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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같은 신앙인이 되자
 
찬송가 : '강물같이 흐르는 기쁨' 182장(통 169장) 
신앙고백 : 사도신경 
본문 : 누가복음 12장 49∼53절 



말씀 : 예수님이 하실 일은 '이 세상에 불을 던짐'과 같아서 비진리의 세계는 불안과 소요가 일어나게 됨을 가정의 비유를 들어 본문에 언급되고 있습니다. 불을 던진다는 말은 복음과 성령의 역사를 의미합니다. 즉 성령의 역사를 통해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고 비진리의 세계를 정복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불은 하나님 능력의 상징이었습니다. 임재의 상징이었습니다. 창세기 15장 6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에 불이 임했습니다. 아들을 준다는 언약의 믿음에 대한 증거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시는 불이었습니다. 출애굽기 3장 2절에 기록된 모세에 대한 부르심도 하나님 임재의 상징이었습니다. 열왕기상 19장 38절을 보면 엘리야 제단에 불이 임했습니다. 거짓 선지자와의 싸움에서 진리의 승리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불이 임하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첫째, 불은 밝힘의 역할을 합니다. 불에는 빛이 있습니다. 빛은 어두움 속에서 밝힘으로 진리와 비 진리를 확실하게 구분시킵니다. 신앙이 있을 때는 구원의 확신 속에서 천국의 소망을 갖고 살아가기 때문에 세상의 죄악(유혹)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혼돈 속에서 사는 삶이 아니라 판단에도 실수가 없게 됩니다. 정도를 걸어갈 수 있는 참된 신앙인의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 불은 힘을 공급하는 에너지 역할을 합니다. 우리가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필수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성령의 불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은 무한합니다. 이 힘의 공급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 제자들은 의욕이 넘쳤습니다. 그렇지만 의욕만 갖고는 안 되는 일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6장 33절에서 베드로는 다 주를 버릴지라도 자신은 버리지 않겠다고 호언합니다. 요한복음 6장 68절은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라고 합니다. 분명한 신앙 고백을 유지하고 성장시켜 갈 수 있는 힘은 성령의 적극적인 개입과 역사하심에 있습니다. 성령의 임재 속에서 신앙의 열정이 불꽃처럼 타오르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을 밝혀주고 이끄는 주인공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불이 있는 신앙이 되어야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성령의 불이 임하면 진리와 비진리, 참과 거짓을 판단할 수 있고, 능력 있는 십자가의 군병으로 사탄과 싸워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의 가정도 성령 충만을 받기 위해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날마다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 우리 삶의 초점이 하나로 모아져야 합니다. 

기도 : 성령에 사로잡힌 신앙인이 되게 하소서. 혼돈 속에서 헤매지 말고 판단에도 실수가 없게 하소서. 정도를 걸어가는 참된 신앙인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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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의 사명
본문 : 잠언 22장 6절 

말씀 : 오늘 본문은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우리의 속담과 일치되는 말씀입니다. 어린 시절 무엇을 배웠느냐에 따라 배운 대로 살아가는 인생이 됩니다. 그러므로 어린 시절에 무엇을 가르치느냐 하는 문제는 아이의 인생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자녀들은 미래의 우리 모습입니다. 자녀들이 올바로 자라나지 못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없어지는 것입니다. 본문도 마땅히 행할 길을 가르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마땅히 가르쳐야 할 내용은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의 뜻을 찾고 사는 삶을 가르쳐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인생이 성공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며 자기 고집대로 사는 인생은 성공할 수 없습니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하나님의 뜻을 찾는 자는 실패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해서는 기도하는 삶, 말씀 연구하는 삶을 가르쳐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요, 말씀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사명으로 사는 삶을 가르쳐야 합니다. 기독교인의 삶에는 우연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움직여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사명이 있어 태어난 인생임을 철저히 가르쳐야 합니다. 신분 의식이 분명할 때 삶의 자세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신분 의식을 분명히 하라는 내용입니다. 사명 의식이 분명할 때 능력 있는 인생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명이 있는 자는 비교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고 능력 있는 인생을 만들 될 수 있습니다. 

셋째. 십자가 중심의 삶을 가르쳐야 합니다. 십자가는 사랑의 상징입니다. 즉 사랑의 위대성을 가르치고 그렇게 살도록 훈련시켜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이 무엇입니까? 미움과 시기와 질투가 난무하는 세상에서 자신을 희생해 이웃에게 참 사랑을 베푸는 삶의 위대성을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 4∼5절에는 에베소 교회의 첫 사랑을 회복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은 사랑 없는 삶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22장 37∼39절에 새 계명을 주셨는데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입니다. 사랑은 자기희생입니다. 십자가는 자기희생의 모델입니다. 

어린 자녀들은 미래의 일꾼입니다. 우리의 미래의 모습입니다. 말씀대로 마땅히 가르쳐서 우리의 미래가 복되게 합시다. 기도하는 삶으로 하나님의 뜻을 찾고 순종하며 사명의식 속에 자신의 가치를 인정하고 십자가 중심의 사랑의 삶을 살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기도 : 부모 된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뜻을 찾고 사명을 발견하게 하소서. 기도와 말씀 가운데 삶의 자세가 달라지게 하시고, 십자가의 사랑을 통해 주님의 자기희생을 배우게 하시고, 실천하는 삶을 살게 하소서. 자녀에서 사명을 가르치는 부모가 되고 본이 되는 삶을 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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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가정예배  손해 볼 준비  <하나님의 사람 모습>     

 
찬송 : '어려운 일 당할 때' 543장(통 342장) 
신앙고백 : 사도신경 
본문 : 창세기 26장 12~25절 




말씀 : 이삭은 유명한 아버지의 아들이었고 유명한 아들의 아버지였습니다. 이삭을 아브라함의 아들, 야곱의 아버지로 기억되는 엑스트라로 볼 수도 있지만 본문을 통해 당당히 주인공으로 살았던 이삭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의 신앙을 물려받아 여호와의 말씀을 따르는 신실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아브라함과 약속하셨던 복을 내리셨습니다. 그는 복을 받았을 뿐 아니라 받은 복을 지키며 살았습니다. 어떻게 그가 복된 삶을 살았을까요? 

첫째, 문제가 삶 속으로 들어왔습니다. 이삭이 그랄에 거주하며 농사 지었을 때, 한 해 동안 100배의 결실을 맺으며 거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삭을 시기하던 블레셋 사람들은 이삭이 소유한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워버렸습니다. 물이 귀한 지역에서 다른 사람이 소유한 우물을 메워버린다는 것은 곧 전쟁 선포를 의미합니다. 결국 블레셋의 왕인 아비멜렉은 이삭에게 그 땅으로부터 떠날 것을 명령합니다. 얼마나 억울했을까요. 잘못한 것도 없는데 시기하는 사람이 생겨 소유를 빼앗기고, 강제추방 명령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그도 모르는 사이 문제가 평안한 삶을 비집고 들어왔습니다. 그 문제는 이삭을 시기한 사람들로 인한 감정의 문제였습니다. 

둘째, 감정의 문제를 다루는 방법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이삭의 우물을 메웠을 때 그 동기는 이삭의 잘못이 아니었습니다. 이삭은 결코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았습니다. 말씀을 보면 그는 다툼이 일어나지 않는 더 넓은 곳으로 장막을 옮겼습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장소의 넓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좁은 마음을 갖고 있다면 넓은 장소에서도 다툼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넓은 마음이 있다면 좁은 장소에서도 다툼을 피해갈 수 있습니다. 이삭은 분쟁이 일어날 때마다 계속해서 더 넓은 곳으로, 다툼이 일어나지 않는 곳으로 장막을 옮겼습니다. 감정 문제로 인한 맞대응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세상과 충돌할 때가 있습니다. 이삭의 모습을 본받아야 합니다. 

셋째, 감정의 문제를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입니다. 이삭의 여정이 그저 다툼만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그의 인생은 엑스트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삭의 종착역은 두려움을 피해 도망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이삭이 에섹, 싯나, 르호봇을 지나 브엘세바로 나아간 여정은 분란을 피하고 평화를 추구하던 길이었으며, 하나님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브엘세바에서 이삭에게 나타나 그를 위로하고 복을 주시며 언약을 확인하십니다. 브엘세바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했던 곳입니다. 이삭이 어릴 적 '여호와 이레'를 경험했던 곳입니다. 감정의 문제는 사람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지만 하나님 앞에 나갈 때 회복될 수 있습니다. 

기도 : 사랑의 하나님, 우리 마음속에 분노와 성냄으로 다른 사람을 대하던 것을 용서하시고 사랑과 온유로 관계를 만드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주기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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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으로운 설교] 교만으로 부터 자유


제목 : 교만으로 부터 자유
성경: 고전 3:21-23   


21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22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23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고전 3:21-23)  

고린도 전서 3장 마지막 부분에서 분쟁과 경쟁에서 벗어나는 길은 사람을 자랑하지 마라고 한다. 즉 누구한테 배웠고 어느 학교 출신이며 어느지역 출신지인지를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지 마라라는 것이다. 어느 사회심리학자가 인간은 다른 사람을 보는 순간 마음 속에 십자가를 그린다고 한다. 십자가의 좌측에 있으면 자신이 싫어하거나 경계하는 사람이고 오른편에 있으면 좋아하거나 호감을 갖는사람이라고 한다. 그리고 십자가 윗편에 위치하면 자기보다 센사람이고 아랫편에 있으면 약한 사람으로 분류해서 그 사람을 대한다는 것이다.
  
좌우로 분류되는 것은 이미 에녹성 이야기에서 말했 듯이 성안에 사람이면 오른편에 성밖의 사람이면 왼편에 위치하게 된다. 상하로 나누게되는 것은 사람이 그가 가지고 있는 힘 즉 권력 재산 학력 미모 도덕성 등등 같은 외적인 힘의 크기에 따라서 분류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떠난 모든 인간은 평생 십자가 윗편에 위치하게 보이도록 몸부림치는 삶을 위해서 수고하고 짐을 지고 산다. 그리고 그들의 자녀들에게도 이런 힘을 안겨주기 위해서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이 가진 것을 의롭고 선한 곳에 사용하지 않는 한 우리 아무 것도 진정으로 소유할 수 없다. 아니 소유해서는 않된다. 소유는 고인 물처럼 악취를 풍기며 자신도 역시 썩게 만드는 세균과 같은 것이다. 즉 사람을 소유의 유무로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빌립보서 2장에서 바울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라고 한다. 힘의 크기로 사람을 분류하면 결코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길 수 없다. 예수님께서 사람의 모양으로 오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시니 이는 십자가의 죽음이라(빌 2:8)말씀은 바로 인간이 마음 속에 그리는 십자가를 자신의 십자가로 걷어내어 진정으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길 수도록 하신 것이다. 

우리가 은연중에 다른 사람의 잘못을 가까운 사람에게 이야기하는 습관 역시 나는 그런 죄를 짖지 않는다는 우월감을 드러내는 것이다. 즉 다른 사람에게 나 자신이 십자가 위편에 위치하도록 비추어 지도록 애쓰는 은밀한 시도인 것이다. 내 이웃 중에 마음에 들지 않고 나 자신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역시 십자가를 그려서 왼쪽 하단에 위치시키면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도 도전하는 행위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나에게 보내는 사람을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불평하고 배척한다면 그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사람을 힘의 유무로 판단하지 않으면 가진자는 자랑 할 수 없고 못 가진 자는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된다. 교회가 이런 모습을 보여야 세상과 다른 것이고 그런 곳이 바로 천국인 것이다. 진정한 겸손이 넘치는 곳이 교회이며 천국이다. 결코 교만은 도덕적으로 겸손해야 한다는 구호로 해결되지 않는다. 십자가의 도를 뼈저리게 가슴에 새기고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일을 피흘려 싸우며 이루는자만이 가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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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예화모음  성숙과 성장에 관하여    

성장, 성숙에 관한 예화 모음

▣ 성장의 기쁨 

나는 결혼한 후 곧바로 개척교회를 시작했다. 두 살 터울로 세 자녀를 낳았다. 교회일에 몰두하다보니 따뜻한 사랑으로 자녀들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부모 된 도리를 다하지 못한 아쉬움 속에 세월이 훌쩍 지나 두 아들이 장가들어 손자 손녀들이 태어났다. 자식에게 다하지 못한 사랑을 손자 손녀에 쏟게 됐다. 그런데 아이들의 성장하는 모습이 아주 재미있다. 처음 말을 배울 때 두 글자로 시작되는 엄마,아빠는 곧잘 따라 하더니 세 글자인 할머니와 네 글자인 할아버지는 따라 하지 못했다. ‘할머니’ 하면 ‘할미’라 하고 ‘할아버지’ 하면 ‘할비’ 또는 ‘할부’라고 했다. 두 자로 된 낱말에 익숙한 아이들이 세 글자,네 글자는 어려워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래 되지 않아 ‘할브지’ 하던 아이가 정확하게 ‘할아버지’라고 말한다. 성장하는 것이 기쁘고 신비롭다. 그리스도인도 신앙 성장이 있을 때 하나님 아버지가 기뻐하신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4:15) 

▣ 성장

어린 영혼은 남들이 칭찬할때 기뻐하고, 비난할 때 슬퍼합니다. 좀 더 자라면 남들이 비난할 때 기뻐하고 남들이 칭찬할때 두려워합니다. 조금 더 성장하면 그는 남들의 칭찬이나 비난에 별로 반응을 보이지 않게 됩니다. 그는 사람의 인정과 비난은 헛된 것이며 전능하신 분으로부터 오는 것만이 영원하며 온전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 성장의 고통 

유명한 조각가 미켈란젤로가 한번은 훌륭한 조각 예술품을 만들기 위해 커다란 대리석 덩어리를 망치와 정으로 쪼고 있었다. 그때에 어떤 사람이 다가와서 '그 좋은 대리석을 이처럼 많이 깨어버리면 낭비가 아닙니까?'라고 물어 보았다. 그러자 미켈란제로는 '이 대리석이 깨어져 나갈 때에야 비로소 조각은 살아나게 됩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처럼 우리의 심령이 깨어질 때 비로소 그리스도의 형상이 나타나게 된다.
우리의 자아가 깨어져 나갈때 비로소 그리스도의 모습이 보이게 된다 그러나 육이 깨어져 나가는 고통이 너무 커서 많은 사람들은 그러기를 원하지 않는다. 댓가 없이 그리스도인은 성장하지 않는다.
“너희도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2)
우리 중에 먼저 예수를 믿기는 했지만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교회의 분쟁은 두 부류가 있는데 하나는 진리와 교리 문제 때문에 일어나는 분쟁입니다. 이것은 선한 싸움으로 진리를 사수하기 위해서 비진리를 추방해내야 합니다. 또 하나는 아직 성숙하지 못했기에 다투고 분리되는 경우입니다. 교회분쟁은 대부분 미성숙하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본문의 ‘지어져 간다’는 말씀은 끊임없이 예수님의 모습으로 만들어져 가며 영적 성전이 완성되어 간다는 뜻입니다.
/최홍준 목사(호산나교회)

▣ 성장의 과정

칼 융은 “모든 신경증은 정당한 고통을 회피한 대가다”라고 말했다.고통을 회피한 대가는 회피하고자 했던 고통보다 결국에는 더 고통스러운 것이다. 정당한 고통을 회피할 때, 우리는 그 문제를 통해 우리가 이룰 수 있는 성장도 회피하는 것이 된다. 배움은 고통이라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안성우의 ‘멈출 수 없는 사랑’ 중에서-

육체가 자라날 때도 성장통을 겪는 것처럼 우리 영이 자라날 때 역시 고통의 순간이 찾아옵니다. 하지만 그 고통의 순간은 결코 좌절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고통을 통해 우리의 불필요한 부분들이 잘려나가 주님 앞에 정금과 같이 서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고통은 우리를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를 주님께로 더 가까이 자라나게 할 것입니다.

▣ 구원받았으면 성장하라 

프로 기사들은 바둑을 둔 후에 자리에서 바로 일어나지 않는다. 復碁(복기)라고 해서 방금 둔 바둑을 다시 두면서 어느 수가 좋았고, 어느 수가 나빴는지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교환한다. 승부를 넘어서서 더 완벽한 바둑을 두기 원하는 것이다. 아마추어 기사와 프로 기사의 수준 차이는 매우 크다
최고의 아마추어가 프로 기사와 둘 때도 몇 점을 깔고 두어야 할 정도다. 그런데 이런 프로 기사들 사이에는 또 1단부터 9단까지 등급이 있다. 9단은 가장 높은 수준으로 신이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여 入神(입신)이라고 부른다. 1단은 겨우 졸렬함을 지키는 수준이라고 해 守卒(수졸)이라고 한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기 위해 아마추어가 아니라 프로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은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을 믿은 성도들은 세상 사람과는 다른 판단 체계를 가지므로, 그 순간에 아마추어에서 프로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9단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변화무쌍한 상황에 가장 적합한 판단을 내리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분별력은 옳고 그름의 차원을 넘어선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가를 논할 때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식으로 생각하는데, 이런 차원이 아니라 무엇이 더 올바르고 적합한가 하는 차원이 되어야 한다. 또 사람의 궤변과 간사한 유혹에 빠진 채 잡다한 교훈에 흔들려 판단력에 균열이 가게 해서는 안된다. 범사에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 가야 한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것을 목표로 신앙 생활을 해야 한다.
/정요석

▣ 언제나 청춘 

롱펠로우는 지금까지도 세계인으로부터 사랑받고 있는 미국의 시인입니다. 롱펠로우는 하버드 대학에서 근대어를 가르치며 낭만적인 사랑의 시를 써서 대중적인 사랑을 받았습니다. 
세월이 흘러 롱펠로우의 머리칼도 하얗게 세었지만 안색이나 피부는 젊은이처럼 싱그러웠습니다. 하루는 친구가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롱펠로우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이보게, 친구! 오랜만이군. 그런데 자네는 여전히 젊군 그래. 
자네가 이렇게 젊은 비결은 뭔가?" 
이 말을 들은 롱펠로우는 정원에 있는 커다란 나무쪽으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습니다. 
"저 나무를 보게나! 이제는 늙은 나무지. 그러나 저렇게 꽃이 피고 열매도 맺는다네. 그것이 가능한 건 그래 봬도 저 나무가
매일 조금이라도 계속 성장하고 있기 때문이야. 나도 그렇다네. 나이가 들었어도 매일매일 성장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살아가고 있다네!" 
인생은 언제나 성장해야 합니다.
<용혜원 / 목사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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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 '주 믿는 사람 일어나' 357장(통 397장)
신앙고백 : 사도신경
본문 : 사무엘상 17장 41∼49절


말씀 : 요즘처럼 외모에 관심이 많던 시대는 없었을 것입니다. 성별과 나이를 불문하고 사람들은 외모에 굉장한 관심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처럼 외모를 보기보다 중심을 보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본문은 다윗과 골리앗의 전쟁 이야기입니다. 어느 누구도 다윗이 당대 가장 큰 장군이었던 골리앗을 이길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은 하나님의 거룩함과 세상의 싸움이었습니다. 이 싸움을 통한 영적인 교훈을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자가 세상에서 승리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방인에게 모욕당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거룩한 분노로 가득한 다윗은 자신의 환경을 보지 않고 담대하게 골리앗에게 나아갑니다. 사랑하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이 원하는 일을 하고 그분의 영광이 가려지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다윗이 그랬습니다. 하나님은 그 모습을 보시고 그를 존귀케 하시고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셨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이름을 존귀하게 여기는 자가 세상에서 승리합니다. 골리앗이 섬기던 다곤신은 반은 사람 모양이고 반은 물고기 모양의 우상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관심을 가졌던 골리앗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지 못했습니다. 믿지 못하니 하나님을 우상의 이름으로 저주했습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모습입니까?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이 보입니까? 신앙이 보이는 것입니까? 눈에 보이지 않지만 믿음이 있게 될 때 삶의 새로운 역사들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그때에 변화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잠언 9장 10절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며 지혜로운 자들에게 이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비결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는 자가 세상에서 승리합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길 조건은 없었습니다. 신체적인 조건과 무기 등 무엇을 봐도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돌멩이로 골리앗을 거꾸러뜨렸습니다. 이는 그가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보는 것과 하나님이 보는 것은 다릅니다. 이제 관점의 차이를 극복합시다. 드러나는 것으로 판단하지 맙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점 차이를 극복합시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님을 존귀하게 여기는 마음 그리고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는 마음을 가질 때 승리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바로 이 길이 주님의 은총을 누리는 길이자 부요케 하는 길입니다.

기도 : 하나님, 여전히 하나님의 관점을 갖지 못한 부분이 있습니다. 부족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은혜를 더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며 깊이 알아가도록 인도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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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대면 예배기간중 가정예배 주 안에서 안식을 누리라

찬송 : '즐겁게 안식할 날' 43장(통 57)
 
신앙고백 : 사도신경 
 
본문: 출애굽기 20장 8∼11절 
 
말씀 : 구약의 안식일과 신약의 주일은 어떻게 다를까요. 기본적으로 구약시대처럼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구약의 율법을 완성하셨기 때문입니다. 구약을 해석할 때 우리는 항상 예수님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봐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을 기념해 주일로 지키게 된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을 그대로 따를 필요는 없지만 그 율법의 정신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유효합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그 정신은 강화됐습니다. 예를 들어 구약율법의 ‘살인하지 말라’는 명령을 지키려면 사람을 실제로 죽이지만 않으면 됐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신 이후에는 마음으로 미워하는 것까지 금지됐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이 율법을 폐기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성경을 보면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에 십계명에 대한 언급이 나옵니다. 똑같이 십계명을 말하지만 약간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출애굽기에서는 ‘하나님이 창조사역을 마치시고 7일째 쉬었기 때문에 너희들도 쉬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쉬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지은 모든 것을 감상하며 즐기셨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제정하신 안식일은 영원한 안식일이지만 이 세상에 죄가 들어오면서 이 안식이 깨어져 버립니다. 잃어버린 안식은 마지막 날에 다시금 회복될 것입니다. 그 안식이 회복될 때까지 일주일에 한 번 그 영원한 안식을 조금이라도 맛보라고 하신 것입니다. 출애굽기에서 말하는 안식일이란 창조에 대한 기념일입니다. 

반면에 신명기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킨 것을 기념하는 의미로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십니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안식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은 그 백성을 구원하시고 참 자유와 안식을 주셨습니다. 그것을 기념하는 것이 안식일의 의미였습니다. 출애굽을 통한 구원은 곧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과 직결됩니다.  

이렇게 본다면 안식일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신 창조에 대한 기념일이고 두 번째는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에 대한 기념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안식일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를 즐기면서 쉼을 얻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에 감사하며 진정한 쉼을 누리지 못하면 안식일을 지켰다고 할 수 없습니다. 안식일에 또 우리는 죄와 사망에 얽매여 있던 죄인들을 해방시키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주일은 6일간 하던 모든 일을 중단하고 쉬어야 합니다. 그냥 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분을 즐거워하면서 보내야 합니다. 이 안식일에 참 자유와 평안을 얻고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주님이 제정하신 주일에 참 안식과 기쁨을 누리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분주한 일상 때문에 예배를 소홀히 하는 일이 없게 하시고, 주일을 보낼 때마다 영원한 안식이 있는 천국을 소망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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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예배 < 시련이 만드는 것 > 코로나19 대유행시 가정예배 중요

찬송 : ‘마음속에 근심 있는 사람’ 365장(통 484)

신앙고백 : 사도신경

본문: 에스더 3장 1∼6절

말씀 : 새로운 하루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오늘도 주님의 은혜로 살아갑니다”라고 인사 나누면 좋겠습니다. 

오늘부터 며칠은 에스더 시대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이스라엘은 솔로몬왕 이후 두 개의 나라로 갈라졌습니다. 그러다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멸망당하고, 남유다는 바벨론에 정복돼 대다수 유대인이 포로로 끌려갑니다. 그러나 바벨론도 신생국인 바사에 의해 멸망당했고, 바사왕 고레스는 포로로 잡혀 왔던 유다 백성들을 다시 고국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 땅에 남아 살던 유대인이 많이 있었고 더 나은 거주지를 찾으려고 사방으로 흩어져 사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오늘 에스더 이야기는 이 첫 번째 귀환과 에스더에 의해 인도된 두 번째 귀환 사이에 일어난 일입니다. 즉 포로 생활 중에 있던 일입니다. 

당시 왕 아하수에로 1세는 역사적으로 아주 변덕이 심한 잔인한 독재자로 언급됩니다. 자신이 곧 법이며 주권자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만이라는 신하가 왕의 심복이 돼 유대인들을 핍박했고, 자신에게 절하지 않은 모르드개를 죽일 뿐 아니라 유대민족 전체를 학살하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배경만이 아니라 인류역사 중 가장 큰 시련을 겪은 민족을 들라면 이스라엘을 제외할 수 없습니다. 그 많은 시련의 한 장면은 에스더 3장에서 시작합니다. 인간이라면 시련을 좋아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시련이 나쁘기만 할까요. 

루이스 캐럴이 쓴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는 도도새 이야기가 나옵니다. 도도새는 아프리카 동쪽 마다가스카르섬 근처에 있는 모리셔스섬에서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모리셔스는 자연환경이 뛰어나고 먹이가 사방에 널려있어 도도새의 천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도도새는 애써 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냥 떨어진 열매를 주워 먹으면 됐고, 천적이 없으니 나무에 둥지를 틀 이유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도도새는 날 줄을 몰랐습니다. 

포르투갈 선원들이 처음 이 섬을 발견했을 때 이 새는 날 줄도 모르고 멍청히 사람을 쳐다만 봐서 이름을 ‘바보 멍청이’라는 의미로 ‘도도새’라고 지었답니다. 이후 사람들이 들어오고 다른 동물들이 유입되자 새는 멸종당하고 말았습니다.

시련은 어쩌면 우리를 살게 하는 천적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야 애써 날고 둥지를 나무 위에 틀고, 먹이를 잡으러 다니는 과정에서 튼튼해지고 강해집니다. 시련은 우리로부터 모든 것을 빼앗아 가는 게 아니라, 우리에게 내면의 힘과 견고한 믿음, 강인한 정신과 결속력을 주는 좋은 기회일 수 있습니다. 천적이 없는 생활을 원하시나요. 시련이 나를 살리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힘을 내어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살면서 어려움과 시련이 없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 안에도 하나님께서 숨겨 놓으신 좋은 선물이 있는 줄 믿습니다. 도망가지 말고 이기게 하시고 그 과정을 통해 강해지게 하소서. 서로 기도하며 함께 이겨가는 가족 되게 하소서.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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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제목 : 강을 건넌 사람들

말씀:수3:14-17

1.현실의 강을 넘어서야 합니다.

어떤 인터넷 매체에 보니까 박명수 어록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거기에 보면 이런 말들이 있었습니다. ‘성공은 1%의 재능과 99%의 빽이다.’ ‘일찍 일어난 새가 피곤하다.’ ‘고생 끝에 골병난다.’ ‘가는 말이 고우면 얕 본다.’ ‘늦었다고 생각할때는 늦은 거다.’ ‘참을 인이 세 번이며 호구된다.’ 그리고 이런 말들에 대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했고, 이런 말들을 주옥같은 명언이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신지요? 공감이 가는 말들인가요? 물론 어떤 면에서는 오늘 우리의 실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어서 공감이 되는 부분들이 없지 않아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속지 마십시오. 설령 그런 말들이 오늘 우리의 현실을 반영하는 말이라고 할지라도 그게 진리는 아닙니다. 아니 도리어 그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었다면 그것은 현실이 그만큼 왜곡되고 썩어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 사고 방식은 결코 인간의 삶을 가치있고 의미있게 하며, 기쁨과 평안과 행복을 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갈등과 탈법과 술수와 상처와 아픔과 시기와 질투와 무질서를 초래하여 인간의 삶을 불행하게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더더구나 그걸 진짜로 알고 그렇게 살아간다면 결국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고 말 뿐입니다.

여러분, 세월이 어떻게 변하고, 가짜가 어떻게 그럴듯하게 가장해도 거짓은 거짓에 불과합니다. 세월이 변한다고 진리가 거짓이 되고, 거짓이 진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진리가 가짜가 되는 일이 있다면 그건 처음부터 진리가 아니었을 뿐이지 진리가 가짜가 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날 너무나 왜곡된 가치관이 마치 진리처럼 가장하고 판을 치고 있습니다. 물질만능주의와 인본주의와 개인이기주의와 무사안일주의와 쾌락주의가 만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앞에서 말씀드린 무슨 박명수 어록이니 뭐니 하는 이런 허접스런 말들이 나오고 그걸 또 무슨 주옥같은 명언이니 어쩌니하며 떠들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합니다. 열심히 말씀과 기도로 훈련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너무나 당당하게 큰소리를 치며 흘러가고 있는 이 왜곡된 가치관들 속에 끌려가기 십상입니다. 우리가 맨날 보고 듣고 이야기하고 교제하며 살아가는 세상이 하나님과는 전혀 관계없이 자신이 죄와 무지속에 있는 줄은 모르고 그저 자기중심, 자기 소견, 자기 의지, 자기 경험대로 물질주의, 이성주의, 이기주의 물결속에 흘러가고 있기 때문에 정말 말씀과 기도로 무장하지 않으면 십중팔구 거기에 휩쓸려 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롬12:2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 세대의 왜곡되고 거짓된 것을 따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정말로 우리 영혼이 변화되고, 마음이 변화하여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바르게 분별하고 그 뜻을 좇아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말씀과 기도로 무장하여 온전한 분별력을 가지고 모든 거짓되고 왜곡된 가치를 바르게 분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다수라는 이름으로 진짜를 가장하고 있는 가짜를 바르게 분별하고 배격함으로 그런 것들에 결코 농락당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정말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능력으로 세상의 모든 오염되고 추하고 왜곡된 현실을 이기고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을 잘 달려감으로 생명의 은총을 풍성히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현실의 강을 건넌 사람들

여러분, 그래서 성경에서는 그런 왜곡된 현실의 강을 건너 살 것을 계속 말씀하셨고, 또 그런 말씀을 따라 삶으로써 성공했던 많은 사람들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노아 할아버지도 그 중 한사람이었습니다. 당시에 죄가 세상에 관영하여 하나님께서는 땅을 홍수로 멸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러나 노아 할아버지 가정은 그런 현실에 휩쓸려 떠내려가지 않고 그 현실의 강을 건너 의롭고 경건하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가정을 통하여 새로운 역사를 이루어가시려고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어 홍수를 피라하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노아는 즉각 순종하여 배를 만들기 시작하여 무려 120년 동안에 걸쳐 방주를 지었습니다.

여러분, 노아의 방주는 길이가 137m, 넓이가 23m, 높이가 14m의 3층짜리 배로 용적량이 3만톤이 넘는 거대한 배입니다. 물론 지금의 조선기술로는 이런 규모의 배 정도야 문제가 될 것이 없지만 노아의 가족 여덟식구가 순전히 손으로 이 정도의 배를 만든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120년동안 그 엄청난 일을 하면서 얼마나 힘이 들었겠으며, 또한 얼마나 많은 유혹들이 있었겠습니까? 이 배를 정말 우리가 완성이나 할 수 있을까? 정말 120년 후에 인류가 멸망할 비가 오기는 오는 걸까? 또 10년 30년 50년 70년 100년이 지나면서 내가 정말 말씀을 바로 듣기는 들은 걸까 등등 많은 생각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사람들은 전 세계의 홍수심판이라는 말도 안되는 말을 믿고 배를 만드는 노아의 가족을 미치광이 취급을 하면서 노아의 가족을 비웃으며 먹고 마시고 즐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그런 모든 현실을 뿌리치고 배를 만들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어떻게 살든 오직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였습니다. 너무나 힘들고 고된 작업이었지만 중단하지 않고 열심히 성실하게 배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120년이 지났을 때 정말로 하늘에 구멍이 뚫려 밤낮 40일 동안을 양동이로 물을 퍼붓듯이 비가 쏟아졌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온 세상이 물에 다 잠겼고, 노아를 비웃으며 먹고 마시고 즐기던 사람들은 하나없이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뭐라 그러거나 말거나, 심지어는 자신의 내부 속에서 어떤 생각들이 일어나거나 말거나 그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120년간 방주를 만들었던 노아의 가족 8식구만이 방주 안에서 안전하게 대홍수의 강을 건너 새로운 인류의 시조가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아브라함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창12:1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밑도 끝고 없이 무작정 가라는 것입니다. 떠나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이 왜곡되고 죄된 문화가 판을 치는 이 땅과 이 사람들과 이 문화를 떠나라는 것입니다. 이들을 떠나 내가 새롭게 시작할 그 땅으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 말씀에 순종하여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아버지와 고향산천과 그 모든 환경과 문화의 강을 건너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 완전히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 것입니다.

또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어 구원하실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여 애굽의 우상숭배의 문화의 땅을 떠나게 하셨습니다. 홍해 바다를 건너 멀리 가나안 땅까지 가게 하셔서 거기서 새역사를 시작하셨던 것입니다.

이 모든 말씀들이 뜻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한마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 죄와 무지와 왜곡과 어둠의 현실들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딛고 일어서든지 아니면 그곳을 떠나든지 여하튼 왜곡된 현실의 강을 건너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승리가 있고, 거기에 생명의 풍성한 은총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본래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던 에덴의 모습들을 너무나 많이 잃어버렸고, 너무나 많이 변질되어 있어서 우리가 넘어야 산과 건너야 할 강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때로는 환경과 상황이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산입니다. 때로는 이성과 경험이 우리가 건너야 할 강입니다. 불신과 의심과 욕심과 욕망과 돈과 권력도 넘어서야 할 강입니다. 사람과 문화와 과학도 우리가 넘어서야 할 산 중의 하나입니다. 술과 담배와 향락과 무사안일은 말할 것도 없이 반드시 건너가야 할 강입니다. 물질주의와 인본주의과 종교다원주의와 개인이기주의도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요, 건너야 할 강입니다. 이러한 산을 넘고 강을 건너야 비로소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입니다. 거기에 우리 모두가 원하는 진정한 기쁨과 자유와 평화와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이 시간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정말 내가 지금 시급하게 넘어서야 할 산이 무엇인지, 빨리 건너야 할 강이 무엇인지 되새겨보면서 그것이 무엇이든 주님의 인도하심과 능력 주심을 따라 그 산을 넘고 그 강을 건너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 산과 강의 저너머에서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는 에덴의 축복을 충만하게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약속의 말씀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가 우리 앞에 놓여져 있는 산과 강을 넉넉히 건너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한마디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바라보며 나아가야 합니다. 다시말씀드리면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든, 어떻게 왜곡되고 오염된 가치관과 문화가 판을 쳐도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고, 푯대로 삼고 천성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도 바로 그러한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데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광야생활을 마치고 드디어 오매불망 기다리던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하여 요단강을 건너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 중요한 시점에 큰 난관에 봉착하게 됩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이면 그때가 우기라서 요단강이 넘칠만큼 싯뻘건 물이 넘실거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적으로는 도무지 요단강을 건널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이런 난관을 어떻게 헤쳐 나갔습니까? 오늘 14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백성이 요단을 건너려고 자기들의 장막을 떠날 때에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에서 나아가니라.” 이것은 6절에서 이미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내용으로 거기에 보면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앞장서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요단강에 도착하면 무조건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요단강이 갈라질 것이다. 그러면 백성들은 제사장들이 멘 언약궤를 보고 건너기만 하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무슨 뜻입니까? 한마디로 세상 물결이 어떻게 넘실 거려도 말씀을 따라 저 가나안복지를 향해 전진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언약궤가 뭡니까? 말그대로 약속의 말씀이 들어있는 상자입니다. 그 안에는 십계명 돌판과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만나 항아리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언약궤는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는 것이며 나아가 하나님의 생명의 떡이요, 생명의 근원이라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약궤를 따라가라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을 따라 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 생명이 있음을 기억하고 그 생명의 말씀을 따라 전진하라는 것입니다. 요단강물이 아무리 사납게 덤벼들어도 두려워 말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약속을 바라보며 전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책임지고 요단강을 가나안복지로 인도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그 때 그 사람들에게만 주신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을 따르는 모든 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갈때에 사나운 강물이 넘실대며 그들을 방해하고 위협하고 낙심하게 만들었던 것처럼 우리가 저 가나안복지를 향해 갈때에 우리를 실망시키고 낙담케하는 일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환난과 풍파가 닥칠때도 있고, 때로는 환경과 상황 때문에, 때로는 물질과 건강 때문에, 때로는 사람 때문에 어려움을 겪을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두려워말고 흔들리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부여잡고 가나안복지를 향해 달려가라는 것입니다. 누가 어떻게 위협하고 유혹해도 그런 왜곡되고 죄되고 혼잡한 것들에게 눈길도 주지말고, 흔들리거나 낙심하지도 말고, 오직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오직 유일한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을 부여잡고 저 가나안복지를 향해 달려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전능하신 하나님,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장애물을 제거해 주시든지, 상황과 환경을 변화시켜 주시든지 아니면 상황과 환경을 그대로 두고 우리에게 지혜와 능력을 주셔서서 이기게 하시든지 여하튼 어떤 방법으로든 승리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오직 주님을 믿고 의지하며 그 약속의 말씀을 바라보며 가나안 복지를 향해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분명히 주님이 인도하십니다. 힘주시고 은혜를 주시고 지혜를 주셔서 이기게 하십니다. 환경과 상황을 변화시켜 주셔서 승리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그러실만한 능력과 권한과 사랑과 인자와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정말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주님의 방법과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갈때에 주님의 능력과 은혜로 우리를 위협하고 유혹하고 넘어뜨리려는 모든 세력들을 이기고 에덴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믿음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 또 하나 기억할 것은 에덴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려면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15,16절 말씀 보겠습니다. “요단이 곡식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 가에 잠기자 /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사르단에 가까운 매우 멀리 있는 아담 성읍 변두리에 일어나 한 곳에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새.....”

자 보십시오, 요단강물의 흐름이 언제 그쳤습니까?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물속에 들어섰을 때입니다. 다시 말씀드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이스라엘을 집어삼키기라도 할 듯이 덤벼들던 요단강의 흐름을 끊고 강바닥을 드러내어 무사히 요단강을 건너게 하셨는데 그런 기적이 일어난 시점이 언제냐?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언약궤를 메고 사납게 요동치며 흐르는 요단강속으로 들어갔을 때라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기적을 일으켜 놓고 건너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순종했을 때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대부분의 경우 기적을 만들어 놓고 누리게 하시기 보다는 믿음으로 행동할 때 기적의 은총을 누리게 하십니다. 노아에게도 하나님께서 방주를 만들어놓고 타라고 하지 않으시고 네가 만들어서 타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고 하실때도 먼저 그냥 무조건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광야생활 동안 반석에서 물을 내실 때도 모세에게 반석을 향하여 명령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가나의 혼인잔치 집에서 포도주를 만들어 놓고 갖다 주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물을 떠서 갖다 주라고 하셨습니다. 나사로를 부활시킬때도 마르다에게 무덤 입구의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때는 제자들에게 빵을 나누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실로암 못가에 있던 맹인에게는 흙을 눈에 바르고 실로암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모든 말씀에 순종했을 때 결국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즉 믿음으로 순종하는 자에게 갓난아기처럼 하나님을 신뢰하는 그 믿음과 순진한 마음을 보시고 은헤를 베풀어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무슨 일이 있어도 세월이 어떻게 변해도 열심히 성실하게 진리를 따라 살기를 원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든지, 상황과 환경이 어떠하든지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을 따르고 그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따라가도 하나님이 아니라 하신 것,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왜곡되고 거짓된 것을 버리고 넘어가고 떠나 갈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유는 두말할나위도 없이 거기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 사랑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과 행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이 땅에서 누려야 에덴 동산이 있고 나아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로 이어지는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 앞에 높게 서 있는 왜곡된 현실의 산들을 넘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너무나 도도하게 흐르는 왜곡의 가치관의 강을 건너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유일한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을 푯대로 삼고 저 가나안복지를 향해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누가 무슨 말을 해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주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며 지혜와 능력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넉넉하게 건너가게 하십니다. 승리하게 하십니다. 이 땅에서도 진정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다가 영원한 천국의 은총을 주십니다. 이런 진정하고 영원한 승리를 누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우리 온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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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명절 설교 예배순서 ( 찬양,기도)

<예배 순서>

오늘은 우리 민족 고유 명절인 설을 맞이하여, 먼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늘나라에 가신 부모님(혹은 선조)을 추모하면서, 동시에 하나님께서 우리 가족을 새해에도 복주시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정성껏 설 명절 예배를 드리겠습니다.

기도문 낭송 (다같이)

여호와는 우리 가족에게 복을 주시고 우리 가족을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우리 가족에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우리 가족에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아멘.

찬송가 477장 (다같이)

1. 내 영혼에 햇빛 비치니 주 영광 찬란해

이 세상 어떤 빛보다 이 빛 더 빛나네

(후렴)

주의 영광 빛난 그 빛 내게 비춰주시옵소서

그 밝은 얼굴 뵈올 때 나의 영혼 기쁘다

2. 내 영혼에 노래 있으니 주 찬양합니다.

주 귀를 기울이시사 다 듣고 계시네

3. 내 영혼에 봄날 되어서 주 함께 하실 때

그 평화 내게 깃들고 주 은혜 꽃피네

4. 내 영혼에 희락이 있고 큰 소망 넘치네

주 예수 복을 주시고 또 내려주시네

대표기도 (가족 중에서)

성경봉독 : 베드로전서 1:13~25

설교

설이란 ‘낯설다’, ‘시작하다’, ‘삼가는 날’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어떤 일이든 새롭게 시작한다는 것은 낯설고 어색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한다는 것은 용기가 필요하듯이, 알 수 없는 새해를 맞이한다는 것은 믿음의 용기가 필요합니다. 어차피 다가오는 해, 누구나 맞이하는 새해인데 무슨 놈의 용기나 마음가짐이 필요한가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으니까 죽지 못해 사는 거지’라는 생각은 수동적 인간, 숙명적 인간의 모습입니다. 수동적, 숙명적 인간은 죄인의 모습입니다. 반대로 ‘난 늘 혼자서 잘해 왔으니 새해라고 뭐가 다르겠어’라고 생각하는 것도 죄인의 모습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인간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수동적, 숙명적 인간도 그렇지만 자기중심적 인간에게서도 공통적으로 하나님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기로 결단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새해가 비록 낯설고 불안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에 그것을 담대히 맞이하고, 맞서 싸우고, 승리하리라는 소망을 붙들고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불확실한 미래 속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하루하루를 자신을 살피고 ‘삼가는 날’로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것을 성경은 ‘거룩한 삶’이라고 말합니다. 예전 우리 어머니들은 새벽 미명에 우물에 가서 물을 떠왔습니다. 이를 ‘정화수’라고 합니다. 이른 새벽에 우물에서 정성스레 떠와서는 뒤뜰에 두고 그 앞에서 가족들을 위해 빌었습니다. 우물에 있을 때는 평범한 물이었지만, 어머니의 손에 들린 순간 그 물은 거룩한 물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도 그래야합니다. 이른 새벽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가족과 목장식구들을 위해 기도할 때, 그들은 거룩한 존재가 됩니다. 그 무릎은 거룩한 무릎입니다. 그 삶이 거룩한 삶입니다.

거룩한 삶을 사는 방법으로 첫째는 받을 은혜를 끝까지 바라고 있어야 합니다. 13절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정신을 차려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이 받을 은혜를 끝까지 바라고 있으십시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듯이 바라보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함으로, 그 분께서 상주시는 이심을 믿고 그 분께 기쁨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그네입니다.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나그네가 아니라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갈지 알기에 이 땅에서 하루라로 헛되이 살 수 없는 나그네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과거의 잘못된 삶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야 할 존재입니다. 1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겉모양으로 판단하지 않으시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분을 여러분이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으니, 여러분은 나그네 삶을 사는 동안 두려운 마음으로 살아가십시오.”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한 두 번째 삶은 하나님 말씀을 알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자로서, 서로를 뜨겁게 사랑하는 삶입니다. “여러분은 진리에 순종함으로 영혼을 정결하게 하여서 꾸밈없이 서로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순결한 마음으로 서로 뜨겁게 사랑하십시오”(22절). 하나님께서 주신 가족을 누구보다 뜨겁게 사랑하는 한 해가 되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교회 성도들을 뜨겁게 사랑하고 섬김으로 각 가정이 복을 받는 해가 되길 바랍니다.

기도 - 설교자

덕담 나누기 - 부모님 혹은 가족 중 가장 어른

주기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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