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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학강좌 평신도를 위한 알기쉬운 신학교육  역사와 종말

 

 

 

 

현실은 암울해도 미래는 하나님 것 기독교인이여 일어나라, 희망하라!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두루마리가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또 보매 힘 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그 두루마리를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나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할 자가 없더라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아니하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그 어린 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취하시니라”(계5:1∼7)

역사는 어둡고…

우리 주변을 볼 때 고통이 난무한다. 기아로 죽어가고 모순과 부조리가 역사에 가득하다. 역사는 여전히 어둡고 가능성은 안 보인다. 어디서 희망을 찾을 수 있을까? 악의 힘과 어둠의 세력이 역사를 휘돌아 친다.

미래를 보면 좌절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위기의 시대다. 이 역사가 과연 어떻게 흘러갈지 불안하다.

현재의 역사를 볼 때 미래의 희망을 말하기 어렵다. 왜 그런가. 우리는 미래를 예측할 때 현재에 토대를 둔 ‘가능성’에 따라 판단하기 때문이다. 즉 희망을 가늠하는 기준은 ‘가능성’(possibility)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기대하는 희망이 실현될 가능성이 커지면 긍정적 전망을 하고, 가능성이 작아지면 낙담한다. 가능성 여부를 판단하는 시점은 ‘현재’이고, 희망은 미래에 대한 기대이다. 그렇기에 가능성의 토대는 ‘현재의 상태’다.

일반적인 ‘희망’의 구조에서는 미래가 현재에 의존한다. 미래의 희망은 언제나 현재의 가능성에 의해 좌우된다. 지금 인류가 가지고 있는 가능성으로 역사를 볼 때 미래는 불확실하고 불안한 것이다. 희망의 근거를 찾기 어렵고, 알 수 없는 미래를 마주하며 두려워한다. 이것이 현재 인류가 처한 상황이다. 미래 역사를 보면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다(계5:4).

희망은 어디서 오는가

성경의 희망은 구조가 다르다. 성경에서 희망은 언제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개념이다. 희망은 하나님의 ‘약속’(promise)으로부터 온다. 성경은 끊임없이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그 약속을 성취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의 희망은 아주 특이한 구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독교의 희망은 현재의 가능성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고, 미래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약속에 의존한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이 신실하다고 믿는다면, 이 희망은 현재의 가능성에 의해 흔들리지 않는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11:1)

기독교인은 미래가 하나님에게 속했기에,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것을 믿는다. 우리는 현재의 역사를 볼 때 아무런 가능성이 없어 보여도, 미래의 약속을 믿고 희망을 가진다. 희망은 미래로부터 온다. 이 미래에 대한 약속이 희망의 근거가 된다. 기독교 역사관은 미래가 현재를 지배한다.

기독교인은 좌절하지 않는다. 역사와 미래에 대해 포기하지 않는다. 그것은 현재의 역사가 가지는 불안한 요소를 인식하지 못하는 나이브한 낙관론 때문이 아니다. 미래를 낙담하지 않고 희망을 가지는 것은 언젠가 이루어질 하나님의 약속을 믿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현재 역사가 가지는 모순과 부조리에 굴복하지 않는다. 미래의 희망과 현재의 모순 사이에는 괴리가 있다. 기독교인에게 이 괴리가 바로 실천의 영역이다. 미래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약속을 믿기에 현재의 모순을 이겨내는 힘이 나온다.

어린 양, 최후 승리를 믿노라!

인류의 유토피아적 꿈은 인류와 함께 시작되었다. 유토피아를 꿈꾸는 수많은 이념, 철학, 역사관이 등장했고, 최근에는 과학적 메시아주의에다 외계인의 출현을 기대하는 집단도 나왔다. 시대가 불안할수록 사람들은 ‘메시아’를 찾는다. 종말의 때에 메시아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외치며 난무할 것이다(마24:23∼24). 이 시대는 미래의 불확실성에 던져져 있다.

과연 누가 미래를 열고 역사를 완성할 것인가. 인류는 어떤 미래가 다가올지 알지 못해 불안과 두려움 속에 있다. 우리는 누가 미래 역사의 인봉을 뗄지 몰라 안절부절못한다. 이때 요한은 우주와 역사가 하나님의 구원사로 완성되는 놀라운 섭리를 말한다. ‘어린 양’이 미래의 열쇠를 가졌다! 그는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있는 인봉한 두루마리 책을 받으시고 그 인봉을 떼실 것이다!

어린 양, 그는 일찍 죽임을 당하신 바로 그분이시다. 성육신하여 십자가에서 속죄의 죽음을 죽으신 그리스도만이 역사를 완성하실 분이다. 이 역사는 진정 알지 못하는 곳으로 가는 듯하고, 어둠이 우리 주위를 엄습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믿는다. 이 역사의 봉인을 뗄 자는 오직 어린 양!

우리는 어린 양의 최후 승리를 믿는다. 지금은 누가 이 역사의 주인인지 모호하다. 하지만 그날이 오면, 죽음과 흑암을 이기신 이가 모든 자들의 주로 드러날 것이다. 이미 십자가에서 승리는 시작되었다. 희망의 목소리는 이미 울려 퍼졌다.

신자는 어둠의 역사 안에서 이미 울려 퍼진 승리의 약속을 믿는다. 기독교인은 최후 승리를 믿는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 이 미래의 약속에서 우리는 현재의 역사를 바라본다. 현재의 어두움이 우리를 이기지 못한다.

신앙은 희망이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요. 그의 신실성에 대한 희망이다. 기독교인이여 일어나라. 희망하라! 미래는 하나님의 것이다.

어린 양이 봉인을 떼는 날, 그날은 은총이 승리하는 날이다. 나무가 기쁨으로 춤을 추고, 돌이 소리 질러 찬양하리라.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리니. 우리 모두 허다한 죄를 용서받는 날, 모두가 기뻐 찬양하리라. 모든 피조물이 그 놀라운 날을 소망하며 기다릴 것이니,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마라나타!(계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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