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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신년예배설교  새해에는 의인처럼 삽시다

시 37:1-7,19-26

새해에는 의인답게 삽시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기를 원합니다. 본문의 말씀은 다윗이 노년에 이르러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비탄시로써 아마도 과거 다윗 자신이 수많은 핍박과 억울한 일들, 사울의 추격과 저주와 욕을 당한 일(삼하 16:5) 등을 배경으로 쓴 지혜시입니다. 다윗은 본 시를 통하여 의인이 고통당하고 도리어 악인이 형통하는 듯한 모순 현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공의의 섭리는 계속되고 있으며 종국에 가서는 악인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을 지킨 의인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것이라는 것에 대해서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살면 어떤 때에는 손해를 볼 때도 있고, 어떤 때에는 정말 억울하게 느낄 정도 분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믿음으로 사는 성도들도 때때로 갈등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특히 요즘처럼 악인들이 오히려 더 잘 되고 득세하고 판을 치는 세상에서는 더욱 더 그러합니다. 세금을 포탈하고 불법적으로 떼돈을 벌고, 호화롭게 살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이 오히려 더 잘 될 때에 믿음으로 온전히 주일을 성수하며 순전한 믿음을 지킨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순적인 현실은 결코 우리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모순적인 현실은 말라기 시대에도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말 3:14-17에서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만군의 여호와 앞에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 지금 우리는 교만한 자가 복되다 하며 악을 행하는 자가 창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 하노라 함이니라”고 밝히고 있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며,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 무익하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고 투쟁하고 애써 보았자 자기만 손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교만한 자들이 오히려 더 복이 있으며, 악을 행하는 자가 창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고 입술로 불평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위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로서 하나님의 책망과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어려운 시대에 산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으로 의인으로서의 삶의 모습을 나타내야 합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새해에는 의인답게 삽시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하는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말씀하시는 “의인”이란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결점이 없는 사람을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인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롬 3:10에서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6:9에서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고 말씀하신 것도 하나님 앞에서 절대적인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하나님의 은혜를 살아가는 자를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바로 의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를 가리켜 “의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의인”이라는 말을 히브리말로 “카도쉬” 또는 “하시드”라는 말로 사용하고 있는데, [카도쉬]라는 말은 [구별된 자 곧 성도]라는 뜻이고, [하시드]라는 말은 “죄로부터 분리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사는 자”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시 31:23),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시 30:4),“성도”,“하나님의 도를 지키는 자”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윗은 본문을 통하여 이러한 의인에게 은혜와 자비를 베풀고 이들을 보존하신다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우리에게 은혜와 자비를 베풀고 계시지만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들은 마땅히 성도다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의인답게 사는 것은 마땅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금년 한해 아무리 어렵고 어려워도 성도다움을 결코 잃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금년 한해를 살아가는 동안에 아무리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을 경험한다고 할지라도 결코 하나님의 백성다움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의인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의인답게 살지 못하면 형식적인 삶을 살았던 [바리새인]와 같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또한 현재 주어진 일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아니하고 현실 도피적인 삶을 살면은 [에세네인]처럼 말씀을 왜곡시키고 경건을 가장하여 자가당착의 오류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말에 “사람이면 다 사람인가? 사람답게 살아야 사람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성도면 다 성도입니까? 성도답게 살아야 성도입니다.”아무리 세상에 악인이 득세하고 악이 광풍처럼 물려온다고 할지라도 성도다움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도록 성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의인답게 사는 것은 어떤 것이며, 의인답게 사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악인의 형통함을 불평하거나 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1-2절,7-8절)
1절 말씀에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악인의 형통함을 불평하거나 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에서 [행악자]란 '행악자'란 “파괴적인 행위를 일삼는 자, 불의를 행하는 자, 불법적인 일을 계획하고 계속 저지르는 자”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불평이란 “격심하게 화를 내는 것”을 말하고, [투기]란 “질투하다 혹은 부러워하다”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거나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라는 것은 행악자들의 파괴적인 행동 때문에 무슨 해를 당할지라도 화를 내어 그들을 대항하지 말고, 불의한 자들이 겉으로 보기에 화려하고 거창한 일들을 행한다고 그것을 부러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즉 신본주의 인생관을 소유한 자들은 결코 인본주의적인 인생관을 가지고 세상의 부귀와 영화를 좇는 자들을 바라보아서는 안된다는 교훈입니다.

그런데 만약 하나님의 백성인 의인이 불의한 자의 일시적인 형통함을 보고 불평한다면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는 경고하시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릇된 방법으로 대항하는 것은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는 악을 행하고 불법을 행하는 자들의 모습에 말려들지 말고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아무리 세상 사람들이 세속화되고 완악하고 교만하다고 할지라도 성도는 성도답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이 아무리 악하다고 할지라도 각 시대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림치는 참된 신자들을 남겨주시고 있습니다. 이것이 남은 자의 사상입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이것을 모르고 실망했습니다. 엘리야는 자기 밖에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내 귀에 의인 7000명을 남겨두었다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리 악한 자들에 득세하는 세상으로 변한다고 할지라도 은혜와 믿음대로 살려고 몸부림쳐야 합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렵다고 할지라도 삶의 중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행악자와 불의를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고, 투기한다면 극서은 공의의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불신적인 행동입니다. 그것은 현실만 바라보았지 살아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그것은 공의로 세상을 다스리고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라도 완악한 말은 입 밖으로 내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입술로 기도하고, 우리의 입술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고, 우리의 입술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우리의 입술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잠 18:21에서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 쓰기를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서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합니다. 우리가 한 말을 하나님께서 다 들으시고 그대로 이루십니다.
말 3:16에서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 139:4에서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상들은 우리의 말을 듣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말을 다 들으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가 말한 모든 것을 다 들으실 뿐 아니라 그대로 준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낙심과 어려움과 환란이 아무리 크다고 하더라도 입술로 범죄 해서는 안 됩니다. 항상 하나님 앞에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감사와 찬양의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들으시는 하나님께서 그 고백대로 축복하시고 큰 역사 이루실줄 믿습니다. 욥이 까닭 없이 환난을 당했지만 결코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했던 것처럼(욥 1:22) 불평하거나 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이렇게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쉽지 않다고 해서 말씀대로 사는 것을 시도하지도 않는 것은 잘못된 행동입니다.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 교회 중심으로 사는 성도라면 결코 불평하거나 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이 불평합니까? 자기를 기준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자기중심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자기 기준, 자기중심으로 사는 사람은 불평, 불만을 품고 살아갑니다. 일에 대한 이해 부족을 가진 자는 불평을 합니다. 예를 들면 탕자의 형은 돌아온 아들을 받아들인 아버지를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에 대한 이해의 부족이요, 자기중심의 사고에 기인한 행동이었습니다. 출애굽 시의 이스라엘의 불평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중심으로 살았다면 결코 불평을 하지 아니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모든 일에 자기중심으로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기에 조금만 어려운 일을 만나면 즉시 반응하면서 하나님과 지도자 모세를 향하여 원망을 하였습니다.(출 16:7-9)

잠 19:3에서 “사람이 미련하므로 자기 길을 굽게 하고 마음으로 여호와를 원망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원망하는 것은 미련한 일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속에 불평을 몰아내야 합니다. 어둠을 물리치는 방법은 빛이 들어오게 하면 됩니다. 마찬가지로 불평을 몰아내는 방법은 감사하는 것입니다. 매일마다 물밀듯이 몰려오는 불평을 매일매일 감사의 생활로 물리치고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욥은 "불평은 어리석음이요 범죄"라고 하였습니다.(욥 1:22) 그러므로 모진 풍랑이 몰아쳐도 그는 불평하지 않고 오히려 감사하였기에 놀라운 축복이 임하였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옥중 생활에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주 안에서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하였습니다.(빌 4:8)
원망과 불평은 하나님을 능력자로 믿지 못하는 불신앙의 태도입니다. 원죄와 자범죄로 영 죽었던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을 생각하면 불평과 불만이 있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조건에서도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우리는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① 악인의 형통함은 순간적이기 때문입니다.(2절) 아무리 악인이 잘 되는 것 같아도 악인들은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같이 쇠잔해지고 말 것입니다(2절) 다윗은 악인들을 가리켜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실 풀이란 잠시 있다 베임을 당하고, 또한 푸른 채소 역시 그 푸르름이 며칠을 못 넘기지 않습니까? 마치 아침 안개와 같고 하늘에 떠 있는 구름 같은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악인의 일시적인 형통을 보고 부러워하고 사모하며, 이런 악인들의 행실을 좋아서야 되겠습니까?
② 악인의 계획은 허망하기 때문입니다. 악인이 숨어 의인을 치러 하지만 그 계획은 허망하여지고 맙니다.(12-13절) 악인이 칼을 빼고 활을 당길지라도 그 칼과 활은 결국 자신의 심장을 겨누게 됩니다(14-15절)
③ 악인은 잠시 잠깐 후면 반드시 하나님의 정하신 심판대에 앞에서 서게 되기 때문입니다.(20절) 그러므로 우리는 불꽃같은 눈동자로 우리 일거수(一擧手) 일투족(一投足)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 결코 불평, 불만을 품어서는 안됩니다.

2. 선을 행해야 합니다.(3절 상)
본문 3절 상반 절에서 “여호와을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의인답게 살려면 선을 행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선을 행하려면 여호와 하나님을 의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뢰하지 아니하면 결코 선을 행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의뢰하다”라는 말은 “...에게 매달리다”(cling to)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여호와를 의뢰하라”는 말은 “선을 행하되 여호와께 매어달린 상태로 행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억할 것은 우리가 선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본적인 삶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며,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서는 결코 선을 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여러분 중에 선을 행할 줄 알면서도 그것을 미룬다면 그것은 은혜 받은 자의 행동이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약 4:17에서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마땅히 선을 행할 줄 알면서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을 행하는 일을 결코 미루어서는 안 됩니다. 마땅히 행해야 합니다. 성도가 선을 행하는 소망은 하나님의 보상에 있고, 선을 행하는 능력은 하나님을 의뢰함에서 비롯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라면 마땅히 선을 행하는 일에 힘써야 하겠습니다.(갈 6:10)

3. 성실로 식물로 삼아야 합니다.(3절 하)
본문 3절 하반 절에서 "...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의인답게 살려면 성실을 식물로 삼아야 합니다. 여기의 “성실”이란 말은 문자적으로 “안전, 보호”를 뜻하지만 성경에서는 주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과 맺으신 언약을 성실하게 이행하사 그에 따른 축복을 주신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성실로 식물로 삼으라”는 말씀은 약속의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날마다 주시는 하나님의 성실된 보상을 체험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로 만족하라고 말씀입니다. 진리로 양식을 삼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양식으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억할 것은 우리에 대하여 성실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양식으로 삼기를 원하는 자들이라면 마땅히 우리 자신도 성실해야 합니다. 의인답게 살려면 성실이 내 몸에 배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성도라면 힘들다고, 어렵다고, 기분 나쁘다고 결코 포기하지 아니하고 주님께서 맡겨주신 일에 대해서 최선을 다하여 감당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진정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원하는 성도라면 그 기쁨을 하나님께 대한 관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그것이 바로 성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사건을 만나면 “이번에는 내가 성실해져야지”라고 결심해 보지만 성실함이 습성화되어 있지 아니하면 곧 실패로 돌아가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늘 부족한 것이 성실입니다. 시31:23절에 "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호와께서 성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히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성실한 자를 보호하십니다.

요셉의 생애를 보면, 꿈을 지닌 소년이었습니다. 그로 인하여 형들에게 미움을 받고 애굽의 종으로 팔리게 됩니다.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가정에서 모함을 받아 옥중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와 같이 어려움이 계속됨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믿고 끝까지 낙심과 불평을 하지 않고 모든 상황에서 성실하였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요셉을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는 자리에 오르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향하여 성실한 사람은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하나님께서 쓰십니다.

하나님께 성실한 사람은 사람들에게도 성실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불평하지 말고 모든 일에 인내와 성실을 그 음식을 삼으시기 바랍니다. 무슨 일이든지 자기 뜻대로 안된다고 조급하거나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낙엽송 같은 나무는 10-15년 생만 되어도 잘라서 사용합니다. 그러나 잣나무 같은 나무는 30-40년 더 키웁니다. 그런데 만일 잣나무가 불평을 한다면 그것은 잘 몰라서 생기는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잣나무는 더 좋은 재목으로 쓰려고 키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낙엽송은 당장 급하게 사용하게 될 재목이 필요해서 잘라 쓰는 것 일 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일의 크고 작은 것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하는일에 최선을 다하며 성실히 행하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보호하십니다.
4절에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의인답게 살려면 하나님을 기뻐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여호와를 기뻐하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긴밀하고 신령한 교제를 통해서 기쁨을 얻어라”는 교훈입니다. 이러한 자세는 하나님 자체를 기뻐하는 자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만남이 기쁘고, 하나님과의 사귐 자체가 즐거워는 사람들은 마음의 소원을 이룰 수 있습니다. 주님을 대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주님 발 앞에서 말씀 듣고 그분과 진정한 사귐을 갖는 것에 대한 즐거움을 느꼈던 마리아의 심정을 가질 때에 하나님께서는 정말 기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의 최상의 방법은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히 11:6에서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실존과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보상하시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자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진 성도는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의 긴밀하고 신령한 사귐을 통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그래서 시 100:2에서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아갈지어다”라고 말씀하고 있고, 시 66:10에서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여 다 그와 함께 기뻐하라 다 그와 함께 즐거워하라 그를 위하여 슬퍼하는 자여 다 그의 기쁨을 인하여 그와 함께 기뻐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때때로 눈물의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를 원한다면 시 126:5-6에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 오리로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결국 기쁨으로 단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본절에서도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쁨되기 원하는 성도에게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와 소원을 들어주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① 성경을 읽어야 됩니다. 왜냐하면 성경 말씀을 읽는 중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② 항상 기도해야 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의 대화니 대화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③ 예배에 참석해야 합니다. ④ 사랑으로 교회를 섬기는 봉사자가 되어야 합니다. ⑤ 영적인 해산의 열매를 맺기 위하여 전도해야 합니다. 삼상 2:7절에 보면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곧 자신이 높아지는 비결임을 알고 오직 하나님만을 높이는 신앙이 귀한 신앙입니다.

본문 5-6절에서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의인답게 살려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여기의 “너의 길”이란 “인생 전체의 여정 뿐만 아니라 삶의 계획, 목표, 방법 모두를 포함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맡기라”는 것은 “돌을 굴려버리다”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너의 길을 하나님께 맡기라”는 것은 인생의 계획을 자신이 이루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께 의탁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마치 큰 돌을 산에서 지고 내려가지 않고 굴려서 내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면 쉽게 내려갈 수 있는 것처럼 그러면 반드시 어렵게 인생을 살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감당할 수 있는 능력과 피할 길을 예비 받으면서 갈 길을 지도받게 됩니다. 그래서 이러한 비결을 깨달은 솔로몬은 잠 3:6에서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수동적으로 나약하게 살라는 말이 아니라 우리의 인생을 우리를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시는 그분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그분이 제시하시는 삶의 인도를 순종하여 좇으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사람 한사람에게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를 우리보다 더 잘 아시는 하나님이 내 인생을 주관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맡기라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다면 그분께 여러분의 앞날을 맡길 수 있어야 합니다. 내 뜻대로 안된다고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면 그만큼 고생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내 뜻과 하나님의 뜻이 다릅니다. 그렇다면 그때 누구의 뜻에 따라야 하겠습니까? 우리인생을 우연에 맡기려고 하지 마세요. 점쟁이나 사주팔자에 맡기지 말고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래서 잠언 16:3에서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베드로 사도도 벧전5:7절에서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고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일의 작정은 여호와께서 하십니다.(잠29:26) 모든 일을 궁극적으로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 나의 인생을 맡기고 나의 소원을 맡기면 그분께서 책임지십니다. 맡긴다는 것은 신뢰한다는 것이요, 신뢰는 곧 신앙입니다.

야곱이 인생 전반부는 자기 뜻대로 행할 때의 실패요, 하나님께 맡긴 후반부의 인생은 성공이었습니다.
인생을 창조하신이가 하나님이십니다. 우주를 만드신 이가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우주 공간을 지금도 경영하고 계십니다. 그런고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창조주 하나님께 인생을 맡기고 살아가는 것이 가장 복된 삶입니다. 그리하기면 하면 본문 6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선악 간에 옳고 그름을 분명하게 하나님께서 밝혀 주십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가 승리하고 복을 받는 것은 사필귀정(事必歸正)입니다. 그것은 정오의 빛에 의해서 모든 것들이 다 드러나는 것처럼 우리가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림치는 것들이 다 드러나게 됩니다. 성도가 이 세상에서 혹시 악인들 앞에서 억울함을 당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그냥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성도가 그 억울함을 하나님께 맡기며 기도할 때에 주님은 그것을 해결하여 주십니다.
본문 7절 상반 절에서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의인답게 살려면 악한 자들의 횡포에도 분노를 폭발하지 않고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참아 기다려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잠잠하고”라는 말씀은 침묵하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신뢰가 없이 인간적인 생각으로 조급해 하거나 자기 나름의 방법을 강구하는 어리석음을 버리고 하나님의 궁극적인 공의의 보응을 믿는 가운데 모든 것을 그분의 뜻에 맡김으로 심령의 평안을 누리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기다리라”라는 말은 “시선을 집중하다”는 뜻으로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바라보고자 자신의 내면의 생각을 한 곳에 집중 시키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뢰하는 마음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역경이 휘몰아쳐 와도 동요하지 말고 참아 기다리면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면서 견디면 마침내 승리를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던 욥은 필승의 때를 알고 참아 기다린 것입니다.
우리들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입니다. 어떠한 어려운 일이 중첩하고, 꿈이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아도 낙심하지 말고 중단하지 말고 참아 기다려야 합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약 1:12에서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악인은 멸망하고 연기처럼 없어집니다. 그러나 의인은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비록 악인이 득세 하는 세상에서 악인들에게 시달리고 괴롭힘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의인은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보호를 받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의인에게 어떤 복을 주십니까?

19절에 "저희는 환난 때에 부끄럽지 아니하며 기근의 날에도 풍족하려니와"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기근 때에도 풍족한 복을 받습니다. 의인은 환난이나 기근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이 상실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의인에게 눈을 향하고 계십니다. 성도에게 다가오는 환난은 성도를 넘어뜨리지 못하고 오히려 그 환난 때문에 하나님만 의지하게 합니다.
여기 '의인'은 예수 믿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죄로부터의 구원을 입은 자를 의미합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천국을 소유한 자를 말합니다. 성경 곳곳에는 의인들이 기근 때에도 하나님으로부터 양식을 공급받은 일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의 백성을 먹이셨습니다. 이삭은 심한 기근의 때에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그랄 땅에 거하면서 농사를 지어 그 해에 백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었습니다(창26:12-13). 이것은 이삭이 농사 기술이 탁월해서 얻은 소득이 아닙니다. 큰 흉년을 만났지만 의인에게 베푼 하나님의 사랑으로 백배의 축복을 얻고 마침내 거부가 되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축복이 성도 여러분들 가정에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베푸시는 특별한 축복이 있기에 하나님을 믿는 자는, 하나님만 의지하는 자는 있는 곳이 광야든, 흉년의 장소든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복 주시고자 하는 성도를 어떤 환경이 방해할 수 있겠습니까? 아합 왕 시대에 비가 오지 않는 하나님의 재앙의 날에도 하나님은 엘리야 선지자에게 어김없이 아침에도 떡과 고기를, 저녁에도 떡과 고기를 제공하셨습니다(왕상17:6).
하나님은 까마귀를 동원시켜서라도 하나님의 일군을 먹이시는 능력을 볼 수 있습니다. 엘리야의 사건은 우리에게 무슨 교훈을 던져 주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전적으로 하나님이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한끼의 양식만 남겨 둔 체 이제 죽음을 맞이해야 할 사르밧 과부의 사건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선지자의 말씀대로 행동하는 사르밧 과부에게 흉년이 지나기까지 일용할 양식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왕상17:10-16).
이처럼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법대로 의인들에게 기근의 날에도 풍족하게 하셨습니다. 경제 기근 속에서도 이 믿음으로 기적을 체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3절에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나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인도를 받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의인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구체적인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갈 길을 미리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의인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감사함으로 그 걸음을 옮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실 때 반드시 평탄한 길만을 제공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다윗은 어릴 때에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왕으로 등극하기까지는 오랜 피난 생활이 필요했습니다. 바울은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울을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보내어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오해하기 쉽고, 실족하기 쉬운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실 때 평탄하고 형통한 길만을 열어 주실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는 길이 평탄하든, 그 길이 좁고 협착하든 그 길이 하나님이 나를 나 되게 하시는 길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정하신 길은 구원의 길입니다. 생명의 길입니다. 영생의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길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는데 성도는 그 길을 가다가 넘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본문 24절에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성도가 가는 길에도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십자가의 길이기에 때로는 좌절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자기의 길을 계속 가게 됩니다. 여기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땅에 몸이 닿을 정도로 넘어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넘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시기 때문입니다(24절). 그러므로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길을 정하셨든지 그 길을 감사함으로 걷는 믿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본문 25절에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의인은 자손까지 복을 받습니다. 다윗은 그의 인생의 여정 속에 하나님이 의인을 어떻게 다루고 계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 구절로 보아 이 시편은 다윗의 인생이 황혼을 맞은 때임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나이가 들은 이 시점에서도 의인은 결코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그 의인의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의인이 받은 축복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손은 흥하게 되어 있습니다. 잠언 10장 3절에도 "여호와께서 의인의 영혼은 주리지 않게 하시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의인들의 후손이 복을 받는 사실이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출20:6, 신5:10). 출애굽기 20장 6절에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왜 의인의 자손이 복을 받습니까? 그 이유는 26절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역시 주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의인은 하나님이 기근 때에도 풍족하게 하심으로 움켜쥐는 자가 아니라 베푸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만을 위해서 물질을 사용하는 자가 아니라 나보다 못한 다른 사람을 위해서, 정말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손을 펴야 합니다. 역시 이런 성도들의 자손들이 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서 많은 것을 하나님께 심어 놓아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 자식을 위한 길입니다.

예수 믿는 우리들은 특별한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구속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기근 때에도 풍족한 복을 받는 신비한 존재들입니다. 우리의 길은 이미 하나님에 의해 정해져 있고 오늘도 우리는 그 길을 걷고 있습니다. 성도가 가는 길은 완전 넘어짐이 없습니다. 성도는 망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자손이 나를 통해서 복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를 잘 믿어야 합니다. 의인답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맡겨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은 장래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보아도, 교회사를 보아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나아가는 성도와 그의 자손이 망했다는 사실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미국의 백화점 왕인 ?죤 와너 메이커?는 가난할 때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세계에서 제일 많이 헌금하는 교인이 되게 하소서!"라고 소원을 아뢰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기도만 한 것이 아니라, 그는 의인답게 살았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를 축복해 주셨는데, 미국의 백화점 왕이라는 엄청난 복을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새해에는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① 불평하지 맙시다.
② 선을 행해야 합니다.
③ 성실로 식물로 삼아야 합니다.
④ 하나님을 기뻐해야 합니다.
⑤ 모든 염려를 다 주께 맡깁시다.
⑥ 끝까지 참고 기다립시다. 그리하면 새해에는 틀림없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누리게 될 줄 믿는데 정말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복을 주실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약속하시는 복을 누리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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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 설교 ♥ 결혼예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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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봉독 고린도전서 13:4-13 행복한 가정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13:13)

서론

1. 먼저 이렇게 혼인 예배를 들릴 수 있게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무엇보다도 귀한 가정 대사에 제가 주례를 맞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축하드립니다.

그간 이 결혼 예식이 있기 까지 여러 모양으로 도와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특별히 양가의 부모님의 사랑의 수고에 감사와 찬앙을 드립니다.

2. 특별히 여기 신분00는 00 선생님과 00 여사님의 삼녀로써 어릴 때부터 정숙함으로 일등 신부감으로 잘 키워주셨습니다. 넘 예쁘고 축복이 됩니다. 자랑스럽습니다.

3. 또한 여기 신랑 000 군은 000 선생님과 000 여사님의 차남으로써 최고의 엄하면서 합리적인 사람으로 키위주시고 더구나 어릴 때부터 신앙으로 자라난 참신한 일등 신랑감입니다.


4. 이런 가문과 가정에서 제가 더 할말이 없지만 자리가 자리인 만큼 오늘 하나님의 말씀으로 행복한 가정이 되는 비결 몇 말씀드리고져 합니다.

 

첫째, 하나님을 잘 믿는 가정이 행복한 가정입니다.


오늘 성경 고린도전서에는 바울이라는 하나님의 사람이 다메셋이라는 곳에서 예수님을 만나서 변화 받고 자신이 기도가운데 개척한 고린도 교회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 곳에 담긴 메시지는 사랑이라는 제목이면서 하나님을 잘 섬기는 가정이 되어야 한다는 원리가 있습니다

두 분은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을 잘 섬기는 가정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잘 섬긴다는 것은 먼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믿는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두분은 그런 신앙을 고백한 그리스도인 입니다. 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잘드리는 것입니다. 또한 매일 하나님께 기도하는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세우신 몸된 교회를 잘 섬기는 것입니다. 요즘 결혼을 하고 2,3년지난면 몇 번의 고비가 있습니다. 그때 신앙 곧 하나님을 섬기는 가정은 해결책이 있습니다. 문제의 정답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없는 가정은 수숩이 어럽습니다.

더불어 위로 하나님을 믿는 것 처럼 서로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믿음이 깨지면 모든 것이 깨집니다. 저사람이 콩으로 메주를 쑷대도 나는 믿는다는 확신을 가질때 좀 늦어도 바쁜가보다 하지... 믿음이 없으면 별 생각을 다하는 것입니다. 두분은 이런 행복한 가정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립니다.


둘째는, 소망이 있는 가정이 행복한 가정입니다.


사도 바울과 고린도 성도들에게 좀 힘들일이 어려운 일이 있었지만 희망 소망 을 가질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두분이 과거 지향적인 사람이 아니라 미래지향적인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좀 어려워도 내일의 희망있고 비젼을 있다는 것을 바라보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자녀에 대한 소망 사업에 대한 비젼 헌신에 대한 포부를 가지시고 위를 바라보는 두분이 될 때 행복의 파랑새는 이집에 계속 머물을 것입니다.

그리고 결혼은 하면 관계가 더 넓어 집니다. 이제는 혼자가 아닙니다. 결혼 전에는 혼자의 관계가 이제는 두 셋 넷으로 복잡해 집니다. 특별히 양가의 부모님를 잘 섬기는 부부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행복입니다. 낳으신 수고 기르신 수고 아무것도 입지 않았을 때 수치를 가려주신 분이 부모님입니다. 양가의 부모님의 관계 어르신들과의 관계가 더 좋아 지는 것이 행복입니다. 부모하고 원수가 되고 부모님 않보는 사람 모든 것 다 가졌으나 행복하고는 거리가 멉니다. 그리고 친구 친척 동료 교우 이웃에게 진정한 장미의 향기가 풍기는 두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 사람들에게 본이 되는 가정이 행복한 가정입니다.


세번째로, 사랑이 있는 가정이 행복한 가정입니다.

여기 사도바울이 세우신 고린도교회와 성도의 관계에서 최고가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는 누구나 머물고싶고 함께 하고 싶으나 미움이 있는 곳에는 다 피라고 싶어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관계가 부부관계입니다. 그 속에 결혼은 정신적 육체적 경제적으로 부모를 떠나는 독립선언입니다. 그런 뜻에는 의무가 있는가 하면 책임도 있습니다. 이제는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마음도 하나 몸도 하나 주머니도 하나 집도하나 침대도 하나입니다.

그 하나됨을 이루어 가는 진한 에너지가 있는데 바로 사랑입니다. ‘남편은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함 같이하라입니다. 먼저 사랑하는 남편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와 허물을 덮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이해 합니다. 또 신부는 사랑만 받는 관계가 아니라 복종하라 했습니다. 여기서 복종은 내 의견이 다르드리도 따르는 것입니다. 순종은 내 의견이 같을 때 따르는 것이라면 복종은 내 의견이 다르드라고 하나님이 세우신 남편이기에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아내를 사랑하는 말씀은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심 같이 입니다. 자기 생명까지 내어 주신 피의 사랑입니다. 아내를 위해서 목이라도 내어 놓는 아가폐적 사랑입니다. 이유가 어떠하든 논리적으로 맞던 틀리던 무조건 두분이 이런 복종과 사랑의 모습으로 살아갈 때 행복합니다. 여자를 힘으로 지배하라고 하지 말고 사랑으로 하고.. 남자를 말로 이기려고 하지말고 순복으로 이기는 아름다운 모습들이 되어서 행복이 뚝뚝 떨어지는 가정이루시기를 바랍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사랑이니라 아멘


끝으로, 행복한 가정을 이르는데 저와 오신 여러분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저는 주례를 맡아 달라고 찾아오는 젊이들에게 반드시 두 가지 질문에 답을 하면 약속을 합니다. 하나는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영접한 사실이 분명하지를 묻습니다. 아니면 믿게 하고 예수를 않믿는다고하면 노합니다. 또 하나는 절대로 어떤 일이 있어도 죽음이외엔 갈라서는 일이 없다고 약속한다고 하면 주례를 응답합니다.

제와 여기 계신분들이 바로 지금까지 이 두사람 곁에서 여러모양으로 함께 하셨던 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는 결혼했기에 끝이 아니라 더욱 관심을 가지고 기도해 주시고 응원해 주시고 책망해 주시기고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증인석에 앉아 계셨던 분들이기에 어떤 일이 있어도 행복한 가정을 꾸미는 대 일조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특별히 신분의 가정에서 딸을 보낸다고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좋은 사위 아들 하나 얻었다고 생각하시고 신랑의 가정에서는 새 사람이 들어 왔으니 어떻게 하나 보자하고 감시 카메라 달라 놓치 말고 내 딸이라고 이제는 내 식구다 생각하시고 예쁘게 봐주시기를 바랍니다.


모두 이 두 사람의 행복한 가정이루고 살기 바라는 마음으로 다같이 힘찬 응원에 박수를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은혜스런 찬양, 기도, 설교를 원하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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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4월 부활주일 부활주일예배설교 부활은 우리의 믿음이다.

부활은 우리 믿음의 기초

사도 바울은 본문 고린도전서 15장 12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그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것이 복된 소식이요, 듣는 자로 하여금 기뻐 뛰게 하는 요점이었습니다. 아마 이러한 말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육에 속한 사람들, 거듭나지 않은 이들에게는 이해가 가지 않고 또 어리석게 들릴 것입니다. 이 일은 바로 신령한 비밀에 속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 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3~14). 육에 속한 사람들, 세상에 속한 이들, 아직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이들은, 1970여년, 거의 이천년 전에 일어난 일, 그 일이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감사하고 기쁜 일이라는 것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 문제의 근원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는, 사람을 새롭게 하고 사람을 개선하고 사람을 개조하여 전혀 딴판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사람 그 자체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개조하기 위한 여러 가지의 행동 양식과 법칙들을 만들어서 시행하곤 합니다. 요즈음 시중에 나와 있는 책들 중에는 사람들을 개조하여 성공적인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책자들이 아주 인기리에 팔리고 있고, 그러한 행동개발을 위한 여러 원칙들을 제시한 책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모든 시도들은 사람이 그냥 그대로는 못쓴다, 사람 그대로는 합당치 못하다, 많은 난제와 문제들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좋은 이상적인 인간상(人間像)을 설정하여 놓고 거기에 이르기 위해 여러 가지의 정책과 실행계획을 세우고 실천해 나갑니다.
동서양이나, 예나 지금이나를 막론하고 남들 보다 앞서 인간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그 인간의 난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를 위해 자신을 던졌던 수많은 이들이 있습니다. 종교가들이 있었습니다. 도덕가들이 있었습니다. 윤리학자들이 있었습니다. 철학자들이 있었습니다. 석가나 공자나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나, 우리나라의 이퇴계나 이율곡 선생 같은 이 등은 그러한 면에서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인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이들 모두가 한결같이 인간의 난제를 개선하고 고치기 위해 사람 자체를 손대었습니다. 인간 자체, 인간성 자체, 인간의 윤리의식, 인간이 가지고 있는 도덕의식 등 자체를 개선시키려고 애를 썼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그러한 노력이 사람들에게 아무런 기여도 전혀 하지 못하였다고 하는 것은 합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어느 정도까지는 그 나름대로의 영향을 끼쳐서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과 정서에 효과를 낸 것만은 사실입니다. 또 사람이기에 그러한 시도를 하는 것이겠지요. 개나 원숭이가 그러한 시도를 하겠습니까? 이런 점에서 그런 시도들이 가지고 있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인간의 문제가 교육이나 도덕성의 고양이나 종교성의 계발이나 어떤 극기 훈련이나 어떤 행동 규례들을 세워놓고 자기를 통제하는 것만으로 해결이 되는 것인가라는 점입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문제의 근본은 인간 자체 내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에 있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과 그에 수반되는 인격적인 제반 문제는 인간 자체를 길들임으로써 해결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사람들이 인간의 난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단순하게 사람이 마음을 잘못 쓰는 것, 행동이 야비하고 세련되지 못하고 교양적이지 못하고, 그래서 여러 가지의 우발적인 사고를 내어 자신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쯤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잘못 쓰는 이들을 잘 쓰게 하고, 야비하고 세련되지 못한 이들을 세련되고 우아하게 다듬고, 교양적이지 못한 이들을 교양적으로 만들어 내면 되는 것이다, 그러한 식으로들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문제는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한 마음을 잘 쓰지 못하고 야비하고 세련되지 못하고 거칠고 교양적이지 못한 것은 하나의 증상(症狀)에 불과하지 그 근본은 아닙니다. 근본은 바로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인간 자체만을 가지고 아무리 집중적이고 주밀하게 연구한다 해도 온전하게 설명이 안 되는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인간은 제대로 설명이 되고, 인간의 난제들에 대한 원인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그 인간 자체를 다루고 개선시키고 세련되게 연마하여 거기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새로운 인간상을 도출하여 내시는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저희 집에서 아주 큰 무를 사왔습니다. 시커먼 흙이 묻고 싱싱하였습니다. 정말 보기 드물 정도로 탐스럽고 크고 퉁퉁하고 살이 많은 일등품 무였습니다. 굵은 부분은 직경 8, 9cm는 족히 될만하였고 무 길이도 약 20cm는 족히 되어 보였습니다. 지난 겨우내 아주 잘 보관한 무였는가 보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기대감이 가게 하는 무였습니다. 저는 옆에서 그 무를 손질하려는 것을 보면서 기대감에 찼습니다. 이제 흙을 털어내고 잘 씻고 칼을 대어 여러 쪽을 내면 아주 쓸모 있을 것 같았습니다. 칼을 대어 그 무의 속을 다 드러내게 잘랐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겉으로부터 약 1.5cm 정도의 깊이까지는 가락지 모양으로 싱싱한 모습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속은 바람이 들어서 말 그대로 시꺼멓게 썩어 딱딱하게 덩어리져 있었습니다.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었습니다. 그 무는 손을 댈 수가 없었습니다. 그 무가 가지고 있는 부패의 요소를 다 긁어내고 거기에 대신 새로운 생명의 풍성을 채워넣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능력이 전혀 없으니 버릴 일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 자체가 그러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근사하게 꾸미고 우아하고 세련되게 다듬어도 속이 부패하여 있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렘17:9).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일에 있어서 그들에게 직접 손을 대어 변화시키고 개선시키는 방식을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썩은 것 자체를 가지고 아무리 해도 생명이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썩은 것 자체에서 생명이 나오게 하실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합당하지 못한 일입니다. 죽은 것 자체에서 생명이 나오게 하지 않습니다. 물론 죽은 자를 살리시고, 썩어 문드러진 것을 살리게 하시기는 하십니다. 죽어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사로의 썩은 몸 자체에서 생명을 뽑아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밖에서 그에게로 생명을 불어 넣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점에서 분명하게 분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썩은 것 자체에서 생명을 찾아 내지 않으십니다. 죽은 것 자체를 가지고 생명을 창출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인간 자체에 손을 대어 개선시켜 새롭게 하시는 방식을 취하시지는 않으십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을 개선시키려는 여러 가지의 행동법칙 자체만 가지고는 우리를 개선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자신의 도덕적 의지로 여러분을 개선시키고 더 착하게 하려는 노력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문제는 해결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셨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 밖에서 그 일을 하셨습니다. 우리 영혼 자체를 가루로 만들어서 새롭게 빚는 방식을 쓰지 않으시고, 우리는 내버려두고 대신 우리 인격 밖에서 먼저 그 일을 하셨습니다. 곧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그 일을 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태어나기 전, 아니 우리 부모들이 서로 만나서 애정을 느끼고 결혼할 마음을 가지기 전에, 아니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 우리의 증조부, 증조모가 태어나기 전에, 바다와 산과 별과 달과 해가 그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 곧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새롭게 지으실 뜻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 안에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시간 세계 속에서 그 뜻을 성취하여 나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 그리스도께서 이천년 전에 동정녀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되시어 아기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죽으셨습니다. 무덤에 장사지낸 바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사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죄로 죽은 우리를 영원히 살리시는 방식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있어서 복음입니다. 영원 전부터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성령으로 잉태되시어 사람으로 태어나셨고, 사셨고, 고난을 받아 죽으셨고, 장사지낸 바 되셨고, 다시 사셨다 라는 이것이 복음의 진수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던 때, 우리가 아직 태어나려면 아직도 1900여년 이상이 더 지나야 했던 그 때에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말입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위해 중요한 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영원한 화해를 위한 대가를 지불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고후 4:18).
우리가 알지 못하던 때에, 우리가 알지도 생각하지도 꿈꾸지도 못하던 때에 말입니다. 우리 인격 밖에서 말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던 때에 말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안에서 저와 여러분을 새롭게 창조하고 계셨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하나님께서 본래 죄로 부패하여 죽어있는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려고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창출하고 계셨습니다.(요 5:24; 10:28~30).
그러니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서의 저와 여러분의 문제, 곧 죄의 문제를 영원히 부수어 다시는 그 죄의 문제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내지 못하게 법정적인 조치를 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우리를 영원히 용서하실 공의롭고 정당한 근거를 마련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므로 이제 누구든지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라고 사도는 말하였습니다. 그 십자가에서 죄가 왕노릇하는 옛 사람을 또한 죽여버리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 6:6)라 하였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옛 사람을 죽이고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을 새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죽이는 일만 해서는 안되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넣어주시는 것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반드시 살아나셔야 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으심 속에서 행하신 대속의 의미가 부활을 통해 확증되고 광포되고 사실적으로 입증이 되었던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었다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의미도 무색해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다시 사시는 것은 필연적으로 있어야 하는 사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 때문에 죽으신 것이 아니고, 우리 죄를 지신 것이니 죽음에 매여 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의 과정을 통해 우리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요구를 완전하게 만족하셨으니,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더 이상 죽으심에 묶어 놓으실 이유가 없으셨습니다. 마치 예전에 대제사장이 백성들을 위해 일년에 한 차례씩 대속죄일에 백성들의 죄 대신 죽은 염소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의 속죄소에 뿌리고 나온 것과 같습니다. 만일 그 제사가 열납이 되지 못하면 거기 들어간 제사장은 나오지 못하였습니다. 거기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위한 속죄희생의 피를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것이요,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속죄일에 백성들은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지성소에 나아가 제사를 드리고 나오기를 간절하게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나오게 되면 환호하며 찬미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죄를 대신하는 염소의 피를 받으셨고 그 대제사장의 드리는 제사를 열납하시고 만족하셨다는 증거였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 들어간 대제사장이 다시는 나오지 못하였다면 백성들은 떨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 자기들의 죄에 대해 자기들에게 직접 물으실 터이니 말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죄를 지시고 대신 형벌을 받으시고 그 증표로 당신의 피를 가지고 하나님의 하늘 성소에 들어가신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들어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한 주님의 십자가의 피를 흡족하게 여기시고 우리 죄에 대한 공의의 요구를 만족하게 여기셨으면 반드시 우리의 대제사장은 다시 살아나오셔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다시 부활하시지 않으시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은 우리 주님의 속죄사역이 완전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새로운 관계를 가지게 되셨음을 광포하실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옛 생명의 체계가 아니라 새로운 생명,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의 관계, 체계를 광포하실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반드시 다시 살아나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되어진 그 모든 효력을 믿음을 통해 각 개인에게 적용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저수지 공사를 하고 나서 그 밑에 있는 논에다 수로를 따라서 물을 나누어주기 시작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이는 그 효력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성령께서 오시었습니다. 그리고 최초의 증거자들인 사도들을 감동하셨고 사도들의 증거를 따라서 믿게 하셨고, 그들이 또한 전도자들이 되어 다시 증거하였고, 그 증거를 통해 당신의 백성들에게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의미에서 전도는 하나님께서 이미 아들 안에서 구원하여 놓으시고 당신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에게 그 효력을 누리고 차지하라고 알리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전도를 통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부활의 확실성은 우리의 믿음의 근거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주님의 부활의 역사적인 사실을 믿지 않으려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고린도교회 안에서도 어떻게 부활하는 일이 있겠느냐고 믿지 않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그 문제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고 하였습니다. 물론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을 정면으로 부인하였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다만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일이 앞으로 없을 것이라고 하는 관점을 나타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사실 따지고 보면 그 이면에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을 부인하는 행동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은 그들 자신이 아직도 거듭나지 못하였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아직 그리스도를 사도가 말하는 대로 믿지 않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아마 그들은 죽은 자가 어떻게 다시 살겠느냐, 썩은 자가 다시 살겠느냐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한 이들의 심정 속에는 과학적으로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냐는 물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식으로 말하는 이들은 그들의 과학적인 고상한 지식과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것을 함께 말하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과학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여 주신 자연질서에 속한 진리와 이치를 발견하여 세운 학문입니다. 그러나 부활은 하나님께서 영적인 세계에 세운 진리와 이치에 속한 것입니다. 부활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영적인 질서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일을 과학 운운하면서 따지는 것은 하나님의 행사의 깊이를 잘 모르고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세계에 대해서만 아는 옅은 지식의 소유자임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세계의 다국면적인 방면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물리적인, 우주 천체적인 질서가 있습니다. 심미적인 세계, 소리와 시각과 색조의 세계, 그 속에서 진리를 발견하여 그 원리를 적용하여 예술이라는 것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세계에 세우신 질서가 있습니다. 나무에서 잎이 나고 꽃이 피고 달고 맛있는 과실이 크게 열리는 것을 과학적으로 어떻게 설명이 가능하다는 말입니까? 과학적으로 열매를 낼 수 있습니까? 주어진 현상의 질서를 연구하고 관찰할 뿐인 것입니다. 사람의 인체의 신비에 대해 어떻게 안다는 말입니까? 영적인 원리, 하나님께서 당신과 사람 사이에 세우신 영적인 원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활이 없다고 하는 이들은 영적인 원리에 대해 무식한 자들입니다(고전 15:13~14).
복음의 진수는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사셨다는 데 그 핵심적인 요소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가르친 것은 도덕적인 착함과 공로와 업적을 쌓아서 구원받는 것을 가르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그 사실, 그것을 전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바로 자기의 구주로서 그 일을 하셨다, 나를 위해 죽고 나를 위해 다시 살았다라고 믿는 사람에게 그 구속의 효력이 미치게 되어 있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속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롬 6:23).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것이 없었다면, 그저 공자와 석가와 소크라테스나 어떤 성현의 말을 배우고 도덕성과 윤리의식을 고취하여 자신을 세우려는 것이나 하등의 다른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라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셨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대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과 그 효력을 성령으로 말미암은 믿음을 통해 우리에게 적용하십니다. 그러니 기독교는 선의 개념이나 이상(理想)의 관념이나 높은 도덕, 또는 윤리 의식을 우리에게 고취시켜 우리를 도덕적으로 개선하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이제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주님께서 다시 사신 그 사실에 기초하여 그 사실의 효력을 누리며 산 소망을 가지고 참된 기쁨을 가질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얻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 1:3~4).
베드로 사도는 성도들의 ‘산 소망’의 충분하고 완전한 근거를 오직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러니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이 없었다면 기독교의 모든 교훈, 아니 성경 전체는 아무 것도 아닌, 하나의 케케묵은 골동품 서적의 가치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과 그 모든 행사에 대한 것은 거짓 것으로 드러날 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주님의 부활의 사실성과 필연성을 강력하게 역설하고 있었던 것입니다(고전 15:16~19).
모든 사도들은 모든 이들에게 바로 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되심과, 그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실을 증거하고 그 사실을 기초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역설하였습니다. 어느 사도도 그 사실을 빼놓고 자기의 강론을 시작하거나 진행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그리스도와 그에 관한 모든 사실들의 증인으로 사람들 앞에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사실이 아닐진대 자기들은 거짓 증인으로 발견될 것이라고 합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 15:15).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믿음의 터를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부활하심의 확실성 위에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 보혜사 성령님의 역사를 따라서 산 소망을 가진 자답게 죄와 세상과 마귀의 시험을 이기며, 성 삼위 하나님께 영광의 찬송이 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도 성령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주님께서 행하신 그 죽으심과 부활의 영광을 우리에게 항상 상기시키시고 그 속에서 늘 가르쳐주시고 양육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가지신 영원한 계획과 목적을 이루어 나가십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3~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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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역예배설교(심방예배설교모음) 신앙생활에 성공하려면

 

 

 

신앙생활에 성공하려면
눅 5:1-11
장성규
성공하는 신앙인이 되어지기 위해서는 특히 3가지가 중요합니다.
1.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본문에 보면 게네사렛 호수에서 고기잡이로 생계를 이어가던 시몬에게 주님께서 나타나
서 그의 생애를 변화시켰습니다. 베드로에게 있어서 예수님을 만났다는 자체가 큰 축복
이고 은혜입니다. 우리도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주님을 만나지 못하면 아무리 교회를
드나들어도 신앙에 성공할 수 없습니다. 주님을 만난다고 하는 것은 은혜를 체험하는 것
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가 주님과 동행하면서도 주님
이신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뜨거워졌을 때 그 분이 주님이신 것
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들은 주님과 대화하는 중에 그러한 은혜를 체험한 것입니다. 우리
도 그러한 은혜를 체험하고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 성경말씀을 읽고 듣는 일과 기도하는
일을 열심히 해야 합니다.
2.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사렛의 목수 가정에서 자랐고 베드로는 게네사렛 호수에서 고기잡이로만 살
던 어업의 전문가였습니다. 그런데 목수가 전문어부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기의 지식과 경험으로 밤 세워
조업을 하였으나 실패하였기 때문에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라고
말하고 순종하였습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고기가 너무너무 많이 잡혀서 친구의 배를
불러서 두 배에 가득 싣고 나왔습니다. 지식과 경험으로는 실패해도 말씀에 순종하면 성
공합니다. 신앙인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도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하는 자만이 성
공합니다.
3. 사람을 취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 잡은 시몬은 깜짝 놀라서 “주여 나
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는 굴복을 하자 주님은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
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취하라는 말씀은 “생포하라, 포로로 만들
라”는 말씀입니다. 죄의 바다에서 허덕이는 사람을 잡아내서 예수님의 것이 되게 하라
는 말씀입니다. 쉽게 말하면 전도자가 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베드로는 곧 자기 배를
버리고 주님을 따름으로서 거듭난 사람,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신앙인으로 성공한 것입
니다. 무릇 신앙에 성공하고자 하는 사람은 사람을 취하는 전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전
도보다 더 좋은 신앙성공의 길은 전에도 지금도 내일에도 없습니다.
면목교회목사


위기에몰렸을 때
민 16:41-50
김창인

1.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41-42)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광야생활을 하는 중에 고라를 중심으로 작당한 250명이 모세를 대 적했습니다. 모세를 대적한 것은 결국 하나님을 대적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모세를 하 나님이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개입하사 그들을 정리하셨습니다.
본문을 보면 고라당파의 죽음을 이유로 온 회중이 모세와 아론에게 달려들어 돌로 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오랫동안의 종살이로 불평불만에 이골이 난 백성들의 폭동은 겉잡 을 수가 없었습니다. 모세와 아론도 속수무책으로 위기에 몰렸을 때 그들은 하나님을 바 라보았습니다. 하나님만 의지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영광으로 나타나 해결해 주셨습니 다. 위기에 몰렸을 때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2. 함께 엎드려야만 합니다 (43-46)
여호사밧왕 때 모압 자손과 암몬 자손과 에돔 자손이 연합하여 유다를 침공하였을 때 유 다로서는 불가항력적인지라 여호사밧 왕을 위시하여 온 국민이 함께 하나님 앞에 간구하 였습니다. 그 날 밤에 침략군 내부에서 내분이 일어나 서로 죽임으로 자멸하고 말았습니 다. 위기에 몰렸을 때 유다 백성은 하나같이 모두 다 함께 하나님 앞에 엎드려 도움을 간구하여 승리하였습니다.
본문을 보면 모세와 아론은 자신들이 위기에 몰렸을 때 함께 하나님 앞에 엎드려 말씀
을 들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민족이 멸망의 위기에 처했음을 알았습니다. 이때 모세는 아 론으로 속죄제를 드리게 하므로 위기를 넘겼습니다. 성도는 위기에 몰렸을 때 함께 하나 님 앞에 엎드려 합니다.

3. 문제 속으로 달려가야 합니다 (47-50)
광야 생활을 끝낸 이스라엘은 가나안을 향해 행진 할 때 요단강이 가로막고 있었습니 다. 요단이 넘치는 시기였기에 큰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은 그 큰 문제를 피하라 하지 않 으셨습니다. 큰 문제를 해결해 주신 다음에 건느게 하셨던 홍해의 경우와는 달랐습니 다. 그 큰 문제 속으로 뛰어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결국은 요단을 건널수 있었습니 다. 문제에 직면했을 때 피하지 말고 부딪치라는 뜻입니다. 그때 문제가 해결되는 법입 니다.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 가운데 염병이 시작되어 겉잡을 수 없이 사람이 죽어갑니다. 아론 은 향로를 들고 백성들 가운데로 뛰어들었습니다. 그 가운데서 속죄제를 드렸더니 염병 이 그쳤습니다. 그 문제 속으로 뛰어 들어가야 합니다.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요 18:33-35
홍 기
창조주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과 그의 아들 가인에게 처음으로 물으신 질문이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이다. 그리고 마지막 날 모든 사람들을 심판대 앞에 세우시고 물으
시는 질문 역시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가 행한 것들
을 기준으로 상과 벌을 내리신다. 그 뿐만 아니라 매 순간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질
문은 “네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 이다. 하나님께서 이 질문을 끊임없이 하고 계
시는 이유는 우리를 참된 신앙의 소유자로 세우시려는데 있다. 우리 신앙인들이 매 순간
마다 “네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라는 하나님의 질문 앞에 어떤 대답을 준비하
며 사느냐에 따라 ‘참된 신앙인’인가의 여부가 결정된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이 질문을 생활 속에서 들을 수 있는가? 모래 시계를 보듯이 자신
의 날을 계수하며 사는 사람이다.
따라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의 날을 계수하는 사람이다.(시90:12) 우리는 우리 인
생의 모래 시계를 볼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는 우리 인생의 없어진 시간과 아직 남
은 시간 사이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에게 기회는 아직 남은 시간들이다. 남은
시간을 아름답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로 채우는 사람이 성공한 인생의 소유자요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사람이다. 우리가 남은 시간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로 채우기
위해서는 영적인 귀를 열고 “지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하고 물으시는 하나님의 질
문을 듣고, 이 질문에 합당한 대답을 준비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는 영적인 귀를 열고 “네가 무엇을 하고 있느냐?, 네
가 무엇을 하였느냐?”라고 묻고 계시는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사모하자. 성공한 인생,
복된 인생은 부자가 되고, 출세하고, 명예를 얻는 것이 아니다. 매 순간마다 “네가 무
엇을 하였느냐?”고 물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이에 대한 대답을 준비하며 사는 사
람,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물으시는 “네가 무엇
을 하였느냐?라는 질문을 듣고,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준비하며 사는 사람이다.
이제 우리도 이 질문을 듣는 귀를 열고, 나의 남은 시간을 소중하게 살되, 하루 하루를
뜻있고 가치있게 살자. 거기에 하늘의 상이 있고, 하나님이 주시는 신령한 복이 가득한
인생의 소유자가 되는 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제주남원

따라가라 그리하면 응답을 받으리라
마 15:21-28
김삼환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실 때 한 가나안 여인이 예수님께로 와서 애원을 합
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이 들렸나이다.” 이 어머니
는 자신의 딸을 지극한 정성으로 돌보았지만 딸에게 들어간 흉악한 귀신을 쫓아낼 수 없
었기에 주님께 나온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내 딸을 고쳐주소서.” 예수님은 한
마디 대답도 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또 따라갑니다. 예수님은 냉담하게 말씀하십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갈기갈기 찢어지고 많은
사람에게 개 취급을 받았던 이 여인이 주님에게 이런 엄청난 모욕과 저주를 받을 때의
심정은 어떠하였겠습니까?
그러나 이 여인은 믿음의 여인이었습니다. 고침을 받는 길을 알았습니다. 은혜를 받는
길이 무엇인지 아는 여인이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께 애청합니다. “주여 옳소이다마
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비로소 예수님께서 여인
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여자야 너의 믿음이 그렇게 클 수가 없구나. 너는 네 딸과 함
께 행복하게 살 것이고 오늘 이 시간부터 네 딸에게 역사 하는 더러운 귀신은 나갈 것이
니라.” 구원이 이 집을 찾아왔습니다.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모든 저주가 물러가고 천
국 같은 새로운 삶이 주님으로부터 이 가정에 주어지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
러분! 주님을 따라가되 끝까지 따라가야 합니다. 믿음으로 따라가야 합니다.
구원은 이렇게 얻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이런 사람을 도우십니다. 이런 사람에게 치료
가 오고 은혜가 주어지게 됩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과 하나님 앞에 쓰임 받은 지도
자들은 다 이런 사람들입니다. 끝까지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끝까지 주님
을 따라갈 때 주님께서 이 가나안 여인에게 베푸신 은혜를 우리에게도 베풀어 주실 줄
믿습니다.
고치시는 분은 주님이지만 따라가는 것은 내 몫입니다. 응답은 주님이 주시는 것이지만
용기는 내 몫입니다. 결단은 내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켜야 주님이 길을 열어 주시
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나아갈 때 기적이 일어나지만 물러서는 사람과 머무는 사람은 멸
망을 당합니다. 기독교는 앞으로 나아가는 종교입니다. 움직이는 종교이며 살아 역사하
는 생명의 종교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피곤하고 힘들고, 삶이 한없이 무겁고 곤궁하다
할지라도 주님의 뜻대로 행하고자 하면 주님은 반드시 그 믿음대로 되게 하시고 길을 열
어 주실 줄 믿습니다.
명성교회목사

내 삶의 중심에 무엇이 있습니까?
요 17:1-5
김재남

토즈라고 하는 신학자는 자아발견의 제일조건으로 “내 소원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지금 나의 소원이 고상한 것인가, 아니면 저급한 것인
가? 남이 알아도 자랑스러운 것인지, 아니면 남이 알면 부끄러운 것인지 그것으로 자신
의 모습을 가늠해 볼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나의 소원, 나의 기도 제목은 어떠합니까?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명하십니다. 거룩한 기도가 있는 자가 되라
고 명하십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
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1절)
오늘 본문은 공관복음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요한복음에만 기록된 말씀입니다. 신학적
으로는 이를 마가의 다락방에서의 대제사장 기도라고 부릅니다. 왜 요한사도는 겟세마
네 동산에서의 기도보다는 이 기도에 더 비중을 두고서 있을까요?
그것은 이 기도가 지니는 독특한 힘 때문입니다. 그 힘은 다름 아닌, 눈앞에 닥친 엄청
난 고난, 십자가의 죽으심 앞에서 주님이 보여주신 거룩한 기도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의 시대는 마가나 마태나 누가가 복음을 기록할 시대와는 사뭇 다른 핍박의 시
대였습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예수를 믿는 것 때문에 생명을 잃을 처지에 누구나 노출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러한 삶의 자리에서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보다는 마가
의 다락방에서의 주님의 기도가 훨씬 당대에 크게 공감이 되었을 것입니다.
유대 땅에서는 밀과 포도 농사가 주종을 이룹니다. 평지에서는 밀을, 산지가 많은 지방
에서는 포도농사를 합니다. 산지는 특히 돌이 많습니다만, 오히려 그 돌 때문에 포도 농
사가 더 잘 됩니다. 비가 한 방울 내리지 않는 그 건기에도 밤이면 공기 속에 있는 수증
기가 바위에 부딪히면서 이슬을 만들고, 이 이슬들이 모여서 포도 성장에 필요한 수분
을 제공해 주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우리가 고난 앞에서도 거룩한 기도를 해야 하는가요? 그것은
그 메마른 현실 속에서도 은혜의 이슬을 만들어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기 때
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말합니다. 이제는 모든 것이 끝장이라고. 그래서 낙심하고 절망하고 원망
의 덫에 걸려 더욱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 들어갑니다. 그러나 주님의 영으로 거듭난 주
의 백성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름다운동산교회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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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 설날 가정예배 순서
 

 

 

설날 가정예배순서   
개 식 사 ……………………………………………………인 도 자
 
개회기도 …………………………………………………  인 도 자
 
사도신경 ………………………………………………… 다 같 이
 
찬 송 ……………………………………… 552장 …     다 같 이
 
대표기도 …………………………………………………가 족 대 표
 
성경봉독 …………………(고린도후서9:6-11) …… 가 족 중
 
6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8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9 기록한 바 그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10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11 너희가 모든 일에 넉넉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그들이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
 
설 교 ………………모든 것이 넉넉한 한 해 ……………………맡 은 이
 

찬 송 ………………………………… 490장 ……………………다 같 이
 
가족 나눔의 시간……( 작년 회고와 새해 기도제목나누기)…  다 같 이
 
광 고 ………………………………………………………………  인 도 자
 
주기도문 …………………………………………………………    다 같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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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설명절 가정예배 (New Years DaY home worship)

 

 


 

설 명절 가정예배 순서지

 

- 가 정 예 배 순 서 -

 

예배의 부름..................................................................................................인 도 자

사 도 신 경.................................................................................................. 다 같 이

찬 송 가 .........................   559장(사철에 봄바람 불어 잇고)..................................다 같 이

기   도........................................................................................................인 도 자

성 경 말 씀...................................로마서 11장 33-36절......................................다 같 이

말 씀 선 포...................................  본향이 있는 인생       ..................................인 도 자

기 도..........................................................................................................인 도 자

광 고..........................................................................................................가족대표

찬 송 가...................................301장(지금까지 지내온 것)...................................다 같 이

주 기 도 문...................................................................................................다 같 이

 

 

<성경> 로마서 11장 33~36절

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깊은 찾지 못 할 것이로다

34: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35: 누가 주계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찬송> 559장 사철에 봄바람 불어 잇고

1. 사철에 봄바람 불어잇고 하나님 아버지 모셨으니 믿음의 반석도 든든하다 우리집 즐거운 동산이라

2. 어버이 우리를 고이시고 동기들 사랑에 뭉쳐있고 기쁨과 설움도 같이하니 한간의 초가도 천국이라

3. 아침과 저녁에 수고하여 다같이 일하는 온식구가 한상에 둘러서 먹고마셔 여기가 우리의 낙원이라

[후렴] 고마워라 임마누엘 예수만 섬기는 우리집 고마워라 임마누엘 복되고 즐거운 하루하루

 

<찬송> 301장 지금까지 지내온 것

1.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한이 없는 주의 사랑 어찌 이루 말하랴

자나깨나 주의 손이 항상 살펴 주시고 모든 일을 주 안에서 형통하게 하시네

2. 몸도 맘도 연약하나 새 힘 받아 살았네 물 붓듯이 부으시는 주의 은혜 족하다

사랑 없는 거리에나 험한 산길 헤맬 때 주의 손을 굳게 잡고 찬송하며 가리라

3. 주님 다시 뵈올 날이 날로 날로 다가와 무거운 짐 주께 맡겨 벗을 날도 멀잖네

나를 위해 예비하신 고향집에 돌아가 아버지의 품안에서 영원토록 살리라

 

<설 교 문>

올 설날도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찾아 대이동을 합니다. 내려가는 길, 올라오는 길, 모든 길이 고생길인데도

사람들은 그 고생을 마다 않고 고향을 찾아갑니다. 설날에 고향을 찾아 대이동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마치 거대한 자석 같은 것이 있어서 그 이끄는 힘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고향을 갈 수 없는 사람들도 고향 땅이 있는 곳을 바라보며, 고향을 찾아갈 수 있는 날이 속히 오기를 간절히 바라며 고향을 찾아가지 못하는 허전함과 슬픔을 달랩니다.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 그 고향에서 죽어 그곳에 묻히고 싶은 마음, 이것은 본능적인 것입니다.

 

고향으로 그리워하고 그곳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본능은 최초의 인류로부터

유전되어 온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는 그 어딘가에 반드시 돌아가야 할 고향이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곳이 바로 우리의 본향인 하늘나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지음을 받았는데, 죄악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단절되면서 모두 본향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고향으로 그리며 그곳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이러한 현상은 결국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고자 하는 본능이라 하겠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말씀에 보면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간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와 그 역사가 모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진행되며, 그를 위하여 존재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바르게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파악하고 그 역사의 흐름을 올바로 따르는 것입니다.

 

시편 37:23-24말씀을 보면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나니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고 하였습니다. 주께서 기뻐하시는 길이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걷는 길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뜻을 따라 그것을 거스르지 않고 따라 사는 길이 바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길입니다.

 

그리고 그 길을 제대로 걷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 발걸음을 지켜 주셔서 그가 혹 넘어지더라도 붙들어 일으켜

주시며, 그 길을 형통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인간은 주님의 뜻을 따르기보다는 자기의 뜻과 생각을 따라 살아갑니다.

왜 그럴까요? 성경은 그것이 바로 인간의 죄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죄악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아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 자손들을 선민으로 택하시어 그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제대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으므로 마침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어

우리의 죄를 대속하게 하셨고, 그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우리에게 나타내셨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이루어질 하나님의 역사가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과 복음이며 예언서의 기록들로 오늘날 우리 손에 들려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므로 믿기 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죄 사함 받고 구원받으므로 내 뜻을 따르지 않고,

이제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내 뜻이 크게 보였고 그것이 전부였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뜻이 보이고 그것이 우리의 삶의 목표가 된 것입니다. 다시 말 해 내 욕망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에 중심에 자리 잡게 된 것입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지금 당장 우리가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역사의 큰 흐름을 되찾아 들어가 그 흐름을 타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을 본향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우리가 똑바로 보고 그 부르심을 좇아 지혜롭게 행하면,

우리의 역사를 하나님께서 시작하시고, 그가 주관하시며, 그가 그 역사를 심판하실 것이며,

그를 위한 역사로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역사의 흐름을 올바로 인식하고 충실하게 그 역사를 따라 살아가기를 힘써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런 자들을 위하여 성경에서 약속하신 모든 은총을 우리가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가 우리를 붙잡아 인도하시며, 그 자손이 복을 받게 하시며, 땅을 차지하게 하시며,

그 미래를 보장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것입니다.

 

결론을 맺겠습니다. 설날을 맞아 우리 모두에게는 반드시 돌아가야 할 본향이 있음을 깨닫고,

그 본향에 이르기까지 날마다 믿음으로 말씀에 복된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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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믿음 튿별한 은혜 <기생 라합에관한 설교>

 

 

 
특별한 믿음 특별한 은혜.

 

여호수아   2장  8절

 

하나님의 일꾼은 무엇보다도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기 때문입니다

 

(히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믿음이 없는 헌신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행함으로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야고보 사도는 말했습니다.

 

노아도 방주를 짓는 생활로 믿음을 증거 했습니다.

(히 11: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아브라함도 행함으로 믿음을 보였고 했습니다.

(히 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라합은 특별한 믿음으로 특별한 복을 받은 여인입니다.

 

히 11:31.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 하였도다

 

1. 라합의 특별한 믿음.

 

1) 선교를 계시한 믿음이다.

  

가나안 종족은 여호와를 섬길 수 없는 종족이다. 가나안 종족은 함의 넷째 아들 가나안의 후손들이다. 그러기 때문에 저주를 받은 종족의 후손이다. 그러기에 노아로 하여금 땅을 상속 받을 소돔 고모라를 중심으로 하는 땅을 분할 받았다.

 

선민의 시대에 종족적으로 믿음을 가질 수 없는 종족이다. 그런데 이방인으로서 여호와를 영접하고 그에게 속한 여인이다. 자원하여 여호와께 돌아온 여인이다.

 

저주받은 종족이지만 여호와께 돌아가면 받아 주실 줄로 믿는 귀한 믿음이다.

 

2) 종교적으로 여호와를 섬길 수 없는 시대이다.

  

당시에 메소포다미아 지역은 바알 신앙이 정성기를 이룬 시대이다. 바벨탑 이후에 시작된 바알신앙은 이미 애급에까지 확장되어 있었다.

 

원래 바알신은 바벨탑을 주도했던 니므롯과 그의 아들 담무즈를 태양신(바알)으로 신격화 했고 니므롯의 아내 이면서 담무즈의 아내인 세미라미스를 달신(아스타롯)으로 신격화한 바알 신앙이 메소포다미에 성행했고 전 역에 퍼져 있었다.

 

그런데 라합은 그중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믿었던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

[수 2:10-11]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11)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라합은 히브리인의 출애급이 여호와 하나님이 이끌고 있음을 믿었고 그들의 출애급 소문을 듣고 하늘 에서도 땅 아래서도 유일하신 여호와라고 고백했다.

 

하나님의 열 가지 재앙을 눈으로 목격 하고도 믿지 못했던 바로 왕에 비하면 소문만 듣고도 선택한 백성들을 이끌어 내시고 인도하시는 천하에 유일한 하나님으로 믿었던 것입이다. 수많은 함의 후예들 가운데 유일하게 여호와께 속한 귀한 믿음이었다.

 

바알 숭배소굴에서 살면서도 여호와를 알고 비록 우상 숭배한 죄인일지라도 받아 주실 것을 믿은 기한 믿음이다.

 

3) 직업 적으로 여호와를 믿은 수 없는 사람이다.

 

 

라합은 기생이라고 했습니다. 그의 직업이 여인숙 업이었다. 그리고 혼자 사는 여인이었다. 성결생활을 할 수 없는 직업을 가진 여자였다. 

 

고대에는 기생은 인생의 가장 정죄하는 직업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더구나 종교적인 면에서는 더욱 그렇다. 성경에는 음행하는 사람은 처형하라고 명하셨다.

 

(레 19:29) 네 딸을 더럽혀 창녀가 되게 하지 말라 음행이 전국에 퍼져 죄악이 가득할까 하노라

 

[신 23:17-18]이스라엘 여자 중에 창기가 있지 못할 것이요 이스라엘 남자 중에 남창이 있지 못할지니 18) 창기가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어떤 서원하는 일로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 이 둘은 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임이니라

 

그런데 라합은 죄인으로 절망하지 않고 여호와께 돌아온 여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하여 그로 하여금 아무리 중죄인이라고 하나님께 돌아오면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나타낸 믿음었다.

 


4) 가난한 자를 용납하시는 하나님을 믿었다.

 

 

라합의 가정은 빈궁한 가정이었다.

(수 2:13) 그리고 나의 부모와 나의 남녀 형제와 그들에게 속한 모든 사람을 살려 주어 우리 목숨을 죽음에서 건져내라

 

그 당시 부자들은 성 중앙에 집을 지었습니다 서민은 성벽 꼭대기에 집을 짓고 살았습니다. 라합은 가난하기에 성벽 끝에 집을 짓고 살았다

 

말씀을 보면 라합이 가족들을 거느린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부모 형제들 그리고 자에게 속한 사람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의 생명을 감당하는 위치에 처해 있음을 알 수 있다. 기생은 넉넉한 생활을 하는 직업이 아니고 보면 가난한 생활을 하는 여인이고 혼자 벌어서 가족을 돌보는 입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여호와는 가난한 자도 용납하시는 하나님인 것을 마음으로 믿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라합의 믿음은 흙속에 진주처럼 귀한 믿음인 것을 알 수 있다.

 

5) 목숨을 건 믿음이다.

 

 

예나 지금이나 정탐꾼을 숨기면 중죄로 다스린다. 처형되든지 심한 고문을 당하게 된다. 왕의 명령 한마디면 죽는 시대이다.

 

라합이 정탐꾼을 살리려고 숨긴 것은 만약 발각이 나면 자신의 신변에 위험이 있음을 각오하였을 것이다. 죽을 각오도 하였을 것이다. 고난을 당할 것을 각오하였던 것이다

 

예상 했던 대로 위기에 왔다 발각이 되어 이 집에 정탐꾼이 왔는데 어데 있느냐고 행정 당국에서 왔다.

 

하나님은 라합에게 지혜를 주어 위기에서 건지신다.

[수 2:4-5]그 여인이 그 두 사람을 이미 숨긴지라 이르되 과연 그 사람들이 내게 왔었으나 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나는 알지 못하였고

5) 그 사람들이 어두워 성문을 닫을 때쯤 되어 나갔으니 어디로 갔는지 내가 알지 못하나 급히 따라가라 그리하면 그들을 따라잡으리라 하였으나

 

라합은 이렇게 말합니다. 과연 그들이 우리 집에 왔었다고 헸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누구인지 말 몰랐다고 하고 어두워 질 무렵에 나갔으니 어디로 갔는지 잘 모르겠고 급히 따라가지 않으면 잡을 수 없다고 했다.

 

라합이 정탐꾼들이 자기 집에 오지 않았다고 했으면 집안을 다 뒤졌을 것이다. 그러나 왔다고 했다. 해질 무렵에 나갔으니 어둡기 전에 빨리 쫓아가서 찾으라고 했다. 하나님은 위기에서 지혜를 주신 것이다 만약 라합이 오지 않았다고 했으면 집안을 뒤졌을 것이다 그러나 왔다가 바로 나갔는데 쫓아가면 잡을 것이라고 했다.

 

믿음은 역사가 따릅니다. 그는 생명의 위험을 각오하고 믿음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하나님은 믿음 있는 라합을 어려움을 당하도록 버려두시지 아니 하셨다 믿음으로 사는 라합을 죽도록 버려두시지 아니 하셨다 지혜를 주신 것이다.

 

지혜란 것은 배워서 하는 것도 아니고 그때 그 때 순발력이다. 하나님은 라합에게 지혜를 주셨던 것이다. 그리하여 위험에서 건져 주셨다.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라는 말씀대로 목숨을 건 위험한 헌신한 자의 목숨을 살리셨다.

 

정탐꾼들이 숨겨달라고 사정하거나 고발하지 말라고 부탁한 일이 없고 라합이 자원해서 숨겨 주었기 때문에 헌신이라고 한 것이다.

 

2. 특별한 은혜.

 

라합은 크게 네 가지 넘치는 축복을 받았다.

 

1) 육신적으로 자신뿐 아니라 그에게 속한 모든 가족이 살았다.

   

(수 6:17) 이 성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은 여호와께 온전히 바치되 기생 라합과 그 집에 동거하는 자는 모두 살려 주라 이는 우리가 보낸 사자들을 그가 숨겨 주었음이니라

 

자기 목숨만 산 것이 아니라 자기 가족들 그리고 그에게 속한 모든 사람들이 모두 같이 살게 되었다.


2) 생활 적으로 기생 업을 청산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기생이 없다. 지금도 이스라엘 나라에는 술집이나 기생집이 없습다. 그러므로 라합은 자연스럽게 기생직업을 청산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새 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사람대우 받으면서 살게 되었던 것이다. 
 

3) 라합은 육신만 산 것이 아니라 영혼도 살게 되었다.

 

 

그는 함의 후예로 태어났다. 저주의 자손이다. 그런데 믿었다. 믿음으로 선민이 되었다. 선민이 되었으니 영혼이 살게 된 것이다. 자신의 생명뿐 아니라 자신의 가족들의 영혼도 살게 된 것이다. 당시 가족들뿐 아니라 그들의 가문에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이다. 애냐 하면 그들의 후손들도 하나님의 자손으로 선민의 자손으로 태어나기 때문이다.

 

4) 라합 개인은 왕족의 어머니가 된 것이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왕족인 살몬과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보아스를 낳았다. 그리고 다윗왕의 조모가 되었다. 기생으로서 왕족인 살몬과 결혼을 했고 이스라엘에서 가장 위대한 왕 다윗의 증조모가 되어 왕족의 족보에 기록되었다. 당시 여성으로 족보에 오른 것만도 축복인데 왕족의 종부에 오른 것은 여간 큰 축복이 아니다.    

 

 결 론

    

라합은 귀한 신앙을 가진 여인이다. 저주의 백성에서 여호와를 찾았고 바알숭배 아스타롯 숭배 신앙 속에서 여호와를 찾았고 성결 생활에 어려운 기생 업에서 여호와를 찾았고 가난한 생활에서도 여호와를 찾았다. 그리고 자기 목숨뿐 아니라 온 가족과 그에게 속한 모든 자들이 살게 되었고 기생직업을 청산하게 되고 선민의 왕조와 결혼하여 이스라엘에서 가장 위대한 다윗왕의 증조모가 되어 족보에 기록된 넘치는 복을 받은 여인이다. 라합은 툭별한 믿음으로 특별한 축복을 받은 사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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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대강절 주일예배 설교 (Preaching Sunday worship) 
 


 
말씀 : 마22:34-40

제목 : 사랑의 계절

벌써 2003년도의 달력도 한 장밖에 남지 않았고, 그 한 장 남은 달력도 절반이 훌쩍 지나가고 말았습니다. 늘 그래왔지만 우리는 이맘때쯤 되면 웬지모를 숙연함을 느끼며 다시금 덧없이 흘러가는 세월을 실감하곤 합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무상하게 지나간 세월속으로 지나가버린 시간들을 더듬어 보며 또다시 우리앞에 펼쳐질 시간들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곤 하는 것입니다.

어느새 성탄절이 눈앞에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 트리의 불빛이 아름답게 빛나고 언제나 그랬듯이 거리에는 웬지모를 흥분감마져도 감돌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부터 약2000년 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영광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낮고 천한 곳에 오셨습니다. 죄와 무지와 어둠과 가난과 질병과 미움과 저주와 온갖 압제 속에서 시달리는, 그래서 결국은 영원한 고통의 세계로 갈 수 밖에 없는 인생에게 생명과 평화와 은혜를 주시기 위하여 이땅에 오셨습니다.

오셔서 정말 무지하고 죄된 인생들과 함께 사셨고, 그리고 마침내는 우리 모든 인류의 죄악을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처절한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은 죽음을 위한 죽음이 아니라 생명을 위한 죽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다시 살아나셨고 생명의 화신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생명을 우리에게 주심으로 오늘 우리는 이 영원한 생명가운데 주님과 동행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성탄의 의미입니다. 죄되고 무지한 인생들, 저주가운데 있는 인생들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은혜를 주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그것을 위하여 그 영광의 보좌를 버리시고 이땅에 오신 것입니다. 오셔서 생명과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참 자유와 평강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생명가운데 은혜가운데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성탄절은 그저 단순히 예수님이 이땅에 오셨다는 그 역사적인 사실을 기념하는 날이 아닙니다. 물론 그 역사적 사실도 우리는 기뻐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주님이 왜 이 땅에 오셔야만 했는지, 왜 우리는 그분을 영접해야 하고, 영접했다면 어떻게 섬겨야 할 것인지, 어떻게 주님의 뜻을 계승 발전시켜 나갈 것인지를 돌아보면서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는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성탄절에 우리는 먼저 주님을 내 심령의 주인으로 모셔야 합니다. 내 가정과 교회속에 새롭게 온전히 주인으로 모셔야 합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나와 내 가정과 내 교회속에 주실 그 생명과 은혜와 사랑으로 채우는 일이 급선무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안에 계신 그 주님의 도우심과 역사하심으로 이 땅위에 주님의 생명의 역사를, 사랑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것에 성탄절의 의미는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크리스마스는 하나님의 사랑이 이 땅에 구체화되고 현실화된 날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 구원의 계획이 구체적으로 이땅에 실현된 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그러한 주님의 뜻을 따라 주님의 생명의 역사와 사랑의 역사를 구체화해야 합니다. 우리와 우리 가정과 우리 교회와 우리 사회속에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를, 하나님의 사랑을 구체화하고 현실화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기독교의 사랑은 단순한 관심이나 이해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사랑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것입니다. 작은 것 하나라도 우리의 현실속에 구체화시킬 때 그것만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이 있고, 관심이 있고, 이해가 있고, 공감을 하더라도 그것이 현실화되지 않는다면 무의미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세상을 사랑했기 때문에 구체적, 현실적으로 독생자를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독생자 예수께서 현실의 세상속에 오셨고, 또한 그분도 십자가의 처형을 실제적으로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또한 구체적 현실적으로 부활하셔서 무덤문을 열고 나오셨고, 실제적으로 40일동안 세상에 계시다가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현실적으로 승천을 하신 것입니다. 기독교는 실제 상황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우리가 받은 바 은혜와 사랑들을 구체적, 실제적으로 현실에 적용할때만이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약2:15,16)라고 말입니다. 관념적인 사랑, 그저 생각으로만 공감하는 사랑, 그저 이해나 하고 있는 사랑, 그것은 아무 쓸모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지금은 성탄의 계절입니다. 성탄절은 말할것도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에 감사하며 영광돌리며 축하하는 날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감사와 영광과 축하도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참뜻을 알지 못한다면 사실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간 주님이 이땅에 오신 것에 감사하며 영광돌리기 이전에 주님의 뜻을 살펴야 되는데 그것은 물론 죄사함과 생명의 은총입니다. 죽은 영혼을 살리시기 위하여 그래서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 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죄사함과 생명의 은총을 주시려고 오셨는데 주님이 그렇게 해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주님께서는 인류를 구속하기 위해서 이땅에 오셔야만 했는데 그 원동력은 무엇이겠느냐는 말입니다. 그것은 물론 사랑입니다. 주님은 인류를 향한 나를 향한 그 애특한 사랑 때문에 이 땅에 오셨고, 사랑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셨고, 사랑 때문에 오늘도 변함없이 우리를 찾아오셔서 은혜로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성탄절을 맞이해서 우리가 다시한번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바로 사랑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이곳에 오셔서 날 위해 죽으셔서 내게 생명을 주신 것을 기억하며 주님의 그 사랑을 기억하며 나도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구체적으로 실제적으로 오셔서 우리를 사랑으로 구원해 주신 것처럼 우리도 실제적이고 구체적이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오늘도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고 말씀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우리 인생에게 두가지의 중요한 커다란 계명이 있는데 먼저는 우리의 생명을 다하도록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성경 전체의 결론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많은 말씀들을 하고 계시지만 결국은 이 두가지로 결론이 지어진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물론 먼저 첫 번째의 말씀 즉 왜, 어떻게 우리의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것인가를 생각보아야 하겠지만 그것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 오늘은 두 번째 주제 즉 우리의 이웃을 내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의 의미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우리의 이웃이 누구이겠습니까? 내 가족입니까? 내 옆집에 사는 사람입니까? 우리 동네 사람입니까? 안동권씨다 진성이씨다 하는 종씨입니까? 아니면 녹전면민입니까? 아니면 대한민국 국민입니까? 물론 좋습니다. 다 나의 소중한 이웃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이웃이란 그 모든 것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모든 혈연, 지연, 학연 다 초월해서 여하튼 너와 함께 부딪히며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흑인이든 백인이든, 전라도 사람이든 경상도 사람이든, 안동 권씨든 진성 이씨든, 서울 대학 졸업자든 녹전초등학교 출신이든, 대통령이든 거지든, 유식하든 무식하든, 적군이든 아군이든, 원수든 친구든 여하간 너와 함께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씀드리자면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써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므로 너 또한 그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네가 만약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면 네가 정녕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그 모든 대상들을 사랑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3,44)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마5:46,47)

그렇습니다. 물론 어려운 일인줄 압니다만 우리는 이러한 주님의 뜻을 늘 헤아려야 합니다. 그리고 정말 우리의 이웃을 그가 누구이든 사랑하는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아무도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말하면 안됩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도 주님앞에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이땅에 오셨습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정말 엄격히 따지고 보면 주님 앞에 사랑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그런 거 다 묻어두시고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성탄절을 준비하면서 먼저 우리의 심령속에 이러한 사랑의 싹을 틔우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와같이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데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요? 오늘 말씀에 보면 그 방법론으로써 네 몸과 사랑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정말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생각해보면 이해가 잘 갈 것입니다.

솔직히 우리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합니까?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소극적으로 우리 자신의 어떤 허물과 죄에 대하여 우리는 사실 얼마나 관대한지 모릅니다. 늘 이해하고 변명을 하고 용서를 합니다. 마땅히 할 일을 안하고서는 부득이해서, 너무 피곤해서, 상황이 어쩔 수 없어서, 바빠서,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해서 라고 하면서 이해하고 변명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안 할때는 그것도 안한다고 비난을 합니다. 어떤 때는 안 할 말을 해놓고는 상대방이 그렇게 만들어서 어쩔 수 없었노라고 합니다. 그러나 상대방이 같은 말을 할 때는 그래도 그렇지 그럴 수가 있느냐고 합니다.

또한 우리는 자기 자신이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노하기를 더디 합니다. 물론 자신에 대하여 화가 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오래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자신을 노하게 만들때는 그 분이 그렇게 쉽게 풀리지를 않습니다. 앙금처럼 남아서 어디한번 두고보자 하는 마음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어떻게 사랑합니까? 우리 자신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는지 모릅니다. 배가 고프면 열심히 먹습니다. 목이 마르면 곧 물을 가져다 마십니다. 추우면 곧 옷을 입히고, 더우면 부채질해주고, 선풍기를 틀어 줍니다. 피곤하면 곧 자리에 누어 쉬게 하고, 병나면 곧 병원에 가서 치료를 해줍니다. 무언가 정말 의미있고 가치있는 삶을 살기 위하여 끊임없이 투자를 합니다.

그러나 솔직히 우리는 남에 대해서는 그런 관심을 가지지 못합니다. 남이 정말 의미있고, 가치있는 삶을 살게하는 일에 그다지 관심이 없습니다. 남이 배고프고, 남이 병이나고, 남이 추울 때 내 몸에게 하는 것의 1/10만 해도 사실 아주 잘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네가 네 몸을 사랑하고 돌보고 아끼는 그것만큼 남도 그렇게 사랑하고 돌보고 아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네가 남에게 대접을 받고 싶어하는 것만큼 너도 남을 대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네가 평안을 누리고, 네가 사랑을 받고, 네가 즐겁고 평안하기를 바라는 것 그만큼 남에게도 평안을 누리게 하고, 사랑을 받게 하고, 즐겁게 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어떻게보면 우리로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완전한 성인군자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런 사랑을 실천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주님의 명령입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의 모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사랑을 실현하기 위하여 애써야 합니다. 그 말씀을 백퍼센트 우리가 다 실천할 수는 없을지라도 다만 그 백분의 일이라도 실천하기 위하여 애를 써야 하는 것입니다. 아니 다만 애쓰는 것에 지나는 것이 아니라 백분의 일이라도 실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탄절이다 연말연시다 하여 사회각계각층에서는 이웃을 향한 도움의 손길을 펼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어떤 방법이로든 어려운 이웃을 돌보는 일에 참여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우리 교회는 나름대로 그러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실시를 하고 있습니다만 지난 4월부터 구제성금을 모금하여 한국국제기아대책기구를 통하여 굶주리는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매월 약3만여원을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지역에 있는 식사준비가 곤란한 가정에 매주 한번씩 반찬을 장만해서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 교회정도의 상황이라면 이 정도로는 조금 부족하다고 여겨집니다. 아직 우리 사회곳곳에는 정말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곳이 많이 있습니다. 물론 여러분 개인적으로 그러한 일에 관심을 가지고 사랑의 손길을 펼치고 있으리라 믿습니다만 우리 교회적으로도 좀더 이일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혹시 개중에는 그러지 않아도 농촌경제가 어려운데 남을 돕는 것이 그리 쉽겠느냐고 말씀하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물론 우리도 가정적으로나 교회적으로 넉넉하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미약한 것도 사실입니다. 농촌 생활 힘든 것도 사실입니다. 현재적으로도 여유도 없고, 미래적으로 큰 희망이 보이지 않는 것도 사실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사실은 우리는 그래도 복받은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물질적으로 그렇게 넉넉하지 않을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영적으로 생명의 은총을 누림과 동시에 이 세상에서도 기본적인 삶을 영위하는데 별다른 어려움이 없이 지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기본적인 것 뿐만아니라 그래도 어느 정도는 문화적인 생활도 하고 있다고 봅니다. 물론 도시에 돈 많은 사람들에 비하면 문화생활이랄것도 없겠지만 어찌되었건 기본적으로 먹을 것, 입을 것, 잠잘 것 염려할 만큼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찌 되었건 휴대폰, 전화기, 텔레비젼, 냉장고, 컴퓨터, 비록 좋은 차는 아니지만 찬 한 대씩 굴리면서 살아가고 있지 않느냐는 말씀입니다.

그 정도면 그래도 복받은 삶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지 않습니까? 세상에는 굶어죽어가는 사람들이 일년에도 수천만명이 되는데, 우리나라 같으면 보건소에 가서 약3일치 지어먹으면 깨끗이 나을 병인데 그런 기본적인 약조차도 없어서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데 우리는 그 정도만 해도 정말 잘먹고 잘살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사랑을 받을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축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는 축복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너무나 많이 받을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성탄의 계절을 맞이하여 주님의 그 사랑을 정말 다시한번 깊이 되새겨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토록 놀랍도록 베풀어주신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며 어떻게하면 그 사랑과 은혜를 더 의미있게 하고, 더 가치있게 할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 사랑을 조금이라도 실천해볼 수 있을 것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 길은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말할것도 없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정녕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가 또한 그 사랑을 본받아 살아가기를 원하는 이상 우리는 그 하나님의 뜻을 따라 조그마한 사랑이라도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과 혀로만 사랑할 것이 아니요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요일3:17,18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그렇습니다. 사랑은 실제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도 실제적인 것이었습니다. 그저 공감이나 이해의 차원이 아니라 실체적이고 현실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러한 실제적인 사랑을 하기를 주님은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들을 실제적으로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생명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에서 사랑한다는 것은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성자를 주셨듯이, 독생성자께서 당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듯이 우리도 무언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무엇인가를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이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류 구원의 대업을 이루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랑을 가지고 나아갈때에만이 주님께서 이루신 생명의 역사를 세상속에 적용시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주는 곳에 은혜가 있습니다. 주는 곳에 주는 자나 받는 자 모두에게 은혜가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물론 받는 기쁨도 있습니다. 그러나 받는다는 것은 주는 것이 선행될때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주는 자가 없으면 받는 자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계속해서 주는 자의 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6:38 )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마10:42)

그렇습니다. 주는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주는 사람이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이 성탄의 계절에 우리는 다시한번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의미를 되새기면서 주는 자의 삶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을 주고, 은혜를 주고, 마음을 주고, 용서를 주고, 이해를 주고, 물질을 주고...... 하여튼 받는 자의 입장보다는 주는 자의 입장에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사실은 바로 내가 복을 받는 비결입니다. 그것이 나와 네가 행복하게 사는 비결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이 성탄의 의미를 바르게 되새기는 일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빛을 세상에 비추는 가장 좋은 비결입니다. 오늘 대강절 셋째주일을 맞이하면서 이런 주는 자의 마음으로 우리의 심령을 채우면서 늘 줄 수 있는 자의 입장에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사랑이 더욱 여러분 안에 충만하고 여러분을 통한 주님의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 이땅위에 더욱 하나님의 영광이 크게 드러나고 그리할대에 여러분 자신도 더욱 하나님의 충만하신 은혜를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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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월 2일 첫째 주일 신년설교 <새벽을 깨우리로다>

 

 


시편 46:1~7, 57:8

요즘에 우리 기독교 교회 신문이나 방송에서 흔하게 듣는 단어 하나가 있습니다.
"Again 1907"입니다. 이 말의 뜻은 1907년에 평양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한국 교회의 첫 번째 부흥 역사가 있은 지 금년이 100주년이 되는 해이므로 그러한 부흥 운동이 100년 만에 또 다시 이 땅에서 일어나도록 하자는 영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 대한민국은 100년 동안에 꾸준한 성장하여 오늘의 한국 교회를 이루었고 지금은 세계 어느 나라의 교회 성장 보다 많은 신자의 수를 가지고 있으며, 세계 선교 국가로 평가받게 되었습니다. 기독교의 역사를 보면 가장 위험했던 때는 핍박의 때가 아니고 교회가 부흥되었던 때였습니다. 부흥된 교회들이 잘못된 방향으로 갈 때 교회는 회복하기 어려운 내리막길을 걸었습니다. 서구의 그 많은 교회들이 핍박의 시기에는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교회를 다니려는 사람들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었지만 권력의 보호 밑에 있을 때는 오히려 신자들이 줄어들기 시작했던 역사를 기억합니다. 또 교인들이 가난했을 때는 교회를 열심히 다녔습니다. GNP 1만 불에서부터 교회 부흥이 멈추기 시작하더니 GNP가 2만 불이 되면서부터 서구의 교회들은 급격하게 교인들이 줄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서구의 그 많은 교회들은 관광용으로 가장 많이 쓰입니다. 예배당들은 교인들이 가난했을 때 헌금해서 건축한 교회들로서 교회 건축의 규모가 얼마나 웅장한지 유럽 여행하신 분들은 다 기억하실 것입니다. 유럽 여행의 대부분이 예배당 건축물 역사를 보러 가는 관광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성전을 건축할 때보다도 비교가 안 되는 부유한 생활들을 하면서도 선조들이 가난했을 때 건축한 교회에 다니지도 아니하는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텅텅 비어있는 그 장엄한 예배당은 관광용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 허다합니다. 대한민국 또한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절대 없기 때문에 "Again 1907"을 외치면서 이 나라에 영적 부흥이 다시 한 번 일어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 오늘날 한국 교회의 현주소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구약 성경 가운데 있는 40명 왕들 가운데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셨던 왕, 다윗 왕과 히스기야 왕 때에 쓰였습니다. 시편 46편은 히스기야 왕의 통치기간 중에 생긴 국가적 위기를 하나님께서 구원하셨던 것을 노래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란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하나님이 그 성중에 거하시매 성이 요동치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하나님의 도움은 새벽에 나타날 것을 조명했습니다. 또 57편 말씀은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겨 아굴람 동굴 속에 숨어있을 때 고백한 시입니다. 사울이 3천명의 정예 부대를 풀고 어떻게 해서든지 다윗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려 그를 찾아다닐 때 아굴람 동굴 속에서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라고 하나님의 구원이 새벽에 나타날 것을 고백한 것입니다. "Again 1907"을 외치는 우리는 어떻게 1907년에 그러한 부흥이 일어나게 되었는가에 대한 역사적 고찰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복음의 시작은 지역적으로 평양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토마스 목사가 복음을 들고 최초로 찾아온 것도 대동강이며 교회들이 처음 세워진 곳도 평양이고 최초의 신학교도 평양에 세워졌습니다. 1907년 부흥의 불길이 일어나기 전 1906년 평양에서는 한국 교회의 새로운 영적 사역이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이 새벽 기도 운동인데 세계 어떤 교회도 하지 않는 영적 사역입니다. 장대현 교회의 길선주, 박치록 두 사람이 서로 대화를 시작합니다. "성경에 보니 예수님도 새벽에 나가서 기도하셨다고 하셨는데 우리도 새벽에 나가서 기도합시다래." "그러지요. 나오시오." 그래서 둘이 새벽기도를 열심히 하는 것을 본 다른 집사님들, 교인들이 "아니, 두 분이 열심히 새벽기도를 하시는데 우리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우리도 나가자." 그래서 장대현 교회에 새벽기도회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시작으로 거룩한 경쟁이 벌어졌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는 이웃 교회가 무엇을 잘하면 샘이 나서 못 견딥니다. "우리도 하자." 그래서 이 교회 저 교회가 새벽기도를 열심히 하는 경쟁적 새벽기도가 1906년에 이루어지더니 일 년 후인 1907년에 대한민국 최초의 부흥의 불길이 일어났고 대한민국 교회가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Again 1907"을 원하는 영적 운동은 바로 새벽 기도의 회복이라고 판단이 되었기에 금년 갈보리교회의 표어를 "새벽을 깨우리로다." 로 정하게 되었습니다.


한국 교회가 이렇게 부흥하게 된데 대해서는 여러 가지 객관성 있는 이유들도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한국인의 종교성! 우리 한국인들은 기독교 복음이 들어오기 전에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 하나님이 이 하나님이라고 가르쳐주니까 복음을 받아들이기가 쉬웠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또 한 가지, 그 당시 조선은 주변국들에게 극심한 고통을 당하던 때였기 때문에 서구 사회에 대한 동경이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이런 사회적 환경이 서구 사회에게 어떤 구원의 기대감을 갖는 그런 분위기가 팽배했기 때문에 이 땅을 찾아온 서구의 선교사들을 반갑게 맞아들였다고 하는 사회적 이유가 있습니다. 또한 과거 종교로부터의 실망감입니다. 당시 불교와 유교의 나쁜 형향으로 나라가 망하게 되는 어려움이 실제로 있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종교인 기독교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되었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그러한 암흑기에 갈 곳이 없는 사람들이 유일하게 자기의 모든 소원이나 억울한 사정을 토로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교회에 나와 하나님 앞에 열심히 기도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교회로 많이 오게 되었다는 객관적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은 외부적인 조건으로 분명히 도움은 되었지만 결정적 이유는 아니었습니다. 한국 교회 부흥의 첫째 이유를 저 같은 목회자에게 묻는다면 세계 어떤 나라 어떤 교회도 하지 않은 영적 운동인 새벽 기도 운동이 한국 교회 성장에 가장 기초적인 밑거름이 되었다고 답변합니다. 대한민국 교회와 같이 이렇게 새벽기도를 열심히 하는 교회는 세계 어느 교회를 다녀봐도 찾을 수 없습니다. 세계 어떤 교회도 하지 않는 새벽기도를 열심히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축복하심으로 세계 교회의 역사의 성장 기록에 유래 없는 기록을 세우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새벽기도를 열심히 해야 하는 이유를 오늘 성경에서 밝힘으로 2019년 이 해가 "Again 1907"이 되도록 방향을 잡아 보겠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에게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인간 구원 사역은 처음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기도로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복음 전파의 시작을 이야기하는 마태복음 4장 17절에 보면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 여기서 "비로소" 라고 하는 이 말은 그 전까지는 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이때부터 비로소 전파하였다." 이때부터 시작이 되었다는 말로서 '비로소' 하시기 전에 하시던 일을 살펴보면 됩니다. 바로 40일 금식기도였습니다. 예수님도 금식하고 기도하신 후에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라는  순서로 사역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로 무장을 하신 후에야 비로소 복음 전파를 하셨습니다. 이렇게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기도 생활을 보면 제일 먼저 금식 기도를 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장에서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서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예수님은 새벽기도를 열심히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설교하는 법에 대해서 그렇게 자세히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찬양하는 기술을 가르쳐주시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지혜는 기도문까지 작성해서 가르쳐 주셔서 지금까지 주기도문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성전을 정의할 때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정의하셨고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있어 기도하라. 너희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내 아버지께 기도하라."라고 기도의 방법론까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기적을 베푸시는 것을 보고 제자들이 놀라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우리들은 왜 안 됩니까?" 물었을 때 "기도 외에는 이런 이유가 있을 수 없느니라. 기도 많이 하면 이렇게 될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심지어는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도 기도하라." 이렇게 기도는 끝이 없이 예수님의 교훈으로 남았습니다. "항상 기도하며 깨어있으라.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또 기도하는 방법에 "이방인들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말 많이 안 해도 괜찮다." 누가복음 6장에 "예수께서 기도하러 산으로 가사" 산기도 가셨습니다. 또 "밤이 맞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철야기도 하신 겁니다. 고민하면서 기도하신 것이 겟세마네 동산이십니다. 얼마나 땀을 흘리시며 기도하셨는지 이마에서 땀방울이 핏방울 같이 되어 떨어지셨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릎을 꿇고 기도한 것이 누가복음 22장에 나타났고, 안수기도하신 것이 마태복음 19장에 나타나있고, 열두 제자를 선택하시기 전에 밤새도록 산 기도를 마치시고 그 다음에 제자 선택을 하셨고, 마지막에 십자가에서도 기도로 끝을 내십니다. 누가복음 23장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 금년에 이 기도에 가장 간절한 모습을 어떻게 표현하는 것이 좋을까? 지금 여기 현수막에 여러분이 보시는 대로 예수님이 바위에 엎드리셔서 애절하게 기도하시는 모습으로 표현해 봅니다.


하나님의 아들 되신 예수님이 그토록 많은 기도생활을 하셨다면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에 대한 해답이 나왔습니다. 우리는 새벽 기도의 어려움을 체험합니다. 하나는 현대 문화권입니다. 현대 문화권에서는 특징적으로 밤 문화가 발달했습니다. 그래서 농경 문화권에서는 해만 떨어지면 잠을 잤는데 지금은 일찍 자는 사람이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을 당합니다. 12시가 넘어서 잔다고 할 때 문화인같이 취급을 하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사람은 좀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좀 늦게 일어나야 합니다. 밤에 하는 TV프로그램들이 심야 토론회 등 볼 것이 많게 만들어지고 있고, 지금은 24시간 영업도 얼마나 많아졌는지 모릅니다. 낮이나 밤이나 별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일찍 잘 수가 없는 문화에서 자니까 새벽에 일어나기 힘듭니다. 그러나 힘들기 때문에 오히려 더 귀한 겁니다. 시간 관리는 누가 해주지 않습니다. 스스로 해야 합니다. 새벽기도를 우선순위에 놓고 생각해서 잠을 조금 일찍 자는 습관을 가진다든지, '열아홉 순정' 끝나면 바로 잔다든지 이렇게 생각을 해야 합니다. 할 것 다하고 볼 것 다하고 언제 잠을 잡니까? 또 한 가지의 어려움은 바로 신체적 조건입니다. 사람이 잠이 든다는 것은 마음의 평화가 이루어져야 잠을 자게 되어 있는데 내일에 대한 걱정과 미래 불안, 오늘 해결하지 못한 고민도 있고, 신경을 많이 써야 하는 문화에서 살고 있으니까 단순 생활이 안 됩니다. 인간관계도 복잡해지고 머릿속에 해결해야 되는 문제도 많고, 그래서 몸은 누웠는데도 잠이 일찍 오지 않습니다. 이런 저런 고민들로 끙끙거리다가 깜박 잠이 드는 시간이 새벽인 것입니다. 그 짧은 몇 시간 잠을 잘 자야만 이튿날 에너지가 생겨서 다시 활동할 수가 있는데 그 깜박 잠이 든 그 시간을 깨워서 나오려니 신체적 조건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인정합니다. 저도 밤늦게까지 심방하고 밤늦게까지 일합니다. 저도 여러분들보다 결코 일찍 잘 수 있는 문화에 있지 않습니다.

제가 텍사스 휴스턴에서 미국 교회를 빌려 한국 사람들을 상대로 목회를 시작할 때 새벽기도를 하려고 그 교회 담임 목사님에게 요청을 했습니다. "한국 교회는 새벽기도를 하는데 새벽 5시에 이 교회 건물을 쓸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이 큰 교회를 당신들은 아무도 안 쓰시지 않습니까? 그러니 교실 하나만 주면 우리가 잘 쓰고 잘 정리하고 갈 테니 새벽 5시에 쓰게 해주십시오." 그랬더니 눈을 둥그렇게 뜨면서 저를 쳐다보고 하시는 말씀이 "당신이 지금 새벽 5시라고 말했습니까, 오후 5시라고 말했습니까?" "새벽 5시입니다." "그러면 당신이 새벽 5시에 나오셔서 설교하실 겁니까?" "그렇습니다." "매일 나올 겁니까?" "매일 하겠습니다." "그러다 죽으면 어떡하시려고 그럽니까?" "안 죽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미국 사람들은 꼭 서류를 해서 오거든요? 미국 사람들 서류 보관하는 것은 본받을 만합니다. 안 버립니다. 무슨 서류가 들어왔든지 차곡차곡 쌓아놨다가 때가 되면 탁 내밀면 꼼짝 못합니다. 미국 사람들과 동업, 거래 관계 하는 거 한국 사람들이 지는 게 뭔지 아십니까? 서류, 메모 한 것을 버리지 않습니다. "네가 그때 이렇게 말했잖아?" 내밀면 꼼짝 못합니다. 그래서 항상 집니다. 나중에 가서 의논해서 당회에서 내가 요청한 것을 저는 말로 했던 것을 "서류로 하라."고 해서 서류로 만들어 사인해서 보냈습니다. "네가 요청했다. 그래서 주겠다." 그것이 뭐냐 하면 "여기에서 파생되는 모든 문제는 네가 책임져라." 그런 것입니다. "책임지겠다." 그래서 당회에 서기가 가져왔습니다. 장로입니다. 나한테 허락한다는 서류를 주면서 한 말이 영원히 잊혀지지 않습니다. "Paster park! 새벽 5시에는 하나님도 주무십니다."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그 시간이 제일 잠 잘 시간 아닙니까?


그러면 성경에 하나님이 새벽에 무슨 일을 하셨는가 보면 됩니다. 우선 오늘 성경 말씀에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여기에 왜 이 "새벽" 단어를 썼습니까? 대낮도 있고, 정오도 있고, 저녁도 있고 얼마든지 24시간 시간이 있는데 왜 새벽이라고 했습니까?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왜 그랬습니까? 이유가 있습니다. 출애굽기 14장에 홍해 사건이 나옵니다. 애굽의 군대가 무섭게 달려오고 있습니다. 앞에는 바다이기 때문에 갈 수가 없게 되자 사람들이 모세를 원망합니다. "아니, 애굽에 장지가 없어서 우리를 여기까지 끌고 나와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물에 빠져 죽게 할 것이냐?" 며 원망을 할 때 말씀에 어떻게 나와 있습니까? "새벽에 여호와께서 불기둥, 구름기둥 가운데서 애굽 군대를 보시고 그 군대를 어지럽게 하시며" 라고 되어있습니다. 홍해 바다가 새벽에 갈라졌습니다. 다시 회복된 것도 새벽입니다. 그래서 애굽 사람들은 다 새벽 시간에 멸망을 당하고 히브리 민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모두 새벽에 이루어지게 됐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온 히브리 민족은 여리고성을 함락시켜야 살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여리고 지방은 식량 생산이 가능한 땅으로서 그곳에서 식량을 생산해서 먹고 살아야 만나가 끊어지고 가나안 땅 정착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전쟁을 한 거 아닙니까? 그런데 거기 살고 있는 원주민들이 그 좋은  땅을 뺏기겠습니까? 그래서 성을 쌓고 견고하게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 6장을 보면 여리고성을 함락시키는 시간이 나와 있습니다. 바로 새벽입니다. "제 7일 새벽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서"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나라의 나라 이름은 야곱 개인의 이름입니다. 개인 이름이 영원한 국호가 되었습니다. 창세기 32장에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밤새도록 기도하는데 천사와 씨름합니다. 야곱이 이겼습니다. 먼동 트기 전 천사는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고 떠납니다. 그것이 나라 이름으로 영원히 되어버린 겁니다. 새벽에 일어난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예수님을 가리켜 "새벽별"이라고 했습니다. 왜 저녁별이 아닌 새벽별이라고 하셨겠습니까? "두아디라 교회는 내가 새벽별을 주리라." 모두다 새벽 단어를 썼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모른다고 3번 부인하다가 새벽 닭 소리를 듣는 순간 소스라쳐 놀라 영혼이 깨어나 통곡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은 새벽에 이루어졌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새벽 오히려 미명에 무덤을 보려고 갔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일 먼저 만나는 영광을 차지하고 제자들에게 가서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고 부활의 메시지를 처음으로 설교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마가복음 13장에 보면 재림 주 예수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새벽에 재림 주가 오실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모두가 새벽을 초점으로 이야기 했습니다. 새벽은 하나님의 권위가 역사하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새벽 기도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이 세상에서도 무엇에 성공하고자 하는 사람은 새벽을 잘 처리해야 됩니다. 우리나라 삼국 시대 역사를 보면 "신라 전성기 때 새벽마다 불국사 종소리를 일찍 울렸다. 그 소리를 듣고 사람들이 일을 시작했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 생각에 박정희 대통령도 혁명 일으킬 때 대낮에 일으켰다면 실패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새벽 2시에 한강 다리 넘어오는 바람에 성공했습니다. 다 잠자고 있는 시간 아닙니까? 새벽을 이용해야 성공한다는 것은 마귀들도 알고 있습니다. 6 25 동란이 새벽에 일어났습니다. 미국 전쟁 역사상 최고의 수치라고 생각하는 하와이 진주만 공격! 야마모토 이소로쿠 대장이 새벽 6시 그것도 일요일에 그 시간에 공격해야만 승리한다는 판단을 내리고 정확히 그 시각에 공격하여 초토화시켰습니다. 그래서 진주만에 가보면 전쟁의 폐허상태 그대로를 박물관에 보관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들이 예수를 재판하고 죽이고자 모의한 것도 새벽입니다. 마태복음 27장 1절에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니" 마귀의 역사도 새벽을 이용할 줄 압니다. 오늘 성경 말씀 시편 46편은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이 말씀을 기초로 해서 찬송가를 지어 독일 국민들에게 애국가보다도 더 많이 부르게 한 말씀입니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니 큰 환란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 마틴 루터는 기독교를 새롭게 한 사람이요 영국의 요한 웨슬레와 찰스 웨슬레는 영국 교회를 새롭게 한 사람들인데 무슨 힘으로 했는가? 그들이 고백하는 말이 "나는 이 일을 시작하면서 하루에 새벽마다 2시간씩 기도했습니다." 그것입니다. 우리나라 개신교회 역사에 최초의 새벽기도 교인은 백홍준이라는 사람입니다. 최초의 전도사가 되었고 최초의 장로가 되었고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그분이 처음에 중국에서 압록강을 건너올 때의 역사가 중국 심양의 로스 목사 사택에 지금 보관되어 있습니다. 제가 여러 번 거기 가서 답사한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개인적으로 기도를 열심히 했는데 백홍준 전도사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새벽기도를 드리면서 조선 민족의 복음화를 위해서 기도했다고 한국 교회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다가 공동 새벽기도 시작은 1906년 장대현 교회의 교인들이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교회들이 새벽기도를 시작했고 마침내 그것은 1907년 한국 교회 부흥의 역사를 일으켰는가 하면 그 기도의 영적인 힘이 그대로 전승되어서 오늘날까지 세계 어떤 교회도 하지 아니한 새벽기도를 대한민국 교회가 열심히 함으로서 세계교회 역사의 보기 드문 부흥 역사를 가져온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새벽 기도는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뇌의 기능이 최고의 역할을 할 때가 새벽 시간입니다. 또, 새벽에 죄 짓고 돌아다니는 사람, 어디 있습니까? 맑은 영혼을 가지고 가장 좋은 뇌의 역할을 가지고 고요한 시간에 하나님께 나와서 자기와 형제들을 위해서 자기와 형제들을 위해서 국가, 민족을 위해서 기도드리는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하나님은 기도한 것은 절대 잊지 않으시고 기억하셨다가 가장 필요한 시간에 나에게 응답하십니다. 성경에 보세요. "네 기도와 구제를 하나님이 기억하신바 되었느니라." 기도는 하나님의 기억에 남습니다. 하나님 컴퓨터에 입력이 되어있단 말입니다. 젊어서 기도 많이 드린 사람은 평생 동안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를 받게 되어있고 자손들까지 하나님의 은혜가 미치도록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영적으로 기도 많이 하는 사람과 맞붙어서 괜히 시비 붙지 않기를 권합니다. 합당하지 않으면 그 화가 내게 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도 있습니다. 영적으로 모르니까 그러는 겁니다. 청년들이 왜 새벽기도에 많이 안 나오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것이 가장 거룩한 투자다. 네 생애를 가장 빛이 나게 만들어줄 것이다. 자신 있다." 저는 강조합니다. 어쩌다가 청년들이 새벽기도를 열심히 하며 울고 그래서 왜 그러느냐고 물어보면 실연당한 청년들이 많이 나오고 그럽니다. 어쩌다 교인들이 새벽기도 나오면 무서운 꿈을 꾸고 나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새벽기도 강조하는 이유는 제 자신의 체험 때문입니다. 제가 계산해 보니까 50년 새벽 기도 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평가를 해보면 제 욕심으로 기도한 것은 안 이루어졌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아! 그것은 내 욕심의 기도였구나.' 그런데 하나님은 좋은 길로 인도하셔서 하나님의 뜻은 내가 기도한 것보다도 훨씬 더 많이 모두 다 성취되었습니다. 제가 소명을 받았을 때 새벽기도하면서 제일 많이 쓴 단어가 "세계 선교" 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제가 온 세상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게 하옵소서." 제가  사춘기 때 그 단어를 가장 많이 쓰면서 기도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나를 그렇게 쓰고 계시지 않습니까? 지난번에도 제가 11번 외국에 나가서 세미나와 부흥회를 했고, 금년에도 제가 그렇게 약속이 되어 있고 내일 또 인도와 스리랑카에 약속이 되어있습니다. 어떤 때는 좀 힘들고 또 외국 나가면 음식 맞지 않아서 고생도 많이 합니다. 그럴 때는 속으로 '에이, 이번에는 좀 쉬면 어떨까?' 이런 생각하다가도 새벽에 나와서 기도하면 "야! 네 입으로 말해놓고 왜 야단이야?" 하나님이 막 책망하십니다. "알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기도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한 최대한 제가 선교에 열심을 다합니다. 사실 만나보고 이야기해 보면 세계 선교의 열정에 대해서 저만큼 열심히 이렇게 하는 목사도 흔하지 않습니다. 왜 그러느냐? 나는 하나님과 약속 기도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 분야에서 제가 이렇게 열심히 합니다. 저는 아주 답답한 게 있습니다. 이렇게 좋은 보화, 보물 덩어리, 보따리를 하나님이 이렇게 딱 갖다놓고 우리들보고 "네 손으로 풀어서 가져가라." 그러십니다. 그게 기도입니다. 새벽 기도가 더합니다. 그런데 왜 그걸 풀지 않는가? 어휴! 답답해 죽겠습니다. 왜 안하시는 겁니까? 새벽 기도 열심히 드리십시오. 기도는 너무나 소중해서 내 기도를 천사들이 금 대접에 담아 하나님께로 가져다 상달시킨다고 성경에 쓰여 있습니다. 여러분, "Again 1907" 뭐가 "Again"이냐? 평양에서 일어난 새벽기도 운동이 대한민국을 영적으로 새롭게 하지 않았느냐? "Again 1907"은 바로 새벽기도 운동에서부터 시작이 되었기 때문에 금년을 "새벽을 깨우리로다." 이렇게 정했으니 여러분 일 년 동안은 시간을 잘 관리하셔서 2019년 에는 "Again 1907"이 우리 교회에서 일어날 수 있도록 모두가 기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를 우리가 게을리 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역사에서 보아왔습니다. 새벽기도 운동이 세계 교회보다 앞서가는 교회를 만든 것을,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것을 저희들이 기억하면서 "Again 1907"은 다른 것이 아닌 새벽기도로 이루어가는 한국 교회, 그리고 나 자신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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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월 신년설교.(<진리의 빛으로 다시 서라)

 

 


잠 22:19 ~ 21,요 8:31 ~ 32

지난 91회 총회 주제는 “교회여, 진리의 빛으로 다시 서라”입니다. 우리 교단의 모든 교회들은 한 해 동안 이 주제를 중심으로 신앙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특히 올해는 1907년 평양에서 시작된 대 부흥운동의 100주년을 기념하는 해로서 부흥을 재현하는 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교회도 “연동교회여, 진리의 빛으로 다시 서라”는 목회주제를 정하였습니다.
  “교회여, 진리의 빛으로 다시 서라”는 것은 몇 가지 전제가 있습니다. 첫째는 교회가 잠자고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교회가 본질적 사명을 상실했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세상에 절대적 가치의 빛이 없다는 것입니다. 넷째는 교회도 빛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세상이 진리를 따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섯째는 교회도 진리를 비추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일곱째는 교회가 다시 서야 세상에 희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여러 가지 전제로 올해는 꼭 교회가 다시 진리 가운데 서서 세상에 희망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최근 기독교는 마이너스 성장을 하였다고 합니다. 어떤 이는 기독교인들이 외국을 많이 가서 실질적인 하락이 있었다고 합니다만 기독교인만 외국을 간 것은 아닐 것입니다. 통계가 그렇게 말한다면 인정해야 합니다. 실제로 우리가 체감하기도 기독교가 쇠퇴하고 있다고 봅니다. 반면에 가톨릭은 급성장했습니다. 지난해의 성장률을 보면 불교가 3.9% 성장했습니다. 천주교는 74.4% 성장했습니다. 반면에 개신교는 1.6% 감소하였습니다.
  얼마 전에는 “현대인의 마음을 사로잡은 가톨릭의 성장”이란 제하에 세미나를 했습니다. 왜 가톨릭은 마음을 사로잡고 성장하는데 개신교는 못합니까? 제가 볼 때는 인간적 요인보다 성경적 요인 때문입니다. 교회가 진리를 떠나 있어서 현대인의 마음을 사로잡지도 못하고 성장하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이제 교회가 다시 서야 합니다. 교회가 진리의 빛으로 다시 서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힘이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같이 형편없는 인간들로 교회를 세우신 것은 거의 도박에 가까운 모험입니다. 어느 교회 앞의 게시판에 이렇게 써두었다고 합니다. “당신은 교회에 들어오지 못할 만큼 악인이 아니죠? 그리고 당신은 밖에 있어도 될 정도로 선한 사람도 아니죠?” 교인 전체는 가치중립적입니다.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합니다. 선과 악이 공존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마음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로 중립적입니다. 모든 교회가 신비와 혼란이라는 두 부분으로 구성됩니다. 존 스토트는 이것을 ‘교회의 이중성’이라 불렀습니다. 교회는 이미 거룩하며, 아직 거룩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거룩해졌으며 거룩해지라고 부르심을 받습니다. 성도를 선하게, 교회를 신비하게, 거룩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회개와 각성의 해, 부흥을 꾀하는 해에 먼저 교회가 다시 서는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교회는 반드시 다시 서야 합니다.

  교회는 다시 서야 합니다. 교회는 성장해야 합니다. 교회는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생명을 근거로 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반드시 서야 하고, 성장해야 하는 당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는 서야 하고, 성장해야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전에 신문에 난 기사가 참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미국 시애틀에 9살짜리 뇌질환성 전신마비 장애 소녀가 있습니다. 애슐리라는 소녀입니다. 이 소녀가 최근에 성장을 멈추는 ‘성장억제’ 시술을 받았습니다. 일부 의료계는 이 시술이 비인간적이라고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애슐리는 태어나면서부터 걷거나 말을 못하고 머리를 제대로 가눌 수도 없고 제 힘으로 구르거나 앉을 수 없는 채로 튜브를 통해 음식을 섭취합니다. 부모가 그 아이에게 붙여준 별명은 “베개 공주(Pillow Angel)”입니다. 이 아이가 6년 6개월이 되자 사춘기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몸의 타 기관은 계속 성장하지만 지능발달에 대한 개선의 징후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진단을 받게 되었습니다. 지능이 더 이상 발달하지 못한다는 진단으로 이 아이에게 성장억제 조치가 취해졌습니다. 아이의 키는 134cm, 몸무게는 34kg 상태를 유지하게 한 것입니다. 일부 의료계와 일부 인사들은 ‘비열한 프랑켄슈타인식’의 행위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릇된 시술이라고 비난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부모와 시술한 의사가 오죽 했으면 아이의 성장을 억제하였겠습니까?
  성장하지 못하는 것은 그 자체가 비극입니다. 서지 못하는 것은 생존의 의미가 없습니다. 다시 스스로 설 수 없는 교회가 되었습니까? 완전히 생명력을 잃은 교회입니까? 교회가 생명을 왜 잃어버렸습니까? 교회는 다시 서야합니다. 교회는 다시 설 수 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가 머리이고 하나님이 주인이십니다. 교회는 생명의 말씀이 근거입니다. 생명이 근거이므로 성장해야 하고, 서야 합니다.
  베데스다 못가의 38년 된 병자는 예수님께서 “일어나라”고 하신 한 마디에 일어났습니다. 예루살렘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앉은뱅이는 베드로가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라”고 할 때에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이면 병자가 일어납니다. 죽었던 자도 살아납니다. 병든 교회도 일어납니다. 죽었던 교회도 살아납니다.


  어느 자료에 보면 성장하는 교회의 제일 요건은 끊임없는 복음전파에 대한 열정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복음적 설교라고 합니다. 성장하는 교회들은 주로 강해설교를 하며 성경을 많이 가르친다고 합니다. 반면에 교회가 쇠퇴하는 신드롬은 첫째가 회의가 예배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된다. 둘째가 기독교 기관이 교회보다 더 발달한다. 셋째가 말씀을 문자보다 상징으로 해석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유의하여 교회가 성장하고 서게 해야 합니다. 교회가 쇠퇴하는 갖가지 신드롬을 억제하고 피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9:31에는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고 합니다. 당신의 교회는 많은 환난과 어려움이 있었지만 교회는 더욱 든든히 서 있었습니다. 찬송가 가사처럼 “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입니다.


  교회는 사회의 최후의 보루입니다. 교회가 무너지면 사회는 기댈 곳이 없습니다. 진리를 지키고, 복음을 수호하는 일이라면 교회가 단호하게 나서야합니다. 머리만 깎을 것이 아니라 목도 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점점 교회들은 주류교단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주류교단들은 전자기술과 스크린으로 상징되는 새로운 세계 질서에서 주역의 위치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단들은 복음에 대한 열정과 교회의 정체성을 지키는 일에 소홀합니다. 개교회가 조금만 앞서가면 발목잡고, 이단 시비를 합니다. 교회들이 교단을 탈퇴하는 징조가 많이 보입니다. 교회가 자유롭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교단은 좀더 탄력적인 사고를 해야 합니다.


  교회는 변하지 않는 복음과 변하는 세상 가운데서 위치를 지켜 바르게 서야 할 때입니다. 이런 교회는 절대 쇠퇴하거나, 침체하거나, 이름만 남아 있거나, 자취를 감추는 교회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복음은 문자적으로 변하지 말고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삶은 날마다 진보적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소아시아 지역을 여행할 때마다 참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그 옛날에 찬란하게 성장하고 칭찬을 듣던 빌라델비아 교회도 지금은 기둥만 몇 개 남아있고 교인의 흔적도 찾을 수 없습니다. 우리 교회가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이 있습니까? 교회를 지키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교회가 절대로 시들지 않고 설 수 있게 하는 것은 우리 시대의 책임입니다.

 

둘째, 교회는 진리의 빛으로 다시 서야 합니다.

  교회는 서되, 진리의 빛으로 서야 합니다. 진리가 아니면 세상을 비추지 못합니다. 진리는 참입니다. 진리는 절대로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논리적으로 진리란 허위에 반대되는 것입니다. 국어사전에는 참된 도리, 바른 이치, 언제나 누구에게나 타당하다고 인정되는 인식의 내용이라고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진리는 무엇입니까? 시편 31:5에는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속량하셨나이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14:6에는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17:17에는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고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진리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진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고 합니다. 기독교는 진리의 종교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이시며 진리이십니다. 요한복음 1:14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진리가 충만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말씀에 거하면 진리를 압니다. 요한복음 8:31 하반절에서 32절에는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17:17에는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진리의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는 예배입니다. 이런 예배가 경건성을 가집니다. 말씀은 진리이며, 진리가 살아있는 예배가 경건한 예배입니다. 경건한 예배는 말씀 중심의 예배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4:24에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고 합니다. 이 말은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하라는 말씀입니다.
  에베소서 6:13-17에는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하십니다. 전신갑주는 진리의 허리띠, 의의 호심경,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신,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성령 검입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진리의 허리띠입니다. 진리, 의, 복음, 믿음, 구원, 성령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실은 우리가 전신갑주를 입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싸우시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22-24에는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합니다. 우리가 옛것을 벗어버리는 회개와 새롭게 되는 변화는 진리로 새 사람을 입는 개혁을 의미합니다. 여기에 개인도 교회도 부흥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8:38에는 “빌라도가 가로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고 합니다. 빌라도는 진리이신 예수님을 앞에 두고도 진리를 몰랐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진리를 알지 못합니다. 지금도 진리를 알지 못하는 까닭은 예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참다운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교회는 진리의 빛으로 다시 설 때에 진리를 확실히 전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먼저 진리 위에 굳건하게 서야 진리를 가르칠 수 있습니다. 교회가 거짓에서 떠나고 진리 위에 서야 세상을 비추는 등대가 됩니다.
  디모데는 참 부러운 사람입니다. 어머니와 외할머니의 깨끗한 믿음을 이어받은 교회의 일꾼입니다. 바울이 아들같이 여기던 바울의 협력자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디모데후서 1장 5절에서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라고 합니다. 저는 이 말이 제일 부럽습니다. 좋은 가문도 부러워할 일이고, 바울이 인정하고 사랑하는 일꾼이 된 것도 부럽지만 가장 부러워할 일은 거짓이 없는 믿음입니다. 진실한 믿음입니다. 진리 가운데 서 있는 그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무엇입니까? 가문이나 사람에게 사랑받고 인정받는 것이 아닙니다. 깨끗하고 거짓이 없는 믿음, 진리 가운데 서 있는 굳건한 믿음입니다.
 

여러분, 이 목사도 거짓말을 하는 것 아십니까? 거짓말은 진리에서 떠난 행위입니다. 저도 거짓말을 가끔 하는 것을 고백합니다. 흔히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미명하에 별 가책 없이 거짓말을 했습니다. 진리의 빛은 거짓이 없는 빛입니다. 저도 오늘의 말씀을 준비하면서 많은 가책을 가졌습니다. “진리의 빛이 되기 위해서는 거짓을 물리쳐야지”하고 다짐했습니다. 제가 여러분들 앞에서 약속하려고 합니다. 선의의 거짓말이라도 하지 않는 해가 되려고 합니다. 올해는 우리부터 거짓말을 하지 않는 해가 됩시다. 진리의 빛으로 세상을 비추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찬송가의 가사에 “하나님의 진리 등대 길이길이 빛나니 우리들도 등대되어 주의 사랑 비추네”라고 합니다. 우리가, 우리 교회가 진리의 등대가 되어 빛을 발해야 합니다. 진리의 등대는 거짓을 비추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가 진리의 등대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세상이 변화되고 새로운 부흥을 기대할 수가 있습니다.

 

결론

  비행기가 공항에 도착하자 안내방송이 흘러나왔습니다. “공항 안에서 댁의 보청기를 주웠습니다. 그러니 고객 서비스 카운터에 와서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아무도 찾아가지 않았답니다. 보청기가 없으니 들을 수가 없습니다. 어떤 분은 안경을 못 찾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안경을 벗고 있으니 안경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 못 찾았답니다.
  교회는 복음을 들려주고,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곳이 돼야 합니다. 귀가 있어도 못 듣고, 눈이 있어도 못 보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확실히 들려주고, 그리스도를 분명히 보여주기 위하여 교회는 진리의 빛으로 다시 서야 합니다.


  ‘러너스 하이’(runner’s high)라는 말이 있습니다. ‘주자 최면 상태’라고 합니다. 이 현상은 쾌락 호르몬의 영향에 의한 것이라고 합니다. 마라톤의 주자들이 한참을 달리다보면 최면상태처럼 되어 그냥 그 속도로 달리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쾌락을 느끼는 상태에서 자신도 모르게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힘들어 보이지만 옳은 곳을 향하여 끊임없이 달리면 주자 최면 상태에 들어갑니다. 끊임없이 세상 향락을 향해 정신없이 달려갈 수도 있고, 끊임없이 하늘의 영광을 위하여 쉴 새 없이 달릴 수도 있습니다. 한 해 내내 신앙으로 달려가기를 바랍니다. 하늘나라의 목표를 향해 달리는 쾌락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열심히 달려 우리 교회가 반드시 회복하는 회개와 각성과 부흥을 이루는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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