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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 받고 사는 삶 (잠 30:10-11)

 

 


10. 너는 종을 그의 상전에게 비방하지 말라 그가 너를 저주하겠고 너는 죄책을 당할까 두려우니라  11. 아비를 저주하며 어미를 축복하지 아니하는 무리가 있느니라


이 시간에 “축복 받고 사는 삶”이라는 제목입니다. 그동안 한국교회에 복과 축복에 대한 용어 가지고 논란이 많았습니다. “복은 하나님이 주시고, 축복은 한자로 빌 축(祝) 복복(福)으로 사람이 사람에게 복을 빌 때 쓰는 건데 왜 하나님께 축복을 달라는 거냐?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분이시지 비는 분이 아니시다.” 대충 이런 논란입니다.


맞는 지적입니다. 모를 때는 그렇게 썼지만 안 다음부터는 복(福)과 축복(祝福)을 구분하여 써야 합니다. 창13:3에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고 정확하게 구분하여 있기 때문입니다.


민6:22-27의 구약의 축도에도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했습니다.


그러나 오래된 습관이다 보니 혹시 누가 복을 써야 할 곳에 축복을 썼다 해서 너무 비판하지는 말고 그 마음을 보고 아멘하자고 제안한 바 있습니다. 하나님은 복을 주시고, 우리는 서로 축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을 축복할 뿐 아니라 또한 많은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며 살아야 합니다.


축복을 받기 위해서 조심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1. 약한 대상이라고 함부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10절 “너는 종을 그의 상전에게 비방하지 말라 그가 너를 저주하겠고 너는 죄책을 당할까 두려우니라.” 여기 종은 당시로 볼 때 권리도 인권도 없는 약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여기 “훼방하다”(라솬)는 말은 거짓된 말로 남을 중상모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로 볼 때 본 절은 성실하고 부지런한 종을 거짓으로 상전에게 밀고하여 미움을 받게 만드는 자는 그 종의 원한을 사게 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원한을 품은 종의 간구를 들으시고 공의로 징계하실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강한 자에게 비굴하고 연약하고 비천한 사람에게는 함부로 하기 쉬운 악한 습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이 약점을 보이거나 자기보다 못하다 생각되면 무시하고 함부로 합니다. 약하고 말 못한다고 마음까지 없겠습니까? 자기를 위하는지 해하는지 다 압니다. 특히 윗사람에게 고자질하면 그 상처가 크기 때문에 그를 결코 축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솝 이야기에 어느 날 동물의왕 사자가 병이 들었는데 숲속의 짐승들은 사자에게 잘 보이지 않으면 후환이 두려운 것을 알고 모두 사자에게 아부하며 병문안을 하였습니다. 여러 짐승들이 건강에 좋은 것을 선물하는데 늑대는 사자에게 줄만한 것이 없어 사자에게 잡아먹힐까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아직 여우가 방문안하지 않은 것을 알고 평소에 여우에게 당했던 것을 보복도 할 겸 사자에게 "대왕님, 여우 녀석은 사자님이 걱정되지도 않은가 봐요." "그렇구나. 괘씸한 녀석" 하며 화가 잔뜩났습니다.


바로 이때 여우가 오다가 이 소리를 듣고 사자에게 말했습니다. "사자님, 제가 사자님 병을 고치는 법을 알고 오는 길에 늦었습니다." “그게 정말이냐?” "네, 그것은 늑대를 잡아다가 삶아 잡수시면 회복이 빨리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 결과 아부하던 늑대는 사자에게 바로 잡혀 먹히고 말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솝 이야기는 그냥 이야기가 아니고 인간의 심리를 동화로서 묘사한 이야기입니다.


우리 속담에도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도 곱다.”했습니다. 말을 좋게 하세요. 그러면 오는 말도 좋을 것입니다. 이처럼 마7:12에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하셨습니다. 율법과 선지자란 구약성경을 일컫는 다른 명칭입니다. 남을 대접하는 것이 성경의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서로 먼저 남을 높이고 대접해보세요. 그러면 감사해서 축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웃에게 잘하면 너 잘되라. 잘되라. 축복해 줍니다. 채무자일지라도 가난하면 너무 혹독하게 말라는 것이 율법입니다. 신24:12-13에 “그가 가난한 자이면 너는 그의 전당물을 가지고 자지 말고 해 질 때에 그 전당물을 반드시 그에게 돌려줄 것이라 그리하면 그가 그 옷을 입고 자며 너를 위하여 축복하리니 그 일이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네 공의로움이 되리라” 하셨습니다.


하나님께도 잘하고 사람들에게도 축복 받게 잘해야 합니다. 너무 혹독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원한을 사게 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 개성도 조절해야 합니다. 개성 때문에 자꾸 다투고 다투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까다롭다면 그를 누가 축복하겠습니까?


잠11:10에 “의인이 형통하면 성읍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패망하면 기뻐 외치느니라” 했고, 잠28:12 “의인이 득의하면 큰 영화가 있고 악인이 일어나면 사람이 숨느니라” 했습니다.


다투지 않는다고 온유하다고 함부로 하면 그가 저주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하늘에서 보시고 가만 두지 아니하십니다. 마10:42을 보면 곧 그들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온유하셨습니다. 마12:19에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하신 대로 욕하면 들으시고 때리면 맞으시고 대항하지 않으셨습니다. 저주하지 않고 축복했습니다. 그렇다고 함부로 하면 하나님이 가만두지 않으신 것을 유대인들을 볼 때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눅20:17-18에 “기록된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냐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셨습니다. 사람에게 축복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지 미움의 대상이 되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2. 친근하다 해서 함부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11절 “아비를 저주하며 어미를 축복하지 아니하는 무리가 있느니라.” 이스라엘의 관습상 아비를 저주하고 어미를 미워하는 자는 율법의 규정에 따라서 사형에 처하게 됩니다. 출21:17을 보면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했습니다. 저주만 해도 사형입니다.


자신을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을 가장 존경하고 친밀하게 해드려야 함에도 부모를 괴롭힌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명한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윤리도덕을 정면으로 거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도 그랬지만 오늘날에는 아주 심각한 상황입니다. 부모나 어른에 대한 효성이나 존경은 땅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친 부모에게도 함부로 하는 자녀들이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들에게 너무 잘해주거나, 아니면 해 준 것이 없어 면목이 없거나 어떤 일에 죄책감을 느끼고 부모가 자기 권리를 주장하지 않으면 자녀들이 부모를 우습게보고 버릇 나쁘게 커서 불효를 행합니다.


어떤 집에 혼자 사는 어머니가 자식하나 바라보고 사는데 자식을 사랑해서 뭐 맛있는 것 있으면 너 먹어라, 뭐 좋은 것 있으면 너 가져라, 뭐 좋은 옷 있으면 너 입어라, 그리고 자기는 먹지 않든지 꼭 벌레 먹은 것 몹쓸 것만 먹고 아이한테만 좋은 것 다 먹였습니다.


그랬더니 이 아이가 버릇없이 제가 대장인 줄 알고 어머니를 무시하고 천시하고 조금 남은 어머니의 재산까지 팔아서 사업한다고 몽땅 없애버리고 어머니는 죽든지 살든지 안중에도 없고, 화가 나면 부모에게 분풀이 하고 그런 불효자가 얼마나 많습니까? 교도소에서도 부모 때리고 온 죄수들은 같은 죄수끼리도 가만 두지 않는답니다.


그런데 꼭 부모 탓만은 아닙니다. 잘해줘도 못해줘도 효도하는 자녀가 있고 잘하지 않는 자가 있습니다. 마지막까지 부모 탓으로만 돌리면 안 됩니다. 결국 내 탓입니다. 구약에도 부모에게 함부로 한 자가 얼마나 많았으면 부모에 대한 경고가 많을까요? 가장 범하기 쉬운 죄이기도 합니다.


친근하다고 함부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가까운 이웃은 우리가 날마다 만나는 사람입니다. 내 이웃에게 먼저 잘해야 합니다. 가까운 사람에게 함부로 하고 먼데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하다가 가까운 이웃의 분노를 사서 축복해 주지 않습니다.


부모, 친근하다고 함부로 해서는 안 됩니다. 부모의 주특기는 축복인데 부모를 서운하게 하면 축복이 나가지 않습니다. 아무리 자녀라도 하도 못된 짓만 하면 차라리 죽기를 바라는 부모도 있습니다. 축복 받을 수 있는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자녀는 부모에게 잘하고 자녀도 부모를 축복해야 합니다. 야곱도 별미로서 아버지의 마음을 기쁘게 해서 축복을 받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면서까지 저주하지 않고 축복하셨습니다. 시109:17-18은 우리에게 경고합니다. “그가 저주하기를 좋아하더니 그것이 자기에게 임하고 축복하기를 기뻐하지 아니하더니 복이 그를 멀리 떠났으며 또 저주하기를 옷 입듯 하더니 저주가 물 같이 그의 몸속으로 들어가며 기름 같이 그의 뼈 속으로 들어갔나이다.” 그러므로 약하다고 함부로 해서 상처 입히지 말고 친근하다고 함부로 해서 마음 상하게 하는 일 없으면서 늘 베풀고 사랑하고 축복하여 서로 축복 받음으로 하나님 앞에 복을 받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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