜도 누리지 못하고 그저 죽자사자 일만하며 살아가는 인생이란 얼마나 불쌍한 인생인가?

그렇다. 안식일을 따로 구별해서 주신 목적은 바로 복을 주시려는 것이었다. 우리에게 안식을 주고 복을 주고 은혜를 주고 기쁨을 주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날이 될 수 있느냐하면 그날을 특별하게 구별해서 보낼 때 그것이 가능한 것이다. 다른 날과 구별하지 못하고 다른 날과 별로 다르지 않게 보낸다면 그런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러한 안식일 즉 주일의 의미를 기억하며 이 날을 거룩하게 보내기 바랍니다. 정말 특별하게 보내기 바란다. 일상적인 삶과 완전히 다르게 보내기 바란다. 정말 몸과 마음과 정신과 모든 것이 주님앞에 온전히 나아와 몸과 마음과 영혼에 온전한 쉼을 누리기 바랍니다. 진정 하나님께 나아와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과 존귀를 돌려 드림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고 여러분 자신들은 주님 안에 있는 은혜, 그 기쁨, 그 안식, 그 평안 온전히 누리는 복된 삶이 되기를 바란다.

2)주일의 의미

먼저 주일(主日)이라는 말의 뜻은 주님의 날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그 날은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날이다. 앞서 안식일의 의미에서도 보았지만 그날은 특별히 하나님께서 구별해 놓은 날이므로 내 맘대로 사용해서는 안된다. 더구나 그날 주님의 날이다. 물론 모든 날이 하나님의 것이지만 이 날은 더더구나 더 그렇다. 주님의 날이기 때문에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

여기서 오늘 말씀과 좀 다른 차원이지만 한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은 우리는 일요일이라는 말을 써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일요일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냥 노는 날의 의미로 사용하는 말이다. 그러니까 공일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이것은 우리가 말하는 주일과 전혀 다른 의미인 것이다. 우리에게는 절대로 공일이 아니다. 이날은 주일이다. 주님의 날이다. 주님께 영광을 돌리며, 주님의 은총을 누리며, 주님안에서 안식하는 날이다. 주님께 드려야할 날이다. 그러므로 꼭 주일이라는 말을 사용하도록 하라.

그렇다면 주일 즉 주님의 날이라는 의미는 무엇인가? 성경에서는 주의 날은 두가지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하나는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이다. 주님께서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날이기에 그 날을 주님의 날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것은 계1:10에 보면 있는데 거기에 보면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라는 말씀이 있다.

이것은 사도요한이 밧모섬에서 요한계시록을 기록할때의 상황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즉 사도요한이 밧모섬에 계시를 받을 때가 주의 날 즉 주님께서 부활하셨던 안식후 첫날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주님이 부활하신 날을 주의 날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두 번째 의미는 주님이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할 날을 주의 날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것은 살전5:2, 살후2:2, 벧후3:10 등에 나타나는데 벧후3:10절에 보면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고 말씀하면서 주님께서 재림하셨을 때의 일을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즉 오늘날 우리가 지키는 주일은 주님의 날이라는 뜻인데 하나는 주님이 부활하신 날이라는 의미이고 또 하나는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을 말한다. 그러니까 주님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결정적인 날인 주님의 부활과 재림의 날을 주의 날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일이란 한마디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날이다. 완전한 생명, 영원한 생명을 주신 날이다. 동시에 이날은 모든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신 날이다. 사망의 권세, 즉 인간을 억누르고 있는 가장 무섭고도 무거운 짐을 벗겨 주신 날이다. 모든 어둠과 고통과 연약함과 허무함의 대표라고 볼 수 있는 죽음의 권세를 벗겨주신 날이다. 동시에 주님이 오셔서 완전한 구원으로 인도하실 날이다. 광야와 같은 세상속에서 모든 무거운 짐을 벗겨주시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로 인도하실 날이다.

3)안식일이 주일로 바뀐 이유

위에서 말한바와 같이 주일은 그야말로 진정한 생명의 날이요, 은혜의 날이요, 안식의 날이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안식일이 주일로 바뀐 이유를 분명하게 찾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주일은 진정한 생명의 날이요, 은혜의 날이요, 안식의 날이므로 안식일의 의미를 완성한 날인 것이다.

앞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게 복을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안에서 안식하며 평강을 누리게 하기 위하여 제정하신 날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인간은 완전한 안식을 누릴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죄와 연약함과 부족함과 허물과 어둠으로 말미암아 영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온전한 안식을 누리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결국 영원한 형벌에 처할 수 밖에 없는 그래서 안식과는 완전히 180도 다른 영원한 고통속에 살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문제를 일거에 해결한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사건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서는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였고, 예수님의 부활을 통하여서는 인간의 생명의 문제를 해결하였다.

즉 십자가를 통하여 완전히 죄로부터 해방되고, 부활을 통하여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완전히 새로운 생명을 갖게 됨으로써 비로소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진정한 안식이 완성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은 곧 안식일의 완성인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이 안식일의 완성이기에 당연히 예수님께서 모든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날이 안식일을 대신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초대교회부터 안식후 첫날 즉 주님이 부활하신 주의 날 에 모이기 시작하였는데 먼저 요20:19에 보면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에 제자들이 모이기 시작했다는 말씀이다.

또 행20:7에 보면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라는 말씀이 있다. 여기서 떡을 떼려하여 모였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은 단순한 애찬이 아닌 성찬을 겸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것은 매 주일마다 정기적으로 모여 예배를 드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특별히 매주일 정기적으로 모인 사실에 대해서는 고전16:2에 잘 나타나 있다. 거기에 보면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니까 매주일 첫날에 예배드리러 모일 때마다 연보를 하여 그것으로 어려움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구제금으로 사용하라는 그러한 말씀인 것이다.

그렇다. 주일이 안식일을 대신하게 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분이었고, 그 오신 목적을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안식일을 완성시키셨기 때문이다. 다시말하면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구약의 안식일의 의미가 완전히 이루어진 것이다. 그것을 이룬 날이 바로 주일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이에 대하여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것은 오늘 본문8절의 말씀인데 곧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는 말씀인 것이다. 안식일의 주인이라함은 한마디로 주님이 안식일을 주관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안식일은 주님의 것이라는 말씀이다. 안식일의 주인은 주님이니까 그날은 주님의 것이고, 그분의 뜻에 의하여 움직여야 되는 날이고, 그 분안에서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자. 주일은 안식일의 뜻을 완성한 날이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류에게 복을 주시려고 구별해서 주신 날이다. 그러나 범죄한 인간은 그 안식일안에서는 온전한 안식을 누릴 수가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안식일을 완성시키셨다. 그 안에 진정한 생명의 풍성함과 안식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야한다. 그날은 주님의 날이다. 오직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날이어야 한다. 오직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날이어야 한다. 주님의 뜻대로 사용해야 한다. 주님의 날이니까. 그러면 더 큰 생명의 은혜를 누린다. 축복을 누린다. 모두 주일을 거룩하여 지켜 복된 삶을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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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설교] 말씀과 삶

 

 

 

 

말씀 : 잠7;1-5

제목 : 말씀과 삶

인간에게는 생존하기 위하여 혹은 보다 더 나은 삶을 누리기 위한 욕구가 있다. 인간의 욕구는 1차적인 생리적 욕구와 2차적인 사회적 욕구로 분류된다. 생리적 욕구는 경험이나 훈련이 필요치 않은 본능적인 욕구를 말하는 것으로 생욕, 식욕, 성욕과 같은 것이며, 사회적 욕구는 물론 본능적인 성격도 있지만 그보다는 주로 사회생활 속에서 형성되는 것으로 명예욕, 소유욕, 성취욕, 지배욕, 권력욕 등이 이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욕구들은 인간의 삶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들이다. 그 모든 욕구들 하나하나가 모두 인간의 삶을 유지시키고 발전시키고 인간의 생명을 풍요롭게 하기 위한 중요한 요소들이 된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욕구들이 잘못 사용되었을 때 그것은 오히려 인간의 삶을 파괴하는 역할을 한다.

그중에서 인간의 삶을 가장 심각하게 파괴할 우려가 있는 욕구는 소유욕과 성욕, 명예욕이라고 한다. 실제로 인간사회에 나타나는 모든 부조리와 갈등과 고통의 현상들이 바로 이러한 소유욕과 성욕과 명예욕에 의하여 발생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이러한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와 관련된 범죄에 대하여 많은 경고를 하고 있다.

물질적인 욕망으로 인한 범죄와 관련해서는 십계명중 제8계명에서는 “도적질하지 말지니라.”고 하셨고, 또 제10계명인 출20:17에서는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고 하시면서 남의 물건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자신의 것을 족한 줄로 여기며 살 것을 말씀하고 있다.

또 성적인 범죄에 대하여 십계명중 7계명인 출20:14에서 “간음하지 말지니라.”고 하셨고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간음하는 자는 돌로 쳐서 죽이라고 말씀하고 있다.(레20:10) 이러한 내용들은 인간 속에 자리잡고 있는 이러한 욕망들이 반드시 필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잘못 사용될 경우 인간에게 심각한 고통을 안겨다 줄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도록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바로 이러한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를 올바르게 사용하지 못함으로 일어날 수 있는 죄악을 어떻게 이길 수 있는지를 말씀하고 있다. 한마디로 말씀안에 굳게 서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 말씀이 우리를 모든 유혹으로부터 보호해 줄 것이라는 것이다.

1.말씀이란 무엇인가?

먼저 1-4절에 나타난 ‘말씀’에 대한 표현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1절의 내 ’말'을 지키며, 내 '명령'을 간직하며, 2절에서는 내 '법'을 눈동자처럼 지키라고 말한다. 그리고 4절에서는 '지혜'에게 누이라하고, '명철'에게 친족이라 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물론 말이나 명령이나 법이나 지혜나 명철은 모두가 같은 의미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곧 명령이고 법이고 지혜이고 명철이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명령이고 법이고 지혜이고 명철이니까 그 말을 가슴에 새기고 간직하고 지키라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을 여러 가지 각도에 말씀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다양한 기능을 말해준다. 즉 말씀을 법이라고 하는 것은 말 그대로 말씀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삶의 법칙이라는 의미이다. 법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기준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말의 기준, 행동의 기준, 준거가 곧 법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법이라고 표현할 때는 이 말씀이 인간의 행동의 모든 기준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또 말씀을 ‘지혜’라고 부르는 것은 말씀이 인간에 참된 진리의 세계를 알려주는 올바른 지식이라는 측면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모든 지식과 지혜와 진리가 들어있다는 말씀이다. 그렇지 않은가? 무엇인 진정 지혜인가? 무엇이 진정한 지식인가? 물론 생명을 주고 더 나아가서는 생명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지혜요, 지식이 아닌가?

생명을 주는 지혜는?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주는 지식은? 오직 말씀, 오직 예수, 그러므로 그 지식을 알고 그것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린다. 그러면 그 사람이 가장 지혜로운 자인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이 곧 지혜가 되는 것이다.

또 말씀을 ‘명령’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 말씀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절대적인 규범으로 그것은 우리가 지켜야 할 의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지혜 이것은 결코 단순한 권면이나 그럴듯한 종교철학이나 사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이 반드시 지켜야 할 하나님의 지시요 명령이라는 것이다. 명령이니까 반드시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1절에는 내 ‘말’이라고 말씀한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말씀이라는 말이 엄청나게 많이 나온다. 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혹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혹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등등의 표현이 굉장히 많이 나온다. 무슨 뜻인가? 말 그대로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임으로 진리이고, 생명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감히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경홀히 대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에 대해서 그것이 법이고 지혜이고 명철이고 율례이고 하나님의 말씀이고 명령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래서 정말 그것을 잣대로 삼자. 참지혜가 거기 있음을 알고 그 말씀을 따르자.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엄중히 다루자. 그래서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살 때 말씀의 인도를 따라 참 생명의 은총의 길을 걸어가자.

2.말씀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다음에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곧 법이요, 명령이요, 계명이요, 지혜인데 도대체 어쩌란 말이냐하는 것이다. 어쩌긴 어쩌겠는가? 그것이 법이고 지혜라면 그 말씀을 지켜야 하지. 지키면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이지.

그것이 바로 1-4절에서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은 그 말씀을 간직하고(1절) 지키고(2절) 가까이하라(3절 上) 새기라(3절下) 친근히 여기라(4절)는 것이다. 여기서 ‘간직한다’는 것은 「숨기다, 비축하다, 저장하다」는 의미이다. 또 ‘지킨다’는 것은 「지키다, 보호하다, 망보다」는 의미이다. 가까이한다는 「곁에 두다, 떠나지 않다, 함께하다」라는 의미이며, 또 ‘새기라’는 것은 「기록하다, 명부에 올리다, 등록하다」는 의미이다. 또 친근히 한다는 것은 「가까이 하다, 좋아하다, 기뻐하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들을 종합해보면 우선은 말씀을 마음에 새겨넣고, 새겨 넣으려면 가까이하고 친하게 지내야 하며, 그 다음 다음에는 잘 간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잘 간수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잘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어떤 것들이 침범하여 마음속에 들어 있는 말씀을 빼앗아가지 못하도록 지키라는 말이다.

특히 지키라는 말씀속에서 2절 후반부에서는 눈동자처럼 지키라는 말이 있다. 눈동자처럼 지켜라. 사람이 어떻게 눈동자를 지키는가? 한마디로 말하면 민첩하게 지킨다. 반사적으로 지킨다. 눈에 무엇인가가 가까이 오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이 깜박여져서 눈꺼풀이 눈동자를 덮어 보호하는 것이다. 눈은 그만큼 중요한 기관으로 반사적으로 지키는데 이와 같이 무엇인가가 말씀을 침범하려고 하면 다른 어떤 것을 지키는 것보다도 중요하게 잽싸게 지키라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가? 말씀을 얼마나 잘 지키는가? 돈을 지킴보다, 내 육체를 지킴보다, 내 명예를 지킴보다 말씀을 지키는가? 돈이냐, 말씀이냐하는 기로에서 우리는 무엇을 택하는가? 육체의 생명이냐 말씀이냐하는 기로에 선다면 무엇을 지킬 것인가? 명예이냐 말씀이냐하는 양자택일을 강요받는다면 무엇을 지킬 것인가?

하나님은 무엇을 지키기를 원하실까?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22:37)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생명보다 물질보다 명예보다 지식보다 말씀을 지키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생명보다 물질보다 명예보다 권력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왜? 하나님이 욕심장이라서? 독재자라서? 폭군이라서? 물론 아니다. 그게 생명의 길이기 때문에... 그게 인간이 가장 인간답게 가장 풍요롭게 가장 가치있게 살아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말씀을 지키기를 새기고 간직하고 지키기를 원하시는데 그렇게 하기 위하여 우리는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한다. 그래서 4절에서는 말씀한다. “지혜에게 너는 내 누이라하며, 명철에게 너는 내 친족이라하라.” 무슨 말인가? 한마디로 친근히 하라는 말이다. 가까이 하라는 말이다. 여기서 누이와 친족을 구별해서 말씀하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친족처럼 형제처럼 그렇게 가까이 하라는 것이다. 함께 하는 것을 좋아하라는 것이다. 즐거워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가까워지고 함께 있게 되고 떠나지 않게 된다.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이 함께 있으면 나의 삶에 은혜가 충만하게 된다.

그러므로 말씀을 가까이 하라. 즐거워하라. 좋아하라. 사랑하라. 묵상해야 하라. 교회를 가까이하라. 예배를 가까이하라. 적용하기를 가까이하라. 그리하여 더욱 은혜 가운데 살아가자.

3.말씀을 지킨 결과는 무엇인가?

말씀을 새기고 간직하고 지키고 가까이하라고 경계하신 다음에 5절에서는 그 결과를 말씀하고 있다. 왜 그렇게 말씀을 지켜 살라고 하시는지 그 이유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세상의 유혹으로부터 그 말씀들이 자신을 지켜 줄 것이라는 말씀이다.

5절 말씀을 보라. “그리하면 이것이 너를 지켜서 음녀에게, 말로 호리는 이방 계집에게 빠지지 않게 하리라.” 즉 그 말씀을 네가 네 마음속에 지키면 이제는 반대로 그 말씀이 너를 지켜 줄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너를 모든 악의 유혹으로부터 보호해 줄 것이라는 말씀이다.

우리는 요셉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다. 그는 많은 시련들가운데서도 오직 말씀으로 승리한 사람이다. 형제들이 자신을 죽이려다가 팔아넘긴 악행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 들여 형들을 미워하지도 않았고 원수를 갚지도 않았다. 또 물질적으로도 신앙양심에 입각해서 살았고, 육체적으로 성결한 삶을 살았다. 창39장에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요셉은 말한다.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창39:9) 당신은 보디발의 아내가 아니냐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당신을 범한다면 그것은 물론 당신의 남편 보디발에게도 악이 되겠지만 그보다 앞서 그것은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다.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이다. 그러니 난 그럴 수 없다고 하지 않는가?

그가 그러한 유혹 앞에서도 결코 넘어지지 않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심령 안에 말씀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삶의 모든 순간 순간 속에서 말씀이 그를 인도했기 때문이다. 혹시 죄를 저지를 만한 상황이라고해도 그의 심비에 새겨져 있던 말씀이 즉시 그를 인도하여 그가 죄악 속에 빠지지 않도록 제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의로운 삶을 살았다. 하나님과 사람에게 인정받았다. 축복을 받았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자. 인간에게는 많은 욕구가 있다. 생욕, 식욕, 성욕, 물욕, 명예욕, 승부욕 등등.... 이러한 욕구들은 물론 건전하게 사용하면 인간에게 약이 된다.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욕구들을 잘못 분출시키면 그것은 독이 된다. 인간의 삶을 파괴한다. 그러한 인간의 욕망들을 잘못 사용하면 결국 자신과 남과 가정과 교회와 사회를 파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올바르게 사용해야 한다. 그럼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가? 방법은 한가지다. 말씀을 심비에 새기고 사는 것이다. 말씀을 간직하고 사는 것이다. 가까이하는 것이다. 말씀을 지키는 것이다. 우리가 말씀을 지키면 그 말씀은 우리를 지킨다. 그러므로 말씀안에서 살아가자. 간직하고 살자. 새기고 살자. 가까이하며 살자.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들을 아름답고 올바르게 사용하여 복된 삶을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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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찬양예배설교 / 하나님의 말씀

 

 

 


말씀 : 잠7;1-5

제목 : 하나님의 말씀

인간에게는 생존하기 위하여 혹은 보다 더 나은 삶을 누리기 위한 욕구가 있다. 인간의 욕구는 1차적인 생리적 욕구와 2차적인 사회적 욕구로 분류된다. 생리적 욕구는 경험이나 훈련이 필요치 않은 본능적인 욕구를 말하는 것으로 생욕, 식욕, 성욕과 같은 것이며, 사회적 욕구는 물론 본능적인 성격도 있지만 그보다는 주로 사회생활 속에서 형성되는 것으로 명예욕, 소유욕, 성취욕, 지배욕, 권력욕 등이 이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욕구들은 인간의 삶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들이다. 그 모든 욕구들 하나하나가 모두 인간의 삶을 유지시키고 발전시키고 인간의 생명을 풍요롭게 하기 위한 중요한 요소들이 된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욕구들이 잘못 사용되었을 때 그것은 오히려 인간의 삶을 파괴하는 역할을 한다.

그중에서 인간의 삶을 가장 심각하게 파괴할 우려가 있는 욕구는 소유욕과 성욕, 명예욕이라고 한다. 실제로 인간사회에 나타나는 모든 부조리와 갈등과 고통의 현상들이 바로 이러한 소유욕과 성욕과 명예욕에 의하여 발생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이러한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와 관련된 범죄에 대하여 많은 경고를 하고 있다.

물질적인 욕망으로 인한 범죄와 관련해서는 십계명중 제8계명에서는 “도적질하지 말지니라.”고 하셨고, 또 제10계명인 출20:17에서는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고 하시면서 남의 물건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자신의 것을 족한 줄로 여기며 살 것을 말씀하고 있다.

또 성적인 범죄에 대하여 십계명중 7계명인 출20:14에서 “간음하지 말지니라.”고 하셨고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간음하는 자는 돌로 쳐서 죽이라고 말씀하고 있다.(레20:10) 이러한 내용들은 인간 속에 자리잡고 있는 이러한 욕망들이 반드시 필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잘못 사용될 경우 인간에게 심각한 고통을 안겨다 줄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도록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바로 이러한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를 올바르게 사용하지 못함으로 일어날 수 있는 죄악을 어떻게 이길 수 있는지를 말씀하고 있다. 한마디로 말씀안에 굳게 서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 말씀이 우리를 모든 유혹으로부터 보호해 줄 것이라는 것이다.

1.말씀이란 무엇인가?

먼저 1-4절에 나타난 ‘말씀’에 대한 표현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1절의 내 ’말'을 지키며, 내 '명령'을 간직하며, 2절에서는 내 '법'을 눈동자처럼 지키라고 말한다. 그리고 4절에서는 '지혜'에게 누이라하고, '명철'에게 친족이라 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물론 말이나 명령이나 법이나 지혜나 명철은 모두가 같은 의미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곧 명령이고 법이고 지혜이고 명철이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명령이고 법이고 지혜이고 명철이니까 그 말을 가슴에 새기고 간직하고 지키라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을 여러 가지 각도에 말씀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다양한 기능을 말해준다. 즉 말씀을 법이라고 하는 것은 말 그대로 말씀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삶의 법칙이라는 의미이다. 법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기준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말의 기준, 행동의 기준, 준거가 곧 법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법이라고 표현할 때는 이 말씀이 인간의 행동의 모든 기준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또 말씀을 ‘지혜’라고 부르는 것은 말씀이 인간에 참된 진리의 세계를 알려주는 올바른 지식이라는 측면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모든 지식과 지혜와 진리가 들어있다는 말씀이다. 그렇지 않은가? 무엇인 진정 지혜인가? 무엇이 진정한 지식인가? 물론 생명을 주고 더 나아가서는 생명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지혜요, 지식이 아닌가?

생명을 주는 지혜는?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주는 지식은? 오직 말씀, 오직 예수, 그러므로 그 지식을 알고 그것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린다. 그러면 그 사람이 가장 지혜로운 자인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이 곧 지혜가 되는 것이다.

또 말씀을 ‘명령’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 말씀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절대적인 규범으로 그것은 우리가 지켜야 할 의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지혜 이것은 결코 단순한 권면이나 그럴듯한 종교철학이나 사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이 반드시 지켜야 할 하나님의 지시요 명령이라는 것이다. 명령이니까 반드시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1절에는 내 ‘말’이라고 말씀한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말씀이라는 말이 엄청나게 많이 나온다. 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혹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혹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등등의 표현이 굉장히 많이 나온다. 무슨 뜻인가? 말 그대로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임으로 진리이고, 생명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감히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경홀히 대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에 대해서 그것이 법이고 지혜이고 명철이고 율례이고 하나님의 말씀이고 명령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래서 정말 그것을 잣대로 삼자. 참지혜가 거기 있음을 알고 그 말씀을 따르자.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엄중히 다루자. 그래서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살 때 말씀의 인도를 따라 참 생명의 은총의 길을 걸어가자.

2.말씀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다음에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곧 법이요, 명령이요, 계명이요, 지혜인데 도대체 어쩌란 말이냐하는 것이다. 어쩌긴 어쩌겠는가? 그것이 법이고 지혜라면 그 말씀을 지켜야 하지. 지키면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이지.

그것이 바로 1-4절에서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은 그 말씀을 간직하고(1절) 지키고(2절) 가까이하라(3절 上) 새기라(3절下) 친근히 여기라(4절)는 것이다. 여기서 ‘간직한다’는 것은 「숨기다, 비축하다, 저장하다」는 의미이다. 또 ‘지킨다’는 것은 「지키다, 보호하다, 망보다」는 의미이다. 가까이한다는 「곁에 두다, 떠나지 않다, 함께하다」라는 의미이며, 또 ‘새기라’는 것은 「기록하다, 명부에 올리다, 등록하다」는 의미이다. 또 친근히 한다는 것은 「가까이 하다, 좋아하다, 기뻐하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들을 종합해보면 우선은 말씀을 마음에 새겨넣고, 새겨 넣으려면 가까이하고 친하게 지내야 하며, 그 다음 다음에는 잘 간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잘 간수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잘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어떤 것들이 침범하여 마음속에 들어 있는 말씀을 빼앗아가지 못하도록 지키라는 말이다.

특히 지키라는 말씀속에서 2절 후반부에서는 눈동자처럼 지키라는 말이 있다. 눈동자처럼 지켜라. 사람이 어떻게 눈동자를 지키는가? 한마디로 말하면 민첩하게 지킨다. 반사적으로 지킨다. 눈에 무엇인가가 가까이 오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이 깜박여져서 눈꺼풀이 눈동자를 덮어 보호하는 것이다. 눈은 그만큼 중요한 기관으로 반사적으로 지키는데 이와 같이 무엇인가가 말씀을 침범하려고 하면 다른 어떤 것을 지키는 것보다도 중요하게 잽싸게 지키라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가? 말씀을 얼마나 잘 지키는가? 돈을 지킴보다, 내 육체를 지킴보다, 내 명예를 지킴보다 말씀을 지키는가? 돈이냐, 말씀이냐하는 기로에서 우리는 무엇을 택하는가? 육체의 생명이냐 말씀이냐하는 기로에 선다면 무엇을 지킬 것인가? 명예이냐 말씀이냐하는 양자택일을 강요받는다면 무엇을 지킬 것인가?

하나님은 무엇을 지키기를 원하실까?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22:37)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생명보다 물질보다 명예보다 지식보다 말씀을 지키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생명보다 물질보다 명예보다 권력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왜? 하나님이 욕심장이라서? 독재자라서? 폭군이라서? 물론 아니다. 그게 생명의 길이기 때문에... 그게 인간이 가장 인간답게 가장 풍요롭게 가장 가치있게 살아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말씀을 지키기를 새기고 간직하고 지키기를 원하시는데 그렇게 하기 위하여 우리는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한다. 그래서 4절에서는 말씀한다. “지혜에게 너는 내 누이라하며, 명철에게 너는 내 친족이라하라.” 무슨 말인가? 한마디로 친근히 하라는 말이다. 가까이 하라는 말이다. 여기서 누이와 친족을 구별해서 말씀하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친족처럼 형제처럼 그렇게 가까이 하라는 것이다. 함께 하는 것을 좋아하라는 것이다. 즐거워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가까워지고 함께 있게 되고 떠나지 않게 된다.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이 함께 있으면 나의 삶에 은혜가 충만하게 된다.

그러므로 말씀을 가까이 하라. 즐거워하라. 좋아하라. 사랑하라. 묵상해야 하라. 교회를 가까이하라. 예배를 가까이하라. 적용하기를 가까이하라. 그리하여 더욱 은혜 가운데 살아가자.

3.말씀을 지킨 결과는 무엇인가?

말씀을 새기고 간직하고 지키고 가까이하라고 경계하신 다음에 5절에서는 그 결과를 말씀하고 있다. 왜 그렇게 말씀을 지켜 살라고 하시는지 그 이유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세상의 유혹으로부터 그 말씀들이 자신을 지켜 줄 것이라는 말씀이다.

5절 말씀을 보라. “그리하면 이것이 너를 지켜서 음녀에게, 말로 호리는 이방 계집에게 빠지지 않게 하리라.” 즉 그 말씀을 네가 네 마음속에 지키면 이제는 반대로 그 말씀이 너를 지켜 줄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너를 모든 악의 유혹으로부터 보호해 줄 것이라는 말씀이다.

우리는 요셉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다. 그는 많은 시련들가운데서도 오직 말씀으로 승리한 사람이다. 형제들이 자신을 죽이려다가 팔아넘긴 악행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 들여 형들을 미워하지도 않았고 원수를 갚지도 않았다. 또 물질적으로도 신앙양심에 입각해서 살았고, 육체적으로 성결한 삶을 살았다. 창39장에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요셉은 말한다.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창39:9) 당신은 보디발의 아내가 아니냐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당신을 범한다면 그것은 물론 당신의 남편 보디발에게도 악이 되겠지만 그보다 앞서 그것은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다.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이다. 그러니 난 그럴 수 없다고 하지 않는가?

그가 그러한 유혹 앞에서도 결코 넘어지지 않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심령 안에 말씀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삶의 모든 순간 순간 속에서 말씀이 그를 인도했기 때문이다. 혹시 죄를 저지를 만한 상황이라고해도 그의 심비에 새겨져 있던 말씀이 즉시 그를 인도하여 그가 죄악 속에 빠지지 않도록 제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의로운 삶을 살았다. 하나님과 사람에게 인정받았다. 축복을 받았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자. 인간에게는 많은 욕구가 있다. 생욕, 식욕, 성욕, 물욕, 명예욕, 승부욕 등등.... 이러한 욕구들은 물론 건전하게 사용하면 인간에게 약이 된다.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욕구들을 잘못 분출시키면 그것은 독이 된다. 인간의 삶을 파괴한다. 그러한 인간의 욕망들을 잘못 사용하면 결국 자신과 남과 가정과 교회와 사회를 파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올바르게 사용해야 한다. 그럼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가? 방법은 한가지다. 말씀을 심비에 새기고 사는 것이다. 말씀을 간직하고 사는 것이다. 가까이하는 것이다. 말씀을 지키는 것이다. 우리가 말씀을 지키면 그 말씀은 우리를 지킨다. 그러므로 말씀안에서 살아가자. 간직하고 살자. 새기고 살자. 가까이하며 살자.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들을 아름답고 올바르게 사용하여 복된 삶을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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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예배설교] 죄와 무지 

 

 

제목 : 죄와 무지

말씀 : 요3:10-17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다. 왜일까? 그것은 두가지 사실을 말해준다. 하나는 인간이 영적인 존재라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인간이 심각한 죄와 무지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하면 인간은 영적인 존재로 창조되었기에 누구에게나 절대자에 대한 희미한 기억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그러한 사실을 알든 모르든 어떤 절대자에 대한 갈급함으로 절대자를 찾게되고 그것이 종교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만약 인간에게 영적인 부분이 없다면 영적인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만약에 인간에게 도덕적인 관념이 전혀 없다면 도덕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겠는가? 물론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영적 관념이 있기에 신을 생각하고, 도덕적 관념이 있기에 도덕적 삶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여러 가지 종교를 가지고 신을 찾는다는 것은 인간이 영적인 존재임을 분명히 보여주는 행위인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이와 같이 영적인 존재이므로 무언가 절대자를 찾게 되었는데 안타깝게도 인간은 참으로 올바른 것을 찾지 못하고 그저 나름대로 신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찾아 섬기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우리 인간이 죄로 인하여 어둠과 무지 가운데 빠져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즉 쉽게 말하면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는 말이다. 영적인 요소가 있어서 무언가 신을 찾기는 찾는데 죄와 무지로 말미암아 엉뚱한 것을 찾아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죄와 어둠 속에서 나름대로 이것을 저것을 찾다보니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난립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신을 올바르게 만날 수 있는 종교는 어떤 종교인가? 우리에게 참 생명의 길을 제시할 수 있는 종교는 어떤 종교인가?

1.참된 종교의 조건

1)인간을 찾아와 자신을 계시해주고 구원해주어야 한다.

앞서 말씀드린바와같이 인간은 죄와 무지로 인하여 스스로는 참신을 찾아갈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이 참신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은 신이 인간을 찾아와 신과 세상과 인간에 대하여 분명히 말씀해 줄때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이 신에 대해서 생각한다면 신을 만난다는 것은 두가지 이유에서 절대 불가능하다. 하나는 신은 무궁무진하시고, 전지전능하시고, 완전히 선하고 거룩하고 의로운 존재이나 인간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능력과 지식과 지혜가 도저히 따라 갈 수 없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인간의 죄 때문이다. 죄로 인하여 타락하고 어두워지고 캄캄해져서 도저히 인간 자신으로서는 참신을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정말 무지하고 연약하고 한계가 있고 죄가 있는 인간이 생각하고 연구하고 도를 닦는다고 알 수 있겠는가? 천만의 말이다. 백날 연구해도 모른다. 인간이 아무리 궁리해봐야 도로 그 자리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크기나 능력이나 지혜나 의나 선이 우리보다 더 작은 것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모든 능력보다 훨씬 큰 존재에 대해서는 아무리 연구해도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갓난아기가 어떻게 인간이 달나라에 간다는 사실에 대하여 이해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본래부터 인간은 지혜나 능력이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작은 존재였는데 거기다가 죄로 말미암아 그 영혼까지 어두워졌으니 어떻게 하나님을 스스로 알겠는가? 그러므로 신을 알려면 신이 우리를 찾아와서 신 자신에 대하여 알려 주어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물론 구원도 동일하다. 인간이 스스로 구원받기 위하여 백날 연구하고 도를 닦아도 헛수고다. 스스로는 도저히 구원의 길을 알 수 없다. 설령 안다고 해도 나 혼자 그 길로 갈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럴만한 지혜도 없고, 능력도 없고, 의지도 없다.

따라서 진정한 종교란 신이 직접 인간을 찾아와서 자신에 대하여 알려주시고, 또한 구원의 손길을 뻗어 인간을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해 줄 수 있는 종교이다.

2)우주만물의 기원을 분명히 제시해 주어야 한다.

참 종교라면 우주의 기원에 대해서 분명히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시작을 알지 못하면 돌아갈 곳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가? 내가 처음 어디서 출발했는지를 모르는데 어떻게 원위치로 돌아가겠는가?

종교란 결국 근원에 관한 문제이고 시작과 마지막에 관한 문제이다. 물론 현재의 문제도 포함하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영원한 세상이다.

그런데 만약 모든 우주만물의 근원에 대한 해답을 제시할 수 없다면 그 종교가 어떻게 인간을 궁극적인 행복의 길로 이끌어갈 수가 있겠는가? 인간을 궁극적인 행복의 길로 인도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어떻게 참 생명의 종교라고 하겠는가? 그러므로 참된 종교는 인간을 비롯한 우주만물의 시작과 끝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3)인격적 만남과 올바른 윤리관이 있어야 한다.

신은 선을 전제로 한다. 물론 악신도 신은 신이겠지만 진짜 신은 절대 선과 절대 의와 절대 거룩과 절대 진실과 전능과 전지의 속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신은 인간에게 궁극적으로 진정한 행복을 줄 수 있는 능력도 자격도 없다.

그러므로 진정한 신이라면 선이어야 하고 윤리적이어야 하고 거룩해야 하며 따라서 진정한 종교라면 인류에게 진정한 선과 의와 거룩과 진실에 대해서 올바르게 말해주어야 한다.

또한 신은 인격적이어야 한다. 인격적이라 함은 영성과 지성과 감성 등을 말한다. 인격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서로 교제하는데 필요한 요소이다. 인격이 있기 때문에 비로소 교제가 가능한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가 통할 수 있는 것은 이성과 지성과 감성이라는 인격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따라서 신과 인간이 교제하기 위해서는 신도 인격적이어야 하는 것이다. 영성과 지성과 감성을 가지고 인간과 만날 수 있고 대화할 수 있고 감동시킬 수 있고 하면서 교제할 때에 비로소 인간과의 관계가 유지되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종교라면 인격적인 신과 인간의 만남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4)인간의 실상을 정확하게 진단해 주어야 한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그 시작과 더불어 현재의 상태에 대한 명확한 진단과 그 진단을 바탕으로 한 처방이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병에 걸렸을때 어떻게 해결하겠는가? 일단은 그 시작점 즉 원인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정확한 진단을 할 수 있고 또 예방도 할 수 있다. 그리고 나서는 현재의 상태가 어떤 상황인지를 알아야한다. 그래야 어떻게 치료해야 할지를 알게 된다. 단순히 약물로 할 것인지, 수술을 받아야 할 것인지, 입원을 해야 할 것인지 등에 대한 결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이제는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아무리 원인과 상태를 알아도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이 없으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인간의 문제도 동일하다. 인간 자체나 인간 속에 들어있는 죄의 기원이 어디서 온 것인지, 현재의 상태는 어떤지,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이것을 알아야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참된 종교는 인간의 실상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그 해결방법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5)인간 생명에 관한 분명한 해결책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세상에 있어서 뭐니뭐니 해도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이다. 생명중에서도 인간의 생명이 가장 중요하다. 그래서 주님은 인간 생명이 천하보다도 귀하다고 하셨다.

따라서 진짜 종교는 무엇이냐하면 결국 인간에게 진짜 생명을 줄 수 있는 종교라는 것이다. 즉 인간의 죄의 문제, 육체의 한계의 문제 등을 완벽하게 해결하여 진짜 생명을 얻게 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진짜 종교냐 아니냐가 결정된다는 말이다.

아무리 윤리적인 종교라해도 이 문제를 해결하면 참종교라할수 없다. 아무리 인격적인 교제가 있다해도 마찬가지다. 천하보다도 귀한 인간의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완전한 해답을 가지고 있지 못하면 그것은 결코 완전한 종교가 아닌 것이다.

6)내세에 대한 확실한 해답을 제시해야 한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다. 영은 죽지 않는다. 따라서 영적인 존재인 인간은 영생하는 존재이다. 따라서 참된 종교는 이 영원한 세계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제시해야 한다. 아무리 윤리적이고 조직적이고 선하다고 해도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대한 보장을 해주지 못한다면 그런 종교는 가짜이거나 불완전한 종교이다.

2.참된 종교의 모든 조건을 갖춘 종교는 오직 기독교뿐이다.

그렇다. 이 모든 조건을 100% 완벽하게 충족시키는 종교는 오직 기독교 뿐이다.

오늘 말씀은 바로 이러한 참종교의 조건중의 한 부분을 말씀하고 있다. 그중에 가장 핵심인 인간의 생명의 문제를 해결하시려고 찾아오신 하나님에 대하여 분명히 증거하고 있다.

오늘 13절에서는 예수님이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이심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또한 16절에서는 예수님이 내려오신 이유를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즉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건져주어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하려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 말씀에는 인간을 찾아오신 하나님을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 생명을 구원할 방법을 말씀하신다. 그리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말씀하신다.

그밖에 오늘 기독교에 대해서 전체적으로 다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이며, 하나님이 찾아오신 종교이다. 인간의 연구나 철학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당신을 계시해주셔서 알게 하셨으며, 우리를 직접 찾아오셔서 구원해주신 종교다.

우주만물의 기원에 대해서 분명히 제시하고 있으며, 하나님과의 올바른 인격적 만남과 윤리관이 있다. 인간의 실상을 명확하게 말씀하고 있고, 그 문제에 대한 확실한 해결법을 가지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감히 타종교에서는 생각할 수도 없고 흉내 낼 수도 없는 방법으로 인간의 생명에 대한 분명한 해결점을 가지고 있다.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는 영광의 나라에 대하여 확실히 보장해주고 있다.

다른 종교들은 비록 윤리적으로나 종교적으로 건전하다고 해도 이러한 조건들 중 일부는 만족시킬 수 있겠지만 전체적으로는 만족시키지 못한다. 또 미신이나 조상이나 자연을 숭배하거나 온갖 잡신들을 섬기는 행위는 이러한 참 종교의 조건들을 거의 하나도 만족시키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러한 종교들은 결코 참 생명의 종교라고 할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사실들을 기억하며 오직 참된 생명의 종교인 우리 기독교에서 하나님을 알고 섬기며 그 은총가운데 살게 된 것에 대하여 정말 감사와 영광과 찬양을 돌리라. 누가 어떤 말로 미혹한다해도 오직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 성경말씀에 뿌리를 내리고 흔들리지 말라.

인간 나름대로 생각한 것들은 다 부족하고 완전치 못한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오직 말씀위에 서라. 아무리 건전하고 윤리적인 고상한 종교라해도 인간이 스스로 고안해 낸 종교, 인간이 신을 찾아 올라가는 종교, 인간이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하여 애쓰는 종교, 이런 종교는 어쩔 수 없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기억하며 오직 생명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엎드려 거기에 순복하고 그 말씀을 따라 주님과 동행할때에 진정으로 생명의 은총을 풍성히 누리는 복된 삶을 살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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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설교]고난의 의미

 

 

 

 

제목 : 고난의 유익

말씀 : 롬5:1-4

17세기에 영국이 낳은 세계적 문학가이며, 거의 성자에 반열에 오를 큼 훌륭한 목사였던 죤 번연이라는 분이 있다. 이분은 사실 신학을 전공한 분도 아니고 공부를 많이 한분도 아니었다. 처음에 그의 직업은 함석이나 쇠붙이 등을 붙이고 때우는 땜장이였다. 그러나 그는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기도생활을 하였고 수십번씩 성경을 읽으며 기타의 서적도 열심히 읽었다.

그리하여 세상적인 공부도 많이 하지 않았고, 신학도 공부하지 않은 그는 목사가 되었으며(침례교에서는 신학을 공부하지 않아도 신실한 신앙인으로 교회의 인정을 받으면 목사가 될 수 있음.) 기독교 교리서와 기도문 등의 많은 책을 썼고 그중에서도 천로역정은 지금까지 많은 신앙인들에게 읽혀져 많은 도전과 소망을 주고 있는 불후의 고전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삶을 파란만장했다. 그는 침례교의 설교자였는데 국교파의 모함을 받아 12년동안 감옥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게다가 그의 아내는 너무 몸이 허약하여 병치레만하다가 그의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일찍 하나님품으로 가고 말았다. 큰 딸 메리는 시각장애인이었고, 두 아들은 번연만큼 신실한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끝내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고 도리어 그는 더욱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하며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되었다. 결국 이러한 고난과 그 고난으로 인하여 날마다 하나님 앞에 무릎꿇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이 그로 하여금 더욱 신실한 신앙인이 되게 하였으며 결국은 「천로역정」이라는 기독교역사상 최고의 베스트셀러라고해도 과언이 아닌 불후의 명작을 낳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많은 고난이 있다. 기독교인이라해도 별로 예외는 아니다. 그래서 이렇게 질문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랑의 하나님이 정말 계시다면 왜 이렇게 불행과 고통이 있는데 그대로 보고만 계시는가? 왜 홍수는 나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왜 많은 사람들이 고치기 힘든 질고로 고통을 당하게 내버려 두시는가? 왜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들이 고난을 당하는가?”

물론 이러한 고통과 불행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아서 내버려 두시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분명 우리 인류가 고통가운데 살기를 원치 않으신다. 그렇다면 왜 고통의 현실에 직접개입하지 않으실까? 물론 무언가 인간의 삶에 필요한 일면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게 뭘까?

1.하나님을 찾고 믿게 하기 위해서이다.

사람들은 평안하고 부족함이 없으면 하나님을 잘 찾지 않는다. 자녀를 키워 봐도 그렇다. 어릴 때는 열심히 부모를 찾는다. 부모에게서 떨어지면 죽는 줄 알고 열심히 따라 다닌다. 그러나 점점 머리가 굵어지기 시작하면 멀어지기 시작한다. 초등학교 고학년만 돼도 벌써 서서히 멀어진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대학교 청년시절을 지나며 점점 멀어져 그때부터는 별로 찾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인생이다. 힘없고 빽없고 혼자 살기 어렵고 고통의 현실이 있으면 무언가 의지할 것을 찾는다. 그러나 아쉬운 게 없으면 자기 멋대로 살려고 한다. 고통과 어려움과 아쉬운게 없이 평안해지면 슬슬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기 쉽다. 엉뚱한 짓을 하기도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애굽에서 평안히 거할 때는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부르짖지도 않았다. 그러나 바로 왕에게 학대를 당하고 고역으로 힘들어지자 그때서야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가정적으로도 평안할때는 하나님을 잘 찾지 않는 경향이 많다. 그러나 가정에 무언가 문제가 발생했을 때 하나님 앞에 나와 울고불고하는 경우가 많다. 실직이나 사업의 실패나 자녀에게 어려움이 오거나 여하튼 무언가 시련과 고통이 있을때 인간은 자신의 연약함을 알고 하나님 앞에 엎드릴 때가 많은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의 연약한 모습을 잘 아시기에 여러번 평안하고 형통할 때 조심 할 것을 경고하고 있다.

신31:20,21절에 보면 “내가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한 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인 후에 그들이 먹어 배부르고 살찌면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나를 멸시하여 내 언약을 어기리니 그들이 재앙과 환난을 당할 때에 그들의 자손이 부르기를 잊지 아니한 이 노래가 그들 앞에 증인처럼 되리라. 나는 내가 맹세한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이기 전 오늘날에 나는 그들의 상상하는 바를 아노라.”

즉 이스라엘 백성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 안에 들어가서 먹고 배부르고 평안하게 거하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을 잊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결국 환난을 자초하게 될 것이고 그때에 모세의 노래 즉 이스라엘의 배교를 경고한 노래를 통하여 비로소 그들의 잘못을 깨닫게 될 것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렇다. 인생은 어리석어서 평안할 때 주님을 멀리하기 쉽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생에게 환난과 고통으로 경고를 보내신다. 돌아오라는 신호이다. 엎드리라는 신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환란과 고통이 그 당시에는 쓰리고 아프지 마는 이러한 고통은 인간을 하나님 품으로 인도한다는 것, 인생이 연약하고 무지하고 어찌 할 수 없는 존재임을 알게 만든다는 것,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녀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욱 믿고 의지하게 하기 위한 도구로써 고통을 허용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러므로 혹시 고난이 있더라도 그것은 오히려 우리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이며 축복이라는 점을 명심하고 그 앞에 더욱 엎드리자.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하나님을 가까이 함으로 도리어 복의 기회로 만들어가자.

2.천국을 사모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칼빈(J.Calvin)은 “이 세상에 고통이 많은 것은 천국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게 하기 위해서이다.” 말했다. 사실 이 세상에 고통이 없이 편하고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다면 사람들은 그다지 천국을 사모하지 않을 것이다.

안 그런가? 세상에서 내가 하고 싶은 것 다 할 수 있다면, 세상에서 아무런 근심도 고통도 부족한 것도 없다면 천국이 무에 그리 그리워지겠는가? 그저 세상의 것에 빠져서 무사안일하게 거기서 만족을 추구하며 살게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심지어 예수님께서는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19:24)고 말씀 하신 것이다. 먹고 배부르고 부족한 것이 없다고 여기면 천국이 그렇게 절실하게 요청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에서 환란과 고통을 당하게 되면 근심과 고통과 슬픔이 없는 영원한 하늘나라를 간절히 사모하게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편안하게 살때에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그리워하지도 않고 돌아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견딜 수 없는 압박과 고통을 당하게 될때 그제서야 가나안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분, 혹시 우리 가운데 고통의 현실이 있다면 그것을 통하여 우리로 하여금 더욱 천국을 사모하게 하시고, 천국을 사모할때에 너무 세상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참 자유를 누리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기억하며 너무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말고 더욱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며 그 천국을 앞당겨 누리기 위하여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하는 가운데 그 하나님의 능력과 힘으로 고난의 현실을 이기고 천국의 은혜를 앞당겨 누리는 삶을 살아가기 바란다.

3.하나님께 순종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대부분의 환란과 고통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고 내멋대로 살고 죄를 짓게 될 때 오는 수가 많다. 그래서 불순종하고 제 멋대로 살다가도 고통이 닥치면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는 사람도 많이 보게 된다. 속된 말로 하면 실컷 두들겨 맞고 나서야 정신을 차릴 때가 너무 많은 것이 우리 인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순종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하여 때로는 고난의 현실을 허용하신다.

그래서 시편119편 67절에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하고 고백했고, 계속해서 71절에 보면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 주의 율레를 배우게 되었나이다.”고 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당하는 질병이나 고통은 하나님이 우리가 미워서 주시는 벌이라기보다는 그것을 통하여 더 하나님의 뜻에 맞는 생활을 하라는 하나님의 사랑의 채찍인 것이다.

그래서 히12:6절에 보면 “주께서 그 사랑 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 하심이니라.”고 했다. 또 11절에서는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환란과 고통과 실패는 하나님께 순종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더욱 그 앞에 엎드리자. 물론 그것을 올바르게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원망하고 불평하고 한탄하는 자에게는 그것이 더욱 인생의 구렁속으로 몰아가는 독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고난의 현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 앞에 엎드리는 자에게는 도리어 큰 축복이요, 은혜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그 앞에 더욱 엎드려 살아갈때에 어떤 어려움의 현실이 있을지라도 그것을 도리어 복의 기회로 삼는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자.

4.인내와 능력을 주시기 위해서이다.

미국의 어느 잡지에 5천년 묵은 나무가 있다는 기사가 실린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나무가 살고 있는 땅은 결코 좋은 땅이 아니라고 한다. 산언덕에 바람이 부딪치고 바위가 많은 토양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나무는 땅도 나쁘고 모든 조건이 나쁘기 때문에 오히려 뿌리는 아주 깊이 박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나무는 이 척박한 땅에서 성장하여 아주 단단하게 되었고 뿌리도 깊이 내려 그렇게 오래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저 평안하게 사는 것이 인생에게 유익한 것은 아니다. 그러한 삶은 마치 온실 속의 화초와 같다. 온실 속의 화초는 뿌리도 깊지 않다. 단단하지도 않다. 더위나 추위나 습도에 대한 적응력도 부족하다. 그래서 조금만 조건이 맞지 않으면 금방 시들기 쉽다. 우리 인생도 동일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저 온실 속의 화초처럼 살아가기를 원치 않으신다. 강하게 성장하기를 원하신다. 뿌리 깊은 나무가 되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어떠한 환란과 시련과 역경이 오더라도 힘차게 이겨 나갈 수 있는 신앙인이 되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종종 우리를 고통의 현장속으로 데리고 나가기도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 3,4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무슨 말인가? 우리는 믿음으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감을 얻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늘 기뻐하며 살 수 있는데 심지어는 환난 가운데서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왜 환난가운데서도 기뻐하며 살수 있는가하면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환난은 인내를 이룬다는 것은 비록 고통의 현실이 있을지라도 주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결국 이겨내고 은혜에 들어갈 것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견뎌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주님을 의지함으로 인내할때에 결국 우리는 성숙한 신앙인격으로 훈련되어지고 그렇게 잘 훈련될때 우리는 어떤 시련도 이겨낼 수 있게 되며 동시에 우리를 더욱 소망위에 든든히 세울 것이기 때문에 환난조차도 기쁨으로 승화시킬 수가 있다는 말씀이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자. 고난의 현실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리고 고난은 분명히 쓴 것이다. 그러나 우리 속담에도 쓴약이 몸에 좋다고 하지 않는가? 늘 평안한 것만이 좋은 것은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고난을 일부러 자초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혹시 고난의 현실이 있다면 무언가 하나님의 필요가 있음을 기억하자.

더욱 우리의 신앙 인격을 다듬기 위한 것이든, 더욱 우리를 소망위에 세우시고 천국을 바라보게 하시기 위한 것이든 아니면 혹시 우리의 죄로 인하여 더욱 하나님 앞에 무릎꿇고 순종케하기 위한 것이든 어쨌든 거기에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다.

그러므로 혹시 우리에게 어떤 고난의 현실이 있다고 할지라도 어리석게 원망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오히려 그 시련과 고통을 통하여 주실 은혜를 기대하며 더욱 주님 앞에 엎드리며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삶을 통하여 고난을 축복으로 바꾸어 누릴줄 아는 지혜로운 인생이 되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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