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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예배 / 예식 설교

 

 

 

 


성경봉독     고린도전서 13:4-13   행복한 가정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13:13)

 


서론

1. 먼저 이렇게 혼인 예배를 들릴 수 있게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무엇보다도 귀한 가정 대사에 제가 주례를 맞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축하드립니다.

 그간 이 결혼 예식이 있기 까지 여러 모양으로 도와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특별히 양가의 부모님의 사랑의 수고에 감사와 찬앙을 드립니다.

2. 특별히 여기 신분00는 00 선생님과 00 여사님의 삼녀로써 어릴 때부터 정숙함으로 일등 신부감으로 잘 키워주셨습니다.  넘 예쁘고 축복이 됩니다. 자랑스럽습니다.

3. 또한 여기 신랑 000 군은 000 선생님과 000 여사님의 차남으로써 최고의 엄하면서 합리적인 사람으로 키위주시고 더구나 어릴 때부터 신앙으로 자라난 참신한 일등 신랑감입니다. 

 


4. 이런 가문과 가정에서 제가 더 할말이 없지만 자리가 자리인 만큼 오늘 하나님의 말씀으로 행복한 가정이 되는 비결 몇 말씀드리고져 합니다.

 


첫째, 하나님을 잘 믿는 가정이 행복한 가정입니다.

 


  오늘 성경 고린도전서에는  바울이라는 하나님의 사람이 다메셋이라는 곳에서 예수님을 만나서 변화 받고 자신이 기도가운데 개척한 고린도 교회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 곳에 담긴 메시지는 사랑이라는 제목이면서 하나님을 잘 섬기는 가정이 되어야 한다는 원리가 있습니다

   두 분은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을 잘 섬기는 가정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잘 섬긴다는 것은 먼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믿는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두분은 그런 신앙을 고백한 그리스도인 입니다. 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잘드리는 것입니다. 또한 매일 하나님께 기도하는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세우신 몸된 교회를 잘 섬기는 것입니다. 요즘 결혼을 하고 2,3년지난면 몇 번의 고비가 있습니다. 그때 신앙 곧 하나님을 섬기는 가정은 해결책이 있습니다. 문제의 정답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없는 가정은 수숩이 어럽습니다.

더불어 위로 하나님을 믿는 것 처럼 서로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믿음이 깨지면 모든 것이 깨집니다. 저사람이 콩으로 메주를 쑷대도 나는 믿는다는 확신을 가질때 좀 늦어도 바쁜가보다 하지... 믿음이 없으면 별 생각을 다하는 것입니다. 두분은 이런 행복한 가정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립니다.

 


둘째는, 소망이 있는 가정이  행복한 가정입니다.

 


  사도 바울과 고린도 성도들에게 좀 힘들일이 어려운 일이 있었지만 희망 소망 을 가질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두분이 과거 지향적인 사람이 아니라 미래지향적인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좀 어려워도 내일의 희망있고 비젼을 있다는 것을 바라보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자녀에 대한 소망 사업에 대한 비젼 헌신에 대한 포부를 가지시고 위를 바라보는 두분이 될 때 행복의 파랑새는 이집에 계속 머물을 것입니다.

 

그리고  결혼은 하면 관계가 더 넓어 집니다. 이제는 혼자가 아닙니다. 결혼 전에는 혼자의 관계가 이제는 두 셋 넷으로 복잡해 집니다.  특별히 양가의 부모님를 잘 섬기는 부부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행복입니다.  낳으신 수고 기르신 수고 아무것도 입지 않았을 때 수치를 가려주신 분이 부모님입니다. 양가의 부모님의 관계 어르신들과의 관계가 더 좋아 지는 것이 행복입니다.  부모하고 원수가 되고  부모님 않보는 사람 모든 것 다 가졌으나 행복하고는 거리가 멉니다. 그리고 친구 친척 동료 교우 이웃에게 진정한 장미의 향기가 풍기는 두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 사람들에게 본이 되는 가정이  행복한 가정입니다.

 


세번째로,  사랑이 있는 가정이 행복한 가정입니다.

 

  여기 사도바울이 세우신 고린도교회와 성도의 관계에서 최고가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는 누구나 머물고싶고 함께 하고 싶으나 미움이 있는 곳에는 다 피라고 싶어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관계가 부부관계입니다. 그 속에 결혼은 정신적 육체적 경제적으로 부모를 떠나는 독립선언입니다. 그런 뜻에는 의무가 있는가 하면 책임도 있습니다. 이제는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마음도 하나 몸도 하나 주머니도 하나 집도하나 침대도 하나입니다.

 그 하나됨을 이루어 가는 진한 에너지가 있는데  바로 사랑입니다. ‘남편은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함 같이하라입니다. 먼저 사랑하는 남편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와 허물을 덮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이해 합니다. 또 신부는 사랑만 받는 관계가 아니라 복종하라 했습니다.  여기서 복종은 내 의견이 다르드리도 따르는 것입니다. 순종은 내 의견이 같을 때 따르는 것이라면 복종은 내 의견이 다르드라고 하나님이 세우신 남편이기에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아내를 사랑하는 말씀은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심 같이 입니다. 자기 생명까지 내어 주신 피의 사랑입니다. 아내를 위해서 목이라도 내어 놓는 아가폐적 사랑입니다. 이유가 어떠하든  논리적으로 맞던 틀리던 무조건 두분이 이런 복종과 사랑의 모습으로 살아갈 때 행복합니다. 여자를 힘으로 지배하라고 하지 말고 사랑으로 하고.. 남자를 말로 이기려고 하지말고 순복으로 이기는 아름다운 모습들이 되어서 행복이 뚝뚝 떨어지는 가정이루시기를 바랍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사랑이니라  아멘

 


끝으로, 행복한 가정을 이르는데 저와 오신 여러분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저는 주례를 맡아 달라고 찾아오는 젊이들에게 반드시 두 가지 질문에 답을 하면 약속을 합니다. 하나는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영접한 사실이 분명하지를 묻습니다. 아니면 믿게 하고 예수를 않믿는다고하면 노합니다.  또 하나는 절대로 어떤 일이 있어도 죽음이외엔 갈라서는 일이 없다고 약속한다고 하면 주례를 응답합니다.

 

  제와 여기 계신분들이 바로 지금까지 이 두사람 곁에서 여러모양으로 함께 하셨던 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는 결혼했기에 끝이 아니라 더욱 관심을 가지고 기도해 주시고 응원해 주시고 책망해 주시기고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증인석에 앉아 계셨던 분들이기에 어떤 일이 있어도 행복한 가정을 꾸미는 대 일조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특별히 신분의 가정에서 딸을 보낸다고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좋은 사위 아들 하나 얻었다고 생각하시고 신랑의 가정에서는 새 사람이 들어 왔으니 어떻게 하나 보자하고 감시 카메라 달라 놓치 말고 내 딸이라고 이제는 내 식구다 생각하시고 예쁘게 봐주시기를 바랍니다.

 


 모두 이 두 사람의  행복한 가정이루고 살기 바라는 마음으로 다같이 힘찬 응원에 박수를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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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예배설교 / 이 세대를 바라보시는 예수님

 

 

 

 

누가복음 19장 41∼44절
 
성령으로 거듭나 변화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눈물을 아는 중보자, 곧 예배자입니다. 변화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부활 생명, 부활 영광의 모습을 보는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이 바뀝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 땅을 바라보시며 보좌 위에서 흘리는 하나님의 생명수(눈물)를 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성을 보고 우셨습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41절) 예수님이 예루살렘성에 들어오실 때 많은 사람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습니다. 그들은 “호산나, 찬송하리로다”라고 소리를 지르면서 환영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우신 겁니다. 눈앞에 펼쳐진 예루살렘성은 수많은 사람으로 온통 축제 분위기였습니다. 예수님은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는 메시아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주님을 나라를 세울 왕으로 오해하고 환영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 보시기에 얼마나 안타깝고 속상하셨겠습니까.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면 우리도 예루살렘성 사람들과 똑같이 행동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다윗왕 때부터 예배와 기도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마음을 몰랐습니다.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눅 19:42)

죄를 회개하면 참자유와 소망이 되시는 예수님이 오십니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게 되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을 얻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계속적인 외침에도 불구하고 죄가 잉태한즉 사망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결국 재앙이 되어 예루살렘이 무너진 것입니다.

지금 이 세대는 어떻습니까. 교회의 모습에서, 하나님이 세운 지도자와 교수, 성도들의 모습에서 빛의 자녀로서 열매가 나타나고 있습니까. 주님은 오늘도 계속적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기회를 주시고 계십니다. 주님은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살전 5:22).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의 모습은 크게 두 가지로 구별됩니다. 그것은 변화 받지 못한 육의 사람과 변화 받은 성령의 사람입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 5:19∼21)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2∼2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도 예수님은 이 땅을 바라보시면서 눈물을 흘리고 계십니다. 이제부터라도 주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드립시다. 하나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는 구별된 거룩한 성도가 되어 시대를 분별하고 생명을 선포합시다. 그런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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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예배설교] 신앙을 이어가는 방법

 

 

 

 

찬송 :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314장(통 511)
 
신앙고백 : 사도신경 
 
본문 : 느헤미야 10장 28∼39절 
 
말씀 : 오늘 본문에서 유다 백성들은 자신과 조상들의 잘못을 다 고백한 뒤 다시는 같은 잘못을 범하지 않겠다고 맹세합니다. 29절을 보십시오. “다 그들의 형제 귀족들을 따라 저주로 맹세하기를.” 이 맹세를 어기면 저주도 기꺼이 받겠다는 아주 단호한 맹세입니다. 유다 백성들은 어떻게 살기로 결단하고 있습니까. 

먼저 이방인과 결혼하지 않을 것을 맹세합니다. 성경의 역사를 살펴볼 때 이방인과 결혼하는 문제로 나라가 위기에 처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페니키아 출신 이세벨이 이스라엘 왕 아합에게 시집오면서 얼마나 나라 안에 우상숭배가 극심해졌습니까. 솔로몬도 외교적 수단으로 이방여인들과 결혼하면서 결국 자신의 영적인 상태가 혼미해지고 타락의 길로 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우리가 영적으로 타락하지 않으려면 이방인과 결혼해선 안 되겠다’는 결심을 하기에 이릅니다. 

오늘날 불신자와 결혼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불신자와 결혼하지 말라는 것은 단순히 신앙적 차이가 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결혼은 가정 안에서 작은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누구신지 모르는 사람과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세울 수 있겠습니까. 신앙이 다음 세대로 이어지지 않을 가능성도 큽니다. 

유다 백성들은 안식일과 안식년을 지키겠노라 맹세합니다. 당시에 주민들이 유대인으로만 구성돼 있었다면 모두가 율법을 지킬테니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이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같이 사는 이방인들이 안식일에도 물건을 팔았고, 유다 백성도 그 물건을 사왔던 것입니다. 때문에 유다 백성들이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기 위해 물품이나 곡물을 사지 않겠노라고 선언합니다. 안식일을 구별된 하나님의 날로 지키겠다는 약속인 것입니다.

‘유대인이 안식일을 지키는 게 아니라 안식일이 유대인을 지켜줬다’는 말이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예로부터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는데 그렇게 안식일을 지키려고 노력한 결과 자기들의 정체성을 지킬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 믿음이 대대에 전해지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합니까. 교회를 통한 믿음생활,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려는 노력이 계속돼야 합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에 교회와 예배에 소홀히 하면서 주관적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유다 백성들이 이방인과 결혼하지 않고, 안식일을 지키겠노라 했던 결단처럼 오늘 우리도 우리 믿음을 대대에 계승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가진 이 신앙이 대를 이어 전수되기를 원합니다. 주의 날을 힘써 지킴으로 우리의 신앙이 자녀들에게 이어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주기도문

한성훈 목사(수원 살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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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주일 예배 설교 (십자가만 자랑하라)

 

 

 

 


   "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라디아서 6:14).

 


   필자는 많은 독서를 한 사람이라 말할 수는 없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세상의 어떤 책도 성경만큼 한가지 주제를 분명히 증거하는 완벽한 책은 없다고 생각한다.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한가지 분명한 주제를 통해서 인생을 깨우치고 있다.

   어떤 이는 "성경은 어려워서 읽지 못하겠다" 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어려운 책이 아니다. 어찌 아비가 자식에게 알아듣지 못하는 어려운 말을 하는자가 있겠는가? 하물며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서 자녀 된 인간에게 주신 말씀인 성경이 당연히 쉬워야 하지 않겠는가! 기독교 역사 2000년 동안, 특히 중세 및 근대 기독교가 일반인들의 성경 접촉을 막거나 혹은 성경을 어려운 책으로 가르쳐왔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이면 누구나 깨달아야 할, 또는 깨달을 수 있는 쉬운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면 성경의 주제는 무엇인가? 성경의 주제는 구원이요 구원의 성취는 십자가이다.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디모데후서 3:15).

   성경에서 십자가를 빼어버리면 성경은 당장에 쓸모 없는 휴지조각으로 전락해 버린다.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하여 성경은 쓰여졌다. 사도 바울은 이 놀라운 진리를 깨달은 후 뜨겁고 간절한 마음으로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고백했다. 십자가는 인류를 구원하는 유일한 길이다. 십자가는 인간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인간 누구도 십자가 앞에 나오지 않고 결코 하나님을 만날 자가 없다.우리 신앙의 시작도 십자가요 우리 신앙의 진행도 십자가요 우리 신앙의 아름다운 열매의 모든 능력도 십자가에만 있다. 인간이 사단과 싸워 이길 수 있는 모든 능력도 십자가에서만 나온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린도전서 1:18).

   진실이 이러할진대 우리에게 있어서 십자가를 믿고 증거하고 사랑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그러므로 사단은 갈보리 십자가 사건 이후 오늘날까지 줄기차게 십자가의 진리를 왜곡시키며 훼손하려고 대적하고 있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의 교회적 문제점들을 바로잡기 위하여 서신을 보내면서  마지막 결론의 내용이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필자는 갈라디아서의 주제들을 마감하려 함에 있어서 갈라디아서의 주제가 되며 결론이 되는 십자가의 역할에 대해서 몇 가지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로 십자가는 구원의 길이다. 거룩하시고 완전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본질적으로 거룩 그 자체이시기 때문에 죄를 무조건 용납하시거나 죄에 관여하시거나 죄인과 상종하실 수 없는 분이시다.

   인간이 멸망의 지옥에 가는 것은 하나님을 닮은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사단의 꾀임을 좇아서 죄인의 길로 들어간 까닭이다. 하나님은 본래 인간을 선하게 만드셨지만 인간이 타락의 길로 간 것이다(전도서 7:20). 창세기 1장 27절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 함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도 포함된다. 하나님이 인간을 이토록 악한 모습으로 만든 것은 절대 아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인간이 하나님(아버지)을 버리고 사단을 아버지로 섬김으로(요한복음 8:44) 사단을 따라서 포악해진 것이다. 사실 현재도 인간의 속성 깊은 곳에 선한(거룩한) 성품이 내재하고 있음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다.

   바울은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로마서 7:21)라고 고백하였다.

   이제 죄로 말미암아 더러워진 인간은 약간의 선한 성품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결코 나아질 수 없는 신분과 상태로 전락하여 버렸다. 만약 성경이 구약만 기록되고 그리스도의 실체를 나타내는 신약이 진술되지 않았다면 인간을 구원하는 길은 영원히 막혀버리고 전 인류는 멸망의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의 구원을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의 선물로 받아들이고 있다. 실제로 오늘날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거나 모르고 있는 자들이 영원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데살로니가후서 1:8).

   그러면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끊어진 인간들을 위하여 십자가는 무슨 역할을 하였는가? 그것은 주님이 십자가에서 구속의 사역을 완성하는 그 위대한 최후의 순간에 외치신 내용에 잘 나타나 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요한복음 19:30).

   여기에서 "다 이루었다" 하신 말씀은 무슨 뜻인가? 죄인을 구속하는 일을 다 이루었다는 뜻이다. 즉 헬라어로 "테텔레스타이" 란 단어로서 '다 갚았다'는 뜻이다. 인간이 갚아야 할 죄를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다 갚았다는 뜻이다.

   이것은 전 인류의 죄, 즉 창세 초기의 아담으로부터 마지막 인간까지의 모든 인간의 죄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여기 '갑'이라는 한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는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을 대적하며 현재 주님을 심히 모독하는 사람이다. 그는 십자가의 속죄를 안 믿을 뿐 아니라, 모르고 있다.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의 죄는 어떻게 되었는가? 그것은 간단하다.

   이미 2000년 전에 갈보리 언덕 십자가상에서 고통 중에 돌아가신 주님은 '갑'이라는 사람의 죄를 포함해서 모든 사람의 죄를 단번에 해결하셨다. 그런데 사람이 왜 지옥에 가는가? 그것은 그가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기보다 이 복음을 믿지 않음으로 지옥에 가는 것이다. 십자가는 모든 죄인을 의인으로 만든다. 더러운 죄인이 거룩해지는 것은 십자가의 길뿐이다. 이제 거듭난 자는 죄인이라 하지 않고 거룩한 의인이라 칭한다. 이제는 하나님과 상종할 자격이 주어진 의인이 된 것이다. 이것은 십자가의 속죄를 받아들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다(로마서 3:23~24).

 

   둘째로 십자가는 능력이다. 구원받은 신자는 어떻게 이 악한 세대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기쁘게 살아갈 수 있는가?

그것은 십자가의 능력을 의지함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신자가 구원받았을지라도 신자의 육체에는 여전히 죄의 속성이 있어서 신자를 괴롭힌다. 사단은 이 육체의 속성을 이용하여 신자로 하여금 기쁘고 즐겁게 생활하지 못하도록 역사한다. 그러나 십자가의 능력은 이러한 죄의 유혹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는 능력이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서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십자가에 달리신)를 바라보자"(히브리서 12:1~2).

   사단은 우리 육체의 속성 중 정과 욕심을 사용하여 우리를 죄 가운데로 인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의 죄의 근원은 정과 욕심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러나 육체의 정욕이 역사하여 우리의 신앙이 흔들릴 때 십자가 앞으로 나가면 불같이 일어나던 정욕이 사그라지고 신령한 그리스도인으로 회복 받게 된다.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고 성도를 용서하지 못하다가도 십자가의 사랑이 중심에 살아나면 저절로 용서하는 마음으로 변화된다.

   모든 평강의 근원도 십자가로 말미암은 것이다. 죄를 향하여 달려가기를 즐겨하는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사실을 묵상하기 바란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라디아서 2:20).

 

   셋째로 십자가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핍박이 따른다.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하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핍박을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쳤으리니"(갈라디아서 5:11).

   바울이 만약 할례와 율법의 행위를 전하였다면 핍박이 없었을 것이요 그러하였다면 바울을 통하여 죄인이 구원받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십자가가 전해지는 곳에는 구원 역사가 일어난다. 구원받는 자들이 십자가로 인하여 성장하며  용감하게 주님을 따르게 된다.

   이것은 사단이 가장 싫어하는 성령님의 역사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전하고자 하는 곳에는 반드시 사단이 핍박하며 자기의 종들을 동원하여 방해공작을 일삼는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은 훌륭한 종파, 큰 교회에 속하여 자신은 정통이라고 하여 다른 사람들을 힘부로 판단하고 핍박하며 스스로 정통적인 믿음의 소유자로 위로 받고 있는데 이것은 엄청난 자기 착각임을 알아야 한다.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사단은 하나님의 종들을 핍박하여 왔다. 성경을 자세히 보라. 항상 핍빅하는 자 편에 선 자들이 이단이요 거짓이었다.

   물론 오늘날 실제로 잘못된 이단이기 때문에 핍박받는 경우도 많지만 정상적인 하나님의 자녀들도 핌박받는 자 중에 있음을 성경이 가르치고 있다.

   핍박의 역사를 간단히 살펴보면 가인이 아벨을 핍박하였고, 이스마엘이 이삭을, 에서가 야곱을, 사울이 다윗을, 여러 잘못된 왕들이 선지자들을 핍박하였다. 예수님도 핍박 받고 이단으로 정죄받아 죽임을 당하셨으며 제자들도 대부분 이단으로 몰려 순교하였다.

   오, 독자여! 그대가 참된 진리 중에 있는지 아는 방법 중 하나는 그대가 지금 그리스도 때문에 핍박받는 자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교회사에도 보면 수많은 하나님의 종들이 핍박을 받았다.

   주님이 친히 말씀하셨다. "이(십자가 예수)을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태복음 5:10~12).

   분명히 말하거니와 성경의 역사나 교회의 역사는 정상적인 하나님의 종들이 심한 핍박에 시달렸음을 잘 대변하고 있다. 오늘날에도 기독교의 거대한 조직들이 참된 하나님의 교회들을 자기 교인들을 지킬 목적으로 얼마나 정죄하고 있는가? 이 핍박은 주님 오실 때까지도 계속될 것이다.주님이 친히 말씀하신 바 "좁은 문"의 비밀을 독자들은 알기 바란다.

   끝으로 바울이 탄식으로 경고하고 있는 말씀이 있다. 참된 하나님의 교회가 어떻게 변질 되는가 하는 문제다. 그것은 "핍박을 면하려는 생각"으로부터 변질 되는 것이다.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 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함 뿐이라"(갈라디아서 6:12).

   핍박을 면하기 위하여 모양을 내고 타협을 하고 안일한 생활을 추구할 때 참 진리는 점점 변질되어 가고, 성령의 능력은 점점 떠나간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면서 복음의 초창기에 온갖 핍박을 정면으로 대적하며 담대하게 나아갔을 때 능력과 성령 충만이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이러한 경험을 회상하는 성도들을 필자는 많이 보아왔다.

   그러나 핍박을 면하려고 부드러움과 평안을 추구하며, 여러 가지 지혜와 학문적 방법이 동원되고, 종교적 형식을 흉내내며, 이러한 것들을 조금씩 조금씩 용납하는 동안 숫자는 늘어날지라도 이미 교회는 변질되어가고 성령의 능력은 소멸되어 가는 것이다. "이슬비에 옷 젖는다"는 우리의 속담처럼 우리가 순종하던 성경의 진리가 놀랍게 변질될 때 주님이 얼마나 슬퍼하시겠는가?

   필자는 생각하건대 전도에는 특별한 방법이 없다고 본다. 정상적 전도라면 십자가의 본질을 분명하고 담대하게 전하는 것이다. 바울도 전도는 미련한 것이라고 하였다(고린도전서 1:21). 비록 핍박이 온다 할지라도 우리는 십자가의 도를 앞세우고 담대히 전진하여야 한다. 핍박이 더 일어난다 할지라도... .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베드로전서 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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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원고 /  인생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인생이란 미래를 준비하는 기간이다.  벧후 1:1-11

올림픽 경기 제밋게 보고 보시나요?   지난시간 우리들도 올림픽 선수들처럼 인생을 경주 선수와 같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도핑검사에 걸려 출전 정지를 당하고 메달을 탔어도 박탈되는 것을 말씀 드리면서 신앙생활도 하나님의 뜻하신 법대로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나는 너를 모른다고 하는 심판 날에 주님의 판결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 오늘은 하나님의 뜻이 뭣이고 하나님의 법이 무엇인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본질에 관한 문제요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에 잘 듣기를 바랍니다. 이것에서 틀어지면 모래위에 탑 쌓은 것 같이 잘못된 신앙생활 하는 것이 되기에 여러분이 지금까지 알고 믿고 있는 것과 비교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께서도 여러분 나름대로 인생이란 뭣과 같은 것이라며 지금까지 살아왔을 것입니다. 그런 것을 생각해 본적이 없다는 사람들일지라도 주위 사람들을 보면서 남들처럼 사는 거지 인생이 별거냐 하면서 인생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 인생에게 주어진 시간이란 하늘에 상급을 쌓을 수 있는 시간임을 알고 사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차이가 있을 뿐 우리는 이미 갓난아이란 출발지를 떠나 여기까지를 달려왔다. 는 사실인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사람들에게 ‘야들아, 인생이란 이런 것이란 것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종합해 보면 인생이란 항해하는 것과 같고 경주하는 것과 같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뭐라고요?) 항해하는 것과 같고 경주하는 것과 같다.  그렇습니다. 언젠가 배가 항해를 떠나면 언젠가는 목적지에 도착해야 하는 것이고 시합이 시작되면 무한정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정한 시간이 오면 판정을 내리는 것입니다.

인생도 마찬가지란 것입니다. 출발이 있고 골인지점이 있고 마감시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무한정 계속되는 것이 아니란 사실입니다. 언젠가는 인류전체에게 ‘스톱, 이젠 끝났다. 지금부터는 심판의 시간이다.’라고 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최후의 심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최후 심판은 엄정하고 공평해서 천국과 지옥을 나누며 천국 갈 자중에서도 상급이 다르며, 지옥 갈 자중에서도 형벌이 다를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데 그중에 대표적인 구절 하나만 들라면 히브리서 9장 27절 <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 라고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 꼭 알아야 할 것을 성경에 기록하여 놨습니다.
그 중에 사람이라면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사람을 창조했는가? 그 이유를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나라를 다스리도록 하기 위해서 창조하였다고 창세기 1장에 이유를 밝히고 있으며,  2장에서는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자유의 한계를 말하고 있으며 3장에서는 첫 인류가 피조물의 한계를 넘어서 하나님의 법을 어겼을 때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를 말하고 왜 예수를 믿어야만 하는지에 대해 알려주고 있습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법을 어겼을 때 어떻게 되었지요? 첫째 범법자가 되어 버렸고 범법자에게 따르는 죄악의 값이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것인지를 맛 봐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죄 범한 인생들이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서 서로 뺏고 뺏기는 싸움을 싸우고 있고, 병들고 늙고  약해져 가다가 죽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죄를 용서받지 못하면 하나님과는 단절되고 죄악을 다스리는 자 악한 마귀가 그 인생을 장악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다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를 거부하고 계속 죄를 지면 악한 마귀와 함께 영영 지옥 불에 떨어지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 범한 인생들에게는 죄를 없이 해주시고 마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해주시고 행복했던 에덴의 시간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아니 그보다 더 귀한 자리를 주시는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려야 한다고 창세기 3장 15절에 말씀하여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4장과 5장에서는 죄 범한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는 하나님이 원하는 제사를 통해서만이 하나님과 교통할 수가 있고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벨은 하나님이 원하는 올바른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으나 가인은 자기 맘대로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 은총을 받지 못하고 도리어 마귀가 그 마음을 장악한다는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께 어떤 예배를 드려야만 되는 지를 말하고 있으며, 6장에서는 홍수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말씀을 순종하는 노아에게는 심판에서 피할 길이 있음과 비록 하나님의 아들들일지라고 자기들 보기에 좋다고 사람의 딸들을 취하는 자들과 하나님을 경외치도 않고 악행을 저지른 자들에겐 심판이 있음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10장은 세계 민족과 나라가 어떻게 시작되고 있는가? 를 보여 주고 있고 11장에서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나라가 어떤 것임을 보여주고 있고 12장에서는 하나님을 믿으려면 어떤 믿음을 가져야 하는지를 아브라함이란 사람을 통해 보여주고,  출애급기부터는 하나님의 택한 민족과 세상나라를 어떻게 다루시는가? 그리고 인류의 마지막은 어떻게 마감되는지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 것이 구약 성경의 내용인 것입니다.

그리고 신약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고 계신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 예수그리스도가 누군지를 알고 받아드리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예수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것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리해야만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나라를 다스리도록 하려고 창조했던 대열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고 세 번째는 예수님이 재림하시고 심판을 하신 뒤에 하나님께서 계획한 하나님나라가 본격적으로 시작할 것이라고 기록한 것이 신약 성경의 내용인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이 되기 전부터 계신 하나님이란 사실과 자신의 형상과 모습으로 우리 사람을 만드신 분이라는 것과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이 여러분과 저 그리고 모든 인류들이 저지른 죄- 그 죄란 것은 하나님을 창조주로 알고 섬기지도 않으며 하나님 뜻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법을 어기며 제 마음대로 살았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우리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대신 형벌의 죽음이란 것을 알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만이 죄를 면제 받으며 원래 신분 하나님나라를 다스리려고 창조했던 신분으로 되돌아 갈 수 있게 하시는 분으로 알고 믿어야 한다고 했던 것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린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반드시 알아야 되고 믿어야 되는 기독교의 핵심 내용인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인생을 창조한 목적과 마귀 때문에 죄에 빠져 범법자가 되었을 때 예수님이 오셔서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신 것을 알아야 만이 인생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비로소 알게 된다 그런 말인 것입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뭣인지를 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궁극적인 하나님아버지 뜻은 모든 사람이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으며 기독교가 말하는 진리가 어떤 것임을 알기를 바라는 것이라고 디모데 전서 2장 4절에 말하고 있고, 요한복음 6장 40절에는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하나님아버지의 뜻은 예수가 누군지를 알고 믿어 하나님께서 본래 계획했던 하나님나라에서 살 수 있는 영생을 얻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육신만이 전부인지를 알고 사는 사람들은 한 마디로 불행한 사람들이요 안타까운 것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전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를 믿는 자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 법을 어기면 얼마나 불행에 빠지는 것을 알고 예수님을 통하여 용서를 받고 하나님나라를 다스릴 신분이 회복이 되었으니 이제는 예수님 말씀대로 법대로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어떻게 살아야 된다고요? )

그래서 예수님은 수많은 비유를 통해서 어떻게 해야 만이 다가오는 하나님나라에서 영광된 자가 되며 기업을 얻을지에 대해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하나만 가지고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7장까지에서 복된 자들은 어떤 자들인가? 그들이 가지고 있는 8가지 심령의 상태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3장은 비유를 말씀한다고 해서 비유-장이라고 하는데 어떤 자들이 천국에서 복된 자들임을 이 비유 말씀을 통해서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24장 25장을 통해서 마지막 때를 살고 있는 자들 중에 어떤 자들이 혼인잔치에 참여하고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실 영광의 자리를 얻을 것인가를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 예수님의 가르친 것대로 살면 주님께서 함께 할 것이고 주님께서 오셔서 시작할 나라, 하나님나라에서 복된 자들이 될 것이라고 가르쳤지 땅에서 세상에서 잘되고 영광을 누리고 형통한 자가 된다고 하신 구절이 한 구절도 없습니다.  

그리고 제자들도 신약 성경의 서신 서를 통해 우리 육신이 사는 것은 다가올 하나님나라, 영생의 나라에서 복을 받을 수 있는 준비하는 기간인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날 목사들이 예수님을 믿으면 ‘믿는 대로 될 것이고’ 세상에서 부와 귀와 공명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친 것은 잘못된 가르침인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 것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 구약 시대에 주시려는 복과 예수님이 오신 신약 시대의 복의 차이를 알지 못해서 생긴 것입니다.

아브라함부터 시작해서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 법도들을 지키며 땅에서 그들에게 복 주시겠다고 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과 하신 약속인 것이고 예수님이 오셔서 교회와 약속한 말씀이 아니란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교회들에게 하신 약속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처럼 사는 자들에게 땅에서 누리는 잠깐의 복이 아니라, 영원히 지속될 하나님나라에서 천사들이 부러워할 복, 시들거나 쇠하지도 않는 복을 주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받아들이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해서 하나님나라 기업을 주시되 열 고을도 다섯 고을도 주시고 예수님과 같이 하늘과 땅을 다스릴 권세를 주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땅에 사는 동안에는 주님께서 성령으로 오셔서 함께 하시되 우리 안에 계시며 보혜사가 되셔서 어떤 일에도 평안할 수 있도록 하시겠다고 요한복음 14장 26에 <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 고 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진 예수님이 함께 할 것이니 어떤 형편과 처지에서도 담대하고 평안하게 살 수 있는 전천후 평안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과 의를 먼저 구하기만 하면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더해 주실 것이라고 했고,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은사들을 주시며 지혜를 주시겠다고 하셨으며 어떤 일 앞에서도 두렴이  없도록 함께 하여 주시겠다고 약속한 것이 교회들과 하신 약속이란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복은 땅에서는 주님이 함께 하심으로 어떤 핍박과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견디고 이겨낼 수 있도록 하시는 심령의 복을 주시고, 예수님이 오실 때 하나님이 계획한 엄청난 하늘의 복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적으로 말할 때 이스라엘과 하나님과 맺은 약속은 왕과 백성과의 약속이라고 하고, 교회와 약속하신 것은 아버지와 아들 관계가 되는 약속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여러분들, 하나님이 여러분의 왕이 되는 것이 좋겠습니까? 아니면 여러분들의 아버지가 되는 것이 좋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오셔서 교회를 세운다고 할 때 바로 아버지와 아들이 되어주겠다는 약속을 하셨는데도 그걸 모르고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신 약속, 육신적인 복, 세상 적인 복을 구하려고 하는 것은 주님이 왜 세상에 왔는지 왜 교회를 세우려고 하였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한 때 번영주의, 기복주의 미국교회 영향을 받고 예수 믿고 잘 살고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라고 잘못되게 가르쳐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좁은 길을 걷은 후에 부활의 영광이 있다고 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은 온데간데없고 너도 나도 예수님을 잘 되겠다고 하는 믿음이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땅의 복을 구한 제자들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을 보세요. 그들은 영원한 나라에서 주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예수님처럼 핍박 받는 것을 무서워하지 않고 도리어 기뻐하며 주님께서 자신 안에 성령님으로 함께 하심을 알기에 자신들에게 맡겨진 사명을 감사함으로 감당하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통하여 죄의 탕감을 받고 영생을 얻어 하나님과 함께 살며 아버지의 나라 하나님나라를 다스릴 엄청난 복을 받았다면 주님을 위해 어떤 고난이라도 참고 헌신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에 이 땅에서의 삶은 선수들이 장래에 메달을 바라보고 노력하듯이 영원히 사는 나라를 위해 준비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집중하여야 하며, 인내하여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삶이란 경주를 하는 삶과 같다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의 상을 받지 못하도록 유혹하고 방해하는 것들이 어떤 것들임을 알고 피할 줄 알고 달려야 된다고 여러 차례 말씀 드렸던 것입니다. 
  
마지막 때는 이런 사단의 방해 공작들이 더욱 기승을 부릴 것입니다.  여러분 깨어서 정신 차려야 할 땝니다. 여러분들이 더욱 성경을 읽으시되 특히 말세에 대해서 기록된 것을 많이 보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예배에 생활에 더욱 힘쓰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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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가정예배  참스승과 제자

 

 

 
 
찬송 : ‘예수 따라가며’ 449장(통377장)

신앙고백 : 사도신경

본문 : 갈라디아서 6장 6∼10절

말씀 :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지방에서 전도하고 성도들을 가르치며 교회를 세운 영적 스승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바울이 그의 제자이면서 성도인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성령의 감동으로 메시지를 전하는 내용입니다. 본문 말씀을 통해 참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짚어 봅시다.

 

참된 스승과 제자 사이에는 우선 옳은 가르침과 배움이 있어야 합니다. 본문 6절에 보면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함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가르침을 받는 자’는 헬라어 원문에 ‘카테쿠메노스’로, ‘무슨 말을 듣고 이해하다’ ‘귀가 따갑도록 반복해서 듣는 자’를 뜻합니다.

 

그리고 ‘가르치는 자’는 헬라어 원문에 ‘디다스 칼로이’로, 초대교회 당시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고 전파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스승은 반드시 진리와 옳고 바른 것을 가르쳐야 하고, 가르침을 받는 자는 진리의 말씀을 듣고 또 들어서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 예로 바울은 디모데에게 아비의 심정으로 하나하나 가르쳤고, 디모데는 그 말씀의 교훈을 받아서 큰 일꾼으로 쓰임 받았습니다. 그래서 스승과 제자는 바르게 가르치고 열심히 배우는 관계여야 합니다.

 

참된 스승과 제자는 좋은 것을 함께하는 관계입니다. 본문 6절에는 가르침을 주고받는 자가 모든 좋은 것을 함께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모든 좋은 것을 함께하라’는 구절과 관련해 신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는 바울의 선교를 후원하는 물질, 선교를 후원하는 기도, 도덕적인 선뿐만 아니라 고난과 영적 은혜, 그리고 육신적으로 좋은 것 등을 함께 나누라는 말입니다. 즉 영육 간에 모든 좋은 것을 같이 나누라는 말입니다.

 

모세와 여호수아를 보면 40년 동안 고난과 전쟁, 기적의 역사를 같이 체험합니다. 영육 간에 좋은 것을 같이 나누고 같이 사역하고 돕는 관계가 참된 스승과 제자의 관계입니다.

참된 스승과 제자는 반드시 좋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본문 9절에 보면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참된 스승과 제자가 되어 바르게 가르치고 배우면 반드시 좋은 열매를 맺는다는 뜻입니다. 젊은 여호수아가 잘 배워서 때가 차매 민족을 이끄는 지도자가 됩니다. 또 어리고 연약했던 디모데가 바울의 가르침을 받고 훌륭한 목회자가 됐습니다.

 

이처럼 참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올바른 가르침을 주고받을 때, 좋은 것을 함께 나눌 때 반드시 귀한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한 열매는 교회 공동체를 통해 목회자와 성도들 간에 맺을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의 삶과 신앙생활 가운데서도 참된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통해 아름다운 복음의 열매가 풍성하길 바랍니다.

기도 : 우리의 참된 소망이 되시는 하나님, 주님의 은혜 가운데 말씀을 잘 받고 배우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참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통해 아름다운 열매를 풍성히 맺도록 축복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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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절기별 설교 ] 부활절 주일 설교 부활신앙

 

 

 

늘 살아 계시네  (막16:1~18 )

가이드 포스트지에 실린 킬링거 부인의 간증입니다. 이혼한 지 1년이 되던 날 그녀는 친구, 가족, 경제생활 등 모든 것이 먹구름에 싸여 죽기 직전의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책장에서 딸의 초등학교 3학년 때 과제물을 발견했습니다. 여덟 쪽인데 매 쪽에 한 살부터 여덟 살 때까지의 사진 한 장씩을 붙이고 자기의 삶을 설명한 과제물이었습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 쪽에 End(끝)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딸의 글씨 옆에 담임선생님의 'Your beginning' (너의 시작이다)이라는 글씨가 End 라는 글씨를 내리 누르듯이 크게 적혀 있었습니다. 이것이 킬링거 부인이 새 출발하게 된 동기가 되었습니다. 여덟 살 난 아이가 사진 이야기의 끝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마흔이 된 자기도 결코 끝이 아니라는 깨달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예수의 부활을 믿는 자에게는 끝이 없습니다. 여덟 살의 딸아이가 자신의 숙제에 '끝' 이라고 썼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고 시작이었던 것처럼 마흔 살이지만 내 삶은 이제 시작이라는 부활의 믿음을 가지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현재 위치는 어디입니까?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끝입니까? 그러나 끝은 여러분의 생각이지, 하나님에게는 시작입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은 결코 헛된 생활이 아닙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은 낙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은 지금부터 시작입니다.

독일의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 역시 부패하고 타락한 가톨릭을 개혁하면서 죽음과 고통과 어려움의 많은 위협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낙심하지 않았고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험한 시험과 역경이 몰아친다 할지라도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새로운 용기와 소망이 넘친다." 라고 말했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생각만 해도 언제나 소망과 용기가 넘친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늘 살아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새로운 삶이 전개될 줄로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다함께 "살아 계신 주" 함께 찬양합니다. "주 하나님 독생자 예수 날 위하여 오시었네. 내 모든 죄 용서하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나의 구세주. 살아 계신 주 나의 참된 소망 걱정 근심 전혀 없네. 사랑의 주 내 갈 길 인도하니 내 모든 삶의 기쁨 늘 충만하네. 주안에서 거듭난 생명 도우시는 주의 사랑. 참 기쁨과 확신 가지고 예수님의 도우심을 입으며 살리. 살아 계신 주 나의 참된 소망 걱정 근심 전혀 없네 사랑의 주 내 갈 길 인도하니 내 모든 삶의 기쁨 늘 충만하네. 그 언젠가 주 뵐 때까지 주를 위해 싸우리라 승리의 길 멀고 험해도 주님께서 나의 앞길 지켜주시리. 살아 계신 주 나의 참된 소망 걱정 근심 전혀 없네 사랑의 주 내 갈 길 인도하니 내 모든 삶의 기쁨 늘 충만하네." 지금도 늘 살아 계신 부활의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늘 살아 계신 주님은 우리 가운데 계시어,


첫째로 두려움과 의심을 물리쳐 주십니다

미국의 유명한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가 절망에 처한 때가 있었다고 합니다. 27세가 되었을 때 신경쇠약증에 걸렸습니다. 그로 인해 공포와 두려움과 낙심 가운데 언제 자살할지 모르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 헤어 나오기 위해 발버둥치다가 성경을 읽게 되었습니다. 어떤 좋은 약이나 의사보다, 뛰어나다고 믿는 인간의 생각이나 방법보다 더 좋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1장 25절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하는 말씀을 읽을 때에 그는 마음에 감동을 느꼈습니다. 죽은 자도 살리시는 예수께서 내 병을 못 고치시겠는가 생각하니 마음이 기뻐 그 말씀을 종일 복창하였습니다. 그러자 마음속에 믿음이 생겼습니다. 믿음이 점점 커지자 용기와 희망이 생기고 살아 계신 주께서 늘 함께 하심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는 인생의 밑바닥까지 내몰았던 신경쇠약으로부터 깨끗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뛰어난 심리학자로서의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고통을 겪으며 절망과 두려움 속에서 살아갑니다. 미래를 알지 못해 불안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래서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염려합니다. "이제는 끝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가집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할 순간임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여인들은 날이 밝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예수의 시신에 향품을 바르기 위함입니다. 이는 여인들이 부활을 믿지 못하고 있었다는 증거이고 합니다. 그러니 저들에게는 오로지 슬픔과 두려움 밖에 없었습니다. 3절에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며 염려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두려움과 염려는 이미 제거되어 있었습니다. 돌이 벌써 굴려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의 부활을 계획하셨기에 돌문을 여신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여인들은 보이는 돌은 염려했지만 부활신앙을 가로막은 절망의 돌을 치우는 일은 생각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우리 앞에 있는 두려움과 염려의 돌을 옮겨주셨습니다. 더 이상 가로막고 있는 돌문을 바라보며 좌절하거나 실망할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 돌무덤 안에 계시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우리를 만나시려고 우리 앞에 서 계십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주님을 만나 부활의 능력이 함께 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부활하신 주께서 늘 살아 계시어 우리의 두려움과 의심 또한 날마다 물리쳐 주심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처음 사랑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클락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일하는 전도자 중의 한 사람입니다. 미국 시카고에서 매일 밤 전도 집회를 합니다. 꾸준하게 회중이 모입니다. 그런데 회중의 대부분은 술주정꾼, 도둑, 소매치기, 투전꾼 등입니다. 모두가 인간이기를 포기한 사람들입니다. 클락의 설교는 형편없습니다. 지루하고 싫증이 납니다. 느리고 흐리멍덩한 음성입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매일 밤 500여명의 회중이 모입니다. 무엇에 단단히 매인 것처럼 열심히 설교를 듣습니다. 결신자들이 하루에도 수십 명씩 나옵니다. 싫증이 나서 제대로 들을 수조차 없는 설교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감동이 되었을까요?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클락의 진실된 사랑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랑처럼 사람의 마음을 깊이 찌르는 힘은 없습니다. 클락의 눈에는 사랑의 눈물이 언제나 고여 있습니다. 지난 날 클락이 이곳으로 처음 왔었을 때 그는 불쌍한 회중들의 가련함을 알고 울었습니다. 그런데 우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했습니다.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마음을 차갑게 가졌습니다. 그 결과 울지 않는 노력은 성공했으나 설교에 능력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내 눈에 눈물을 돌려주시옵소서." 하나님은 그에게 눈물을 돌려 주셨을 뿐만 아니라 처음 사랑을 회복시켜주셨고 놀라운 능력도 주셨습니다. 사랑은 위대합니다. 사랑은 상대방의 마음을 사로잡고 사람들을 이끄는 매력이 있으며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기적을 만들어 냅니다.

6절입니다.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본문에 의하면 부활 사건의 초점이 빈 무덤이 아니라 갈릴리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더 이상 무덤 속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이미 부활하셔서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갈릴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장소입니다.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만나려는 주님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갈릴리는 예수께서 사역을 시작하신 곳입니다. 제자들을 부르시고 훈련시키신 곳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모두 도망쳤습니다. 그들은 숨어서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처음 사랑과 처음 열정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주님을 향한 사랑이 회복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을 첫 사랑의 장소인 갈릴리로 모이게 하신 것입니다. 그곳에서 자신의 부활을 확인시키심으로 새로운 용기를 주고, 첫 사랑을 회복하고, 부활의 증인으로 삼으시려는 것입니다. 주님의 첫 사랑을 잃어버린 분이 있습니까? 신앙의 좌절을 맛보고 낙심한 분이 있습니까? 부디 부활하신 주님을 통하여 첫 사랑을 회복하시고 은혜를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부활을 증거하는 능력을 주십니다

일본의 최고 기업인 '가네보' 제약회사의 경영자 미타니 야스토는 예수님을 만나 부활신앙으로 인생이 역전되었다고 간증합니다. 인사과장으로 일하면서 회사에서도 항상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알고 상부에서 회사 안에서는 신앙생활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그는 회사에서 쫓겨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신앙을 포기하겠습니다" 라고 상사에게 선언하였습니다. 그러자 그의 마음속에서 "네가 나를 배반하는구나" 하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성경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는 구절을 읽으며 마음이 너무 괴로웠습니다. 자책감이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자신의 인생을 맡기겠다고 기도하면서, 직장을 잃어버리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그러자 마음에 평강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다시 기도하고 성경을 읽으며 회사 동료들에게 열심히 전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일본 전역을 순회하면서 이백여 회의 전도집회를 하고 간증을 하였습니다. 그 결과 회사에서 쫓겨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성실함과 실력을 인정받아 급격히 승진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주심으로 회사를 일본 최고의 기업으로 성장시킨 기여를 인정받아 그 회사의 회장이 되었습니다. 이후 야스토는“예수님의 부활 신앙 체험으로 인생이 역전되었습니다.”라고 간증하게 된 것입니다.

15절에 예수께서 명령하십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예수 부활하심으로 예수 믿는 자들이 영원히 살 수 있다고 전하는 내용이 복음입니다. 그래서 빈 무덤을 본 자들은 예수님의 살아나심을 증거 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난 자들도 누구를 만나든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직접 빈 무덤을 보지 못했고, 예수님을 만난 적도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에서 부활하셨다고 증거하며 목숨걸고 외쳤습니다. 우리도 부활신앙으로 부활의 증거자가 되어야 합니다.

부활절 신앙과 부활신앙을 구별하여야 합니다. 부활절에 교회를 아름답게 장식하고 계란을 준비하여 나눠주고 새벽 예배드리는 일들은 부활절 신앙이라고 부르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하고 체험하는 것은 부활신앙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부활절 신앙이 아닌 부활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부활신앙은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 하는 신앙입니다. 부활사건은 나 자신이 믿어져야 관계가 있게 됩니다. 부디 두려움과 의심을 물리쳐주시고, 첫사랑을 회복시켜 주시며, 부활의 능력을 날마다 주시는 늘 살아 계신 주님을 전하는 부활의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서윤석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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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 받고 사는 삶 (잠 30:10-11)

 

 


10. 너는 종을 그의 상전에게 비방하지 말라 그가 너를 저주하겠고 너는 죄책을 당할까 두려우니라  11. 아비를 저주하며 어미를 축복하지 아니하는 무리가 있느니라


이 시간에 “축복 받고 사는 삶”이라는 제목입니다. 그동안 한국교회에 복과 축복에 대한 용어 가지고 논란이 많았습니다. “복은 하나님이 주시고, 축복은 한자로 빌 축(祝) 복복(福)으로 사람이 사람에게 복을 빌 때 쓰는 건데 왜 하나님께 축복을 달라는 거냐?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분이시지 비는 분이 아니시다.” 대충 이런 논란입니다.


맞는 지적입니다. 모를 때는 그렇게 썼지만 안 다음부터는 복(福)과 축복(祝福)을 구분하여 써야 합니다. 창13:3에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고 정확하게 구분하여 있기 때문입니다.


민6:22-27의 구약의 축도에도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했습니다.


그러나 오래된 습관이다 보니 혹시 누가 복을 써야 할 곳에 축복을 썼다 해서 너무 비판하지는 말고 그 마음을 보고 아멘하자고 제안한 바 있습니다. 하나님은 복을 주시고, 우리는 서로 축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을 축복할 뿐 아니라 또한 많은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며 살아야 합니다.


축복을 받기 위해서 조심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1. 약한 대상이라고 함부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10절 “너는 종을 그의 상전에게 비방하지 말라 그가 너를 저주하겠고 너는 죄책을 당할까 두려우니라.” 여기 종은 당시로 볼 때 권리도 인권도 없는 약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여기 “훼방하다”(라솬)는 말은 거짓된 말로 남을 중상모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로 볼 때 본 절은 성실하고 부지런한 종을 거짓으로 상전에게 밀고하여 미움을 받게 만드는 자는 그 종의 원한을 사게 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원한을 품은 종의 간구를 들으시고 공의로 징계하실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강한 자에게 비굴하고 연약하고 비천한 사람에게는 함부로 하기 쉬운 악한 습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이 약점을 보이거나 자기보다 못하다 생각되면 무시하고 함부로 합니다. 약하고 말 못한다고 마음까지 없겠습니까? 자기를 위하는지 해하는지 다 압니다. 특히 윗사람에게 고자질하면 그 상처가 크기 때문에 그를 결코 축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솝 이야기에 어느 날 동물의왕 사자가 병이 들었는데 숲속의 짐승들은 사자에게 잘 보이지 않으면 후환이 두려운 것을 알고 모두 사자에게 아부하며 병문안을 하였습니다. 여러 짐승들이 건강에 좋은 것을 선물하는데 늑대는 사자에게 줄만한 것이 없어 사자에게 잡아먹힐까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아직 여우가 방문안하지 않은 것을 알고 평소에 여우에게 당했던 것을 보복도 할 겸 사자에게 "대왕님, 여우 녀석은 사자님이 걱정되지도 않은가 봐요." "그렇구나. 괘씸한 녀석" 하며 화가 잔뜩났습니다.


바로 이때 여우가 오다가 이 소리를 듣고 사자에게 말했습니다. "사자님, 제가 사자님 병을 고치는 법을 알고 오는 길에 늦었습니다." “그게 정말이냐?” "네, 그것은 늑대를 잡아다가 삶아 잡수시면 회복이 빨리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 결과 아부하던 늑대는 사자에게 바로 잡혀 먹히고 말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솝 이야기는 그냥 이야기가 아니고 인간의 심리를 동화로서 묘사한 이야기입니다.


우리 속담에도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도 곱다.”했습니다. 말을 좋게 하세요. 그러면 오는 말도 좋을 것입니다. 이처럼 마7:12에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하셨습니다. 율법과 선지자란 구약성경을 일컫는 다른 명칭입니다. 남을 대접하는 것이 성경의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서로 먼저 남을 높이고 대접해보세요. 그러면 감사해서 축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웃에게 잘하면 너 잘되라. 잘되라. 축복해 줍니다. 채무자일지라도 가난하면 너무 혹독하게 말라는 것이 율법입니다. 신24:12-13에 “그가 가난한 자이면 너는 그의 전당물을 가지고 자지 말고 해 질 때에 그 전당물을 반드시 그에게 돌려줄 것이라 그리하면 그가 그 옷을 입고 자며 너를 위하여 축복하리니 그 일이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네 공의로움이 되리라” 하셨습니다.


하나님께도 잘하고 사람들에게도 축복 받게 잘해야 합니다. 너무 혹독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원한을 사게 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 개성도 조절해야 합니다. 개성 때문에 자꾸 다투고 다투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까다롭다면 그를 누가 축복하겠습니까?


잠11:10에 “의인이 형통하면 성읍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패망하면 기뻐 외치느니라” 했고, 잠28:12 “의인이 득의하면 큰 영화가 있고 악인이 일어나면 사람이 숨느니라” 했습니다.


다투지 않는다고 온유하다고 함부로 하면 그가 저주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하늘에서 보시고 가만 두지 아니하십니다. 마10:42을 보면 곧 그들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온유하셨습니다. 마12:19에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하신 대로 욕하면 들으시고 때리면 맞으시고 대항하지 않으셨습니다. 저주하지 않고 축복했습니다. 그렇다고 함부로 하면 하나님이 가만두지 않으신 것을 유대인들을 볼 때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눅20:17-18에 “기록된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냐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셨습니다. 사람에게 축복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지 미움의 대상이 되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2. 친근하다 해서 함부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11절 “아비를 저주하며 어미를 축복하지 아니하는 무리가 있느니라.” 이스라엘의 관습상 아비를 저주하고 어미를 미워하는 자는 율법의 규정에 따라서 사형에 처하게 됩니다. 출21:17을 보면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했습니다. 저주만 해도 사형입니다.


자신을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을 가장 존경하고 친밀하게 해드려야 함에도 부모를 괴롭힌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명한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윤리도덕을 정면으로 거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도 그랬지만 오늘날에는 아주 심각한 상황입니다. 부모나 어른에 대한 효성이나 존경은 땅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친 부모에게도 함부로 하는 자녀들이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들에게 너무 잘해주거나, 아니면 해 준 것이 없어 면목이 없거나 어떤 일에 죄책감을 느끼고 부모가 자기 권리를 주장하지 않으면 자녀들이 부모를 우습게보고 버릇 나쁘게 커서 불효를 행합니다.


어떤 집에 혼자 사는 어머니가 자식하나 바라보고 사는데 자식을 사랑해서 뭐 맛있는 것 있으면 너 먹어라, 뭐 좋은 것 있으면 너 가져라, 뭐 좋은 옷 있으면 너 입어라, 그리고 자기는 먹지 않든지 꼭 벌레 먹은 것 몹쓸 것만 먹고 아이한테만 좋은 것 다 먹였습니다.


그랬더니 이 아이가 버릇없이 제가 대장인 줄 알고 어머니를 무시하고 천시하고 조금 남은 어머니의 재산까지 팔아서 사업한다고 몽땅 없애버리고 어머니는 죽든지 살든지 안중에도 없고, 화가 나면 부모에게 분풀이 하고 그런 불효자가 얼마나 많습니까? 교도소에서도 부모 때리고 온 죄수들은 같은 죄수끼리도 가만 두지 않는답니다.


그런데 꼭 부모 탓만은 아닙니다. 잘해줘도 못해줘도 효도하는 자녀가 있고 잘하지 않는 자가 있습니다. 마지막까지 부모 탓으로만 돌리면 안 됩니다. 결국 내 탓입니다. 구약에도 부모에게 함부로 한 자가 얼마나 많았으면 부모에 대한 경고가 많을까요? 가장 범하기 쉬운 죄이기도 합니다.


친근하다고 함부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가까운 이웃은 우리가 날마다 만나는 사람입니다. 내 이웃에게 먼저 잘해야 합니다. 가까운 사람에게 함부로 하고 먼데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하다가 가까운 이웃의 분노를 사서 축복해 주지 않습니다.


부모, 친근하다고 함부로 해서는 안 됩니다. 부모의 주특기는 축복인데 부모를 서운하게 하면 축복이 나가지 않습니다. 아무리 자녀라도 하도 못된 짓만 하면 차라리 죽기를 바라는 부모도 있습니다. 축복 받을 수 있는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자녀는 부모에게 잘하고 자녀도 부모를 축복해야 합니다. 야곱도 별미로서 아버지의 마음을 기쁘게 해서 축복을 받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면서까지 저주하지 않고 축복하셨습니다. 시109:17-18은 우리에게 경고합니다. “그가 저주하기를 좋아하더니 그것이 자기에게 임하고 축복하기를 기뻐하지 아니하더니 복이 그를 멀리 떠났으며 또 저주하기를 옷 입듯 하더니 저주가 물 같이 그의 몸속으로 들어가며 기름 같이 그의 뼈 속으로 들어갔나이다.” 그러므로 약하다고 함부로 해서 상처 입히지 말고 친근하다고 함부로 해서 마음 상하게 하는 일 없으면서 늘 베풀고 사랑하고 축복하여 서로 축복 받음으로 하나님 앞에 복을 받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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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 마13:3-9

제목 : 마음을 옥토로 만듭시다

1.풍성한 열매의 관건은 밭입니다.

농사를 지어서 풍성한 수확을 얻으려면 여러 가지 구비 조건이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밭이 가장 중요하지 않나 생각이 됩니다. 아무리 품종이 좋고 기후나 기술이 좋아도 토질이 형편없으면 좋은 열매를 기대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농부가 농사를 지으려면 밭을 갈아 부드럽게 하고, 돌멩이를 골라내고, 퇴비도 넣고 토양 소독도 하면서 밭을 장만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이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의 밭이 깨끗하고 진실하고 겸손하고 지혜로워야 인생의 좋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주님께서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하여 바로 이러한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여 생명의 말씀을 받아들임으로 마음을 옥토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30배 60배 100배의 풍성한 열매를 맺어 생명의 풍성한 은혜가 넘치는 삶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오늘 말씀의 내용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깊이 묵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려면 우리 마음을 바르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인간의 심령이 너무 왜곡되어 있어서 복음이라는 너무 귀하고 복된 생명의 말씀이 사람들에게 전해졌는데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귀한 생명의 말씀을 아예 받아들이지도 않고,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들마저도 생명의 풍성한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얼마든지 생명의 은총을 누릴 수 있는 상황속에 있습니다.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과 영광의 나라와 동시에 이 땅에서도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평화와 소망을 주는 복음의 씨앗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의 마음의 밭에 뿌려 졌고 또 얼마든지 그것을 믿고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릴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말씀을 거부하고, 어떤 이는 겨우 받아들이긴 했으나 열매를 맺지 못하고 겨우 목숨만 부지하고 있거나 심지어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고 극히 일부의 사람들만이 생명의 열매를 맺으며 그 은총을 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무엇이 문제입니까? 왜 같은 생명의 씨앗이 들어갔는데 어떤 사람에게는 거부당하고, 어떤 사람은 조금 자라다가 말라죽고, 어떤 사람에게는 근근이 목숨만 부지하고 있고, 어떤 이들에게는 생명의 열매가 풍성히 맺히는 것입니까? 그건 다름 아니라 복음을 들은 사람들의 마음의 밭이 문제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의 밭이 완고하고 단단하게 굳어져 있거나 돌밭과 같이 얄팍하거나 세상의 온갖 잡초들로 무성하여 복음의 씨앗이 싹이 트고 자라나지 못하여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능력을 본 사람들 중에도 어떤 이는 복음을 받아들였고, 어떤 이는 복음을 거부하였다는 사실에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주님은 감히 세상의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지혜와 능력으로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엄청난 능력으로 병든 자를 고치시고, 귀신 들린 자를 고쳐주시고, 심지어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군중들이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러한 주님의 말씀을 듣고, 능력을 본 사람들 중 끝까지 예수님을 믿고 따른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예고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님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도 가려느냐고 물으시면서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셨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는 하는 가장 근본적인 요인은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의 마음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죄와 무지와 어리석음과 연약함과 한계를 인정하고 겸손히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자는 생명의 복음을 받아들여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지만 자신의 분수를 모르고 자기 생각과 지식과 경험과 이성대로 살아가는 완고하고 어리석은 자는 복음을 받아들이지도 않고 겨우 받아들인다해도 말씀을 따르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살아감으로 생명의 은총을 누리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 마음의 밭을 잘 다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것으로 인해 단단해지고, 세상의 온갖 잡초로 가득하고, 자신의 힘과 지식과 이성을 의지하려는 완고하고 교만한 마음을 성령의 능력으로 깨트리고 부드럽고 깨끗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마음이 옥토가 되어 생명의 말씀이 싹이 트고 자라나 풍성한 열매를 맺어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 마음의 밭을 옥토로 만들 수 있습니까?

2.단단히 굳어진 마음을 깨트려야 합니다.(3,4절)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옥토로 만들려면 자신의 무지와 어리석음과 한계를 인정하고 겸손히 주님 앞에 엎드려 말씀묵상하며 깨어 기도함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 심령속에 들어있는 단단하게 굳어진 것들을 깨트려 버려야 합니다.

오늘 말씀속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데 먼저 3,4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이 말씀은 비유의 말씀으로 씨를 뿌리는 자는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복음을 전하는 자들입니다. 씨는 물론 하나님의 말씀이고, 밭은 인간의 마음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길가란 단단하게 굳어져 있는 인간의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이미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전해졌건만 사람들의 마음이 세상에 태어나서 보고 듣고 배우고 경험한 것들로 완전히 굳어져 있어서 생명의 말씀을 도무지 이해하지도 못하고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생명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죽음의 길로 치닫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인간의 심령은 세상에서 보고 듣고 배운 것으로 너무나 단단하게 굳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세상에서 보고 듣고 배운 것들은 대부분 물질적으로 많고 좋은 것을 누리며 높은 자리에 올라가 대접받으며 육체적 물질적으로 평안하고 부요한 삶을 살아가기 위한 것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을 위하여 기를 쓰고 공부하고 일하고 힘쓰고 애쓰며 거의 대부분의 시간과 정열을 거기에 할애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육체적 물질적 사고로 심령이 완전히 굳어질 수 밖에 없고, 그러한 물질적 사고로 심령이 굳어지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명의 말씀에는 아예 관심도 없고,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도 못함으로 이를 거부하고 영원한 멸망의 길로 치달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나마 복음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마저도 아직도 그 심령 속에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있는 물질적 육체적 가치관으로 인하여 말씀 따라 가지 않고 세상을 따라 감으로 생명의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단단하게 굳어진 심령을 깨트려 부드럽게 하고 생명의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다른 방법 없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죄와 무지가운데 있는 존재인지, 자신의 지식과 경험과 이성과 얼마나 작은 것인지를 인정하고 주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기도하며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주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너무나 왜곡되게 굳어진 옛자아가 깨트려 주심으로 진리를 향해 갈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 성령이 역사하시고 성령이 역사하시면 그 동안 살아오면서 단단하게 굳어진 왜곡된 가치관들이 깨지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고, 말씀에 아멘으로 화답하며 그 말씀을 따라 살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 심령 속에서 말씀의 씨앗이 싹이 트고 자라나서 풍성한 생명의 열매를 맺게 되어 그야말로 생명의 은혜가 넘치는 복된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어찌 하든지 정말 겸손한 마음으로 더욱 자신을 말씀 앞에 세우며 기도하며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자신이 죄인이요 어리석은 자요 완고한 인생임을 고백하고 기도하며 성령의 역사하심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능력과 은혜가 여러분의 심령 속에 충만하게 임함으로 세상의 것으로 굳어져 있던 마음이 활짝 열려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이 여러분의 심령에 온전히 심겨지고 그래서 그 말씀이 여러분 심령 속에서 싹이 트고 자라나 풍성한 열매를 맺으며 그 은총을 충만히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말씀이 심령 속에 깊이 뿌리 내려야 합니다.(5,6절)

그렇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 마음이 옥토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 속에 들어온 말씀이 우리 심령 속에 깊이 뿌리 내리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5,6절을 보십시오.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여기서 돌밭은 돌이 많은 밭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위 위에 약간 흙이 덮여있는 밭을 말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싹이 텄으나 가뭄이 들자 땅속의 습기를 공급받지 못함으로 금방 말라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심령도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심령에 말씀의 씨가 겨우 들어가긴 했는데 그 마음속이 아직도 세상에서 살면서 보고 듣고 배우고 경험한 물질주의와 인본주의적 가치관이 자리 잡고 있어서 말씀이 그 마음속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주님 안에 있는 진정한 생명의 도를 알지 못하고 세상의 복이나 기쁨이나 평안을 위해서 다니고, 그래서 뭔가 믿는 흉내를 내기는 내는데 조금만 어려운 일이 있으면 그만 실족하여 넘어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안타깝게도 이런 일들이 많습니다. 10년 20년 30년 교회에 다녔다고 하면서 아직도 세상의 가치관으로 굳어진 심령이 깨지지 않음으로 그저 세상 기쁨이나 평안이나 위로나 복을 위해서 다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교회에서 별일 없이 웃고 떠들고 재미있게 교제할 때는 그 재미로 교회에 다닙니다. 또 뭔가 어려움이 없고 일이 잘 되면 좋다고 교회에 다니고 어떤 때는 은혜를 받은 것처럼 눈물 흘리며 기도하기도 하고, 교회 일도 열심히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분들은 교인과 뭔가 관계가 틀어지고 뭔가 좀 어려운 일이 있으면 그만 낙심하고 원망하고 불평하게 됩니다. 뭔가 좀 자기에게 서운하게 대하는 것처럼 느껴지거나 알아주지 않는 것처럼 여기면 교회를 떠나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나도 왕년에 세례를 받았다, 성가대를 했다, 교사를 했다고 하면서 교회에 안 나오는 분들도 많습니다. 여러분, 그건 그냥 교회에 왔다갔다 한 것이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정말로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속된 말로 때려 죽여도 교회에 안 나올 수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생명의 주를 만났는데, 천국과 지옥을 아는데 어떻게 교회를 안 나올 수가 있습니까?

그러면 왜 이런 일이 벌어집니까? 다름 아니라 마음이 돌밭이라 그렇습니다. 말씀을 받기는 받았는데 그 심령 속에 아직도 인간적인 생각과 가치관과 경험과 이성이 바위처럼 굳어 있어서 그냥 인간적인 생각으로 교회생활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절대로 그렇게 교회생활하면 안됩니다. 정말 나 자신을 깨트려 부수고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안에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있고, 오직 그 말씀만이 진리이며 생명이라는 걸 알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이게 신앙생활입니다.

그냥 인간적으로 사랑하고 돕고 위로하는 것은 직장이나 마을이나 동호회나 계모임에서도 할 수 있습니다. 거기서도 사랑도 나눌 수 있고 서로 섬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단순히 인간적으로 교제하는 곳이 아닙니다.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며 그래서 이 땅에서도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다가 무엇보다도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분명한 진리이고 이것을 아는 사람은 죽어도 교회를 떠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윤리적으로 종교적으로 교회생활하면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물론 조금 어려움이 오고 일이 잘 안 풀리면 그만 졸업해 버립니다. 교회가 자신을 알아주지 않고 조금 서운하게 하면 그만둡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정말 우리 심령 속에 바위처럼 굳어져 있는 인간의 이성과 경험과 지식의 단단한 것들을 주님의 능력으로 깨트려 버려야 합니다. 신앙생활이란 인간적인 기쁨이나 평안이나 욕구 충족을 위하여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말씀으로 거듭나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누리며, 오직 말씀안에서 주님과 동행함으로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며 그 역사를 이루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물론 그렇게 살다보면 인간적인 생명의 기쁨과 자유와 평화와 사랑은 저절로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우리 심령속에 굳어진 왜곡된 생각들을 하루속히 버리고 오직 우리의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 가운데 오직 주님의 말씀을 따라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권능과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어려움과 유혹과 시험을 이기고 먼저는 나 자신이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며 주님의 거룩한 역사를 이루어가는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마음속의 잡초를 뽑아버려야 합니다.(7절)

그렇습니다. 우리 마음을 옥토로 만들어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기 위해서는 세상의 것들로 완고하게 굳어져 있는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그 다음에는 마귀 사탄이 끊임없이 우리 마음에 뿌려놓는 잡초를 제거해야 합니다. 아무리 마음의 밭을 부드럽게 해도 온갖 못된 잡초들이 무성하면 생명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7절에서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그러니까 어떤 사람은 말씀을 겨우 받아들이긴 했는데 그래서 뭔가 자라는 것처럼 보였는데 그만 마음속에 세상의 온갖 잡동사니 같은 것들로 가득차서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밭을 아무리 부드럽게 하고 퇴비를 넣고 씨앗을 뿌려도 잡초가 무성하면 어떻게 좋은 열매를 맺겠습니까?

여러분, 인간의 마음의 밭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심령에는 너무나 많은 잡초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 근심과 걱정이 잡초입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의 향락과 즐거움이 잡초가 됩니다. 어떤 이는 원망과 불평과 미움과 욕심이 잡초입니다. 어떤 이는 돈과 권력에 대한 집착과 욕심이 잡초가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러한 잡초는 얼마나 질기고 강하고 잘 자라는지 모습니다. 밭에 곡식의 씨앗을 뿌려 놓으면 잡초가 먼저 납니다. 조금만 방치하면 잡초가 곡식을 완전히 덮어 버려 곡식은 약해져 죽거나 겨우 살아남아도 열매가 별로 없습니다.

우리 인간 심령도 그렇습니다. 마귀가 얼마나 강렬하게 역사하는지 조금만 방심하면 온갖 왜곡되고 추하고 부정적이고 악하고 불신앙적인 것들이 우리 심령을 차지해 버립니다. 세상의 돈과 명예와 영광과 향락과 원망과 불평과 증오와 미움과 같은 잡초들이 말씀을 덮어 버립니다. 그래서 말씀이 열매를 맺지 못함으로 생명의 은혜가 넘치는 삶을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걸 제거하고 이겨야 합니다. 이걸 이기는 방법도 다른 게 없습니다. 더욱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며 말씀의 능력을 덧입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능력과 은혜를 덧입어 마귀가 잡초의 씨앗을 뿌리지 못하게 하고 자라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아니 완전히 뿌리째 뽑아버려야 합니다. 그러면 생명의 말씀이 무럭무럭 자라나서 생명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음으로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이 넘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8절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우리의 심령을 부드럽게 하고 말씀으로 채우고 잡초들을 제거하면 생명의 풍성한 열매를 맺고 그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우리 심령속에 있는 세상의 온갖 잡다한 것들을 제거하고 진정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 은혜의 말씀, 사랑의 말씀이 무럭무럭 자라난다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아름답고 복되고 귀하고 영광스럽겠습니까? 얼마나 자신의 삶이 윤택하고 부요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의 은총을 가져다 주겠습니까? 주님은 오늘 이 비유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이러한 삶이 되기를 간절히 촉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여러분의 심령을 부드럽게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심령 속에 온전히 뿌리박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의 심령의 밭에 있는 모든 잡초들을 제거하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주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기도하며 말씀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 진정 주님의 인도하심과 성령님의 역사하심 가운데 오직 옥토와 같은 마음으로 주님과 동행할 때에 여러분의 심령 속에서 생명의 씨앗이 싹이 트고 자라나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면서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갈 수 있는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되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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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관예배설교 ( 영원한 고향집으로 )

 

 

 


말씀 : 고후5:1~4


지금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셨던 귀한 육신을 본래 있었던 곳으로 돌려 보내드리기 전에 하나님께서 주셨던 육신을 관에 고이 모시기 위하여 모였다. 지금 사랑하는 임을 보내드리면 이 세상에서는 더 이상 이분을 만날 수도 없고, 함께 사랑을 나눌 수도 없고, 섬길 수도 없다. 그래서 인간의 정으로는 너무나 마음이 아프고 쓰리고 안타깝다.

 


또한 물론 사랑하는 유족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누구보다도 서로 사랑하며 아끼며 살아오셨을 줄 믿는다. 그러나 아무리 사랑했어도 우리가 온전할 수 없기에 언제나 후회는 남은다. 그래서 사랑하는 아내와 어머니를 더 사랑하고 더 아끼고 더 효도하지 못한 것 때문에 더 마음이 쓰리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랑 유족과 성도 여러분, 우리가 육정을 가지고 있는 한 인간으로서 이러한 아픔과 안타까움과 쓰린 마음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해도 그러나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처럼 우리는 끝내 낙심하거나 절망할 이유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의 헤어짐이 영원한 이별이 아니라 잠시 떨어져 있다가 곧 다시 만난다는 사실을 너무나 분명히 알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 오늘 말씀을 보라. 우리 장막집이 무너지면 영원한 집이 있다고 하였다. 장막집은 우리 육신을 말한다. 왜 장막집인가? 영혼이 잠시 거처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장막이 무언가? 임시 처소이다. 즉 우리 육신은 영혼의 임시 처소인 것이다. 그래서 육신의 장막집은 곧 무너진다. 그리고 나면 영혼은 영원한 나라로 가는데 거기가 바로 영원한 처소인 것이다.

 

그래서 요14장에서도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영원한 처소가 예비되어 있다고 하셨고, 또 계21장에서는 우리를 위하여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준비되어 있다고 하신 것이다. 그런데 우리 ○○○성도님은 지금까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잘 싸우고, 모든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지금 그 영원한 본향집에서 완전하고 영원한 생명의 기쁨과 평안과 축복을 누리고 계신 것이다.

 


그러므로 고  ○○○성도님을 영원한 본향집으로 먼저 보내드리고 물론 마음이 쓰리고 아프고 마음 한 켠에 커다란 구멍이 난 것처럼 허전함이 있겠지만 그러나 죽음은 결코 끝이 아니라 영원한 본향집으로 돌아가는 것임을 기억하기 바란다. 사랑하는 임은 무거운 짐을 다 벗어던지고 천국에서 안식하고 계심을 기억하며, 그리고 우리도 머잖아 그 분의 뒤를 따라가 영원한 천국에 만날 것을 기억하며 위로와 소망을 갖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제는 다 하지 못한 사랑과 효도도 잊어버리고 오직 믿음 안에서 더욱 사랑하면서 성실하게 열심히 주님과 동행하면서 주님이 주시는 위로와 소망과 인도하심 가운데 주님과 동행하다가 언젠가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그날에 할렐루야 찬양하면서 감사와 감격과 기쁨 속에 사랑하는 임을 만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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