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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도가 멀면 죄가 가깝습니다

 

 


1. 기도가 멀면 죄가 가깝습니다.
   사무엘은 자신의 민족을 위한 기도를 멈추는 것을 죄(삼상 12:23)로 알고
  그 죄를 결단코 범치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기도하지 않는데 사업이 잘되거나, 기도없이 부와 명예를 누리고 있다면
  그것은 분명 하나님의 저주일 것입니다.
  요즘 문제되고 있는 청소년 문제까지도 기도의 가뭄이 그 원인이라해도
  결코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기도의 문을 열었으니 주께서
  우리의 갈급한 영적소원과 기도의 문제들 속에 함께 하실 것입니다.

2. 소리내어 하는 것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부흥회나 기도원 집회시에 은혜를 받았다 하는 간증을 많이 듣습니다.
  그러나 그 은혜 받았다 하는 말속에는 소리내어 하는 이른바 「통성기도」를
  결코 무시할 수 가 없습니다.
  또한 ‘주여 삼창’은 영적 분위기에서의 순종과 화합의 의미가 있고,
  정신을 기도에 쏟는 유일한 방법으로서, 삼위의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호소도
  무시할 수 가 없습니다. 기도는 힘있게 부르짖어야 그 기도가 신선하며,
  그 영이 살고, 믿음의 깨어있는 삶을 갖다 줍니다.

3. 이제 우리의 이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작정해야 합니다.
   하나님께로 말미암아 시작된 것이면 그 끝도 역시 하나님이 책임져 주실 것
  입니다.
  그 마음을 잃지 않도록, 아무도 그 마음을 빼앗지 못하도록 기도합시다.
  할 수가 있습니다.

4. 기도는 성결을 담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일반적으로는 다람쥐 쳇바퀴 돌듯한 생활로 하루하루를 살아
  갑니다.
   그러나 반복된 의미없는 나날속에서도 지루함을 갖지 않게 하고
  생활에 진미를 날마다 맛보며 살아가게 하는 비결은 바로 기도에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같을지라
  도 눈과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사 1:18).
  하시면서 부르시는 음성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 곧 성도들로 하여금 성결한
  삶을 요구하시는 부름으로서 넘어지고 좌절하며 함정에 빠진 추한 모습이 될 때가
  많은 죄인들로 하여금 기도생활을 통하여 깨끗하게 되고, 마치 세탁한 것과 같은
  청결하고 깨끗한 생활로 새롭게 살아가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영혼을 순수하게 하며, 기도는 성도들로 하여금
  세상에서 밝은 빛을 발하고 소금과 같은 역활을 잘 감당하도록 해줍니다.
  기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기보다는 실제로 기도하는데 더 중요한 의의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생명력 넘치는 의욕과 주님안에서 승리하며,
  회개함으로 성결한 삶을 기도로 이끌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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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을 구하는 기도

 

 


주님!
당신의 온전한 사랑으로 내 속에 있는 두려움을 내어쫓으시고,
나를 당신의 충만한 모습으로 만들어 가는 모험을 감행하게 하옵소서.

여러 가지 상처들과 변명으로 비뚤어진 내 모습을 정직하게
받아들이는 용기를 주시고, 두려움 때문에 무력하게
주저앉아 머물러 있지 않게 하옵소서.

나의 장점을 인정하게 하소서.
자기증오나 거짓된 겸손을 거부하고 칭찬을 고맙게 받아들이게 하시며
나의 존재가치나 독특함에 대한 자각과 자신감을 가지게 하옵소서.

나에게 있는 재능과 은사들을 감사함으로 시인하고 가꾸어서
창의적인 기여가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성취를 위한 긴장과 경직이 아니라, 주님을 모심으로
승패에 관계없이 나 자신을 사랑하며 존중할 줄 알게 하옵소서.

나의 약점을 인정하게 하옵소서.
슬픈 일이 있을 때 공공연히 우시던 예수님처럼,
비탄에 빠져 있을 때 울음, 신음, 떨림과 같은
고통을 정직하게 표현할 수 있는 용기를 주옵소서.

자신의 약점을 감추기 위해 타인의 칭찬과
인정에만 의지해서 사는 오류에서 나를 건져 주시고,
나를 방어하거나 증명하기 위해 애쓰거나, 스스로를
학대하는 데 정력을 낭비하지 않게 하옵소서.

이를 통하여 비굴, 무력, 자기비하가 아닌
참된 겸손의 미덕을 배우게 하시고, 연약할수록
더욱 귀히 여기시는 아버지의 품에 안길 수 있게 하옵소서.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내가 주님에 의해서 깊이 인정받고 사랑받고 있음을 신뢰하게 하옵소서.

내가 사랑스럽다는 것과 또 사랑받고 있음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나도 상대방에게 사랑을
잘 표현할 수 있게 해 주옵소서.

주여!
고칠 수 없는 것들은 제가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고칠 수 있는 것들은 고쳐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그리고 고칠 수 있는 것과 고칠 수 없는 것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옵소서.

- (라인홀트 니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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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결혼 예식 순서 (wedding ceremony order christian)

 

 

 

 


결 혼 예 식 순 서

주례 / 0 0 0 목사


축하주악     개식사

신랑입장     0 0 0군 / 박수로 환영

신부입장     0 0 0양 / 박수로 환영 

서로인사     신랑 신부          

혼인찬송     찬송가 287장

 ① 오늘모여 찬송함은 형제자매 즐거움 거룩하신 주 뜻대로

    혼인예식 행하세 신랑신부 이두사람 한 몸 되기 원하며

    온 집안이 하나 되고  한뜻 되게 합소서

 ② 세상에서 사는동안 한길가게 하시고 맘과 뜻이 하나되어

    주 따르게 합소서 서로 믿고 존중하며 서로 돕고 사랑해

    고와 낙을 함께하며  승리하게 합소서


개식기도   

성경봉독     고린도전서 13:4-13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말씀선포    0 0 0목사 (행복한 가정)

 

결혼서약     신랑 신부 / 주례자

 신랑의 서약

    신랑 000군은 지금 옆에 서 있는 000양을 하나님께서 주신 배필로 믿어(잠19:14) 아내로 맞이하여 한 평생 사랑하며(엡5:25) 존중히 여기며 어떠한 환경에서라도 남편으로서의 일정한 부부의 대의와 정조를 굳게 지키며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살기를 서약합니까?

 신부의 서약

    신부 000양은 지금 옆에 서 있는 000군을 하나님   께서 나와 짝지어 주신 남편으로 맞이하여 한 평생 존중   히 여기며 어떠한 환경에서라도 아내로서의 일정한 부부

    의 대의와 정조를 굳게 지키며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살

    기를 서약합니까?


성혼선포     주례자

   신랑 000군과 신부 000양이 하나님과 여러 증인 앞에서 진실한 부부의 도리를 다할 것을 서약하였으므로 이에 부부가 된 것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공포합니다.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아 멘)


축    가     친우

인사말씀     양가대표

축복기도     주례자

축하케잌     신랑 신부

인    사     신랑 신부 양가부모님과 하객들에게

행    진     신랑 신부 (다같이 일어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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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서약 참고

 

결혼식 주례 집례시에 신랑과 신부가 직접 서약서를 읽으면서 결혼 서약을 하게 하고

'사랑의 서약'이라는 제목으로 예쁜 액자에 넣어서 결혼 선물로 주어 집에 걸어놓고

항상 볼 수 있도록 하면 좋은 결혼 선물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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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랑의 서약

 

나 OOO는

이 아름다운 날에 그대 OOO양을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아내로 맞이하며

함께 살아가는 동안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그대가 건강할 때나 병들었을 때나,

오늘과 동일한 사랑으로

이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사랑하며,

한 가정의 가장으로써

하나님이 맡기신 책임을 다하고,

성경이 가르치는

남편된 본분을 다할 것을

하나님과 여러 증인들 앞에서

엄숙히 서약합니다.

 
2018년 O월 OO일 신랑 O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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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의 서약

나 OOO은

이 아름다운 날에 그대 OOO군을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남편으로 맞이하며

함께 살아가는 동안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그대가 건강할 때나 병들었을 때나,

오늘과 동일한 사랑으로

이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사랑하며,

그대를 돕는 배필로

슬기롭고 현숙한 아내가 되겠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정하신

아내의 본분을 다할 것을

하나님과 여러 증인들 앞에서

엄숙히 서약합니다.

 
2018년 O월 OO일 신부 O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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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결혼식 설교 (Wedding preaching)

 

 


성경봉독     고린도전서 13:4-13   행복한 가정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13:13)

 

서론

1. 먼저 이렇게 혼인 예배를 들릴 수 있게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무엇보다도 귀한 가정 대사에 제가 주례를 맞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축하드립니다.

 그간 이 결혼 예식이 있기 까지 여러 모양으로 도와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특별히 양가의 부모님의 사랑의 수고에 감사와 찬앙을 드립니다.

2. 특별히 여기 신분00는 00 선생님과 00 여사님의 삼녀로써 어릴 때부터 정숙함으로 일등 신부감으로 잘 키워주셨습니다.  넘 예쁘고 축복이 됩니다. 자랑스럽습니다.

3. 또한 여기 신랑 000 군은 000 선생님과 000 여사님의 차남으로써 최고의 엄하면서 합리적인 사람으로 키위주시고 더구나 어릴 때부터 신앙으로 자라난 참신한 일등 신랑감입니다. 


4. 이런 가문과 가정에서 제가 더 할말이 없지만 자리가 자리인 만큼 오늘 하나님의 말씀으로 행복한 가정이 되는 비결 몇 말씀드리고져 합니다.

 

 

 

 

첫째, 하나님을 잘 믿는 가정이 행복한 가정입니다.


  오늘 성경 고린도전서에는  바울이라는 하나님의 사람이 다메셋이라는 곳에서 예수님을 만나서 변화 받고 자신이 기도가운데 개척한 고린도 교회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 곳에 담긴 메시지는 사랑이라는 제목이면서 하나님을 잘 섬기는 가정이 되어야 한다는 원리가 있습니다

   두 분은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을 잘 섬기는 가정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잘 섬긴다는 것은 먼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믿는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두분은 그런 신앙을 고백한 그리스도인 입니다. 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잘드리는 것입니다. 또한 매일 하나님께 기도하는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세우신 몸된 교회를 잘 섬기는 것입니다. 요즘 결혼을 하고 2,3년지난면 몇 번의 고비가 있습니다. 그때 신앙 곧 하나님을 섬기는 가정은 해결책이 있습니다. 문제의 정답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없는 가정은 수숩이 어럽습니다.

더불어 위로 하나님을 믿는 것 처럼 서로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믿음이 깨지면 모든 것이 깨집니다. 저사람이 콩으로 메주를 쑷대도 나는 믿는다는 확신을 가질때 좀 늦어도 바쁜가보다 하지... 믿음이 없으면 별 생각을 다하는 것입니다. 두분은 이런 행복한 가정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립니다.


둘째는, 소망이 있는 가정이  행복한 가정입니다.


  사도 바울과 고린도 성도들에게 좀 힘들일이 어려운 일이 있었지만 희망 소망 을 가질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두분이 과거 지향적인 사람이 아니라 미래지향적인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좀 어려워도 내일의 희망있고 비젼을 있다는 것을 바라보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자녀에 대한 소망 사업에 대한 비젼 헌신에 대한 포부를 가지시고 위를 바라보는 두분이 될 때 행복의 파랑새는 이집에 계속 머물을 것입니다.

그리고  결혼은 하면 관계가 더 넓어 집니다. 이제는 혼자가 아닙니다. 결혼 전에는 혼자의 관계가 이제는 두 셋 넷으로 복잡해 집니다.  특별히 양가의 부모님를 잘 섬기는 부부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행복입니다.  낳으신 수고 기르신 수고 아무것도 입지 않았을 때 수치를 가려주신 분이 부모님입니다. 양가의 부모님의 관계 어르신들과의 관계가 더 좋아 지는 것이 행복입니다.  부모하고 원수가 되고  부모님 않보는 사람 모든 것 다 가졌으나 행복하고는 거리가 멉니다. 그리고 친구 친척 동료 교우 이웃에게 진정한 장미의 향기가 풍기는 두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 사람들에게 본이 되는 가정이  행복한 가정입니다.

 

세번째로,  사랑이 있는 가정이 행복한 가정입니다.

 
  여기 사도바울이 세우신 고린도교회와 성도의 관계에서 최고가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는 누구나 머물고싶고 함께 하고 싶으나 미움이 있는 곳에는 다 피라고 싶어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관계가 부부관계입니다. 그 속에 결혼은 정신적 육체적 경제적으로 부모를 떠나는 독립선언입니다. 그런 뜻에는 의무가 있는가 하면 책임도 있습니다. 이제는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마음도 하나 몸도 하나 주머니도 하나 집도하나 침대도 하나입니다.

 그 하나됨을 이루어 가는 진한 에너지가 있는데  바로 사랑입니다. ‘남편은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함 같이하라입니다. 먼저 사랑하는 남편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와 허물을 덮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이해 합니다. 또 신부는 사랑만 받는 관계가 아니라 복종하라 했습니다.  여기서 복종은 내 의견이 다르드리도 따르는 것입니다. 순종은 내 의견이 같을 때 따르는 것이라면 복종은 내 의견이 다르드라고 하나님이 세우신 남편이기에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아내를 사랑하는 말씀은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심 같이 입니다. 자기 생명까지 내어 주신 피의 사랑입니다. 아내를 위해서 목이라도 내어 놓는 아가폐적 사랑입니다. 이유가 어떠하든  논리적으로 맞던 틀리던 무조건 두분이 이런 복종과 사랑의 모습으로 살아갈 때 행복합니다. 여자를 힘으로 지배하라고 하지 말고 사랑으로 하고.. 남자를 말로 이기려고 하지말고 순복으로 이기는 아름다운 모습들이 되어서 행복이 뚝뚝 떨어지는 가정이루시기를 바랍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사랑이니라  아멘


끝으로, 행복한 가정을 이르는데 저와 오신 여러분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저는 주례를 맡아 달라고 찾아오는 젊이들에게 반드시 두 가지 질문에 답을 하면 약속을 합니다. 하나는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영접한 사실이 분명하지를 묻습니다. 아니면 믿게 하고 예수를 않믿는다고하면 노합니다.  또 하나는 절대로 어떤 일이 있어도 죽음이외엔 갈라서는 일이 없다고 약속한다고 하면 주례를 응답합니다.
 

  제와 여기 계신분들이 바로 지금까지 이 두사람 곁에서 여러모양으로 함께 하셨던 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는 결혼했기에 끝이 아니라 더욱 관심을 가지고 기도해 주시고 응원해 주시고 책망해 주시기고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증인석에 앉아 계셨던 분들이기에 어떤 일이 있어도 행복한 가정을 꾸미는 대 일조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특별히 신분의 가정에서 딸을 보낸다고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좋은 사위 아들 하나 얻었다고 생각하시고 신랑의 가정에서는 새 사람이 들어 왔으니 어떻게 하나 보자하고 감시 카메라 달라 놓치 말고 내 딸이라고 이제는 내 식구다 생각하시고 예쁘게 봐주시기를 바랍니다.

 모두 이 두 사람의  행복한 가정이루고 살기 바라는 마음으로 다같이 힘찬 응원에 박수를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김홍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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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예배]기억에 남는 결혼식 준비

 

 

기억에 남는 주례를 위한 아이디어 10가지

 

1.혼인서약문을 신랑 신부가 직접 작성하도록 해보십시오.

대부분의 기혼자들은 혼인서약의 내용을 잊고 살게 마련입니다. 고작 “아멘”이나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정도의 대답을 기억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이미 정해진 혼인서약문을 주례자가 낭독하고

서약의 주인공인 신랑 신부는 그저 대답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현상을 막기 위해 신랑과 신부가 스스로 혼인서약문을 작성하고 주례자가 미리 그 문구를 수정해주는 방법을 사용해보십시오.

서약의 내용을 만드는 일 자체가 신랑 신부에게 소중한 공부가 될 것이고 서약의 내용에 본인들 스스로의 의지가 강하게 담겨있을 것입니다.
물론 주례를 맡은 목회자가 그 내용에 대해 충분히 검토하고 세밀하게 조언을 해주어야만 내용이 충실한 서약문이 만들어질 것입니다.

가능하면 결혼식장에서 이 서약문에 신랑과 신부가 직접 서명하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2.주례설교 원고를 신랑 신부에게 나눠주십시오.

일생에 한번 뿐인 결혼식을 위해 단 위에 서 있는 신랑과 신부는 대체로 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진땀만 흘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 하객들 앞에서 잔뜩 긴장한 탓도 있겠지만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라는 압박감에서 오는 부담감도 클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주례자가 아무리 좋은 권면을 한들 그 내용이 머리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기를 바라는 건 분명 지나친 기대일 것입니다.
차라리 신랑 신부가 신혼여행지에서 안정감을 되찾고 결혼에 관한 생각을 되짚어 보며 다시 한번 읽어볼 수 있도록 원고를 선물해 보십시오.

실제로 이렇게 하는 목사님들이 몇 분 계십니다.
어떤 목사님은 또 결혼주례가 담긴 비디오 테잎을 신랑 신부에게 선물하기도 합니다.

시간 날 때마다 부부가 함께 틀어보며 결혼의 의미를 되새겨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영락교회의 한 장로님은 45년전에 받은 주례설교를 녹음해 해마다 결혼기념일맞아 듣고 있다고 합니다.
어쩌면 이러한 노력이 단 한번으로 그치지 않고 지속적으로 신랑 신부의 결혼생활을 도와줄 수 있을 것입니다.


3.신랑 신부에게 제대로 된 결혼준비를 시키십시오.

하다못해 차를 운전을 하는데도 면허증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그런 마당에 사람의 일생에서 가장 소중한 순간인 결혼을 하는데는 1시간도 안되는 결혼식을 치르는 것으로 얼버무리고 마는 것이 고작입니다.
제대로 된 결혼준비란 단순히 혼수품을 저렴하게 마련하거나 신혼여행을 의미있게 보내는 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혼생활을 통해 부부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며 포기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꼼꼼하게 따져보아야 합니다.

행여나 부부싸움을 하게 되면 어떤 요령이 있는지, 가사분담든 어떻게 하고, 가정경제는 누가 어떻게 담당할건지,

자녀에 대한 계획은 어떠한지, 부부간의 신앙성장을 위해서는 어떻게 노력해야 할지 등등.
숱한 실제적인 문제들을 서로 솔직하게 대화하고 해결할 수 있는 훈련을 시켜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혼수감입니다.
주례에 앞서 신랑과 신부를 만나 이러한 실제적인 가르침을 들려주십시오.

보다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도움이 필요한 경우에는 기독교가정사역연구소를 비롯한 전문연구기관에서

실시하는 결혼예비학교에 참가하도록 권유해 보십시오.
결혼예비학교를 거친 커플과 그렇지 않은 커플 사이엔 삶의 질에 있어서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점을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4.실제적인 가르침을 주십시오.

한 목사님은 주례설교에서 다음과 같은 권면을 하곤 합니다.
“남편되는 신랑에게 권면합니다
- 결혼기념일과 아내의 생일을 잊지 마십시오.
- 나무를 가꾸는 정원사의 심정으로 아내를 대하십시오.
- 모든 일을 아내와 의논하고 결정하는 습관을 기르십시오.
- 진정한 행복은 사랑의 대화입니다. 많은 대화를 나누십시오.
- 마음에 상처를 주는 농담이나 가족의 이야기를 삼가십시오.
- 남편의 매력은 너그러움입니다. 한 걸음 양보하십시오.
- 가정의 경제를 아내에게 일임하여 보람을 갖고 살림에 임하도록 하십시오.

또 아내되는 신부에게 권면합니다.
- 아름다움과 재치와 근면성이 있는 현숙한 아내가 될 것을 꿈꾸십시오.
- 음식을 정성껏 준비하여 식탁을 친교와 화목의 장으로 가꾸십시오.
- 웃으며 남편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결코 혼자 중얼거리는 일을 하지 마십시오.
- 남편에게 혼자만 지낼 수 있는 정신적인 휴식시간을 주십시오.
- 중요한 일은 꼭 남편의 결정을 따르십시오.
- 남편의 수입에 맞추어 규모있는 살림을 꾸리십시오.
- 가정을 하나님의 성전으로 만들어 하나님의 축복이 머물도록 하십시오.“
왜 그렇게 사소한 일까지 시시콜콜하게 잔소리를 하느냐는 분들도 있겠지만

실제로 젊은이들이 결혼주레에서 바라는 것은 생활에서 실천할 수 있는 실제적인 가르침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5.신랑 신부의 기억에 남는 결혼예식을 고안하십시오.

주례설교 중간에 신랑 신부가 부모님께 드리는 감사의 편지를 낭독하는 시간을 마련해 보십시오.

미리 신랑 신부에게 감사의 편지를 써오도록 주문하면 됩니다.

편지를 낭독한 후엔 새가정을 이루는 신혼부부와 이들을 떠나보내는 부모님들을 위해 주례자가 기도해 주십시오.

 당사자들은 물론 생각없이 들린 하객들까지도 감동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또 특별한 선물도 생각해 보십시오. 한 목사님은 주례를 설 때마다 신랑 신부에게 커다란 양초를 하나씩 선물한다고 합니다.

부부가 오붓하게 마주앉아 대화할 때마다 그 양초를 키도록 하고 양초가 다 달았을 즈음엔 다시 한번 주례자를 찾아와

그동안 지내온 시간들에 대해 들려달라는 것입니다. 점차 사라져가는 부부간의 대화를 회복하고 부부간의 친밀감을 높일 수 있는

기발한 아이디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외에도 신랑 신부가 부부 십계명을 스스로 만들어 서로에게 약속하도록 하고

그 내용을 결혼예식 순서지나 청첩장에 소개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수 있습니다.


 

 

6.주례자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주십시오.

한 목사님은 딱딱한 권면보다는 자신의 결혼생활에 얽힌 경험담들을 진솔하게 들려주는 것으로 주례를 대신하곤 합니다.
결혼생활에서 가장 즐거웠던 기억이나 감동적인 순간도 이야기 하지만 그것보다는 가장 위험하고 위태로웠던 경험을 들려주는데

주안점을 두는 겁니다. 심지어 목회자임에도 불구하고 이혼을 생각하고 홀로 눈물을 곱씹던 아픔들까지 고스란히 들려주는 겁니다.
과거의 경험을 있는 그대로 쏟아놓는 모습을 보면 사회적으로 덕망도 있고 성공한 목회자로서 존경을 받아온

그 목사님이 정말 그러한 아픔을 겪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갖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뜻밖에도 이러한 주례는 강력한 힘을 갖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흡인력으로 결혼예식에 참가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그 영혼을 뿌리부터 뒤흔들어 놓습니다. 또 부디 결혼에 대한 환상이나 쓸데없는 자존심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서약한 결혼을

경솔하게 여기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도록 권면하는 힘도 갖고 있습니다.
보편적인 도덕률보다는 차라리 솔직한 경험담이 감동적이게 마련입니다.


7.참석자들을 고려하십시오.

결혼식의 주인공은 신랑 신부 두 사람만이 아닙니다. 신랑 신부의 부모님을 비롯해 그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람이 주체입니다. 그

런 점에서 주례자는 결혼식 하객들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해야만 기억에 남는 주례사를 남길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객들 가운데는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불교 신자이지만 어쩔 수 없이 평소의 친분 때문에 교회에서의

결혼식에 참가한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불신자를 전도하기 위해 한번 총동원주일 행사를 마련하려면 숱한 노력과 비용이 소모되지만

결혼식에는 제 발로 찾아온 전도대상자들이 수두룩하게 마련입니다.
같은 메시지를 전할 때도 보다 보편적인 언어와 표현법을 사용하십시오.

일평생에 처음 교회에 나온 사람들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단어를 사용해 차근차근 기독교의 사랑에 관해 설명한다면

신랑 신부뿐만 아니라 하객들 모두를 변화시킬 수 있는 주례를 남길 수 있을 것입니다.


8.과감하게 특별한 순서를 도입해 보십시오.

미국에서는 결혼식에서 당사자들만이 서약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까지 서약을 하는 이색적인 사례가 있습니다.

 이름하여 ‘부모서약’이라는 것입니다.
내용은 대강 이렇습니다.
“오늘 자녀들을 결혼시키는 우리 부부 두 사람은 늘 사랑과 기도로 신랑 신부를 후원하고 서로를 섬기는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자녀들에게 가정생활의 참된 모범이 되기 위해 노력할 것을 하나님과 여러 친지들 앞에서 서약합니다.

또 한번 떠나보낸 자녀들을 우리의 뜻대로 먼 거리에서 조정하거나 강요하지 않고 자녀들이 하나님 안에서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도록 힘써 기도하는 후견인이 될 것을 다짐합니다”
또 자녀 가운데 한 사람이 부모님께 드리는 감사편지를 낭독하고 부모 가운데 한 사람이 이에 대한 답례로

몇가지 권면을 들려주는 편지를 낭독하도록 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아울러 하객들이 신랑 신부에게 들려주고 싶은 축복의 말들을 써넣을 수 있는 사인 보드(sign board)를 마련해 두었다가

신혼부부에게 선물할 수도 있습니다.


9.신랑 신부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보여주십시오.

결혼식에 참석한 하객 가운데는 신랑 신부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찾아온 사람들도 많을 것입니다.

부모님과 친분이 있는 사람들이나 이웃들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더구나 신랑측 하객들은 신부에 대해 아는 부분이

거의 없을 것이고 신부측 하객들도 신랑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신랑 신부에 대해 아는 것이 적으면 적을수록 그 결혼식장의 분위기는 반대로 산만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나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사람이라는 의식이 희미해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 주례자는 신랑 신부에 대해 보다 자세하게 설명해줄 필요가 있습니다. 결혼 당사자들의 출생이나

어린 시절에 얽힌 에피소드, 신랑 신부의 버릇이나 특징 등을 소개해보십시오. 또 신랑 신부의 경력이나 앞으로의 소망에

관해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하객들의 관심을 끌어낼 수 있습니다. 이외에도 신랑 신부의 장점과 단점,

취미나 공통점, 별명이나 신앙생활 경력 등을 들려주셔도 됩니다.
이를 통해 목회자가 예비 부부에게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드러낼 수도 있고 보다 친밀한 피드백을 주고 받으면서

결혼식을 인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하기 위해선 결혼식 전에 신랑과 신부를 만나 부담없이 대화를 나눠보아야만 합니다.


10.결혼주례의 ‘아프터 서비스’를 시도해 보십시오.

대부분의 주례가 결혼식장에서 단 한번의 행사로 끝나 버립니다.

그러나 보다 의미있는 주례는 결혼식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신랑과 신부를 돌보는 것으로 시작될 수 있습니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신랑 신부를 만나 보십시오. 그동안 귀로 듣고 속으로 예상했던 것과 신혼부부들이 실제 결혼생활에서

겪는 느낌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경우엔 예상하지 못한 갈등요소를 발견할 수도 있고 배우자에게서 너무나 다른 모습을

보고 충격에 휩싸인 커플도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잠시라도 함께 생활해 본 신혼부부들을 다시 한번 대화를 나누며 그들이 새롭게 직면한 문제들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해 주십시오.

가능하면 집으로 직접 초청해 선배의 입장에서 신혼부부들에게 필요한 실제적인 가르침을 들려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결혼주례의 ‘아프터 서비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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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예배 대표기도

 


만유의 근원이신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지혜로우심과 의로우심과 거룩하심을 이 시간에 찬양과 경배를 드립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시며 우리의 인도자이시며 우리를 지키시는
보호자이심을 믿습니다 우리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시며
우리의 영혼이 영원을 사모하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하나님과 같이 있음이 저희들의 삶의 기쁨임을 고백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풍요로움 속에 안식과 평강을 바라볼 수 있는 가을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모든 곡식과 열매가 익었고 들의 짐승들도 살이 졌습니다
우리에게도 넉넉한 마음을 주셔서 서로를 생각하게 해 주신 하나님,
저희들을 하나님의 날개 아래로 부르시어 그 동안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하게 하옵시고 허락하신 풍성함을 즐거워하게 하시오니 더욱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이 시간 다시 마음을 모아 하나님 앞에 진실된 모습으로 서기를  </p>
원하옵나이다
한 여름 동안 우리가 입고 있던 가식의 옷을 모두

벗어버릴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특별히 오늘의 예배는 이 민족의 명절인 추석을 맞는 주간에 드리는 예배입니다
시날 평지를 지나 끝없이 동쪽으로 이동하다 거의 4천년 전에 한반도에
정착한 이 민족은 하나님의 말씀을 오랫동안 잊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다시 이 민족을 말씀으로 찾아오시어 오늘의 이 예배로 복을 주십니다
이제 저희들은 우리 앞에 펼쳐지는 이 가을의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의 은혜를
조상을 넘어서 하나님 아버지께 돌리오며 하나님의 이 큰 선물을
기뻐하고 기뻐하면서 즐거워 하옵나이다,

여전히 수만은 국민들이 모든 삶의 은택을 자연과 조상이란
 어리석은 믿음으로 돌렸습니다 자연과 조상이란 거짓된 이름의 탈을 쓰고 영혼을 사냥하는 원수

마귀의 속임수에 빠져있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세상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빛이 그들에게도 역사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현대를 살아가는 저희들은 너무나 어려운 환경과 조건 가운데서 힘든 삶을 살고 있습니다
끝없는 무한 경쟁은 저희들의 육신과 영혼을 고갈시키고 있습니다
사회적인 여건도 복잡해져 많은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하나님 우리와 늘 같이하시고 복을 주시어 우리의 삶이 오늘과 같이
모자람 없는 넉넉한 삶이 되게 축복하여 주시옵고 경제적인 부요함과
동시에 저희들의 사회도 여유와 너 그러움이 있는 사회가 되게 해 주시며
이 나라도 안정적인 정치적 경제적 발전을 계속하여 하나님의 복이
풍성한 나라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이 예배를 통하여 저희들이 다시 참된 기독교인 으로서 의 각오를 새롭게 하고자 합니다
우리의 생명과 삶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며 우리의 가진 부도
하나님의 뜻 안에서 비로소 그 의미가 있음을 인정하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때 하늘 나라와 그 의를 구할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필요를 다 충족시켜 주심을 믿습니다
열심을 내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게 하옵시며 선교에 동참하게 하시고
나보다 가난한 사람들을 돕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의 이 넘쳐 남을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게 하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추석 절기를 맞이하여 고향을 찾아 먼길을 여행하는
많은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함께 동행하여 주시옵소서
사회의 그늘진 곳에서 외롭고 힘들게 이 명절을 보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 위에 형편과 사정에 합당한 하나님의 위로와 평강이 임하시기를 간구 하옵나이다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주님이 맡겨주신 성도들을
말씀으로 인도하는 목회자들을 기억하여 주옵소서!

성도들에게 좋은 영의 양식을 공급할 수 있도록
믿음과 하늘의 능력을 내려주옵소서!
영육간의 강건함을 주시며 성령 충만함을 허락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이악한 세대에 양떼들을 풍성히 먹일 수 있도록
지혜와 지식과 능력과 권세를 주시옵소서! 

이 시간 드리는 예배의 시종을 주님께 의탁 하오며 말씀들고 단위에 서신
목사님께 주님께서특별히 은총 내려 주시옵소서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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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 축제 대표기도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지난 주간에도 세상 속, 삶의 자리에서

은혜 가운데 보내게 하셨다가, 주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속량해 주셨지만, 우리의 믿음은 습관적이 되어가고,

하나님보다도 사람의 시선을 더 의식하는 외식적인 삶을 살아가면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말씀을 듣고 성전을 떠나 세상으로 나갈 때에는 말씀대로 살겠다는

결심과 각오를 가지고 세상으로 향하였지만, 작은 유혹에도 쉽게 흔들리고,

성도로서의 구별된 삶을 살지 못한 적도 많았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주님!

다시는 흔들리지 않도록 강한 팔로 우리를 붙들어 주시기를 원합니다.

 

회개하는 마음과 갈급한 심령으로 주님 앞에 나왔사오니,

예배드리기에 합당한 마음을 주셔서,

주님에게만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 주옵소서.

 

마음의 번잡함을 내려놓고, 귀를 열어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시고,

생명의 말씀으로 우리의 빈 마음을 채워 주시옵소서.

주님의 긍휼함과 인자함으로 우리의 심령을 새롭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견고한 피난처가 되어주시는 주님!

계속된 불황으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정과  

여러 가지 문제와 염려로 고통 받고 있는 이웃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이 시간 말씀 속에서, 그들의 상한 심령이 치유 받게 하시고,

위로와 소망을 갖게 하옵소서.

 

주님과의 만남 속에서, 탄식과 눈물의 기도가 멈추게 하시고,

감사와 찬양이 넘쳐나는 삶으로 변화시켜 주시기를 소원합니다.

 

우리 앞에 닥치는 수많은 역경과 고난이, 믿음의 연단이 되어서,

정금같이 거듭남으로, 우리 모두가 주님에게 귀하게

쓰임 받는 성도들 되게 하시옵소서.

 

오늘은 ‘새 생명축제 주일’로 ‘새 생명의 탄생’을 다 함께 축하하는

참으로 복되고 좋은 날입니다. ‘너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파하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전도 대상자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여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부모와 형제자매, 친척, 친지 그리고 이웃을 마음에 품고

주님께 올려드린 기도와 수고함이, 오늘 이 즐거운 날에,

풍성하게 열매 맺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님!

이 자리에 처음 나온 ‘새 가족’ 모두의 마음 문을 활짝 열어 주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할 수 있도록 큰 은혜를 내려 주옵소서. 

 

그리하여, 하늘 아버지와 우리 모두가 기뻐하는

‘새 생명축제’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단 위에서 말씀을 증거 하시는 담임 목사님에게

영육 간에 강건함과 성령 충만함을 주시옵소서.

 

말씀을 받는 우리에게는 기쁨과 감사가 넘쳐나는 복된 시간,

은혜의 시간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른 아침부터 정성껏 준비하여 하나님께 찬양을 올려드리는

찬양단의 헌신을 기쁘게 받으시고,

 

단원 모두에게 범사가 잘 되는 복을 내려 주시옵소서.

예배를 위하여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여러 모양으로 수고하고 헌신하는 모든 지체들에게도

동일한 은혜를 내려 주시길 원하오며,

모든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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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의 삶 ]사람이 거듭난 결과는 무엇인가?

 

 

어쩌면 독자의 마음속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이 떠오를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자의 삶 속에서 무엇으로 이 거듭남의 여부를 알 수 있는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일곱 가지 정도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거듭남은 새로운 생명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 새로운 생명을 가리켜 우리는 "영생"이라고 부릅니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이 영생을 얻기까지는 아무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할 수 없다고 말씀드리는 것으로 충분할 것 같습니다. 영생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고 있으며,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써, 영생이라는 선물이 따라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안에(in Him)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는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 증거는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요일 5:11-12).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 속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만이 자신이 영생을 가지고 있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생명을 소유할 때만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갈 수가 있습니다(벧후 3:18). 영적인 생명이 없이는 성장이 있을 수 없고, 그리스도가 없이는 영적인 삶도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2. 거듭남은 새로운 본성, 곧 신의 성품을 받은 결과이다.

(1) 새로운 본성의 사실
성령께서는 영생을 소유한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하여, 인격적으로 각 신자 개인적으로 내주하실 뿐 아니라, 이전에는 결코 소유할 수 없었던 새로운 본성을 또한 주심으로써,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신의 성품의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벧후 1:4). 이렇듯 성령님과 새로운 성품은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또한 서로 전혀 다릅니다. 이 새로운 본성에 능력을 덧입히시는 분은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의 성품을 소유함으로써, 신자는 이제 하나님께 속한 영적인 실제를 이해하고, 맛보며, 또한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신자는 기도하고, 찬양하고, 또한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자 하는 욕구를 자연스럽게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신자에게서 "육"이라고 부르는 옛 본성 혹은 천연적인 생명을 제거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신자가 이 땅에서 사는 동안은 결코 그것을 뿌리 뽑지 않으십니다. 성경이 분명히 가르치는 바는 거듭난 사람은 누구나 다 그 속에 두 가지 독특하고, 서로 대립되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여전히 하나님을 대적하는 "육"이라고 불리는 옛 본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 육은 개선되거나, 또는 개선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선을 행하는 일에 무능력합니다. 신자는 영생을 소유함으로써, 이제 "영"으로 불리는 새로운 본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늘 하나님 편에 서며, 악을 행하는데 무능력합니다.

(2) 두 본성, 곧 육과 영의 충돌과 대립
이러한 두 본성의 소유로 인해 피할 수 없는 싸움이 신자 속에 있게 됩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7). 육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며, 하나님께 속한 일에 대한 욕구나 마음이 없습니다. 만일 조금이라도 기회가 주어지게 되면, 신자의 삶 속에서 이기적인 마음과 시기와 게으름과 세상적인 마음과 못된 성질과 악한 생각과 나쁘게 말하는 버릇과 깨끗지 못한 삶과 그밖에 "육체의 일"이 그 특징을 이루는 온갖 더러운 일들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됩니다(갈 5:19-21). 한편 새로운 본성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와 그리스도께 대한 헌신과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과 주를 위한 봉사와 그리스도를 전파함과 찬양과 예배와 선한 행위 등을 추구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갈 5:22-23).

이러한 두 가지 본성과 서로 다른 욕구에 대한 사실이 닭장에 오리와 암탉의 알을 서로 섞어서 부화시키는 과정을 통해 설명할 수 있습니다. 병아리들은 어미 닭 가까이 있고자 하지만, 새끼 오리들은 어미 닭이 큰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도, 떨어져서 가까운 개울에서 자기들끼리 노는 기회로 삼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어미 닭 편에서는 자기 새끼들이 이러한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본성이 무엇인지에 대해 잘 설명해주는 하나의 사례입니다. 오리는 본성적으로 물을 좋아하며, 따라서 그 본성적으로 좋아하는 것을 떠나도록 강요하는 암탉의 모든 소리에 대해 전적으로 반응하지 못합니다. 자신들이 거듭났음에도 이와 유사한 곤경에 빠지는 경험을 하게 된 어린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자신이 두 가지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거듭났기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육신 문제로 어려움을 당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아, 여전히 악이 함께 있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바로 그 동일한 것을 발견하게 되었고, 자신의 경험을 로마서 7장 15-25절에 기록했던 것입니다.

 

 

(3) 육신의 지배로부터 건지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
거듭난 사람은 이처럼 두 가지 본성을 소유하고 있으며, 이 둘이 서로 대적하고 있다는 사실을 살펴보았으므로,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이 세상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길 수 있습니다. 몇 가지를 살펴보면서, 이에 대해 가능한 간결하게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a) 우선 첫 번째로, 신자는 이렇듯 존재하고 있는 상황에 정직하게 직면해야 합니다. 이에 대해 눈을 감아 버리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반드시 하나님이 이 모든 일에 대해 말씀하신 바를 알아야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영적인 사실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영적인 어둠 가운데서 방황하면서 혼돈 가운데 빠져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자신의 구원까지 의심하게 되는데, 이는 전적으로 불가능한 일인 육신을 개선시키고, 또한 훈련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노력하지만 늘 실패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오리를 훈련시켜서 본성적으로 좋아하는 물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하려고 하는 일과 같습니다.

다시 한번 우리에게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이 두 본성은 서로 섞일 수 없으며, 서로 혼합되는 일 없이 별개로 영원히 남아 있습니다. 육은 오직 악 외에 아무 것도 낼 수 없습니다. 영은 오직 선 외에는 아무 것도 낼 수 없습니다. 육은 그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그 성격이 개선되거나, 하나님의 뜻을 기뻐하도록 훈련되지도 않습니다. 육은 부패하여 고칠 수 없으며, 계속해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b) 두 번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육신에게서 조금의 선도 기대하지 않으시며, 전적으로 정죄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죄(sin)"와 "죄들(sins)"의 차이점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 속에 있는 이 악한 원칙, 혹은 본성을 가리켜 "죄"로, 또 그 죄의 열매는 "죄들"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요한일서 1:8-9에서 선명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만일 우리가 죄(sin: 여기서 죄는 우리가 '육'이라고 부르는 죄악된 본성과 동의어로 사용되었음)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그리고 9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sins)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sins)를 사하시며." 하나님은 악한 본성의 열매인 죄들을 값없이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본성의 뿌리에 해당하는 죄는 용서된 것이 아닙니다. 이 악한 본성에 대해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유일한 한 가지 일이 있다면, 그것은 곧 정죄하시는 일입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는 어떤 사람이 시기하며 질투하기를 잘하는 기질로 인해 악한 말로 우리를 비방하고 욕하는 것은 용서하고, 또 용서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것을 일으킨 질투나 시기는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질투와 시기는 그러한 열매에 해당되는 죄악된 말을 내뱉도록 한 죄의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악한 뿌리에 대해서 다만 정죄할 수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로마서 8장 3절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보게 됩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죄)하사(죄에 대한 희생 제사를 통해서)."

이것을 간단하게 말씀드리자면,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행한 것들(우리 죄들)을 위해서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우리의 죄악된 성품)을 위해서도 죽으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범한 죄들을 없애 주셨을 뿐 아니라, 우리가 타락해 있던 상태, 또는 타락한 인류로서 연관된 우리 자신을 없애기 위해서도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 거룩한 대속주의 죽으심을 우리 자신의 죽음으로 보시고,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보실 때, 대속주 되신 예수님 안에서 모두 죽은 자로 여기십니다. 과거에 육신과 관계되었던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십자가에서 끝난 존재들입니다. 육신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미 정죄되었습니다.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롬 6:6). 하나님은 이제 그리스도인들을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장사지낸 바 되었으며, 다시 살아난 자로 여기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새 생명으로 연결된 자들로 보십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부르는 것입니다(고후 5:17).

(c) 세 번째, 신자는 하나님이 보시고 여기시는 대로,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기는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신자는 하나님이 십자가의 역사로 전적으로 무익하고, 개선의 여지가 없었던 "육신에 죄를 정죄하신" 사실을 보아야 합니다. 신자는 이제 하나님 편에 서서, 함께 육신을 정죄하며, 육신에게서 조금의 선도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신자는 하나님이 보시고 여기시는 대로 따르며, 하나님의 말씀의 권면을 좇아야 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롬 6:11).

이것은 느낌의 문제가 아니라, 실제적인 사실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참된 것이지만, 경험적으로 느낄 수는 없습니다. 신자는 하나님이 그에 대해 말씀하신 것을 사실로 단순히 받아들이고, 죄에 대하여는 자신을 죽은 자로 여겨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대하여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주로 말미암아 산 자로 여겨야 합니다. 

신자 속에 있는 육이 발동하거나 외부로부터 어떤 유혹에 반응하게 될 때, 하나님의 자녀는 우리에 대해 하나님이 보시고 여기시는 이 사실을 지속적으로 확인하고 주장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자는 어떤 죄나, 혹은 생각이나 말이나 행위에 대해서 "나는 나의 대속주 되신 주님 안에서 이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기노라", 또는 "이 악한 마음의 갈망은 육에 속한 것이고, 이 육은 이미 정죄되었고, 또한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이미 하나님 앞에서 끝장이 났다. 하나님은 나를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로 여기신다. 그러므로 나도 이 악한 정욕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기노라"고 주장해야 합니다. 이러한 태도가 계속해서 끊임없이 유지되는 한, 신자 속에 거하시는 성령님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다스리시기 위하여 새로운 본성에 능력을 더해 주심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 속에 내주하셔서 능력을 주시고,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성령님은 우리의 잘못된 행위로 인해서 근심하시며, 우리가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알고도 불순종하게 될 때, 소멸될 수도 있고, 우리의 불신앙으로 인해 성령님의 역사가 제한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엡 4:30, 살전 5:19, 시 78:41). 이 일은 결국 신자가 그리스도와의 교통을 상실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이러한 교통을 상실케 하고, 성령님을 근심케 한 죄가 정직하게 자백이 되고, 그 죄로부터 돌아서기까지는 이러한 교통은 회복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신자는 "가능한 하나님과 친밀히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일단 자신이 죄를 범했다는 것을 깨달았으면, 즉각 회복을 위해 기도하며 마음의 변화를 받도록 해야 하며, 그러할 때, 하나님과의 교통이 유지되는 것입니다. 내주하시는 성령님이 근심하시며, 소멸되거나, 또는 제한 받으신다는 사실이 물론 신자의 영원한 안전에는 조금도 영향을 미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이 신자를 "구속의 날까지" 인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신자가 연합하는 일이 있고, 또 이 연합을 유지하는 일이 있으며, 이러한 하나님과의 연합의 기쁨을 가리켜 "교통(communion)"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d) 네 번째로, 하나님의 자녀는 육신 안에 그 무엇도 확신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결연히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빌 3:3) 성경적인 하나님과의 사귐 가운데 자신의 위치를 지켜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육에 대해 판단하신 것이 또한 자신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육은 다양한 모습으로 변장하고 나타나는 성질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엡 4:22). 나쁘고 못된 성질이 "의로운 분노"라고 하는 그럴듯한 명분의 옷을 입을 수 있습니다. 남의 흠을 잡는 못된 버릇도 "솔직하고 정직한" 때문이라는 그럴듯한 구실을 댈 수가 있습니다. 육신은 참으로 우리의 가장 거룩한 순간에도 침투해 들어오곤 합니다. 따라서 신자는 지속적으로 이에 대한 대비를 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이 부패한 본성의 유혹의 욕심에 이끌려 잘못된 길로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경각심을 갖고, 은연중에 자신을 너무 확신하는데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e) 다섯 번째로, 신자는 그 악한 정욕을 만족시키는 일에 대해 조금이라도 개입하거나 혹은 그러한 곳에 빠질 수 있는 상황을 허락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합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4). 육신은 반드시 굶주리도록 해야 하며, 억제시키고, 지속적으로 죽음에 위치에 있도록 해야 합니다. 새로운 본성은 반드시 먹이고, 격려해야 하며, 또한 개발해야 합니다. 육신은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달라고 외치며, 또한 먹여달라고 아우성을 칠 것입니다. 육신은 그 유혹의 욕심을 만족시킬 만한 책을 읽기를 원하고, 어떤 장소에 가고 싶어하며, 볼거리를 찾고, 그에 대해 생각하고, 또 행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를 위한 그 어떤 일도 해서는 안됩니다. 어떤 죄악된 생각을 품거나, 문제가 될 만한 습관에 빠지는 것은 단지 육신으로 하여금 우리의 영적인 삶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고,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일에 육체의 정욕에 힘을 실어줄 뿐입니다(벧전 2:11).

예를 들어, 신자가 어떤 류의 책을 읽게 되면 육신의 악한 정욕에 불을 붙이게 되기 때문에, 그 책 읽기를 그만두어야 합니다. 그런데 만일 그 책 읽기를 고집한다면, 결국에는 육신이 활개를 치고 활동할 수 있는 여지를 준 자신을 정죄하는데 빠지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이러한 원칙을 우리가 듣고, 보고, 또한 생각하는 모든 일에 적용해보면, "육신을 만족시키는 일이 없으면, 욕심은 그것으로 끝난다"고 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 분명해질 것입니다.

신자는 육신을 만족시키는 일이 없어야 할 뿐 아니라, 성령님을 위한 일에는 최선을 다해 굳세고 적극적으로 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거듭난 갓난아기는 "순전하고 신령한 (말씀의) 젖을 사모"해야 합니다(벧전 2:2). 이는 이로 말미암아 자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연구함으로써, 새로운 본성은 양식을 얻게 되며, 힘을 얻고, 또한 발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개인 신앙을 고취시키는 찬송과 예배와 기도는 다 신자의 신령한 삶의 큰 부분을 형성하도록 도울 뿐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기는 삶에 크게 기여하게 됩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신성한 본성은 함양이 되고, 그리스도인은 결과적으로 자신의 구주와 주님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게 되는 것입니다(벧후 3:18).

(f) 여섯 번째로, 그리스도인은 결연히 육신을 부인해야 하며, 악한 소욕을 자극할 만한 그 어떤 일도 허락해서는 안되며, 온전히 거절해야 합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 2:11). 하나님은 신자들에게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라고 권면하시며, 또한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라고 말씀하십니다(딛 2:12). 이것은 단순히 우리가 알고 있는 죄로부터 단호히 돌아서도록 또다른 방식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육신의 통제 아래서 살 수도 있다는 것은 참으로 끔찍한 일입니다. 그러한 사람을 성경에서는 "육신에 속한 자" 또는 "신령하지 못한 자"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고전 3:1-4 참조). 때때로 이러한 육신적인 모습이 너무 강할 때, 이러한 육신적인 신자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과 아무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다음과 같은 주님의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 26:41). 평안을 얻기 위해 지불해야 할 값은 지속적으로 경계하고 또 경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신자들은 지속적으로 깨어 경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신자는 자신의 마땅한 권리인 마음을 즐겁게 하고자 하는 모든 생각과 읽고자 하는 책들과 하고자 하는 말과 모든 행위에 대해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면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자기 훈련은 자연스럽게 그 모습을 표현하기를 좋아하는 육신이 좋아할 리 없지만, 풍성한 영적인 삶을 누리고자 한다면 이것은 꼭 필요한 일입니다.

존 웨슬리의 어머니가 그 유명한 아들에게 다음과 같이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는 지혜롭고 경건한 충고를 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합당한 오락인지 그 여부를 판단하고자 할 때, 이러한 원칙을 따라서 판단하도록 해라. 너의 판단력을 흐리게 한다든지, 너의 양심을 무디게 한다든지, 영적인 것에 대한 맛을 잃도록 한다든지, 하나님을 의식하는 감각을 흐리게 한다든지, 또는 네 육체(몸)가 네 마음(정신)을 주장하도록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죄라고 하는 사실을 잊지 말아라." 다니엘은 그가 행한 일로 인해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단 1:8)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일은 자아와 죄와 사탄에 대해 지속적으로 "안돼(No)!"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 정욕이 자기 삶을 주장하지 못하도록 결연히 부인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g) 마지막으로 신자는 자기 몸을 산 제사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몸은 그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이 정하신 도구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난 자들은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말씀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또한 로마서 6장 13절도 보시기 바랍니다.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이것은 단순히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기 몸과 그 몸의 모든 지체를 합당하게 사용해야 한다는 뜻이며, 손과 귀와 눈과 발과 입 등을 지극히 귀하고 귀한 보혈로 자신을 사신 주님의 처분에 완전히 맡겨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하게 되면, 기쁨이 충만하고 하나님과의 생생한 교통이 이루어지고, 거룩한 삶을 살게 되며, 하나님께 유용한 사람으로 사는 삶이 뒤따르게 될 것입니다.

다음 이야기는 지독하게 악한 삶을 살았지만 극적으로 거듭나게 된 어떤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구세군에 들어가서, 그 입고 있는 빨간 스웨터 앞에 "피와 불"이라고 써서 다녔습니다. 그에게 이 단어들은 자기 삶 속에 일어난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내는데 불충분해 보였습니다. 어느 날 그는 길을 가다가 어떤 건물에 걸려있는 간판을 보고는 한 가지 아이디어를 떠올렸습니다. 그래서 자기 아내에게 가서, 이 간판의 문구를 노란색 글자로 크게, 자신이 입고 있는 빨간 스웨터에 수를 놓아 달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 그는 큰 거리로 나갔는데, 그 가슴에는 다음과 같은 글자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새로운 경영진이 경영관리 중." 이것은 거듭난 사람들을 얼마나 잘 표현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는 이제 자기 삶의 주님이 되시고, 성령님은 내주 하심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도록 능력을 주시며, 이를 통해 자기 동료들에게 축복이 되도록 하십니다.

다음과 같은 권면이 우리 모두의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곧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거룩한 희생 제사를 드린 때문이라.
영과 혼과 몸, 모두가 다 주의 것이니
자기 것으로 영광 돌리시려
그 거룩한 보좌를 삼으시리라!

따라서 모든 신자들은 다음과 같이 화답해야 할 줄로 압니다.

나의 것이 아니네, 오 주님,
내 가진 모든 것, 당신의 소유입니다.
내 모든 것 다 주께 드리니
주께서 온전히 다스리시옵소서.
주께서 나를 통하여 역사하심으로
의로운 삶으로,
봉사의 삶으로 기쁨의 삶으로, 또한 자유의 삶으로,
주께서 영광 받으시옵소서.

우리는 여기까지 공부해 오는데 많은 시간을 드렸지만, 신자 속에 두 가지 본성이 있는 것과 또한 위로부터 거듭난 모든 사람을 위해 하나님이 예비하신 죄의 권세와 통치로부터 구출을 받는 방법 등에 대한 성경적인 가르침을 분명히 하는데 꼭 필요한 일이었다고 확신하는 바입니다.

출처 크리스챤투게더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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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 교회성장을 위한 전도 (이슬비 전도 편지)

 

 

 


요즈음 전도하기가 참 어렵다는 것은 교회 목회자들의 입에서 나온 말입니다.
전도는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며 주님이 도우셔야 한다고 합니다.
교회 성도가 열심히 전도할 때 주님이 도와 주시는 것이죠
오늘은 오래 전부터 전도 방법으로 잘 알려진 전도 성공사례를 중심으로
전도학습 세미나를 통해 알아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이슬비 전도편지 사역 세미나 1

성공적인 전도를 하려면

 


질문) 여러분 중에 교회 나오시게 될 때 스스로 처음부터 나오게 되신 분이 몇 분이나 됩니까?

우리는 대부분 누군가의 전도에 의해서 예수님을 믿게 된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전도해본 경험이 얼마나 되십니까?

그리스도인의 기본적인 삶을 4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기도, 말씀, 교제, 전도이다.


기도, 말씀, 교제는 우리가 잘합니다. 이 세 가지는 서로 통하는 데가 있다. 그러나 전도는 전혀 다른 것이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야 한다. 저들과 전혀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통하지 않는 사람에게 전해야 한다.

전도가 중요하고 꼭 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하여서는 인정하면서도 막상 잘 안되는 것이 전도이다. 그래서 전문가들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찍 포기를 한다. 전도는 은사가 아니고 명령이다.

오늘은 전도가 무엇인지, 그리고 지금까지의 전도방법을 분석해보고,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기로 한다.

1) 전도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바로 우리를 전도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전도에 대한 정의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가장 쉬운 표현으로 말한다면 "불신자를 회개시켜 예수 믿게 하는 것"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신자란 "육은 살아 있으나 영혼이 죽은 사람이다" (요일5:12)"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일단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는 전도의 대상은 "불신자"들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끼리끼리 잘 모입니다. 이유는 서로 잘 통하기 때문입니다. 노름하는 사람은 그들끼리 통하는 말이 있습니다. 사업가는 사업가끼리 잘 통합니다. 농사짓는 사람은 농사짓는 사람끼리 잘 통합니다. 생각하는 것이 비슷하고 추구하는 것이 비슷합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들과 잘 통합니다. 말하는 것과 생각하는 것 그리고 추구하는 것이 같습니다.

기도, 말씀, 교제는 모두다 그리스도인들과 잘 통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도 잘 통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이런 일들을 하는데는 너무나 자연스럽습니다. 그리고 이 이런 것은 우리에게 솔직히 재미도 있습니다. 그리고 할수록 은혜를 받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의 기본적인 삶에서 유독 전도만은 독립적인 것입니다.

기도 말씀 교제는 대상자가 하나님이고 성도입니다. 그런데 전도는 대상자가 불신자입니다. 우리와 생각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가치관이 다릅니다. 삶의 목적도 다릅니다. 그러므로 상대를 하면 잘 통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자연히 답답합니다. 그래서 전도하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는 분들 중에도 보면 기도 말씀 교제는 잘하는데 전도는 잘 못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일단 우리가 기억할 것은 우리의 전도 대상자는 불신자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결국 우리가 전도를 잘 하려면 우리는 불신자에 대하여서 잘 알아야 합니다.

2) 우리가 알고 있는 전도의 방법

대부분 전도하면 아는 사람이든지 아니면 모르는 사람에게 접근해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교회로 초청을 하든지 하여 복음을 전했습니다. 대표적인 방법들을 보면, 노방 전도(서울역 지하철역에서 전도하는 모습), 축호 전도(가정집을 찾아가는 전도), 그리고 전도지를 사용한 배포 등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전도지의 내용들을 보면 대부분 죄, 천국, 지옥, 심판, 죽음 등의 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러한 글은 너무나 중요하고 귀한 진리들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너무나 친숙한 단어들입니다. 금방 이해가 되고 알아들을 수 있는 용어들입니다. 그러나 불신자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너무나도 생소한 내용들입니다. 이해되지 않는 단어들로 만들어져 있다는 것이다. 전혀 생소한 말들입니다. 그러니까 자연적으로 관심이 없습니다.

이런 전도지를 받아들면 당연히 거부적이다. 이해가 되지 않는 말들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이해되고 또 중요한 단어들이지만 불신자들에게는 어려운 말들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대부분 우리의 입장에서 전도를 하였다. 즉 전도하는 사람의 수준과 입장에서 불신자에게 접근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신앙 생활 한지가 오래되어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들끼리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말이지만 불신자의 입장에서는 어려운 말들이고 이해되지 않는 말들을 가지고 전도하려고 하였던 것이 지금까지의 전도방법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불신자들의 입장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우리 입장에서 전도를 했다는 것이다.

우리의 입장에서 일방적으로 선포하든지 강요하든지 하여 전달하였다. 전도에 있어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성경은 마10:16절이다. "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우리는 이 말씀을 너무 소홀히 하였다고 생각한다.

딤후4:2의 말씀과 마10:16절의 말씀을 서로 보완하여 "항상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게 전도" 하는 것이 성경적인 전도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3) 전도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

전도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이 어렵다는 것이다. 누구든지 해야 하는 일이지만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란 생각을 먼저 한다. 이것은 특별히 훈련받은 사람이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성경을 많이 알아야 한다는 생각,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이 할 수 있다는 생각, 기도를 잘하는 사람이 할 수 있다는 생각, 말을 잘 하는 사람이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십자가, 천국, 믿음이라는 것이 절대적인 관심사이다. 그러나 불신자들에게는 이것이 너무나 생소한 이야기이며, 저들에게는 무관심의 대상이다. 저들에게 무관심한 이야기를 계속해서 한다는 것은 저들의 관심을 가져오기보다는 거부감을 가져오게 한다. 지금까지의 전도를 통해서는 오히려 거부감을 가져온 것이 더 많다고 생각한다.

4) 성공적인 전도를 하기 위한 전략

전쟁에서 승리를 하기 위해서는 전략이 필수적이다. 우리가 전도를 한다는 것은 영적인 전쟁과 같은 것이다. 사단의 편에 있는 불신자를 하나님의 편으로 만드는 일이다. 사단은 필사적으로 자기의 수하에 있는 불신자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최악의 발악을 할 것인데 우리가 승리하여서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전략으로 공격해야 한다.

이슬비 전도 편지는 바로 이러한 전도 전략 중에 하나이다. 이슬비 전도 편지 전략은 가장 한국적인 전도 방법이라고 확신을 한다. 이것은 확실히 승리를 보장할 수 있는 전략이다. 이슬비 전도 편지 전략의 성경적인 근거는 마13:1-23 에 두고 있다. 성경적인 이슬비 전도편지의 전략을 우리는 옥토화 작전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옥토화 작전이란 : " 모든 전도 대상자의 마음 밭을 먼저 좋은 땅으로 만들고 그 후에 말씀의 씨를 뿌리는 것이다." 마13장에서 말씀의 씨앗이 ? 가지의 땅에 떨어졌는가? 4 가지의 밭이다. 떨어진 씨앗이 결실을 한 땅은 바로 옥토 밭이다. 다른 밭에는 아무리 많이 뿌려도 결실을 하지 못한다. 길가와 같은 마음 밭, 돌밭과 같은 마음 밭, 가시덤불과 같은 마음을 가진 불신자의 마음 밭을 기경 하고 비료를 주고 가꾸어서 말씀의 씨앗이 저들의 마음 밭에 떨어질 때 100배로 결실하게 한다는 작전이다. 옥토 밭을 만들기 위한 작전은 5단계로 시작된다.

제 1단계 작전 - 태신자 잉태하기

태 신자란? "전도자의 마음속에 믿음으로 잉태한 전도대상자"이다. 이렇게 잉태하면 어떻게 됩니까? 나중에 때가 되면 해산을 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한 생명이 탄생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예수님을 믿게 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태신자를 많이 잉태하는 사람이 많은 생명을 해산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나중에 태신자를 잉태하는 방법을 다시 설명 드리겠습니다. 일단은 태신자를 많이 잉태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말씀의 씨앗을 뿌릴 수 있는 밭이 있어야 합니다. 태신자는 바로 이 밭을 말합니다. 문제는 이 밭입니다. 대부분 우리가 잉태한 전도 대상자들의 마음 밭이 옥토가 아니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데로 잘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길가와 같고, 돌밭과 같고, 가시밭과 같습니다. 지금까지 전도는 이 일을 잘 못했습니다. 그래서 뿌리기는 수도 없이 많이 뿌리고 수고는 많이 하였는데 거두어 들이는 열매는 너무 적었습니다.

우리가 복음의 씨앗을 뿌리기 전에 먼저 태신자의 마음 밭을 옥토로 만드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한 다음에 복음의 씨를 뿌리면 쉽게 열매를 거두어 들일 수 가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두 번째 작전입니다.

제 2단계 작전 - 좋은 땅 만들기


우리가 믿음으로 잉태한 태신자들의 마음 밭이 대부분 돌밭, 길가밭, 가시덤불입니다. 좋은 땅을 만나기란 극히 드문 일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밭을 기경 해서 옥토로 만들어야 합니다. 렘4:3의 말씀을 우리는 적용해야 한다. 어떻게 옥토를 만들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길 원합니다. 우리가 농사를 짓기 때문에 밭을 옥토로 만드는 일에 대하여서는 잘 아실 것입니다. 일단은 깊이 갈아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필요 없는 것들을 골라내고 유기질 비료를 주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유기질 비료가 무엇인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가장 좋은 비료가 이슬비 전도편지입니다. 우리가 이슬비 전도 편지를 매주 한 통씩 보내는 것이 바로 유기질 비료입니다. 이슬비 전도편지 속에는 다음과 같은 성분의 비료가 들어있습니다.


① 관심의 비료

돌같이 굳어져 있고 딱딱한 마음 밭을 어떻게 기경 할 수 있겠습니까? 저들의 마음 밭을 부드럽게 만들 수 있겠습니까? 첫 번째는 저들에게 관심을 가져 주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의 특징 중 하나가 고독하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바쁘고 이기적입니다. 그러니 자기와 이해 관계가 없는 사람에게는 도무지 관심을 주지 않습니다.

이렇게 외로운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전도자만의 특권입니다.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관심을 갖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 사람은 마음의 문을 열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관심을 가져주는 방법 중의 하나가 바로 이슬비 전도 편지를 보내는 것입니다. 좋은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고 친필로 ? 자 적어서 마음을 보내면 저들의 마음이 이슬비에 옷이 젖듯이 마음밭이 촉촉하게 젖어 옥토가 될 것입니다.

② 기도의 비료

기도는 하나님과의 영적인 대화요 교제이다. 성도가 간절히 기도하는 내용을 하나님은 듣고 응답해 주십니다. 기도는 마음의 문을 여는 열쇠이다. 앞으로 우리교회에서 이제 이슬비 전도편지 사역을 위한 기도 카드를 만들어서 교회 입구에 놓게 될 것입니다. 대상자를 위해서 교회 들어오며 나가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한 영혼을 얻는 것은 마귀의 손에서 우리가 빼앗아 오는 것이다. 이것은 엄청난 영적인 전쟁입니다. 이것은 죽고 사는 문제입니다. 마귀는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마귀의 손에서 빼앗아 오려면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③ 봉사의 비료

우리는 누구로부터 도움을 받거나 은혜를 입게 되면 잊지 못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의 부탁을 거절하지를 잘 못합니다. 태신자의 마음밭을 옥토로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의 봉사가 필요합니다. 섬김이 있어야 합니다.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봉사가 바로 사랑의 편지를 성실하게 보내는 것입니다. 잉태하고 있는 대상자를 위해서 우리는 무엇인가를 도와 줄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한다.

④ 인내의 비료

우리가 한 영혼을 인도하려고 할 때, 몇 번 하다 안되면 마귀는 빨리 그 일을 그만 두게 하고 포기하도록 유혹합니다. 이슬비 전도 편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인내이다. 어렵지 않는 것에는 빨리 포기하지 않는다. 어렵기 때문에 포기하려고 한다. 갈5:6에서 인내하라고 했다. -인내해야 할 이유를 설명- 인내는 자기 자신에게 필요한 비료이다.

제 3단계 작전 - 씨 뿌리기

지금까지 우리는 너무 성급하게 돌밭에다가 길밭에다가 씨앗을 뿌렸다 그러니 열매를 거두지 못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이슬비 전도 편지의 특징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태신자의 마음을 먼저 옥토로 만든 후에 씨앗을 뿌린다는 것이다. 2단계 좋은 땅 만들기를 계속하는 동안 태신자의 마음이 어느 정도 옥토로 되어있을 때 다음단계에서 이제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것입니다.

① 복음 편지 보내기

옥토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지금까지 이슬비 사랑의 편지나 이슬비 전도편지를 보내었다. 이것은 사실 우리가 복음을 전하기 위한 정지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마음의 문을 열게 하는 하나의 과정이다. 그래서 사랑의 편지나 전도편지를 마치 우유나 스프에 비유한다면 복음 편지는 밥이라고 할 수 있다.

태신자에게 처음에는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고 아름다운 내용의 사랑의 편지나 전도편지를 보내다가 어느 정도 마음의 문이 열렸다는 판단이 설 때 즉 마음 밭이 옥토로 바뀌었다고 생각될 때 복음의 편지를 보내는 것이다. 사실상 사랑의 편지나 전도편지를 1년이고 2년이고 보내는 것은 마음의 밭을 옥토로 만들어서 복음을 전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② 전도자의 간증나누기

예수님 믿어서 축복 받은 경험을 나누는 것입니다. 여기서 축복이라고 할 때는 꼭 물질과 연관시키지 않기를 바랍니다. 물질만이 축복은 절대로 아닙니다. 믿기 전의 내 생활이나 형편과 환경에서 지금 누리고 있는 기쁨과 감사의 생활을 자연스럽게 나누는 것입니다. 특별히 여러분이 이 단계에서 할 일은 자랑을 많이 하라는 것입니다. 자랑에는 3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 자랑입니다. 두 번째는 교회 자랑입니다. 세 번째는 목사 자랑입니다. 이것은 순서가 바뀌어도 됩니다. 예수님은 좋은 분입니다. 우리를 사랑하는 분입니다. 자기 교회를 자랑할 수 없는 성도는 절대로 전도하지 못합니다. 목사 자랑하지 못하는 성도 역시도 전도 못합니다.

③ 만남과 교제

이것은 태신자와 일대일로 만남을 의미한다. 편지를 계속적으로 보내면서 어느 시기에는 만남이 필요하다. 만나서는 부담스럽지 않게 자연스러운 대화를 나눈다. 만나서 교제하는데는 뭐니뭐니 해도 식사교제가 최고이다. 아니면 간단하게 커피나 차를 마실 수도 있을 것이다. 만나서 일단은 사귐을 통해서 친밀함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은혜로운 간증 테잎이나 책들을 선택해서 선물로 보내주기도 한다면 좋을 것입니다.

④ 가족 초청하기

이제는 일대일이 아니라 가족을 전체로 초청을 한다. 간단한 음식이나 아니면 잘 준비해서 대접을 한다. 특별히 화목하고 아름다운 가정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제 5단계 작전 - 열매 거두기

이슬비 전도 편지 사역의 최종적인 목적은 태신자로 하여금 즐거운 마음으로 자진하여 교회에 나오게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조건 기도하고 기다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올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 동기를 부여하는 일을 해야 한다.

① 초청잔치에 인도하기

전도편지나 사랑의 편지를 보내면서 마음문이 열린 상태에 따라서 복음을 전하든지 아니면 권면 해서 아무 때라도 교회로 인도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교회에서 태신자 초청잔치를 할 때에 꼭 참여할 수 있도록 권면하여서 나올 수 있게 한다. (초청잔치는 3개월 혹은 수시로 교회에서 시행한다)

② 복음을 듣게하여 구원으로 인도한다.

주간 중에든지 교회로 인도해서든지 기회가 주어지는 데로 우리는 복음을 전한다.

③ 양육편지 보내기 - 새 신자 통신교육 엽서를 보내면서 양육에 들어간다.

④ 상담과 돌보기 - 계속적으로 당분간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돌보아 주어야 한다.

3:7 사역 3개월 동안에 개인적으로 7명을 친하게 알아야 한다

⑤ 이슬비 전도사역에 동참시킨다.

본인의 경험을 살려서 다른 태신자를 위해서 사역에 참여하게 한다. 아직 자신도 어린이지만 말하자면 소년 소녀 가장이 되는 것이다.

 

 

 

이슬비 전도편지 사역 세미나 2


복습


① 그리스도인의 4 가지 기본적인 삶 : 말씀, 기도, 교제, 전도

② 이슬비 전도하교에서의 전도란 : 불신자를 회개시켜 예수 믿게 하는것

③ 불신자란 어떤 사람인 : 육은 살아있으나 영혼이 죽은 사람이다.

④ 태신자란 : 전도자의 마음속에 믿음으로 잉태한 전도대상자

⑤ 옥토화 작전이란 : 좋은 땅 만들기 작전이다. 방법은 4단계이다.


- 태신자 잉태하기, 좋은 땅 만들기(관심. 기도. 봉사. 인내), 씨뿌리기(복음 편지, 간증, 만남과 교제),

열매 거두기(초청잔치에 인도, 구령, 양육, 사역동참)


1. 이슬비 전도편지란 무엇인가?

여러분 개인적으로 편지를 받아본 경험이 있습니까? 고지서가 아닌 편지를 받았을 때의 기분이 어떠했습니까? 가장 편지가 그리워지는 곳이 아마도 군대일 것입니다.(경험상)

여러분 편지의 위력이란 대단합니다. 사람은 들어갈 수 없는 집이라도 편지는 그 집에 들어갑니다. 아무리 꼭 닫힌 대문이라도 편지는 대문을 열 수가 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신약성서의 대부분이 편지로 되어있습니다. 편지를 통해서 교회와 개인의 영적인 부분이 다루어 졌습니다.

이슬비 전도편지 교육을 받으면서 고민을 한 것이 한가지 있습니다. 무엇이냐 하면 이슬비 전도란 무엇인가를 어떻게 한 마디로 설명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충분히 이해가 되고 무엇이다라는 것이 감이 잡혔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여러분에게 한 마디로 요약해서 설명을 하려고 하는데 도무지 요약이 안되었습니다.

그래서 고민을 하다가 한마디로 설명하기를 포기하였습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설명해서는 안될 문제이다. 최소한 ? 마디는 해야 설명이 되겠다고 결론을 내리고 고민을 끝냈습니다. 그 만큼 이슬비 전도가 가지고 있는 의미와 중요성이 크다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그 ? 마디를 시작하겠습니다.

1) 이슬비 전도라는 말은 "이슬비"와"전도"라는 두 단어가 합해진 말입니다.

전도라는 말에 대하여서는 설명하지 않아도 여러분이 충분히 이해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슬비라는 말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왜 하필이면 "이슬비"인가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소낙비" 라고 하든지 아니면 "장대비"도 있는데 말입니다. 이슬비라고 한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여러분 이슬비하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비 같지도 않는 비, 좀 맞아도 괜찮은 비, 금방 옷이 젓지 않는 비, 이슬비에 대하여서는 대부분 무시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소낙비가 내리면 우산을 서든지 우비를 입습니다. 비를 맞지 않습니다. 폭우가 쏟아지면 아에 바깥에 나가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이슬비가 내릴 때는 그냥 비를 맞고도 일을 하든지 길을 걷습니다. 이 정도는 괜찮다는 생각을 하면서 비를 맞습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것은 이슬비에도 옷이 젖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말이 있지요 "이슬비에 속옷이 젖는다" 이 말을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우리가 전도를 해보면 사람들이 금방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교회를 거부하고 예수님 소리만 들어도 거부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슬비 전도편지란 바로 이런 분들에게 처음에는 예수님, 믿음, 천국, 지옥, 구원, 같은 말을 전혀 하지 않고 그냥 저들이 좋아하는 시, 수필, 칼럼으로 된 엽서로 된 편지를 계속적으로 보내어서 저들의 마음을 즐겁고 편안하게 합니다. 말하자면 그냥 편지를 받아보는 즐거움에 빠지게 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태 신자들이 편지를 보내는 사람에 대하여서 고마워하는 마음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에 여리고 성같이 굳게 닫혀있던 저들의 마음 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합니다. 길바닥 같고 돌밭 같은 저들의 마음을 한 통, 두 통 편지가 들어가면서 본인도 모르게 마음 밭을 옥토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슬비에 옷이 젖게 하는 일입니다.

즉 복음을 전하기 전에 복음을 들을 수 있는 마음 밭을 만드는 작업과정이 바로 이슬비 전도 편지 사역이라고 할 수 있다.

2) 이슬비 전도란 여리고 작전 전도이다.

수6:1절의 말씀을 보시면"이스라엘 자손들로 인하여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 없더?quot; 고 되어있습니다. 이 상황은 수2:1에서 여호수아가 싯딤에서 두 명의 정탐꾼을 여리고 성에 보내어서 기생 라합의 집에서 숨어 정탐을 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라합의 도움으로 정탐꾼들은 무사히 여리고 성을 빠져나 왔습니다. 이때 여리고 성안에서는 완전히 비상 사태가 벌어진 것입니다. 간첩이 나타났다가 없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여리고 성에는 비상 계엄령이 내려졌고, 성문을 완전히 닫아버린 것입니다. 공격을 대비하였을 것이며 또 다른 침입을 막기 위한 수단이었을 것입니다. 결국 여리고 성문이 굳게 닫힌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다 보면 많은 경우에 불신자들이 상처를 입고 있습니다. 복음을 거부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교회를 거부합니다.

여러 가지 핑계가 있지만 우리가 가슴 아픈 것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분들 때문에 오히려 복음이 가리워 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그 정도라면 나는 차라리 예수님을 믿지 않겠다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물론 본이 되고 존경할 분들이 있지만 저들은 핑계거리를 찾습니다. 그래서 불신자의 마음 문이 굳게 닫혀있습니다.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여리고 성을 무너뜨렸습니까? 6:7절을 보면 무장한 자들이 여호와의 궤앞에 서고 백성들이 여리고 성을 돌았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칼과 창으로 무장하는 대신에 사랑의 수고와 봉사인 이슬비 전도편지로 무장하여 매주 1통씩 보내면서 태신자의 마음의 성을 계속 도는 것입니다. 그리고 태 신자를 위해서 이름을 불러가면서 열심히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지막 날 나팔을 불었을 때 성이 무너진 것처럼 우리들도 계속해서 편지를 보내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저들을 교회로 초청해서 복음을 전하는 전도 전략입니다.

3) 이슬비 전도란 불신자(태신자)의 눈 높?전도이다.

이슬비 전도는 불신자(태 신자)의 입장에서 출발하는 전도방법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전도를 할 때는 무조건 복음을 전하였다. 전도자의 입장에서 너무나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내용을 가지고 불신자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러다 보니 불신자들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용어들과 단어들로 대화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 천국, 지옥, 믿음, 구원 이 모두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태 신자에게는 중요하지도 않고 전혀 새로운 용어들입니다.

전도지에 나오는 내용들이 불신자들에게는 이해도 되지 않았고, 그리고 저들의 관심이 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해되지 않고, 관심도 없는 내용을 가지고 자꾸 다가가면 불신자들은 관심을 가지기보다는 오히려 거부하고 귀찮게 여깁니다. 그래서 전도지의 대부분이 쓰레기장으로 들어갔습니다.

문제는 이들이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슬비 전도 편지는 먼저 이들이 공감하고 이해하고 좋아하는 내용들의 편지를 저들에게 보내어서 저들의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마음 문이 조금씩 열릴 때 복음을 전달해 줌으로 저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전도 전략입니다.

4) 이슬비 전도란 옥토화 전도전략이다.

이것은 지난번 우리가 충분히 들었습니다. 하지만 교육은 반복이니까 다시 한번 요약해 보겠습니다. 돌밭, 길가 밭, 가시밭과 같은 불신자의 마음을 좋은 밭으로 만들어서 복음의 씨앗을 뿌린다는 전도 전략입니다.


5) 이슬비 전도란 불신자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전도이다.

과거 대기업의 판매전략은 고객 만족이 구호였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구호는 고객 감동입니다. 21세기에는 고객을 감동시키지 못하면 살아남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슬비 전도 편지란 태신자 혹은 불신자가 전도자의 사랑과 헌신에 감동을 받아서 교회 한번 나가주자 하는 마음을 가지게 하여서 교회로 인도하는 전도 방법입니다.

정해진 날에 지속적으로 서두르지 않고 끊임없이 이슬비 편지를 보내다 보면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태신자의 영혼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흥부의 마음으로 거북이 정신을 가지고 한 영혼을 향하여 사랑을 전하는 전도이다. * 흥부의 마음 = 내 이익과 유익에 상관없이 상대방이 잘되기를 원하는 마음, 거북이 정신 =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목표까지 도달하겠다는 정신이다.

이슬비 전도편지는 바로 태 신자의 관심사에서부터 출발하여 우리가 원하는 목표를 달성한다는 것이다. 세상이야기에서 시작하여 복음을 전해서 교회로 인도하는 전도이다. 이슬비 전도는 가장 한국인의 정서에 맞는 전도방법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적이라는 말은 감성적이다는 이야기다. 정에 약한 한국정서에 꼭 맞는 전도 방법이다.

2. 이슬비 전도편지가 좋은 점


1) 이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 전도하면 전문적으로 훈련을 받은 사람이든지 아니면 전도에 특별한 은사가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전도는 어렵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슬비 전도는 누구나 할 수 있다. 당장 복음을 전한 다든지 아니면 예수님에 대하여서 성경을 말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무조건 접촉점을 찾아서 정성스럽게 엽서만 매주 잘 보내어 주면 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교회이야기나 구원이야기나 믿음,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사랑을 전하는 엽서만 우편으로 보내면 되는 것이다.


2) 이것은 전도하면서 받는 어려움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전도지를 들고 나가서 전하다 보면 때로는 욕을 얻어먹기도 하고 심한 경우에는 맞을 수도 있고 오해를 받기도 한다. 그래서 가끔은 자존심을 구기는 일도 생긴다. 얼굴을 붉히는 일도 일어날 수 있다. 하지만 이슬비 전도는 엽서만 보내는 것이다. 전혀 이런 문제가 일어날수가 없다

3) 이것은 대상자가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태신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든지 이웃이든지 친척이든지 친구이든지 아니면 동네 아는 사람들 그리고 내가 가는 약국 식당 세탁소 등등 그리고 나가서 접촉점을 만들기가 너무나 쉽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가서 교회 나오라고 아니면 예수 믿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편지를 받아 보겠느냐고 물어서 주소 성명을 알아서 보내면 되는 것이다.


4) 이것은 누구라도(새신자) 할 수 있는 것이다.

신앙적인 지식이 없어도 교회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성경을 잘 몰라도 얼마든지 이것은 할 수 있는 일이다. 태신자에게 이슬비 전도 편지만 보내주면 되는 것이다. 할아버지에서 유치부에 이르기까지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전도이다.


이것은 너무나 쉽다는 것이다. 요즘 전도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만나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모두다 바쁘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것은 편지로 보내지는 것이기에 어떤 집에도 들어 갈 수가 있다. 그리고 따뜻하고 포근한 내용과 예쁜 그림 엽서이기에 사람들에게 쉽게 친근할 수 있고 호감을 갖게 할 수 있다.


3. 어떻게 시작 할 것인가?

가) 전도대상자 정하기

1) 접촉점용 편지를 가지고 대상자를 만난다. (접촉점 사용법은 다음에)

2) 평소에 내가 마음에 두고 있는 분들을 선택한다.

3) 사랑의 편지를 받기 원하는 사람의 이름 주소 전화 인적사항을 구체적으로 기록한다.

나) 엽서 보내기

1) 태신자(전도대상자) 카드를 만든다.(이미 교회에서 만들어 놓았음)

2) 태신자에게 맞는 엽서 고르기 (엽서 목록 바인다를 참조한다.)

3) 친필로 인사말을 쓴다. (예문들이 있음)

4) 담당자에게 발송 표와 함께 엽서를 교회에다가 낸다.

5) 매 주 한 통씩 사랑의 엽서를 써서 발송할 것


다) 관리하기

1) 3주정도 보낸 후에 전화로 확인을 할 것 (편지가 잘 들어오는지)

2) 4-5주정도 보낸 후에는 직접 찾아가서 일상적인 교제의 시간을 나누면서 사귐을 갖는다.

3) 상황을 보면서 마음이 열리는 것 같으면 교회 참석을 권면해 본다.

4) 교회에서 하는 태신자 초청잔치에 초대를 한다.

5) 서두르지 말고 계속해서 엽서를 보낼 것.


이슬비 전도편지 사역 세미나 3

복습 

① 그리스도인의 기본적인 4가지 삶 - 말씀 기도 교제 전도

② 이슬비 전도학교에서의 전도란 - 불신자 회개시켜 예수믿게 하는 것

③ 불신자란 누구인가 - 육은 살아있으나 영이 죽은 사람

④ 태신자란 누구인가 - 전도자의 마음속에 믿음으로 잉태한 전도대상자

⑤ 이슬비 전도편지란 - . 이슬비와 전도의 합성어다.

. 여리고 작전 전도이다.

. 불신자 눈 높이 전도이다.

. 옥토화 작전 전도이다.

. 불신자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전도이다.

. 흥부의 마음으로 거북이 정신으로 하는 전도이다.

이슬비 전도 편지의 우리교회 적용

1) 태신자(전도대상자)를 정해야 한다. 3명 이상 * 원칙은 우리교회로 인도가능한 자

① 연고자 중심으로 태신자 정하기

. 자기와 연관된 사람들의 이름을 모두 써 보라

. 가능성 있는 사람의 이름에 표를 하라

② 접촉점 카드로 태신자 정하기

. 태신자 명단 카드 뒷면에 있는 내용을 참고 한다.

. 기도한 후에 대상에 맞는 접촉점 카드를 가지고 나간다. (어린이, 십대, 청년, 장년)

. 사랑의 편지 내용과 보내는 취지를 설명해 주어야 한다.

(돈 받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사랑의 편지 나눔회에서 나왔다.)

. 관심을 보이면 이름과 주소 전화 인적사항을 최대한으로 적어온다.

2) 이슬비 전도 편지 쓰기 - 교회당에서 직접 시범을 보임

. 교회에서 준비한 개인용 발송카드(바인더)에 태신자 명단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교회에도 명단을 제출한다.

(전도대상자 명단 인쇄물 사용)

. 개인용 편지 발송카드를 가지고 이슬비 편지함이 있는 곳에 가라 (교회당 뒤쪽)

. 단순하게 선택하되 상대방의 나이 환경상황을 고려해서 골라 써라-(바인다. 편지목록 책)

. 카드에 있는 대로 발송할 이슬비 전도편지의 엽서와 봉투를 꺼내라

. 엽서 뒷면 아래 부분에 친필 메시지를 적어라.(친필 내용 예문을 참고 할 것-사용한 것 표시)

<친필 내용 : 인사, 칭찬, 관심, 사랑, 긍정, 용기, 요약 등>


* 친필 내용을 위해서 개인정보를 최대한 수집하라.

소원목록을 만들라. (태 신자의 입장에서 소원이 될만한 것을 적어 보라)

-학생은 점수, 직장인은 승진, 사업가는 발전, 주부는 자녀, 남편 건강 등등

* 엽서를 적는 일은 집에서 하든지 단체로 교회에서 하든지 상관없음

* 개인용 발송카드에다 편지 보내는 상황을 상세하게 기록을 할

(친필의 내용 요약, 편지 종류, ? 신인지를 확인)


3) 이슬비 전도 편지 보내기

. 엽서를 봉한 후에 교회 입구에 있는 "발송 확인서" 에다가 기록을 한다.

. 엽서와 발송 확인서를 우체통(화일 박스)에 넣을 것.(수요일 전까지)

. 수납장은 모든 엽서를 수집해서 우표를 붙이고 강단에 갖다 놓는다. (수요예배)

. 교회에서 함께 기도한 후에 목요일 발송을 한다.


4) 열매 거두기

. 2-3주 편지를 보낸 후에 전화로 편지가 잘 들어가는지를 확인할 것

. 4-5주 보낸 후에는 직접 방문을 해서 일상적인 교제를 나누고 사귐을 갖는다.

. 상황을 보면서 마음이 열릴 것 같으면 조심스럽게 교회 출석해볼 것을 권해본다.

. 태신자 초청잔치에 정식으로 초대를 한다.

. 서두르지 않고 계속해서 편지를 보낸다.

5) 계속적인 관리

. 모든 성도는 본인이 직접 3명 이상에게 엽서를 써서 보낸다. - 개인관리 목표 정하기

. 모든 성도는 개인이 보내는 태신자 외에 별도의 태신자를 교회에 제출한다.

- 전도 대상자를 수시로 교회에 제출하여서 엽서를 발송하게 한다. (사역팀 운영)

. 전도팀을 운영하여 접촉점을 계속적으로 맺어서 발송할 수 있게 한다.

6) 교회 준비 사항

. 전도대상자 명단 카드(교회, 개인보관용), 사랑의 편지 발송카드, 발송통계표, 이웃초청대상자 명단카드,

태신자 기도막대기 만들기(코팅할 것), 개인 상황판 만들기(사무실벽), 엽서발송대장, 우표구입대장, 엽서구입대장,

. 이슬비 전도 사역팀 구성

팀장, 우체국장, 행정재정국장, 중보기도국장, 대필팀


7) 각 기관별 전도팀 운영

. 여선교회 목요일 심방과 접촉점 맺기

. 청년부 월1회 혹은 분기별로 일산 금촌 지역등지에서 접촉점 맺기

. 학생부 청년부와 같은 방법으로 한 학교씩 접촉점 맺기

. 주일학교 교사별로 학생들을 통한 태신자 잉태하기

8) 접촉점 맺기 실습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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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부활은 우리 믿음의 기초 (고전 2:13~14)


사도 바울은 본문 고린도전서 15장 12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그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것이 복된 소식이요, 듣는 자로 하여금 기뻐 뛰게 하는 요점이었습니다. 아마 이러한 말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육에 속한 사람들, 거듭나지 않은 이들에게는 이해가 가지 않고 또 어리석게 들릴 것입니다. 이 일은 바로 신령한 비밀에 속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 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3~14). 육에 속한 사람들, 세상에 속한 이들, 아직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이들은, 1970여년, 거의 이천년 전에 일어난 일, 그 일이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감사하고 기쁜 일이라는 것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 문제의 근원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는, 사람을 새롭게 하고 사람을 개선하고 사람을 개조하여 전혀 딴판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사람 그 자체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개조하기 위한 여러 가지의 행동 양식과 법칙들을 만들어서 시행하곤 합니다. 요즈음 시중에 나와 있는 책들 중에는 사람들을 개조하여 성공적인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책자들이 아주 인기리에 팔리고 있고, 그러한 행동개발을 위한 여러 원칙들을 제시한 책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모든 시도들은 사람이 그냥 그대로는 못쓴다, 사람 그대로는 합당치 못하다, 많은 난제와 문제들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좋은 이상적인 인간상(人間像)을 설정하여 놓고 거기에 이르기 위해 여러 가지의 정책과 실행계획을 세우고 실천해 나갑니다.
동서양이나, 예나 지금이나를 막론하고 남들 보다 앞서 인간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그 인간의 난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를 위해 자신을 던졌던 수많은 이들이 있습니다. 종교가들이 있었습니다. 도덕가들이 있었습니다. 윤리학자들이 있었습니다. 철학자들이 있었습니다. 석가나 공자나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나, 우리나라의 이퇴계나 이율곡 선생 같은 이 등은 그러한 면에서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인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이들 모두가 한결같이 인간의 난제를 개선하고 고치기 위해 사람 자체를 손대었습니다. 인간 자체, 인간성 자체, 인간의 윤리의식, 인간이 가지고 있는 도덕의식 등 자체를 개선시키려고 애를 썼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그러한 노력이 사람들에게 아무런 기여도 전혀 하지 못하였다고 하는 것은 합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어느 정도까지는 그 나름대로의 영향을 끼쳐서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과 정서에 효과를 낸 것만은 사실입니다. 또 사람이기에 그러한 시도를 하는 것이겠지요. 개나 원숭이가 그러한 시도를 하겠습니까? 이런 점에서 그런 시도들이 가지고 있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인간의 문제가 교육이나 도덕성의 고양이나 종교성의 계발이나 어떤 극기 훈련이나 어떤 행동 규례들을 세워놓고 자기를 통제하는 것만으로 해결이 되는 것인가라는 점입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문제의 근본은 인간 자체 내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에 있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과 그에 수반되는 인격적인 제반 문제는 인간 자체를 길들임으로써 해결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사람들이 인간의 난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단순하게 사람이 마음을 잘못 쓰는 것, 행동이 야비하고 세련되지 못하고 교양적이지 못하고, 그래서 여러 가지의 우발적인 사고를 내어 자신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쯤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잘못 쓰는 이들을 잘 쓰게 하고, 야비하고 세련되지 못한 이들을 세련되고 우아하게 다듬고, 교양적이지 못한 이들을 교양적으로 만들어 내면 되는 것이다, 그러한 식으로들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문제는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한 마음을 잘 쓰지 못하고 야비하고 세련되지 못하고 거칠고 교양적이지 못한 것은 하나의 증상(症狀)에 불과하지 그 근본은 아닙니다. 근본은 바로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인간 자체만을 가지고 아무리 집중적이고 주밀하게 연구한다 해도 온전하게 설명이 안 되는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인간은 제대로 설명이 되고, 인간의 난제들에 대한 원인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그 인간 자체를 다루고 개선시키고 세련되게 연마하여 거기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새로운 인간상을 도출하여 내시는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저희 집에서 아주 큰 무를 사왔습니다. 시커먼 흙이 묻고 싱싱하였습니다. 정말 보기 드물 정도로 탐스럽고 크고 퉁퉁하고 살이 많은 일등품 무였습니다. 굵은 부분은 직경 8, 9cm는 족히 될만하였고 무 길이도 약 20cm는 족히 되어 보였습니다. 지난 겨우내 아주 잘 보관한 무였는가 보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기대감이 가게 하는 무였습니다. 저는 옆에서 그 무를 손질하려는 것을 보면서 기대감에 찼습니다. 이제 흙을 털어내고 잘 씻고 칼을 대어 여러 쪽을 내면 아주 쓸모 있을 것 같았습니다. 칼을 대어 그 무의 속을 다 드러내게 잘랐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겉으로부터 약 1.5cm 정도의 깊이까지는 가락지 모양으로 싱싱한 모습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속은 바람이 들어서 말 그대로 시꺼멓게 썩어 딱딱하게 덩어리져 있었습니다.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었습니다. 그 무는 손을 댈 수가 없었습니다. 그 무가 가지고 있는 부패의 요소를 다 긁어내고 거기에 대신 새로운 생명의 풍성을 채워넣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능력이 전혀 없으니 버릴 일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 자체가 그러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근사하게 꾸미고 우아하고 세련되게 다듬어도 속이 부패하여 있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렘17:9).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일에 있어서 그들에게 직접 손을 대어 변화시키고 개선시키는 방식을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썩은 것 자체를 가지고 아무리 해도 생명이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썩은 것 자체에서 생명이 나오게 하실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합당하지 못한 일입니다. 죽은 것 자체에서 생명이 나오게 하지 않습니다. 물론 죽은 자를 살리시고, 썩어 문드러진 것을 살리게 하시기는 하십니다. 죽어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사로의 썩은 몸 자체에서 생명을 뽑아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밖에서 그에게로 생명을 불어 넣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점에서 분명하게 분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썩은 것 자체에서 생명을 찾아 내지 않으십니다. 죽은 것 자체를 가지고 생명을 창출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인간 자체에 손을 대어 개선시켜 새롭게 하시는 방식을 취하시지는 않으십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을 개선시키려는 여러 가지의 행동법칙 자체만 가지고는 우리를 개선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자신의 도덕적 의지로 여러분을 개선시키고 더 착하게 하려는 노력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문제는 해결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셨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 밖에서 그 일을 하셨습니다. 우리 영혼 자체를 가루로 만들어서 새롭게 빚는 방식을 쓰지 않으시고, 우리는 내버려두고 대신 우리 인격 밖에서 먼저 그 일을 하셨습니다. 곧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그 일을 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태어나기 전, 아니 우리 부모들이 서로 만나서 애정을 느끼고 결혼할 마음을 가지기 전에, 아니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 우리의 증조부, 증조모가 태어나기 전에, 바다와 산과 별과 달과 해가 그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 곧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새롭게 지으실 뜻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 안에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시간 세계 속에서 그 뜻을 성취하여 나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 그리스도께서 이천년 전에 동정녀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되시어 아기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죽으셨습니다. 무덤에 장사지낸 바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사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죄로 죽은 우리를 영원히 살리시는 방식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있어서 복음입니다. 영원 전부터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성령으로 잉태되시어 사람으로 태어나셨고, 사셨고, 고난을 받아 죽으셨고, 장사지낸 바 되셨고, 다시 사셨다 라는 이것이 복음의 진수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던 때, 우리가 아직 태어나려면 아직도 1900여년 이상이 더 지나야 했던 그 때에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말입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위해 중요한 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영원한 화해를 위한 대가를 지불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고후 4:18).
우리가 알지 못하던 때에, 우리가 알지도 생각하지도 꿈꾸지도 못하던 때에 말입니다. 우리 인격 밖에서 말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던 때에 말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안에서 저와 여러분을 새롭게 창조하고 계셨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하나님께서 본래 죄로 부패하여 죽어있는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려고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창출하고 계셨습니다.(요 5:24; 10:28~30).
그러니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서의 저와 여러분의 문제, 곧 죄의 문제를 영원히 부수어 다시는 그 죄의 문제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내지 못하게 법정적인 조치를 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우리를 영원히 용서하실 공의롭고 정당한 근거를 마련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므로 이제 누구든지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라고 사도는 말하였습니다. 그 십자가에서 죄가 왕노릇하는 옛 사람을 또한 죽여버리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 6:6)라 하였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옛 사람을 죽이고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을 새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죽이는 일만 해서는 안되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넣어주시는 것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반드시 살아나셔야 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으심 속에서 행하신 대속의 의미가 부활을 통해 확증되고 광포되고 사실적으로 입증이 되었던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었다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의미도 무색해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다시 사시는 것은 필연적으로 있어야 하는 사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 때문에 죽으신 것이 아니고, 우리 죄를 지신 것이니 죽음에 매여 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의 과정을 통해 우리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요구를 완전하게 만족하셨으니,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더 이상 죽으심에 묶어 놓으실 이유가 없으셨습니다. 마치 예전에 대제사장이 백성들을 위해 일년에 한 차례씩 대속죄일에 백성들의 죄 대신 죽은 염소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의 속죄소에 뿌리고 나온 것과 같습니다. 만일 그 제사가 열납이 되지 못하면 거기 들어간 제사장은 나오지 못하였습니다. 거기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위한 속죄희생의 피를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것이요,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속죄일에 백성들은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지성소에 나아가 제사를 드리고 나오기를 간절하게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나오게 되면 환호하며 찬미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죄를 대신하는 염소의 피를 받으셨고 그 대제사장의 드리는 제사를 열납하시고 만족하셨다는 증거였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 들어간 대제사장이 다시는 나오지 못하였다면 백성들은 떨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 자기들의 죄에 대해 자기들에게 직접 물으실 터이니 말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죄를 지시고 대신 형벌을 받으시고 그 증표로 당신의 피를 가지고 하나님의 하늘 성소에 들어가신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들어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한 주님의 십자가의 피를 흡족하게 여기시고 우리 죄에 대한 공의의 요구를 만족하게 여기셨으면 반드시 우리의 대제사장은 다시 살아나오셔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다시 부활하시지 않으시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은 우리 주님의 속죄사역이 완전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새로운 관계를 가지게 되셨음을 광포하실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옛 생명의 체계가 아니라 새로운 생명,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의 관계, 체계를 광포하실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반드시 다시 살아나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되어진 그 모든 효력을 믿음을 통해 각 개인에게 적용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저수지 공사를 하고 나서 그 밑에 있는 논에다 수로를 따라서 물을 나누어주기 시작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이는 그 효력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성령께서 오시었습니다. 그리고 최초의 증거자들인 사도들을 감동하셨고 사도들의 증거를 따라서 믿게 하셨고, 그들이 또한 전도자들이 되어 다시 증거하였고, 그 증거를 통해 당신의 백성들에게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의미에서 전도는 하나님께서 이미 아들 안에서 구원하여 놓으시고 당신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에게 그 효력을 누리고 차지하라고 알리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전도를 통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부활의 확실성은 우리의 믿음의 근거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주님의 부활의 역사적인 사실을 믿지 않으려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고린도교회 안에서도 어떻게 부활하는 일이 있겠느냐고 믿지 않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그 문제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고 하였습니다. 물론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을 정면으로 부인하였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다만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일이 앞으로 없을 것이라고 하는 관점을 나타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사실 따지고 보면 그 이면에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을 부인하는 행동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은 그들 자신이 아직도 거듭나지 못하였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아직 그리스도를 사도가 말하는 대로 믿지 않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아마 그들은 죽은 자가 어떻게 다시 살겠느냐, 썩은 자가 다시 살겠느냐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한 이들의 심정 속에는 과학적으로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냐는 물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식으로 말하는 이들은 그들의 과학적인 고상한 지식과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것을 함께 말하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과학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여 주신 자연질서에 속한 진리와 이치를 발견하여 세운 학문입니다. 그러나 부활은 하나님께서 영적인 세계에 세운 진리와 이치에 속한 것입니다. 부활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영적인 질서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일을 과학 운운하면서 따지는 것은 하나님의 행사의 깊이를 잘 모르고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세계에 대해서만 아는 옅은 지식의 소유자임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세계의 다국면적인 방면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물리적인, 우주 천체적인 질서가 있습니다. 심미적인 세계, 소리와 시각과 색조의 세계, 그 속에서 진리를 발견하여 그 원리를 적용하여 예술이라는 것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세계에 세우신 질서가 있습니다. 나무에서 잎이 나고 꽃이 피고 달고 맛있는 과실이 크게 열리는 것을 과학적으로 어떻게 설명이 가능하다는 말입니까? 과학적으로 열매를 낼 수 있습니까? 주어진 현상의 질서를 연구하고 관찰할 뿐인 것입니다. 사람의 인체의 신비에 대해 어떻게 안다는 말입니까? 영적인 원리, 하나님께서 당신과 사람 사이에 세우신 영적인 원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활이 없다고 하는 이들은 영적인 원리에 대해 무식한 자들입니다(고전 15:13~14).
복음의 진수는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사셨다는 데 그 핵심적인 요소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가르친 것은 도덕적인 착함과 공로와 업적을 쌓아서 구원받는 것을 가르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그 사실, 그것을 전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바로 자기의 구주로서 그 일을 하셨다, 나를 위해 죽고 나를 위해 다시 살았다라고 믿는 사람에게 그 구속의 효력이 미치게 되어 있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속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롬 6:23).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것이 없었다면, 그저 공자와 석가와 소크라테스나 어떤 성현의 말을 배우고 도덕성과 윤리의식을 고취하여 자신을 세우려는 것이나 하등의 다른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라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셨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대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과 그 효력을 성령으로 말미암은 믿음을 통해 우리에게 적용하십니다. 그러니 기독교는 선의 개념이나 이상(理想)의 관념이나 높은 도덕, 또는 윤리 의식을 우리에게 고취시켜 우리를 도덕적으로 개선하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이제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주님께서 다시 사신 그 사실에 기초하여 그 사실의 효력을 누리며 산 소망을 가지고 참된 기쁨을 가질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얻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 1:3~4).
베드로 사도는 성도들의 ‘산 소망’의 충분하고 완전한 근거를 오직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러니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이 없었다면 기독교의 모든 교훈, 아니 성경 전체는 아무 것도 아닌, 하나의 케케묵은 골동품 서적의 가치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과 그 모든 행사에 대한 것은 거짓 것으로 드러날 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주님의 부활의 사실성과 필연성을 강력하게 역설하고 있었던 것입니다(고전 15:16~19).
모든 사도들은 모든 이들에게 바로 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되심과, 그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실을 증거하고 그 사실을 기초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역설하였습니다. 어느 사도도 그 사실을 빼놓고 자기의 강론을 시작하거나 진행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그리스도와 그에 관한 모든 사실들의 증인으로 사람들 앞에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사실이 아닐진대 자기들은 거짓 증인으로 발견될 것이라고 합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 15:15).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믿음의 터를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부활하심의 확실성 위에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 보혜사 성령님의 역사를 따라서 산 소망을 가진 자답게 죄와 세상과 마귀의 시험을 이기며, 성 삼위 하나님께 영광의 찬송이 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도 성령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주님께서 행하신 그 죽으심과 부활의 영광을 우리에게 항상 상기시키시고 그 속에서 늘 가르쳐주시고 양육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가지신 영원한 계획과 목적을 이루어 나가십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3~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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