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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주일 예배 대표기도문 

우리의 힘이 되시고, 방패가 되시며, 믿는 자들의 피난처가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
   
은혜와 사랑을 감사하며 감사와 찬양과 영광과 존귀를 올려드립니다. 
   
지금 이 시간, 우리의 모든 결단과 헌신을 예배로 드리오니 흠향하여 주옵소서.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시고 세워 주셨나이다. 우리는 참으로 아버지의 것이오니 세상과 구별된 삶으로 승리케 하옵소서. 
   
죄인된 저희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거름더미에서 부르시고, 가난 중에 부르시며, 실패가운데 불러 주셔서 귀족 가운데 앉히시고, 부요한 은혜를 주시며, 성공적인 삶으로 인도하심을 믿습니다. 
   
비록 지금은 단련 중에 있다할 지라도 믿음의 사람 욥과 같이 인내하여 축복의 결말을 보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렸던 모든 것들을 회개하오니 용서하시고 이 나라 이 민족 위에 필요한 이웃이 되게 하시고, 사회에 없어서는 안 될 빛의 사명들을 감당하는 성도들이 되게 하옵소서. 
   
세상과 짝하여 세상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게 하시고, 살아있는 물고기처럼 시대의 세파에 오히려 거스려 올라갈 수 있는 은혜를 주옵소서.
   
말씀을 알면서도 지킬 수 있는 힘과 의지가 부족하오니 성령의 능력으로 채워주셔서 감당할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이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오니, 이 땅에 하나님의 주권이 인정되도록 축복하시고 복음화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 질 수 있도록 인도하옵소서. 
   
이 땅에 세워진 교회들을 위해서 기도하오니 주님의 지체된 저희가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명하신 본분을 감당할 수 있는 복을 허락하여 주옵시고, 저희로 하나님께 칭찬 받는 귀한 청지기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저희들 거룩한 성회로 모였사오니 은혜 받게 하셔서 가정으로 직장으로 사회로 돌아갈 때에 생활가운데 응답과 축복이 나타나게 하옵소서.
   
지금은 예배의 첫 시간이오니 마치는 시간까지 주님 홀로 영광 받으시기를 원하오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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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금십일조예물

헌금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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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 처음 나온 새신자들이 당혹스러운 것 중에서 하나가 바로 이 헌금에 대한 것입니다. 헌금함이 돌려지는 것을 보고서 과연 내가 내는 헌금이 어디에 쓰여지고 또 왜 내야하는가에 대해서 한번쯤 의문을 품게 됩니다. 그렇다면 헌금의 정의부터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헌금은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감사하는 믿음의 표시입니다. 일주일이면 일주일, 한달이면 한달동안, 이모양 저모양으로 돌봐주시고 지켜주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표시입니다. 또한 그를 통하여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신앙의 표현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것으로서, 주님의 사업에 동참하는 의미를 지닙니다. 우리가 가진 건강, 지혜, 재능 등 모든 것은 본질적으로 전부 그의 것이며 잠시 우리에게 맡겨진 위탁물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중 일부 혹은 전부를 다시 그에게 돌려 보내는 일은 지극히 당연한 우리의 의무입니다.
또한 헌금의 중요한 의미로는 신앙조직의 집단이며 공동체인 교회생활을 하는 교인의 의무입니다. 헌금이 쓰여지는 선교활동이나 구제사업에 동참하는 의미를 가집니다. 이러한 헌금생활은 개인생활의 기도와 성경공부 및 믿음에 힘쓰는 것을 기반으로 해야만 온전하게 성취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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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금은 왜 드립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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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금을 드리는 가장 기본적 이유는 하나님의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하여 드리는 것과 , 하나님께서 "성도를 위한 연보에 대하여는 너희도 그렇게 하라"(고전 16:2)고 하셨고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라"(말 3:10)고 하셨으므로 순종의 의미에서 드리며, 교회의 기능중에 하나인 구제와 봉사를 실천하기 위하여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말고도 교회의 행사와 운영을 위하여서도 헌금은 필요한 것이며 특히 복음전파를 위해서 헌금의 뒷받침은 매우 긴요합니다. 금전은 인격시험의 시금석입니다. 금전에 대한 자세로 그의 인격과 믿음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주의 일에 감사하고 헌금할 줄 아는데 따라 믿음이 성장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헌금을 하는 교인의 올바른 마음자세는 모든 주어진 선물은 자기만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위한 선물인고로 당연히 가난한 형제에게도 분배되기 위하여 헌금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과 성령으로 건설하는 것을 권하고 있는 한 교회 내에 말씀의 사역자를 위시하여 개개인에게 직분을 주어 다스리게 하였다면 그리스도는 성도들에게 헌금의 의무를 다하도록 하신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교회의 유지를 위해서, 또는 국내외 전도를 위하여, 또 가난한 자의 구제를 위하여 규칙있게 계획적으로 헌금하는 행위는 성경에서 분명히 명하고 있는 특권이요, 의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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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금의 종류에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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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교회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으나, 모든 신자가 매주일 예배 때마다 공통적으로 드리는 헌금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십일조는 하나님의 구별하신 것으로서,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치는 헌금입니다. 예를 들면, 수적인 의미로 100만원 소득이 있는 사람은 90만원을 다쓰고 10만원을 헌금하는 것이 아니라, 100만원 수입 후 10만원을 먼저 드리고 나머지 90만원을 쓰는 것입니다.
가축에도 십일조가 있으며 농작물에도 십일조가 있습니다. 농작물이나 가축의 경우 처음 것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생각하에 가장 좋은 부분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바치도록 하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자를 구제하기 위한 것은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축복을 분배한다는 형제 사랑의 도리에 근거를 둡니다.
그리고 일반헌금으로는 매주일 낮 예배시간에 모든 신자가 드리는 주일헌금을 들 수 있으며, 하나님께 받은 여러 가지 은혜에 감사하여 드리는 헌금인 감사헌금이 있습니다. 생일이나 입학, 취직, 승진등의 감사한 일에 대한 헌금을 말합니다.
그 외에도 절기헌금, 특별헌금, 구역헌금, 구제헌금, 선교헌금, 건축헌금등의 기타헌금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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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금은 어떻게 내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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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금이란 잘 드리면 하나님께 영광이요, 사람에게는 축복입니다. 그러나 잘못 드리면 하나님께 욕되고 사람에게는 징계가 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헌금을 어떻게 드려야 할까요?
우선 헌금은 철저하게 하나님께만 드려야 합니다. 국가에 바치는 세금은 세무서에 납부하는 것처럼 헌금의 정당한 수납처는 교회이어야 합니다. 교회가 아닌 다른 곳에 바치는 것은 헌금이 아닙니다. 사회사업이나 정치자금 같은 것입니다.
헌금을 드리는 가장 중요한 자세는 정성껏 준비하는 것입니다. 결코 인색한 마음으로 해서는 안됩니다. 또한 억지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9:7에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이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즐거운 마음, 기쁜 마음으로 해야합니다.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왔다고 생각하고 감사함으로 드려야 합니다. 그것은 액면에 관계없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소득(이익)을 얻은대로 그에 비례해서 합당한 헌금을 내야 합니다.
헌금을 통하여 즐겁게 자원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은 각자의 형편대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손수 수고한 것으로 드려지는 것이 더욱 값지며, 주님 일에 풍족하도록 하는데 동참한다는 의미를 가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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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금의 복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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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금은 교회의 필요를 충당하기 위한 의무적인 면에서도 꼭 시행해야 하지만 바치는 자에게도 크게 축복이 되므로 이를 시행함이 유익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교회 전체에도 큰 축복이 됩니다.
고린도후서 8:4-6에서는 "이 은혜와 서로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우리의 바라던 것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쫓아 우리에게 주었도다"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헌금하는 것이 은혜에 참여하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신자가 주의 교회를 위하여 헌금을 드릴 때 기쁨을 체험케 되며, 또 마음에 있는 악의 뿌리를 제거시켜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십일조 헌금을 하면 적극적으로는 넘치게 축복을 받게 되고(말 3:10) 소극적으로는 재난이 없어지며(말 3:11), 열방이 인정한 만큼 복을 받게 됨을(말 3:7) 성경에서 증언하십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바치는 자는 그들의 자원을 더욱더 넉넉하게 하여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 이 말씀이 경제 원칙에는 위배될지 모르나,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이요, 지혜인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에서는 헌금을 드리는 것으로 많은 축복을 받는다는 것을 명시해 두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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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금은 어디에 사용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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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하나님께 드린 헌금은 여러 가지 유익한 목적을 위해 사용되고 있습니다.
헌금은 우선 복음사역과 선교사역에 필요한 자금으로 적극 활용됩니다. 그리고 교회의 주일학교 각 부서 활동비 및 교육비로 조달됩니다.
또한 교역자 및 유급 직원들의 생활비(보수)로 충당됩니다. 말씀의 교역자가 그의 가정의 생활비로 인하여 그 직에 전념할 수 없다면 이것은 결코 교회의 바람직한 상태가 아닙니다.
그리고 가난한 자들을 돕는 구제비 명목으로, 어려움을 당한 자들을 돕는 부조금으로 사용됩니다. 그 외에도 교회 내부의 각종 관리비, 수리비 및 시설 확충비, 교육관 운영비 등으로도 쓰여집니다.
이것 이외에도 교회의 사업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교역자 양성기관, 전도사업, 교육사업등 이것이 활발히 실행되어지기 위해서 헌금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상적인 교회란 돈이 안드는 교회가 아니라 본래의 교회의 사명을 위하여 더 많은 돈을 쓸 수 있는 교회임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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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진정한 의미를 찾아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우리는 그분께 영광을 돌린다. 이때 하나님의 사랑은 두 번째요, 하나님의 영광은 첫 번째다. 이것은 성경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로마서 15장 8-9절은“그리스도께서 … 수종자가 되셨으니 … 이방인으로 …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기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고 이방인들에게 자비를 베푸셨다. 에베소서 1장 4-6절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를 예정하고 사랑하신 목적은 그분을 영원토록 기쁘게 찬미하기 위해서다. 시편 86편 12-13절은 이와 같은 내용에 대해 “영영토록 주의 이름에 영화를 돌리오리니 이는 내게 향하신 주의 인자가 크사”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동기요 그분의 영광은 목적이다.



이 원리는 왜 중요한가? 이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면 진실로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중요시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를 자아 중심의 죄로부터 구원하여 우리로 하여금 그분을 영원토록 높이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은 그들을 높이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높이도록 도와주기 위해서다.



최고의 사랑은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만족하며 사는 것이다. 사람에게 국한된 사랑은 결국 유해한 것이다. 이런 사랑은 우리에게 영원한 기쁨을 주지 않으며 하나님께 인도해주지도 않는다. 하나님 중심의 사랑이 아니면 그것은 위대한 사랑이 아니다. 인간의 사랑은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내면적 갈망이나 유일한 소망을 앗아갈 뿐이다. 십자가를 예로 들어보자.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극적으로 표현하셨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 사랑은 여기 있으니 …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10). 



그러나 로마서 3장 25절은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화목 제물로 세우셨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의에 큰 문제가 생긴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마치 판사가 범인을 처벌하지 않고 풀어주는 것과 같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시는 것은 그분의 의로우심이 위태롭게 되는 것과 같다. 의로움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일을 하셨다. 우리가 지은 죄의 형벌을 받도록 자기 아들을 대신 죽이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우주 밖으로 쓸어 내버린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믿는 이의 죄를 예수님 안에서 벌하고, 믿지 않는 이들은 지옥에서 벌하신다. 그러나 이 사랑의 행위의 중심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의로움을 내내 지키시는 한편 당신의 의로움을 나타내셨다. 갈보리 사랑은 하나님을 높이는 사랑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십자가상에서 높이셨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실 수 없었을 것이다. 



사랑의 목적이 인간 구원에 있다면 십자가의 궁극적인 목적도 우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목적은 당신을 영화롭게 하는 하나님의 행위에 우리를 동참시켜서 같이 즐기도록 하기 위해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 하면서 당신의 영광을 그토록 중요시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통해 우리에게도 하나님을 아낄 수 있는 성품을 주고자 하실것이다(요한복음 17장 26절을 보라). 이것이 궁극적인 십자가의 목적이다.



그리스도가 죽으신 이유는 우리가 중요해서가 아니라 죄에 묶여 있는 우리를 해방시켜 하나님을 높이는 일을 즐기고 그 일에 영원토록 참여시키기 위해서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의인의 신분증을 발급해주고 우리의 자존심이나 세워주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 건전하고 만족스럽고 자유로운 기쁨을 느낄 수 없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의 자존심과 결부 시킨다면, 이것은 마치 그랜드 캐년을 눈앞에 두고 그 장관을 감상하지 않고 자신의 사사로운 일을 연상하는 사람과 같다. 이런 마음가짐을 가진 사람은 자아에 속박되어 있는 사람이다.



최고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것은 나를 구원하여 으뜸이 되고자하는 하나님의 열심에 나를 동참시키는 행위다. 이것보다 하나님을 더욱 영광스럽게 하고 우리에게 만족을 주는 행위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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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와 사용 용도 그리고 목적        

 신약시대의 십일조의 정의 현시대를 사는 성도들은 십일조에 관한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십일조는 내가 주인이냐 하나님이 내 주인이냐를 인정하는 것이다. 말로만 하나님이 주인이라 하지만 물질로도 주인의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을 통해서 십일조에 관한 문제를 자세히 검토해 보자. 구원받은 사람들이 해야 할 의무 가운데 하나가 십일조다. 하나님께서는 십일조를 왜 드리도록 했으며 십일조는 어떤 곳에 써야 하는지 그 용도, 그 목적 등을 자세히 검토해 보자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사람이 땅위에 번성하기를 원하며 땅에 있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하셨다. 그리고 사람이 번성한 후에도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않고 그 주권을 인정하게 하기 위하여 에덴동산에 선,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두시고 그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는데 그 이유는 사람들이 대대로 내려오면서 만물을 하나님이 다 창조하셨다는 것을 인정하도록 하신 것이다.

아담은 하나님이 자기를 창조한 창조주임을 알지만 그 후손들은 하나님을 잘 알 수 없기 때문에 그 자손들까지도 하나님을 알도록 하는 방법으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두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도록 한 것이다

세 가지의 주권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주권을 인정하도록 하는 두 가지의 방법을 주셨다.

그중 하나는 선악과요 하나는 안식일이다. 그리고 첫 소산물과 동물의 새끼와 첫 아들을 구별하는 것이 십일조다.



1. 모든 물질은 하나님이 주신 것임을 인정하는 표로 선악과를 주셨으며 

2. 모든 날의 주인은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게 하기 위하여 안식일을 주셨다.

3. 모든 첫 것은 하나님의 것이이다. (유월절 사건을 기억하라)

그러나 아담이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고 죄를 범하게 되자 하나님은 아담을 에덴동산에서 추방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담을 추방했을 지라도 멸망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구원의 계획을 주셨으며 계속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도록 십일조를 드리게 했고 날 가운데 하루를 쉬도록 하므로 계속적으로 아담의 후손들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이 창조주임을 믿게 했던 것이다. 모든 날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며 모든 물질의 주인도 하나님이시다.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행위의 표인 것이다.

기록된 십일조의 기원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창14:20)



성경에서 최초로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린 역사를 볼 수 있는데 아브라함은 조카 롯의 일로 전쟁을 하게 되었고 그 전쟁에서 승리하고 도라 올 때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 멜기세댁을 만나게 되자 자기가 얻은 것에서 십일조를 들였다 모세 이전에는 계명이 없었으나 아브라함은 계명을 지켰다고 기록되었으며 그는 멜기세덱을 만났을 때 십일조도 드렸다.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니라 하시니라” 창26:5)

아브라함은 모세보다 400년 전의 사람이지만 그 때도 계명을 지켰다. 그러나 그 때에는 성문화 된 계명이 없었지만 계명을 지킨 것을 볼 때 아브라함 이전에도 하나님께 대한 여러 가지 규례와 계명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모세 이전에는 아버지가 자녀에게 전해주는 방식으로  구전을 통하여 계명을 지켰는데 출애굽 후 모세를 통하여 십계명을 받음으로 계명이 성문화된 것이다.

야곱의 십일조

계명이 없을 때도 야곱은 십일조를 드렸다(창28:20-22)

“야곱이 서원하여 가로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야곱은 하나님이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돌아가게 하시오면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반드시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하였다. 십일조란 어떤 것인가 십일조란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시요 또한 나를 지키시고 나의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시는 분이시며 나에게 구원을 주시는 분이심을 인정하는 표다.  

 

(2) 십일조를 드리는 이유

“너는 마땅히 매년에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신14:22)



십일조를 왜 드려야 하는가?

첫째로 십일조는 하나님이 명하셨기 때문이다.                             

십일조는 자기가 수고하여 제물을 얻었으나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이 얻게 해 주심으로 얻었다고 하는 것을 인정하는 표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재물을 얻었을 때 어떻게 얻었다고 생각하는가?모든 사람들은 자기가 일을 잘해서 얻었다고 생각하며 자기의 머리가 다른 사람보다 좋고 능력이 있어서 얻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성경은 그런 일에 대하여 책망하고 있다.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신8:17)  그렇다 사람들은 돈을 벌게 되면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얼마나 잘못된 생각인가 우리가 재물을 얻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얻게 해 주셨기 때문에 얻은 것이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 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신8:18)  그렇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제물을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재물이 하나님이 주신 것임을 인정하는 표로 십일조를 드리도록 하였다.

십일조는 누구의 것인가?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성물이라”(레27:30)

그렇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지만 그 중에 아홉은 우리에게 쓰도록 하고 특별히 하나는 하나님의 것이니 하나님께 바치라고 한다.  소나 양의 십분의 일은 어떻게 드리는가? 짐승의 십일조는 막대기 아래로 통과하는 것의 열째마다 드린다.



“소나 양의 십분 일은 막대기 아래로 통과하는 것의 열째마다 여호와의 거룩한 것이 되리니” (레27:32)

왜 우리가 십일조를 들려야 하는가? 우리가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는 첫 번째 이유는 하나님께서 명하셨기 때문이며 둘째로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 십분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레27:30)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이유 없이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 그리고 십일조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드리지 않으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 된다.

십일조의 사용 처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하기 위하여 십일조를 요구하시는가?  성경에 말씀하시기를 십일조는 회막에서 일하는 일꾼들의 보수라고 하셨다.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의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민18:21)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십일조를 통해서 살도록 하셨다. 하나님은 모든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십일조를 바치도록 하여서 그것으로 성전에서 일하는 자들이 생활하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성소에서 일하는 일꾼들의 보수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십일조를 누구에게 주셨는가?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십일조를 레위인에게 기업으로 준 고로 내가 그들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기업이 없을 것이라 하였노라”(민18:24) 하나님은 십일조를 성소에서 봉사하는 레위 인들에게 주셨다. 그러므로 레위 인들은 육신의 기업이 없도록 하였다. 십일조를 받는 자들은 자기사업이 없으므로 전적으로 성전과 관계된 일만 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레위인에게 십일조를 주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의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민18:21) 경은 십일조를 레위인에게 기업으로 주어서 회막에서 수고한 대가를 갚는다고 했다. 다시 말하면 십일조는 레위인들이 성전에서 봉사한 노력의 대가 곧 일한 것에 대한 대가란 말이다. “너희와 너희 권속이 어디서든지 이것을 먹을 수 있음은 이는 회막에서 일한 너희의 보수임이니라” (민18:31)십일조는 성전에서 일한 자에게 보수를 주시기 위해 제정한 것이다.

 

“회막에서 일한 너희의 보수”그런데 십일조를 받는 자들에게 한 가지 중요한 기준이 세워져 있는데 그것은 자기의 기업이 없어야 한다. 즉 목사는 육신의 사업장이 없는 사람이라야 된다는 말이다. 만약 목사가 육신의 사업장에서 수입을 얻을 경우 십일조를 받아서는 안 된다. 십일조는 성전에서 영적인 일을 한 것에 대하여 하나님이 대가로 주시는 것이다.

십일조의 남용

십일조의 일부를 가지고 감사예물을 드릴 수 있는가?

없다. 왜냐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지 자기의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얻은 수입이라 할지라도 자기의 마음대로 십일조를 사용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면 십일조를 건축헌금으로는 들일 수 있는가? 아니다 십일조는 건축 헌금으로도 들일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십일조를 나누어 감사예물이나 건축예물로 드리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십일조는 거룩한 것이며 하나님께서 내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자기의 마음대로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십일조를 가지고 감사예물이나 건축헌금이나 선교헌금을 해서는 안 된다.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건축을 위하여 십일조 외에 다른 예물을 드렸다.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고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명하신 일이 이러하니라 이르시기를, 너희의 소유 중에서 너희는 여호와께 드릴 것을 취하되 무릇 마음에 원하는 자는 그것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릴지니 곧 금과 은과 놋과,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는 베실과 염소털과, 붉은 물들인 숫양의 가죽과 해달의 가죽과 조각목과, 등유와 및 관유에 드는 향품과 분향할 향을 만드는 향품과, 호마노며 에봇과 흉패에 물릴 보석이니라,(출35:4-9, 36:8)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을 건축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의 예물들을 드렸다.



그러나 건축 헌금을 의무적으로 드린 것이 아니다. 모세는 저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여호와께 드릴 것을 취하되 무릇 마음에 원하는 자는 그것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릴지라고 하셨다. 그렇다 건축헌금은 마음에 원하는 만큼 드리는 것이다. 그러나 십일조는 마음에 원하는 대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의무적으로 드려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성막을 지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때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지고 있는 좋은 것을 가져다가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데 들이라고 했다 그때 백성들은 자원하여 건축헌금을 들였는데 넘치도록 들였다. 그러나 십일조를 가지고 건축헌금을 드린 사람은 한사람도 없다. 저들은 십일조 외에 별도의 헌금을 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십일조를 가지고 건축헌금을 들여서는 절대로 안 된다 십일조를 가지고 건축헌금을 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훔치는 도적이다. 당신이 아버지가 어떤 곳에 쓰려고 하는 돈을 아버지 모르게 훔쳐다가 다른 곳에 쓴다고 가정해 보라 얼마나 웃기는 일인가 그렇게 해도 당신의 아버지가 당신을 좋아하겠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건축을 위하여 예물을 드릴 때에 어떤 마음으로 드렸는가?  그들은 자원하는 마음과 즐거운 마음으로 들였다  “백성이 아침마다 자원하는 예물을 연하여 가져오는 고로 성소의 모든 일을 하는 지혜로운 자들이 각기 하는 일을 정지하고 와서 모세에게 고하여 가로되 백성이 너무 많이 가져오므로 여호와의 명하신 일에 쓰기에 남음이 있나이다 모세가 명을 내리매 그들이 진중에 공포하여 가로되 무론 남녀하고 성소에 드릴 예물을 다시 만들지 말라 하매 백성이 가져오기를 정지하니 있는 재료가 모든 일을 하기에 넉넉하여 남음이 있었더라 (출36:3-7)



이스라엘백성들은 십일조 외에 성전을 건축하기 위하여 건축헌금을 들였는데 너무나 많이 가져와서 헌금을 중단시켰다. 하나님은 십일조를 가지고 건축헌금을 들이도록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십일조 외에 별도로 건축헌금을 드리도록 하시며 그 헌금을 드릴 때에는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리기를 원하신다.

 

  특수한 십일조

이스라엘백성들은 일반적으로 드리는 십일조 외에 어떤 십일조를 드렸는가?

“매 삼 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신14:28)  이스라엘백성들은 수입이 생길 때 마다 십일조를 드리는데 그 외에 3년에 한 번씩은 특별한 십일조를 들였다. 이 십일조는 무엇 하기 위하여 드리도록 하였는가? 이 3년에 한번씩 드려지는 십일조는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특수하게 들였다.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신14:29) 



“제 삼 년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 네 모든 소산의 십일조 다 내기를 마친 후에 그것을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서 네 성문 안에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신26:12) 



많은 사람들이 십일조의 사용에 대해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위에서 보는바와 같이 십일조를 가지고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십일조는 3년에 한번씩 드려지는 특수한 십일조이다. 이 3년에 한번씩 들여지는 십일조는 특별히 성중에 우거하는 객이나, 고아나. 과부, 가난한 자들과 기업이 없는 자들이 누구나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우리가 드리는 십일조는 3년에 한번씩 드리는 십일조가 아니라 매년 드리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3년에 한 번씩 특별한 십일조를 드리도록 했는데 이것은 기본적으로 들여지는 십일조가 아니다. 특별한 십일조인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가지의 십일조만 드린 것이 아니라 여러 종류의 십일조를 드렸다.



이스라엘백성들은 성전에 드리는 십일조 외에 어떤 십일조를 드려야 했는가?

우리가 국가에 세금을 내는 것 같이 이스라엘은 국가를 위해서도 십일조도 들였다.  삼상 8:10 사무엘이 왕을 구하는 백성에게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일러 가로되 너희를 다스릴 왕의 제도가 이러하니라 그가 너희 아들들을 취하여 그 병거와 말을 어거케 하리니 그들이 그 병거 앞에서 달릴 것이며... 그가 또 너희 딸들을 취하여 향료 만드는 자와 요리하는 자와 떡굽는 자를 삼을 것이며 그가 또 너희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의 제일 좋은 것을 취하여 자기 신하들에게 줄 것이며 그가 또 너희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를 취하여 자기 관리와 신하에게 줄 것이며 너희 양떼의 십분 일을 취하리니 너희가 그 종이 될 것이라(삼상8:10, 17)



사무엘은 하나님이 반대에도 불구하고 왕을 기어이 세우려는 자들에게 너희가 왕을 세우면 일반 십일조 외에 국가에도 십일조를 내야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왕을 세운 후에 너희가 국가를 위하여 십일조를 이중으로 내게 될 때 못살겠다고 부르짖어도 하나님은 응답치 않겠다고 했다. 그런데 이 십일조는 레위인에게 주는 십일조가 아니라 국가를 위하여 왕에게 내는 십일조 인 것이다. 그래서 사무엘은 이렇게 부담스러워도 왕을 세우려면 세워라. 그러나 너희가 부르짖어도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기어이 왕을 세우므로 이중 삼중으로 십일조를 내야 했던 것이다.



그러면 국가에 내는 십일조는 누가 쓸 것인가?

 “너희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를 취하여 자기 관리와 신하에게 줄 것이며”(삼상8:15) 어떤 사람들은 십일조 하면 똑같은 것인 줄 알고 성경에 고아와 과부들을 위하여 쓰라고 했다고 하면서 십일조를 가지고 구제를 해야 한다고 하는 자들도 많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을 잘 모르는 무지에서 온 것이다. 성경에는 세 종류의 십일조가 있다.



 하나는 모든 수익의 십일조인데 그것은 레위인들이 성소에서 봉사할 때 그 일한 보수로 주는 것이며, 두 번째는 3년에 한번씩 들이는 십일조인데 그것은 나그네와 객과 고아와 과부와 가난한 자들을 위한 것이며, 세 번째는 국가의 세금으로 바치는 십일조인데 그것은 왕으로부터 시작하여 정부에서 일하는 모든 관리들이 쓰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상식이 없는 자들은 십일조하면 똑같은 것으로 알고 십일조를 가지고 구제나 건축이나 여러 종류의 곳에 쓰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모든 십일조가 똑같은 것이 아니다. 분명히 십일조가 구분되어 있다.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은 이스라엘은 국가 자체가 하나님을 섬기는 나라요, 왕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국민에 이르기 까지 하나님께서 특별히 택하신 성민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국가에 바치는 세금이나 가난한 자와 객을 위한 모든 자금을 특수하게 내는 십일조를 가지고 사용하도록 하였다.



다시 한 번 말하자면 이스라엘은 세 종류의 십일조를 드렸다.

성전을 위한 십일조, 구제를 위한 십일조, 국가를 위한 십일조

그러나 구제나 국가를 위한 십일조는 성전에 드리는 십일조의 것을 떼어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아예 별도로 십일조를 정해서 구제나 국가를 위해 드렸던 것이다. 즉 국가를 위한 십일조는 일종의 국세를 말하는 것이며 3년에 한 번 드리는 십일조는 구제 헌금이다.



만약 레위인을 위해 드리는 십일조를 나누어 버리면 레위인이 살수가 없다. 그리고 국가를 위한 십일조나 구제를 위한 십일조는 마음대로 쓸 수 있지만 레위인을 위한 십일조는 성막에서 봉사한 수고의 대가이기 때문에 다른 곳에는 쓸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을 다른 곳에 쓰는 것은 주어야할 인금을 가로채는 행위요 횡령인 것이다.

신약의 십일조

구약시대에는 성막에 봉사하는 레위인들이 있어서 십일조를 드렸지만 신약시대에도 십일조를 드려야 하는가? 어떤 사람들은 신약시대는 십자가로 율법이 다 폐지됐는데 무슨 십일조를 드리느냐고 한다. 그러나 신약에서도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



왜 십일조를 드려야 하는가?

1. 예수님이 드리라고 명하셨기 때문이다.  

마23: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예수님께서는 바리세인들을 책망하시면서 너희가 십일조는 잘 드리면서 더 중한 믿음은 버렸다고 하셨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믿음도 행하고 십일조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고 하시므로 신약시대에도 역시 성경에서 명한대로 십일조를 들려야 됨을 말씀하셨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십일조를 드려야한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오셔서 율법을 다 패하셨기 때문에 십일조를 드릴 필요가 없다고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사상이다.

왜 신약에서도 십일조를 드려야 하는가? 신약에서도 구약에서와 같이 성전에서 일하는 일꾼들이 있기 때문이다. 구약시대에 십일조는 성전에서 봉사하는 자들이 자기의 기업이 없이 성전의 일을 하기 때문에 그 대가로 십일조를 주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신약시대에도 역시 목사님들이 자기의 기업이 없이 오직 복음만을 위하여 일해야 하기 때문에 십일조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믿음도 가지고 십일조도 버리지 말라고 하셨다.



구약시대에 성전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은 것 같이 신약시대에서도 하나님의 성전에서 복음을 위하여 일해야 하기 때문에 성전에서 나는 십일조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시대에도 반드시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모든 율법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다 끝났는데 왜 십일조를 드려야 하느냐고 반문 한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왜냐하면 신약시대에도 하나님만을 위하여 일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직접 십일조를 드려야 된다고 명하셨기 때문에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

마10:10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군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자기의 사물을 가지지 말고 가라고 하시면서 일꾼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은 마땅하다고 하셨다. 어떤 사람들은 사역자들이 주머니나 두벌 옷을 가지면 안된다 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사역자들이 복음을 위하여 일하고 있다면 지기의 것을 가져다가 쓰지 말고 성도들이 주는 것을 먹고 일하라는 말씀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목사는 두벌 옷도 없이 가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구약의 레위 인들은 백성들보다 20%를 더 쓰도록 하나님께서 책정 하셨다.



십일조란 평민은 10에서 1을 뺀 후 9를 먹고 레위인들은 열한 지파가 드리는 11을 먹었다 그러므로 레위인들은 일반 백성들보다 더 먹도록 하나님께서 법을 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목사는 두벌 옷도 가지지 말고 가난해야 한다는 논리는 잘못된 논리다. 예수님께서 지팡이나 두벌 옷을 가지지 말라 하신 말씀은 목회자들은 자기의 기업을 가지지 말고 성도들이 주는 것을 먹으라는 말씀이다. 그러기 때문에 십일조의 제도에서 레위인은 기업이 없을 것이며 하나님은 그들의  기업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십일조를 레위인에게 기업으로 준 고로 내가 그들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기업이 없을 것이라 하였노라”(민18:24) 그렇다 레위인은 육적인 기업이 없다. 레위인들은 하나님이 기업인 것이다. 그러므로 먹을 것을 인하여 염려해서는 안 된다. 사역자들은 하나님이 주실 것을 믿고 확신을 가지고 일하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먹이실 것이다.  

십일조에 대한 권고

하나님은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십일조를 드리도록 명하셨으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십일조를 드리지 않았다. 이스라엘이 십일조를 드리지 않을 때 하나님은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자를 도적이라고 하였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 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말3:8)



말라기 선지자는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자를 도적이라 했다. 그렇다 십일조를 드리지 않으면 도적이다. 왜 도적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십일조는 내 것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십일조를 드리지 않으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죄가 되는 것이다. 십일조가 하나님의 것이므로 드리지 않을 때 도적이라고 한다면 십일조를 잘못 쓰는 것도 도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일조에 대한 중대한 문제가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것은 드려진 십일조를 어떻게 쓰느냐하는 것인데 십일조가 하나님의 것이므로 드리지 않을 때 도적이라 한다면 드려진 십일조를 잘못 쓰는 자는 무엇이라 해야 하는가? 그것도 역시 도적이라 해야 하지 않겠는가? 십일조가 하나님의 것이므로 드리지 않을 때 도적이라 한다면 십일조를 잘못 쓰는 것도 도적이다. 그러면 십일조는 어떤 곳에 써야 하는가? 십일조는 성전에서 일하는 자들에게 주는 보수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십일조를 다른 목적에 쓰는 것은 성전에서 일하는 자들에게 주어야 할 노임을 횡령하는 죄가 되다.

잘못된 십일조의 사용

십일조는 원래의 하나님이 제정하신 그대로 바른 목적을 위해서만 사용하여야 하다. 만약 그렇지 못하고 십일조를 다른 목적에 쓴다면 그것 역시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죄가 된다. 십일조는 성전 건축을 위해 쓰는 것이 아니요, 구제를 위해 쓰는 것도 아니다. 성경에 건축을 위해서는 건축헌금이 따로 있었으며 구제를 위해서도 구제헌금이 따로 있다. 그러기 때문에 십일조는 십일조의 원래 목적을 위해 사용되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큰 교회에서 십일조를 다 쓰지 못하면 작은 교회 사역자들을 위하여 내놓아야 한다. 그러나 거의 100%가 다른 목적에 사용되어지고 있다. 어떤 교회는 그것을 가지고 땅을 사고, 어떤 교회는 그것을 가지고 건축을 하는 등 제멋대로 쓰고 있다.이 세상에서 어떤 회사 사장님이 사원들의 인건비를 가지고 마음대로 써버린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사장이라도 제멋대로 노임을 사용했다면 그것은 횡령죄가 되는 것이다.



  그와 같이 목회자들도 성소에서 봉사하는 자들의 노임으로 지불할 십일조를 제멋대로 사용하는 것은 횡령이다. 만약에 십일조를 원래의 목적대로 바르게만 사용했다면 이 세상에 복음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이 전파되었을 것이며 앞으로 그렇게 십일조를 쓴다면 이 세상에는 신속히 복음 사업이 마쳐질 것이다.   

온전한 십일조

1. 하나님은 어떤 십일조를 원하시는가?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3:10)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온전한 십일조를 원하신다. 하나님이 물질이 없어서 우리에게 십일조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십일조는 성전에서 봉사하는 자들을 위하여 구별해 놓으셨기 때문에 성도는 온전하게 십일조를 들려야 하며 사역자들은 십일조를 바르게 사용해야 한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집에 양식이다.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말3:10) 성경은 십일조에 과하여 말씀하시기를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라 고 하셨다. 그렇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집 곧 성전의 양식이다. 성전의 양식이란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먹는 양식을 말씀하는 것인데 성전에서 전적으로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는 일꾼들은 다른 기업이 없으므로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어야 한다. 만약 성전에 양식이 없다면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이 없게 되고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없게 되면 성전은 폐허로 변하고 성전은 버린바 될 것이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성전의 양식을 풍족하게 만들어서 복음을 위하여 일하는 자들로 하여금 생활에 얽매이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위하여 일하도록 하기위한 것이다. 성전에서 일하는 사역자들이 생활에 얽매이면 복음을 위하여 제대로 일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십일조를 드려서 하나님의 성전에서 양식이 풍족하도록 하고 복음을 위하여 일하는 자들로 하여금 자유로이 일하도록 해주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 교회의 실정은 어떠한가 하나님의 집에 양식이 넘쳐야 하는데 현재 그렇지가 못하다. 왜 그런가 하나님의 집에 양식이 되어야 할 십일조가 엉뚱한 곳으로 세어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재 우리는 십일조가 바르게 쓰여 지도록 개혁을 해야 한다.

양식이 떨어지면 파산한다. 

  십일조는 하나님 집의 양식이라 했는데 성전에서 일하는 자들이 생활해야 할 양식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집인 성전에는 십일조가 창고에 넘쳐야 한다. 만약 십일조가 없을 때 어떤 문제가 일어나는가? 그것은 가정에 양식이 떨어졌을 때 일어나는 현상과 똑 같은 것이다.



어떤 가정이든지 양식이 떨어지면 그 집은 활동능력이 마비되며 양식이 떨어지면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이 마비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집은 일할 기력이 없으므로 파산하고 만다. 느해미야 당시에도 하나님의 집에 양식이 없으므로 성전에서 봉사하던 일꾼들이 모두 흩어져 버렸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전은 버린바 되고 하나님을 찾는 백성들은 모두가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이 되어 하나님의 진노가 이스라엘에 내려졌다.

양식이 없을 때 어떤 문제가 생겼는가?

“내가 또 알아본즉 레위 사람들의 받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직무를 행하는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각각 그 전리로 도망하였기로”(느13:10) 느헤미야 당시에 하나님의 성전에는 제사장들이 없으므로 성소에서 제사 드리는 일이 마비되었다. 그 이유는 백성들이 십일조를 드리지 않아 성전에서 일해야 할 레위인들이 먹을 것이 없으므로 성전을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두 생계를 위하여 성전을 떠났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집 성전에 양식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십일조를 드리지 아니하므로 성소에서 일해야 할 레위인들이 하나는 상업차로 하나는 밭으로 모두가 떠나 버렸다. 제사장의 무리들은 스스로 먹고 살기 위해서 노동을 해야 했다. “받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직무를 행하는 레위 사람들이 각각 그 전리로 도망하였다. “田리란”고향 밭으로 돌아갔다는 말이다.



  공동번역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동안 레위인들은 받을 몫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레위인들은 제사 때에 해야 할 일을 버리고 저마다 밭이 있는 곳으로 가 버리고 말았다” 이 사실을 안 느헤미야는 새로운 개혁을 단행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 시대마다 하나님은 개혁자를 세우신다. 이스라엘이 십일조를 드리지 않아 성전이 황폐하자 개혁이 필요한 시기에 느헤미야가 믿음으로 개혁을 단행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사실을 안 느헤미야는 새로운 개혁을 단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시대마다 하나님은 개혁자를 세우신다.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십일조를 드리지 않아 성전이 황폐했는데 이런 때는 강한 개혁을 필요로 하는 시기이다 그러므로 그때 느헤미야는 강한 믿음을 가지고 개혁을 단행했던 것이다.

 

느헤미야의 개혁

성전의 일을 해야 할 레위인들이 성전을 떠났을 때 느헤미야는 어떤 조치를 취했는가?

“내가 모든 민장을 꾸짖어 이르기를 하나님의 전이 어찌하여 버린바 되었느냐 하고 곧 레위 사람을 불러 모아 다시 그 처소에 세웠더니” (느13:11)



느헤미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십일조를 드리지 않아 하나님의 집에 양식이 없으므로 하나님의 성전에서 일을 해야 할 제사장들이 다 나가버린 것을 알고 “민장” 즉 백성들의 지도자들을 책망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십일조를 바치도록 하였다. 그때 느헤미야의 책망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가 다 십일조를 내기 시작했으며 그 결과 성전에는 양식이 채워지게 되었다.



“이에 온 유다가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가져다가 곳간에 들이므로” (느13:12)

느헤미야는 이스라엘백성 들로 하여금 십일조를 드리도록 하고 그 드린 십일조를 효과 있게 쓰기 위하여 특정 인물들을 세웠는데 그 이름은 “제사장 셀레먀와 서기관 사독과 레위 사람 브다야였으며 그들로 창고지기를 삼고 성전에서 일하는 형제들에게 양식을 분배하는 일을 하게 하였다. 그리고 느헤미야는 내 하나님이여 이 일을 인하여 나를 기억 하옵소서 내 하나님의 전과 그 모든 직무를 위하여 나의 행한 선한 일을 도말하지 마옵소서” (느13:13-14) 하며 기도했다.



느헤미야의 개혁을 단행한 사건에 대하여 공동번역을 보면 “어찌하여 하나님의 성전을 내버려두었느냐 하고 관리들을 꾸짖고 레위인을 다시 불러 들여 복직시켰다. 그러자 온 유대인들이 곡식과 술과 기름의 십분의 일을 일제히 창고에 가져다 바쳤다.



  느헤미야는 유대인들이 십일조를 내지 않아 성전에서 일하던 레위 인들이 성전을 버리고 모두 자기의 일터로 나감으로 황폐한 성전을 보고 유대 지도자들을 꾸짖었다. 그리고 레위 인들을 다시 불러들여 복직시키고 그들의 양식을 위하여 십일조를 바치도록 하였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십일조를 모두 바치게 되었고 성전을 떠나갔던 레위 인들이 돌아옴으로 무너진 성전은 다시 회복되었다. 이것은 현대에 사는 기독인들에게 놀라운 교훈이 되는 사건이다. 이 시대에 우리 한국에도 이러한 사명 자가 요구된다. 누가 이 일에 나설 것인가?

개혁이 필요한 현대교회

지금 한국의 기독교는 어떠한가? 십일조를 바르게 사용하지 못하므로 목사님들은 생계를 위하여 육적인 일터로 나가버렸고 사역자가 없으므로 문을 닫는 교회들이 얼마나 많은가? 열려져 있던 교회 문들이 다시 닫쳐 버리고 있다. 이 시대에도 느헤미야와 같은 개혁이 일어나야 한다. 누가 느헤미야와 같은 개혁자가 될 것인가? 현재 우리 한국에는 이런 개혁자가 꼭 필요하다.



그러나 한 가지 지금의 우리 한국교회 실정은 느헤미야 당시의 교회 상황과는 조금 다르다. 느헤미야 당시는 백성들이 십일조를 드리지 않으므로 성전에 양식이 없어서 일꾼들이 떠났으나 지금 한국교회는 성도들이 십일조를 드리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나마 성도들은 십일조를 잘 드린다. 그런데 문제는 드려진 십일조를 큰 교회들이 잘못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성전이 문을 닫고 있는 것이다. 우리 한국에 지금의 교회 형태가 어떠한가?

 

큰 교회는 십일조를 넘치게 축적해 있고, 작은 교회는 창고가 텅텅 비어서 말라 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 한국 교회에도 느헤미야 당시와 같은 개혁이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 그때는 “민장들을 꾸짖었으나 지금은 교회의 민장 곧 대형교회의 장로나 목회자들을 꾸짖어야 한다. 현재 얼마나 많은 사역자들이 자기의 일터인 성전을 떠나고 있는가? 얼마나 많은 목사님들이 성전을 떠나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헤매고 있는가? 그것은 현재 십일조가 잘못 사용되어 지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전에 성경에서 요구하는 올바른 십일조의 개혁이 일어났다면 한국의 교회 상황은 지금과 전혀 달라졌을 것이다.



현재 거의 모든 목회자들은 성도들에게 십일조를 내라고 강조만 하지 드려진 십일조를 바르게 써야 된다고 하는 자는 거의 없다. 성도들이 십일조를 내지 않으면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도둑이라고 책망한다. 그러나 십일조를 잘못 쓰는 것을 보고 도둑이라고 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보지 못했다. 그리고 또한 그것을 도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역시 한사람도 없다. 그렇지만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사람을 도적이라고 한다면 십일조를 잘못 사용하는 사람도 도적이다,

 

그렇다! 십일조를 잘못 사용한다면 그것은 십일조를 안 내는 사람보다 더 큰 도적이다. 즉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자가 바늘 도둑이라면 십일조를 잘못 쓰는 자들은 소도둑이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성경적 원칙에 따라서 바르게 사용되어 져야 한다.

온전한 십일조를

  하나님은 온전한 십일조를 원하신다. 온전한 십일조란 양이 많고 적음이 아니라 합당하게 드리는 십일조를 말한다. 즉 수확에 따라서 많이 얻었으면 많이 드리고 적게 얻었으면 적게 드리는 것이다. 십일조는 적게 드린다고 미안하게 생각 할 것이 없으며 많이 드린다고 과시할 것도 없다. 십일조는 정당하게 드리고 드려진 십일조도 정당하게 사용되어야만 온전한 십일조가 된다. 그러므로 교회는 십일조의 액수가 많이 들어 왔다고 해서 그것을 가지고 자기들의 마음대로 써서는 안 된다. 왜냐 십일조는 내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그저 우리는 하나의 청지기로서 정확한 십일조를 드리고 또한 그것을 정확하게 사용할 의무 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우리가 십일조를 드린 후 그것이 어떻게 쓰여 지는지 하고 사사건건 간섭하는 성도가 되어서도 안 된다. 우리는 청지기로서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돌릴 따름이다. 십일조를 드리는 자들은 드리는 것으로 끝나고 마치 자기의 돈인양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



십일조의 사용은 하나님과 십일조를 쓰는 목회자와의 관계이지 드리는 성도가 간섭할 문제가 아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요, 우리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남의 것을 주인에게 전달한 사람이 전달한 후에까지 간섭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청지기로서 하나님이 맡긴 물건을 전달하는 것 뿐이며 그것을 간섭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바치는 것으로 끝나야 한다. 사사건건 간섭하지 말고 너희의 의무나 성실히 이행하라. 십일조는 일반 사람들의 몫이 아니라 성소에서 일하는 일꾼들의 몫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야한다. 

조건적인 십일조

십일조로 ‘복을 받기 위해서 한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우리가 그러한 사상은 바꿔야 한다. 어떻게 바꿔야 하는가?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므로 하나님께 돌리는 것 뿐이라는 확고한 사상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그러한 생각으로 드렸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약속했기 때문에 십일조를 정확하게 드리는 사람들을 축복하신다. 심지어 예수를 안 믿어도 십일조를 잘 드리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약속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를 안 믿으면서도 하나님께 십일조를 철저하게 드리므로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미국 경제의 70%를 차지한다고 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복을 전제로 십일조를 드려서는 절대로 안 된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므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가지 깨달아야 할 것은 십일조나 감사예물이 모두 하나님의 것이지만 십일조를 자기의 마음대로 나누어서 감사예물로 드려서는 절대로 안 된다. 그것은 하나님을 희롱하는 것이다. 만약 여러분이 어떤 목적에 쓰려고 구별해둔 돈을 가지고 다른 사람이 자기의 맘대로 선심을 쓴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십일조는 선심을 쓸 수 있는 종류가 아니며 타인이 자기의 마음대로 다른 용도로 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십일조는 한 목적을 위하여만 사용 되어져야 한다.

 

공식을 벗어난 하나님의 주권

우리가 수학적인 공식으로 볼 때 10에 1을 빼면 반드시 9가 된다. 그러나 십일조는 10에서 1을 빼도 9가 되지 않고 10도 되고 100도 되고 만도 된다. 십일조는 숫자를 분명히 뺏는데도 수가 더 많아지는 것이다. 누구든지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 보라. 그리하면 당신의 계좌에 들어있는 돈이 수학적인 원칙에서 벗어나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즉 십일조를 드리고 나중에 결산하면 그 수가 더 늘어나 있는 것을 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정반대로 십일조를 드리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그러면 원래 계산상의 수자가 더 줄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세상 물건을 도둑질하면 정죄 받고 감옥에 간다. 세상에서 남의 것을 도둑질하면 반드시 처벌을 받는다. 그와 마찬가지로 십일조를 도둑질하는 사람들도 반드시 처벌을 받게 됨으로 십일조를 자기의 마음대로 쓸 때는 처벌이 있음을 각오를 해야 한다.



십일조를 잘 드리면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는가?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황충을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말3:11)



  성경은 십일조를 잘 드리는 사람들의 사업에 황충을 금하여 토지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해 주신다고 하셨다. 그렇다! 십일조를 잘 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집에 양식이 있게 되면 성전에 일꾼들이 머물러 있게 되고, 그들이 성소의 일을 잘 하게 됨으로 백성들은 복을 받게 되며 하나님께서 모든 재앙을 막아 주셔서 복이 임하게 하는 것이다.



레위인은 성소의 직무를 지킬 것이요 ”이와 같이 너희는 성소의 직무와 단의 직무를 지키라 그리하면 여호와의 진노가 다시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미치지 아니하리라” (민18:4)백성들은 제사장이 제사를 잘 드려야 재앙이 떠난다. 성경은 제사장이 성소의 일을 잘해야 “여호와의 진노가 다시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미치지 아니하리라” 고 하셨다. 그러므로 제사장이 성전에서 일을 잘 하려면 십일조가 있어 성전에 양식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일꾼들이 먹을 것이 있으므로 성전에 붙어 있으며 성전에 있어야 백성을 위하여 기도해 주고 하나님의 사역을 충실히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성도들의 축복의 통로가 는 것이다.



”이와 같이 너희는 성소의 직무와 단의 직무를 지키라 그리하면 여호와의 진노가 다시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미치지 아니하리라” (민18:4) 제사장들이 성전에서 성소의 직무를 잘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집의 양식인 십일조를 잘 드리도록 하라 십일조를 받는 자들은 하나님의 일꾼임으로 하나님께서 먼저 자기의 일꾼들을 평안하게 하기 위하여 십일조를 드리도록 한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 평안해야 하나님을 섬기는 교인들의 가정도 평안할 수 있다 당신이 평안하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성전에 양식이 있게 하라.

목자는 하나님이 직접 책임지신다.

어떤 교인들은 자기들이 십일조를 드린 것으로 교회의 목회자가 생활하기 때문에 자기들이 목회자를 살리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큰 잘못이다.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은 교인들은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 뿐이요, 목회자들은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으므로 하나님께서 직접 먹이시고 입히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직접 그들을 먹이기 위하여 십일조의 제도를 미리 정해 놓으신 것이다. “그 십분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성물이라”(레27:30)



  십일조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고 했다.

십일조는 그것을 드린 자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다. 또한 민18:21에 십일조는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주어서 성막에서 하는 일의 댓가로 하나님이 갚으시는 것이라고 했다. 복음을 위한 성전에서의 사역은 하나님께서 시킨 것이므로 하나님이 수고한 댓가를 직접 주신다는 말씀이다. 십일조는 교인들이 사역자를 위하여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성전에서 일한 자들에게 보수로 주시는 것이다.



  “너희의 권속이 어디서든지 이것을 먹을 수 있음은 이는 회막에서 일한 너희의 보수니라”(신18:31)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보수를 가지고 타인이 왈가왈부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이다. 세상에서의 국가 공무원들은 국민이 낸 세금에서 보수를 받는다. 그러나 국민들에게서 보수를 받는 것이 아니라 국가에서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금을 낸 국민이 자기가 그에게 보수를 준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만약에 국가 공무원들이 받는 보수를 자기들이 낸 세금이므로 자기들이 준다고 생각하고 공무원을 자기의 맘대로 간섭한다면 그는 국가로부터 제재를 받을 것이다. 국민은 자기의 의무로 세금을 낸 것 뿐이요, 공무원은 국가로부터 받는 것이지 국민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다. 그와 같이 십일조를 받는 것도 성도들이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자기가 낸 십일조에 대하여 절대로 간섭해서는 안 된다. 

신약의 십일조

 신약에서도 예수님은 십일조를 구약과 똑같이 적용하도록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둘씩 보내시면서 자기 양식을 가지고 가지 말라고 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 (마10:10)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전도를 위하여 나아갈 때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하시면서 일군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한 것이라고 하셨다. 사역자들은 영적으로 일을 했기 때문에 그 일한 대가로 자기의 생활에 필요한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복음을 위하여 일한 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대가를 받는 것이 정당하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복음을 위하여 나아갈 때 빈손으로 나아가서 거기서 주는 것을 먹으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열 두 제자들에게만 일한 댓가를 받는 것이 합당하다 하지 아니하시고 70인을 보낼 때도 똑같은 말씀을 하셨다 “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군이 그 삯을 얻는 것이 마땅하니라.(눅10:7)

 축복 받은 예

  십일조를 드려 하나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자! 그러면 축복을 주실 것이다.

한 번은 머슴이 주인을 따라 부흥회에 참석했다가 축복을 받으려면 십일조를 잘 드리라고 하는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그때부터 열심히 십일조를 드렸더니 하나님께서 그를 축복하사 훗날 만석이가 되었다. 만석이란 벼를 만석 수확하는 주인을 말한다.

 십일조의 십일조

 레위인이 십일조를 받았을 때 그 십일조의 십일조를 어떻게 하라고 했는가?

민18:26 “너는 레위인에게 고하여 그에게 이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취하여 너희에게 기업으로 준 십일조를 너희가 그들에게서 취할 때에 그 십일조의 십일조를 거제로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 레위인들은 십일조로 생활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도 역시 보수를 받을 때는 십일조의 십일조를 다시 거제로 드려야 한다. 그리고 그 드려진 십일조는 제사장의 권속들이 먹었다.



“너희와 너희 권속이 어디서든지 이것을 먹을 수 있음은 이는 회막에서 일한 너희의 보수임이니라(민18:31)

“너희가 그 중 아름다운 것을 받들어 드린즉 이로 인하여 죄를 지지 아니할 것이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의 성물을 더럽히지 말라 그리하면 죽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는 레위인들에게 십일조를 주시면서 십일조는 레위인들의 기업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십일조는 레위인들이 “회막에서 일한 보수라”고하셨고 십일조를 레위인들은 어디서든지 먹을 수 있다고 하셨다. 그러나 레위인들도 십일조를 기업과 일한 보수로 주셨기 때문에 보수를 받을 때 십일조의 십일조를 드리라고 하셨던 것이다.



십일조의 십일조를 어디에 드려야 하는가? 십일조의 십일조는 레위인이면서도 아론에게 돌리라고 하셨다. 십일조의 십일조는 상부에 올려야 하였고 상부에서는 그것을 권속들에게 주어 나누어 먹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십일조의 십일조는 상부로 올리고 상부에서 필요한 곳에 나누어 주는 것이 좋다.



그러므로 레위인들도 십일조를 드려야 하지만 그 드린 십일조를 다시 자기가 써서는 안 된다. 반드시 십일조의 십일조는 다른 곳으로 보내져야 한다. 그러면 이 시대의 십일조의 십일조는 어떤 것인가? 그것은 목사님들이 보수를 받은 후 목사님이 드리는 십일조가 현시대에 있어서 십일조의 십일조가 된다. 왜냐하면 현재 성전에서 일하는 일꾼은 목사님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목사님들이 받은 보수에서 드리는 것이 십일조의 십일조가 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목사님이 드리는 십일조는 다른 곳으로 가야하며 다른 곳에서 쓰여져야 한다. 그러나 현재는 어떻게 쓰여 지고 있는가? 목사님이 받아서 내는 십일조를 다시 자기교회에 다 내기 때문에 목사님은 또다시 그 십일조를 받게 된다. 그러면 자기가 낸 십일조를 다시 자기가 쓰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성경적이 못된다.



성경은 십일조의 십일조를 거제로 드리라고 하셨으니 십일조를 받는 목회자들의 십일조는 다른 곳으로 가야만 합당하다. 만약 지금까지 성경적 제도가 현 교회에 그대로 사용되어지고 있었다면 우리 한국 교회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을 것이며 이런 제도대로 지금까지 십일조가 사용됐었다면 복음이 지금보다 몇 배 더 효과적으로 전파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십일조의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면 사역자가 내는 십일조는 그 교회에 포함시키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다른 사역자들에게 보내져야 한다. 레위인의 십일조의 십일조는 아론의 자손에게 돌리라고 했다.



 이러한 원칙대로 십일조가 바르게 쓰여 진다면 큰 교회들은 작은 여러 교회들을 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큰 교회부터 작은 교회에 이르기 까지 여러 곳에 도움을 줄 수 있으므로 많은 교회들이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좋은 제도가 성경에 명시되어 있으니 이런 원칙이 지켜질 때 가난한 목회자들이 다시 살아날 것이다.

 

 십일조의 십일조 제도만 잘 사용한다면 큰 교회 하나가 여러 교회를 살릴 수 있다. 목회자들이 성도들에게 십일조만 내라고 강조하지 말고 그 십일조의 십일조를 거제로 드려 다른 곳으로 보내도록 하라. 이 제도만 지켜진다 하여도 개척교회가 밥을 굶는 일은 없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교파가 아니라고 사역자 돕는것을 꺼려한다.

 

 그러나 복음이 같다면 다른 교파란 없는 것이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유대인이나 예수 안에서는 모두가 동일하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바울은 어디를 가든지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를 섬기는 일을 위하여 이방교회에서 계속적으로 헌금을 가지고 왔다. 그러므로 우리 신약의 사람들은 교파를 따지지 말고 복음이 있느냐 없느냐만 따지면 된다. 복음만 확실하다면 모든 성도는 하나인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만 같으면 십일조의 십일조를 누구에게 보내도 아무런 이상이 없는 것이다.     

기도원에 드리는 십일조

 어떤 사람들은 기도원에 가서 십일조를 드린다. 그러나 기도원은 십일조를 드리는 장소가 아니다. 기도원은 십일조를 내는 곳이 아니다. 왜냐 기도원은 교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비유를 든다면 기도원은 일종의 병원과 같은 곳이다. 개인이 병원에 갈 때에는 국가에 내야할 세금으로 병원비를 내는 것이 아니라 별도의 개인 돈을 준비하는 것같이 기도원에 가는 성도들도 십일조 외에 다른 것으로 드려야 한다. 기도원은 기본제사가 아니요 개인 적인 사무이므로 십일조가 아닌 다른 것으로 헌금을 드려야 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어떤 기도원은 너무 많은 십일조를 받아 치부하고 있다. 기도원 원장의 땅을 사주기 위하여 십일조를 드리라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십일조가 기도원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는가?



 이것은 불법이다.

 왜 권사나 장로가 기도원에 앉아 십일조를 받아 챙겨야 하는가? 은사가 있는 기도원의 원장을 위하여 십일조가 마련된 것이 아니다. 십일조는 성전의 봉사를 위하여 성전에서 일하는 자의 보수인 것이다. 직권을 남용하지 말고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라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하지 말라. 십일조는 기도원 원장들이 땅을 사고 집을 사고 개인 재산을 늘리는데 도와주라고 정한 돈이 아니다. 십일조를 기도원에다 내는 것은 그것을 내는 자나 쓰는 자가 모두 남의 것을 횡령 하는 범죄인 것이다. 지금까지 횡령한 돈들을 원래의 목적지에다 환원 하고 엎드려 하나님께 회개하라. 지나간 시간에는 알지 못하여 그렇게 하였을 지라도 지금은 천하에 공개 되었으니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가지라. 만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나님께로부터 공정한 심판이 있을 것이다.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리라”        

 본교회가 아닌 곳의 십일조

 일반적으로 십일조는 본 교회에 드려야 된다고 강조한다. 그것은 정당하다고 볼 수 있는데 그렇다면 십일조를 타 교회에는 전혀 드릴 수 없는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하여는 우리가 객관적인 입장에서 냉정하게 검토해 보아야 한다. 먼저 구약의 예를 살펴보자 하나님이 십일조를 제정 할 때는 레위인들을 위하여 세워졌다.

 

그러면 이스라엘백성이 드리는 십일조가 지역에 구애를 받았는가?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곳에서나 십일조가 레위인 들에게 돌아가기만 하면 장소에 구애됨이 없이 십일조를 드렸다. 십일조란 백성들은 자기의 의무대로 드리기만 하면 되고 그 드려진 십일조를 레위인들이 쓰기만 하면 된다. 그러므로 장소는 상관이 없다. 그렇다면 현재도 일반 성도들은 드리기만 하면 되고 그 십일조가 바른 원칙에 의해서 사역자들에게 똑바로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 십일조를 자기 개인이 쓴다고 한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그것이 성소에서 일하는 자들에게 돌려지고 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구약의 십일조 제도로 볼 때 타당한 것이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대형교회의 목사님들이 반대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적 진리가 이상이 없다면 나는 아무런 꺼리낌이 없다. 현재 대형교회의 십일조가 정당하게 쓰여 지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적은 교회 목사님들이 고통당하고 있는데 그것은 큰 교회가 작은 교회의 사역자들에게 주어야 할 몫을 주지 않고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어려운 교회에 십일조가 직접 드려짐으로 성소의 양식이 채워진다면 나는 성경적으로 볼 때 잘못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한다. 

   

 십일조를 본 교회에 드리지 않은 것이 불법이라고 규정한다면 먼저 자기 자신부터 외부에서 들어오는 십일조를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 이제 우리는 한국교회의 어린 시절을 상기해 보자 우리한국 교회의 현주소는 어떻게 이루어 졌는가? 한국교회의 어린 시절 우리교회들의 현주소는 거의가 다 외국에서 들어온 십일조로 인하여 장성했다



 우리 한국교회가 자라기 시작 할 때에 어디를 가든지 가는 곳마다 보리 고개가 있었으며 그때 많은 국민이 외국으로 나가 노동을 하여 나라를 살렸다. 지금 우리국민이 모두 잊었는지 모르지만 우리교회가 성장한 것이 얼마나 되는가? 우리의 부모나 우리의 형 우리의 누나가 외국에서 노동을 하여 보내준 돈으로 우리가 살았다.



 미국 독일 등 많은 곳에는 간호사로 나간 사람이 얼마나 많았는가?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에 가서 노동해서 들어온 돈이 얼마나 많은가? 그 노동자들은 외국에서 교회를 다녔지만 십일조를 그 교회에 드리지 않고 수입 전체를 모두 한국으로 보내 왔으며 한국에 있는 가족이 한국 교회에 십일조를 드렸다 그러나 원칙대로 따진다면 그가 다니는 교회에 십일조를 드렸어야 한다. 그러나 그때 한국교회는 어느 누구도 본인이 다니는 교회에 십일조를 드리고 한국으로 보내지 말라고 만류 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일부 노동자들은 모든 가족이 현지에서 생활했으나 십일조만은 한국으로 보내줬는데 그때 한국교회는 그들이 보내준 십일조로 교회가 성장할 수 있었다. 이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사실이다. 십일조를 꼭 본 교회에 드려야 한다면 그때 보내준 십일조는 쓰지 말았어야 했다.



 자기가 받아서 쓸 때는 십일조를 고향으로 보내주어야 한다며 요구하고 자기가 자라서 배가 부르니 십일조를 다른 곳에 드리는 것은 불법이라 한다면 한국 교회가 성장하면서 외부에서 들어와서 쓴 십일조를 모두 그때 그들이 다니던 그 외국 교회로 다 돌려보내야 한다. 우리 한국 교회는 다른 곳에서 들어온 십일조를 너무 많이 썼다. 한국교회가 개척당시 교회를 운영할 힘이 있었는가? 교회마다 어린이나 있고 어른들이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이끌어 갔는가? 그나마 외국에서  힘들게 일하며 고향에 있는 교회를 살리기 위하여 십일조를 보내 교회가 유지됐다.

 

 그러기 때문에 한국교회는 그 문제에 대하여 할 말이 없다. 만약에 그 문제에 이의가 있다면 자기들이 쓴 돈부터 반환해야 한다. 그것도 이자를 붙여서 반환해야 하며 그때 당시의 물건 값으로 환산하여 값을 배상해야 한다. 그러나 누가 이일을 할 것인가? 모두가 자기는 안 썼다고 할 것이다.     



 또한 십일조를 꼭 본 교회에만 드려야 된다고 한다면 큰 교회는 십일조를 쌓아놓지 말고 개척교회 사역자들에게 나눠줘야 한다. 왜냐하면 성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큰 교회나 작은 교회나 똑같이 십일조를 쓸 권한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은 십일조의 제도가 아니라도 큰 교회는 작은 교회를 도와야 할 의무가 있다.



 강단에서는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외치면서 왜 작은 교회 목회자들의 굶주림은 외면하는가?  

나는 십일조를 넘치게 쌓아놓고 썩는데도 개척교회의 사역자들에게 손을 펴지 않은 사역자들은 남의 보수를 가로채는 횡령으로 본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요 레위인들에게 일한 보수로 준 것이다. 그러므로 십일조를 넘치도록 쌓아 몇 년이고 묵히는 교회에는 더 이상 십일조를 드려야 할 명분이 없다. 그런 경우라면 십일조를 바르게 사용하는 교회에 드리는 것이 불법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십일조는 레위인이 평등하게 쓰도록 마련된 것이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하나님의 사업을 위하여 헌신하는 목회자라고 하다면 똑같이 쓸 권한이 있다.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어야 한다.   

    

십일조의 그릇된 사용

민18:20 “여호와께서 또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땅의 기업도 없겠고 그들 중에 아무 분깃도 없을 것이나 나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 네 분깃이요 네 기업이니라.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의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



레위인들은 이스라엘 중에 땅의 기업도 없고 그들 중에 아무 분깃도 없다. 그러나 그 대신에 성전에서 일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 자신이 그들의 분깃이요 기업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의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는다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레위인은 육적으로 생활 할 수 있는 일터가 없는 반면 하나님이 십일조를 이스라엘에게 받아서 레위인들에게 주어 성전에서 하는 일의 댓가를 갚는다는 말이다. 십일조는 레위인의 기업이다. 그렇기 때문에 목회자들은 십일조로 보수를 받는 것 외에 다른 기업에서 보수를 받아서는  안 되다. 목회자는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십일조를 받아 전적으로 그 곳에서 일을 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십일조의 보수를 받지 말든지 목회자가 영적인 사업과 육적인 사업을 겸하여 하면서 양쪽에서 보수를 받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만약 목회자가 육적인 사업을 하고 그곳의 보수를 받는다면 교회에서는 보수를 받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사역자의 기업은 하나님이요 십일조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만 받을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레위인은 이스라엘 중에 땅의 기업이 없다. 하나님이 곧 그들의 기업이다. 목회자는 이것을 확실하게 해야 한다. 그러므로 목회자가 양쪽에서 보수를 받는 것은 불법이다. 한번 냉정하게 생각해 보라



어떤 회사에서 근무하는 사원이 그 장소를 이탈하여 다른 곳에 가서 일을 하고 그 곳에서도 보수를 받는 다면 그것이 합당한 일인가 그것은 불법이요 사장이 그 사실을 모른다 할지라도 그렇게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결코 이중으로 보수를 받도록 영적인 일과 육적인일을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사역자들은 육적인 것에 매여서는 안 된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확정된 십일조

그리고 그 반면 십일조는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생활비이므로 다른 곳에는 쓸 수가 없는 것이다. 십일조는 오직 성전에서 일하는 일꾼들이 쓰도록 하나님이 특별하게 구별해놓은 성물이요 성전에서 일하는 자들의 보수이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다른 어떤 곳에 사용해서도 안 된다. 그러나 큰 교회들은 십일조를 가지고 자기들의 마음대로 쓰고 있다.



다른 사람들의 일한 보수를 가지고 어디에다 쓸 수 있는가? 십일조는 성직자의 생활비 외에는 아무 곳에도 쓸 수 없는 종류이다. 십일조는 선교를 위하여 쓰는 것도 아니요 구제를 위하여 쓰는 것도 아니요 건축을 위하여 쓰는 것도 아니다. 십일조는 다른 어떤 곳에도 쓸 수 없는 성물이다.



오직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성소에서 봉사하는 자들을 위하여 구별해 놓은 특별한 부분이다.

그러므로 십일조를 가지고 성전 건축을 하거나 구제를 하거나 선교를 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이 제정한 목적에서 위배되는 것이다. “십일조를 레위인에게 기업으로 준 고로 내가 그들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기업이 없을 것이라 하였노라”(민18:24)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에게 취하여 너희에게 기업으로 준 십일조”라고 하였다. 십일조를 레위 인들에게 기업으로 준 것이라면 다른 사람들은 십일조에 대하여 타 치 할 권한이 없다. 왜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준 것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단 말인가? 십일조는 내 맘대로 할 부분이 아니다. 십일조는 그 받은 사람만이 쓸 자격이 있는 것이지 타인이 맘대로 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그런데 현재 십일조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 교회가 맘대로 사용하고 있다.  

 

교회들이 십일조를 가지고 땅을 사놓든지 건물이나 그 외의 여러 가지 종류들을 자기들이 생각대로 쓰고 있다. 그러나 십일조는 부동산 구입비로 드리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일꾼들이 나가서 영적인 일을 할 때 복음을 위해서 쓰여 지도록 구별해 놓으신 것이다. 십일조를 가지고 땅을 사는 것은 일꾼들이 써야할 남의 생활비를 횡령하는 것이다. 십일조는 원래의 목적에 바로 사용되어져야 한다. 만약 십일조가 하나님이 제정하신 목적대로 사용되어 졌다면 한국이 벌써 복음화 되었을 것이다. 



십일조는 사역자의 생활을 위한 보수로만 사용되어 저야 한다. 만일 십일조를 바르게 사용했더라면 작은 교회 목사님들이 교회를 떠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십일조가 바르게 사용만 되어 졌다면 현재와 같이 많은 목사님들이 영혼구원 하는 사업을 떠나 각종 세상의 일터로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느헤미야 당시에도 십일조를 바르게 쓰지 않아 많은 레위 인들이 성전을 떠났다. 그러므로 느헤미야는 개혁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오늘날도 느헤미야의 개혁이 일어나야 한다.

느헤미야의 개혁

느13:10 “내가 또 알아본즉 레위 사람들의 받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직무를 행하는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각각 그 전리로 도망하였기로 내가 모든 민장을 꾸짖어 이르기를 하나님의 전이 어찌하여 버린 바 되었느냐 하고 곧 레위 사람을 불러 모아 다시 그 처소에 세웠더니 이에 온 유다가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가져다가 곳간에 들이므로”



느헤미야는 개혁자다 그는 바사왕 아닥사스다의 허락을 받고 이스라엘의 총리가 되어 강한 리더로서 무너진 많은 부분들을 개혁하고 나라를 바로 세운 능력 있는 개혁자이다.   느헤미야는 많은 문제들을 개혁하는 중에 특히 십일조에 대한 개혁을 단행하였다. 첫째 십일조는 성소에서 일하는 자들의 생활과 직접 관련이 있기 때문에 “레위 사람들의 받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직무를 행하는 레위” 사람들이 자기사업을 하기 위하여 성전에서 도망갔다.

 

그러므로 느헤미야는 “모든 민장을 꾸짖어 이르기를 하나님의 전이 어찌하여 버린바 되었느냐 하고 곧 레위 사람을 불러 모아 다시 그 처소에 세웠다. 민장이란 어떤 사람들인가 민장이란 이스라엘 백성들의 어른을 말한다. 즉 지도자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느헤미야는 백성들로 하여금 십일조를 잘 내도록 하였으며 레위 인들을 다시 불러 성소의 알을 정상적으로 하도록 하였다. 그 시대의 하나님의 교회 곧 이스라엘을 개혁한 것이다. 느헤미야는 잠자는 교회를 살렸다.



그러면 오늘의 한국 교회는 어떠한가? 느헤미야 당시와 똑 같이 이름은 살았으나 실상은 죽어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에도 개혁이 일어나야 한다. 느헤미야의 당시와 같이 특별한 개혁이 일어나지 않으면 한국교회도 전망이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개혁을 해야 할 것인가 느헤미야 당시에는 백성들이 십일조를 내지 않아 하나님의 종들이 떠나므로 성전이 버린바 되었으나 지금은 그때와 좀 다르게 드려진 십일조를 다른 목적에 사용하므로 교회에 양식이 없어 목사님들이 성전에서 떠나고 있다. 영혼을 구원해야할 목사님들이 양식을 구하기 위하여 교회를 떠나므로 교회가 문을 닫고 있다.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

그 책임은 드려진 십일조를 바로 쓰지 않고 쌓아놓은 몰지각한 교회들에게 있다. 현재 대형교회의 목사들이 십일조를 쌓아놓고 자기의 마음대로 쓰면서 복음을 전하는 목회자들에게 생활비를 나누어주지 않아 성전에 양식이 없어 목자들이 교회를 버리고 세상일을 찾아 떠나고 있다. 그러므로 느헤미야와 같이 민장들을 꾸짖어 십일조를 바로 쓰도록 해야 한다. 현제의 민장들이란 누구일까? 곧 교회의 어른들을 민장이라고 할 수 있는데 목사님들 중에도 큰 교회 목사님과 장로들이 민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민장들이 회개하고 쌓아놓은 십일조를 교파와 상관없이 교회를 떠난 목사들을 불러들여 먹을 것을 주고 다시 성전에서 복음을 위하여 일하도록 특단의 개혁을 단행해야 한다.

      

앞에서도 진술하였거니와 다시 한 번 성경 적 원칙을 말한다면 십일조는 성소에서 복음을 위하여 일하는 일꾼들의 보수이다. 그러므로 십일조를 드리지 않은 성도들을 도적이라 한다면 십일조를 쌓아놓고 땅을 사고 집을 사면서 성소에서 일하는 일꾼들에게 주도록 되어있는 것을 주지 않은 목사들은 더 큰 도적이다. 십일조를 내지 않은 사람을 바늘 도적이라 한다면 십일조를 쌓아놓고 일꾼에게 주지 않는 목사들은 소도둑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큰 교회의 목사님들은 쌓아놓은 십일조를 내어다가 일터를 떠난 목사님들에게 나누어주어야 한다.



십일조를 자기의 맘대로 쌓아놓은 대부분의 교회 목사님들은 자기교회에 들어온 십일조가 모두 자기의 것인 줄 알지만 십일조는 자기의 것이 아니라 성소에서 일하는 일꾼들에게 생활비로 똑같이 나누어 주어야할 부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전에 양식이 없어서 복음을 위하여 살지 못하고 성전을 버리고 떠나는 목자들의 그 책임은 십일조를 쌓아놓고 나누어 주지 않은 목회자들에게 달려있다. 그러므로 많이 거둔 자들은 그 거둔 것을 못 거둔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 그렇지 않으면 벌래가 먹고 썩어버릴 것이다.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람이 없도록 그 거둔 것을 나누어 주라 그것이 오늘 이 한국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요구이다.

 십일조를 어떻게 사용하여야 할 것인가  

 십일조는 성소에서 일하는 레위인들이 똑같이 쓰도록 되어 있다. 어떤 사람은 많이 쓰고 어떤 사람은 적게 쓰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레위인이면 공평하게 쓰도록 되어있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교회를 설립하여 성장시킬 때 십일조가 증가하는 것에 따라 사역하는 일꾼들을 늘려 나아가야 한다.



 예를 들어 담임목사님의 보수를 얼마로든지 교회가 정하였는데 십일조가 그 이상 나오게 되면 교회는 일꾼을 다시 더 두고 또다시 십일조가 증가되어 일꾼을 쓸 수 있으면 다시 일꾼을 써서 복음을 전하도록 하여야 한다. 그래도 십일조가 남으면 교파와 상관없이 약한 교회의 사역자에게 나눠줘야 한다. 왜냐 하면 십일조는 사역자의 보수 외에 다른 곳에는 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십일조는 레위인들이 공평하게 쓰는 것이지 한곳에는 남아있고 한곳에는 모자라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우리한국교회는 어떠한가?

 

 어떤 목회자는 배 불어 죽고 어떤 목회자는 배고파 죽고 둘 다 죽고 있는 실정이다 이것은 너무나 불공평한 처사다. 어떤 목회자는 라면도 없어서 못 먹고 일부의 어떤 목회자들은 너무 먹을 것이 많아 다 먹을 수 없으므로 날마다. 고급요리 집이나 찾아다니고 있으니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합당한가? 그래도 강단에서면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성도들에게 외치고 있을 것이 아닌가? 진정으로 자신이 그런 설교를 해도 양심의 가책이 없는가? 나는 묻고 싶다. 어떤 경우에는 대형교회 목사님이 부패 집에 한번만 덜 가도 시골교회 목회자가 일 년 먹을 양식이 될 수도 있다. 성경은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었다고 하므로 모두가 똑같이 공평하게 먹을 수 있는 것이 합당함을 말해주고 있다.   

                

 출16:17 “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기 식량대로 거두었더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 두지말라 하였으나 그들이 모세의 말을 청종치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하나님이 내려주는 양식을 먹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내려주는 양식이지만 욕심이 생겨 자기들이 먹고도 남도록 거두어 왔다 그러나 그 거둔 것을 되어보니 남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았다. 그리고 모세는 그 거둔 것을 다 먹고 남겨두지 말라고 했으나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아침까지 남겨두었는데 벌래가 먹었다고 하였다. 이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준다. 만나는 자기가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늘에서 내려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남겨둘 이유가 없다.



 이스라엘백성에게 내려졌던 만나와 같이 십일조는 하나님이 성소에서 일하는 사역자들에게 내려주시는 하늘의 만나인 것이다. 그러므로 남겨두면 안 된다. 들어오는 데로 일꾼들이 나누어 먹어야 한다. 만약에 십일조를 쌓아 논는다면 분명히 벌래가 먹을 것이다. 그리고 모세는 아침까지 쌓아놓은 사람들에게 진노하였다. 그런데 지금도 그때 사람들의 욕심같이 욕심이 많은 욕심쟁이들이 십일조를 쌓아놓고 있다. 그러나 아침까지 쌓아두었던 만나가 썩고 벌래가 생긴 것 같이 지금도 십일조를 쌓아놓는다면 하나님이 진노하실 것이다.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 두지말라 하였으나 그들이 모세의 말을 청종치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

 <내가 이제 십일조를 많이 쌓아놓은 교회의 목사님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권고합니다. 쌓아놓은 십일조를 골방에서 꺼내어 가난한 목회자들에게 던지십시오. 십일조를 잔득 쌓아놓고 있다가 하나님 앞에 가서 무엇이라 하시겠습니까? 안일하게 대처한 일에 대하여 하나님께 책망 받으실 것입니다. 십일조는 당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에게 돌리십시오. 그것이 영적으로 당신이 사는 길입니다. 민장들을 꾸짖는 느헤미야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그것이 영적으로 당신이 사는 길입니다.>

 

 민18:20 “여호와께서 또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땅의 기업도 없겠고 그들 중에 아무 분깃도 없을 것이나 나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 네 분깃이요 네 기업이니라.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의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



 십일조의 제도는 성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그들의 기업이요 그들의 분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십일조에 대하여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의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는다고 하여 십일조가 하나님의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런데 어찌하여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자기의 마음대로 쓰고 있으며 또는 어찌하여 일꾼에게 주지 않고 쌓아두었는가?

 

 일꾼에게 주어야 할 것을 주지 않고 쌓아둔다면 그것은 분명히 남의 것을 횡령한 범죄자가 된다. 하나님께서는 오늘의 한국교회를 바라보시면서 말라기서에 책망하시듯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 질 하고도 우리가 언제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한다고 말씀 하셨는데 오늘 이 시대에도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십일조를 쌓아놓고 주어야 할 것을 주지 않는 십일조가  곧 그것이라고 하신다.



 말3:8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 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말라기 선지자는 너희가 십일조를 내지 않아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다고 하였다 그렇다 현재 한국교회는 증가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감소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하였으므로 저주를 받아 교회가 이단의 밥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한국교회는 십일조의 개혁을 시도 하여야 한다. 십일조를 쌓아놓은 자들은 십일조를 풀어 약한 교회를 살려라 그렇지 않으면 한국교회는 전망이 없다. 한국은 복음으로 세계를 정복해야하는 사명을 가진 나라이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합당하지 못하므로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므로 이재 시대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권고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우려야 한다. .



 말라기 선지자는 너희가 십일조를 드리지 않아 “온 나라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하였으므로 저주를 받았다고 하였다 그렇다 현재 한국교회는 말라기 시대의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 하였다고 한 것과 같이 온 교회가 십일조를 일꾼들에게는 다 주지 않고 다른 목적에 사용하므로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였기 때문에 “저주를 받아” 교회가 퇴보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라고 하신 말씀대로 교회에 양식이 없어서 성전을 떠났던 사역자들을 불러 모아 보음을 전하게 하므로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게”하라 현재 한국 기독교는 교회가 부흥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감소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하였으므로 저주를 받아 교회가 이단의 밥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한국교회는 십일조의 개혁을 시도해야 한다. 십일조를 쌓아놓은 부자들은 십일조를 풀어 약한 교회 사역자들에게 먹을 양식을 주라 그렇지 않으면 한국교회는 전망이 없다. 한국은 복음으로 세계를 정복해야하는 사명을 가진 나라이다. 그러나 온 교회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지 못하므로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므로 이재 시대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권고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우려야 한다.

기독교는 2000년 역사 이래 지금까지 말라기 3장 십일조의 문제를 들어 설교 할 때마다 일반 성도들에게만 적용시키고  목회자들에게는 전혀 상관없는 것으로 여겨왔다. 그렇기 때문에 십일조 문제를 제기 할 때 마다 당연히 성도에게 화살을 겨눈다. 그러나 말라기서는 일반 성도들보다 레위 인이나 제사장들을 향하여 더 책망하고 있다. 



 말2:1 “너의 제사장들아 이제 너희에게 이같이 명령하노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만일 듣지 아니하며 마음에 두지 아니하여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려 너희의 복을 저주하리라..내가 이 명령을 너희에게 내린 것은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이 항상 있게 하려 함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대저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하겠고 사람들이 그 입에서 율법을 구하게 되어야 할 것이니 제사장은 만군의 여호와의 사자가 됨이어늘 너희는 정도에서 떠나 많은 사람으로 율법에 거치게 하는 도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니 너희가 레위의 언약을 파하였느니라”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말라기서는 특히 레위인과 제사장들을 향하여 책망하고 있다. 그런대도 우리는 지금까지 일반 성도들에게만 국한시켜 십일조를 안내면 도적이라고 해왔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주장이다 문론 말라기서는 일반 백성들에게도 해당 되지만 백성보다는 특히 레위인과 제사장들을 향하여 강하게 책망하고 있는 것이다.



 말1:6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비를 공경하나니 내가 아비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어찌하여 선지자는 제사장들에게 강하게 책망하고 있는가?                          

그때의 제사장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 보다는 제사를 빙자하여 돈을 챙기는데 급급하였다. 좋은 제물은 자기가 챙겨서 팔고 그 대신 나뿐 것들을 사서 드렸다. 제사장들이 얼마나 나뿐 제물을 드렸는가 하는 것을 성경은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말1:8)

 

 제사장들은 돈이 많이 나가는 것은 팔고 눈먼 것과 병든 것과 각종 병신을 싸게 사서 드렸다. 심지어 예수님 당시에는 시골에서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올 때 제물을 끌고 오기가 불편하니 그대로 예루살렘에 올라와 돈으로 제물을 사서 하나님께 들였다. 그런데 그때당시의 제사장들은 심지어 제물로 바친 것을 한 바퀴 돌린 다음 다시 그곳으로 끌고 나와 이중으로 되팔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요2:14,16)고 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서 경고하기를 성전 문을 닫아 버렸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 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말1:10)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얼마나 나쁜 제물로 제사를 드렸으면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였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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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십일조를 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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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익한 종
2022. 9. 13. 6:41

 이웃추가본문 기타 기능
왜 십일조를 해야 하는가 - 아더 핑크

아래 글은 아더 핑크 목사님의 좋은 글로서, 왜 우리가 십일조를 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명백하게 성경적 근거를 제시하고 계십니다. 읽고 많은 유익을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일부분을 발췌한 것으로서 전체를 보셔야 하는데, 이 글은 옛적길 출판사에서 나온 개혁주의 주일성수와 십일조라는 책에서 발췌한 것임을 밝혀 둡니다. 꼭 책을 사셔서 보세요. 좋은 책입니다.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린 것은 아브라함이 충성된 자의 아버지로서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 주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멜기세덱의 원형인 그분에게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


주의 백성이 성실하게 십일조 하는 곳에는, 어떤 부족함이나 빚에 빠지지 않는다. 십일조가 무시되는 곳에는 거의 항상 부족과 적자가 있으며, 경건치 않은 자들이 돈을 벌기 위해 세상적인 방법들을 동원한다.
십일조를 탐욕의 해독제로 정하셨다. 복권 문제, 돈이 우상이 되어 있다. 십일조는 우리를 탐욕으로부터 구하고, 우리의 본성적인 이기심을 물리치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우리의 복을 위해 기획된 것이며, 하나님의 모든 계명과 같이 무거운 것이 아니라, 우리의 유익을 위해 정해진 것이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일과 관련되어 일어나는 모든 재정적 문제의 해결로서 정해졌다.


존 번연

여기에 한 사람이 있네.
어떤 이는 그를 미쳤다고 하네.
그가 더욱 많이 드릴수록
그는 더욱 많이 가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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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말하는 헌금 

저마다 자기 마음속에 정한 대로 낼 것이요,

마지못해 하거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거이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고후9:7-하단박스)

​이 구절은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주께 드릴 때 생각해 봐야 하는 말씀입니다.

각기 자신에게 적용해야 하고,

마음 속에 정해서 해야 하고,

마지 못해 하면 안 되고,

억지로 하면 안됩니다 (고후9:7).

저마다 해야 하기에 남이 대신할 수 없고,

남과 비교할 수 없고,

남의 것을 드릴 수도 없습니다.

​마음 속에 정하는 것이기에

기도 속에 주님께서 마음에 얹어 주는대로 해야 합니다.

​주님은 자원해서 즐겁게 드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마지못해 하거나, 억지로는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성경에는 헌금이란 말이 없습니다.

물질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giving' 자체를 의미합니다.

즉, 재물 뿐 아니라 무엇이든 주께서 주신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신대로 드리면 됩니다 (고후8:12).

1. 갖지 아니한 것은 받지 아니하십니다

자원하는 마음만 있으면 사람이 가진 것에 따라 주께서 그것을 받으십니다.

주님은 그가 갖지 아니한 것은 받지 아니하십니다 (고후8:12).



하나님이 특히 기뻐하시는 것은 몸을 살아있는 헌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롬12:1).

적극적으로, 기쁨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과 영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입니다 (고전6:20).

우리의 몸은 주께서 값을 치르고 사신 것이므로, 하나님의 것입니다.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왔기에 (롬11:36),

주님께 받은 것을 드리면 됩니다.

2. 균등의 원리를 따라

주님께 드리는 것은 균등의 원리에 따라 채워 집니다.

균등의 원리란 많이 가진 자가 부족한 자를 채우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균등’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습니다.

“... 이번에는 너희의 넘치는 것으로 그들의 부족함을 공급하고

또한 그들의 넘치는 것으로 너희의 부족함을 공급하여 균등하게 하려는 것이라“ (고후8:14).



그러므로 액수는 상관이 없습니다.

자원함으로, 기쁘게 드리면 됩니다.



3. 자신을 드리는 것

주님께 드리는 자는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는 것입니다 (고후8:5).

자신을 드리는 것은 몸과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물질에 앞서 드려야 할 것이 자신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내가 가진 것’이 아니라, 바로 ‘나’입니다.

몸을 거룩하게 하고, 몸을 하나님께 살아있는 희생물로 드리는 것이 합당한 섬김입니다 (롬12:1).



그러기 위해 세상에 동화되지 말고, 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

하니님의 선하시고, 받으실 만하고, 완전한 뜻이 무엇인지 입증해야 합니다 (롬12:2).



4. 자신을 드리는 자는 시간을 드립니다

주님께 드리는 것은 재물이 아니라 ‘나 자신’ 입니다

그러므로, 내게 있는 돈 뿐 아니라 나의 시간을 주님께 드리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만약, 1/10을 드리겠다고 결심했다면,

하루의 1/10인 144분 (2시간 24분)은 주님과 교제하는데 드려야 합니다.



자신을 드리는 대표적인 방법이 주님과의 교제를 위해 시간을 드리는 것입니다.

만약 일하는 것이 너무 바빠서 그 시간을 내기 어렵다면,

그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세상 일을 포기하고, 세상에서 얻는 이익을 손해봐야 합니다.



그 손해는 주님의 회계장부에 ‘주님께 드린 것’으로 계산 될 것입니다.



5. 주님의 회계장부에 올라간 헌물

사도바울은 “나는 선물을 바라지 아니하며 오직 너희 회계장부에 넘치게 될 열매를 바라노라 (빌4:17)” 라고 했습니다.



주님께 드리는 것이 회계 장부에 올라갑니다.

주님께 드리는 것은, 드리는 사람 자신을 위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회계장부에는 '내가 주님께 드린 재물' 뿐 아니라

주님께 '나의 몸'을 드린 것이 기록될 것입니다.



내가 주님께 나를 드리기 위해 세상 것을 버린 것은,

손해가 아니가 열매로 기록될 것입니다.



주님께 시간을 드리기 위해 10만원어치의 일을 포기 했다면,

그 10만원은 손실이 아니라,

내가 주님께 드린 헌물 10만원으로 계산 될 것입니다.

아니, 그 이상으로 계산 될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손해 본 것들을 아까와 하지 맙시다.

주님은 그것들을 회계장부에 계속해서 올리고 계십니다.

그것들은 훗날 회계장부에 넘치게 될 열매가 될 것입니다.

그것들은 세상에서 손해 본 그 사람이 훗날 받을 보상입니다.



[관련구절]

- 즐거이 내는 자

* 고후9:7 저마다 자기 마음속에 정한 대로 낼 것이요, 마지못해 하거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거이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 자원하는 마음

* 고후8:12 먼저 자원하는 마음만 있으면 사람이 가진 것에 따라 주께서 그것을 받으실 것이요, 그가 갖지 아니한 것은 받지 아니하시리라.



- 몸을 드리는 것

* 롬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긍휼을 힘입어 너희에게 간청하노니 너희는 너희 몸을 거룩하고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살아 있는 희생물로 드리라. 그것이 너희의 합당한 섬김이니라.



- 몸과 영으로 영광 돌리라

* 고전6:20 주께서 값을 치르고 너희를 사셨느니라. 그런즉 하나님의 것인 너희 몸과 너희 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나오고...

* 롬11:36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나오고 그분으로 말미암으며 그분께로 돌아가나니 영광이 그분께 영원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 균등의 원리

* 고후8:14 다만 균등의 원리를 따르려는 것이니 곧 이제 이번에는 너희의 넘치는 것으로 그들의 부족함을 공급하고 또한 그들의 넘치는 것으로 너희의 부족함을 공급하여 균등하게 하려는 것이라.



- 자신을 드리다

* 고후8:5 그들은 우리가 바라던 것과 달리 이 일을 행하되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에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

 

- 세상에 동화되지 말고...

* 롬12:2 너희는 이 세상에 동화되지 말고 오직 너희 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그 선하시고 받으실 만하며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입증하도록 하라.



- 회계장부에 넘치게 될 열매

* 빌4:17 나는 선물을 바라지 아니하며 오직 너희 회계장부에 넘치게 될 열매를 바라노라.



[성경비교] 고후9:7

KJV와 NIV가 사용한 단어들



1. Every man (모든 사람은 저마다) : Each man (각각)

2. purposeth (정하다, 결심하다) : decided (결정했다)

3. grudgingly (인색하게) : reluctantly (마음 내키지 않는)



4. necessity (필요) : compulsion (강요 아래, 강제적으로)

KJV는 necessity 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흠정역, 한킹은 ‘억지로’ 로 번역하여 ‘억지로 하지 말지니’ 라고 했고,

한국어 권위역은 ‘필요’로 번역하여 ‘필요에 의해 내지 말아야 한다’ 라고 했습니다.



NIV는 compulsion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under compulsio 이란 표현은 ‘강요 아래, 즉, 강제적으로’의 의미입니다.



5. 콜론(:) for : 콤마(,) for

KJV는 콜론(:) for 를 사용했고, NIV는 콤마(,) for를 사용했습니다.

한국어 권위역은 '왜냐하면, ~때문이다'로 번역했지만, 다른 성경들은 번역을 빠뜨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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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지옥은 존재하는가?

 "여러분, 이 극장에서 지금 화재가 발생했으니 빨리 질서있게 나가 주십시요"라고 말하자, 청중들은 박수를 치면서 참 잘 웃긴 다고 즐거워했습니다.

그러자 코메디안이 다시 나와서, "아니 여러분, 정말 이 극장에 불이 났으니 빨리 나가셔야 합니다." 하고 심각하게 말을 해도 여전히 웃기는 말로만 듣고 좋아하다가 많은 사람이 불에 타 죽었다고 합니다.

오늘날도 가장 심각하게 들어야 할 설교가 지옥에 관한 설교인데, "지옥"하면 웃기는 말이나 농담으로 들으려고 하는 세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러자 지옥에 관한 설교를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보다 더 심각하고 중요한 설교가 어디 있겠습니까? 목사는 교인들이 듣기 좋아하고 감칠맛 나는 설교만 할 수 는 없습니다.

의사는 환자가 싫어해도 주사를 놓아야 할 때는 놓고, 아파하고 고통스러워해도 칼로 째야 할 때는 째고 수술을 해야 하는 것과 같이, 목사도 듣기 좋은 설교만 할 수는 없습니다.

인기가 좋고 흥미가 없어도 "지옥"에 관한 설교를 해 주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 니다. 딕슨 박사(Dr.A.C.Dixon)가 말하기를, "만일 우리가 강단에서 지옥에 관한 설교를 더 많이 했더라면 우리 사회에서 지옥과 같은 현실이 더 적어졌을 것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옳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도덕적으로 부패하고 도덕적 질병이 잘로 심각해 지는 것은 지옥의 의미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지옥에 관한 설교를 분명히 해주었더라면, 성도들이 더 많이 전도했을 것이며, 더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구원받았을 것입니다. 오늘날 목사들과 교인들이 지옥의 존재를 분명히 믿고, 예수를 믿으면 영생을 얻어 천국에 가고 안 믿으면 멸망받아 지옥의 형벌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을 믿는다면, "교인 숫자만 많으면 무엇하느냐?"는 말을 할 수가 있을까요? 결코 없으리라고 봅니다.

천국과 지옥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기독교신앙의 근본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확신을 갖고 전해야 됩니다.

1.지옥은 존재하는가?

사랑의 하나님의 어떻게 사람을 그 고통스러운 지옥에 보낼 수가 있느냐고 흔히들 말합니다. 지옥은 애초에 사람을 위해 예비된 곳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25장 41절에, 지옥은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곳"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지옥은 천사장이 하나님을 반역하고 인간을 괴롭히는 마귀들을 위해서 예비된 곳인데,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마귀를 쫓아가다가 함께 지옥의 형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교양있는 여자가 목사님께, "나는 지옥의 사상 같은 것은 싫어합니다"라고 하더랍니다. 목사님은 그 말씀을 듣고, "옳습니다. 사람들이 형무소를 싫어하고 전기의자나 교수형 같은 사형을 싫어하지만, 어쩔수 없이 정부에서 만들어 놓은 것과 같습니다"라고 대답해 주었다고 합니다. 최후의 심판은 반드시 있게 마련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후에는 심판 있으리니"(히 9:27)라고 말씀하신대로, 사람이 죽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임과 같이 죽은 후에 심판이 있는 것도 피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농사를 짓는 사람이 거름주고, 김 매고, 비료줘서 농사짓고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가을에 반드시 타작하여 알곡과 쭉정이를 갈라? 놓는 때가 있는 것과 같이, 최후에 하나님께서 불순종한 모든 세상 사람들을 심판하셔서 지옥의 형벌을 주시는 때가 있는 것입니다. 불란서의 무신론 철학자 볼테르(Voltaire)는 100년 후에는 성경이 다 없어진다고 호언장담하며 무신론의 책자를 많이 출판했는데, 도리어 그가 죽은 후에 그의 집은 성경을 보급하는 성서공회가 되어 성경책이 산더미처럼 쌓여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볼테르는 죽어갈 때, "나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버림을 당하였구나! 의사여, 나를 6개월마 더 살게해 주십시요. 그리하면 내 보물의 절반을 주겠고"하고 말했습니 다. 그때 의사는, "당신은 6주간도 못 살겠소" 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가 병중에서 죽음에 임박하자 극도로 고민하여 흉하게 떨어서, 돌보던 의사가 정신을 못차렸다고 합니다. 그는 최후에, "나는 지옥에 가노라"고 스스로 말하며 죽었습니다. 프랜시스 뉴톤(Francis New- ton)이라는 무신론자는 임종시에, "나는 영원히 정죄받았구나! 하나님이 나의 원수가 되었으니 누가 나를 구원하리요? 아! 지옥과 저주의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내가 받았노라"고 말하며 절명했습니다. 토마스 스코트경(Sir Thomas Scott)은 죽을 때에 말하기를, "나는 이때 까지 하나님도 없고 지옥도 없는 줄 알았노라! 나는 전능자(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 의하여 멸망으로 들어가는구나!"라고 하였습니다. 페리콜드(Perigold)라는 무신론자는 임종시에 심한 고통을 받으면서, "나는 영원한 정죄 받은 자의 고통을 받으면서, "나는 영원한 정 죄 받은 자의 고통을 받노라!"고 말하였습니다. 이상의 예보다 더욱 확실한 것은, 거짓없는 진리의 말씀인 성경이 여러차례 강조해서 지옥의 실재에 대해 말씀해 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에는 천국에 대한 말씀보다 지옥에 대한 말씀이 더 많습니다. 성경에 한두번 말 씀하셨어도 반드시 이루어졌는데, 그렇게 많이 강조하신 말씀이 이루어지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막 9:48)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도 지옥이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환란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중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여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살후 1:7-9)라고 말했습니다. 베드로도 지옥은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벧후 2:4)라고 말했습니다.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계 20:15)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지옥이 없다고 말해도, 예수님과 사도들의 말씀을 반대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법을 어긴 자들을 위하여 감옥과 사형과 형벌이 있음과 같이, 하나님의 법을 어긴 자들을 위해서 형벌과 지옥이 있다는 것은 옳고 당연 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지옥을 믿지 않는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죽은 뒤 5분도 못되어 그것을 믿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늦은 때입니다. 2.지옥은 어떤 곳인가? 어떤 사람은 지옥은 한낱 묘사요, 그림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옥은 인간의 말로 표현한 것보다 못지 않게 고통스러운 곳임을 명심해야 됩니다. 실제는 그림이나 묘사보다 뜨겁습니다. 지옥은 어떤 말의 표현보다 훨씬 더 고통스럽고 뜨거운 곳입니다. 지옥에서 고 통당하는 자의 기억이 더 뜨겁게 할것입니다. 강도는 지옥에서 그가 죽인 희생자의 얼굴을 기억하고, 투전꾼은 자기가 속여먹는 사람을 기억하고, 그리스도를 믿기를 거부한 사람은 믿을 수 있었던 기회를 기억하고 더 괴로워 할 것입니다. 죄는 불의 뜨거움을 더할 것입 니다. 야심 또한 불의 뜨거움을 더할 것입니다. 그러면 지옥은 어떤 곳일까요? (1)꺼지지 않는 불이 있는 곳입니다. 영원히 꺼지지 않으며, 벌레 한마리도 죽지 않는 곳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마5:22계20:10,14,15218,막9:48,사66:24). 얼마나 고통스러운 곳인지 슬피 울 며 이를 가는 곳이라고 말씀했습니다(마25:30). 설혹 육신적 감각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정신적 고통은 육신의 고통 못지 않게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그러길레 정신적 고통으로 독약을 먹고 자살하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누가복음 16장에 기록된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음부에 떨어진 부자는 너무너무 목이 타고 고통스러워서, 자기 집에서 얻어먹던 나사로를 보내어 손가락 끝에 물 한방울만 찍어 자기 혀를 서늘하게 해 달라고 아브라함에게 사정했으나, 그나마도 허락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자 어차피 이 고통스러운 곳에 왔지만 집에 남아있는 다섯 형제에게 나사로를 보내어 이곳에 오지 않도록 증거하게 해 달라고 애원하였습니다. 얼마나 뜨겁고 목이타고 고통스럽길래 그랬겠습니까? (2)피할 수 없는 곳입니다. 지나간 주간에 부흥회 인도하러간 교회의 목사님이, "피곤 한데 사우나 목욕이나 가서 땀을 좀내자"고 해서 같이 갔다가 말 한마디에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뜨거운 도크에 들어가서 땀을 내다가 너무너무 뜨거워서 참다 못해 뛰어나가면서, "예이, 여기서는 참다 못 참으면 뛰쳐 나갈수나 있지, 지옥에 한번 들어가면 아무리 뜨거 원도 나갈수도 없으니..... 그것도 영원히"라고 하는 말에 큰 은혜를 받고, 그 고통스러운 곳에 안가도록 지옥에 대한 설교를 또 한번 해야 되겠다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이 세상으로부터의 도피는 죽음으로 가능하지만, 지옥에서는 출구가 없습니다. 어떤 이는 세상이 괴롭 다고 자살하는 이가 있는데, 그것은 후라이판이 뜨겁다고 영원한 불에 뛰어드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샌프란시스코(Sanfrancisco)의 금문교에서 내려다보면 바다 한가운데 섬이 하나 있는데, 그 섬에 감옥이 있습니다. 왜 그곳에 감옥을 지었느냐 하면, 종신형을 받은 사람 들이 탈출하지 못하게 하려고 그곳에 지었다고 합니다. 그곳에 탈출한다고 해도 물살이 세서 헤엄을 못치고, 헤엄을 쳐도 물이 차서 심장마비가 걸리거나, 아니면 헤엄쳐 나오다가 상어밥이 되기 때문에 탈출한 생각을 못한답니다. 그래도 그 감옥 창설이래 한 사람인가가 탈출해서 살아났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옥은 도망칠 수 있는 문도, 길도 영원히 없습니다. (3)끝이 없습니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젠가는 속박의 생활이 끝나리라는 소망을 가졌고, 후에 실제로 모세가 나타나 약속의 땅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감옥에 힌 사람도 언젠가는 자유의 몸이 되리라는 소망을 가지며, 병원의 병자도 회복될 희망을 가지고, 또 회복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옥의 고통은 영원히 끝이 없습니다. 어떤이는 " 이 짧은 생애 동안에 지은 죄로 영원한 형벌을 주는 것은 옳지 않다" 말하지만, 그러나 형벌 은 죄의 성질에 따라서 부과하는 것이지, 그 죄를 범한 시간에 비례하지 않습니다. 어떤 강도는 삼초동안에 살인하고, 어떤 강도는 세시간 걸려서 사람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범죄한 시간에 따라 죄와 형벌이 작거나 커지지 않습니다. 모든 죄 중에 가장 큰 죄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우리를 구원하려고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어 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죄입니다. 태평양의 바닷물을 참새 한 마리가 입으로 한모금씩 옮겨 대서양을 채운다고 합시다. 태평양의 물이 다 마르기까지 얼마나 긴 세월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러나 영원에 비하면 이것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지옥에서 영원히 지낸다는 것이 얼마나 비참합니까? (4)모든 종류의 사람이 섞여서 지냅니다. 지옥에는 모든 계급, 모든 종족, 모든 피부색깔을 가진 사람들이 다 모이는 곳입니다. 세상에서 저급한 인간을 상대하지 않던 사람도 지옥에서는 최하급 저질의 인간과 함께 지내며 고통을 받아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21장 8절은 지옥사회의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가를 설명해 줍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의 술객들과 우상숭배 들과 모든 거짓말하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여러분, 혹시 나는 거기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할지 모르겠으나, "믿지 않는 자"도 극악한 죄인들과 함께 불못에 던지운다고 했습니다. 세상에서 크게 보이는 죄만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산 사람은, 세상적인 표준에서 훌륭해 보여도 지옥에 참여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크리스챤 아내를 가진 사람도, 좋은 크리스챤 부모를 가진 사람도,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의 구원을 배척하고 진심으로 믿지 않은 사람은 지옥에 갑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모르고, 자기의 선행과 공적을 의존했던 사람은 다 지옥에 참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안믿고 영접하지 않은채 죽으면 오늘의 설교가 마지막 초청의 기회가 될른지 모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의 구주로 영접하여 구원 받아 한 사람도 지옥의 형벌을 받지 않기를 바랍니다. 예수를 믿으면 영생, 천국이요, 안 믿으면 멸망이요, 지옥입니다. 일찌기 기독교 역사상 하나님이 크게 들어쓰신 목사님들은, 하나같이 믿음으로 지옥불을 바라보며, 멸망해가는 영혼을 하나라도 더 구원하려고 불타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한 사람들입니다. 참으로 성령을 받은 사람은 예수님을 생명의 구주로 믿고 천국과 지옥을 확실히 믿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천구과 지옥에 대한 확신을 주신 것에 참으로 감사합니다. 그 신앙 때문에 우리 교회가 끊임없이 부흥되고, 없는 가운데서 세 계적인 성전을 건축하게 되고, 국내 외에 쉴 새 없이 복음을 전하게 해 주신다고 믿습니다. 지옥이 없다면 반드시 예수 믿으라고 할 필요도 없고 목사노릇 할 필요도 없습니다. 지옥으로 떨어지는 영혼을 속히 속히 구원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아멘-

출처:금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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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3월 주일예배대표기도문

거룩하신 하나님 !

아직도 주님을 본 받기에 힘겨워하는 저희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주님의 십자가

사랑만 붙들고 어두운 세상을 십자가로 밝히며, 복음의 빛으로 살아갈 수 있는 저

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특별히 간구하옵기는, 이 나라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갈수록 나라가 어수선

해지고 경제적 불안이 심화되고 있사오니 평화의 왕이 되시는 주님께서 이 민족을

치료하시고 건지시기를 간구합니다. 저희로 하나님을 바라고 섬길 수 있는 귀한 믿

음을 허락하시고, 저희의 어리석음으로 하나님을 부인하고 저주하는 범죄를 저지

르지 아니하도록 지혜로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일생을 승

리할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아직도 사단은 성도를 넘어뜨리려고 온갖 것을 동원하여 몸부림치고 있나이다.

십자가 신앙으로 강하게 무장함으로써 마귀의 궤계를 능히 물리칠 수 있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대를 정복하는 십자가의 군병이 되게 하옵소서. 이곳에 하나님께

서 허락하신 성전을 세우셨사오니 저희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며 교제하는 귀한

시간이 되게 하시고, 저희의 모든 것이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의 성호를 찬양

할 수 있는 귀한 성도들이 될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예배를 위해 돕는 손길들을 기억하사 축복하시고 증거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은

혜를 주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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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주일 낮 예배 대표기도문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 

거룩한 주님의 날, 택하시고 예정하신 자들을 불러주시어 경배와 찬양과 기도와 예배로 모든 영광과 존귀를 귀하신 주님께 드릴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하여 온 세계가 수고와 근심가운데 있음에도, 슬픔과 낙망가운데에서도 소망과 간구로 영혼들을 모이게 하시고, 생명의 말씀으로 강건하게 하여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먹고 마시며 주님을 멀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과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인줄을 알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하시고, 측량할 수 없는 사랑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려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사랑과 자비와 은혜가 풍성하신 아버지 하나님,

지금 이 시간 코로나 바이러스가 땅을 삼키고 있으며, 세계 거민들이 쇠약하고 쇠잔해져 온 대륙으로 확장하는 바이러스를 이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간 증가하고 있는 사망자로 말미암아 마음이 즐겁던 자들이 탄식하며, 이 땅에 기쁨이 그치고 울음이 기성하고 있나이다. 

 

지금 이 시간, 우리의 간구의 기도가 우리의 염려와 근심과 눈물을 마르게 하여 주시옵소서.

지금 이 시간,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하늘 문을 열게 하시어 무슨 독을 마셔도 해를 입지 않는 강건한 역사를 더하여 주시옵소서.

지금 이 시간, 자복하며 통회하는 주의 백성들 머리 위에 주의 은혜를 더하여 주시고, 권능과 권세로 덧 입혀 주시고, 사랑과 평강으로 충만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지금 이 시간, 제단에서 선포되는 말씀마다 아멘으로 화답하게 하여 주시고, 화답하는 자마다 강건의 역사가 넘치게 하여 주시옵소서.

지금 이 시간, 코로나 바이러스로 묶여있는 이 나라와 이 민족, 이 땅의 모든 거민들이 묶임이 모두 끊어지고 확진 받은 모든 자들이 생명의 역사로 온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지금 이 시간 갈한 영혼들 위에 은혜의 단비를 더하시어 갈라진 심령들이 봉합되게 하시고, 힘 있는 자들과 힘없는 자들, 많이 가진 자들과 못 가진 자들이 서로 하나 되어 나누고 위로하는 놀라운 역사를 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신 아버지 하나님

이제 이 한주도 사랑과 은혜의 한 주가 되게 하시고,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며 받은 사랑과 은혜를 나누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이 한주도 코로나 바이러스로 휴교되고, 휴업되는 학교와 기업들의 형편을 돌아보시어 그들의 학업에 부족함이 없게 하시고, 그들의 기업이 물질의 어려움이 사라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코로나 바이러스로 상한 심령들을 위로하여 주시고, 복음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시고, 세상 것이 아닌 하늘의 신령한 것을 위하여 기도하며 달려가는 귀한 열매의 역사가 차고 넘치게 하여 주시옵소서. 

코로나 바이러스로 이 땅의 모든 거민들이 두려워하고 있으며, 또 확진자와 사망자가 확장되고 있사오니 속히 백신이 준비되게 하시고, 강건한 믿음으로 바이러스를 이기는 놀라운 표적을 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강단에 세우신 하나님의 사자 여재창 목사님을 기억하시어, 기름부음을 더하여 주시오며, 권능과 권세의 입술로 생명의 말씀을 선포하게 하여 주시오며, 듣는 자마다 아멘으로 화답하여 위로부터의 축복이 차고 넘치게 하여 주시옵소서.

 
교회 각 기관과 재직들과 섬기는 손길들을 기억 하시옵고, 섬기는 손길 손길마다 주께서 예비하신 축복을 더하여 주시오며, 믿는 자의 권세가 넘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귀한 은혜와 영광으로 충만하여 주심에 감사드리며, 이 모든 영광 홀로 받으시옵소서.

모든 것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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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주일예배대표기도문

오래 참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을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 자녀의 권세를 주심으로 기도하고, 찬양하며, 예배하고, 전도하게 하심을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의 신앙고백이 죽어가는 이웃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능력이 되게 하옵소서.

저희에게 열매가 있게 하시려고 은혜를 주시고, 은사를 나누워 주심으로 아버지의 역사하심에 동참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저희들을 통하여 선한 열매가 맺히게 하여 주시옵소서.
   
허물 많은 저희들을 물리치지 않으시고, 오늘도 하나님의 존전에 나와 용서받게 하시고, 은혜 받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저희들이 변화 받아 민족과 교회와 가정을 변화시키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오늘 드리는 예배를 받아주시옵소서. 성가대의 찬양에 능력이 있게 하시고, 저희의 드리는 찬양이 하늘 문을 열게 하옵소서. 
   
오래 참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도 오래 참음으로 전도의 열매를 맺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오늘 예배를 인도하시며 말씀을 증거하시는 목사님과 함께하시며, 목사님의 목양의 사역이 승리할 수 있도록 축복하시고, 가정과 삶의 터전 위에 하나님의 축복하심이 함께 되게 하여 주옵소서 
  
증거 되는 말씀마다 능력이 있게 하셔서, 우리의 심령 골수를 쪼개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붙들어 주옵소서.
   
그리스도의 인격을 사모하게 하셔서 영적으로 인격적으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성장하게 하옵소서. 
   
성도들의 질고를 아시는 아버지께서 예배에 은혜를 주셔서 위로가 넘치게 하시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치료받는 기적을 주옵소서. 한주간도 믿음으로 지켜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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