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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성탄절예배설교(예비)
  
제목 : 기쁨의 성탄절
말씀 : 눅 2:8-14

요즘 우리 사는 세상에 너무 슬프고 아픈 소식이 많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베네수엘라에서는 사상 최대의 홍수가 나서 5만명 이상이 희생될 것 같다고 합니다. 필리핀에서는 여객선이 침몰하여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습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종교분쟁이 일어나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희생을 당했다고 합니다. 엊그제에는 영국에서 우리 대한항공 화물기가 폭발과 함께 추락하여 기장과 승무원등 4명이 죽었습니다. 21세기를 즐겁게 맞이하려는 우리들에게 이런 소식들은 불안과 두려움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슬프고 아픈 소식들 틈에서 21세기에 희망의 빛을 주시는 하나님의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 8절에 보면 한 밤중에 밖에서 양을 치는 목자들에게 천사가 나타나 말하기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오늘은 20세기 마지막 성탄절입니다. 21세기를 닷새 앞둔 우리들에게 세상에서 들려오는 모든 험악하고 불안한 소식들을 다 잊게 하고 새로운 시대의 새 희망을 주시기 위해 구주 성탄의 기쁜 소식을 들려주고 계십니다. 이 시간 이곳에 모인 모든 분들에게 참 빛으로 오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새 천년의 희망이 넘치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구주 예수께서 탄생하신 소식"은 온 우주에 가장 큰 기쁜 소식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 탄생하셨을 때, 그 소식을 들은 모든 사람들이 기뻐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마리아, 목자들, 그리고 동방의 박사들.. 그 외에 예수님을 만난 모든 사람들은 기뻐 찬양했으며, 하늘의 천사들까지 기쁨의 찬양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성탄절이 되면 우리는 "merry christmas"라고 인사하는 것입니다. 오늘 20세기 마지막 성탄을 맞이하는 여러분들에게 첫 번째 성탄절의 기쁨이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성탄의 기쁨은 어떤 것입니까? 첫 번째 성탄을 맞이하던 사람들을 통해서 진정한 성탄의 기쁨이 어떤 것인지 생각하며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1. 목자들의 기쁨 

8절-11절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2000년 전 당시 구세주의 탄생의 첫 증인이 된 사람들은 목자들이었습니다. 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께 경배하는 이 거룩한 일에 목자들이 그것도 첫 번째로 참여했다는 것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 엄청난 도전이 되는 말씀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사회적으로 가장 신뢰받지 못했던 계층의 하나가 목자였기 때문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들은 신뢰받지 못했다기보다는 멸시받는 계층이었습니다. 그들은 직업 속성상 한 곳에 정착할 수 없는 떠돌이 삶을 살았기 때문에 종교적인 의무를 행할 수도 없었고, 또 이리저리 떠돌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큰 피해를 입히기도 했던 사람들로 인식이 되어 법정에서 증인 노릇 할 권리마저 박탈당한 그렇게도 멸시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로 그러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천사들을 보내어 구세주 탄생의 가장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하셨던 것입니다. 

여기에는 엄청난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멸시받는 사람들을 택하셔서 존귀한 자리에 두시기를 좋아하십니다. 미련한 자들을 택하셔서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며 약한 자들을 택하셔서 강한 자를 놀라게 하십니다. 아무 것도 아닌 자들을 택하셔서 권세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제대로 된 권리 하나 없는 목자들을 택하셔서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가 탄생하신 것을 증거 하게 하신 것입니다. 온 세상이 영적 어둠에 잠겨 있었습니다. 얼마나 영적으로 어두웠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던 서기관들조차도 구세주의 오심을 예상조차 하지 못했겠습니다. 이렇게 세상은 소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소망 없는 세상 한 구석에서 멸시받고 천대받는 목자들에게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워 계신 구세주를 집적 목격하게 함으로 세상의 모든 유력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신 것입니다. 부끄러운 자들로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이러한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목자들의 기쁨은 무엇입니까? 11절을 봅시다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아멘. 이 말씀은 "오늘(today)구주가 나셨으니"라는 것입니다. 오늘은 약속의 성취됨입니다. 새로운 시대를 여는 소식입니다. 은혜가 임하는 소식입니다. 멸시가 사라지고 고통의 날이 끝나고 흑암이 물러가고 밝은 빛 속에서 새 삶이 시작된다는 복된 소식입니다. 이제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는 기쁨의 날이 왔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소식을 목자들이 들었고, 20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목자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그들이 들은 그 기쁨의 좋은 소식을 귀로만 들은 것이 아니라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마음으로 영접한 기쁨에 찬송과 영광을 돌린 것입니다. 이 기쁨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릅니다. 불편했던 모든 관계가 새롭게 될 때 얻는 기쁨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맛보고 하늘의 평안을 얻었을 때, 누리는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삶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어떠한 염려나 근심이라도 초월할 수 있는 기쁨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구속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기쁨의 일 번지입니다. 그분만 있으면 즐겁습니다. 그분만 생각하며 기쁨이 넘칩니다. 빼앗길 수 없는 기쁨 그분 안에서 샘솟는 기쁨이 끊어지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 안에서 누리는 특권이요 영광입니다. 구유에 누인 아기를 우리의 구세주로 주인으로 모실 때, 우리들에게도 목자들과 동일한 기쁨이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2. 마리아의 기쁨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실 때, 가장 고통스럽고 힘들었던 사람이 있다면 그는 바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였을 것입니다. 그는 요셉이라고 하는 청년과 결혼을 약속한 여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정혼을 하였다는 것은 함께 살지는 않지만 완전한 부부가 되기로 약속된 사이이기 때문에 서로에게 부정행위가 드러나면 율법에 따라 돌로 쳐서 죽이는 무서운 형벌이 가해지게 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마리아에게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좋은 소식을 전하는 천사입니다. 그런데 가브리엘 천사가 하는 말이 마리아가 하나님의 성령으로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가 바로 예수라고 했습니다. 처녀에게 이 소식은 좋은 소식입니까? 나쁜 소식입니까? 분명히 나쁜 소식입니다. 지금 당장에 보기에는 엄청난 비극의 일이지만 하나님의 기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브리엘이 온 것입니다. 그러면 마리아의 기쁨은 어떤 것입니까? 


①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의 기쁨입니다. 누가복음 1:30 "천사가 일러 가로되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하나님의 선택으로 전개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갈릴리 나사렛에 살고 있는 한 이름 없는 처녀를 선택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도 똑똑한 사람이 많았을 텐데, 왜 하필이면 하나님께서 갈릴리의 작은 동네 나사렛에 천사를 보내셨는지 우리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믿음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기 위해 한 여자를 선택하셨는데 그 여인이 바로 마리아였습니다. 그리고 천사가 그를 향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여"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리아의 기쁨인 것입니다. 이 일로 모진 수모와 멸시를 받을 것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 적인 선택의 은혜가 주어졌기 때문에 마리아는 큰 기쁨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바로 이 은혜를 얻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진노하시거나 그냥 모른 척하고 지나칠 수 있었는데, 원수 마귀가 내 마음을 혼미케 하여 복음을 듣지 못할 수도 있었는데, 어쩌다가 나에게까지 복음이 전해지고 또 어떻게 내 마음이 예수님을 믿을 마음이 생겼는지, 생각만 해도 감사하고 기쁜 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이 줄 수 없는 엄청난 기쁨을 소유한 백성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②마리아가 기뻐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라고 하는 말씀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큰 축복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많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은혜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마리아와 함께 하신다고 선언하여 주신 것입니다. 소망이나 바람이 아니라 지금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에게 야곱에게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라고 말씀하신 하나님, 그 약속의 말씀이 있었기에 그들의 생애가 힘들고 고통스러운 역경 속에서도 승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어내는 그 엄청난 과업을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의 함께 하심" 때문이었습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할 수 있었던 비밀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확신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그 하나님이 지금 마리아에게 함께 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것이 마리아가 그 힘든 상황에서도 찬송을 부를 수 있었던 비밀이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기뻐할 수 있었던 비밀인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예수님의 또 다른 이름은 임마누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다는 뜻입니다. 오늘 이 시간 마리아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땅에 사람의 모양으로 오신 것입니다. 나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오늘 왜 우리에게 성탄절이 기쁨의 절기입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우리를 선택하여 구원하셨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이 믿음 때문에 여러분과 나의 삶에 참 기쁨이 넘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동방 박사들의 기쁨 


예수님의 탄생을 목격하고 경배한 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동방의 박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오늘의 페르시아(이란)아나 아니면 인도 같은 이방 나라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천체와 우주를 연구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들은 하늘의 이상한 기운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하늘에 큰 빛 하나가 나타나 움직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분명히 만왕의 왕이 나실 징조라고 깨닫고 왕을 만나면 바치려고 몰약과 황금과 유향을 선물로 준비하고 급히 그 별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 별을 따라 베들레헴의 한 마굿간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한 아이가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것을 보게 되었으니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던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의 기쁨은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1장 10-11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저희가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집에 들어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 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동방박사들의 기쁨은 참 빛을 발견한 기쁨이었습니다. 어둡고 암울한 세상, 당시 로마의 거대한 세력이 마구 세상을 짓밟고 있어 로마에 식민지가 된 나라마다 배고픔과 가난으로 힘겨운 삶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비단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고대 근동지역이 모두 그랬습니다. 그들은 희망을 보기를 원했습니다. 암울한 역사가 영원히 지속되지 않으리라는 기대를 하면서도 어디에서 그 희망의 빛을 찾아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바로 동방의 박사들이 그 희망의 빛을 찾은 것입니다. 그가 바로 온 인류의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참 빛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은 1장 9절부터 읽겠습니다. 


"(9)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10)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참 빛 곧 세상에 비추는 빛이 있었으니 그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희망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이 어둡고 칙칙한 세상을 밝고 아름답게 열어 가실 영원한 희망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생명과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 최고의 기쁨이요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동방의 박사들은 이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세상의 정부도 로마도 희망이 없으나 온 세상을 비추는 큰 빛을 따라 달려와 만난 아기 예수가 희망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들의 보화를 드려 왕 되심을 천하에 선포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참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십시오. 그 생명의 주님, 예수님을 만나십시오. 이제껏 세상에서 누려보지 못한 엄청난 희망이 열려질 것이며, 동시에 하늘의 기쁨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끝으로 그러면 여러분의 기쁨은 무엇입니까? 목자들과 마리아와 동방박사들, 그들이 아기 예수님을 만남으로 얻은 그 기쁨이 저와 여러분의 삶에 늘 충만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은 그야말로 기쁜 성탄절입니다. 이 기쁨이 영원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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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3월 사순절예배설교 : 겸손한 자가 누리는 은혜

제목 : 겸손한 자가 누리는 은혜

말씀 : 눅4:25-27

1.신실한 믿음의 복

몇 년 전에 미국 MIT공대 경제학과 조나단 그루버 교수는 ‘종교시장구조와 종교참여 및 결과’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는데 결론은 올바르고 열성적인 신앙생활은 영적으로 뿐 아니라 세상에 사는 동안 정신적, 육체적, 물질적으로도 많은 유익을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마음에 평강과 위로가 있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하게 되며, 선과 의를 향하여 열심히 노력하기 때문에 신앙심이 없거나 얕은 사람들보다 성공률이 훨씬 높아진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예배출석률이 두 배가 되면 소득이 9.1%가 증가되고, 복지혜택은 16% 감소된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혼인율은 높아지고, 이혼율은 낮아지며, 알콜, 흡연, 마약, 도박, 향락, 음란에 빠지는 경우는 무려 70%정도 감소하고, 범죄율은 35%이상 낮아지고, 행복지수는 30%이상 높아진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올바르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영적으로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기쁨과 소망 속에 살아가는 것은 물론이고 이 땅위에 사는 동안도 감사와 기쁨과 평안 속에 정신적, 육체적, 물질적으로도 넉넉한 삶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너무 당연하지 않습니까? 주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경배하고 찬양하고 영광을 돌릴 때에 주님께서 은혜를 주십니다. 영광의 나라를 보여주십니다. 나아가 주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주님의 말씀을 따라 진실하고 성실하게 살기를 애씁니다. 주님이 주시는 지혜를 가지고 가정생활도 성실하게 하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직장생활도 성실하게 하려고 애를 쓰게 됩니다. 그러니 당연히 마음속에 평안과 기쁨과 위로와 소망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당연히 더럽고 추하고 악한 것들을 멀리 하고 싫어하게 됩니다. 거룩하고 아름답고 진실하고 성실하고 사랑하는 것을 기뻐하게 됩니다. 그래서 무슨 마약이나 알콜이나 도박이나 향락이나 음란이나 거짓이나 폭력이나 도적이나 이런 범죄에 빠질 우려가 현저하게 줄어드는 것입니다. 왜 그런 것들에 빠집니까? 마음에 평안과 위로와 기쁨과 만족이 없어서 그럽니다. 그런데 예수님 온전히 믿으면 마음에 평안과 위로와 기쁨과 만족이 있는데 그 딴 것들을 왜 거들떠 보겠습니까? 그러니 이런 사람들의 가정이 어찌 평안하지 않겠으며 어찌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겠습니까?

그래서 시1:1-3절에서는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겸손히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 세상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행운이며 축복입니다. 내 영혼이 평안과 기쁨을 누리고, 가정이 잘되고 나라가 잘되는 비결입니다. 그러다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그야말로 무한한 복이요 은혜요,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인생의 행복이 결코 돈과 명예와 권력과 세상 즐거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겸손히 주님과 동행하는 것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겸손히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겸손히 주님 앞에 엎드려 말씀묵상하고 기도하며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가까이 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 안에 있는 그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는 것은 물론 이 세상에서도 영적으로 육체적으로 물질적으로 넉넉함을 누리며 가정이 평안하고 하는 일들이 잘되고 주께 영광 돌리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사순절의 의미

여러분, 오늘 사순절 둘째주일을 보내고 있는데 사순절은 바로 그렇게 겸손히 주님과 동행하는 훈련을 하는 기간입니다. 사순절은 부활절 전 6주간 중 주일을 뺀 40일간을 말하는데 한마디로 육체적인 것에 얽매어 있던 삶에서 돌이켜 좀 더 주님을 닮아가는 훈련을 하는 기간인 것입니다. 우리 몸과 마음과 영혼이 더욱 주님을 가까이 함으로 주님의 생명의 은총을 더욱 풍성히 누리며 주의 역사를 이루어가기를 힘쓰는 기간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순절을 영어로 Lent라고 합니다. 이 말은 고대 영어 Lang에서 유래된 말로 봄이라는 뜻입니다. 즉 추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땅속에 잠자던 씨앗이 싹을 틔우고, 죽은 듯이 보이던 나무들이 잎새를 내며 활발하게 움직이는 것처럼 우리 믿음도 더 이상 잠들어 있지 말고 활발하게 움직여서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기 위한 준비를 하는 기간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잠들어 있으면 안됩니다. 마치 봄이오면 땅속에 있던 씨앗들이 싹을 틔우고 줄기와 잎을 내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처럼 활발하게 움직여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영적으로 열심히 움직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잠들어 있지말고 영적인 기지개를 크게 켜고 열심히 말씀과 기도와 찬양생활해야 합니다. 주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일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 자신이 생명의 기쁨을 마음껏 누리며 동시에 주님의 생명의 역사도 힘있게 이루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목사님! 저도 은혜충만한 믿음생활 하고 싶은데 그게 잘 안됩니다.” 그렇게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비단 새신자만 아니라 10년, 20년 다니신 분들도 이런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중직들도 있습니다.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경건의 훈련을 열심히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옛날에 일본에 후쿠사이라는 유명한 화가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친한 친구가 와서 수탉을 그려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일주일 있다가 오라고 했습니다. 친구가 일주일 있다가 가니까 아직 그리지 못했다고 한달 있다가 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한달 있다가 갔는데 또 한달 있다가 오라고 하고, 또 한달 있다가 오라고 하고, 그러기를 무려 3년을 했습니다.

드디어 그림을 부탁한 친구가 인내의 한계에 달하여 “오늘은 그냥 돌아갈 수 없네. 지금 당장 수탉 그림을 주든지 싫으면 아예 그만두든지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후쿠사이는 그때서야 그를 데리고 그의 작업실로 갔습니다. 그런데 그를 따라 작업실에 들어간 친구는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그 작업실에 수백장의 수탉그림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말했습니다. “아니 이렇게 많은 수탉그림이 있는데 왜 3년 동안 그림을 안 준거냐?” 후쿠사이가 말했습니다. “여보게 친구! 나는 자네에게 가장 좋은 그림을 주고 싶었다네.” 하면서 자신이 보기에는 이 그림이 가장 마음에 든다며 한 장의 수탉그림을 주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좋은 그림은 그냥 그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노래도 그냥 나오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 훈련하지 않고 어떻게 좋은 군인이 되겠습니까? 어떻게 열심히 연습하지 않고 훌륭한 선수가 되겠습니까? 어떻게 열심히 연주하지 않고 좋은 연주자가 되겠습니까? 어떻게 육체를 꼼짝하지 않고 움직이지 않으면서 육신이 건강하기를 바라겠습니까? 어떻게 열심히 말씀 묵상하고 기도하고 찬양하지 않으며 은혜충만한 신앙인이 되겠습니까? 어떻게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지 않으면서 훌륭한 신앙인이 되겠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내 생각, 내 고집, 내 경험, 내 편한대로 하면서 신앙이 성장하겠습니까? 

여러분, 딤전4:7,8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여러분, 신앙도 훈련해야 합니다. 훈련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쉬운 것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힘들어도 해야하고 어려워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영적 훈련은 주님 앞에 서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해야 합니다. 그럴 때 성숙한 신앙의 모습을 갖게 됩니다. 그렇게 성숙하고 성화된 모습을 가질 때 하나님 안에 있는 그 무한한 생명의 열매를 마음껏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 사순절 기간에 좀 더 영적 훈련을 열심히 하시기 바랍니다. 가장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경건의 훈련은 예배입니다. 예배는 세상에서 하고 싶은 것들, 쉬고 싶은 것들, 안일한 것들, 물질적인 유익들, 내 경험적인 것들 다 내려놓고 자신을 주님 앞에 세우는 일입니다. 세상의 다른 어떤 것보다 주님께 영광돌리고 말씀듣고 찬양하는 일이 더 소중한 일임을 고백하는 행위입니다. 말씀으로 영의 양식을 삼고, 기도로 주님과 함께 호흡하고, 찬양으로 영광을 돌리는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이야말로 가장 기본적인 경건의 훈련입니다. 이걸 잘못하면 세상에서 다른 것을 아무리 잘해도 소용없습니다. 자신의 모든 이성과 생각과 즐거움과 평안함과 경험을 다 내려놓는 신앙의 고백이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고백이 없이는 다른 것도 쓸데 없는 짓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런 자세로 하나님 앞에 엎드려 예배드릴 때 내 영이 더욱 밝아지고, 생명력이 넘치고, 은혜가 충만해 지는 것입니다. 주님의 지혜와 능력으로 충만해 지는 것입니다.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충만해지고 그러면 주님이 주시는 지혜와 능력과 은혜로써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며 주님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 안에 있는 생명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며 생명의 열매를 맺는 복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이런 복된 삶이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3.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영적인 풍성한 은혜를 누리려면 또한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의 말씀을 따를 때에 하나님의 은혜를 흡족하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그런 모습으로 은혜받은 두사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시돈 지방의 사렙다라는 곳에 사는 가난한 과부이고, 또 하나는 아람의 군대장관으로써 나병환자였던 나아만 장군입니다. 예수님께서 고향인 나사렛 사람들에게 이 두 사람을 소개하면서 당시에 이스라엘에도 많은 가난한 과부와 나병환자들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제쳐 놓고 이 두사람에 특별한 은혜를 베풀어 주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고향인 나사렛에 오셨을 때 고향사람들이 그 알량한 자신의 지식과 경험으로 마음을 완고하게 하여 예수님을 배척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자기 동네에 오셨을 때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면서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렙다 과부와 나아만 장군 이야기를 하면서 너희들이 그 알량한 지식과 경험을 버리고 겸손하게 엎드려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은총을 누리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여러분, 이 두 사람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보기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만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들은 둘 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개처럼 여기는 이방인이었고, 게다가 하나는 당시 사람들로부터 멸시받고 무시당하던 과부였으며, 또 하나는 당시 사람들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생겼다고 생각하는 나병환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그때에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제쳐두고 이 두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하나님 앞에서는 외적인 조건들은 아무 관계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겉으로 그럴듯해도 심지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해도 자기를 부인하고 겸손히 주님을 따르지 않는다면 은혜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업신여기고 더럽게 여기고 무시하고 하는 사람이라도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겸손히 엎드려 주님을 따르는 자들은 놀라운 은혜로 채워 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렙다 과부는 어떤 사람이었기에 이렇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만큼 큰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까? 한마디로 그녀는 자신의 모든 생각, 환경, 논리, 경험 다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내용은 열왕기상17장에 나오는 데 하루는 엘리야 선지자가 사렙다 과부를 찾아가 물과 떡을 좀 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때가 어떤 상황이냐 하면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아서 자기 가족도 먹을 것이 없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사렙다 과부는 엘리야에게 말합니다. 왕상17:12절입니다. 같이 보겠습니다. “그가 이르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지금 한끼 식량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나는 이 한끼 식량으로 아들과 함께 밥을 해 먹고 죽기만을 기다려야 할 형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엘리야 선지자가 뭐라고 합니까? 왕상17:13절입니다.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아니 선지자가 좀 체면이 있어야지, 그래 한끼 먹을 양식밖에 없다는 데 그걸 가지고 먼저 자기를 위하여 밥을 지으라는 것입니다. 아니 그래, 그렇게 딱하냐? 그럼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좀 보태주마, 나는 괜찮으니 너희들이나 해 먹어라. 그래야지 밥한끼 해먹고 죽어야 할 형편이라는데 그걸 달라고 하니 이럴 수가 있습니까?

그럼 정말 이 선지자의 행동이 염치없는 행동입니까? 물론 아닙니다. 그들을 곤경에 빠트리려는 게 아니라 네 모든 상황과 환경과 가치와 생각을 내려놓고 일단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책임져 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사렙다 여인은 그 말씀을 믿고 순종했던 것입니다. 왕상17:15절을 읽겠습니다. “그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그와 엘리야와 그의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보세요. 지금 그들에게 남아있는 것은 딱 한끼 식사할만한 떡과 기름입니다. 그게 전 재산입니다. 그걸 먹고 죽기만을 기다려야 할 형편입니다. 3년6개월 비가 안왔기 때문에 어디서 꿔 올데도 없습니다. 꿔줄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굶주린 자식새끼에게 먹여할 그 한끼 식사를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에게 바쳤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자식이 굶어 죽었습니까? 왕상17:15절부터 16절까지 다시 보겠습니다. “그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그와 엘리야와 그의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놀랍게도 한끼 식량밖에 안되던 가루와 기름이 한끼가 아니라 열끼 백끼 천끼를 먹을 수 있는 양식으로 변했던 것입니다.

만약 이 여인이 에이, 선지자님도 참 너무하십니다. 한끼 밥해 먹고 죽으려고 한다는데 그걸 달라고 하시니 세상에 염치도 없으시지 그런 말씀이 어딨습니까 하면서 그냥 자식 새끼 먹이는데 썼더라면 그들은 그 한끼 밥을 먹고 굶어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모든 생각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드렸을 때 어찌된 영문인지 통에 가루와 병에 기름이 먹으면 또 채워지고, 먹으면 또 채워지고 하여 그 극심한 가뭄가운데서 그들은 염려없이 지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람의 군대장관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엘리사 선지자가 이웃나라의 국방부 장관이 왔는데 감히 나와 보지도 않고 종을 보내어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라고 하니까 노발대발합니다. 건방진 놈, 감히 대 아람의 국방장관이 왔는데 나와보지도 않고 고작 종을 보내어 한다는 말이 뭐 요단강에 가서 씻으라고.... 그까짓 요단강에 가서 씻느니 차라리 우리나라에 있는 더 큰 강에 가서 씻겠다고 하면서 돌아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의 종이 ‘아니 왜 이러십니까? 선지자가 더 어려운 일을 시켜도 해야 하는데 그까짓 요단강에 가서 씻는 일이 뭐가 어렵다고 이러십니까?’라고 하니까 나아만이 요단강으로 들어가서 씻지 않습니까? 한번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 여섯 번 씻어도 아무일어나지 않았지만 끝까지 시키는 대로 일곱 번 씻었을 때 나병이 깨끗이 낫지 않았습니까? 어떻게보면 인간적으로보면 황당한 일이었는데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하니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것이 사렙다과부와 나아만 장군의 공통점입니다. 인간의 논리, 경험, 이성 그거 아무것도 아님을 인정하고 말씀에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경건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속에서 그냥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옳습니다. 하나님이 맞습니다.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나보다 백배 천배 억배 크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책임져 주실 줄 믿습니다. 그리고 그냥 겸손히 하나님을 편을 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겸손이고 이것이 경건이고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 사순절에 우리는 이런 훈련을 하는 기간입니다. 겸손히 엎드리는 훈련입니다. 겸손히 기도하는 훈련입니다. 엎드려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았으면 그 알량한 내 생각과 가치관과 의지와 경험과 지식을 버리고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고, 능력이 임하고, 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놀라운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사랑과 평강과 위로와 소망이 넘쳐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감사와 기쁨과 능력으로 주님과 동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기쁘신 뜻을 따라 거룩하고 성실하고 열심히 진실하게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사람앞에 인정받고 존중받고 사랑받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정이 평안하고 형통하고 교회가 든든히 서가며 주의 영광 나타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이 사순절을 보내며 아니 주님앞에 서는 그 순간까지 자신을 부인하며 주님 앞에 엎드려 예배드리고 말씀듣고 기도하는 등의 기본적인 경건의 훈련을 더욱 열심히 하시기 바랍니다. 오직 말씀에 순종하며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할때에 진정 주의 은혜와 능력과 지혜와 위로와 평강을 충만하게 덥입어 주님의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며, 주께 영광을 돌리고, 주님의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도)

이제는 우리의 약함과 부족함과 죄됨을 인정하고 더욱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겸손히 주님 앞에 엎드려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살아갈때에 영적, 정신적, 육체적, 물질적으로 주님의 은총을 넉넉하게 누리며 주의 영광 크게 드러내는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는 우리 모든 사랑하는 성도들과 저들의 가정과 저들이 영위하는 모든 일들 가운데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우리 하나님의 극진하신 사랑하심과 성령님의 인도 교통 역사 충만케 하시는 은사가 이제로 영원까지 함께 하시옵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기도) 

영화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오직 영광과 존귀만을 받으셔야 합당하신 주님께서 온갖 멸시천대 침뱉음 모진 채찍질과 심지어 십자가의 그 끔찍한 죽음을 당하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주셨사오니 감사와 영광과 존귀를 돌리나이다.

그러하오나 주님, 우리는 아직도 진정으로 겸손하지 엎드리지 못함으로 주의 은총 온전히 누리지 못하며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을 섬기지 못할 때가 너무나 많나이다. 주여, 저희들과 부족함과 연약함을 아시오니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이시여, 특별히 사순절을 보내며 우리가 더욱 모이기를 힘쓰며 주님 앞에 엎드려 말씀 듣고 기도하고 찬양하는 영적 훈련을 잘 받아서 주의 은혜 충만하게 덧입어 주님의 은총 온전히 누리며 주님의 거룩한 역사에도 감사와 기쁨으로 참여하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언제나 우리의 연약함과 무지함과 한계와 어리석음을 인정하고 주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갈때에 우리들 자신 안에 주님의 의와 평강과 희락과 소망이 가득하며 가정과 직장과 나라가 평안하고 든든히 서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출처] 사순절)겸손한 자가 누리는 은혜(눅4:25-27) 조학환목사|작성자 학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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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과의 싸움
본문: 단 1:8-9
찬송가: 342장(구 395장)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다니엘에게 어느 날 기회가 다가왔다. 그것은 유다포로 청년 가운데 몇 사람을 선발해서 특별 교육을 실시한 후에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의 비서로 일을 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그 당시 바벨론은 세계를 제패한 최대 강국이긴 했지만 사회기강은 어지럽고 도덕은 퇴폐일로를 치닫고 있었다. 거기에 휩쓸린 젊은이들 또한 가치관을 상실하고 정신적으로 휘청거리고 있었다. 한 마디로 쓸 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바벨론 왕은 비록 포로들이긴 하지만 그들 중에서 쓸만한 젊은이들을 골라서 쓰겠다는 용인술을 발휘했던 것이다.
 
그런데 다니엘은 왕이 허락한 진미와 포도주를 입에 대지 않고 거절했다. 이유는 자기를 더럽힐 수 없다는 것이었다. 먹으면 식도와 위장을 거쳐 배설되어버리는 음식을 놓고 자신을 더럽힐 수 없다며 거절한 다니엘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그 때 그는 자신과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타협하느냐, 거절하느냐, 개방하느냐, 절제하느냐, 멋대로 사느냐…. 
 
절제란 자기욕망을 제어하는 것이다. 자기행동을 조절하고 삶의 균형을 맞추는 것은 절제이다. 이처럼 자신과의 싸움에서 자신의 욕망과 고집과 습관을 제어하였을 때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 귀히 쓰임을 받았다. 
 
우리도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자신과의 싸움에 승리하는 하루가 되길 바란다.

오늘의 기도

주님! 유혹이 많은 세상에서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기 원합니다. 그 어떠한 달콤한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절제의 미덕을 발휘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그 옛날 다니엘과 같이 하나님의 은총을 크게 받아 이 시대에 더욱 귀하게 쓰임 받는 우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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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주일예배설교 

  
제목 : 드보라의 찬양

말씀 : 삿5:1~9

하나님을 아는 자는 찬양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과 은혜, 그 위대하신 능력과 지혜와 위엄, 그 거룩하시고 영화로우심, 선하심과 의로우심, 구원하심을 기억할 때 어찌 찬양 안하랴! 오늘도 여선지 드보라를 비롯한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맛보고 감사와 영광의 찬양을 드리는 장면.

드보라는 이스라엘 제4대 사사로 B.C. 1200년경에 약 40년간 사사로 활동. 그의 직전 사사는 에훗이었는데 에훗이 사사로 이스라엘을 다스릴 때는 어느 정도 하나님을 따르다가 그가 죽고 곧바로 사사가 세워지지 않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또다시 이방신을 섬기고 악을 행함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가나안왕 야빈의 손에 팖으로 이십년 동안 학대받음.(삿4:1~3) 

그때서야 이스라엘 백성들이 또다시 하나님께 부르짖고 이에 응답하셔서 에브라임 산지에 살고 있는 랍비돗의 아내 여선지 드보라를 사사로 세우시고 그녀를 도와 이스라엘을 야빈의 손에 건져주시고 40년동안 평안을 주심. 

오늘 말씀은 이와같이 20년동안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가나안 왕 야빈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물리치고 감사의 찬양을 드리는 장면. 이들의 찬양의 내용을 살펴보자.

1.부르짖음을 들으심을 찬양함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스라엘이 끊임없이 거역했지만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여호와 하나님을 찾아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호소하고 간절히 타원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불상히 여겨 다시 구원해 주셨다는 것이다. 먼저 삿4:3절을 보자. “야빈 왕은 철 병거 구백 대가 있어 이십 년 동안 이스라엘 자손을 심히 학대했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 가나안 왕 야빈에게 극심한 압제를 당하자 하나님 앞에 엎드린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나? 드보라를 세워 회개운동을 하게 하신 다음에 이스라엘을 도왔던 것이다. 삿4:15절을 보자. “여호와께서 바락 앞에서 시스라와 그의 모든 병거와 그의 온 군대를 칼날로 혼란에 빠지게 하시매 시스라가 병거에서 내려 걸어서 도망한지라.”

참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 얼마나 놀라운 사랑인가? 그렇게 거듭해서 부족하고 연약하고 죄된 모습을 보였던 이스라엘이었건만 또다시 불쌍히 여겨서 그들을 구원해 주신 것이다. 사실 우리들도 별로 다를 게 없다. 거듭 불순종하고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무릎 꿇을 때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찾아와 구원해 주시는 것이다. 만약 이런 하나님의 계속적인 은혜가 없다면 천국의 골인지점을 통과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러므로 더욱 겸손히 엎드려 회개하며 이토록 긍휼히 여기시는 주님, 그래서 결국 구원의 길로 이끌어 가시는 주님께 감사와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드리자.

2.하나님의 도우심을 찬양함 

하나님은 단지 긍휼히 여기실 뿐만아니라 우리를 구체적으로 도와주신다. 드보라의 승리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 때문이었다. 

삿4:7 “내가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와 그의 병거들과 그의 무리를 기손 강으로 이끌어 네게 이르게 하고 그를 네 손에 넘겨 주리라 하셨느니라.” 기손강은 와디 즉 우기에만 물이 흐르는 강인데 지금은 건기이다. 그래서 시스라군대의 철병거를 이쪽으로 끌어들여 폭우를 내림. 삿4:15 “여호와께서 바락 앞에서 시스라와 그의 모든 병거와 그의 온 군대를 칼날로 혼란에 빠지게 하시매 시스라가 병거에서 내려 걸어서 도망한지라.” 병거를 칼날로 쳤다. 시스라가 걸어서 도망갔다. 즉 병거가 꼼짝 못했다는 것이다. 

오늘 본문 4절도 보라. “여호와여 주께서 세일에서부터 나오시고 에돔 들에서부터 진행하실 때에 땅이 진동하고 하늘이 물을 내리고 구름도 물을 내렸나이다.” 즉 번개와 우레를 동반한 폭우가 쏟아졌다는 것이다. 이때는 건기라 비가 전혀 오지 않을 때인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도우시기 위하여 폭우를 보내신 것이다. 이런 놀라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하였던 것. 그래서 그렇게 구체적으로 도우셔서 승리케 하신 하나님을 찬양한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체적, 현실적으로 도우신다. 우리의 죄와 무지를 하나님께 고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면 우리의 삶속에 필요한 것들로 채워주신다. 영적으로 천국으로 인도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막연히 추상적이고 내적인 평안이나 은혜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 실제적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시며, 약하고 부족하고 힘든 문제들을 해결해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승리의 기쁨을 누리며 살게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병든 자를 고치시고, 오병이어로 오천명이 넘는 사람들을 먹이시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고, 귀먹은 자를 듣게 하시는 등 인간의 현실적인 필요로도 채워주셨던 것이다. 그것이 본질적인 목적은 아니지만 주님 앞에 회개하고 주님을 향해 부르짖고 주님과 동행할 때에 이런 현실적인 것들로도 채워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더욱 주를 의지하고 바라보고 주님과 동행할 때에 지금 여기서 몸담고 사는 동안에도 주님의 구체적이고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도우심 가운데 모든 어렵고 힘든 문제들을 해결 받고 현실적, 실제적 삶에서도 더욱 윤택함을 누리며 더욱 감사 찬양하며 주님과 동행하는 복된 인생이 되자.

3.백성들이 즐거이 헌신하게 된 것을 찬양함

그렇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단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만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에 참여하게 되었음을 찬양하고 있다. 그래서 2절에서는 “이스라엘의 영솔자들이 영솔하였고 백성이 즐거이 헌신하였으니 여호와를 찬송하라.”고 하였고, 9절에서는 “내 마음이 이스라엘의 방백을 사모함은 그들이 백성 중에서 즐거이 헌신하였음이니 여호와를 찬송하라.”고 하였다. 

영솔자들이 영솔. 백성들이 즐거이 헌신. 그러므로 찬양하라. 즉 하나님의 뜻을 따라 적들을 물리치는 일에 지도자들은 지도자들대로, 백성들은 백성들대로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최선을 다했다는 것이다. 이런 온 백성들이 감사와 기쁨으로 참여하게 된 일로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도 깊이 묵상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분명히 도우신다. 역사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만히 앉아있는 자를 돕지는 않으신다. 제 마음대로 살아가는 자를 구원하지는 않으신다. 구원을 향하여 힘써 나가야 한다. 우리가 싸울 것은 싸워야 한다. 우리가 믿음으로 해야 할 일은 해야 한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을 때, 모세가 믿음으로 지팡이를 내어 밀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음으로 요단강에 들어갔을 때, 나아만 장군이 믿음으로 요단강에서 씻었을 때, 기생라합이 믿음으로 정탐꾼들을 숨겨 주었을 때,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배 오른편에 그물을 내렸을 때, 12년을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믿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 그 옷자락에 손을 대었을 때 역사가 일어났던 것이다. 

드보라와 바락은 이와같이 지도자들과 백성들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참여하게 된 것에 대하여 감사와 영광과 찬양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그 참여할 수 있게 된 것도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거기에 참여할 수 있다는 사실이 세상 어떤 것보다도 영광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더욱 감사와 영광과 찬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가자.

4.경제 및 일상생활을 회복시켜 주심을 찬양함

드보라와 바락이 하나님을 찬양한 또 다른 이유는 그들이 그렇게 하나님께 회개하고 부르짖었을 때 찾아와 구원해 주심으로 그들의 영성이 회복되고 일상생활이 회복되었을 뿐 만아니라 경제적으로 회복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가나안 왕 야빈의 압제를 받을 때 얼마나 피폐해져 있었는지 오늘 6,7절에서는 말씀한다. “아낫의 아들 삼갈의 날에 또는 야엘의 날에는 대로가 비었고 길의 행인들은 오솔길로 다녔도다. / 이스라엘에는 마을 사람들이 그쳤으니 나 드보라가 일어나 이스라엘의 어머니가 되기까지 그쳤도다.”

대로가 비었다는 것은 무역이 그쳤다는 것을 말한다. 당시 대상들은 여러 마리의 낙타를 끌고 다니며 여러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다녔으므로 대로가 필요했다. 그래서 대로가 비었다는 것은 그들이 사라졌다. 그래서 경제가 피폐해졌다는 말이다. 행인들은 오솔길로 다녔다는 그 만큼 압제가 심했다는 것이다. 공연히 대로로 다니다가 압제자들의 눈에 띄어 봉변을 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오솔길로 숨어 다녔다는 말이다. 마을 사람들이 그쳤다는 것은 사람들이 먹고 살기 힘들어 촌락을 떠났다는 말이다. 농사를 짓거나 가축을 길러봐야 압제자들이 빼앗아가므로 이를 포기하고 유리방황하는 자들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언제까지였느냐? 드보라가 일어나기 전까지 였다. 즉 드보라가 일어나서 회개운동을 벌이고 이방신을 버리고 악을 제했을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도우셔서 압제자에게서 건져주시고 일상생활이나 경제생활도 회복되게 되었다는 말씀이다. 이 사실을 찬양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일이 있다. 우리의 삶에 진정한 회복은 무엇으로부터 시작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다. 영성이 회복되어야 한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한다. 그래야 일상생활이 회복되고, 경제가 회복되고, 정치가 회복된다. 온갖 우상을 섬기고 제멋대로 행동하고 물질과 지식과 과학을 우상처럼 받들면 뭔가 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결국은 망한다. 결국은 무너진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회복되어야 승리한다. 

내가 예언하지만 만약 저 서유럽이나 미국이 계속해서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지 않고 인본주의, 물질주의에 빠져 있으면 반드시 망한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정말 회개하고 그 잘난 인본주의와 과학지상주의, 물질지상주의를 버리고 순수한 말씀으로 돌아가 하나님 앞에 엎드린다면 계속해서 번영한다. 우리 개인도 동일하고 우리나라도 동일하다. 분명한 것은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방법대로 진실하게 정직하게 성실하게 열심히 살아갈 때에 그 영혼과 그 가정이 복되고 형통하게 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이고, 역사가 증명한 사실이고, 너무나 당위적인 일이다. 

오늘 이 귀한 말씀을 묵상하며 우리 모두는 정말 하나님 앞에 엎드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오지 못한 것이 있으면 철저하게 회개하고 하나님께 부르짖음으로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과 도우심과 은총을 덧입어 우리 영혼이 온전히 회복되고 일상생활이 회복되고 경제적으로 회복되어 더욱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하며 영광돌리는 삶을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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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 설교/ 행복한 가정 
 
제 목 : 행복한 가정
본 문 : 시 128:1-4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네 집에 내실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상에 둘린 자식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다고 하셨다.

두분의 결혼도 이 말씀을 기준하여 이루어진 줄 안다. 본문에 아름답고 복된 가정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즉 2절에 호주의 축복,
 3절에 아내의 축복,
 3절하반절에 자식의 축복을 주신다.
   
1. 네가 수고한대로 먹을 것이다.

하나님을 공경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기초를 삼는 가정은 호주가 수고하는 일이 헛 수고가 아니라 반드시 그댓가를 받아 누린다는 복이다.
   
2. 네 내실에 있는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포도나무 같으며 하였는데 부부생활이 매우 사랑스러운 관계를 맺어 갈수록 탐스러운 열매가 맺어지는 가정이 될 것이고 “네 상에 둘린 자식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했는데 감람나무는 성장이 빠르다.

자녀들의 성공과 성장이 빠르겠다는 말이다. 그래서 영권 인권 물권을 가지고 크게 쓰임을 받는 가정으로 번창하는 축복이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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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예배 성령 충만한 가정 



찬송가 : '내가 매일 기쁘게' 191장(통 427장) 
신앙고백 : 사도신경 
본문 : 요한복음 14장 26절 


말씀 : 기초가 무너지면 전부가 무너진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 기초가 튼튼해야 어떠한 상황에서도 아름답게 신앙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신앙에 있어서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지탱해주는 기초는 '성령'입니다. 오늘 본문 내용은 부활 후 승천하시려는 주님이 제자들을 위로하시는 말씀입니다. 세상에 남아 핍박과 환난 가운데 복음 전파의 사명을 감당하고 마음이 근심과 혼란에 있지 말라고 위로의 말씀을 주시면서 강조하는 것은 '보혜사 성령'입니다. 

첫째, 성령은 우리의 가정과 가족의 연약함을 도우십니다. 예수님은 가정 및 가족을 돕는 자와 위로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성령을 돕는 자로 보내주셨습니다. 보혜사 성령의 위로가 있을 때 우리는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보혜사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우리 신앙은 무너지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보혜사 성령은 우리를 하나님의 강한 일꾼으로 만들어주시고 주께서 허락하신 사명을 감당케 하십니다. 

둘째, 성령은 우리 가정과 가족에게 말씀을 깨닫게 하십니다. 호세아 4장 6절은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리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의 불행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6절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는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기록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저자가 성령이라는 의미입니다. 

셋째, 성령은 우리의 삶을 거듭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십니다. 세상에서 위협받고 있는 가정들이 건강하게 돼 가족 구성원 모두가 인간답게 사는 게 필요합니다. 베드로전서 1장 16절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가 거룩하게 사는 삶을 원하십니다. 오직 성령을 통해 영혼의 눈이 밝아지면서 죄를 책망하는 성령의 음성을 듣고 복음의 진리를 확신할 때만이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성령의 사역은 내재하실 뿐 아니라 위로하고 깨닫게 하고 거룩하게 하고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간구하는 성도의 가족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우리의 연약함을 돌보시고 말씀을 깨닫는 자가 되게 하소서. 매일의 삶이 성령의 능력 가운데 거듭나고 거룩하게 하소서. 성령의 인도를 받아 올바른 가정이 되고 믿음의 신앙인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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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예배설교 <십자가의 길> 


성경말씀 : 누가복음 22:39-46                   
                              
예수님의 고난이 오늘 오후 부터 시작해서 금요일 까지 계속됩니다.  그래서 이번 주간을 고난주간이라고 합니다.  기독교 입장에서 보면 일년 중에서 이번 주간이 가장 경건하고 엄숙하며 장엄하고 뜻이 있는 주간에 해당 됩니다.  그래서 오늘은 아픈 마음으로 십자가의 길이라는 제목으로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고난주간 첫날인 오늘은 종려주일 혹은 고난주일이라고 합니다.  2천년 전 오늘 에수님은 니귀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을 하십니다.  그 때 군중들은 옷을 벗어서 길에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왕으로, 메시야로, 열열히 환영하며 환호 했습니다.  후대에 와서 사람들은 이 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종려주일" 이라고 불렀습니다.  초대교회에서는 교회들이 이 날이 되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시가행진을 했다고 합니다.
둘째 날인 내일 월요일은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신 날 입니다.  거룩해야 할 성전에서 주님은 불결하고 속된 시장바닥과 같은 문란해진 성전의 모습을 보시고는 분노하시며 장사꾼들을 모두 내 보내시고 성전을 척결하십니다.  그리고 그 분노를 길을 가시다가 죄 없는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시는 것으로 나타 내십니다.  타락할대로 타락해 버린 예루살렘의 도성, 그리고 그 보다 더 타락한 제사장들의 모습을 보시고는 그들에게 쏟으실 저주의 진노를 대신 나무에게 쏟아 부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둘째 날에 있었던 일 입니다.
셋째날인 모레 화요일은 예루살렘 성을 내려다 보시며 눈물을 흘리신 날 입니다. 앞으로 40년만 있으면 망해 버리고 말 이 도성의 앞날을 주님은 일찍 알고 계십니다.  그 날, 이 도성이 처참하게 무너져 내릴 그 때를 보시면서 그것도 모르고 오늘 흥청망청 살아가고 있는 저 우매한 민중들을 바라 보시기 안타까운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신 것입니다.
결국 이 도성은 기원 70년에 로마의 디도장군이 이끈 군대에 의해서 처참하게 무너져 내려 110만명이 불에 타 숨지고 도성은 산산이 조각나는 수난을 겪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십자가의 행렬을 따르면서 눈물 짓던 여인들을 향해서 나를 위해서 울지 말고 너와 너희 자녀들을 위하여 울라고 타 이르셨
던 것입니다.
네째 날인  수요일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모처럼 제자들과 함께 하루를 휴식하신 날 입니다.  그런데 그 날도 가룟유다는 열심히 돌아 다니면서 예수를 팔기 위해서 흥정을 하고 다녔습니다.
다섯째 날인 목요일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날 입니다. 그래서 이 날을 세족 목요일(洗足 木曜日) 이라고 부릅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안은 것을 아시고는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마음껏 사랑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고는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나누신 후에 주님은 제자들
을 이끄시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기도하기 위해서 올라 가십니다.  이것이 다섯째 날에 있었던 일 입니다.
여섯째 날인 금요일은 고난주간의 절정입니다.  이 날이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신 날 입니다.  이 날 예수님은 체포되어 가야바 법정에서 심문을 받으시고, 빌라도 법정에서 심문을 받으시고, 마침내는 군중들에게 맡겨져서 가시관을 쓰시고, 붉은 죄수복을 입으시고,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에 가서 죽으십니다.  이 날이 기원 29년, 니산월, 15일, 금요일, 오전 9시에 못 박혀서 여섯시간 동안 고생을 하시다가 오후 3시에 운명을 하심으로 예수님은 그 한 많은 인생을 마치셨습니다.  그래서 이 날을 "성 금요일"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토요일은 안식일 입니다.  모든 유대인들은 이 날은 쉬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금요일 저녁에 매장되어 토요일을 무덤에서 지내시고 제 3일 안식 후 첫날인 일요일 새벽에 부활 하십니다.  모든 악의 권세를 물리치시고, 모든 부정적인 것들을 극복 하시고, 모든 부조리를 일소 하시고, 보란 듯이 살아 나셔서 우리들에게 부활의 소망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다음 주일 새벽이 부활의 아침 입니다.  그 후 이 세상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 날을  주님의 날로 선포하고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그래서 오늘 일요일이 주님의 날이 되어버린 것 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기독교를 말할 때 십자가를 빼 놓을 수 가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 십자가는 그렇게 아름답거나 유쾌한 것도 아니고 뜻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십자가는 통나무 두개를 서로 엮어 3 M 높이로 세워 놓고 그곳에 흉악한 죄수들을 잡아다가 매달아 놓고는 진을 빼서 죽이는 곳, 그곳이 십자가 입니다.  이를테면 사형틀 입니다.  바로 이같은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신 것입니다.  그것도 창조자가 피조물들에게 처참하게 죽으신 자리 입니다.  그래서 오늘 십자가가 기독교의 상징이 된 것입니다.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 들이고 10년 후에 가서 화폐에다 이 십자가의 모형을 새겨 넣었습니다.  30년 후에 가서는 죽은 사람의 관 위에다 고난의 표시로 이 십자가의 모형을 새겨 놓았습니다.  그리고 4세기 후에 가서는 교회들 마다 십자가를 만들어서 종탑 위에 세우기 시작 했습니다.  그런 것이 오늘 날에 와서는 교회들 마다 십자가를 높이 지붕 위에 달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 그 뒤 부터는 사람들은 고난을 표시할 때느 의례히 십자가라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도바울도 자신의 몸에 지닌 질병을 가시라고 표현 했습니다.  그것이 십자가라는 뜻 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어려운 일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는 십자가가 주어졌다고 말 합니다.  근심거리가 생겼을 때도 사람들은 십자가가 생겼다고 말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집집 마다 가보면 십자가 없는 집이 없습니다.  겉에서 보면 행복하게 보이는 집에도 좀 깊이 들여다 보면 나름대로 다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네 십자가는 네가 지고 가라" 고 했습니다.  사람이면 다 십자가가 있다는 말씀 입니다.  내게 주어진 십자가는 남이 대신 져 줄 수가 없는 것 입니다.  남에게 전가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 십자가는 나 밖에 질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십자가인 것 입니다.
어떤 사람이 늘 마음 속으로 생각 하기를 "내 십자가는 너무 무거워, 내게 주신 십자가는 너무나 커, 하나님은 왜 나에게만 이렇게 큰 십자가를 주셨는지 몰라"하고 푸념하며 불만스럽게 살았다고 합니다.  그러다 어느 날 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습니다.  꿈 속에서 십자가를 지고 언덕 길을 올라 가고 있는데 그
곳에 십자가가 많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때 어디선가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가벼운 것으로 바꾸어 지고 가거라",  이 사람은 너무나 반가워서 지고 있던 십자가를 집어 던지고는 가장 작은 것으로 골라 졌습니다.  빛이 나고 보석으로 꾸며 있고 가볍게 생긴 것으로 골라서 져 보니까 묵직했습니다. 그래서 속을 들여다 보니까 그곳에는 아품과 고뇌가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다른 것으로 골랐습니다.
이번에는 장미 꽃으로 장식해 놓은 십자가를 골랐습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를 지자 마자 찔러대기 시작하는데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곳에는 각종 한숨과 질고가 가득하게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다시 고른 것이 지금 까지 자기가 지고 있다가 무겁다고 집어 던진 그 옛날의 십자가를 골라 다시 졌습니다.  그 때 어디선가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아니, 그것은 네가 무겁다고 던져버린 그 십자가가 아니냐",  "네,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이것이 가장 가벼운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 사람이 그 십자가를 지니까 그렇게 가벼웠다고 합니다.
얼핏 보면 남들은 모두 십자가가 없는 것 처럼 보입니다. 있어도 모두 가볍게 보입니다.  내게만 제일 무거운 십자가가 주어진 것 처럼 생각되어 불평을 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 십자가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오죽하면 그 고난들을 십자가라고 했겠습니까.
오늘 본문 속의 예수님의 모습을 보십시요. 지금 겟세마네 동산 위에 올라와 있습니다. 오늘 밤이 지나고 날이 밝으면 제자의 배신으로 체포 됩니다.  지금 산 아래에는 군인들이 지키고 있습니다. 이제 날이 밝으면 금요일, 십자가에서 죽어야 합니다. 이 십자가는 누가 대신 져줄 수가 없습니다.  져줄 일도 아닙니다.  어떻게 면할 도리가 없습니다.  이 절박한 시간, 너무 괴로와서 몸부림을 치며 기도를 합니다.  혼자서는 너무나 고독해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해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얼마나 외로운 시간 입니까.  그런데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심정을 모릅니다.  그래서 잠만 잡니다.
이같은 모습들이 예수님을 더욱 고독하게 만들었습니다. 제자 하나는 배반을 하였고, 세 제자는 잠만 자고 있고, 호산나 하면서 열광 하던 그 군중들은 내일이면 폭도로 변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그 운명의 시간은 자꾸만 다가오고 있고, 외롭고, 고독하고, 쓸쓸한 밤, 그것이 겟세마네의 밤 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지금 심각하게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어느 주석자는 그 때 예수님이 바위를 부여 잡고 기도 했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그 때 이마에서 땀이 흐르는데 핏방울 같았다고 말씀 하고 있습니다. 2세기의 교부였던 저스틴과 이레네우스는 문자 그대로 그것은 핏방울이었다고 해석 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 앞에 서 있는 예수님의 모습 입니다.  누구를 위한 고난 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왜 이같은 고난을 받아야 합니까.
밤새 기도하고 하산 할 때 산 밑에는 군인들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체포당한 에수님은 빌라도 앞에 가서 심문을 받으시고, 죄수의 몸이 되어 사형선고를 받습니다.  강도요, 살인자요, 방화범인 바라바는 석방되고 병자들을 고쳐주고, 배고픈 자를 먹이시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문둥이를 깨끗게 하고, 앉은뱅이를 일어나게 하고, 죽은 자를 살려준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어야 했습니다. 이것이 그 시대의 아픈고 어두웠던 면 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적인 죽음은 이렇게 해서 죽습니다.  그래서 정치적인 죽음은 억울한 죽음 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요.  그렇다면 억울한 죽음을 당하는 예수의 죽음을 군중들 만큼은 막아 주었어야 합니다. 군중들 속의 단 몇 %만큼은 그 시대를 옳게 분별하고 직시해서 억울한 죽음을 당하는 약자를 보호하는데 그 군중들을 이끌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것이 민중의 힘 입니다. 그런데 군중들은 어떠했습니까. 엇그제 까지만 해도 호산나 하면서 겉옷을 벗어서 길에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열광하던 군중들이었는데 오늘은 어떻게 된 영문인지 그 입으로 이번에는 살인범 바라바를 석방하고 대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정치에 이골이 난 빌라도가 그 순간을 놓칠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한 말이 "그 죄 값을 너희가 받아라" 였습니다.  그랬더니 이 우매한 군중들이 화답하기를 "그 핏 값을 우리와 우리 자손들의 머리에 돌리소서"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이 그 죄 값을 얼마나 혹독하게 치루었습니까.  예수 사후 받은 혹독한 죄 값 말고도 근대역사 속에서 그의 자손들이 나찌에게 당한 수난이 얼마 입니까. 당시 인구 천만명 가운데 600만명의 백성들이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무작위로 전쟁도 아닌 때에 학살을 당하는 수모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군중들이 왜 이렇게 까지 우매했습니까. 마가복음 15장에 보면 대제사장들이 무리를 충동해서 바라바를 석방하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백성들을 "권고" 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권고" 라는 말은 "Epeisan"이라는 말 입니다.  한 사람이 대중 앞에 나서서 부추기는 선동을 "에페이산" 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제사장들이 가만히 있는 백성들을 선동했다는 말 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 입니까.  그래서 정치인들의 선동에 군중들이 놀아나면 안됩니다.  이 땅에 더 이상의 선동정치는 없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정치학자는 "군중은 우매한 무리들이다, 군중을 잘 이용만 하면 천부의 독
재자가 될 수 있다" 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은 끝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얼마나 처절하고, 외롭고, 고독한 자리 입니까.  그래서 견디다 못해서 절규 합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이 소리가 그냥 나올 수 있는 소리 입니까. 피와 땀과 눈물이 범벅이 되어서 인류에 모든 고통과 질고와 죄와 형벌과 죽음의 전부를 한 몸에 걸머지고 가장 어둡고 부정적인 자리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 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고 하나님을 불러 가며 고뇌 속에서 절규하는 이 예수의 처절한 모습, 이 모습을 우리가 어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이 누구를 위한 고난이고, 누구를 위해서 흘리는 피요 아픔 입니까.
이렇게 절규하건만 정작 인자하기만 하시던 하나님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 일언반구 말씀이 없습니다.  위로의 말씀 한 마디가 없습니다. 지금 하나님의 심정을 어떨 것이며, 또 지금 어디에 계시는지 말씀 한 마디가 없으십니다. 어디에선가 마음 아파해 하며 고뇌하고 계실 것이 분명한데 그 하나
님은 끝내 절규하는 독생자를 외면 하십니다.
왜 입니까.  이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뜻 때문 입니다. 그래서 일본의 지다구라 라는 신학자는 십자가 속에 들어 있는 이같은 하나님의 고뇌하시는 아품을 모르는 사람은 함부로 십자가라는 말을 입에 담아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 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 입니다.
여러분, 어떠 십니까.  오늘 고난주일 아침에 우리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흘리며 기도하시는 주님의 안타까운 모습을 생각 할 수 있어야 합니다.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죽어가며 부르짖는 고뇌에 찬 저 절규의 소리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독생자의 저 절규하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끝내 세상 구원을 위해서 아들을 포기하시는 하나님의 저 저미는 아픈 마음도 헤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주님의 그 고난에 만분지 일이라도 동참하게 되고 또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때로 내 앞에 닥칠 십자가도 기쁘게 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고난주일의 아침에 부활 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고난 받으신 우리 주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기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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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설교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 26:36 ~ 46

지금 우리는 사순절 기간을 보내고 있고, 다음 주일부터 고난(苦難)주간이 시작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고난주간을 “위대한 주간”이라고 칭할 정도로 교회의 큰 명절로 삼았습니다. 그렇다면 왜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 주간을 이렇게 중요한 날로 지켰습니까? 그것은 이 주간동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많은 것들이 우리를 위해 성취되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 주간동안 옛 악마의 통치가 해체되고 죽음이 정복되었고 속죄(贖罪)가 이루어졌고 저주의 닫히고 낙원이 문이 열렸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장벽이 무너지고 하나님의 평화가 하늘과 땅에 가득 차게 되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졌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러한 구원의 축복을 더욱 실감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을 함께 느끼기 위해 여러 가지 형태로 고난절 행사를 했습니다. 
대표적인 행사는 교인들의 [금식(禁食)]이었습니다. 성경학자 [에피파네스]는 "당시의 사람들이 한 주간 금식했으며 특히 마른 고기나 빵 소금 물 등만을 먹을 수 있게 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한 주간 내내 식음(食飮)을 전폐하고 금식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2일정도 굶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크리소스톰]은 "이 주간동안 가난한 자들에게 자선을 베풀곤 하였으며 도움이 필요한 자들에게 도와주는 관습이 있었다" 라고 했습니다. 

또 이 기간 동안에는 종들에게 휴식과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이때에 황제는 죄수들을 석방하는 특혜의 조치도 내렸고 모든 소송과 법정의 재판을 중단하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고난주간 목요일은 예수님께서 배반당한 날이기 때문에 특별한 행사를 했습니다. 
서양(西洋)교회에서는 이날 저녁에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을 기념하기 위해 [성만찬]을 시행(試行)했습니다. 이날에 새신자들에게 세례를 베풀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금요일은 [좋은 금요일](Good Friday)이라고 해서 이 날에 기도하고 금식하고 회개하는 자에게는 죄 사함을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부활주일 날에도 여러 가지 종교행사를 거행했습니다. 
교회 역사가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콘스탄틴왕 시대에는 이러한 철야행사는 거대한 등불행사를 동반하였다"고 말합니다. 콘스탄틴노플 전역에 횃불이 세워지고 등불이 켜 졌으며 그래서 온통 도시에 정오의 태양을 보듯이 밝았다고 합니다. 교회 내에 횃불이나 등불을 달았습니다. 이렇게 불을 밝히는 것은 부활절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인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령하는 행위로 상징하였습니다. 

▶ 여기에서 우리는 이러한 행사들의 특징과 교훈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 그들은 예수님의 육체의 고난에 실제로 동참하려고 몸부림쳤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의 고난을 하찮고 값싼 것으로 전락시키지 아니하면서도 정신적인 고통을 육체적인 고난으로 몸소 체험하고 실감하려고 몸부림쳤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의 고난이 그들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인식하고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더욱 깊이 받기 원하여 몸부림쳤습니다. 그들의 모습은 고난주간에 아무런 의미 없이 바쁘게 지내버리는 현대교회의 교인들은 이런 행위들을 부끄럽게 합니다. 

둘째, 초대교회 성도들은 고난주간에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할 뿐 아니라 형제의 고난에도 동참하는 아름다운 신앙의 전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들은 고난주간을 가난한 자들과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돌봐주고 노예와 종들을 쉬게 하는 등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와 기쁨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주간으로 삼았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고난이 곧 이러한 사람들을 위한 고난이라는 그들의 신앙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셋째, 초대교회 성도들은 고난주간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을 생각하며 의의 태양이신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종말론적인 영광과 기쁨의 신앙으로 보냈습니다. 이 도시에 횃불을 밝혀 놓고 교회마다 집집마다 등불을 켜 놓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바라보면서 찬양하면서 한 주간을 보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회개하는 새신자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성만찬을 행하면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에 함께 참여하는 절기로 삼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주간은 기독교인들에게 큰 절기입니다. 고난 없이 영광도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고통이 없었다면 부활의 영광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 많은 성도들은 고난을 멀리하고 영광만 차지하려고 불신앙의 늪에 빠져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해야 합니다. 부활의 아침이 이 땅에 다시 임하도록 우리 모두 기도할 때입니다. 

정말 고난주간은 우리성도들이 모든 일에 조심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준비해야 합니다. 말이나 행실로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지 않도록 주의함으로 보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 국가에서는 금요일부터 다 부활절까지 다 공휴일입니다. 국가적으로 3일간을 부활절 휴가로 보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 주간을 겸손한 마음과 영혼을 여밀고 경건하게 지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부활의 승리를 위한 기도를 드렸던 것처럼 우리도 고난주간동안 특별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금식하는 것도 중요하고, 여러 가지 행사를 갖는 것도 중요할지라도 기도하지 않고서는 결코 주님의 고난에 동참할 수 없습니다.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의 두 가지 핵심 요소는 말씀과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쉬지 않으시고 줄기차게 말씀을 가르치시고 병자들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며 제자양성에 주력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능력 있게 사명을 감당하실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입니까.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새벽 미명에 일찍 일어 나셔서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또 틈만 나시면 산에 올라가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신 고통스러운 상태에서도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고난의 쓴잔을 앞두시고 외롭고 고통스러우나 겟세마네 동산에 나아가 기도의 싸움을 싸우셨습니다. 이 기도의 싸움은 자기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는 자기와의 투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겟세마네 기도를 통해서 고난의 십자가를 질 영력을 덧입으시고 인류 구속역사를 능히 섬기실 수 있었습니다. 

▶ 그런데 이때에 제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눅 22:44에서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께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실 때에 함께 겟세마네 동산에 기도하러 올라 갔던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그들은 자고 있었습니다. 

▶ 본문 40절을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그렇습니다. 제자들은 다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가슴 아픈 말씀입니까? 이 얼마나 안타까운 말씀입니까? 

그렇다면 왜 제자들이 잠을 잤을까요? 그것은 유월절 만찬 때 양고기를 많이 먹고 포도주를 너무 많이 마셨기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마음이 슬프고 피곤했기 때문이었을까요? 대개 마음이 슬프고 피곤하면 잠을 많이 자게 됩니다. 물론 피곤하면 잠을 자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시는 안타까운 말씀을 들으셔야 합니다. 41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이 말씀은 우리가 깨어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죄는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이처럼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새워 기도하셨는데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셨던 주님께서 기도하셨는데, 우리가 기도하지 아니하면 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기도 없이는 제대로 사랑할 수 없고, 기도 없이는 참된 봉사를 할 수 없고, 기도 없이는 교회학교 학생들을 제대로 가르칠 수 없고, 기도 없이는 남편을, 아내를 참으로 사랑할 수 없고, 기도 없이는 우리의 자녀들을 훌륭하게 키울 수 없고, 기도 없이는 하나님의 교회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섬길 수 없고, 기도 없이는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갈 수 없고, 기도 없이는 복음을 전할 용기도 나지 않고, 기도 없이는 이 땅을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시켜갈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기도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면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교훈을 함께 생각하면서 다시금 우리들의 마음과 영혼을 여밀기를 원합니다. 

1.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깨어서 기도해야 합니다.(39절)
본문 39절에서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기 시작하셨습니다. “땅에 엎드렸다 ”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 겸손한 자세와 복종하는 마음 ”을 보여 줍니다. 또한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리는 자세 ”를 보여줍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겸손하고 복종하는 마음으로 땅에 엎드려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할 것은 예수님은 “내 아버지여!!”라는 말로 기도를 시작하셨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대한 깊은 사랑과 신뢰심을 가지고 계심을 말해줍니다. 우리는 힘들고 답답하고 괴로운 상황에 처하게 되면 기도는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께 섭섭한 마음을 품고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기 쉽습니다. "하나님!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을 주십니까? 왜 나를 이렇게 괴롭게 하십니까?" 하며 하나님을 원망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된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도 의심치 아니하시고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셨습니다. 

물론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실 정도로 예수님께서 받아야 할 잔 곧 십자가의 죽음은 참으로 고통스런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인성을 갖고 계신 분이셨기에 "만일 할 만하시거든" 라는 기도를 하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십자가 고난의 잔을 마시지 않고 다른 방법으로 구원의 역사를 이룰 수 있으면 그렇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연약한 인간의 몸을 입고 계셨기 때문에 할 수만 있으면 고통과 수치의 십자가를 지고 싶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심한 정신적 고통 가운데서 처절하게 번민하시면서 기도하셨습니다. 

▶ 그러나 예수님은 이에 머물지 아니하시고 한 걸음 더 나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여기의 '그러나'는 매우 중요한 기도입니다. 이는 자기중심에서 하나님중심으로의 전환이요, 육에서 영으로의 전환입니다. 예수님은 심한 정신적 고통 가운데서도 자신을 기쁘시게 하기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십자가를 회피하고자 한 기도가 아니라 오히려 이를 적극적으로 감당하기 위해 드리는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쳐 복종시킴으로써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고자 하는 영적 투쟁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란 자기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렇게 기도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보다도 자기의 뜻을 앞세우고 자기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원하여 "아버지의 원대로 마옵시고 내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가를 찾고 순종하기보다, 내가 원하는 것만 하나님께 일방적으로 간구합니다. 그리고 그 간구한 것에 대한 응답이 빨리 나오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원망합니다. 나의 소원은 좁고 편협하고 불완전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크고 원대하고 완전합니다. 사람이 자기의 뜻을 부인하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쓰실 만한 영적인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처럼 깨어서 기도하되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사순절 기간 동안 특히 고난주간에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나의 가정에 어떤 뜻을 가지고 계시는지, 나의 사업장과 나의 인생에 어떤 뜻을 가지고 계시는지 알려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내일 일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내가 아는 것은 완전하지 못합니다. 내가 가진 것도 완전한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뜻대로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른 기도는 그 결정에 대해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 혹은 원하는 바를 자신이 뜻이 아닌 주님의 뜻대로 해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나의 모든 것들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롬 12:2에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서는 깨어 있어 기도하되,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조금 후에 벌어질 일에 대해 알지 못합니다. 통계나 경험(經驗) 혹은 나타나는 현상만 가지고 될 것이고 생각하고, 사업에 투자하고 모든 일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의 사업은 이렇게 결정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들은 모든 일들을 이렇게 결정해서는 안 됩니다. 사업이 내 쪽에서 보면 모두 잘될 것 같은데, 하나님 편에서 보면 아닐지도 모릅니다. "주님 이것을 해야 합니까? 하지 말아야 합니까?"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람을 볼 때도 그 사람의 속에 감추어져 있는 것을 알 수 없습니다. 
겉보기에는 착하고 좋은 사람처럼 보여도 그 중심은 하나님만 아십니다. 우리는 우리 생명의 내일을 알지 모릅니다. 내 직장의 내일도 모릅니다. 내 삶과 물질이 어떻게 될 것인지도 알지 못합니다. 우리의 환경이 내일 어떻게 변할지 알 길이 없습니다. 내일 일을 아는 분은 전능하신 하나님밖에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가진 것으로는 부족하고 내 힘과 능력으로는 모자람이 많습니다. 어떤 측면으로도 알 길이 없으며 그것은 아는 분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초월하여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주여 지금 내가 가는 길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이렇게 묻고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그분의 지시를 받고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우리의 모든 형편과 사정을 아시는 주님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2. 시험을 이기기 위해서는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40-41절)
본문 40-41절에서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깨어서 기도해야 할 이유는 시험을 이기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위해 기도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오셨는데, 제자들이 깊은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이에 베드로를 향하여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시동안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라고 말씀하신 후에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땅히 기도해야 할 베드로가 기도하지 않고 잠만 자는 것을 보시고 “한시동안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주님의 책망을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책망하심은 베드로를 미워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베드로를 위해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 그런데 주목할 것은 베드로의 이런 말씀은 바로 나에게 하시고 있는 말씀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우리가 깨어 있어 기도하지 않으면 시험에 들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은 때가 악한 시대입니다. 우리자 자다가 깰 때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롬 13:11에서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깨어서 기도하지 못하고 깊은 잠을 잘 때가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 41절의 말씀을 통하여 베드로에게 주시는 음성을 통하여 성령님께서 지금 나에게 주시는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시동안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우리는 깨어서 기도하지 아니하면 사단의 시험을 받습니다. 사단은 강하고 또 간교합니다. 사단의 시험은 유혹입니다. 이 유혹은 달콤하고 힘이 있어 우리의 힘과 지혜로 이길 수 없습니다. 사단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습니다(벧전5:8). 우리가 깨어 기도하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게 사단의 시험에 들어 영적 분별력과 영적 힘을 상실하여 사단의 밥이 되고 맙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육신은 약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은 약하도다."라는 이 말씀은 육신이 약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육신이 약하기 때문에 더욱 깨어 기도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강하면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약하기 때문에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깨어 기도하게 되면 연약한 육신도 이길 수 있지만, 기도하지 않으면 건강한 육신을 가진 자도 자기 자신 하나를 감당할 수 없게 됩니다. 

우리들은 육신적으로 약한 본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깨어서 기도하지 않으면 시험에 들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기도하는 사람도 시험을 받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시험을 받더라도 그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에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깨어 기도하셨기 때문에 마귀의 간교한 계략을 아시고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놓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 앞에 큰 시험이 놓여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금 져야 하는가? 왜 지금 인가? 꼭 져야 하는가? 다른 길은 없을까?” 이 시험으로 예수님은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셨습니다.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를 통하여 이 모든 시험을 다 이기시고 십자가의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험은 우리를 놀라게 하고 슬프게 하고, 마음에 심각한 고민을 안겨주어 초췌하게 합니다. 그런데 이 시험은 누구에게나 다 온다는 사실입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에게만 시험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에게도 옵니다. 예수님에게도 시험이 있었습니다. 사십일 금식기도하고 난후, 믿음이 좋을 때 시험이 오지 않았습니까? 십자가를 앞에 두고 시험이 오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누가 시험을 당하거든, "집사님이 믿음이 약해지셔서 시험이 오는구나."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건강한 사람에게도 오고, 병든 사람에게도 옵니다. 부자에게도 오고, 가난한 사람에게도 옵니다. 건강하고 모든 일이 잘 되어 가면, 믿음생활이 나태해지기 쉽습니다. 바로 그때에 믿음의 시련이 닥칩니다. 가난하면 돈 버는 일 때문에 믿음생활에 힘들어 합니다. 사업이 너무 잘되어도 시험이 옵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하여튼 누구에게나 어떤 상황에서나 시험은 옵니다. 

그런데, 시험에 들면 안 됩니다. 시험에 든다는 것을 “시험에 빠진다, 시험이 떨어진다, 유혹의 덫에 걸려든다.”는 것입니다. 시험이 와도 시험에 들면 안 됩니다. 넘어지면 안 됩니다. 그런데 만약 깨어서기도하지 못하면 베드로처럼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자리에 서게 됩니다. 결국 주님을 버리고 도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깨어서 기도할 때에 시험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시험을 찬바람에 비유합니다. 찬바람이 불면, 어떤 사람들은 "아이 추워."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아! 시원하다"합니다. 찬바람이 분다고 다 감기 걸리는 것이 아닙니다. 몸이 약한 사람이 감기 걸립니다. 강한 사람은 절대로 감기에 걸리지 않습니다. 시험이 오더라도 믿음이 강한 사람은 절대로 시험에 들지 않습니다. 넘어지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믿음이 강한 사람입니까?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늘 기도하는 사람은 시험이 와도 걸려 넘어지지 않습니다. 승리합니다. 아무리 큰 시험이 있을지라도 기도하면 이겨낼 수 있습니다. 승리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겟세마네동산의 기도를 통해서 시험을 이겨내신 것처럼 우리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기도하는 성도는 건강한 성도입니다. 기도하는 교회는 건강한 교회입니다. 매일 새벽마다 기도하는 교회는 어떤 시험이 와도 넉넉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왜 우리 집안에만 늘 이런 어려움이 닥치나? 왜 나만 이렇게 고생하나? 왜 우리 교회에만 이런 일이 생기나? 아닙니다. 다른 집안에도 여러분이 모르는 어려운 일이 닥칩니다. 다른 사람들도 여러분이 모르는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교회들도 우리가 모르는 시련이 닥칩니다. 나만, 나만, 이런 생각은 버리세요. 그렇게 생각하면 시험에 듭니다. 낙심합니다. 

시험을 당하기 전에도 기도해야 합니다. 시험을 당한 후에도 기도해야 합니다. 시험은 항상 언제든지 우리들에게 옵니다. 그러므로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규칙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매일 새벽에, 매일 저녁 잠들기 전에, 매일 낮에 등 시간을 정해놓고 규칙적으로 기도하십시오. 기도의 습관을 들이십시오. 기도의 습관이 되어 있는 분들은 무슨 시험을 갑자기 만나면, '그래, 이것도 기도하라고 하나님께서 주신 시험이구나.' 라고 생각하고 깨어서 기도하면 시험에 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험을 통하여 더 성숙해 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약 1:2-4에서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도하면서 시험을 이겨내면 우리의 인격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됩니다. 계속 시험을 이겨냄으로 우리는 점점 성숙한 인격체로 성장하게 됩니다. 주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시험을 이기는 기도입니다. 시험을 이기는 길은 기도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기도함으로 승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담대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깨어서 기도해야 합니다.(46절)
본문 46절에서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후에 담대해지셨습니다. 하나님께 응답을 받고 나면 담대해집니다. 마음의 평안이 찾아오고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그 모든 일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이 있었기에 승리하셨습니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으면 약해집니다. 시험에 듭니다. 본문 69절 이후에 보면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는 사건이 나오는데, 베드로가 왜 이처럼 약해졌습니까? 그것은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라고 말씀하시면서 기도할 것을 거듭하여 당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이러한 주님의 당부를 깨닫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기도하는 것을 소홀히 했습니다. 기도를 가까이 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야고보와 요한은 한시 동안도 깨어 있을 없었습니다. 결국 이로 인해서 결국 이들은 시험에 들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기도할 시간에 기도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 잡혀 갈 때에 제자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해 버립니다. 

그렇다면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33절)라고 호언장담하며 큰 소리를 쳤던 베드로는 어떠했습니까? 본문 58절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베드로는 주님을 따라가되 “멀찍이”따라갔습니다. 혹시라도 예수님처럼 자기도 잡힐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대제사장 가야바의 바깥뜰에서 하속들과 함께 앉아서 상황을 지켜보던 베드로에게 한 비자가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69절)라고 말할 때에 두려운 나머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하면서 “나는 네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70절)라고 말하면서 앞문까지 나갔습니다. 이때 다른 비자가 베드로를 보고 “이 사람도 나사렛 예수와 함게 있었도다.”(71절)라고 말할 때더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예수님을 모른다 ”고 맹세하면서 부인했습니다.(72절) 그리고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너도 진실로 그 당이라. 네 말 소리가 너를 표명한다.”(73절)라고 말하니 더욱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저주를 하며 맹세하면서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바로 그때에 닭이 울었습니다.(74절) 이에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리라는 말씀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했습니다.(75절)

그렇습니다. 깨어서 기도하지 않으면 시험을 받을 때에 두려움에 빠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종종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해서"라는 말을 하면서 기도생활에 힘쓰지 못하는 것을 합리화(合理化)시키고 있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육신적으로 약하기 때문에 더욱 더 깨어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아니하면 베드로처럼 영적 전쟁에서 두려워할 수 밖에 없고,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깨어서 기도하지 아니하면 영적으로 나약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깨어서 기도하지 아니하면 무능력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깨어서 기도할지라도 엘리야 선지자가 로뎀 나무 아래서 죽기를 작정하는 영적 릴레마에 빠진 것처럼 우리들도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영적인 위기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깨어서 기도하지 않는다면 더더욱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깨어서 기도하지 않는 것도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무엘 선지자가 삼상 12:23에서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않겠노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깨어서 기도하지 않고 쉬는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깨어서 기도하는 사람은 무슨 일이 와도 근심, 걱정이 없습니다. 기도로 준비한 무슨 일이 닥쳐와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기도로 준비한 성도는 모든 준비를 다 갖춘 성도입니다. 하지만 기도하지 않는 성도는 모든 것을 다 갖추었다 해도 그의 준비는 조금 부족한 것입니다. 

중한 병이 걸려도 살 수 있고 아무 것도 아닌 병으로도 죽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내일 일은 일단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안다고 해도 그것은 확실하지 않습니다. 완전한 것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늘 속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성도는 여기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기도로 이겨냅니다. 

링컨도 늘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나는 몇 번이고 무릎 꿇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 외에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의 지혜 아니면 모든 사람의 지혜로도 어떤 일에 대하여 대처하는 능력이 불충분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라고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많은 참모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정해도 부족하고 어떤 것을 준비해도 마찬가지로 완전하지 못하니까 하나님 앞에 기도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하면 내 부족한 그릇에 하나님의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는 것을 주시고 구하지 않는 것도 주십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주님 앞에 기도하는 성도가 승리합니다. 사업의 앞날을 하나님께 여쭤보고 해야 합니다. 정치적인 앞날도 하나님께 여쭤보고 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에 하나님은 도와주시고 버리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을 천하보다 귀히 여기시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승리자가 되게 하시고 결단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하십니다. 영의 세계는 보이지 않습니다. 사망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볼 수 없습니다. 지혜로운 성도는 기도합니다. 끝까지 승리하고자 하는 성도는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미래를 알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일이 되고 안 되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기도하고 난 다음에 하나님께서 열어주신 길을 따라가면 두려움이 없고 염려가 없습니다.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깨어서 기도하면 하나님은 그 길을 합력하여 선을 이룰 수 있도록 인도해주십니다. 깨어서 기도하는 사람은 담대합니다. 두려움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 4:6-7에서“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즘에 많은 분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서 매우 피곤해 하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으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바로 이때에 외롭고 괴롭고 답답할 때 우리 모두 예수님처럼 겟세마네 동산으로 나아가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깨어있어 기도하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교제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깨어 기도하지 않으면 성령의 인도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영생수의 근원되신 예수님으로부터 영생수를 받을 수 없습니다. 심령이 메마르고 딱딱해 져서 아무런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깨어 기도하지 않으면 세상을 이길 힘이 없고 사단의 시험에 빠지게 됩니다. 매일 도전해 오는 마귀와 싸워 이길 수 없고 적당히 타협해 버립니다. 사명의 십자가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깨어서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과 뜻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불신자들과 똑같이 살아가게 됩니다. 사명을 부담스럽게, 귀찮게 느끼게 됩니다. 조금만 힘들어도 짜증을 내고 불평하며 심령과 얼굴은 어두워집니다. 사단은 십자가 지지 않고 사는 것이 현명한 길이라고 속삭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비록 몸이 피곤하고 마음이 힘들지라도 예수님처럼 하나님께 나아가 엎드려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나의 어려움을 호소하면서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어떠한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지, 진정 나의 인생에서 추구해야 할 방향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 주십니다. 우리가 깨어 기도하면 나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죄인인가 깨닫게 해 주십니다. 

우리가 겸손히 하나님께 의지할 때 역사를 능력 있게 감당할 수 있는 힘과 스피릿을 주시고 영적 싸움에서 큰 승리를 주십니다. 또 우리가 줄기차게 중보기도하면 우리교회와 가족, 특히 자녀들이 놀라운 축복을 받습니다. 우리가 깨어 기도하면 내가 바라는 개인적인 꿈과 소원이 얼마나 유치하고 근시안적인가, 이 세상의 영광과 권력이 얼마나 하잘 것 없고 덧없는 것인가 깨닫게 해주시고, 반면에 하나님 나라의 영광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를 보여 주십니다. 

우리가 마음을 다해 기도드리며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크고도 비밀한 일들을 보여주십니다.(렘 33:3) 우리가 깨어서 기도할 때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가장 먼저 구해야 할 것은 하나님 나라임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기도는 힘든 영적 투쟁입니다. 그러나 영적 투쟁 없이는 영적으로 승리할 수 없습니다. 깨어 기도할 때 영적 분별력이 생기고 또 악의 세력과 싸울 수 있는 영적 힘을 덧입을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무리 무거운 십자가도 능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동역이 중요합니다. 서로 끌어주고 밀어 주어서 기도할 수 있도록 힘을 보태야 합니다. 우리 모두 자기 자신의 뜻을 쳐 복종시키고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는 겟세마네 기도의 용사가 됩시다! 

예수님께서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심으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고 인류 구원의 역사를 이루신 것처럼 우리가 깨어서 기도하되,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여 십자가를 질 때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친히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피땀 흘리는 겟세마네의 기도를 통해 사단의 궤계를 파하시고 승리하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는 비결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후에 “깨어 있어 기도하라!”는 말씀을 붙잡고 회개하고 깨어 기도함으로써 연약함을 이기고 많은 십자가를 감당하는 능력 있는 하나님의 종이 되었던 것처럼 우리가 깨어서 기도하기만 우리들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일을 넉넉하게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벧전 4:7에서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며 기도하라."고 권면하시고 있는 지금은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할 때입니다. 고난주간을 즈음하여 우리도 예수님처럼 승리를 위한 겟세마네의 기도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정말 경건하고 거룩한 마음으로 사순절을 기간을 보내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함으로 금번의 고난주간은 정말 새롭게 거듭나고 승리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귀하게 쓰임받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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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설교 긍휼을 원하시는 주님의 뜻(마태복음 9장13절)

긍휼을 원하시는 주님의 뜻


마 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자신의 힘으로는 의인이 될 수 없음을 깨닫고 

주님 앞으로 나아갈 때 구속의 사역을 감당하도록 행하신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주님 앞으로 나아오는 자들에게 긍휼을 원하시는 것이다. 

주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의인이 되도록 하심이 

긍휼을 원하시므로 가능한 것이다. 

그것이 주님의 긍휼이다. 


그 긍휼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사랑이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형식적인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 

즉 형식적인 예배드림을 원하시지 않으신다. 

다만 심령의 중심에 믿음을 지니고 있을 때 긍휼을 베풀어 주신다. 

  

롬 11:32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사람의 시각으로 보는 긍휼과 주님께서 주시는 긍휼은 다르다. 

주님의 긍휼은 주님의 생명이 있는 사랑의 세계인 영의 영역이다. 


그래서 주님으로 긍휼을 받고 난 후 예배를 드릴 때 진정한 산 예배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긍휼이 제사보다 앞서고 긍휼없는 제사는 하나님이 원치 않으신다.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고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다. 

 죄없는 사람에게는 예수님이 필요치 않다. 

예수님이 구하시는 것은 상한 심령이다. 

그 상한 심령을 치유해 주시는 분이 예수님이시며 

예수님께서는 긍휼의 사랑으로 인도하신다. 

  

시 51: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 여호와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 앞에 나올 때마다 통회하는 마음과 상한 심령을 가지고 나와야 한다. 

 지금 지은 죄가 없다고 하더라도 전에 지은 죄를 붙들고 애통하는 심령을 가져야 한다. 

 다윗은 범죄한 후에 침상이 뜨고 요가 적시도록 회개하였다. 

  
시 34:18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과거에 이미 회개하여 사함을 받았을지라도 그 죄를 다시 원통히 여기고 회개하면 

영혼의 거름이 되고 그것으로 인하여 점점 겸손하여지고 

자기를 부인하게 되어 하나님 앞에 점점 가까이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죄를 회개하고 상한 심령이 되지 못하면 하나님의 권고가 떠나고 마귀에게 내어준 바 된다. 

마귀에게 내어준 바가 되면 생베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사람이 되고 만다. 

  

마 9:16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생베조각을 낡은 옷에 붙여보라. 낡은 옷이 되어버린다. 

마귀에 붙잡히면 옛 사람의 성정으로 돌아가게 된다. 

 헌 옷에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욱 심하게 될 것이다. 

믿음의 삶에서 과거로 돌아가면 옛 사람의 성정보다 

더 악하게 되고 더 심한 악취가 나는 죄악의 구렁텅이로 빠지게 된다. 

또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한다고 하였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으면 새 포도주가 팽창할 때 

부대가 터져서 부대도 버리고 포도주도 버린다. 

즉 새로운 영은 묵은 옛 사람의 성정이 섞이면 안된다. 

  
롬 7: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주님께서 긍휼을 원하시는 것은 그리스도의 자녀들이 진리의 말씀안에 거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생한 영은 말씀과 성령의 인도함으로 걸어갈 때 

생명의 역사가 더욱 크게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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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성령 받아 새 역사의 일꾼이 됩시다

말씀 : '내가 매일 기쁘게' 191장(통 427장) 

신앙고백 : 사도신경 

본문 : 사도행전 2장 1~4절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성령이 오심으로써 제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확장해 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요한복음 20장 19∼22절에서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성령 충만을 받으라고 말씀하시고 새 시대의 일꾼이 될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왜 성령 충만을 받아야 새 역사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까요? 

첫째, 성령 충만을 받아야 거룩한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벧전1:16).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거룩하게 살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삶을 사는 자들에게 그의 뜻을 위임하시기 때문입니다. 디모데후서 2장 21절은 깨끗한 그릇이 되어야만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통해서만 우리는 거룩하게 될 수 있습니다. 거룩하신 성령이 우리에게 충만하게 임하시려면 우리가 거룩해야만 합니다. 

둘째, 성령 충만을 받아야 사명과 꿈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미래를 향한 꿈이 어떠냐에 따라 오늘에 영향을 받습니다. 잠언 29장 18절은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고 했습니다. 꿈은 자신의 욕망이나 야망이 아니라 비전을 의미합니다.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는 사도행전 2장 17절 말씀은 사명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루소는 "인간은 두 번 태어난다고 할 수 있는데 살기 위해 태어나고 일하기 위해 다시 태어난다"고 했습니다. 칼 힐터는 "자신의 사명을 찾는 날이 인생 최고의 날"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제자들이 성령 충만을 받고 세계복음화라는 하나님의 뜻을 갖게 된 것을 잘 보여줍니다. 이 환상을 좇아 예수님의 제자들은 새 역사의 주인공이 됐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환상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일꾼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미래는 준비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성령 충만을 받기 위해 우리는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2장 38절은 "회개하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고 강조합니다. 순종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5장 32절은 "순종하는 자에게 주실 성령은 그러하니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제자들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때를 기다리다가 성령 받았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사는 데 우리는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아직 주님이 영광을 받지 아니하신 고로 성령이 계시지 아니하니라"(요 7:39) 성령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지 개인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 성령 충만을 받고 다가오는 새 역사의 큰 일꾼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 회개의 삶을 통해 성령 충만하게 하소서. 성령 충만을 통해 우리의 삶이 거룩하게 하소서. 성령 충만함으로 사명과 꿈을 갖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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