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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송구영신예배설교 (새로운 축복과 새출발)

 

 


 신 34:1∼12

 

오늘은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시간입니다. 오늘의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지난날을 감사하고 새로운 축복을 대망해야 하겠습니다.
이 시간 우리는 모세의 일생을 통해서 지난날의 신앙생활을 돌아보고 이제 새롭게 내려주실 하나님의 은혜를 믿으며 새 출발을 다짐해야 하겠습니다.

모세는 지금 느보산에 있는 비스가 산정에 서서 두 개의 세계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미 지나온 세계와 앞으로 전개 될 세계 그리고 지금까지 받은 은혜와 앞으로 주실 은혜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근 200만 명이나 되는 노예백성을 광야로 끌고 나왔을 때 함께 해 주신 하나님.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게 하시고 시내산에서 주신 율법은 이 노예백성들에게 정신적인 지주가 되게 하시고 긍지를 갖게 하셨습니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함께 하시고 거친 땅에 하얗게 덮인 만나와 그 위에 쏟아져 내린 메추라기 떼를 보게 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시내광야에서 금송아지사건과 고라의 반역은 쓰라린 기억이었습니다.

시90:9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라고 모세는 고백했습니다. 모압평지에서 느보산으로 올라가 비스가산 꼭대기에 이르렀을 때 드디어 희망의 땅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 이였습니다.
바로의 궁에서 왕자의 대우를 받으면서도 자기민족이 압박 당하는 것을 보고 하루도 편히 지내지 못한 모세였습니다.

그로부터 거의 100년이란 세월이 지나가 버린 지금 마침내 그토록 사모하던 목적지에 도달했습니다. 광야에서 늙어 버린 모세는 비스가 산상에서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바라보고 감동에 젖었습니다.
길르앗에서 단까지 이르는 모든 지역과 종려나무가 많은 여리고, 비옥한 납달리, 그리고 파도가 넘실거리는 지중해까지의 시야가 펼쳐집니다.
그러나 모세는 자기가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아쉬움도 다 잊어버리고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하여 생각했습니다. 그 때 모세는 하나님께서 성전을 건축할 시온산과 십자가가 세워질 모리아 언덕을 바라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모세는 자기 사명을 다했기 때문에 죽어야 했습니다. 모세는 홀로 죽기 위해 높은 산에 올라갔습니다. 자기주위에 아무리 많은 대중이 있을지라도 죽음의 길은 홀로 가는 길임을 모세는 깨달은 것입니다 . 모세와 하나님사이에 끼여들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아무도 그의 시체를 보지 못했습니다.
신34:6 '오늘날까지 그 묘를 아는 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만일 모세의 무덤이 발견됐다면 예루살렘의 유적들과 마찬가지로 숭배의 대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성경학자들은 모세가 변화산에서 엘리야와 나타난 마17:1∼8 과 유다서1:9 을 근거로 모세는 엘리야처럼 승천했다고 주장합니다. 엘리야가 살아서승천한 사람이라면 모세는 죽어서 승천한 사람이며 모세가 율법의 대표자라면 엘리야는 예언의 대표자요, 엘리야가 산 자의 대표자라면 모세는 죽은 자의 대표자입니다.

모세는 홀로 비스가 산정에 올라갔습니다. 자기는 결코 들어갈 수 없는 가나안땅을 바라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믿음의 눈으로 자기가 곧 들어가게 될 하늘의 가나안 복지를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모세는 하늘을 향하여 올라갔습니다.
이세상 모든 사람들이 "젖과 꿀이 흐르는 제나름대로의 가나안땅"을 목표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즉 농부는 땅을 경작함으로 미술가는 화폭에 그림을 그림으로 상인은 장사함으로 정치가는 정치를 함으로 그 목표에 도달하려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적인 자기 목표에는 도달했을지 모르지만 삼성의 이병철씨도 현대의 정주영씨도 갔습니다. 전해 듣기로는 이병철씨는 자기 재산을 얼마든지 내 놓고라도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달라고 의사에게 매달렸다고 합니다. 사실인지는 몰라도 정주영씨도 건강할 때 젊은 피로 많이 바꾸었다는 세간의 소리도 있었습니다.
이 지구상에는 우리의 목적지는 없습니다. 우리가 돌아갈 본향은 하늘나라뿐입니다.

오늘처럼 한해가 가고 한해가 오면 나이테가 그어집니다. 이런 반복 속에 어느덧 사람은 하나님 앞에 서게 되고 그 앞에서 판단되어 집니다. 그래서 사람은 하루 하루를 후회 없는 삶으로 살아야 합니다.
모세는 그처럼 일에 방해자가 많고 원수가 많았으나 모든 판단을 의로운 재판장이신 하나님께 맡기고 절대 믿음의 삶, 평화의 삶, 사랑의 삶을 살았습니다.

모세는 신34:10에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라고 했습니다. 또 신33:1에는 모세가 하나님과 영적 교제의 깊이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아마 모세는 가나안땅에 들어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과 생각은 달랐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어 노예백성을 해방시키고 이스라엘백성을 가나안으로 인도하는 영적 지도자,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 합한 믿음의 사람, 순종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왕자의 자리에서 양치는 자로 광야의 40년의 훈련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민12:3절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에 모든 사람보다 승하다'고 했습니다. 또한 노예백성 이스라엘을 인도하면서 40년 간 많은 아픔과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유목민족 노예민족 이스라엘에겐 가나안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지만 죄된 인간이 사는 곳이므로 또다시 죄와 불법과 아픔과 고통과 병과 늙음이 있는 곳이 될 수밖에 없는 곳이기 때문에 모세에게 가나안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더 이상 죄가 개입하지 못하며 요한계시록 22;1-22:5에 기록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거룩한 성이 모세를 위해 예비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해를 새로 맞이하는 이 시간 고요히 기도하고 성서를 읽고 영원한 하늘나라에 우리 인생의 목표를 두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땅위에 사는 동안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위해 최선을 다할 때 그리고 주님의 말씀대로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리란 약속대로 이루어 주십니다. 전능하신 사랑의 하나님만 의지하며 믿음과 순종으로 살아 영육간에 축복의 새해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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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1월 네째 주일 예배 설교

Sunday, November 2018 Worship Preaching

 

 

 


본문 / 사무엘상 1장 9~18절
제목 / 다음 세대를 일으키라


9.그들이 실로에서 먹고 마신 후에 한나가 일어나니 그 때에 제사장 엘리는 여호와의 전 문설주 곁 의자에 앉아 있었더라 10.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11.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12.그가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 엘리가 그의 입을 주목한즉 13.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움직이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하므로 엘리는 그가 취한 줄로 생각한지라 14. 엘리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 하니 15.한나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내 심정을 통한 것뿐이오니 16. 당신의 여종을 악한 여자로 여기지 마옵소서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은 나의 원통함과 격분됨이 많기 때문이니이다 하는지라 17. 엘리가 대답하여 이르되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18 .이르되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근심 빛이 없더라


사무엘상의 시대는 사시기에 속합니다. 사사기는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어두운 암흑기였습니다. 사사기, 룻기, 사무엘상의 시대는 이스라엘의 혼란기에 속합니다. 이런 어둡고 혼란한 시대에 사무엘상 1장에 한나라는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1~2절을 보면 엘가나에게 두 아내가 있는데 첫 번째 아내는 브닌나이고 두 번째는 한나입니다. 브닌나에게는 자녀가 있었고 한나에게는 자녀가 없었습니다. 이 문제로 한나의 피맺힌 기도가 시작되었습니다. 한나가 성전에서 자식의 문제로 오랫동안 통곡하며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성도가 삶의 문제로 뜨겁게 기도하고 있었는데 반면에 엘리 제사장은 한나가 술에 취해서 기도하는 것으로 오해했습니다. 엘리 제사장이 영적인 지도자로서 문제가 있는 것과 하나님의 성전에서 술을 먹고 취해서 뒹구는 일이 흔히 있었다는 것을 짐작해서 볼 때 그 시대의 영적 상태가 얼마나 어두웠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영적 지도자가 영적 판단력이 무뎌졌다는 것은 그 시대의 영적인 상황을 잘 대변해 주는 것입니다. 지도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영적 분별력입니다. 주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잘 분별해내는 것이 영적 지도자입니다. 영적 지도자가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그 시대와 맡은 공동체를 잘 이끌어가는 리더쉽을 발휘하려고 하면 영적인 분별력이 있어야 하는데 영적인 문제가 생겼다는 것은 아주 심각한 것입니다. 특별히 영적 지도자는 영적인 민감성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하는데 백성의 아픔을 이해하는 마음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은 제사장으로서의 기능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백성의 아픔과 고통하는 소리를 잘 듣고 이해하고 그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이 영적 지도자의 역할입니다. 하나님과 백성의 중보자 역할에 민감성은 아주 중요합니다. 이것은 영적 지도자의 문제뿐만 아니라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어두워져 있을 때 영적으로 무감각하고 무뎌지는 증세가 나타납니다. 말씀을 듣고 기도를 해도 영적인 감동이 일어나지 않으면 어둠 가운데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을 때는 하나의 말씀을 들으면 열 가지, 스무 가지 깨달음과 큰 도전과 파장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무뎌져 있으면 어떤 말씀을 들어도 깨달음이 오지 않고 무덤덤하고 영적인 일에 관심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예배를 드려도 건성으로 드리고 영적인 깊은 갈망이 사라졌다면 영적으로 병든 것입니다. 사사기는 영적으로 어두운 시대로 이스라엘의 가장 최악의 시대였습니다. 다른 것이 어려워도 영적으로 문제가 없다면 그 시대는 소망이 있습니다. 어느 시대든 가장 마지막 보루는 영적 세계의 타락입니다. 경제가 무너지고 사회가 복잡하고 혼란이 일어나도 영적인 하나님의 사람들이 중심을 잡고 있으면 그 도시와 공동체는 소망이 있습니다. 만약 영적으로 어둡고 타락한다면 그 시대는 끝납니다. 오늘 사사기는 총체적 위기에 처해있습니다. 영적으로 가장 예민해야 하고 영적인 판단력이 탁월해야 할 지도자가 영적으로 아주 어두웠던 시기가 한나가 살고 있는 시대의 배경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영적 지도자들을 위한 중보기도를 우선순위에 둬야 합니다. 영적 지도자들이 건강하게 깨어서 서 있을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이 우리나라를 살리는 일인 줄 믿습니다. 비난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중보기도를 해야 합니다.

 

이렇게 영적으로 무너져 버린 시대에 한나라는 여인이 등장합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한나인데 처음에 한나는 자식의 문제로 기도를 시작하였습니다. 한나의 불임을 통해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 안에 거룩한 자손들이 일어나고 있지 않은 그 시대의 영적 상태를 보여주시려고 하셨습니다. 대표적으로 엘리 제사상의 자손은 타락했습니다. 영적으로 어두워져 있는 엘리 제사장이 자신의 신앙뿐만 아니라 자녀들에게도 신앙을 전하지 못해서 엘리의 두 아들도 아주 타락했습니다. 영적 재생산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 시대는 소망이 없습니다. 영적인 어둠은 영적인 대가 끊기는 것을 말합니다. 영적인 세계를 보면 3대가 번성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3대인데 믿음의 1대인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 가운데 믿음으로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이삭은 그 아버지만 못합니다. 특별히 눈에 띄는 믿음의 삶을 볼 수 없습니다. 그 아들인 야곱은 한참 방황을 한 자녀였습니다. 이삭은 말년에 눈이 어둡고 영적인 총기가 사라졌습니다. 그러다가 야곱은 이삭을 속이고 영적인 방황을 하게 됩니다. 아브라함 대의 신앙이 이삭의 대에서 약해지고 야곱의 대에서는 더 약화합니다. 또 구약에 보면 다윗은 실수한 적은 있지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서 탁월한 영성을 가진 믿음의 1대였는데 솔로몬은 아버지 대만 못합니다.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이 이루어놓았던 모든 것을 누리는 자였습니다. 여로보함의 대에 가서는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열되는 비극이 일어납니다. 1대의 믿음이 2대에서 약해집니다. 믿음으로 출발할 때는 뜨겁게 출발했는데 전수받는 사람이 희미하게 전수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밑에 있는 사람은 더 희미하게 받는 것입니다. 아무리 믿음으로 뜨겁게 출발해도 100%다 물려줄 수가 없습니다. 사사기의 혼란시대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영적인 대가 끊겼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전체가 불임기입니다. 부흥은 한 세대로 끝나면 안 되고 다음 세대로 이어져야 합니다. 한국 교회는 그동안 부흥했습니다. 그런데 현재 부흥이 안 되는 시기가 되었습니다. 외적으로는 번성하고 부흥했는데 다음 세대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외국의 교회들보다도 더 빨리 끊기고 있습니다. 이것은 경제적인 성장과 굉장히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현재 세대교체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1세대의 부흥기를 이어받을 다음 세대의 주자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한국교회의 미래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시기가 온 것입니다. 마라톤에서는 바통터치가 중요합니다. 아무리 잘 뛰는 선수라고 해도 바통터치에 실패하면 게임이 끝납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육상에서 미국이 가장 유력한 우승후보였습니다. 미국은 육상 강국이라 우승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득 찼는데 400m 릴레이에서 남녀팀 모두 예선 탈락을 했습니다. 이유는 남녀팀 모두 바통터치에서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소위 장인, 명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자신이 이룬 업적도 중요하지만 계속 이어지도록 전수하는 것이 더 중요해서 자기가 가진 비밀을 자녀들에게 전수해 줍니다. 내가 조금 부족해도 바통을 받은 사람이 더 탁월하면 더 멋진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릴레이를 할 때도 가장 실력 있는 사람을 마지막 주자로 내세웁니다. 우리의 인생과 신앙도 릴레이입니다. 나만 혼자 열심히 뛰다가 끝나면 안 됩니다. 정확하게 바통터치를 해줄 누군가 없다면 실패한 것입니다. 영적으로도 그렇습니다. 바울에게는 디모데가 있었고 엘리야에게는 엘리사가 있었습니다. 위대한 생은 위대한 계승으로 이루어집니다. 지난 주간에 KBS에서 성탄특집으로 한경직 목사님의 일대기를 방송했습니다. 그동안 한국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만 많이 나왔는데 개신교에 관련된 좋은 프로그램을 공영방송에서 직접 만들어 성탄 절기에 방영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과 같은 기독교의 영적인 세계를 대표할 만한 인물들이 계속해서 나와야 할 줄 믿습니다. 한국사회를 이끌어가고 영향력을 끼칠 하나님의 귀한 사람들이 나올 수 있도록 우리가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나의 기도를 살펴보면 첫 번째로 10절에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한나가 자식을 위해서 기도하는데 너무 마음이 괴로워 통곡하면서 기도했습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기도는 자신의 마음 안에 맺힌 것을 하나님 앞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기도는 자신의 고통을 쏟아내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7절을 보면 「브닌나가 그를 격분시키므로 그가 울고 먹지 아니하니 」 한나의 기도는 한이 맺힌 기도입니다. 그 시대는 자식이 없으면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다고 취급받아 냉대를 받았습니다. 남편 엘가나가 한나를 사랑했지만, 자식이 없으니 끓어오르는 버림받은 감정으로 꼭 술 먹은 사람처럼 기도했습니다. 최고의 기도 교사는 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위기의 순간에 처해서 기도하는 사람은 다릅니다. 고상하게 기도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과 단판을 내고자 하는 강력한 기도, 응답받지 않고는 일어설 수 없다는 기도는 고난을 당한 사람이 할 수 있습니다. 간단한 문제로 40일 금식 기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저는 전도사 초기에 일주일 동안 금식기도를 했습니다. 아버지가 예수를 믿지 않으셔서 아버지의 구원을 위해서 단판을 내려고 기도원에 갔습니다. 기도원에 다녀오니 아버지가 완전히 변해있었습니다. 제가 떠나던 순간부터 변하셔서 그 다음 날 새벽기도부터 나가시고 술, 담배를 끊고 예수를 믿으면서 확실하게 하나님을 만나셨습니다. 알고 보니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가는 순간 떠나는 나의 뒷모습을 보고 하나님의 영이 아버지에게 임하셔서 감동을 주셔서 눈물, 콧물 다 흘리고 회개하고 주님 앞에 돌아온 것입니다. 아버지를 위해서 생명을 걸겠다는 마음으로 일주일 금식기도를 하러 갔는데 하나님께서 아들의 기도를 들어주신 것입니다. 그때 간이 안 좋아서 각혈까지 하고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갔었는데 예수 믿고 약 하나 쓰지 않고 치료받으셨습니다. 현재까지 건강하게 전도하고 다니십니다. 기도 외에 다른 길이 없으니까 하나님께 매달리고 매달리다 보니까 은혜 받고 여러 가지 간증이 생기게 됩니다. 고난이 유익합니다. 한나는 특별히 브닌나 때문에 기도를 더 잘하게 되었습니다. 6절에 보면 「그의 적수인 브닌나가」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는 아주 훌륭한 기도학교 교사였습니다. 여러분을 괴롭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분 때문에 내가 기도를 배울 수 있으니 감사하십시오. 좋은 환경 속에서 기도를 배우기는 어렵습니다. 고난과 환란 속에서 기도하며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평안할 때 건성으로 기도하지 마시고 간절하고 깨어 있는 기도를 배우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강력하게 기도하도록 몰아가실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무엇인가를 하시려고 할 때입니다. 한나의 기도를 보면 개인적인 기도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11절에 보면 「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자식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한나가 자식을 하나님께 바치고자 서원하고 있습니다. 한나에게 대단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다 보면 기도 안에서 내가 성숙해갑니다. 달라는 기도에서 드리는 기도로 바뀌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하나님께 나의 마음을 헤아려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계속 기도하다 보면 내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게 됩니다. 깊이 기도하다 보면 나와 하나님의 마음이 통하게 됩니다. 내가 기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그것이 기도의 성숙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과 마음이 통하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한나에게 자식이 없었던 이유는 5, 6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니 」,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므로」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한나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자식을 갖지 못한 원통함 안에 하나님의 뜻이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남성의 리더쉽이 다 무너진 시대에서 한 연약한 여인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한나가 처음에는 자식을 달라고 기도하다가 나중에는 자신의 불임을 통해서 그 시대를 안타까워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자식을 낳지 못하는 아픔의 문제가 아니라 더 심각한 이스라엘 전체가 어두운 영적인 불임의 상태임을 이 여인을 통해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부르짖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는 기도는 바로 중보기도입니다. 우리 교회가 앞으로 중보기도에 관한 사역을 많이 펼쳐가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기도하는 자를 일으키시기를 원하십니다. 모든 시대에서 중보기도하는 자들을 사용하셔서 그 시대를 살려 가십니다. 오늘 철야기도회가 이 도시를 위해 중보기도하는 좋은 자리라고 믿습니다. 내 문제에 매달리지 않아도 이 땅을 위해서 중보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알아서 다 하십니다. 자기 자녀만을 위해서 기도해도 다 보호해 줄 수 없습니다. 병든 이 시대의 문화와 제도적 개혁을 위해서 중보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마지막까지 하고 계시는 유일한 사역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중보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가 하는 것입니다. 한나는 자식이 없는 문제로 하나님 앞에 원통함으로 간절히 기도했는데 기도하다가 하나님과 마음이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 시대의 어둠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기도할 때 경험해야 할 축복은 나의 기도제목을 벗어나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마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어떤 문제로 기도하는데 나의 영적인 상태 때로는 교회, 한국교회의 영적인 상태를 보여주실 때가 있습니다. 저는 이 밤에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기도가 여러분 안에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들이 많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의 방향을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저는 교육 전도사 때부터 한국 교회를 위해서 많이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이 시대에 한국교회가 회복되기를 원하는 한국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한나의 기도는 아들을 달라는 기도에서 하나님께 아들을 드리는 기도로 변했습니다. 예전에는 보지 못했는데 그 시대가 너무나 어둡고 타락했다는 것을 절감했습니다. 그래서 한나는 하나님을 위해서 아들을 바치기로 결단했습니다. 한 여인을 영적으로 준비시키시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게 하셨습니다. 자식이 없어서 고통을 당했던 여인이 아이를 낳아 젖을 떼자마자 하나님의 전에 바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한나는 그 시대를 이끌어가는 영적 리더를 잉태하고 출산하고 키워 마침내 이스라엘의 어둠을 걷어 내는 위대한 역사를 이뤘습니다. 비록 초라한 불임의 여성이지만 하나님은 그 여인을 사용해서 역사를 밝히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십니다. 기대했던 사람들에게는 실망하게 하시고 기대하지 않았던 의외의 사람을 일으키셔서 하나님의 일을 행하십니다.

우리의 시대에서 중요한 것은 다음 시대를 일으키는 일입니다. 사사기 시대의 실패는 영적 계승의 실패입니다. 사사기 2장 10절에 「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새로운 세대가 이스라엘을 위해서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앞 세대의 책임입니다. 우리는 자녀의 영적인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자녀교육은 참 어렵습니다. 한국의 고3 입시는 너무나 힘듭니다. 교회 중직자의 고3 자녀가 교회를 나오지 않아도 아무 말 하지 않습니다.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은 성전에서 살았지만, 예배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성전 기구를 놀이 기구로 삼았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없었고 예배를 소홀히 여겼습니다. 예배를 소홀히 여긴다는 것은 하나님을 소홀히 여기는 것입니다. 이 모든 책임은 부모에게 있습니다. 1세대의 태도는 아주 중요합니다. 예수를 믿으라고 말은 하지만 돈을 더 좋아하는 아버지라면 아이들은 예수를 믿을 수 없습니다. 자녀는 부모의 말을 듣고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모습을 보고 순종하게 됩니다. 아이가 전공을 선택할 때 연봉이나 사회적 출세만을 따진다면 믿음의 삶은 실종된 것입니다. 부모가 바른 믿음의 모범을 보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영적으로 자녀를 길러야 할 책임이 있는데 쉽지는 않습니다. 아이들에게 바른 신앙의 전수를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신앙을 무장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세상과의 타협을 물리치는 과감한 태도가 필요합니다. 나도 모르게 영적으로 식어 가는 것이 있다면 우리 자녀의 신앙을 건져내는 것은 어렵습니다. 한나는 그 시대에서 다른 모습입니다. 모성애는 아주 강합니다. 그러나 한나가 사무엘을 하나님의 전에 바치는 모습을 보면 모성애를 뛰어넘었습니다. 얼마가 갖고 싶었던 자식이었습니까? 젖 떼는 순간 하나님의 성전에 바친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에 대한 애착은 누구나 강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식에 대한 애착을 뛰어넘어 어두운 그 시대에 대한 책임감으로 나가갔습니다. 그 시대에 대한 하나님의 아픔을 발견하고 기도의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나실인으로 구별하여 바치기를 원했습니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용기 있는 한 여인의 결단과 헌신으로 역사를 바꾸는 위대한 인물 사무엘을 탄생하게 했습니다. 사무엘은 사사 시대의 어둠을 종식 시킬만한 충분한 영적 지도자로서 역사 속에 서게 되었습니다. 많은 남자가 어둡게 만든 시대를 바꾸는 일에 하나님은 한 여인의 기가 막힌 숭고한 헌신을 사용하셨습니다. 저는 그냥 자식 사랑과 자식을 위한 희생이 아니라 살신성인한 한나의 신앙적 결단을 높이 사고 싶습니다. 오늘 한국 사회의 입시 과열은 엄마들이 일조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세상의 사람들과 똑같이 따라가야 하는지, 우리의 역할은 무엇인지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부모로서 자녀에게 어떤 영향력을 미쳐야 합니까? 성공하는 자녀로 만드는데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쏟아 붓고 공부, 공부하다가 다 놓쳐 버리고 나중에 후회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대학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젊은 날에 은혜 받도록 해야 합니다. 대학 가서 일 년 휴학하고 선교지에 가도 좋습니다. 길게 봐야 합니다. 은혜 받지 않고 영적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세상의 자식이 되어 되돌리기 어렵습니다. 미국의 명문대학 기숙사에서 별의별 일들이 다 일어납니다. 신앙으로 키우지 않고 공부만 시켰다면 후회하게 됩니다.

우리는 새로운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자녀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리더로 키워야 합니다. 먼저 엄마들에게 한나의 마음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한국 사회에서 여인들의 역할이 큽니다. 영적인 경험이 추억으로 남아 있으면 그것이 그 아이를 일평생 끌고 갑니다. 엄마의 기도하는 모습이 뇌리에 박히면 그것이 일생 영적인 힘으로 그를 끌고 갑니다. 그래서 새벽기도에 끌려 나와서 앉아 있는 자체가 큰 영향력이 있는 것입니다. 다음 세대들이 일어날 수 있도록, 젊은이들이 구름떼처럼 모일 수 있도록 그들을 이해하고 용납하고 품고 기도해야 합니다. 다음 세대의 소망이 있는 교회, 다음 세대를 잇는 교회, 공부보다 신앙을 더 말해 줄 수 있는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불임을 통해서 그 시대의 아픔을 불어넣어 단순히 자식을 낳는 문제가 아니라 그 자식을 통한 한나의 위대한 헌신으로 한 시대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오늘 한국의 엄마들, 부모의 세대들이 다음 세대를 잇는 일에 우리의 삶을 드린다면 한국교회는 다시 일어나게 되고 우리 교회는 더 크고 놀라운 부흥이 일어나게 될 것이고 우리의 자녀의 세대에서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일어나 열방을 주께로 돌이키게 하는 일에 쓰임 받는 교회가 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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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예배 :: 권사님의 2주기 추도예배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드리고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오늘은 박ㅇㅇ권사님의 2주기 추도예배로 드리고자 합니다.

         이곳에서 주님의 성전삼아  하나님께 예배 드리고자 하오니 이시간 성령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시어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므로써 하나님께로만 영광돌릴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시작하는 시간부터 끝나는 시간까지 사탄마귀 틈타지 못하게 하여주시기를 원하오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였습니다. 아멘.

 

찬송가 ; 221장 . 나 가난 복지 귀한 성에

하나님의 말씀 ; 요한복음 14 ; 1 ~ 3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 요한복음 14 ; 1 - 3
 

*** 우리의 인생을 볼때 참 너무나 짧은 것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가 어려서 부모님 밑에서 형제자매들과 함께 성장하며 자랐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모두 가정을 이루고 또한 자녀들이 성장하여서 손주들까지 보게 되는 나이까지 이르렀습니다.

이렇게 빠르게 세월이 지나는데 그동안 사는 것에 너무나 급급하여서 뒤도 돌아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박ㅇㅇ권사님이 하나님품에 안기신지도 벌써 2년 이란 세월이 훌쩍 지나가 버렸습니다.

이렇듯이 세월은 유수와 같이 흘러가서 우리도 언제 하나님께서 부르실지 아무도 알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라 하시면 우리는 언제든지 "네" 하고 갈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우리의 생사화복은 오직 하나님 손에 달려있습니다.

세상을 살면서 우리는 너무나 많은 근심과 걱정속에서 여기까지 달려왔습니다.

자녀를 키우며 세상일을 하며 뒤돌아보지 않고 달려왔지만 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켜보시고 계셨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근심이나 걱정도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세상의 근심과 걱정은 뼈만 마르고 상할 뿐이지 아무런 유익이 되지 않는 것이지요.

사람은 동물과 달리 이성이 있으므로 우리가 죽으면 육체는 없어질지언정 영혼은 살아있는 것입니다. 육체에서 영혼이 빠져나오는 것이지요.

그러면 그 영혼은 어떻게 될까요.

도무지 구원을 받을수 없었던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시므로 우리는 빛으로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어도 천국을 갈수 있는 소망이 생긴것입니다.

지금 이땅에 사는 세상은 잠깐이지만 천국은 영원한 것입니다.

인생에 태어나서 죽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요. 인생은 일장춘몽이요 화무십일홍입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러니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안믿을수 없는 거지요.

우리는 천국을 가야합니다. 지옥은 정말 갈데가 못됩니다. 우리가 잠잘때 꿈속에서처럼 실제 천국과 지옥은 그렇게 꿈속에서처럼 살수있다고도 하는데 무서운 꿈을 꾸면 꿈속에서도 벌벌떨고 그러는데 지옥은 마치 이렇듯이 지옥에 있는 영혼을 1초도 뜨거운 불속에서 가만 놔두지 않는다고 합니다. 지옥은 물 한방울도 얻어 먹을수 없다고 합니다.

부자와 나사로가 각각 천국과 지옥에 갔을때 천국과 지옥은 바라볼수는 있어도 영원히 오고갈수는 없는고로 부자가 나사로를 보내서 자신의 일가친척을 구원하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박권사님도 천국에 계신데 우리도 모두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서 모든 형제와 일가친척들이 천국에서 만나 영원히 살기를 소망합니다.

 그곳에는 이미 우리가 거할 처소가 예비되어 있는데 그곳을 가지 못한다면 얼마나 슬픈일일까요.

믿지 않는 우리 형제와 일가친척들이 모두 주님을 영접하여 걱정근심 없는 낙원에서 영원토록 주님과 함께 살기를 원합니다. 감사합니다.

 

기도 ;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 이렇게 주님의 은혜로 저희들 감사함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우리 모두 하늘의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저희 가족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늘 주님께서 함께 해주시어 건강과 안전을 지켜주시고 평안함으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살아계신 우리 구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 받들어 기도드렸사옵나이다. 아멘.

 

찬송가 ; 222장. 보아라 즐거운 우리 집

주기도문으로 모든 예배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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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사 안수 및 권사 취임 감사예배

 

 

 

 

제1부 ;

 


묵    도 ;

찬    송 ; 320장(350)  나의 죄를 정케 하사

기    도 ; 성복교회 --- 김애남목사

하나님의 말씀 ; 에베소서 4 ; 11 - 15

찬    양 ; 연주 ---이루디아/전유리

설     교 ; 성도를 온전케 하는 일 ---- 서윤석목사

찬     송 ; 597장(378) 이전에 주님을 내가 몰라

 

제2부 ; 집사안수/권사 취임

 

집사임직자호명.

집사임직자서약.

교우들에게 서약 ;

안수기도(집사)

악  수  례 ;

공       포 ; 김길수 목사

김종수, 이유영씨는 대한예수교 장로회 함께하는 교회 안수집사가가 된 것을 내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공포하노라. 아멘.

 

권사추임자호명 ;

권사취임자서약 ;

교우들에게 서약 ;

권사취임기도 ; 김길수 목사

공      포 ;

김매자, 김정호, 박정화씨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함께하는 교회 권사가 된것을 내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공포하노라 아멘.

 


제 3부 ; 권면/축사

 

권     면 ; 김형석목사

축     사 ; 최형기목사

축     가 ; 조지성청년

기념패증정 ;

인사 / 광고

찬     송 ; 595장(372) 나 맡은 본분은

축     도 ; 서 윤석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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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 장례식 - 추도 예배 설교 예시문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 드리고;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오늘 김00 권사님의 5주기를 맞이하여

하나님앞에 예배로써 이날을 기억하고자 합니다.

 결실의 계절 가을을 맞이하여 이렇게 온가족이 모여

하나님께 예배하게 하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시작하는 시간이오니 마치는 시간까지 사탄마귀 틈타지 못하게 하시고

오직 주님께로만 영광돌려드리는 시간되게 하옵소서.

주님께서 함께하시는 줄 믿사오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찬송가 ; 570장(453) 주는 나를 기르시는 목자

하나님의 말씀 ; 시편 23 ; 1 - 6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먼저 우리가족 모두가 모여서 이렇게 김00권사님의 추도예배를 할수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히브리서4;12(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여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노니)

시편 23편의 말씀으로 예배하는 이곳에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움직여 모두가 하나님을 만나는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예수님을 모르는 세상사람들도 아주 크고 힘이 센 자와 힘없고 작고 약한 자의 싸움을 보고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라고 하는 것을 많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김00 권사님께서 소천하시기전 병원에 입원해 계실때 제가 여러번 읽어드렸던 시이기도 한데  박권사님께서 무척 좋아하셨던 시였습니다.

 이 시편23편의 말씀은  마음을 편안하게 하므로 영혼을 치료하는 치료제 역할을 하는 '시'로써

 다윗이 목동시절을 회상하며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이심을 고백하는 시입니다.

​목동이 하는 일은 자신에게 주어진 양들을 잘 살피고 사나운 짐승으로부터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양은 혼자 힘으로 할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고 멀리 내다보지도 못하는 아주 약한 시력을 가지고 있어서  양에 있어서 목자는 절대적인 존재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목자되시며 우리는 양으로 한치앞을 내다볼수 없기때문에 우리가 주님을 목자로 삼을 때 어떠한 위험으로부터도 보호받을수 있고 또한 부족함이 없는 풍성함을 누릴수가 있는 것입니다.

특히 시편23편은 우리의 갈급한 영혼을 편안하게 해주는데

어떤 사람이 사업에 실패하여 자살의 영에 사로잡혀 죽으려고 했을때 친구의 권고로 시편 23편을 하루에도 몇번씩 반복하여 읽다가 치료를 받고 새로운 삶을 살고 사업에 재기하여 크게 성공을 한사람이 있는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형편과 처지를 다 아시고 살펴주시고 도와주시므로 주의 은혜와 말씀가운데 살아가는 자는 두려움이 있을수 없고 아무런 염려와 근심도 없습니다.

우리가 또 잘 알고 있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왕은 온갖 부귀영화를 다 누렸지만 그 역시 인생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고 했으며, 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고 했습니다.

시편 90;10(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5년전에 박00 권사님이 소천하신후 그동안 참으로 많은 것이 변했고 우리도 그만큼 나이가 먹었으니 주님앞에 갈날도 그때보다 좀더 가까워진것이 사실입니다.

심00 권사님도 ​인생의 오랜 동반자를 먼저 하나님앞에 보내드리다보니 쓸쓸함과 고독감으로 많은 마음의 공허와 허무함으로 인하여 병까지 얻어 몸의 상태가 최악으로 병원에서  혼자 힘으로 숫가락도 들을수 없고 누워서 몸을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로 모든 사람들이 돌아가실것이라고 했지만 지금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렇게 예배를 드릴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3;6(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병원에서 엄마에게 제가 이 말씀을 선포하자 엄마가 큰 소리로 아멘을 한후에 일으켜 세웠더니 다리에 힘이 생겨 일어나 걷기 시작한 것은 우리 모두가 다 아는 사실입니다.

권사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알았기 때문에 믿고 아멘이라 한것이지 만약 말씀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냥 담벼락에다 말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어 결코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호세아4;6에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가 살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듣고 순종하며 따라야 합니다.​

권사님께서 몸을 전연 움직일수도 없고 정신도 올바르지 않으신 상태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끝까지 잃어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기적이 일어나 걷게되어 이렇게 이자리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어디있느냐" 고하는데 예수를 믿지 않는 농부들도 하나님이 계신것은 다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햇빛과 비를 주시는 하나님과 동업관계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세월이 정말 얼마나 빠른지 박권사님께서 손주인 선우결혼을 그렇게도 보고 싶어 하셨지만 못보시고 우리곁을 떠나셨는데 벌써 선우는 한가정을 이루고 두 아이들까지 있습니다.

참으로 긴것 같은 인생길이지만 뒤돌아보면 엊그제 같은것이 점점 나이가 들면서 흐르는 세월도 강물과 같이 빠르게 지나는 것 같습니다.

인간의 생사화복은 오직 하나님 손에 달려있습니다. 우리는 이땅에 순례자로 온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그만 놀아라 하면 가지고 놀던 모든것을 다 버리고 가야하는것이 우리의 인생길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죽는다면 '네가 갈곳이 있느냐'고 누가 물으면 과연 내가 어디로 갈것인지 확실하게 대답을 할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사후세계를 경험하고 돌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자신의 몸에서 영혼이 빠져나와서 죽은 자신의 몸을 바라본다고 합니다. 그리고 환한 빛속에서 주님을 만난다고 합니다.

물론 주님을 만나는것은 믿음의 사람들에 한정된 것이지만요.

사람이 죽으면 실제 몸무게가 10그램 정도가 준다고 하는데 그것은 영혼의 무게라고 합니다.

동물과 사람이 다른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영혼이 있고 없고의 차이라고 합니다.

동물은 죽어도 그램수가 줄지 않고 그대로인것은 영혼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지금도 우리를 지켜보시고 이곳에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모두 믿고 천국에 가서 주님을 만나뵙고 먼저가신 박권사님도 모두 만날수 있는 가족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기도합니다.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주님,

오늘 저희 가족 모두 모여 하나님앞으로 먼저 가신 박00권사님을 기억하는 예배를 드리게 하심을 참으로 감사드리니다.

우리의 목자가 되시는 주님을 모르고 살았던 지난날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제라도 주님을 만나게 해주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인생의 봄 여름을 지나가게 하시고 아름다운 가을에 주님을 만나게 하신것도 참으로 감사합니다.

너무 추운 겨울에 주님을 만나지 않게 해주신것 또한 무한 감사를 드립니다.

남들보다 조금 더 늦게 주님을 만났으니 더 많이 주님을 사랑하며 섬기게 하여주시어 주님 만나는 그날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수 있게 하옵소서.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주님. 주님을 열심히 섬기므로 온가족이 모두가 천 대까지 복을 누리며 사는 믿음의 명문가정 되게 하옵소서.

모든 영광 홀로 받으시길 원하오며 나의 목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올리옵나이다. 아멘.


찬송가 ; 287장(205) 예수 앞에 나오면​

주기도문으로 예배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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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1월 추수감사주일 설교 / 범사에 감사하는 은혜

 

 

 

범사에 감사하는 은혜  (데살로니가전서 5:18)

오늘은 추수감사주일로 지킵니다. 한해 동안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인간다운 삶은 영위하게 하시며, 특별히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신 은혜를 돌이켜보면서 감사하는 주일입니다. 이런 주일을 맞이하여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과연 우리가 이 말씀에 순종하면서 사는지 돌이켜보는 것은 대단히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감사를 많이 하는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훨씬 건강하고 행복하다고 합니다. 감사지수가 높으면 높을수록 건강지수와  행복지수가 높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인간의 행복을 논하면서 다음과 같이 충고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대의 마음 속에 감사하는 생각이 없으면 그대는 파멸의 노를 젓고 있는 사람이다. 부디 다른 공부보다도 먼저 감사하는 공부를 배우라." 그만큼 감사는 우리의 삶을 윤택하고 행복하게 하는데 필수적인 요소인 것입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인간의 근성은 감사에 인색합니다. 심지어 러시아의 대 문호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은 감사할 줄 모르는 두발 달린 동물이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는 우리가 자녀를 키우면서 쉽게 동감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요즘같이 풍요로운 사회에서 부모들은 자식이 원하는 것이라면 대부분 거절하지 아니하고 다 들어줍니다. 그러나 그렇게 애지중지하며 키운 자식일수록 나중에 부모님의 은혜를 망각한 채 살아갑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말세가 가까워 질수록 사람들에게 감사의 마음이 없어진다고 예언하신바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 1절 이하에 보면, 말세에 나타나는 삭막한 인간성 중 하나가 감사를 모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역시 50년 전, 100년 전 그 혹독한 가난가운데 힘들게 살았던 우리 조상들에 비해 훨씬 감사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처럼 세상은 점점 감사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를 향해 하나님께서는 "범사에 감사하라"고 교훈 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범사에 감사할 때, 영과 육이 건강하고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범사에'라는 말은 헬라어로 '엔 판티'(en panti)라고 하는데 이에 대해 영어 성경에서는 크게 3가지로 번역합니다. 곧 '어떤 형편에서든지', '모든 일에', 마지막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도' 감사하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언뜻 보기에 다 비슷해 보일지 모르지만, '범사에'라는 말을 다양한 각도로 살펴 보면 3가지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좋은 일에도 감사할 뿐 아니라 안 좋은 일에도 감사해야 합니다. 사소한 일에도 감사할 뿐 아니라 큰 일에도 감사해야 합니다. 인생의 양지에 있을 때도 감사할 뿐 아니라 음지에 있을 때도 감사해야 합니다. 그래서 감사하지 않고 지나치는 것이 하나도 없게 하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의 참뜻입니다.

 

실로 이 말씀은 우리에게 엄청난 부담감을 줍니다. 어떻게 이 말씀을 실천하라는 것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게다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감사의 내용을 알면 그 고민은 한층 더 무거워집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감사는 막연히 느끼는 고마운 감정이 아닙니다. "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내가 구원의 잔을 높이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소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시116:2-14)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감사에는 적어도 3가지 요소가 있음을 가르쳐줍니다.

첫째로 감사에는 마음이 담겨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하나님께서는 이런 간절한 마음이 담긴 감사를 원하십니다. 어떻게 보답하는 것이 하나님께 감사 드릴 수 있을까? 이런 간절한 마음을 담는 것이 감사요.

 

둘째로 궁극적인 감사의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물론 고마운 사람에게 감사할 수 도 있지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서 "하나님이여 감사합니다" 하고 그 앞에 경배하는 것을 일컬어서 감사라고 합니다. 10명의 문둥병자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제사장을 찾아가는 도중 병이 낫게 되었습니다. 9명은 "우와! 내 병이 나았네. 아이고, 고마워라." 하며 고맙다는 느낌을 가졌지만 그 이상 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나머지 1명, 바로 사마리아 사람은 병이 낫자, "하나님이여 감사합니다" 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가던 길을 돌이켜 예수님에게로 다시 달려왔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 앞에 넙죽 엎드려 주님을 경배하면서 감사를 드린 것입니다.

셋째로 진정한 감사는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는 예물을 들고 나오는 것입니다.
"나의 소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 소원이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약속하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 제 기도를 들어주시고 응답해 주시면 제가 이렇게 하겠습니다."라고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정말 응답해주시면 너무나 감사해서 자기가 서원한 것을 그대로 시행하는 것입니다.

한나는 아들을 달라고 기도하던 중 정말로 아들을 얻자 그 은혜에 감사하여 아들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평생 기도한 것을 다 받고 나니 너무나 감사해서 말년에는 자신이 쌓아 놓았던 모든 재산을 성전을 짓는데 드리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므로 "범사에 감사하라"고 할 때 그 감사에는 마음이 담겨야 하고, 하나님께 경배하는 자세가 있어야 하고, 경우에 따라 감사의 예물을 들고 나와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범사에 감사하면서 살아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굉장히 어려운 말씀입니다. 고맙다고 느끼는 것으로 머물면 안되고, 감사하다는 말로 끝나서도 안됩니다. 정말로 하나님 앞에 거룩한 제사로 드려지는 감사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얼마나 범사에 감사하고 있습니까? 얼마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까? 

이처럼 범사에 감사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3가지를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첫째는 좋은 일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세상이 험하고 악해도 좋은 일이 종종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자비로우셔서 무더운 여름에 소낙비를 주시듯 가끔 우리에게 삶의 기쁨을 주십니다. 

 

자녀를 낳아 키우는 것이 엄청난 수고요, 희생이지만 그 속에서 우리는 좋은 일을 자주 맛보곤 합니다. 평생 부부로서 사는 것이 굉장한 희생과 인내를 필요로 하지만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종종 좋은 일을 주십니다. 한 생을 살면서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면 나름대로 각자에게 좋은 일이 있었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가 경험하게 된 좋은 일마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지 못합니다.

저는 우리 교회 성도들이 감사헌금을 잘하시는 것에 늘 하나님 앞에서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감사헌금을 보면 감사에 대한 성도들의 정성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습니다. 저희 교회는 몇 만 명이 모이는 대형교회입니다. 그런데 몇 백 명 모이는 교회에 비하면 감사헌금이 그리 많은 것은 아닙니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 감사할만한 좋은 일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좋은 일 하나하나마다 '이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하는 뜨거운 심정으로 손에 헌금을 들고 주님 앞에 나오는 사람들이 드물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좋은 일이라고 자연스럽게 감사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긍정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마땅히 감사해야 될 좋은 일을 감사 없이 넘겨버릴 때가 많이 있음을 인정하고 회개할 필요가 있습니다. 

둘째는 나쁜 일에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이 말씀은 일차적으로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향해 주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현재 그들은 엄청난 핍박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장차 받을 환란을 너희에게 말하였더니 과연 그렇게 된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살전3:4) 바울은 전도하면서 이제 예수를 믿게 되면 핍박을 받게 될 것이라고 미리 예언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예수 믿고 나니 엄청난 환란과 핍박이 그들에게 덮친 것입니다. 여기에서 핍박이란 믿음을 지키기 위해 다른 것을 다 포기해야 되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 중국에 가보면 정부와 결탁하여 그들의 비위를 맞추는 삼자 교회는 버젓하게 교회 문을 열어놓고 예배를 드리지만, 공산주의와 타협하지 않고 지난 수십 년 동안 복음을 들고 투쟁한 지하교회들은 지금도 핍박을 받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공 셍리앙(Gong Shengliang) 목사님은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크게 쓰시는 종입니다. 그분을 따르는 신도만 해도 2, 3만 명에 이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통해 구원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면서 집회마다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자 중국 정부에서 핍박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핍박의 구실을 만들고자 그 교회에서 예수 잘 믿고 인물이 있는 여 집사 몇 명을 끌고 가, 공 목사가 성폭행한 사실을 인정하도록 고문을 해서 허위자백을 받아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근거로 공 목사를 잡아 들여 재판을 치루고는 사형선고를 내렸습니다. 이 사실을 안 세계인권위원회는 중국 정부에 압력을 가했고 결국 사형선고에서 종신형으로 감형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핍박이란 예수 한번 바로 믿기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상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형편에 있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핍박 받는 것도 감사하고, 매 맞는 것도 감사하고, 가족들이 끌려가서 죽는 것도 감사하고, 이리저리 쫓겨 다니는 것도 감사하고, 굶는 것도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얼마나 무서운 말씀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아무리 나쁜 일을 많이 보고 마음에 원치 않는 일을 경험한다고 할지라도 핍박을 받는 사람에 비하면 가벼운 것입니다. 핍박 받는 데살로니가 교인에게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신다면,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실까요. 언짢은 일에도, 손해 보는 일에도, 내 몸이 망가지게 되더라도, 사랑하는 이가 일찍 죽는 것을 보고도 감사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감사하라는 말씀입니다.

 

셋째는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기 쉬운 일에도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 빚지고 있는 것들입니다. 숨쉬고 있는 공기로부터 시작해서 마시는 물, 우리가 당연시 여기는 내 몸의 모든 기능, 하나님이 주신 내 자녀, 일용할 양식, 어느 것 하나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날마다 풍성하게 주시니까 우리가 소중한 것을 받고도 당연한 것처럼 여기기가 쉽습니다. 당연하게 여길 때는 감사가 따라오지 않습니다.

 

오늘날 현대 문명은 무엇이든지 당연하게 여기도록 부채질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에서 왔다는 빚진 감정을 갖지 못하도록 합니다. 1세기 전만 해도 사람들에겐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빚진 의식 또는 의존 의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과학이 발달하고 모든 것이 풍족해지면서 서구사회로부터 영향을 받은 모든 나라들이 이제는 빚진 감정 대신 권리 의식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의존 의식보다도 자율의식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잘나고 내가 능력이 있어서 이 모든 것을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에 인기 있는 만화 작가 바트 심슨(Bart Simpson)이 한번은 어느 레스토랑에서 식사 기도를 부탁 받았습니다. 그러자 그가 이런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시여, 우리가 이 모든 음식을 위해서 친히 값을 다 지불했습니다. 그래서 감사할 것이 하나도 없음을 감사합니다." 얼마나 방자하고, 거만하고, 교만한 태도입니까? 내가 누리는 것은 내가 노력해서 내 능력으로 얻었는데, 무슨 감사냐는 말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당연한 것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무서운 범죄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손에서 받았기 때문에 일일이 감사할 의무가 있습니다. 어거스틴이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인에게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할렐루야이다." 입니다. 그 어느 것을 보아도 하나님 앞에 감사를 드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너무 풍족한 세상을 살아서 많이 오염되었습니다. 그래서 빚진 의식보다 권리 의식에 은근히 더 오염된 것 같습니다. 70년 전만해도 우리는 식민지에서 겨우 벗어난 가난한 나라였습니다. 설상 가상으로 6·25전쟁이라는 끔찍한 동족상잔을 겪으면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던 것입니다. 그런 나라가 불과 반세기도 되기 전에 OECD에 가입할 정도로 세계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된 것입니다. 이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지 않으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먹고 마시는 모든 것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보다도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는 냉랭한 마음이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도 전 세계를 보면 60억 인구 가운데서 1/10에 해당하는 6억 인구의 하루 생활비가 1달러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전기가 없는 사람들의 수가 20억이 넘습니다. 식수 시설이 되어 있지 않아 아무데서나 퍼 마시는 사람들의 수는 10억이 넘습니다. 인간다운 삶은커녕 이렇게 끔찍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 조그마한 한반도에서 우리가 이만큼 먹고 마시며 여유를 가지고 살수 있다는 것은 결코 당연히 여겨야 할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한번 종합병원에 가서 진료과목들이 얼마나 많은지, 한 의사가 다루고 있는 병이 몇 가지나 되는지 살펴 보십시오. 병이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병에 걸리지 않고 이렇게 당당하게 걸어 다니고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보통 감사할 일이 아닙니다.

 

정범진이라는 사람은 교통사고로 평생을 전신마비로 살아야 되는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각고의 노력 끝에 미국 브루클린 검찰청의 부장검사까지 되었습니다. 그가 쓴 책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단 하루만 걸을 수 있다면, 내가 가장 하고 싶은 것은 화장실에 들어가 변기 앞에서 시원하게 오줌을 누는 것이다." 그는 전신이 마비되었기 때문에 화장실에 들어가서 볼일을 보는데 2시간동안 사투를 벌일 때도 있다고 합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하나하나 뜯어보면 절대로 당연시 하고 넘길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체스터튼(G. K. Chesterton)이라는 사람의 말에 공감합니다. "나의 주된 인생관은 모든 것을 감사함으로 받고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도록 연습하는 것이다." 우리가 범사에 감사하려면 이와 같은 자세를 배워야 합니다. 좋은 일에도 감사해야 하지만 나쁜 일에도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날마다 누리는 당연한 것들에도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뜻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범사에 감사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순종하지 못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는 것은 허황한 소리에 불과한 것입니다.

 

핍박을 당하고 있는 데살로니가 교인에게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신 것은 아무런 근거 없이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할 수도 없는 일인 줄 뻔히 아시면서 하나님께서 명령하실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실 때는 반드시 그 명령을 순종할 수 있는 은혜까지 준비하십니다. 따라서 범사에 감사하는 일은 은혜의 산물이지, 노력의 산물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은혜를 받아야 가능한 것이지, 노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처한 상황을 뛰어넘어 감사할 수 있는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내가 당하는 모든 일을 앞에 놓고 "할렐루야" 할 수 있는 은혜가 내 안에서 치밀어 오를 때 가능한 것이지, 내가 노력하고 결심하고 연습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데살로니가 전후서를 읽어보면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핍박 중에서도 범사에 감사할 수 있었던 이유가 나옵니다. 바로 구원의 은혜였던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바울을 통해서 복음을 듣고 난후 이렇게 변했습니다.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 말하니."(살전1:9-10) 이 말씀을 다시 한번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예수를 믿고 나서 과거에 우상숭배하던 것을 다 버리고 살아계신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이제 하나님을 섬기는 구원 받은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나아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그분과 함께 영원히 살 하나님나라의 영광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배후에는 이런 구원의 은혜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은혜를 힘입으면 범사에 감사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가 되자 자비로우시고 전능하시며 광대하신 하나님이 그들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러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세상에 있을 동안 너희들이 어디에 가든지 내가 동행해주마. 불 가운데로 지나갈 때도 내가 너희와 함께 하마. 물 가운데로 지나갈 때도 내가 너희와 함께 하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할 때도 내가 지팡이와 막대기로 너를 안위하리라. 원수들 앞에서 너희들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높여주리라. 좋은 일이 생기든, 나쁜 일이 생기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해주마. 그리고 너희들이 어려울 때마다 나에게 기도하여라. 그러면 내가 언제든지 귀를 기울이고 들어주마. 환란 중에 내가 너희를 건져주리라. 악한 자가 와서 만지지도 못하도록 내가 너희를 보호해주리라." 이처럼 헤아릴 수 없는 약속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낸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내 아버지가 되셔서 나에게 주시는 구원의 은혜를 생각하면 범사에 감사하는 자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날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기만을 간절히 고대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핍박을 받기에 더더욱 그러했습니다. 주님이 재림하셔서 그분과 함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 살 것을 생각하면 너무나 황홀한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의 영광을 눈 앞에 그려보면서 현재의 고난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장차 그 나라에서 누릴 영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결론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세상에서 당하는 이런 일 저런 일이 땅에서는 중요하게 보이는 일이지만, 하나님나라의 영광에 비추어 보면 잠깐 지나가는 꿈에 불과한 것입니다. 

 

 

구원의 은혜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한국이 아닌 하나님나라를 위해서 가고 있습니다. 이런 은혜를 받으며 살기에 세상에서 좋은 일에도 감사할 수 있고, 나쁜 일에도 감사할 수 있고, 하찮은 일도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구원의 은혜가 우리에게서 샘 솟을 때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구원의 은혜 때문에 범사에 감사하면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의 은혜가 있으면 얼마든지 승리할 수 있습니다.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에게 구원의 은혜를 충만하게 주시옵소서. 구원 받은 은혜에 취해서 살게 해주시옵소서. 내가 예수님 때문에 얼마나 큰 구원을 얻었는가를 알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 때문에 들어가게 될 하나님나라의 영광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날마다 바라보면서 흥분하며 살게 해주시옵소서." 이런 구원의 은혜가 있으면 세상에서 겪는 어려운 일에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다른 일로는 범사에 감사할 수 없습니다.  오직 구원의 은혜에 우리가 흠뻑 젖어 있을 때 감사할 수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은혜를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넘치도록 부어주시길 바랍니다.

다같이 기도합시다.


"범사에 감사하라고 우리를 향해서 명령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이렇게 명령하신 이유는 우리가 너무나 큰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앞에는 하나님나라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이 큰 구원의 은혜를 우리가 값없이 얻었기 때문에 이 은혜 안에서는 좋은 일도 감사하고 나쁜 일도 감사하고, 큰 일도 감사하고 작은 일도 감사하고, 어떤 일이 일어나도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우리 모두에게 구원의 기쁨을 회복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구원의 감격을 회복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구원 받은 자의 행복과 기쁨을 다시 한번 회복하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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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머니 추도예배순서

 

※ 예배선언 : 인도자

 

"오늘 우리는 돌아가신 할머니를 추모하며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이 시간 신령과 진리로 살아계신 하나님께 예배드리겠습니다. "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

 

(시편90:1~10)


 

※ 신앙고백 : 다함께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다가 거기로 부터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 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 찬 송 : 492장, 다같이

 

1. 나의 영원하신 기업 생명보다 귀하다 나의 갈길 다 가도록 나와 동행하소서

 

2. 세상 부귀 안일함과 모든 명예 버리고 험한 길을 가는 동안 나와 동행하소서

 

3. 어둔 골짝 지나가며 험한 바다 건너서 천국 문에 이르도록 나와 동행하소서

 

[후렴] 주께로 가까이 주께로 가오니 나의 갈길 다 가도록 나와 동행하소서 아멘  
 

 

※ 기 도 : 작은아들

 

인간의 생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믿음과 희망을 가지고 살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또한 새로운 가족을 맞이하여 처음으로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축복을 허락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오늘은 할머니를 하나님 나라로 부르신 날을 기억하며 가족들이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립니다.

 

할머니에게 다하지 못했던 부족함을 용서해주시고 이제 여기 남겨진 가족들끼리라도

 

못다 했던 사랑과 우애를 나눌 수 있도록 행복이 가득한 가정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부모님의 건강을 소망하고 자녀들의 일이 잘 풀려가길 소망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족들 모두가 믿음이 성장하고 더더욱 단단하여져서 하나님께 최선을 다하는 가정이 되길 간구하오니 하나님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언제나 우리 가정을 축복하시고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와 동행하시는 예수그리스도의 이름 받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봉독 : 욥기14 : 1-12절, (큰며느리)

 

1.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생애가 짧고 걱정이 가득하며

 

2.그는 꽃과 같이 자라나서 시들며 그림자 같이 지나가며 머물지 아니하거늘

 

3.이와 같은 자를 주께서 눈여겨 보시나이까 나를 주 앞으로 이끌어서 재판하시나이까

 

4.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에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

 

5.그의 날을 정하셨고 그의 달 수도 주께 있으므로 그의 규례를 정하여 넘어가지 못하게 하셨사온즉

 

6.그에게서 눈을 돌이켜 그가 품꾼 같이 그의 날을 마칠 때까지 그를 홀로 있게 하옵소서

 

7.나무는 희망이 있나니 찍힐지라도 다시 움이 나서 연한 가지가 끊이지 아니하며

 

8.그 뿌리가 땅에서 늙고 줄기가 흙에서 죽을지라도

 

9.물 기운에 움이 돋고 가지가 뻗어서 새로 심은 것과 같거니와

 

10.장정이라도 죽으면 소멸되나니 인생이 숨을 거두면 그가 어디 있느냐

 

11.물이 바다에서 줄어들고 강물이 잦아서 마름 같이

 

12.사람이 누우면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하늘이 없어지기까지 눈을 뜨지 못하며 잠을 깨지 못하느니라

 

※ 설 교 : (짧고 덧 없는 인생)

 

부처는 이 세상을 고통의 바다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고통으로 가득 찬 인간의 실존 앞에 고민하면서 그것으로부터 초월할 수 있는 길을 찾았고 그것을 해탈이라고 불렀습니다. 오늘 본문은 부처보다 훨씬 오래전 인간으로서 견디기 힘든 고통 속에서 욥이 발견한 인간의 실존에 관한 말씀입니다.

 

첫째, 인생은 괴로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1~4절) 여인에게서 난 인간이 이 세상에서 며칠이나 살다가 죽을까요? 욥은 그 날이 얼마 되지 않는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가 회상할 때 대부분의 나날은 시들어 버린 꽃과 같고 실체 없는 그림자 같이 허망하며 순식간에 지나갔기에 진정 그에게 의미 있고 행복했던 나날은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욥은 지난 인생이 고통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솔로몬 왕은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영화를 다 경험한 사람들 중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해 아래서 행한 모든 일이 자신에게는 괴로움뿐이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욥이 생각할 때 이런 인생은 하나님 보시기에 눈 여겨 볼만한 대단한 것도 없고. 심판할 만한 어떤 가치도 없으며, 거룩함을 기대할만한 꼬투리조차 없는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둘째, 인간의 수명은 하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5~6) 욥은 사람이 사는 날이 정해져 있고 그 달수가 주께 있기 때문에 인간이 그 한계를 결코 뛰어넘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마치 주인과 고용 계약을 맺고 일정한 시간 동안 일하기로 한 노동자처럼 주님과 약속된 시간까지 일하다가 우리는 어느 순간 그 때가 되면 모든 고단한 일상을 마치고 고향 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오늘날 의학의 발달로 인간의 수명은 전 세계적으로 매년 3개월씩 늘어난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인간이 보약을 먹고 운동을 하고 애를 써도 오늘밤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결국 나의 수명은 하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셋째, 인간은 결국 허망하게 사라져 버립니다.(7~12) 나무가 잘려도 뿌리가 뽑히지 않는 한 새 순이 나오리라는 희망이 있습니다. 심지어 땅 속에서 그 뿌리가 늙고 그 밑동이 죽는다 할지라도 물 기운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거기서 연한 순이 돋아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람이 죽으면 그것으로 끝납니다. 가뭄에 말라버린 강물처럼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리고 건강했던 사람도 어느 날 땅에 묻히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합니다. 영웅호걸도 절세가인도 지나가는 청춘을 잡을 수 없고 다가오는 죽음을 막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인간은 다 허망하게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인생이 이렇게 괴로움으로 가득 차 있고, 인간의 수명이 그 날과 달수가 하나님께 정해져 있으며, 이 땅에서 아무리 수고하고 애를 쓴다 할지라도 결국 이렇게 안개처럼 사라져 버리는 것이라면 얼마나 허망하고 덧없습니까?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권면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돼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은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며 간절히 사모하십시오. 그날에 하늘이 불에 타 해체되고 그 구성 물질들은 불에 녹아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지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봅니다.”(베드로후서 3:11~13) 이것이 기독교가 불교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거룩함과 경건함으로 2013년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 찬 송 : 221장 다함께

 

1. 나 가난복지 귀한성에 들어 가려고 내 중한 짐을 벗어 버렸네 죄 중에 다시 방황할 일 전혀 없으니 저 생명 시냇가에 살겠네

 

2. 그 불과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시니 나 가는 길이 형통하겠네 그 요단강을 내가 지금 건넌 후에는 저 생명 시냇가에 살겠네

 

3. 내 주린 영혼 만나로써 먹여 주시니 그 양식 내게 생명 되겠네 이 후로 생명 양식 주와 함께 먹으며 저 생명 시냇가에 살겠네

 

[후렴]

 

길이 살겠네 나 길이 살겠네 저 생명 시냇가에 살겠네 길이 살겠네 나 길이 살겠네 저 생명 시냇가에 살겠네

 
 

※ 주기도문 : 다함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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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기예배 설교 <십자가> 어떤 십자가를 지고 가십니까?

 

 


(막15:16-32)


  “아무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마 16:24). 십자가와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예배의 주제입니다. 모든 정상적인 목회자들은 모두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릅니다. 그러나 목회자마다 십자가를 지는 느낌은 다릅니다. 십자가에 대한 나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1. 억지로 지는 십자가(막15:16-25).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서 와서 지나가는데 저희가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에 이르러”(막15:21-22).

 

  구레네 사람 시몬은 예수를 대신하여 얼마동안 십자가를 "억지로" 짊어져야 했습니다. 군인들의 창과 칼 앞에 자존심을 다 구기고 마지못해 십자가를 졌습니다.   이날은 시몬에게 "개 같은 날의 오후"며 재수 없는 날이었습니다. 십자가는 시몬에게 원치 않았던 굴욕이요,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며, 빨리 던져버려야 속이 시원한 불편한 짐이었으며 그가 비방하고 조롱한 형벌에 불과했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의 위협에 시달리다 더 버티면 어쩐지 뒤끝이 좋을 것 같지 않다는 느낌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은 아닐까요? “이보게나, 내가 피 흘려 산 교회를 위해 그렇게 불평과 원망의 느낌을 가지고 십자가를 짊어져야 한다면 이제 그만 내려놓게나. 내 마음이 편치 않네.”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마16:24). 십자가의 감격을 회복하도록 주님, 도우소서! 십자가를 하나 더 얹어주실지라도 기꺼이 지고 갈 수 있도록 우리 마음을 십자가의 은혜로 채워주소서!

 


  2. 마취제를 거절한 십자가(막15:22-25).

 


  “내가 목마르다!” 예수의 외침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십자가를 지는 삶에는 목마름과 고통이 있습니다. 갈증이 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고통과 갈증을 면하기 위해 마취제 같은 쓸개 탄 즙은 거절하셨습니다. 우리들이 목회자가 되어 한 없이 양보하고,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려 할 때 고통과 목마름을 느낍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피곤해지는 순간이 있으며, 좌절을 겪기도 합니다. 하나님, 십자가의 목마름을 성스러운 목마름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우소서! 이런 저런 목마름을 환영하는 모습으로 살 수 있도록 도우소서!  

  예수님께는 십자가의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있으나 쓸개 탄 마취제를 거절하심으로 온 몸 그대로 고통을 느꼈습니다. 비통한 희롱과 조롱, 외면이 주는 정신적 고통도 감수했고 무서운 저주도 온 몸과 영으로 받았습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고 갈보리로 향하는 가파르게 보이는 해골의 언덕을 오를 때 사람들이 제공할 고마운 마취제를 고대하며 십자가를 등에 지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위로인 마취제가 필요 없었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눅23:34). 하나님, 사람들의 비난과 비평에 몸서리치고 있는 저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소서!

  주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조롱하는 자들이나 죽을 준비가 되었다고 큰소리치고는 잽싸게 달아나 버린 제자들을 향한 원망의 느낌, 버림받았다는 서러움의 느낌을 못 박아 버렸기에 마취제를 거절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자기 연민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렸기 때문에 마취제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길 원했습니다. 십자가를 하나님의 축복으로 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여, 우리들을 축복하소서! 십자가를 하나님의 위로며 영광으로 들어가는 감격으로 받을 수 있도록 도우소서! 

 


3. 죽어야 사는 십자가(막15:30-32).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면 믿겠다”고 했으나 주님은 십자가에서 내려 올 수 없었습니다. 우리들의 구원을 “다 이루었다”고 선언할 때까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도록 막고 있던 휘장을 하나님께서 친히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버리심으로 구원의 새롭고 산 길 을 열어 놓으시기까지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내려 올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오직 죽어서야 십자가에서 내려 왔습니다. 저주를 받은 뒤에야 내려 왔습니다. 우리들의 구원을 완성한 뒤에 내려 오셨습니다!

“주님 오늘도 제 몸은 당신께 드리는 희생제물입니다. 명령을 기다립니다.”

  서 아프리카 선교사로 사역했던 테일러 스미스의 기도입니다. 이 기도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오늘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죽을 각오가 되어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들은 교회 사임을 생각하고 있을 지 모릅니다. 우리들은 교회사역을 그만 둘 적절한 타이밍을 찾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린 애써 기도하며 개척했던 사역지를 떠나려는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왜 우리들은 사명을 중단하려는 것일까요? 왜 우리는 더 이상 헌신을 하지 않으려는 것일까요? 죽기살기로 헌신하더니 10년도 못 채우고 사역지를 떠나려는 것일까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갈5:24).

  성령님께서 나에게 물으십니다. "육신적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는가? 세상에 대해 죽었는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지고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길 원하는가?"(고후 4:10)  "아닙니다. 성령님, 내 자존심 때문에 더 이상 목회 못하겠습니다." 성령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죽어야 그리스도가 나타난다네. 네 자존심이 죽고, 네 욕심이 죽어야 교회가 살지 않겠나!"

   

  지금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 있다면?  ‘사람들의 칭찬, 명예, 자존심, 대우’에 대해서 전보다는 더 적게 관심을 기울일 것입니다. 우리는 욕심에 대해 죽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우리들에게 좋게 말하느냐 아니냐가 우리들의 헌신의 질을 결정할 만큼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죽는 순간에 이르면 우리가 하나님의 뜻과 무관하게 열심히 추구하던 것이 별 의미가 없게 됩니다. 죽음의 자리에선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들이 다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혹독한 비판에 대해 죽은 자입니까? 사람들의 불친절에 대해 죽은 자입니까? 오늘도 나 자신을 향해 죽고 하나님의 영광과 목적을 위해 살려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인준하지 않으신 욕심에 대해 죽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죽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열매 맺기 위함입니다.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십자가에서 자아를 단호히 처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진가(眞價)를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게 함이니”(빌3:8-9). 오늘도 십자가를 지는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타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4:10).  하나님, 죽은 줄로만 알았던 내가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조금만 실망해도 분노가 치밀고, 조금만 나의 지도력이 손상 당해도 견딜 수 없어하는 나를 철저히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 주십시오! 내 눈물은 주님을 위한 눈물이 아니라 서러워서, 속상해서, 억울해서 흘리는 눈물 뿐이니, 주여 이 상한 마음마저도 십자가를 못 박을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4. 당돌한 십자가(막 15:42-47; 요 19:38-42)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taking courage)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귀한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요셉이 세마포를 사고 예수를 내려다가 이것으로 싸서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어두고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으매.”(막15:42-47)

 


  하나님의 아들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제자들은 모두 달아났습니다. 예수님은 실패자처럼 보입니다. 아무도 예수님 편에 서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십자가 주변에는 그 당시에 아무런 사회적 권리나 힘이 없는 여성들만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실패한 것처럼 보이는 순간이요, 실패자의 자리에 나서서 자신이 예수의 제자라며 밝히며 예수님의 시신을 수습해 가겠다고 한 사람이 아리마대 요셉입니다. 그는 주변에 믿는 사람처럼 보이는 이들이 없고, 믿는 사람들이 다 넘어진 것 같을 때 실망하지 않고 나서서 당돌히 십자가를 졌습니다. 억지로가 아닙니다. 마지못하여 십자가를 찾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용기있는 태도로 십자가를 졌습니다.

 

  요셉을 당돌하다고 표현한 이유는 그가 한 행동은 홀로 죄악에 맞서는 용기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반역자의 신분으로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반역자의 시신은 가족들도 가져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요구한 것은 스스로 반역자의 제자라고 공개하는 일이므로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모든 것을 잃을지라도 예수의 제자임을 밝힌 신앙이 바로 빌라도와 세상이 볼 때 당돌한 신앙이고, 하나님이 보실 때 용기 있는 신앙입니다.  “반역자로 몰아가도 좋다. 아니 예수는 반역자가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죄 없는 아들이심을 내가 믿는다. 빌라도 당신도 예수가 무죄라는 것을 알지 않는가!”라는 담대함이 이 시신을 달라는 요구에 담겨있었습니다.

 


  요셉이 용기있게 십자가를 지는 태도는 다른 사람에게 거룩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일찍 예수께 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온지라”(요 19:39). 자신의 신분 노출을 두려워해서 밤중에 찾아왔던 니고데모, 예수님이 비난당할 때 드러내 놓고 변호하지 못했던 니고데모, 드디어 그도 요셉을 보고 힘을 얻었습니다. 당당히 자신이 예수의 제자임을, 예수를 사랑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동료를 보고 용기를 얻었습니다. 니고데모는 장례를 치르기 위해 100근이나 되는 값비싼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가지고 왔는데 이 양은 왕족의 장례를 치를 때에 사용하는 만큼의 많은 분량입니다. 내가 용기있게 십자가를 지고가는 삶이 어둠 속에서 자신들의 존재를 감추고 살아가는 수많은 니고데모들이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와 당당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주게 되도록 도와주소서! 

 

  5. 자랑의 십자가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갈6:14).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아무 것도 자랑하지 않고 사신 분 중에 최초의 미국 침레교 선교사 아도니람 저드슨이 있습니다. 그는 미얀마에서 7년 동안 열심히 사역했지만 7년이 지나도록 예수 믿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주변의 냉대 속에서 자신의 사랑하는 아내마저 병으로 잃었습니다. 자기 아내를 묻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친한 친구가 이렇게 위로했습니다.

“여보게 저드슨 형제, 너무 낙심치 말게나.”

그러자 저드슨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낙심이라고? 예수 안에서 소망은 태양처럼 빛나고 있다네!”  

  25년의 세월이 흘러 저드슨은 미국으로 돌아 왔습니다. 지금까지는 선교하면 영국이 대표였습니다. 미국이 아직 선교에 미약할 때였는데 위대한 사역을 마친 저드슨이 돌아오자 전 미국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를 환영하고 그의 보고하는 자리에 몰려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선교사의 입에서 나올 흥미진진한 선교 이야기들을 듣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데 저드슨 선교사는 첫째 날 우리 죄인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설교했습니다. “역시 하나님의 사람이구나”하고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둘째 날은 저드슨이 번역한 미얀마-영어 사전과 미얀마 번역성경에 대한 이야기도 듣고 싶어했습니다. 또 7년 동안 열매가 없다가 그 후 20여 년 동안 3,000명이 넘는 미얀마 원주민들을 예수님 앞으로 인도하고 침례를 베푼 영웅적인 이야기를 듣고 싶어했습니다. 또 감옥에 끌려가서 죽을 뻔한 고비를 수없이 넘긴 일화도 자세히 알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나 저드슨은 둘째 날도 예수 그리스도만 이야기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사 53:5). 사람들은 셋째 날엔 틀림없이 선교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셋째 날에는 죄의 권세를 깨치시고 부활의 능력으로 오늘도 우리 속에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해 말씀했습니다. 그러자 사회를 보던 목사님이 기다리다 못해 안타까워서 말했습니다.

“저드슨 선교사님, 성도들은 오늘 다른 설교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이야기 말고 선교사님이 겪으신 재미있고 극적인 이야기를 좀 해주십시오. 또 선교사님이 회중교회 선교사의 신분으로 출발했다가 배를 타고 가면서 성경공부를 하는 중에 왜 침례교회 선교사로 바뀌었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에게 이야길 들려주십쇼”라고 부탁드렸습니다.

그러나 저드슨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저에게는 저 영광의 보좌를 버리고 나를 위해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우리 주님 이야기보다 더 재미있고 더 감격스러운 이야기는 없습니다.”  

 

  저 영광의 보좌를 버리고 세상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우리 주님을 이야기하는 것이 가장 감격스럽습니까? 자랑의 십자가가 우리 마음을 꽉 채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십시다. 하늘에서 드리는 예배의 중심도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계 5:12). 아멘!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합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합시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니라”(고전2:2). 아멘.

 

  어떤 십자가를 지고 부활의 주님에게 나아가겠습니까?   (김택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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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2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로마서 3:1-2)

[살기 좋은 세상을 이루려면 물질보다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성도에게는 사명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빛의 사명이란 밝은 세상을 만드는 것, 한 마디로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살기 좋은 세상이 어떤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착하고 의롭고 정직한 세상입니다. 빛의 열매가 그대로 나타나는 세상이 제일 살기 좋은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은 물질문명이 발달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선진국이 되고 기름이 펑펑 나며 억대 부자가 되는 것이 살기 좋은 세상이 아닙니다. 미국의 대표적인 도시인 뉴욕을 멀리서 보면 백층 넘는 빌딩들이 있고 자유의 여신상 등이 보이는 등 참 멋집니다. 제가 뉴욕에 79년도에 처음에 가서 혼자 돌아다니고 UN본부, 자유의 여신상을 꼭대기까지 돌아다녔는데 참 외로웠습니다. 아무도 내게 말을 걸지 않아서 제가 혼자 계신 백인 할머니와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때 제가 제일 놀란 것은 멋지게 봤던 뉴욕이 얼마나 지저분한지 서울, 부산보다 더 지저분했습니다. 하여튼 그렇게 지저분함에 너무 실망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뉴욕에 가난한 흑인들이 많이 살고 있고 백인들은 뉴욕에서 1,2시간 떨어진 곳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폭력, 마약 등 너무 죄악이 관영해서 아파트 값도 뉴욕에서 멀수록 비싼 것입니다. 세계적인 제일 첨단을 걷는다는 도시, 죄악이 관영하는 그런 곳이어서 불심판이 임하면 제일 먼저 임할 것 같았습니다.
아무리 세계의 돈이 다 모이고 예술가가 모여도 그런 것이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뉴욕을 부러워할 것이 없이 부산이 제일 좋은 것입니다. 유명한 교회 목사님들도 우리 교회에 오시면 반해서 또 오시겠다고 하시고 참 좋아하십니다. 앞으로 우리나라도 살기 좋은 나라가 되려면 경제, 물질 문제만 해결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요새 잘 사는 사람은 잘 살아도 얼마나 사회가 부패했습니까! 얼마나 청소년들이 타락하기 쉽습니까! 지구상에 우리나라처럼 아파트마다 위성방송이 들어오는 곳은 없습니다. 지도자들은 백성을 다 타락시키려고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미국도 특별히 돈을 줘야 위성파를 볼 수 있어서 웬만한 집은 볼 수 없습니다. 일본 역시 돈을 집어넣어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수출이 11위정도 하는 대단한 나라인데도 더 잘 살려고 하는데 우리나라가 물질이 없어서 망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나라 백성이 어떤 국민이 되느냐 입니다. 거짓이 가득한 국민이 되는지 어떤 국민이 되느냐에 따라 살기 좋을 수도 지옥 같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좋은 세상이 되려면 남을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본문에 우리가 사는 세상이 밝은 살기 좋은 세상이 되려면 하나 더 교훈을 주는 것이 남을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남의 죄를 정죄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해 보입니다. 나쁜 짓을 하는 사람에게 나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고 남을 판단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 7:1-5)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눅 6:37) 무엇이든지 심는 대로 거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을 심으면 선을, 악을 심으면 악을, 의를 심으면 의를, 불의를 심으면 불의를, 정직을 심으면 정직을, 사랑을 심으면 사랑을, 증오를 심으면 증오를, 남을 비판하면 비판받게 되고, 남을 정죄하면 정죄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 원리를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롬 2:1) 왜냐하면 자신도 같은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남을 판단하다 보면 자신을 정죄하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롬 2:3) 참 무서운 말씀입니다.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이 세상의 누가 남을 판단할 자격이 있고 남을 정죄할 자격이 있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죄와 허물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성경에도 아브라함 같은 믿음의 조상도 허물이 많았습니다. 마음이 약해서 믿음이 부족했겠지만 아내를 아내라고 하지 않고 누이라고 해서 두 번이나 빼앗기는 것입니다. 부인은 두 번이나 남의 품에 안겨도 자신은 사는 것입니다. 얼마나 비겁합니까? 하나님이 분명히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된다고 해도 하갈을 붙여주니까 못 이기는 척 이스마엘을 얻는 것입니다. 결국 아브라함도 허물이 많은 것입니다. 이삭도 야곱도 다윗도 그렇습니다. 남의 아내를 빼앗아 임신시키고 그 남편은 죽이는 등 인간이 할 수 있는 죄악 중 극악한 것은 다 한 것입니다. 베드로 역시 주님을 모른다고 3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물론 주님을 몰랐던 때였지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때리는 등 못된 짓을 많이 했습니다. 하여튼 성경에 모든 인물을 봐도 저와 여러분을 봐도 죄와 허물이 없는 사람은 인류 역사상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 역시 죄와 허물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판단을 받아야 마땅한 그런 죄인입니다. 그런 죄인이 어떻게 남을 판단하고 정죄합니까!

[교만한 사람이 남을 판단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마치 하나님이라도 된 양, 나는 마치 죄가 없는 의인인 것처럼 남을 판단하면 그 사람은 양심에 화인을 맞던지 교만함에 영안이 어두워진 사람입니다. 사람이 교만해지면 영안이 어두워집니다. 그러면 자신의 죄와 허물은 안 보입니다. 왜 이 세상이 서로 욕하고 판단합니까? 교만해서 그렇습니다. 자신의 분수를 생각하십시오. 자신은 어떻든지 남 흉보고 욕하고 판단하므로 세상이 골치 아픈 것입니다. 내가 저 사람을 판단하면 그 사람은 입이 없습니까? 그 사람 역시 나를 판단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교만한 사람들은 누구에게나 미움을 받습니다.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니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치 못하리라』(잠 16:5)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싶으시면 겸손하십시오.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 곧 그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육 칠 가지니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잠 6:16-17)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의 첫 번째가 교만한 사람의 눈인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눈을 보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지만 세상에서도 싫어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조심해야 하는 것은 내가 남보다 신앙생활 잘 할 때입니다. 남보다 기도 많이 할 때, 헌금 많이 하고 전도 많이 하고 더 헌신할 때, 남보다 공부 잘하고 부자 됐을 때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갔을 때 조심하십시오. 교만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저를 가난하게 하셔서 지렁이 밟듯이 계속 밟으셨습니다. 죽고 싶을 정도로 밟으셔서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보니까 그렇게 밟으셨으니까 이만하지 안 그러셨으면 나같이 교만한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그렇게 교만한 줄 아시고 나를 짓밟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은 그게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도 그 교만의 뿌리가 남아서 사람을 볼 때 판단합니다. 사람들을 볼 때 점수로 봅니다. 이게 얼마나 교만한지 모릅니다. 내가 사람을 보는 것이 하나님이 보는 것과 같습니까? 제가 목사님을 볼 때도 평가를 하면서 고생 꽤나 하겠다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그게 미우셨겠습니까? 저는 그냥 사람을 보는 대로 판단한 것뿐인데 그것이 교만한 것이었습니다. 제가 판단을 해서 그대로 판단을 받는 것입니다. 저는 바르게 올바르게 기도도 많이 하고 목회도 잘 한다고 생각했는데도 나를 판단하고 욕하는 사람들에게 저는 참 나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주님은 어느 날 제게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사람을 판단만하고 울어주지 않고 품지도 않고 기도하지 않았던 것을 사랑이 없는 교만한 인간인 것을 주님이 말씀하시 때 깨닫고 회개했습니다.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약 4:6)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잠 11:2) 어디로 가든지 욕을 먹는다고 합니다. 내가 교만한 순간에 나를 욕하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내가 욕을 먹는다고 생각된다면 내가 교만한지 생각해보십시오. 교만이 있으면 욕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일을 잘 해도 좋은 일을 해도 욕합니다.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잠 29:23)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잠 16:18) 『여호와는 교만한 자의 집을 허시며』(잠 15:25) 하나님이 하시면 다 망합니다.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벧전 5:5) 왜 교만한 자를 원수처럼 대적하시느냐? 교만한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서 사람을 판단하고 심판하려 하는 것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오르려고 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이 치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교만에서는 다툼만 일어날 뿐이라』(잠 13:10) 『미련한 자는 교만하여 입으로 매를 자청하고』(잠 14:3)

[교만한 자는 충고를 받지 않기 때문에 망합니다.]

교만한 자가 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책망과 충고를 잘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도를 배반하는 자는 엄한 징계를 받을 것이요 견책을 싫어하는 자는 죽을 것이니라 음부와 유명도 여호와의 앞에 드러나거든 하물며 인생의 마음이리요 거만한 자는 견책 받기를 좋아하지 아니하며 지혜 있는 자에게로 가지도 아니하느니라』(잠 15:10-12)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망하고 죽는 길로 가는지 모릅니다. 그럴 때 누가 충고해주는 것을 잘 듣지 않으면 망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칭찬해주는 사람만 좋아하지 않고 우리의 부족한 점을 지적하면 화가 나고 기분 나빠도 잘 참고 받아주는 것은 보약 중 보약이고 축복 중 축복입니다.
어떤 목사님을 헐뜯는 사람들이 그분의 여러 죄를 폭로하면서 괴롭혔는데 그 목사님은 반항도 싸우지도 않고 ‘나는 그것보다 더 큰 죄인입니다.’하셨습니다. 그런 목사와 더 이상 싸울 수 없는 것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의롭다고 그렇게 훌륭한 목사님을 비난하고 욕하는 것입니까?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악을 저지르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 목사님께서 그 어려움을 조금도 눈을 껌벅이지 않고 이기시는 것을 보고 정말 대단하시다고 생각했습니다.

[교만한 자는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도 듣지 않아서 망합니다.]

교만한 자가 망하는 또 다른 이유는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도 듣지 않아서입니다. 사람의 책망하는 말을 듣지 않는 사람도 망하고 하나님을 경고를 듣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교만한 자가 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도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들을찌어다, 귀를 기울일찌어다, 교만하지 말찌어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그가 흑암을 일으키시기전, 너희 발이 흑암한 산에 거치기전, 너희 바라는 빛이 사망의 그늘로 변하여 침침한 흑암이 되게 하시기 전에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라 그가 흑암을 일으키시기 전, 너희 발이 흑암한 산에 거치기전, 너희 바라는 빛이 사망의 그늘로 변하여 침침한 흑암이 되게 하시기 전에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라 너희가 이를 듣지 아니하면 나의 심령이 너희 교만을 인하여 은근히 곡할 것이며 여호와의 양무리가 사로잡힘을 인하여 눈물을 흘려 통곡하리라』(렘 13:15-17) 교만한 마음이 사람을 완악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힘으로 살 줄 알고, 하나님이 없어도 살 줄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백성이 그렇게 교만하게 살다가 나중에 사로잡혀서 죽을 것을 알고 괴로워하시는 좋은 하나님이십니다. 교만한 마음으로 남을 판단하면 안 됩니다.

[은혜 받은 사람은 항상 겸손합니다.]

자기 자신의 죄와 허물을 아는 사람은 겸손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가 아니면 살길이 없다는 것을 알고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고 내가 죄인이라고 감사합니다. 자신의 죄와 허물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음을 압니다. 예를 들어서 병이 들었다가 나으면 감사합니다. 그러나 병이 들었다가 나은 것이 감사합니까, 병이 안 드는 것이 감사합니까? 평소에 감사하십시오. 병에 걸려 수술하면서 아팠다가 죽지 않은 것을 감사하겠습니까? 아예 병들지 않는 것을 감사하십시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해서 응답받은 것도 많지만 기도하지 않고도 건강하고 밥 잘 먹고 소화하는 것은 보통 축복이 아닙니다. 소화가 안 돼서 약을 먹으면서 ‘건강 주셔서 감사합니다.’하는 것보다 약 먹지 않고도 건강한 것을 감사하십시오. 손가락이 여섯 개가 아닌 것을 감사하십시오. 감사할 것이 정말 많은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하루하루 살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몸이 건강하다고도 할 수 없고 그렇지 않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주일에 다섯 번씩 설교하는 것이 참 대단한데 저에게 사인이 옵니다. 그러면 저는 준비합니다. 주님이 언제 오실지 모르고 내가 언제 천국 갈지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하며 준비합니다. 가슴이 아프고 할 때 ‘앗, 사인을 주시는구나.’ 하며 주님 만날 준비를 하면 모든 욕심이 없어집니다.
자기 건강을 믿지 마십시오. 하루하루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두 눈으로 보는 것, 귀가 들리는 것, 듣게 해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듣게 해주신 것, 거저 주신 은혜와 복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런 사람은 겸손해서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로 압니다. 자신이 제일 죄인이라고 생각해서 남을 판단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보통 은혜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이 이것입니다. 가장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라는 고백은 문학적인 말이 아니라 정말 은혜 받은 사람에게서 나오는 고백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영안이 밝아져서 자신의 약함을 알게 됩니다. 은혜 받으면 겸손해집니다. 그런 사람들은 함부로 입을 열지 않습니다.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 5:5)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훈계라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잠 15:33)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잠 29:23)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잠 22:4) 이 세상에서 정말 지혜로운 사람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미련한 사람입니다.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잠 11:2)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지혜로워지는 것입니다.
여자들이 시집가서 남편의 사랑을 받으려면 겸손해야 합니다. ‘너 없으면 못 사는 줄 알아?’하는 태도는 미련하고 가정이 깨지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지혜로운 여자는 세상에 무엇이든 집에서는 겸손해야 남편의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겸손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어딜 가든 사랑을 받습니다. 그렇게 하면 그 남자가 목숨 걸고 사랑해줄 것입니다. 『지존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사 57:15) 자신의 죄를 통회하며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신다고 하십니다. 내가 아무리 죄가 많고 허물이 많고 과거가 있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 통회하고 내 죄와 허물을 알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과거가 문제가 아닙니다. 만복의 근원,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와 허물을 아는 사람은 항상 거룩하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둘째로 자신의 죄와 허물을 아는 사람은 항상 거룩하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알기 때문에 거룩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받으면 사랑으로 충만해집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입니다. 성령의 첫 열매가 사랑인 것입니다. 그리고 순서가 있는 것입니다.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잠 10:12) 그래서 사랑이 충만한 사람은 성령의 눈으로 사람을 보는 것입니다. 악하고 불의하고 거짓된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기고 자신의 죄처럼 하나님 앞에 용서해달라고 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런 성도를 보면 참 기쁘실 것입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 9:13)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긍휼을 더 원한다는 것은 죄인끼리 싸우며 제사를 지내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긍휼한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긍휼을 베푸는 사람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눅 6:35-37) 37절을 조금 바꾸면 비판하면 비판받고 정죄하면 정죄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용서를 하지 않으면 너도 용서를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면 하나님 앞에 원수 노릇하는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원수에게 선대하라고 하십니다. 즉 좋게 대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비한 것처럼 우리도 자비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원수같이 못된 사람들을 비판하거나 판단, 정죄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던 사울과 그의 후손에게 큰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사울의 손자 므비보셋은 두 다리를 저는 장애인인데 친 아들같이 여겨서 늘 같이 한자리에서 밥을 먹었습니다. 다윗이 큰 죄를 범한 적이 있음에도 존경받고 사랑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다윗의 모습은 곧 주님의 모습입니다. 자신을 늘 죽이려고 따라다니던 그 원수. 죽일 수 있음에도 죽이지 않았던 원수가 죽었을 때, 통곡하며 크게 장사를 지내주고 그 자손들에게 선대했었습니다. 다윗이 한 번 실수를 해도 그의 죽을 때까지 삶은 너무 자비하고 인자하며 주님이 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시 18:25) 사무엘하 22:26절에도 이 시편 내용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우리가 자비를 베풀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자비하신지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족 중에도 문제가 있거나 직장에 문제가 있거나 여러분 주위에 그런 사람이 있을지 모릅니다.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마시고 내 원수라도 사랑하고 선대하며 자비를 베푸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자비를 베푸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넘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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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의 믿음: 누가복음 5:1~11  사복음서강해  

 

구약성경에 나오는 다니엘과 신약성경에 나오는 베드로를 보면 서로 다른 점이 있습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이방 신에게 바쳐진 바벨론 음식을 이스라엘 청년들에게 먹게 해서 바벨론 사람으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다니엘은 그 음식을 거부합니다. 또한, 왕 외에 어느 신이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서 사자굴에 던져 넣기로 한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했습니다. 그 결과 다니엘 6:16에 “이에 왕이 명하매 다니엘을 끌어다가 사자굴에 던져 넣는지라 왕이 다니엘에게 일러 가로되 너의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엄청난 권력 앞에서도, 그리고 핍박 가운데서도 신앙을 꿋꿋하게 지켰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는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하시기 전에 제자들이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 갈 것이라 하셨을 때 베드로는 죽기까지 주님을 버리지 않고 부인하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잡히신 후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보자 예수님의 말씀처럼 세 번이나 주님을 저주하며 부인합니다. 이처럼 베드로는 권력 앞에서 약해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베드로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반석(베드로)이 되게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실패, 연약함, 우유부단함도 있었지만 끝내 하나님은 베드로를 반석으로 만드셨습니다. 이렇게 반석이 된 베드로의 믿음의 특징은 무엇이었는가? 눅 5장을 통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첫째, 베드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베드로는 밤새 그물을 던져 고기 한 마리 못 잡은 날 아침에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말씀을 마치시고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바로 순종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실망에 빠졌던 베드로가 다시금 새 힘을 얻어서 그물을 깊은 데에 던지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가 실망에서 벗어나 희망의 사람이 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눅 11장에서 예수님께서 최고의 인기를 백성들로부터 받을 때 한 여인이 예수님께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도소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믿음의 사람이 되는 데에 첫걸음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음에 있었습니다. 롬 10:17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했습니다.

둘째, 베드로의 믿음의 전진은 죄의 발견에 있었습니다.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내렸을 때에 엄청나게 많은 고기가 잡히는 것을 본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 무릎 아래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의 신앙의 발전은 바로 자신의 허물을 발견함에 있었습니다.

이사야 6장에서 이사야는 성전에 들어갔을 때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이 충만한 것을 보았습니다. 사 6:9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자신의 죄를 깨달은 이사야는 하나님이 보내신 스랍에 의해서 성전에서 달궈진 숯불로 악이 제하여지고 죄가 사함을 받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선지자로서의 사명을 받게 되었습니다. 죄를 깨닫고 죄 용서함을 받아야만 새 사람이 되고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마치 외과술에서 병든 부분을 제거해야만 다시 건강한 몸이 되듯이 베드로는 그의 죄성이 발견되고 회개하고 고침 받고나서 새 사람, 믿음의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셋째, 베드로가 믿음의 사람이 되는 세 번째 단계는

10-11절 “... 예수께서 시몬에게 일러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은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름에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일에 헌신해야 합니다. 대강 믿으려 하면 절대로 믿음이 자라나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실수가 많고, 권력 앞에서 약해지고, 우유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반석이 되었고 오늘날 존경받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죄 용서 받았습니다. 자기 모습 그대로 예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며 맡겼습니다. 그 결과 베드로는 반석이 되었습니다. 요한 21:18~19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고 했습니다. 결국 베드로는 영광스러운 삶을 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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