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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교회사
청교도의 신앙  영국 청교도와 장로정치

 

 

 
제10장 2차 대각성 운동과(선교운동) 프런티어 운동

 

1) 제2차 각성운동과 장로교회

독립전쟁의 여파로 미국은 도덕적 타락을 겪음. 이 때 미국인들을 치료하는 운동이 프런티어 운동과 함께 일어난 제2차 대각성운동이다.

 

2) 교회연합 운동과 장로교회

대각성은 다른 교단들과의 연합운동을 통해 일어나게 되었다. 19세기 초반 미국 장로교도들은 미국에 개혁주의 신앙을 토착화시키기 위해 개혁주의적이고 복음적 신앙을 고백하는 교회들과 교제하는 것을 장려 - 1801년 장로교 총회가 장로교회와 회중교회를 통합할 계획을 세우면서 가속화됨 --> 통합계획은 복음전도를 위한 전략으로, 당시 사람들이 서남부로 이민 - 변방에서 이사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한 연합사업 요청. 장로교회와 회중교회는 모두 칼빈주의적 교리를 고백하고 예배형식도 동일.
* 죠나단 에드워즈 2세는 두 교단을 통합. 연합활동으로 많은 이들이 장로교로 돌아옴.

 

3) 프런티어 운동과 장로교회

특히 장로교회의 부흥운동은 프런티어 지역에서 크게 일어남. 이 시기는 계몽주의와 자연신교, 경건주의 신학이 미국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시기. 이 때 아치발드 알렉산더, 존 홀트 라이스, 제임스 맥그리디에 의해 1798년과 1801년 사이에 프론티어 지역에서 부흥운동이 일어남.
* 제임스 맥그리디 - 1799년 켄터키의 호겐에서 그의 성도들에게 일주일에 한시간, 한 달에 하루를 기도할 것을 설교. 기도의 결과 큰 부흥. 부흥운동의 특징은 캠프 미팅으로 통나무 강단과 통나무 의자를 사용하여 천막 안에서 자면서 집회. 이 결과 주일학교 운동, 내지와 외지 '선교운동'이 일어남. 계몽주의, 합리주의는 영향력 상실.

이러한 부흥운동은 교세확장의 전환점이 됨. 장로교회와 회중교회에서 많은 교회들이 세워졌으나 파송할 목회자의 절대 부족, 반면에 감리교회와 침례교회는 교회조직과 목회자 교육에 유연성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개척자들을 따라가며 교회를 세움.

 

* 컴버랜드 장로교회의 분리운동 - 침례교회와 감리교회에 자극 받은 사람들이 장로교회를 확장하기 위해 목사의 수준을 낮추어 수급을 원활히 할 것을 제안, 2차 각성운동은 교리적인 것이 아니라 성경지식을 따를 때 일어난 것으므로 분쟁만 야기하는 교리적 논쟁을 지양할 것을 주장. 그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근거한 미국 장로교회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 교리를 배척하려는 시도를 보임.

** 분리운동에도 불구하고 교회연합과 대각성 운동의 결과 1800년에는 180명이던 목사의 수가 2,140명으로, 449개의 교회가 1,695개의 교회로, 2만명의 교인이 22만명으로 성장. 부흥운동은 교회 지도자들에 의해 선교운동으로 발전.

 

* 사무엘 밀즈 - 1806년 사무엘 밀즈와 윌리엄스 대학 학생들의 선교운동에 헌신할 것을 맹세하는 '건초더미의 서약'이 있었다. 그들은 선교에 헌신한 후에 '형제들의 선교회'를 조직. 외국 선교활동은 지원할 수 있는 단체를 만들라는 이들의 요구에 따라 1810년 '미국 해외 선교부'가 생김. 1812년 아도니람 저드슨 부부는 버마로, 루터 라이스는 아시아로 선교를 떠남 ---> 이러한 활동에 힘입어 장로교회 안에도 선교운동이 일어나게 됨. 1789년까지 건초더미의 서약의 영향으로 5개 이상의 선교부가 미국에 생기게 됨. 밀즈의 선교지 연구. 선교사들의 노력으로 주일학교 생김. 미국에 소책자 협의회가 조직되어 기독교 소개, 장로교인들의 능동적 참여.

1812년 3명의 학생으로 프린스톤 신학교가 뉴저지에 설립. 초대교수는 아치발드 알렉산더, 세무엘 밀러. 나중에 찰스 핫지 / 부흥운동을 힘입어 장로교 계통의 신학교들이 세워짐. 1818년 어번 신학교, 1823년 버지니아의 유니온 신학교, 1827년 웨스턴 신학교, 1828년 컬럼비아 신학교, 1829년 레인 신학교, 1830년 매코믹 신학교, 1836년 뉴욕 유니온 신학교.

 

 

 

제11장 남북전쟁과 진보파와 보수파의 대결(도전 받는 장로교회)


1830년대의 장로교도들에게 중요한 문제는 흑인 문제. 흑인 노예 해방문제는 찰스 피니의 부흥운동에 의해 멀리 번짐.
* 피니 - 변호사, 1821년 개종. 1830-31년에 걸쳐 뉴욕주의 로체스터에서 큰 부흥운동을 일으킴. 인위적, 갈망석을 둠. 회심 없는 부흥은 마귀의 집회, 회심 체험 강조. "어떻게 하면 한 사람도 구원할 수 없는 설교를 하는가?"(랠프 왈도 에머슨의 합리주의적 설교를 꼬집음) 피니는 노예해방을 하나님의 뜻이라 주장.
* 죠지 번 - 피니의 노예해방 주장을 계승. 영국 태생, 버지니아의 렉싱톤 노회에서 안수받음. 설교를 통해 노예제도의 그릇됨을 주장.


노예문제로 사회가 혼란하게 되자 교회는 입장 표명.
1787년 뉴욕 필라델피아 대회 = 회원들의 유익과 사회적 상황에 맞추어 사용할 것을 권고, 1818년 장로교 총회 = 어느 한 종족이 다른 종족을 다스리는 것은 하나님의 법에 모순, 그리스도의 복음 정신에도 반대된다. 문제가 심각하게 되자 1836년 총회는 이 모든 문제를 무기한 연기. 1860년대 교회 안에는 북부 중심의 즉각적인 노예폐지론과 노예제도는 성경적이라는 남부 중심으로 나뉨.


노예문제, 신학적인 문제와 선교정책의 차이는 장로교회를 혼돈 가운데로 몰아넣음.
1) 자유주의 신학의 일어남
유니온 계획에 의해 회중교회 출신의 목사들이 장로교세 확장에는 공헌했으나 상호간의 신학적 차이는 교회를 혼란으로 인도함. 스코트-아일랜드 장로교회 츨신의 목사를 중심한 보수파(Old School)는 회중교회 출신 목사를 중심한 진보파(New School)에 대해 불평하기 시작.

(1) 칼빈주의 대신 자유로운 신학적 입장을 취함 - 교회조직, 관리, 선교활동에 있어 다른 입장.

(2) 특히 선교활동에 있어 재정관리문제가 심각. 보수파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철저하게 따를 것과 모든 선교활동을 교단 직영으로 운영할 것을 주장.

(3) 노예문제가 교회분열을 심화시킬 것을 두려워하여 논의를 꺼림. 그러나 진보파들은 통합 계획에 대해 만족, 신학적 관용을 주장, 선교활동을 초교파적으로 시행, 노예폐지를 적극적으로 주장.


2)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장로교도들의 반응
시간이 흐르면서 두 세력의 간격은 더욱 멀어짐.
1831년 피츠버그대회가 서부 해외 선교부를 조직하자 보수파는 1837년 장로교 해외 선교부를 조직해 서부 선교부 기금과 사업을 자신들의 관할 아래 두려 했다.
1835년 보수파는 교회를 순회하며 불건전한 교리의 보급과 신앙적 방종을 경고. [행위와 증거]란 소책자를 교회에 보급.
1837년에 이르러 보수파는 장로교회 안에서 5/9 이상의 다수가 되자 (1) 통합 계획을 폐지, (2) 통합계획에 의해 조직된 4개의 노회, 웨스턴 리저브 노회, 위티카 노회, 제네바 노회, 제니시 노회는 장로교 노회에 소속될 수 없다고 선언 - 진보파를 장로교회에서 제거함을 의미. 보수파는 남부와 북동부 지역을, 진보파는 북부지역을 차지하게 됨 - 이러한 교회의 분열은 미국 사회를 지리적으로 양분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두 교회의 적대감은 남북 전쟁의 원인을 제공.


노예문제로 시작된 장로교회의 분열은 다른 교회에게도 영향을 미쳐 1844년 침례교회가 남북으로 1845년감리교회가 남북으로 분열되었다.
진보파의 장로교회 총회는 노예제도를 정죄하는 결의를 통과시킴. 남부의 소수 진보파는 북부에서 이탈하여 '연합남부 대회'를 조직.
* 가드너 스프링스 목사 - 보수파는 노예제도 인정하는 입장. 1861년 뉴욕에서 가드너 스프링스 목사가 노예폐지론을 들고 나오면서 분열운동이 가속화됨. 그는 남과 북으로 나뉘어진 장로교회를 하나로 하기 위해서는 노예제도를 폐지할 것을 주장. 가드너 스프링스의 제안은 총회에서 156대 65로 채택. 그러나 노예제도를 지지하는 남부의 장로교회는 보수파에서 이탈하여 1861년 '미연방장로교회'를 조직(벤자민 팔마, 쏜 웰의 지도아래 아틀랜타의 아우구스타에 총회 - 결국 노예문제로 장로교회는 4조각으로 나뉨).


남북전쟁이 끝나고 1870년부터 화해의 무드 속에서 북부의 진보파, 보수파 모두 노예문제에 대해 같은 입장을 취하게 되어 북부의 진보파 교회와 보수파 교회는 1870년 합동 '미국 장로교회'를 조직(남부는 합동에 반대). 재결합된 북부 장로교회는 크게 부흥 --> 선교활동에 적극 참여, 19세기를 위대한 선교의 세기로 만듬.


19세기는 신학적인 격변의 시기
*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 - 미국 장로교 신학자들에게 받아 들여짐.
* 제임스 우드로우 - 성경을 진화론에 입각하여 해석하려 함.
* 찰스 브릭스 - 성경의 고등비평 사상을 미국 교회에 소개. 총회의 정죄 - 성경의 축자 영감과 무오성 선언.

제12장 20세기 장로교회(근본주의 운동과 장로교회)


20세기 전야에 미국을 특징지은 사건들
(1) 부흥운동
* 제레미야 랑페에 - 1857-1858년에 기도운동이 일어남. 1857년 6명의 동지와 기도 시작, 6개월 뒤 10,000명이 기도에 참석, 뉴욕 근처에 50만-100만명이 기독교로 돌아옴.
* D.L.Moody - 이러한 기도운동은 무디의 부흥운동으로 연결됨. 구두 수선공이었으나 은혜를 받은 후 벤쿠버의 브리티시 아일랜드에서 부흥운동 시작, 1873-1875년 사이 시카코의 복음화를 주도, 대중집회운동 전개, 찬송과 기도 회개운동이 일어남.
* 르우벤 토리, 집시 스미스, 빌리 샌디, 빌리 그래함 - 무디의 전도운동을 계승.
(2) 사회개혁 운동 : 19세기 말의 복음주의 운동은 노예폐지 운동과 금주와 같은 사회개혁운동으로 나가게 됨. 남북전쟁으로 음주문화가 만연할 때 금주운동과 절제운동, 1895년 살롱 폐지 협의체 조직.
(3) 자유주의 운동 : 1903년 북장로교회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수정 - 역사적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입장을 떠났음을 보여줌. 이후 북장로교회는 컴버랜드 장로교회와 합동.
(4) 근본주의 운동 : 기독교 신앙에 대한 도전이 심해지자 신앙옹호를 위한 노력이 교회 안에서 일어남. 현대주의의 위협, 기본적 교리를 부정하는 자유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지역별로 근본주의자들은 모임을 가짐. 1909년 [근본적인 것들 - 진리의 증언]이란 책자가 나옴. 근본원리는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육체적 부활, 성경의 무오성, 대속적 속죄, 그리스도의 임박한 육체적 재림이었다.
그러나 이 입장에 서있던 근본주의자들은 전천년설 만을 바른 신앙이라 주장 - 다른 근본주의자들은 설 땅이 없게 됨.
 

1920년대의 프린스턴 신학교의 재구성 - 교과과정이 구시대적, 실천신학은 없고, 성서에 대한 연구도 없고, 성서비판만 강조. 교수 가운데 사변적 독일 신학에 심취한 자, 이단자들이 다수. 프린스턴은 새로운 교장을 새움으로 개혁하려 했으나 실천신학 교수였던 스티븐슨은 직무를 감당할 때 너무 독단적 학사 운영으로 많은 문제. 복음주의적이지 개혁주의가 아니었다. 이러한 가운데 그레샴 메이첸이 변증학 교수로 자리에 오르게 됨. 자유적인 총회는 스티븐슨을 지지하여 메이첸에게 압력을 가해 프린스턴을 떠나게 함.

 

* 그레샴 메이첸 - 프린스턴을 떠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세움. 그는 C.R.C. 계통에서 교리적인 신학자를 영입하고, O.P.C. 교단을 만들었다. 메이첸이 웨스트민스터를 세울 때까지만 해도 보수적인 많은 교회들이 그를 지지하였으나 천년왕국설로 인한 교회의 분열은 보수신앙에 대한 불신을 초래. 1930년대의 웨스트민스터는 근본주의 신학의 중심지. 그러나 필라델피아 근본주의 협의회가 웨스트민스터를 비난하고 전천년설을 공식적 교리로 채택하고, 훼이스 신학교를 세워 나감으로 보수세력은 약화되었다. 천년왕국 논쟁으로 근본주의자들은 분리주의자로 인정되어 많은 이들이 자유주의 교회로 떠나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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