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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주일예배] 사순절의 의미를 알자

 

 

 

사순절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겪으신 고난과 부활을 기억하기 위하여 부활절 전 40일간 경건하게 지내는 기간을 말한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부활절을 앞두고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내어주신 살과 피를 기념하는 성찬식을 준비하면서, 주님의 수난에 동참하는 의미로 금식을 행한 것으로부터 유래하였다. 유대인들은 유월절을 준비하기 위해 유월절 전에 금식을 행했는데, 초대교회 성도들은 신앙의 성장과 회개를 통한 영적 준비라는 차원에서 구약의 유월절 만찬을 새롭게 해석하여, 주님께서 제공하신 성찬식에 앞서 금식을 행했던 것이다. 고난주간을 포함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 수난 당하신 사건에 담긴 구속사적 의의를 살펴보면서 회개하고, 각성하며 절제하는 시간을 갖는것이 바로 사순절이다.

-사순절 기간
이는 부활 주일부터 거슬러 올라가 주일을 뺀 40일간, 즉 ‘재의 수요일(Ash Wendsday)'부터 부활절 전야(Easter Eve)까지의 기간이다. 교회 역사 가운데서 시대에 따라 여러 모양으로 이 절기를 지키다가 A.D 325년 니케아 회의(Council of Nicea)에서 40일로 처음 결정되었다. ’40‘이란 수는 예수께서 40일 동안 광야에서 시험 받으심, 40일간 시내 산에서의 모세의 금식, 이스라엘의 40년 간의 광야 생활, 예수의 부활에서 승천까지의 40일 등과 같이 성경에 여러번 고난과 갱신의 상징적 기간으로 등장한다.

-사순절 풍습
사순절은 초기교회 또는 중세기부터 전래된 것으로, 죄를 참회하고 절제하며 자기 훈련을 하였다. ‘재의 수요일’이란 사순절의 첫날로, 옛날에는 이 날에 참회자의 머리 위에 재를 뿌린 습관에서 유래 되었다. 사순절 기간에는 술과 육식을 금하며, 마음과 몸을 깨끗이 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묵상을 하면서 지내게 된다.

(1) 성례식
1)성찬식: 사순절에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찢으신 살과 흘리신 피를 기념하는 성찬식을 행하였다.
2)세례식: 사순절이 끝나는 부활절에는 새로 영접되는 성도의 세례식이 있게 되는데, 세례 예비자들은 이때 세례와 입교(入敎)를 받기 위하여 준비기를 두고 금식과 기도로 신령한 훈련에 참여하기도 했다.

(2)금식과 절제
사순절 행사로서의 금식은 수세기 동안 매우 엄격하게 지켜졌다. 저녁전에 한끼 식사만이 허용되었으며, 물고기와 고기등의 육류는 물론 우유와 달걀로 만든 음식까지도 금지 되었다. 그러나 8세기 이후로 가면서 많이 완화되기 시작하여 14세기에는 금식 대신에 절식이 행해졌으며, 15세기에 와서는 정오에 식사하는 것이 일반적인 종교 관습이 되었고, 저녁 시간에도 간단한 식사인 콜레이션(collation)이 허용 되었다. 사순절 기간 동안에 연극, 무용, 연애소설 읽는 것과 같은 오락 행위는 금지 되었으며 화려한 옷을 입는것, 좋은 음식을 먹는것등 호화 생활도 자제 되었다. 대신 예배 참석, 기도등이 권장되었다.

(3)구제와 선행
사순절에는 범죄한 인류를 사랑하셔서 자신을 제물로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뜻을 이어받는 의미에서 불우한 이웃을 위한 구제와 자선이 행해졌다. 금식 기도를 통한 고난에의 동참, 회개뿐만 아니라 불우한 이웃의 고통과 가난을 생각하기도 했던 것이다.

(4)성경 읽기.쓰기
예수님의 생애와 고난을 묵상하는 의미에서 성경 읽기 또는 쓰기를 해보는 것도 좋다.

(5)새가족 찾기
사순절 의미와 직접 관련은 없으나, 상대적으로 자기 신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사순절 동안 새가족 찾기를 진행할수 있다. 사순절의 시작과 동시에 새가족 찾기 작정식을 가진다음, 사순절 동안 기도와 여러 가지 노력으로 부활절에 열매로 거두도록 한다.
사순절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부활하신 주님을 영접할 준비를 하는 것이라 할수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 구주로 모셔들였는가 반성하는 기간이 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구속사역을 기리고 하늘 나라의 백성됨을 감사하면서, 그 백성 된 자로서의 삶의 자세를 돌이키게 하는 사순절은 근신과 절제를 통해 마음 자세를 살피고 주님의 제자로서의 자세를 재정비하는 영적 훈련의 기간으로 삼아야 한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갖은 핍박을 당하면서도 하나님께 감사할수 있었던것은 우리를 향하신 그리스도의 사랑과 피흘리심으로 인해 하늘나라의 소망을 가진 백성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현대의 크리스찬은 절기에 대한 의무를 무심코 흘려 버리거나 무의미하게 보내 버리는 경향이 짙다. 부활절은 성도에게 믿음의 생동력과 승리를 맛보게 하는 환희의 절기이다. 그러나 이러한 준비과정 없이 부활절을 맞는것은 아무 준비없이 결혼식을 맞는 신부와 같다고 할수 있다. 부활절이라 해서 단 하루만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억할것이 아니라 이러한 기간을 통해 영적으로 풍부한 경험을 쌓아서 일상생활 한 가운데서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훈련을 해야 하겠다. 자기 반성에서 얻은 모슨 제거에 인색하지 않아야 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명령을 따르는 기간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사랑과 고난을 깊이 묵상하며 믿음을 살피는 기간으로 삼아. 내 믿음이 현재 어디에 서 있는지 점검하며 새로운 결단을 계획하여 실천하는 기간으로 삼는 이번 사순절 기간이 되어야 하겠다.

출처/광명교회 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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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주일 설교,부활의 소식

 

 


제목 : 가장 큰 기쁨의 소식, 부활

성경 : 행5:27~32

1.가장 큰 기쁨의 소식, 부활

할렐루야, 오늘은 우리 주님께서 세상의 모든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이라는 인류의 가장 큰 원수를 물리치시고 살아나셔서 생명의 주가 되심을 명백히 드러내신 날입니다. 그래서 그를 따르는 모든 자들에게 영원한 승리를 안겨 주신 날입니다. 이러한 전 우주 공간과 역사에 있어서 유일무이한 날을 맞이하여 부활의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심으로 부활의 생명과 은혜와 기쁨과 능력이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부활절은 세상의 그 어떤 명절이나 절기보다도 가장 위대하고 기쁘고 복된 절기입니다. 여러분, 당연하지 않습니까? 사망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시다니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그것도 다시 죽지도 않고 아프지도 않을 영광의 몸을 입으시고, 그래서 시공을 초월하시는 몸을 입으시고 살아 나셔서 그 영광스러운 몸으로 두둥실 떠올라 승천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그 예수님을 믿는 모든 이들에게 영광스러운 새 생명을 주시지 않습니까? 그러니 얼마나 굉장하고 놀랍고 신비하고 기쁘고 감격스러운 일입니까?

그런데 여러분, 안타깝게도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걸 모르고 세상의 정말 별것 아닌 이성과 지식과 경험과 과학을 운운하며 예수님의 부활을 신화처럼 여기고, 부활과 천국과 지옥을 이야기하면 허황되고 유치한 이야기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 중에서도 그저 고상한 윤리적 종교적 철학적 차원에서 믿거나 아니면 그저 세상사는 동안에 복이나 좀 받아보려고 믿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부활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그래서 부활의 능력과 기쁨과 소망가운데 살지 못하고 그래서 주님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에 대하여 확실하게 증언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주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막8:31절에서는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또 요11:25절에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마28:6절에서는 말씀대로 살아나셨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확실히 말씀하셨고, 그 말씀대로 살아나셨는데 예수님과 자신의 부활에 대하여 확신하지 못한다든지 또 믿는다고 하면서 마치 부활을 모르는 사람처럼 기쁨도 능력도 소망도 없이 살아간다면 어떻게 주님을 믿는 사람의 모습이겠습니까?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사망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다시는 그 죽음의 권세와 시간과 공간과 상황과 어두운 세력들의 지배를 받지 않는 완전히 영화로우신 몸으로 다시 사신 예수님, 그래서 그 부활의 주님을 믿는 사람도 주님의 부활의 능력에 동참하여 그 은혜를 누리게 된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이라며 어찌 생명의 능력과 은혜와 기쁨 속에 살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이 놀랍고 위대하고 엄청난 소식을 증언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오늘 30,31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여러분, 보세요. 너희가 십자가에 죽인 예수님을 하나님이 살리셨다. 그리고 구주로 삼으셨다고 당당하게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거 뭐 당연하지 않느냐고요? 네 물론 당연하지요. 그게 사실이니까요. 그런데 여러분, 당연한 이야기인데 문제는 지금 상황은 그렇게 당연하게 말하기가 정말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27,28절을 보겠습니다. “그들을 끌어다가 공회 앞에 세우니 대제사장이 물어 / 이르되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가르침을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

보십시오. 지금 유대의 집권자들이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님의 제자들을 공회에 끌어다가 놓고 ‘예수에 대하여 가르치지 말라고 하였는데 어찌하여 예수의 가르침으로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느냐? 그가 죽은 책임을 우리 책임으로 떠 넘기려고 하느냐?’면서 또 그러면 잡아 가두겠다고 위협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지금 제자들은 자칫 잘못하면 감옥에 갇힐 수도 있고 아니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무슨 헛소리냐? 너희 말 듣는 것이 옳으냐, 하나님 말씀 듣는 것이 옳으냐? 우리는 오직 주님께 보고 듣고 배운 것을 말할 뿐이다. 너희가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주님은 분명히 살아나셔서 우리의 임금과 구주가 되셨다.’고 당당히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사도들을 비롯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분명히 목격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식사를 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승천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순절 날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그 부활의 능력과 의미와 자신들의 부활에 대하여 분명하게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감격과 기쁨과 소망과 확신 속에 외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부활하셨고, 물론 우리도 부활합니다. 그리고 물론 부활한 우리는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 완전한 영광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을 물론 지금 여기서도 얼마든지 부활의 능력과 기쁨과 소망 속에 천국의 은총을 누리며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부활에 대한 확실한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부활의 주님의 능력으로 더욱 소망과 감사와 기쁨과 능력이 넘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과학이니 이성이니 문화니 지식이니 하는 별것 아닌 것들에 휘둘리지 말고 주님이나 우리의 부활은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하심 가운데 너무나 확실한 사실이고 오직 부활만이 우리에게 가장 큰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평안과 소망을 주는 가장 큰 능력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부활의 주님의 능력으로 생명의 기쁨과 감사와 은혜가 넘치는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왜 많은 사람들이 부활을 믿지 못할까요?

2.육체적 안목 속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부활은 이토록 확실한 사실이고, 인류역사에 있어서 가장 크고 놀랍고 엄청난 일이고 우리에게 가장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가져다주는 가장 큰 능력이건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인정하지도 않고 믿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부활이 주는 그 엄청난 은혜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물론 죄와 무지가운데 있는 인생은 그저 육체적인 안목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분명히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로 영적 육체적 정신적 물질적인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멀어지고 영혼이 죽어감으로 오직 육체가 되어 모든 것을 육적 물적 가치관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이나 천국을 이야기하면 허황되게 들리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고, 이해할 수도 없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창6:3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대홍수로 노아 가족이외의 인류를 멸망시키기 전에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왜 노아 가족 외에는 다 멸망시키시기로 작정하셨느냐하면 그들이 육체가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면 육체가 된 게 뭡니까? 전에는 육체가 없었습니까? 있었습니다. 그럼 뭡니까?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겨 하나님도 알지 못하고 인생의 본분도 알지 못하고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지도 영화롭게 하지 않고 오직 육체적 만족과 기쁨과 영광만을 위하여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 죽은 영혼을 가지고 죄와 무지가운데서 그저 육체적 물질적 정신적 욕구만을 채우는데 급급하며 살다보니까 영적인 일은 생각하지도 않고, 이해하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도 허황된 이야기로 생각하며 웃고 조롱하며 자신이 얼마나 무지 속에 있는지 알지 못한 채 세상 것만 바라보며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은 제자들도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오랫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도 세상에 예수님의 나라가 세워질 때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오를 것인가를 두고 서로 다투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것이라고 하시자 베드로가 ‘주여, 무슨 말씀입니까? 안됩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감히 누가 그런 짓을 한단 말입니까? 그런 일은 있을 수도 없고 제가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가만히 있지도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호된 꾸지람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제자들도 처음에는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믿지 못했습니다. 눅24:11절을 보십시오. “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즉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다가 천사에게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는 말씀을 듣고 제자들에게 달려가 전했는데 제자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허황된 말처럼 생각하고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제자들이 언제 변하게 되었습니까? 바로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나서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한 자신을 보았음에도 아직도 믿음이 부족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1:4)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너희가 아직은 믿음이 연약하다.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야 한다. 그러니 내가 가면 성령을 너희에게 보낼 것이니 성령을 받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고 있거라. 그러면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고 그러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이 말씀을 따라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전혀 기도에 힘쓰다가 열흘만인 오순절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의 능력으로 다른 언어를 말하며 강력한 능력으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집권자들이 위협하고 감옥에 가두고 했지만 아무도 그들을 막을 수 없었고, 하루에 삼천명 오천명이 회개하며 놀라운 생명의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제자들도 처음에는 육체의 사람이었는데 오순절날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렇게 성령의 사람이 되었을 때 비로소 주님의 부활과 천국과 영원한 영광의 나라와 영생복락을 온전히 믿고 그 은총을 누리며 그 역사를 감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정말 육의 사람의 상태에 머물러 있지 말고 영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온갖 죄와 무지와 추함과 어리석음과 한계 속에 있는 육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생명의 도를 알지도 못하고 그 길로 갈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영에 속한 사람은 생명과 진리와 선과 의의 영이신 성령의 지배 속에서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을 달려감으로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의 은혜와 능력이 넘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롬8:6절을 보십시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여러분, 성령을 받지 못하면 영이 죽어 있으므로 오직 죄와 무지 가운데 있는 육의 생각을 따라 살기 때문에 부활이고 천국이고 영생이고 영광의 나라고 도무지 관심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고, 믿어지지도 않고 그저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게 인생인줄 압니다. 그래서 육신의 생각은 사망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받으면 영이 살아나 하나님을 따라 진리의 길, 생명의 길로 달려갑니다. 부활의 주님을 믿고 동행함으로 생명과 기쁨과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성령 받은 사람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더욱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며 말씀과 기도와 찬양 생활에 힘씀으로 성령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이미 성령을 받은 분은 더욱 충만하게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성령의 역사하심 가운데 주님의 부활이라고 하는 이 너무나 분명하고 확실하고 엄청난 사실에 대한 온전하고 확실한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할 때에 부활의 주님의 능력과 은혜로 더욱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과 소망이 넘쳐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부활 신앙은 생명력이 넘치게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너무나 분명하고 확실한 사건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부활은 우리 인류에게 영원하고 완전하고 온전한 생명을 주는 유일한 사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은 분명히 그 삶이 달라집니다. 인생이 바뀝니다. 삶에 은혜와 능력과 기쁨과 소망이 넘쳐나게 됩니다.

제자들이 그랬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부활의 주님과 동행했던 모든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확실히 알게 되었을 때 인생이 백팔십도 달라졌습니다. 그저 먹고 마시고 세상 영광과 즐거움을 위하여 살던 사람에서 영광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주님과 동행함으로 생명의 능력과 은혜 가운데 살게 되었습니다. 세상 명예와 영광을 위하여 예수님을 따르던 삶에서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위하여 주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위협과 유혹 앞에서 도망하고 예수님을 부인하고 세상과 타협하던 삶에서 죽음을 무릎 쓰고 부활의 주님의 증인이 되어 놀라운 생명의 역사를 이루는 위대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당연하지 않습니까? 부활의 주님을 만났는데 두려울 것이 무엇이며 걱정하고 염려하고 불평하고 원망하고 낙심하고 좌절 할 것이 무엇입니까?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하고 싸우고 헐뜯고 때리고 빼앗고 죽이고 할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부활이 있는데 그래서 영원한 생명이 있는데, 또 부활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할 때에 세상에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데, 그래서 부활의 주님의 능력과 은혜로 세상에서 얼마든지 생명의 은혜가운데 살 수 있는데 그럴 이유가 뭐가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잘 아시는 요11:25,2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여러분, 보세요. 부활의 주님을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산다고 하였습니다.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죽기는 죽되 죽는 게 아니라 영원한 영광의 나라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지 않는 것입니다.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데 그냥 지금의 모습을 가지고 사는 게 아니라 영원한 영광의 나라의 은총을 누리게 되고 지금 여기서도 얼마든지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가운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부활은 과거에도 일어났고, 미래에도 일어날 일이고 동시에 지금도 여전히 일어나는 신비한 사건입니다. 부활의 주님은 말 그대로 부활의 주님이시기 때문에 부활의 주님을 심령 속에 모셔 들이면 지금도 계속해서 부활의 생명과 기쁨과 소망과 능력을 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활의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믿는 그 순간 거듭나 부활의 생명을 얻게 되고, 부활의 주님께서 부활의 능력과 기쁨과 소망으로 채워주심으로 생명의 은혜가 넘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리고 부활의 주님이 주시는 능력가운데 부활의 주님을 힘차게 증언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다가 물론 주님 다시 오실 때 완전한 부활로 주님 앞에 서게 되고, 그때에 완벽하고 영원한 승리자로서 세세토록 완전한 영광을 누리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금번 부활주일을 맞이하여 부활의 주님에 대한 확실한 믿음 가운데 부활의 주님을 심령 속에 온전히 모시고 살아감으로써 부활의 주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부활의 기쁨과 소망과 위로와 능력을 마음껏 맛보며, 이 놀라운 부활의 소식을 힘차게 전함으로 세상에 부활의 생명과 소망과 기쁨을 가져다주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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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설교] 사순절설교 : 십자가의 도

 

 

 

고린도전서 1장 18절

이슬람교에 대한 자료를 살피면서 깜짝 놀란 일이 있습니다. 저들의 경전인 꾸란에 “예수를 믿으라”는 말이 나오기 때문입니다.(43:63) 그리고 꾸란에서 참 많은 부분을 할애하여 예수에 관해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꾸란에 나오는 예수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면, 성경에 나오는 것과 거의 비슷합니다. 예수님께서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신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복음을 전하셨다는 것과 그 복음을 믿어야 한다고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병자를 고치시고 놀라운 기적을 베푸신 것도 사실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것과 다시 재림하실 것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쯤 되면 이슬람교는 유대교보다 우리 기독교에 더 가까운 종교라고 할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 자칫 이슬람교와 기독교는 충분히 대화가 가능한 종교라고 생각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가 한 가지 있습니다. 바로 십자가입니다. 저들은 예수의 십자가를 생략하거나 무시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적극적으로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3:55) 십자가에서 죽음을 모면한 후 샘이 흐르는 곳으로 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23:50) 그래서 이슬람교는 예수를 구세주가 아니라 알라가 보낸 위대한 선지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 적극적으로 기독교가 예수를 잘못 가르치고 있다고 기독교를 적대시하고 공격합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가 결정적인 기준입니다. 십자가가 빠진 예수는 참된 예수가 아닙니다. 아무리 예수의 기적을 믿고, 예수의 말씀을 따르고, 예수의 동정녀 탄생과 승천까지 믿는다고 해도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가 빠지면 그것은 헛된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의 십자가를 부인한다면 아무리 예수를 치켜세우고 심지어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해도 그들은 적그리스도입니다.

   오늘날 많은 종교, 많은 사상에서 예수를 인정합니다. 치켜세우고 존경을 표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들이 말하는 예수 안에 십자가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안에 구원이 없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닮아가야 할 모델로 추앙합니다. 그 말씀을 생명처럼 소중히 여깁니다. 그러나 저들의 예수 안에 십자가가 생략되거나 강조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안에 능력이 없습니다.

 


십자가의 도

   오늘 본문은 기독교의 핵심을 설명해 줍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십자가의 도로 우리가 구원을 받고, 십자가의 도 그 자체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십자가의 도”란 무엇일까요? 헬라어 원어로 ‘호 로고스 가르 호 투 스타우르’입니다. 보다 쉬운 말로 번역해 보면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의 도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에 관한 말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통해 이 세상에 선포된 말씀”을 말합니다.

   사도 요한은 요 1장에서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사건이 로고스 곧 말씀이 이 땅에 선포된 사건으로 설명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선포한 말씀의 핵심이요 절정이 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온존하게 선포되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이 땅에 선포한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이 땅에 선포된 말씀은 무엇일까요?

 


첫째, 공의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란 사실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에 죄를 미워하십니다. 죄를 지은 자에 대해 진노하십니다. 그리고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십자가는 이 점을 분명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롬 3:10-12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리고 롬 1:18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니...”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고, 그 죄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선포합니다. 그래서 모두가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선포합니다.

 


둘째, 사랑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란 사실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죄인을 그대로 버려두실 수 없으십니다. 그래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특단의 조치를 취하셨습니다. 바로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시고 저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이 점을 분명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요 3:16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고 롬 5:8에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죄 중에 신음하고 있는 인간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저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셨다는 사실을 선포합니다. 그래서 구원의 길이 열렸다는 사실을 선포합니다.

셋째, 구원입니다.

   십자가는 죄인들이 구원 받을 길이 있음을 선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다만 이 사실을 믿기만 하면 모든 죄를 용서받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믿음으로 구원 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는 이 점을 분명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갈 1:4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그리고 살후 2:13 하반 절에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구원의 길이 활짝 열려있음을 선포합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사실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능력

   오늘 본문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우선 이 십자가의 도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이 말씀을 들으면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습니다.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에 버럭 화를 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 지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말에 어처구니가 없다고 고개를 젓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를 믿어야 구원 받는다는 말에 배타적이라고 조롱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십자가의 도는 사람의 머리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 내용이 합리적이지도 않고, 논리적이지도 않고, 입증해 보일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도는 선포된 것입니다. 이해시키거나 설명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엡 2:8에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이 십자가의 도가 믿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은혜로 구원 받는다고도 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이 십자가의 도가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십자가의 도가 은혜로 믿어져 구원 받게 된 사람에게 능력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십자가의 도가 어떤 능력을 나타낼까요?

첫째, 변화의 능력입니다.

   십자가의 도를 믿고 따를 때 우선 우리에게 변화가 나타납니다.

   고후 5:14-15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십자가의 도는 우리를 새사람으로 변화시킨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옛사람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새사람으로 다시 태어나 주를 위해 살게 한다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위대한 부흥사 가운데 한 분으로 김익두 목사님을 손꼽습니다. 이 분은 원래 황해도 안악시장을 주름 잡던 아주 못된 깡패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미국 선교사 스왈런 목사님의 사경회에 참석했다가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날부터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세례 받기까지 전력을 다해서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친구들이 찾아와 술을 마시러 가자고 하더랍니다. 이 때 김익두가 이렇게 말했답니다. “아니야 나 지금 약 먹기 때문에 술 못 마셔” 친구가 물었습니다. “무슨 약을 먹는데?” “응 신약과 구약이야”

  하루는 성경을 읽다가 갈 2:20을 읽고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아! 내가 죽어야 내 안에 예수가 살고 내가 믿음 안에서 살 수 있구나”라고 깨닫게 됐습니다. 그 후 김익두는 엉뚱하게도 김익두가 죽었다고 부고장을 발송했습니다. 깡패였지만 그래도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이 문상을 왔습니다. 김익두는 멀쩡히 살아서 문상객을 맞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모이자 그가 이렇게 말했답니다. “깡패 김익두는 죽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부고장을 돌린 것입니다. 이제 내 안에는 예수가 주인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이런 선언에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고 함께 예수를 믿기로 했답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도는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내 중심으로 살던 사람을 주님 중심으로 살도록 변화시킵니다. 바로 여기에 십자가의 도의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둘째, 승리의 능력입니다.

   십자가의 도를 믿고 따를 때 우리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롬 6:6-7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십자가의 도는 우리로 하여금 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죄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오랜 세월 방탕한 생활을 하시던 중에 나이 40에 회심하고 돌아와서  후에 신학을 공부하고 늦게 목사가 된 분이 있었습니다. 워낙 술고래였었기 때문에 짓궂게 물었습니다. “목사가 되신 뒤에도 술 마시고 싶은 유혹이 있었습니까?” “이제 전혀 술 마시고 싶은 생각이 사라 졌습니다”라는 대답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이 분의 대답은 뜻밖이었습니다. “여전히 술 마시고 싶은 생각이 간절합니다. 술 집 50미터 전방에만 가도 술 생각이 간절합니다.”

  계속 물었습니다. 그러면 그럴 때는 어떻게 하십니까? “우선 그 자리에서 십자가를 묵상합니다. 그리고 가까운 가게에 들어가서 우유를 사서 마십니다. 그러면 술 생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묵상하면 술의 유혹을 이길 수 있고 우유를 사서 마시면 배가 불러오면서 술 마시고 싶은 생각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믿어도 계속 죄의 유혹은 따라다닙니다. 술에 대한 유혹, 음란에 대한 유혹, 방탕에 대한 유혹, 거짓과 술수에 대한 유혹... 우리 힘으로 이런 유혹을 이길 수 없습니다. 바라 십자가의 도를 묵상하면 이길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우리에게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셋, 충성의 능력입니다.

   십자가의 도를 믿고 따를 때 우리는 끝까지 충성할 수 있습니다.

   고후 4:7-11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십자가의 도는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불굴의 용기로 주를 위해 충성할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우리로 환란과 박해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전주시 화산동 외국인 묘지에 가보면 군산 영명고등학교 학생들이 성금을 모아 세우 기념비가 있습니다. 바로 데이비스 선교사의 기념비입니다. 이분은 한국에 파송되어 최초로 순교한 여자 선교사입니다. 1896년 군산에서 주로 어린 아이들과 부녀자들을 대상으로 선교를 했습니다. 후에 결혼하여 전주에서 선교하고 있을 때 서문 밖에서 약방을 개설하고 환자를 치료하면서 선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후에 선교부가 이곳에 병원을 짓고 본격적인 의료선교를 하게 됐는데 그곳이 바로 전주 예수병원입니다.

  이 데이비스 선교사는 누구보다도 전도의 열정이 강해서 전북지역을 가가호호 방문하면서 전도해서 한해에 1885명을 전도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분은 몸을 돌보지 않고 전도하는 일에 목숨을 바쳤습니다. 또한 이분은 어린이를 사랑해서 혼신을 다해 어린이 환자를 돌보았습니다. 전주 예수 병원에 입원해 있는 어린이들을 정성을 다해 돌보다가 약해진 몸이 열병에 전염이 되어 41세의 나이로 1903년 6월 20일 이 땅에서 순교했습니다. 그의 기념비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생명을 바쳐 선교한 여장부”

  이분이 이렇게 충성할 수 있었던 것은 어려서 어머니에게 배운 십자가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십자가 사랑에 감격하여 전도하고 가나한 사람들을 돌보던 본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를 위해 충성을 해도 끝까지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죽기까지 주를 따르고 헌신하고 충성할 만한 능력이 우리에게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도를 묵상하고 마음에 새기면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우리에게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고난 주간을 시작합니다. 십자가의 도 깊이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의 도의 능력을 덧입으시기를 바랍니다.

출처/박봉수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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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설교] 장례예배

 

 

 

 

하늘나라 영원한 집 (사망한 가정)

고후 5:1-4

          

          
본문은 땅에 있는 장막집과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본문에서 말하는 땅의 집이나 영원한 집은 영혼이 거주하는 집을 가

리킨다.  사람의 영혼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육체의 장막에 있게 되고 사

람의 영혼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하늘 나라의 영원한 집에 가서 살게 되는

것이다.  오늘 고인이 된 분은 그동안 세상에서 육체의 장막집에 거하여 하

나님을 잘 섬겼는데 이제는 그 장막집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러므로 하나

님께서 지으신 영원한 집으로 이사를 가신 것이다. 육체의 장막은 그리 좋

은 집이 못 된다.  영원한 하늘나라의 집은 육체의 장막과는 비교할 수가

없는 좋은 집이다.  그곳은 찬송과 영광과 기쁨과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즐

거움으로 충만한 집이다.  세상은 눈물과 한숨과 죽음의 골짜기요 억울하고

고달픈 생활이지만 이제 고인이 가신 곳에는 이 모든 무거운 짐을 벗고 행

복을 안겨준 죽음이다.  이제부터는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이민이 되어

서 새 생활이 시작되는 날이다.  고인의 죽음을 슬퍼하지 말자.  오히려 기

뻐해야 할 문제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는 자의 특권이기 때문이다.  또

한 우리의 소망이 되기 때문이다.  믿음이 보배이다. 믿음이 있으면 이 세상

에서도 모든 것을 이 길수가 있으되 죽음도 이긴다. 믿음으로 영원한 하늘
나라를 기업으로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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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회 설교]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한복음 8:32~33)


 

자유를 살펴보는 것은 부활의 아름다운 증거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8:32~33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폐암에 죽어가는 친구가 병원에 입원하여 병문안을 가니 담배하나 달라 합니다. 그만두고 싶을 때 그만두지 못하는 것도 자유가 아닙니다.  하고 싶은데 하지 못하는 것 또한 자유가 아닙니다.  돈이 풍요하고 많은 것이 자유함이 아닙니다. 먹고 사는 것에 묶여있을 수 있습니다. 무엇이 진리입니까? 진리는 참된 이치입니다. 반대말은 거짓입니다. 거짓된 이치를 밝혀 주는 것이 진리입니다. 유괴를 당하는 어린아이 처럼 우리들도 영적인 유괴를 당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교묘한 거짓들은 진실처럼 들립니다. 거짓을 드러나게 하는 것이 진리입니다. 유혹들이 주는 짧은 쾌락이 거짓 진리입니다. 도박장의 화려한 불빛이 아무리 화려하고 즐겁게 보일지라도 거짓된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붙들고 세상의 쾌락을 쫒지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쫒는다면 그것이 진리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진리를 가진다면 바르게 적용하여야 합니다. 한 부부가 다툼을 할 때 남편은 예수님이 교회를 사랑한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말씀을 가지고 말합니다. 두사람은 분명 성경의 말씀을 가지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잘못 적용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복종할 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나에게 적용하여야 하는 것을 남에게 적용하고 남에게 적용하여야 하는 것을 나에게 적용할 때 말씀은 남을 해치는 무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린 이 말씀을 남에게 적용할 때는 정죄가 되고 나에게 적용할 때는 묵상이 되고 큐티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신 올바른 목적과 동기가 또한 옳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라는 것이 깨달아진다면 그 말씀이 결코 억지로 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자유롭게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동기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하나님 말씀을 전하라는 명령하셨지만 요나는 싫어서 도망가다 물고기 뱃속에서 삼일을 지내다 결국 니느웨를 구원하게 됩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요나를 니느웨로 보낸 이유가 니느웨를 위한 것뿐 아니라 요나를 위하여 마음 속의 분노와 미움을 없애주기 위하여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이 깨달아 질 때 그 말씀을 붙들 수 있고 따를 수 있고 우리를 자유케 하는 진리가 되게 합니다. 말씀을 붙들고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나의 죄를 깨달을 때 그곳은 은혜의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죄인을 부르시는 예수님 앞으로 가야 합니다.  성경의 모든 죄진 사람들은 죄를 가지고 하나님 앞으로 나와 죄를 깨닫게 해주시고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를 용서하시고 받아주심에 그때 우리는 진정한 자유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자유입니다. 또한 말씀이 바르게 적용되어야 하나님 말씀은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기록된 목적에 바르게 적용될 때 그것이 바로 진리이고 우리로 하여금 죄인임을 깨달아 진리안에 살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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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설교 : 한 사람의 감사

 

 

 

제목 : 한 사람의 감사

말씀 : 시 142:5-7, 눅 17:11-19)


현대인에게 잊혀진 계명은 감사이다. 더구나 추수감사주일의 유래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더 많이 있다. 감사는 신앙생활의 기본적 요소인데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은혜를 느끼면서 신앙은 시작된다.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시 116:12)라는 감격이 곧 감사이고 신앙의 시작이다. 예수님이 낫게 하신 10명의 나환자 가운데 1명만이 예수님께 와서 감사하였다는 것은 감사가 어려운 일인 것을 말하고 있다. 더구나 이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당시의 감사는 아홉 사람이라는 다수가 아니라 한 사람이라는 소수였다.


1. 한 사람의 감사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대조이다.
유대인은 마땅히 감사해야 할 사람이었다. 선택받은 사람이었고 많은 은총을 받고 있던 사람이었다. 반면에 사마리아인은 천한 사람이었고 은총을 받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기대하지 않았던 사마리아인이 감사하였다. 받은바 혜택을 당연시하고 감사를 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많이 있다. 이러한 것을 배은망덕이라고 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의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살 때가 많이 있었다. 우리도 많이 가지고 있고 흔한 것의 고마움을 알지 못할 때가 많이 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사람들 보다 더 많은 죄를 짓고 더 큰 벌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아야 한다.


2. 한 사람의 감사는 우선의 문제였다.
아홉 사람의 유대인들은 그들의 병이 나았지만 제사장에게 보이고 자신이 정상인으로 인정받는 것을 더 급하게 생각하였고 한 사람의 사마리아인은 예수님께 다시 와서 감사하는 것을 더 급하게 생각하였다. 무엇 때문에 분주한가는 중요한 인간의 가치관이다. 아무리 분주하다고 하더라도 예수님께 와서 자신의 나음을 감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분주한 것은 없을 것이다. 우리가 우선의 문제를 바르게 가지고 있는 자는 항상 감사할 수 있지만 우선의 문제가 잘못되어 있는 사람은 감사하지 못한다. 사마리아인은 자신의 그 감격을 잊기 전에 감사하고 자신의 일을 하기 전에 예수님께 와서 감사한 우선을 아는 사람이었다.


3. 한 사람의 감사는 신앙중심의 삶이었다.
아홉 사람의 유대인은 제사장에게 달려가 자신의 나음을 보이고 확인받았을 것이다. 이러한 그들의 태도는 대단히 신앙적인 듯이 보이지만 사실은 세속적이다. 종교의식을 자신의 세속적 생활의 이용물로 사용하였다. 한 사람의 사마리아인은 세속적인 것 같지만 실제는 신앙적이었고 종교적 자세를 가지고 있었다. 전도서에는 날 아래의 일과 날 위의 일을 대조하고 있다. 날 아래의 일을 위하여 사람들은 분주하고 힘을 다 하지만 결국 날 아래의 일은 헛되다고 한다. 감사하는 생활은 날 위의 일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하늘 위의 창고를 채우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신앙중심의 생활이 감사할 수 있게 한다. 도저히 감사할 수 없는 조건에서 감사하는 것은 놀라운 기적을 낳는다.

우리가 배은망덕한 아홉 사람의 유대인이 아니라 한 사람의 사마리아인 같은 감사하는 사람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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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설교 /   예수로 가득 찬 사람 

 

  
 사도행전 26장 24∼29절

오늘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을 강하게 하고 여러분의 몸과 영혼을 치료하는 능력이 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이름 때문에 놀림을 많이 받았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저를 낳으신 후 바로 잡을 광자에 해 년자를 넣어 광년(匡年)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셨습니다. 이것은 해를 바로 잡으라는 의미이고, 역사를 바로 잡는 사람이 되라는 큰 뜻을 가진 이름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춘기 시절 저의 친구들은 제 이름의 광자를 미칠 광(狂)자로 제멋대로 갖다 붙이며 놀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정도만 이야기해도 현명하신 성도 여러분께서는 당시 친구들이 저를 어떻게 불렀는지 눈치 채실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지만 다행히 저는 초등학교 4학년 때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었고, 고등학교 때는 이미 신앙 안에서 가치관을 분명히 정립하고 있었기에 친구들이 놀릴 때마다 “그래, 나는 예수에 미친 사람이다. 앞으로도 예수님께 미친 사람으로 살아갈 것”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어떤 청년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한 후 너무 기뻐서 자신의 티셔츠에 “나는 예수에 미쳤다”라고 써서 입고 다녔습니다. 그 청년이 그 옷을 입고 길가로 나가면 사람들은 “별 이상한 사람 다 있군” 하며 다시 한 번 쳐다보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 청년의 등 뒤에는 또 다른 글귀가 쓰여 있었습니다. “너는 뭐에 미쳤니?”라는 글귀였습니다. 즉 “나는 예수에 미쳤는데 너는 뭐에 미쳤니?”라는 질문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무언가에 미쳐 살기 마련입니다. 어떤 사람은 돈에 미쳐서 살아갑니다. 또 어떤 사람은 명예에 미쳐 삽니다. 권력에 미쳐 살기도 합니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은 이성에 미치거나 쾌락이나 향락에 미치기도 합니다.

성경을 보면 바울 사도는 예수에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6장을 보면 바울은 아그립바 왕과 베스도 총독 앞에서 자신의 믿음을 변론합니다. 바울이 말을 마치자 베스도 총독은 바울을 향해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하였도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베스도 총독을 향해 “내가 미친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 차린 말을 하나이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결박된 것 이외에는 모든 사람이 다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얼마나 당당하고 분명한 신앙인의 모습입니까?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이전에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던 것들을 분토와 같이 버렸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아름다운 것을 분명히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에 미쳐 살아간다는 것은 예수로 가득 채워지는 것을 말합니다. 복음의 열정을 위해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난날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목숨 걸고 피와 땀과 눈물로 신앙을 지켰고, 하나님과 교회를 섬겨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들에게는 그런 열정과 믿음과 진실성이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 저와 여러분이 예수로 가득 찬 사람이 되어서 주님의 기쁨이 되고 부흥의 시대를 다시 열어가는 주인공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김광년 목사(봉천감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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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문화관계

 


롬13:6-14 ‘6. 너희가 조세를 바치는 것도 이로 말미암 음이라 그들이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 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 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12. 밤이 깊 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13.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 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 거나 시기하지 말고 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 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 아멘.

 


 바울 사도는 본장에서 성도의 문화생활은 사랑 가운데 행함으로 온전한 신앙인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의 제도나 모든 율법과 교훈은 사랑 가운데서 완성한다는 것입니다.[사랑의 문화관계]라는 주제로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1. 세금

 


 세금은 공세로 국민으로서 나라를 운영해나가기 위한 유지비라면 국세는 관세나 여러 행정비를 위해 받는 세 금으로 문화생활 전반에 내는 세금입니다. 우리 기독교 인이 탈세를 한다든가 세금을 조작하는 일을 한다면 먼 저 하나님께 범죄가 됩니다. 마22:21 ‘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 님께 바치라..’  교

인으로서 장사나 사업을 하는 사람은 더구나 세금을 분명하게 내야 합니다. 이를 속이거나 변칙을 쓰는 것은 범죄이고 복되지 못할 것입니다. 본문 6-7절 ‘6. 너희가 조세를 바치는 것도 이로 말미암 음이라 그들이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7.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조세를 받을 자 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종교인 과세 문제는 이미 세금을 낸 성도들의 헌금으로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목사의 사례에 또 세금을 부여하 면 이중과세가 됩니다.

단지 교회가 수익 창출을 한 일에 는 과세를 할 수가 있겠지요. 마24:12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 리라’ 고전13: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 하고’

 


 2. 이웃과의 사랑관계

 


 그리스도인으로서 문화생활을 하는 것은 세인들처럼 이 기심과 개인주의가 아니라 사회공동체의식으로 사랑 가 운데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 고 감동받은 자들이 자연적으로 발휘하는 정신입니다. 본문 8절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 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 라’

 사랑의 빚이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에 이웃에게 반 영해야 할 거룩한 부담을 말합니다. 모든 율법의 목표는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사랑 가운데서 서로 협력하 며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율법의 완성입니다. 본문 9절에서, 모든 율법이란 것은 결국 이웃을 내 몸같 이 여기며 사랑하는 가운데 사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그 러니까 이웃이 누구냐? 하고 묻는다면 문화적 유기체로 여길 때 내 몸입니다, 하고 답을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본문 10절‘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 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율법과 사랑을 분리하거나 사랑때문에 율법이 무시된다 는 말이 아니라 사랑으로 사는 것이 율법을 온전히 성취 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11절에서, 사랑 가운데서 사회적 관계를 형성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깝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이 말은 종말론적으로 주의 날이 가까워짐을 말합니다. 12절에서는 어둠의 세상일을 벗고 주의 빛된 옷을 입으 라 했고,

13-14절‘13.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 하지 말고 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이 구절은 어거스틴이 방황하며 지낼 때 보게된 말씀인 으로 아주 평범한 순간이었습니다. 386년 밀란의 정원 에서 친구와 앉아 있는데 어린 아이들이 부른 노래 소리 에 ‘네 옆에 있는 성경을 펼쳐 읽으라’는 말에 귀가 번쩍 하여 펼쳐 읽게 된 것이 바로 이 13-14구절이었다고 합 니다.

성도의 문화의식 안에는 항상 하나님의 사랑이 밑받침 이 되어야 온전한 삶이 된다는 점을 명심하고 기도하며 살아야 할 줄 믿습니다.

 세상은 어차피 온전한 것이 없습니다. 불완전한 관리체 제라도 공동체를 위한 규범에 대해 서로 협력하며 살 것 을 교훈했습니다. 이는 세상을 살아가는 기본이며 다만 신앙양심을 저해하는 경우는 순복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 외는 사랑 가운데서 연합하고 잘 살아내야 할 줄 믿 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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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가정을 세우신 하나님의 뜻

 

 

 

가정을 세우신 하나님의 뜻
창 1:27-28

할렐루야, 계절의 여왕이라고 하는 5월 첫 주일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하나님의 은총이 가득하게 임하시길 축복합니다. 같이 은혜 받읍시다. 라고 인사 나누겠습니다.

오늘 전할 말씀 제목은 가정을 세우신 하나님의 뜻으로 정하고 하나님께서 왜 가정 제도를 세우셨는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깨어진 가정이 있다면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고 우리 각자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축복 속에 들어가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읽은 창세기 1장 27절에 하나님께서 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신 목적이 너무도 선명하게 말씀하여 주고 있습니다. 28절을 다 같이 읽어봅시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남자와 여자로 창조한 가장 큰 이유는 생육하고 번성하도록 하심에 있습니다. 그래서 땅에 충만하도록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남자와 여자는 서로 끌려 종족을 번식토록 性을 주신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끌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여러분들, 연애한 번 안하시고 결혼하셨습니까? 잘 하신 것입니다. 또 연애를 여러 번 하고 결혼하신 분들 계십니까? 그것도 잘 하신 것입니다. 왜들 잘하셨느냐 면 남성과 여성은 서로 끌리도록 성 호르몬이 나오는데 남성에게는 한 가지 테스토스테론이란 호르몬이 나오는데 여성 호르몬은 두 가지 호르몬 에스트라디올과 프로게스테론이 나온 답니다.


그래서 이 호르몬이 너무 일찍 나오면 사춘기가 일찍이 와 상사병에 이를 정도로 심한 경우도 있답니다. 저도 젊은 날에 연애 감정은 있었는데 막상 연애를 못해봤습니다. 하나님께서 너는 그 정도가 적당하다고 적당하게 하신 것 같습니다.


이렇게 性은 하나님의 선물이라서 남자와 여자가 만나 가정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이 性의 너무 많이 심하게 변질시키고 왜곡되도록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영어로 LGBT란 말이 있는데 L은 레즈비언(Lesbian), G는 게이(Gay)를 뜻하고, B는 바이섹슈얼(Bisexual), T는 트랜스젠더(Transgender)의 첫 글자를 따서 만들어진 용어입니다.


아시는 대로 레즈비언들은 나는 남자들만 보면 싫어! 나는 여자가 좋아. 여자끼리 만지고 그러는 게 행복해! 그런 여성을 말하고 게이는 게이대로 나는 남자가 좋지 여자는 별로야. 그러면서 한 남자는 남성의 역할을 한 남자는 여자의 역할을 하며 성 행위를 하는 사람들을 말하는 용어고, B 바이섹슈얼(Bisexual)은 남성도 좋고 여성도 좋고 기회만 되면 남자건 여자건 서로를 가리지 않고 섹스를 하는 사람들을 말하는 용어고, 트랜스젠더는 어느 날 남자란 녀석이 난 남자는 싫어 여자가 되고 싶어 하고 성 전환수술을 해서 고추를 떼고 그 자리를 여성의 것으로 만들고, 여자 역시 난 남자가 되고 싶어 어느 날 남자가 되는 수술을 하여 남자가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종족을 번식을 목적으로 허락하신 성을 오직 성적 즐거움만을 위하여 그렇게 성을 왜곡시키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계획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죄악인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정당한 방법으로 남녀 간에 결혼을 하라고 그래서 성을 사용하라고 레위기라는 성경에 그리고 창세기 로마서에 잘못 사용하면 하나님의 형벌이 있을 것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변태성욕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취향대로 성을 선택하여 성을 즐기고 결혼까지 하는 것을 잘못된 것이라고 하는 사람들을 처벌하는 법을 만들고 자기 맘대로 하게 해달라는 법이 차별금지 법이란 것입니다.

이 법이 통과되면 어느 날 아들이 한 남자를 데려오더니 이 사람이 내 남편 될 사람이에요. 그런 일도 생기고 또 딸은 딸대로 남성이 되는 수술을 하고 나서는 여자를 데리고 와서 이 여자가 제 와이프 될 사람이에요. 그런 일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완전 뒤죽박죽이 돼 버리고 오직 성적 쾌락만을 추구하는 괴물들이 돼 버리는 세상이 올 것입니다.


그것 것은 식물도, 동물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예쁜 꽃들과 곡식들은 다 암수가 접붙임으로 종자를 번식시키고 동물세계에서도 엄연한 암컷과 수컷의 교합을 통하여 번식이 되는데 인류번식, 자손을 번식시키는 성을 쾌락만을 추구하는 인간이 될 것인데 그런 상태가 계속 되지 않도록 인류 역사를 하나님께서는 막을 내려 버릴 것입니다.

왜냐하면 남자와 여자를 창조한 계획을 인간들이 바꿔버리는 인간들을 하나님께서 하등 그런 인간을 더 이상 놔 둘 필요도 없기 때문에 심판해 버린다고 하셨습니다.


세계가 동성애를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이자는 물결이 일어나 우리나라에도 미국에서 대통령의 인권특사 란 자를 보내어 동성애를 받아들이도록 압박을 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마지막을 향해 달려 나가고 있으니 정신 차리고 신앙생활 하자고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여 가정을 꾸리도록 한 것은 관계성과 역할을 알도록 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뭐라고요?) 관계성과 역할.


우리들은 남자로 태어나면 어릴 땐 부모의 돌봄과 양육을 받다가 때가 되어 결혼하여 부모가 되면 자녀에서 역할이 끝나고 부모의 역할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여자도 마찬가지죠. 그래서 우리는 남자로 태어났던지 세 가지 역할이 있는 것입니다.


사내아이는 어릴 때 아이 역할, 결혼하면 남편의 역할, 자녀가 태어나면 부모의 역할, 여자아이는 어릴 땐 마찬가지로 아이 역할, 결혼하면 아내의 역할, 자녀가 태어나면 어머니라는 부모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알고 바른 관계를 갖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관계성이 잘못되면 가정의 질서가 깨지고 거기서 불상사가 생기고 불행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관계성을 잘 알고 거기에 순응을 할 때 행복이 온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들, 이 한 때 천사장이 되어 영광과 존귀한 신분이었던 자가 사단 마귀가 되어 저렇게 비참하고 처절하게 고통 받고 있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관계성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천사는 하나님의 사역을 돕도록 하기 위해서 창조했고 그 사역자들 가운데 가장 높은 사역을 감당하도록 창조한 천사장이 자기 신분을 망각하고 하나님만이 받는 영광을 자기도 받고, 하나님만이 주권을 행사하는 것을 부러워하다가 자기가 하나님이 되겠다고 한 것이 천길 만길 낭떠러지 지옥 신세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사람들도 자신의 신분에 따른 관계성을 배우도록 하기 위해서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였고 결혼해서 가정을 가지게 해서 자녀의 역할, 부모의 역할, 남편의 역할, 아내의 역할을 하면서 관계성의 질서를 배우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들은 사내아이로 태어나도 여자아이로 태어나도 평생을 관계 속에 산다는 것을 알고 자기의 역할을 잘 할 때 행복이 있고 평안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알아야 될 것은 우리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남자던지 여자든지 남편이던지 아내 던지 혹 부모 던지 자녀 던지 간에 상관없이 하나님과의 관계는 창조주와 피조물이란 관계인 것입니다. 이것을 절대적인 관계라고 하는 것입니다. (뭐라고요? )

창조주와 피조물과 관계는 영원히 범접할 수 없는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여야만 하는 것입니다. 피조물이 창조주의 법을 어길 때 그 피조물은 더 이상 그간에 누렸던 모든 관계는 차단되고, 그 즉시 창조주의 정한 법규에 따른 처벌의 대상이 되어 버리는 것을 피조물 된 우리 사람들이 잘 알고 있어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창세기 2장에 참으로 왕같이 왕비와 같이 행복하게 살던 아담과 하와가 왜 그렇게 왕 같은 신분에서 하루사이에 비참하고 처량한 처지가 된 것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실과는 먹으면 죽는다는 창조주 하나님의 지엄하신 법을 어겼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공평하기에 예외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남자던지 여자든지 성인이던지 아이던지 간에 하나님의 법을 따라야만 하는 것입니다. 예외는 없습니다. 대통령이라도 재벌이라고 봐주는 일이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포함된 모든 인류는 죄인의 후손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하나님의 특별 은총을 통하지 않고서는 우리 신분을 회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죄를 범하여 죄인 된 아담과 하와의 후손된 인류를 처벌받는 것을 불쌍히 여기시고 하나님께서 베푸신 특별 은총은 ‘아들 되신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아들 되신 예수그리스도가 하신 말씀을 따라야 만이’원래 신분으로 되돌아가 원래 창조할 때 에덴동산에 살 때의 축복된 시절로 되돌아 갈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바로 사람과 하나님과 사이에 깨졌던 관계를 회복시키러 오신 분임을 알고 받아들일 때 구원의 신분이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런고로 구원 받은 자들은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이 곧 창조주 하나님의 법임을 알고 촉각을 곤두세워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을 얼마나 지키느냐에 따라 이 땅에서 삶과 저 나라의 하늘나라에서 삶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법에 의해 처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우리 피조물 사이에 절대적인 관계가 있고 두 번째는 사람과의 사이에는 상대적인 관계가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절대적관계가 끊어지면 영생이냐 지옥이냐의 문제가 발생하고 사람과의 상대적인 관계가 잘못되면 행복대신 불행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부부의 관곕니다. 바로 남편과 아내의 역할입니다. 거기에 대한 말씀이 창세기 2장에 기록되어 있고 에베소서 5장에 구체적으로 나와 있습니다. 그 다음이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입니다.

에베소서 5장 22절부터 24절까지 읽읍시다. 신약성경 315페이지.

[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24.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

어떻습니까? 아멘입니까? ‘어~ 과연 그럴 수 있겠는가? 그런 생각이 안 드십니까? 안 드신다면 여러분들은 성령 충만한 분들일 것입니다. 저는 이 구절을 읽을 때 어떻게 그럴 수 있어?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요즘 같은 세상에 남편에게 복종하라니? 아내 사랑하기를 죽어가면서 까지 하라니?

나이가 들어서인지? 은혜가 임해서인지? 아 맞는 말씀이로구나! 역시 하나님 말씀이로구나!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읽으면서 ‘어라!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라고 생각이 드는 것은 우리들 자신이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자기중심으로 해서 살고 있음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입니다. 창세기 하와 어머니에 피가 내속에 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아직도 내 속에는 하나님보다는 내가 먼저 생각나는 죄의 성질- 罪性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들었을 때도 내 생각에 틀린 것 같으면 어떻게 그럴 수 있어! 하고 ‘반항기질’이 툭 뛰어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가정이 불행하고, 평안치 못할 때 ‘내 역할을 과연 내가 잘하고 있는지를’ 생각하는 것보다 상대편이 잘못하기 때문에 내가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하고 에덴동산의 아담 씨와 하와 씨가 선악과를 따먹고 서로 핑계대기에 앞섰던 그 때처럼 부전자전처럼 우리도 그러고 있다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 살다보면 서로의 잘, 잘못을 알게 됩니다. 상대방의 성격도 알고 장점과 단점도 알게 됩니다. 그러다 말다툼이 일어납니다. 어떤 목사님이 말다툼 없는 부부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랬더니 어떤 분이 저희는 말다툼을 아예 없습니다. 그러더란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말다툼하고 살다보니 스트레스만 싸여 지금은 아예 말다툼을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분들 계십니까? 그것은 자기 자신이 먼저 자기의 단점을 고치려 하지 않고 상대방이 단점을 먼저 고쳐주기를 바라서 말다툼을 하고, 말다툼이 싫어 각방을 쓰는 것이 편한 것입니다. 그것은 행복이 아니라 불행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가정을 주신 것은 행복한 것이 어떤 것인지 배우라고 가정을 주신 것입니다. 돈이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닙니다. 돈 많은 부자 재벌들 가정이 불행한 일들이 더 많은 것을 뉴스를 통해 접할 수 있습니다.

 

세계 나라 사람들이 행복한지를 조사한 행복 지수를 본적이 있는데 부자 선진국보다 도리어 우리가 불행할 것이란 생각을 하는 나라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하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행복은 관계 속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 부모와 자녀관계. 거기에 대해 에베소서 5장과 6장에 써놨습니다. 상대방이 잘못된 것을 생각하기보다 먼저 자기의 단점을 보게 해달라는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남이 하면 불륜이고 자기가 하면 로맨스라는 착각이 아닌 죄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변명을 늘어놓을 것이 아니라 주님께 자신의 단점을 고백할 수 있는 용기, 상대방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을 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싱그런 5월 가정의 달에 하나님과의 관계는 잘하고 있는지 사람과의 관계는 잘하고 있는지를 생각하는 5월 한 달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진정 행복한 가정들이 되기를 기도하여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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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예배] 그리하면 무너지리라

 


 
찬송 : ‘주 믿는 사람 일어나’ 357장(통 397)

신앙고백 : 사도신경

본문 : 여호수아 6장 1∼11절

말씀 : 견고한 여리고성을 무너뜨리는 일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이스라엘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고, 여리고성은 일주일 만에 무너져 내렸습니다. 본문 5절에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라는 약속의 말씀이 등장합니다. 우리 삶 가운데서도 무수한 장벽을 만나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장벽이 무너지는 역사를 보여주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살펴봅시다.

우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한다는 확신이 설 때 ‘무너지는 역사’가 임하게 됩니다. 본문 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넘겨주었으니”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성을 바라보고 걱정만 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군대장관 미가엘 천사가 와서 일러준 말입니다.

이 말씀을 접한 여호수아는 확신에 찼습니다. 확신이 선 사람은 아무리 높은 장벽이라도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공동체가 믿음의 확신으로 서 있을 때 장벽을 넘고 큰 사역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둘째, 그치지 않는 믿음의 기도가 ‘무너지는 역사’를 만듭니다. 본문 3절에 보면 “너희 모든 군사는 그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또 4절에 보면 “일곱째 날에는 그 성을 일곱 번 돌며”라고 했습니다. 모든 문제의 처음과 끝을 아시며 본질부터 해결책도 아시는 하나님께서 제시한 방법이 “매일 성 주위를 돌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이를 지금의 우리 성도들에게 적용한다면 무엇일까요.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놓고 낙망하지 않고 쉼 없이 하나님께 매달리며 기도하는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을, 하나님의 방법대로 이뤄주실 것을 확신하면서 끊임없이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매일 성 주위를 돌도록 하라”는 하나님 명령에 순종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믿음으로 끝까지 기도하면서 돌 때 도저히 무너질 수 없는 여리고성이 무너지는 것처럼 ‘기도의 역사’ 또한 일어납니다.

셋째, 믿고 선포할 때 ‘무너지는 역사’는 일어납니다. 본문 4∼5절에 보면 “일곱째 날에는 그 성을 일곱 번 돌며 그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라고 했습니다. 나팔은 승리에 대한 확신이며 다 같이 큰 소리로 외치는 것은 승리의 함성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입술의 열매를 맺으시는 분입니다. 우리 입에서 나오는 것을 들으시고 그대로 행하시는 분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계획하신 큰일을 다 이루실 때까지 믿음의 고백과 믿음의 선포를 멈추지 마십시오. 주님께서는 반드시 큰일을 앞서 행하시고 이루실 줄 믿습니다.

기도 :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와 장벽을 마주할지라도 약속의 말씀을 믿고 행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주기도문

강창훈 목사(서울 동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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